수란석은 속이 꽉 막힌 듯 답답하여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오늘 협상에서 그는 원래 먼저 기선을 제압하고 죄를 물으며 압박을 가하고는, 상대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며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한 뒤 귀국해 전쟁을 선포하려 했다.하지만 이제는 그 계획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협상도 오히려 서경 측이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게다가 자신의 조카인 장공주에게조차 무시를 당해 더욱 분한 마음이 들었다.목 승상은 한쪽에 앉아 이런 상황을 보면서 마음을 놓았다.평화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면 충분했다. 녹분성 사건은 상국의 잘못이기에 상국이 사죄하고 보상하려면 평화롭게 협상을 할 기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서경 측은 녹분성 학살 사건에 대한 기록 문서를 상국 측에 배포했다. 그 문서에는 당시 서경의 태자와 함께 포로로 끌려갔던 병사들의 구술 기록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돌아온 생존자들로, 당시의 참혹한 실상을 생생히 증언했다.학살 당시 마을 사람들이 전부 죽은 것은 아니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이들조차도 그 끔찍한 상황을 목격한 탓에 잔혹함에 벌벌 떨었다.문서에서는 우용이라 불리는 소장이 서경 선태자를 의미한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사여묵과 이덕회는 우용이 선태자의 별칭이며, 그의 본명이 경역임을 알고 있었다.그 기록을 읽은 사여묵을 비롯한 상국 측 사람들의 마음도 몹시 무거워졌다.비록 이방과 이천명이 반복된 심문 끝에 몇 가지 세부 사항을 털어놓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많은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떻게 민간인을 인질로 잡아 가혹하게 학대하며 그 과정에서 우용을 끌어내려 했는지, 얼마나 잔혹한 수단을 사용했는지를 말이다.특히, 우용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혹한 행위를 했는지도 말이다. 장공은 목 승상을 알아보고 향병을 시켜 그에게 문서를 건네 주었고, 사여묵의 신호에 따라 홍려사 관원은 송씨 가문 멸문의 참혹한 사건 기록도 배포했다.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과 깊은 관련이
장공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상국이 양국 간 체결된 민간인을 해치지 않고 포로를 죽이지 않는다는 협정을 먼저 위반했으며, 전쟁 중에 민간인을 학살하고 포로를 잔혹하게 살해한 것은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서경 첩자가 송씨 가문을 멸문한 일 역시 엄청난 죄악이라고 지적했다."우리가 평화 협상을 진행하려면 양측 모두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만 양국 간의 평화로운 협상이 가능합니다."통역관이 이를 번역하자 사여묵과 상국 측 협상 담당 관원들도 이에 동의했다.그렇게 정식으로 협상이 시작되었다.서경 측은 다섯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첫째, 상국은 학살당한 서경의 민간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둘째, 황금 만 냥을 배상해야 한다.셋째, 서경으로 삼십만 석의 곡식을 배상하고 상국 측에서 운송해야 한다.넷째, 녹분성에서 체결된 협정을 무효화하며 국경선을 협정 이전의 기준으로 복구해야 한다.다섯째, 전북망, 이방, 소승을 서경으로 넘겨 처벌해야 한다.’상국 측도 어느 정도의 요구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서경이 제시한 조건들은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사여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수용 가능합니다. 하지만 삼십만 석의 곡식 배상과 국경선 변경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잘못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성릉관 사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양측 모두에게 잘못이 있습니다. 다섯 번째 조건과 관련하여 이방은 서경에 넘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승은 당시 중상을 입었기 때문에 주된 책임이 없습니다. 단지 부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가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 상국에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합니다."이에 서경의 대학사 고공이 말했다."송씨 가문의 멸문 사건은 애초에 상국이 협정을 위반하면서 발생한 재앙입니다. 서경에도 분명 잘못이 있지만 상국 역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그러자 이덕회가 나서서 반박
서경 사신들이 홍려사를 떠나 회동관으로 돌아간 뒤에도 상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홍려사에 남아 다음 협상에 대해 계속 논의했다.목 승상 역시 논의에 참여했다. "곡물을 배상해야 한다 해도 절대로 그렇게 많은 양은 안 됩니다. 그들은 지난해 흉작으로 군량이 부족한 상황인데 우리가 삼십만 석의 곡물을 배상한다는 건 그들의 군량을 채워주는 꼴입니다. 따라서 곡물 배상을 한사코 물고 늘어지다 하더라도 삼만 석을 넘겨서는 안됩니다."목 승상은 잠시 말을 멈춘 뒤 다시 덧붙였다."또한 황제께서는 국경선 문제에서도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셨습니다."이 두 가지를 말한 후 그는 자리를 떴다. 북명왕의 협상 진행 방식에 대해 목 승상은 꽤 안심하는 듯했다.한편, 형부에서는 전북망이 이택을 만나겠다는 요청을 했다.어젯밤 이방과 대화를 나눈 뒤, 전북망은 이방이 서경이 소 대장군을 데려갈 방법이 있다고 말한 점이 몹시 불안했다. 하지만 돌아가서 아무리 고민해도 이방이 어떤 방법으로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게 할 수 있을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엔 이택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이다."그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단 말입니까?"이택이 직접 전북망을 찾아와 서둘러 그에게 질문했다."그럼 어떤 방법을 사용할지도 말했습니까?"전북망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말하지 않았습니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도망칠 경로를 계획해 둔 걸 보면 서경 사신들을 설득해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이택은 아직 협상 결과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소 대장군이 협상에서 주요 쟁점으로 논의될 것은 분명했다. 만약 상국 측이 협상 중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경 측이 소 대장군을 데려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그렇다면 협상이 끝난 뒤에는 과연 서경이 어떤 수단으로 상국의 손에서 소 대장군을 데려갈 수 있다는 것인가?그런데 이방은 어떻게 서경 사신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걸까?"그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합니다." 이
송석석은 곧바로 평서백부로 가서 최씨를 찾아 상황을 전달했다. 최씨는 단호히 한 마디만 했다."소 대장군과 관련된 일이니 지체할 수 없군요. 당장 나서겠습니다."전북망이 형부로 끌려간 이후 왕청여는 줄곧 불안에 떨었다.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돌아가 보기도 했지만 최씨는 그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다."이건 두 나라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당신 같은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겁니까?"그렇다고 최씨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전북망의 상황을 알아보게 했다. 전북망이 형부에 갇혀 있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으며 고생하거나 고문당하지는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최씨는 왕청여에게 그 소식을 전했고, 왕청여는 눈물을 머금으며 하소연했다."겨우 현철위 지휘사가 되었는데 이제 이방 일 때문에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때 목씨 부인이 이런 혼사를 추천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께서도 허락하지 않으셨겠지요!”최씨는 그 말을 듣고 꾸짖었다."일이 생길 때마다 원망만 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질 생각을 좀 하십시오!"형수의 꾸짖음에 왕청여는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녀는 결국 장군부로 돌아갔지만 안채의 일을 모두 시아버지 전기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장군부 안에서 왕청여에 대한 뒷말이 돌기도 했다.최씨는 장군부에 도착하자마자 왕청여에게 말했다."모든 하인들의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하세요."왕청여가 이유를 묻자 최씨는 단호히 답했다."전북망을 구할 방법을 찾으려는 겁니다."왕청여는 자세히 물어보려 했지만 최씨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을 잘랐다."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시키는 대로 당장 실행하세요."결국 왕청여는 노비문서를 찾아와 그녀에게 건넨 후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최씨는 노비문서를 확인한 뒤 집안 관리인을 불러 하인들의 신원을 물었다. 특히나 이방을 보좌했던 하인들을 주목했다.대략적인 정보를 얻은 후 최씨는 다시 문지기를 불러다 물었다.그
영인은 하인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무엇을 조사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기에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최 씨가 노부인의 제사 전날 고향 사람과 차를 마신 일에 대해 물어보고 나서야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날 함께 차를 마신 것은 림씨 가문에서 시녀로 있는 저의 동생이옵니다. 잠깐 고향으로 돌아간다하여 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사옵고, 함께 선물을 고르자고 권하였사..."너무 많은 말을 했던 탓에 피곤했던 최 씨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날 이방에게 전하라는 말은 없었더냐?" 잠시 생각하던 영인이 답했다. "…있었사옵니다. 림 낭자께서도 노부인의 제사에 갈 것이라 하였사옵니다." "이방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라고는 하지 않았느냐?" "한약재 한 꾸러미를 전해주라 하였사옵니다." "그 한약재가 무엇이었느냐?" "생지황이었사옵니다." "거기에 쪽지는 끼워져 있지 않았더냐?" 그러자 영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거기까진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제가 말을 전하기 바쁘게 이 부인께서 물러가라 고 하셨습니다." 말끝을 흐리던 그녀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다시 말을 이었다."아, 뭔가 틀림없이 있었던 것 같사옵니다! 소인이 다시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바닥에 잿더미가 조금 있었는데, 뭔가를 태운 것 같았사옵니다." 최 씨는 혹시나 빼먹은 것은 없는지 다시 물었고 그 말에 한참을 생각하던 영인은 더는 없다고 말하자 영인에게 떠날 채비를 하라고 명했다.벌써 여러 번 편전에 왔던 왕청여는 최 씨가 하인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가 마침 영인을 데려간다는 말에 대뜸 물었다."형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에게 자세하게 말씀하시지 않은 것입니까? 형님 때문이 집안은 난장판이고 하인들이 죄다 숨어서 게으름만 피우고 있습니다. 차 한 잔 내오라 해도 없고, 이 시간이 되도록 저녁 식사조차 차리지 않고 있사옵니다." 최 씨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내
최 씨를 배웅한 뒤, 송석석과 시만자는 의사당으로 돌아왔다.전에는 대체로 서재에서 일을 의논하였지만, 사숙이 온 뒤로는 중요한 일이 있을 때에만 의사당으로 향했다.사숙은 하루 종일 의사당에 머물었고, 사여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담판은 이미 끝났고 내일의 일정에 대해 의논하고 있을 것이다.송석석은 이날 조사한 일들을 사숙에게 보고했고 사숙은 모두가 예상한 결론을 내렸다."사람을 죽여 증거를 인멸하거라." 그러자 심청화가 물었다."사숙, 혹 처음부터 이방이 서경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었다면요? 누군가가 이미 오래전에 서경과 내통하여 소대장군을 겨냥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듣고 있던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허나, 회왕은 이미 도망친 터라 수란석이 그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심청화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회왕과 수란석이 아니라면? 회왕과 수란석은 너를 겨냥한 것이나, 연왕은 수년을 준비하였으니, 치밀하게 계산했을 것이다. 혹여 이 속에 또 다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소대장군일지도 모르느니라." 사형의 면밀한 분석에 송석석은 그러한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연왕은 참으로 노련하고 계략에 능하였다.또한, 이방이 일찍부터 도망칠 경로를 계획한 듯했다. 아마 오래전부터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사람을 배치하여 계속 그녀를 감시하였으니, 그녀 또한 이를 알고 있을 게 틀림 없었다. 더군다나, 장군부를 떠나면 다시 암살당할까 쉬이 움직일 수 없었기에 장군부에서 기회를 엿보며 버텨왔고, 그렇게 결국 형부에 체포된 것이다.이방은 아마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소대장군을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이번이 그녀의 마지막 기회이기에 형부에서 전북망의 진술도 받으면서 그녀는 부득불 말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래야만 전북망은 끌어들이지 않을 수 있다.그녀 말대로 소대장군이 죄가 있다면 행동대장인 전북망의 죄가 더욱 무거워질 것이기에 하여 즉시 말을 바꿔 자신이 일시적인
사여묵은 대사형을 한 번 힐끔 보고는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사부님, 어찌하여 또 대사형께 벌을 내리신 것입니까? 사건사고가 많아 그의 도움이 필요하온데, 사부님께서 내린 벌을 받느라 저를 도울 시간이 없사옵니다.” 그제서야 무소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내 친히 면해 주리다.” 그러자 밖에 있던 심청화과 평무종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듯 눈을 반짝였다.평무종은 안으로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스승님께 아뢸 일이 있사옵니다. 회왕의 금은패물을 모조리 바꿔치기하였는데, 그 상자들 속에는 온통 돌멩이로 가득 차 있었사옵니다.” “그들도 눈치챘느냐?” “그들이 작은 숲에서 쉬는 동안 저희가 모두 기절시켰으니 아마 깨어난 뒤에야 확인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붙였느냐?” 평무종은 너무나 당연한 것을 지금 왜 묻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당연히 사람을 시켜 면밀히 감시하게 했다. 그녀도 이제 노해졌기에 운익각에 그녀의 공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심청화가 아직 항아리 벌을 받고 있는 광경에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이미 사람을 배치하였사오니 염려 마시옵소서.” 사여묵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송석석과 시만자가 급히 달려와 담판 상황을 물었다.그 모습에 무소위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껏 바삐 돌아쳤을 것이니 밥 한 톨 입에 대지도 못했을 것이다. 뜨신 밥이 있지 않더냐? 얼른 대령하게 하여라.” 심기가 불편해진 사숙의 얼굴과 마주하자 송석석은 서둘러 밖으로 향했다.무소위가 사여묵에게 말했다.“네가 오냐오냐하니 저리도 너를 막 대하는 것 아니더냐!.” 그러자 사여묵이 웃으며 대답했다.“이미 조금 먹고 오는 길입니다. 석석이도 담판 때문에 긴장하고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는 말아주세요.” 사여묵의 말에 심청화와 평무종도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마음이었다. 무소위는 너무나 무던한 제자의 모습에 그저 한숨만 조용히 내쉴 뿐이었다. ‘그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네가 변호할 일도 없을
사여묵은 따뜻한 음식을 먹은 후 오늘 담판한 일에 대해 말했다.그의 곁에 앉아 있는 송석석은 그의 힘을 빌리려는 듯했다. 바로 옆에 붙어 앉아있으니, 적어도 뱉은 말이 사숙의 마음에 들지 않아도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염선생이 물었다."폐하께서 그들의 조건을 알고 계십니까? 폐하의 뜻은 어떻습니까?""이덕회가 궁에 들어가 말씀을 드리고 홍려사에 돌아왔을 때 폐하의 뜻을 전했습니다. 변선은 절대 물러설 수 없고 다른 것은 참작하여 조건을 주는 것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다른 보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 폐하의 뜻입니다."무소위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변선을 양보하지 않으면, 이방이 서명한 협의가 유효하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서경을 강요하는 꼴이 된다. 이방이 서명한 협의가 무효라 인정하면, 변선은 이전대로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변선의 전쟁을 해왔고 상국 상황이 복잡할 때 침입한 것이라 참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다."사여묵이 말했다."오늘 밤 홍려사에서 상의한 것이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서경에서 이방의 협의를 인정하기는 어렵고, 저희도 마음이 불편할 것입니다. 변선으로 물러나면 백성들이 욕설을 퍼부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방을 영웅으로 치켜세울 수도 있다는데, 어찌 죄가 많은 사람이 영웅이 된다는 말입니까?""정말 힘든 문제로구나."무소위는 두 가지 문제 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머리가 아파왔다. 사여묵이 말했다."선조 때 정한 변선의 지도와 서경과의 협정을 정리했습니다. 서경을 설득하여 그때의 협정으로 이방의 협의를 대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들이 침범했을 때, 저희는 동의하지 않아 새로운 변선 협의도 없었습니다.""쉽지 않을 것입니다."송석석이 말했다.무소위가 담담하게 말했다."쓸데없는 말이구나.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정말 쉬웠다면 폐하께서 어찌 그를 불러 협의하라 했겠느냐? 이렇게 되면 공을 그저 넘기는 꼴이 아니더냐?"송석석은 짧게 한마디 했을 뿐인데 무소위에게 혼나버려 입도 다물고
그 마름쇠는 이황자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가 떨면서 받아 보니 확실히 삼황자가 가지고 놀던 그 마름쇠였다. ‘그들이 너에게 어떻게 대했든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주거라.’바로 그때,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고, 그는 놀라서 마름쇠를 밖으로 던졌다. 덕비는 직접 마름쇠를 주워 차가운 이황자의 손을 잡고 떠났다. “내가 후궁을 거느리지 않으니 너의 황형이 널 마음대로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본데, 각 궁엔 아직 나의 인맥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몰랐나 보군. 내가 바로 사람을 잡아와서 고문을 해본 결과 네가 본 그대로였다. 그 사람은 장춘궁의 사람이니 너도 잘 알 것이다.” 순간 이황자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괴로웠다. ‘그럼… 황후마마와 황형이 날 모해하려고 했던 거야? 그럼 사이좋게 지낸 것도 모두 가짜였어?’ 그는 돌아가서 멍하니 덕비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내일 이렇게 하거라.” 어머니의 계획을 들은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러자 덕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죽는 건 너가 될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마름쇠를 멀리 던지고 덕비의 품에 안겨서 말했다. ‘어마마마, 전 죽기도 싫고 황형을 모해하기도 싫습니다. 전 지금 너무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자 덕비가 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이야, 난 네가 착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착한 건 네가 주동적으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는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널 해쳤을 때 반격해서 안된다는 게 아니란다.”이황자가 울면서 물었다. “그럼 저번처럼 황숙과 숙모에게 잘 보여서 보호해 달라고 하면 안 됩니까?” “소용없단다. 그들은 모두 너의 황형이 곧 태자가 될 것을 알고 있어서 태자를 보조할 것이란다.” 그러자 덕비가 부드러운 말투로 타일렀다. “그리고 나도 너의 황형이 정말로 죽길 바라는 건 아니다. 그가 낙마한 후에 단신의가 그의 목숨을 구해준다면 두 다
이황자는 덕비의 말에 얼굴이 창백해져 자기도 모르게 배를 가렸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모두 최근에 형제들과 함께 수업하고 무술을 익히며 힘든 순간에도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던 기억들 뿐이었다. 그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마마마, 혹시 오해가 아닐까요? 지금 황형은 저와 사이가 아주 좋습니다.” 그러자 덕비가 한숨을 쉬더니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먼저 밥부터 먹거라. 식사 후에 내가 널 데리고 갈 곳이 있다.” 그러자 이황자가 물었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먼저 먹거라.” 덕비는 옆에 앉아 이황자가 식사하는 것을 보며 옆에 있는 청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황자는 마음이 조마조마해진듯 식사하는 속도도 훤히 느려졌다. 사실 그는 진작에 자신이 황형과 태자의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어마마마도 줄곧 그에게 황형을 적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그리고 태자의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항상 강조해 왔다. 게다가 황형이 예전엔 확실히 밉상이었기에 황형이 태자가 되면 더 나빠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꼭 태자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생활이 즐거워 그는 태자의 자리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덕비는 아무 말없이 그가 식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총명하고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잘만 키우면 세상을 놀라게 할 만했다.하지만 아직 어려서 권력이 얼마나 좋은지를 깨닫지 못하고 현재의 작은 기쁨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비록 보통 아이들보다 생각은 깊었지만 마음이 독하지 않아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을 시킨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태후가 너무 엄격히 지키고 있어서 다른 기회는 없었고 유일한 방법은 이황자에게 직접 하라고 하는 것 뿐이었다.왜냐하면 요즘 그들 사이가 좋아서 아무도 아이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이황자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태부께서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저는 중개라는 이름을 선택했습니
숙청제의 천추만수절은 황실 정원에서 열릴 예정이였기에, 내부에서는 미리 준비를 마치고 이날만 기다리고 있었다.12월 25일, 황자들은 여전히 열심히 훈련을 했고, 심지어 삼황자마저 함께 연습했다.삼황자는 안아줘야 말에 올라탈 수 있었지만, 누구보다 용감해서 황숙이 가르쳐준 대로 고삐를 잡고 말을 달렸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여묵은 사람을 보내 삼황자를 보호하도록 했다.대황자와 이황자는 이미 숙련되어 있어서 말을 타고 달리는 건 그들에게 더 이상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탄 말은 큰 말이 아니라 작은 망아지여서 성격이 온화하고 통제하기도 쉬웠다.해시까지 훈련하고 사여묵은 그들에게 내일 주의해야 할 사항과 위험에 처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줬다.그리고 말이 끝나자마자 덕비는 사람을 보내 이황자를 데려갔다.이황자는 원래 형들과 함께 자안궁으로 돌아가 야식을 먹으려고 했었는데, 청이가 몇 번이나 손을 흔드는 것을 보고 대황자와 서우에게 함께 응원하자고 말했다. “내일 우리 모두 열심히 해서 부황의 체면을 세워주자.”그러자 대황자가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며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그래. 어서 돌아가서 푹 쉬렴.”“응.”이황자는 대답하고 사여묵에게 인사를 했다.“황숙,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그래.”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황자가 떠나자 계란궁에서도 사람을 보내 삼황자를 데리러 왔다. 삼황자는 펄쩍펄쩍 뛰며 손을 흔들며 떠났다.그 모습을 본 대황자는 웃으며 말했다.“삼황자 아픈 거 맞아? 우리보다 더 힘이 넘치는 것 같은데.”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오늘 훈련이 너무 힘든 탓에 다리마저 다 후들거렸다.삼황자의 일은 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감히 말하지 못했다.사여묵은 하인에게 뒷수습을 하라고 분부하고 그들에게 자안궁으로 돌아가라고 했다.가는 길에 호위들이 있었는데, 태후께서 엄명을 내려 현철위는 조금도 감히 소홀히 할 수 없었다.채릉궁에
대황자는 두 손으로 나무줄기를 안고 앞으로 움직여 얼굴을 나무줄기에 기대고 말했다. “모르겠어. 어마마마는 항상 나에게 잘해 주셨는데 저번에 정말로 죽을 정도로 배가 아팠거든.” 대황자가 담담히 말하고는, 얼굴을 돌려 서우를 보며 물었다. “네 고모는 너한테 잘해줘?” 대황자는 서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예전엔 이 일을 거리낌 없이 언급했지만, 지금은 철이 들었는 데다가 서우와 관계가 좋아지다 보니 서우를 슬프게 하는 일은 언급하고 싶지 않아했다. 게다가 태후가 그에게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으니 말이다. 서우가 대답했다. “너무 잘해주시지.” 대황자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럼 네 고모가 어떤 목적을 위해 너에게 독을 타서 네가 아파 죽을 때까지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애?” 그러자 서우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럴 일은 당연히 없어.” “그럼 너의 앞길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한다면?” 서우는 이번에 잠시 생각을 하며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밖에서 거지생활까지 해서 또래 아이들보다 일찍 세상 물정을 깨달았다. 만약 서우가 자신의 고모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대황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미워하게 만드는 것이 된다. 하지만… 친구 사이에는 거짓이 없어야 하는데. 서우는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앞길을 위해서라면, 고모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을 거야. 그리고 황후마마께서는 다른 방법을 미처 생각하지 못해셔서 그런 것일수도 있어.” “정말 위험했다고.” 대황자가 냉소하며 말했다. “그때 내가 정신이 혼미하긴 했지만, 태의가 낮은 목소리로 이 독은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어.” 서우는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널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야.” 대황자는 다리까지 떨며 마음의 아픔을 애써 감추려하며 말했다. “그렇겠지. 하지만 사실 난, 네 고모의
결국 대황자는 어쩔 수 없이 남아서 서우와 이황자가 식사하러 떠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볼수 밖에 없었다. 그는 속으로 약간 화가 났지만 황조모께서 화가 나도 쉽게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쳐 주었기에 담담한 척을 하며 물었다. “어마마마, 제게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너……!” 황후는 그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마음이 아팠다. “넌 오랜만에 어마마마를 만났는데 할 말이 없느냐?” 대황자는 황후를 보다가 란주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란주의 간절한 눈빛에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말했다. “저도 어마마마가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식사를 하러 가고 싶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후, 그는 태후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올리고 서우를 쫓아갔다. 대황자가 떠나자, 황후는 멍하니 앉아서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흐느끼기만 했다. “아들과 서먹해진 모습을 보니 만족하십니까?” 그녀는 한참 후에야 눈물을 닦고 이를 갈며 말했다. 눈 밑의 원한도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황후는 자신이 아직 태후와 소란을 피울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때, 태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되물었다. “그가 너와 서먹해진 걸 왜 내 탓을 하느냐?” 그러자 황후가 눈시울을 붉히며 태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태후께서 우리 모자 사이를 이간질하지 않으셨습니까? 인정하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가 고의로 이간질을 한 것이 아니라면 모자 사이에 이렇게 깊은 원한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태후는 그녀와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은듯 담담하게 말했다. “대황자를 만났으니 이만 돌아가거라.” “제가 오해를 풀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황후는 결국 굴복하여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러자 태후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해명할 오해가 대체 뭐가 있느냐? 네가 그를 독살한 적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제 황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저도 그가 웃음
승마 대회가 겉으론 보기엔 무장들을 위해 열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대황자가 사냥할 때보다 얼마나 발전했는지 보여주려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전에 대황자가 복통으로 인해 실수를 했다는 설명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금세 알아챘다. 아침까지 활기찼던 사람이 왜 하필 그 순간에 복통이 온 것인지, 의심 되는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날 그는 실수를 한 게 아니라 추태를 부렸다. 맞히지 못했다고 엉엉 울질 않나, 아무리 봐도 태자의 의지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황후는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특별히 자안궁으로 가서 태후마마께 대황자를 한 번 만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태후가 이번엔 허락했지만, 반드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만나야 하며 사적으로 만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제 황후는 사실 사적으로 대황자를 만나 약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태후가 허락하지 않으니 어쩔수 없었다. 그녀는 저녁 무렵 태후를 모시고 식사를 했다. 한 시진 더 기다리고 나서야 대황자가 서우와 손을 잡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고, 그 뒤에는 이황자가 뒤따랐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그들의 이마가 흠뻑 젖은 것을 보면 방금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황후는 대황자를 보자마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들을 못 본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오래되었으니 말이다. 대황자는 전보다 많이 말라졌고, 키도 더 커졌다. 반면, 대황자와 서우는 웃으며 들어와 대황자의 어머니와 황조모가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먼저 앞으로 가서 황조모에게 인사를 한 후 작은 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그의 태도로 보아, 사이가 서먹한게 분명했다. 서우와 이황자도 앞으로 가서 인사를 올린 후 한쪽으로 물러났다.황후는 그들을 보지도 않고 눈물만 줄줄 흘릴 뿐이었다. 아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가 약간의 기쁨도 없이 이렇게 냉담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그녀의 품에 안겨
란주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대황자를 찾아갔다. 하지만 서재 같은 중요한 곳에는 잡인들을 들여보내지 않기에 그녀가 멀리서 한 번 보기 위해서는 대황자가 서재에서 나와 자안궁이나 연무장으로 갈 때만 가능했다. 때로는 호위병들의 몸집이 커서 대황자의 머리끝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호위병들에게 은자를 줘서 대황자를 반 시진만 나오게 하려고 했지만 그 호위병들은 태후가 배치한 사람들이라 은은커녕 금을 줘도 받지 않을 것이었다.태후는 가장 간단하고 거친 방식으로 그들을 보호했다. 그래서 황제가 보고 싶다고 해도 사람을 배치해서 그들을 호송할 뿐이었다.반면, 태후는 이황자에게는 비교적 느슨한 편이었는데, 이유는 덕비가 후궁을 오랫동안 다스린 데다가 곳곳에 사람을 배치했기에 그녀가 이황자를 보호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태후는 사람을 보내 은밀히 주시하도록 했다. 이황자의 사고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막으려는 것이었다.지금 상황으로 보아 황후와 덕비의 마음은 아주 초조한 것 같았다.황후는 한동안 기뻐했지만 곧바로 태자 후보를 발표하지 않으면 이황자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고 덕비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후는 그들에게 단념하게 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사실 덕비는 그 어떤 희망이나 요행도 품지 않았고, 태자 후보가 대황자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이상 노력해서 쟁취할 기회는 있다고 생각했다.그녀는 무언가를 얻고자 한다면 하늘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반드시 스스로 쟁취했다. 원래 대황자의 품행에 따르면 황제가 그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대황자가 죽어야만 이황자에게 기회가 생길 것이었다. 삼황자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수빈이 황자를 모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있어, 비록 처벌하지는 않았지만 황제께서 다시는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황자는 반드시 죽어야만 했다. 태후가 이렇게 단단히 보호하고 있는데 어찌 손을
조정에서는 태자를 세우는 것과 관련된 말은 멈추지 않았고, 대신들마저 매일 아침마다 이 일을 언급했다. 그러다 마침내 음력 12월 18일에 숙청제가 태자후보가 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태자가 어리기 때문에 직접 발표하지 않고 왕실 종묘의 기둥에 보관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고는 조정에서 태자 후보는 자신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목 승상과 사여묵이 계속 대신들에게 질문을 받는 걸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대황자가 예전처럼 게으르고 교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고 성격도 많이 겸손 해졌다. 게다가 진국공부의 국공님이 그의 독서친구이기에, 모두가 그를 태자 후보라고 생각했다. 적장자의 지위에 나쁜 습관을 모두 고친 데다가, 태후가 직접 가르치기까지 했으니 사실 추측하기 어렵진 않았다. 비록 이황자도 태후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대황자와는 달랐다. 대황자가 장춘궁으로 돌아가지 않아, 이황자는 덕비를 보러 갈 수 있었다. 많은 대신들은 제상서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상서부의 문턱이 닳도록 방문했다. 그렇게 상서부에 찾아와서 축하해 주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았고, 심지어 많은 선물들을 보내왔는데 그중엔 진귀한 보물들도 있었다. 하지만 제상서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만약 정말 대황자를 태자로 세운다면 황제는 계속해서 외척의 세력을 약화시킬 것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지금 찾아와서 선물을 하는 건 그들에게 위험을 증가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미움을 살 수 있으니 모두 거절할 수는 없었다. 거절했다가는 황제가 제 씨 가문을 건드릴 때 도와줄 사람도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꾀병을 부리고 휴가를 냈다. 그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방문을 사절할 수 있고 황제에게 태도를 표명할 수 있었다. 청가 상주문을 올리자 숙청제는 결재를 하며 그에게 병을 잘 치료하라고 했다. 그리고 이부가 어차피 연말에 봉인될 것이니 이부의 일을 먼저 해결하라고 했다.제상서는 그제서야 한숨을 돌
태후는 수빈이 계란궁으로 이주한 것이 삼황자의 요양을 위한 것이니,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태후의 감시가 있는 한, 궁의 내부에서도 감히 게을리할 수 없어, 여전히 수빈에게 원래의 빈의 신분에 걸맞은 의식주를 제공했다.그러나 가권들과의 만남은 철저히 금지되었고, 그 이유 역시 삼황자의 안정적인 요양을 위해 외부와의 접촉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이씨 부인은 더 이상 방법이 없자, 송석석을 찾아가 부탁하기로 했다. 그녀는 수빈이 궁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테니, 약간의 은화를 보내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적절히 챙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궁 안에서 고생하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을 것이었다.이씨 부인은 복소의의 유산이 수빈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총애를 잃은 후궁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궁 안에서는 권력이 곧 생명이며, 사람들은 강한 자에게만 붙어 약한 자를 철저히 외면했다.송석석은 그녀에게 태후께서 이미 공주와 황자를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지다. 그러나 이씨 부인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 아이는 제가 열 달을 품고 어렵게 낳은 딸입니다. 손바닥 위에서 귀하게 키우며 그 어떤 고통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아이인데……이제는 부모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앞으로는 스스로 헤쳐 나가야겠지요. 왕비께서 부디 그녀에게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부디 스스로를 아끼라고 전해주십시오.”송석석은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해지며, 가슴이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그녀도 이전에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그녀의 모친은 자신을 전북망에게 시집을 보낼 때, 그에게 이렇게 말했었다.‘내가 석석이를 가졌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아 열 달을 품고 또 낳는 동안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했네. 이 아이는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소중한 내 딸이네. 작은 고통조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