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왕비는 문밖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떠났다. 그녀는 왕야가 마치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회왕부에는 몇 명의 낯선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은 왕비인 그녀조차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마주쳐도 못 본 척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고요한 밤에 갑자기 말굽 소리가 들렸지만, 청석판 거리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진성의 밤은 동서성 및 강변 쪽에서만 번화했으며 그곳의 소음과 웃음소리가 남성까지 전해지지는 않았다.바로 그때 갑자기 말이 울부짖으며 멈추더니 공기 속에 이상한 떨림이 느껴졌다.몽동이는 채찍을 들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찼다. 마차의 풍등은 먼 곳까지 비추지 못했고, 달이 구름 속에 숨어있는 탓에 주변은 어둠에 휩싸여 오싹할 정도로 음침했다.몽동이는 눈을 감고 공기 속의 변화를 귀 기울여 들으며 귀를 미세하게 움직였다.송석석도 채찍을 쥐고 있었는데 긴 채찍은 마치 붉은 뱀처럼 그녀의 발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시만자는 검을 움켜잡으며, 검집을 살짝 튕기면 검이 쑥 빠져나오게 단단히 준비를 했다. 어둠 속에서 수십 명의 그림자가 조용히 내려앉았는데 발밑에는 먼지조차 닿지 않아 그들의 경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몽동이는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는 마치 천둥 같은 힘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손에 쥐고 경공을 펼쳐 구름을 타듯 날아가면서 칼을 뽑아 그 사람을 향해 내리쳤다.암살자는 치명적인 일격을 피하기 위해 몸을 피했지만 긴 칼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피 냄새가 코를 찔러 암살자의 살육 본능을 자극했다.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창을 부수고 뛰쳐나왔다. 긴 채찍은 민첩하게 뱀처럼 휘어지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을 곧바로 밀어냈다.시만자는 보검을 뽑아 꽃처럼 휘두르고는, 송석석의 채찍을 밟고 그대로 공중으로 뛰어올라 능숙하게 방어막을 형성하며 암살자들을 단숨에 밖으로 밀어냈다.검은 옷과 가면을 쓴 정영수도 긴 칼을 들고 있었다. 그는 팔도장인 모든 무
심지어 그는 송석석이 어떻게 피했는지조차 보지 못했다. 그저 긴 칼이 공중에서 빗나갔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마차의 풍등이 어두운 빛을 발산하며 송석석의 얼굴을 비췄는데, 차가운 바람 속에서 서리가 내린 듯 차가워 보였다. 송석석이 그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순간적으로 그의 피부를 스쳐 지나가며 오싹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오싹함은 단지 기분 뿐만이 아니라 통증까지 전해지게 했다. 그가 반응하기도 전에 송석석의 채찍이 공중에서 그를 정확히 내려 찍어버렸다. 순간 채찍 끝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몸을 돌려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얼굴을 재빨리 가렸다.그는 벽 위로 올라가 몸을 돌렸는데, 그때 붉은 채찍은 마치 독사처럼 왼쪽 사사의 목을 감아 버렸다. 송석석은 힘을 주어 채찍을 당기며 그를 오른쪽으로 날려버리고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그의 사사를 마차 앞으로 끌고갔다.곧 사사의 손에 들려 있던 무기는 손을 벗어났고 무기가 떨어지기 전 송석석은 발끝으로 그것을 날려 보냈다. 칼은 공중을 가르며 비행했고 그녀는 그 사사를 끌고 빠르게 공중으로 뛰어올라 칼을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그러자 그 칼은 또 다른 사사의 배꼽을 정확히 찔렀다.이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난 탓에 정영수는 가까운 거리에서 이 장면을 직접 목격했지만 그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었다.그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송석석이지, 자신들이 아니라는 사실을.그는 이를 악물고 칼을 휘두르며 채찍을 끊으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사는 정말 죽게 될 것이다. 송석석은 채찍을 휘두르며 사람을 공중으로 던졌는데 그 속도는 정영수를 다시금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는 방향을 급히 바꾸어 사사를 실수로라도 다치지 않게 하려고 했다.하지만 방향을 바꾼 순간 그의 큰 칼엔 피가 묻었고 사사의 머리는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송석
냉옥 장공주는 회동관에 돌아왔지만 수란석과 정영수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그녀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수란석은 그녀의 작은 외삼촌으로, 수가에서 가장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이었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나치게 용감하고 호전적이며 성급하고 무모했다."양안을 불러라!" 그녀는 여관에게 명령했다. "당장!"양안은 내각 대학사이자 수란석의 처남이다. 두 사람은 상국에 오는 내내 함께 세밀히 논의했기에 양안은 그가 오늘 밤정영수와 함께 무엇을 하러 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양안은 방으로 돌아가 소식을 기다렸다.그는 이번 작전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히 준비된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가 떠날 때 수란석이 이미 계획을 반쯤 성공시킨 것을 보고는 북명왕을 데려갔다.북명왕을 속여 데려가기만 하면 송석석을 잡는 것은 매우 쉬웠다. 이번 외출에는 단지 마차 한 대와 하녀 두 명, 그리고 북명왕 부부만 있었으므로, 북명왕이 수란석에 의해 데려가졌다면 송석석이 아무리 강한 무공을 가지고 있어도 정영수와 회왕이 보낸 사사들 앞에선 불리할 수밖에 없다.따라서, 이 작전은 확실히 성공할 수밖에 없었다."양학사, 장공주께서 부르십니다." 문밖에서 향병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양안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이번 일은 냉옥 장공주에게 숨기려 했지만, 이미 실행에 옮겨졌고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았으므로 이제는 알려야 했다. 장공주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그저 상국의 적절한 설명을 원했다. 또한, 전쟁이 있어야만 진짜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하며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면 어떻게 새 경계선을 정하고 사과와 배상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그는 향병을 따라 장공주가 머무는 별실로 향했다. 등불 아래의 장공주의 얼굴은 굳어 있었는데 오늘 밤 궁중 연회 때의 온화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수란석과 정영수는 어디 간 게요? 지금 무엇을 몰래 꾸미고 있는 것이오?" 그가 예의를 차리
양안은 승리가 확실해졌다는 것과 황제의 명령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감이 생겨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장공주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자신의 나라에 대해 비하하는 발언은 옳지 않습니다. 저희는 두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들이 물러나기를 원하면 당연히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만, 만약 그들이 물러나지 않는다면 결국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북명왕비를 잡는 것 역시 이방이 선태자에게 했던 방식과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두 군이 전쟁을 벌이면 북명왕비는 성릉관 전장에서 포로로 나타날 것이고 소가는 그대로 물러날 것입니다. 이는 수란키 대장군이 선태자를 위해 체결했던 그 부끄러운 조약처럼 될 것입니다."장공주는 이를 듣고 격노했다. "어리석기 그지없소! 그때 수란키 대장군이 그렇게 한 이유는 이방이 우리나라의 태자를 잡았기 때문이오. 당시 황제의 병세가 위중하고 내란이 일어나고 있었으니 국본을 안정시키지 않으면 나라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소. 그런데 북명왕비와 태자를 어떻게 비교될 수 있단 말이오? 나는 그대들이 너무 어리석다고 생각하오. 내 말이 틀렸소? 그대들은 송석석에 대해 알고 있소? 소가의 장군에 대해 알고 있소? 소가군에 대해서는 아냐는 말이오!"양안은 송석석이 대단하다는 말을 그다지 믿지 않았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송회안 대장군이고 그녀도 남강 전장에서 싸운 경험이 있지만, 결국 여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정영수와 회왕의 사사들이 그들을 도와줄 테니 실패할 일은 없을 것이다."물론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무작정 나선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준비한 계획이 있단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북명왕비는 반드시 우리 손에 들어올 것입니다. 가둬둘 장소도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선 회왕부에 두었다가 기회가 오면 진성을 떠나도록 할 것입니다. 협상이 실패하면 우리는 안전하게 서경으로 돌아가면 되면 정식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장공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서경으로 돌아가면 전쟁을 선포한단 말이오? 그럼 우리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도 왕경루는 아직 불빛이 켜져 있었지만 입구에는 "영업 종료"라는 글자가 적힌 양각등 두 개가 걸려 있었다.3층의 별실은 원래 차를 마시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술 한 주전자와 몇 가지 안주가 놓여 있었다.사여묵는 호위와 함께 오지 않았고 수란석도 단 한 명의 하인만 데리고 왔는데 하인은 문 앞에 서 있었다.술은 이미 절반을 마셨고 두 사람은 내일 있을 협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그 누구도 핵심적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수란석은 그를 이곳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명확했기에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작전은 이미 끝났기에 반드시 잡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반면, 사여묵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 내일의 협상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웃을 뿐이었다. 그들은 북명왕이 아주 대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 했지만 막상 수란석은 단 몇 마디만으로 그를 속일 수 있었다.그렇다고 경계를 푸는 것은 아니었다. 내일의 협상은 상국이 매우 중요하게 여길 것이고, 자기들이 불리하다는 걸 알기에 자국의 조건을 탐색하려 할 것이다.그가 웃긴다고 생각한 것은 북명왕은 마치 광대처럼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었다.그는 북명왕의 오만함이 참을 수 없어 웃으며 말했다."왕야께서는 전쟁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허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황제께서 왕야에게 군권을 넘길까요? 제가 알기로는 귀국의 황제는 왕야를 두려워하시기에 다시 군을 맡길 리가 없습니다."사여묵은 담담히 대답했다."그건 상황을 보고 결정할 문제지 폐하의 뜻에만 의존하는 건 아닙니다.""상황요?" 수란석은 여전히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만약 상황이 그렇게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진다면 왕야는 군을 이끌고 나가서 과연 전세를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다만...""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한 번 시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사여묵의 눈빛에 담긴 자신감은 수란석의 걱정을 일으켰지만 그들이 이미 선수를 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수란석은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갔다.1층에는 몇 명의 호위 복을 입은 사람들이 계산대 근처에 서서 보고하러 온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그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들어왔을 땐 주인장과 하인밖에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들어온건지 궁금했다. 보고하러 온 사람은 왕정이었는데, 그는 세 명의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수란석을 보자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수 대인, 서경은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감히 송 대감에게 암살 시도를 하다니요?"수란석은 송석석이 보이지 않자 어쩌면 이것이 덫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함부로 말씀하지 마십시오."십여 명을 이끌고 고작 세 명을 상대하는 일이니 정영수가 절대로 실패할 리는 없었다. 게다가 정영수는 무공이 매우 높아 만약 그들이 미리 대비했다면 최소한 붙잡힐 일은 없을 것이다. 송석석은 이미 잡혀갔고 그들은 그것을 서경에서 했다고 추측하여 이곳에서 그를 속이려는 게 분명했다. 그는 더욱 분노하며 사여묵을 향해 돌아서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북명왕,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연극을 꾸며서 우리를 모함하려는 겁니까? 내일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는 겁니까? 너무 비열하지 않습니까?"사여묵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고 왕정에게 눈짓하며 말했다."왕비가 다쳤다고 했소? 그럼 괜찮은 건가?""큰 상처는 나지 않았고, 팔을 다치고 지금 약왕당에서 치료 중입니다. 치료가 끝난 뒤에는 대리사로 갈 예정입니다."사여묵은 왕비가 정말로 다쳤다는 말에 걱정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서경의 정영수가 한 짓이라고 확신하는게요?"왕정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합니다. 정영수 외에도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십여 명 있었습니다. 송 대감이 몇 명을 처치했고 나머지는 모두 대리사로 잡혀갔습니다. 그들의 입속에는 독이 있었지만 송 대감이 모두 제거했습니다.""그럴 리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음해하려 한다면 내일 협상은 필요 없습니다."
약왕당 외에 두 개의 등불이 걸려 있었다. 사여묵 일행이 말을 타고 도착했을 때 송석석은 막 시만자의 부축을 받으며 나왔다.그녀가 나오자 수란석의 몸은 굳어졌고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정말 실패한 걸까?’그는 분노로 온몸의 피가 들끓는 것 같았다. 회왕이다. 분명 회왕이다. 회왕이 서경과 동맹을 맺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 아닌, 상국이 보낸 첩자가 분명했다.송석석의 머리카락은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상처 입은 팔은 이미 붕대를 감고 새로운 옷을 입었다. 분명 누군가 그녀의 집에 가서 옷을 가져온 것이다.사여묵은 즉시 말에서 내리더니 약간 흔들리는 등불 아래를 급하게 걸어가 걱정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소?"송석석은 불만과 억울한 기운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빨리 피하지 않았더라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겁니다. 정 대인은 저와 무슨 큰 원한이 있기에 사람까지 데려와 저를 해치려고 하는 겁니까?"그녀는 화를 내면서도 사여묵의 손을 꼭 잡고 가볍게 손끝으로 두드리며 괜찮다는 표시를 보였다.그 말을 들은 수란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몇 번이나 쳐다보며 그녀가 진짜 북명왕비가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금 정영수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그런 짓을 했다니, 말도 안 됩니다."사여묵은 송석석의 손을 꽉 잡고 몸을 돌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대리사에 가서 확실하게 확인해 봅시다."수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북명왕이 왕비를 말에 태우자 그 옆의 여종이 능숙하게 말에 올라 기민한 동작을 보였다. 이는 평범한 여종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밤늦게 대리사에 도착했지만 대리사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잡혀 온 정영수와 다섯 명의 사사는 아직 감옥에 가두어지지 않았고 소경인 진이가 심문을 진행하고 있었다.심문실에서 정영수를 본 수란석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그는 온몸이 엉망이었고 머리에서 턱까지 이어지는 굵은 채찍 자국이 얼굴을 거의
사여묵은 그가 충동적이고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이 판은 쉽게 풀렸고 그들은 즉석에서 정영수를 붙잡았기에 수란석은 충분히 회왕을 의심하고 회왕이 그들과 함께 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란석은 입을 열려는 순간 다시 말을 삼켰다. 그는 비록 충동적이지만 어리석지는 않았다."진 소경, 계속 심문하거라." 사여묵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진이에게 명령을 내린 후 왕정에게 말했다. "수 대인을 회동관으로 모시고 이 일을 장공주께 보고하거라.""예!" 왕정은 명령을 받고 수란석에게 말했다. "수 대인, 가시지요."수란석은 정영수를 한 번 보더니 손을 내밀어 소매 주머니를 정리했다. 그 안에는 황제의 성유가 들어 있었고, 정영수에게 말을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정영수는 그의 행동을 보고 마음이 식어버렸다. 그는 이미 버려진 졸개가 되었다. 비록 현장에서 붙잡혔지만 서경에서의 협상이 실패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모든 책임을 혼자서 떠안아야 했다.수란석은 대리사를 떠나며 손과 발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고 마음속엔 계속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로 매복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정말 세 명만 있었던 걸까?’ 정영수의 몸에는 채찍 자국이 있었는데 그건 분명히 한 사람에게만 맞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를 붙잡은 사람은 십여 명이 세 명을 공격했다고 말했다. 즉 북명왕은 미리 이 사태에 대비하지 않았고 그저 정영수와 사사들이 싸움에서 밀렸을 가능성도 있었다.하지만 수란석은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만약 세 명이라면 그것은 마부와 여종, 그리고 북명왕비의 조합일 텐데, 그런 조합이라면 사사들이 없다 해도 정영수를 이길 수는 없다.아니다, 마침 그때 경위가 나타났다는 건 미리 준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럼 경위들이 정영수를 붙잡은걸까?그렇지만 그것도 이상했다.경위와 금군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그중에는 무공이 뛰어난 자는 거의 없었다.
상서원과 지안궁에서 벌어진 일은 순식간에 숙청제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마음이 나날로 초조해져갔다.게다가 연일 계략까지 모색하느라 두통이 심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였다.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한 것도,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였다. 태자가 될 인물에게 금족된 어머니가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청제는 금족된 황후가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 곧 자식을 해치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황후는 반성하긴 커녕, 오히려 황자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다고 확신할 뿐이었다. 한편, 숙청제는 입맛이 없는듯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운 뒤 약탕을 마셨다. 아무리 지쳐도 약은 반드시 복용해야 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매번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항상 죽음은 먼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가온 것이니 말이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국가의 중대사나 미래의 계획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숨을 돌리며, 마음을 편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사람, 송석석뿐이었다. 송석석은 부상 치료로 며칠간 어서방에 오지 않았다. 숙청제는 임태의를 불러 침술로 두통을 진정시켰으나, 어지러운 증상과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지러움 때문인지, 검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러다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었다.한편, 북명왕부에서 노 집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오?” 염 선생이 서재에서 나오며 물었다. 노 집사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마마를 뵙고 싶다 하시옵니
황후는 시간을 맞춰 다시 상서원으로 간 후, 대황자를 데리고 함께 지안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앞뒤로 늘어선 수행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대황자마저 어린 환관의 등에 업혀 궁문에 이르러서야 그를 내려놓았다.황후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대황자의 손을 잡고 지안궁으로 들어갔다. 꿇어앉아 예를 올린 후, 태후의 안부를 여쭈어 보았다. 비록 예법은 완벽했으나, 태후는 한동안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다만 대황자를 불러 물었다. “오늘 태부께 칭찬을 들었느냐?” 그러자 대황자는 태후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태부께서 칭찬을 잊으신 것 같사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가 서둘러 말을 보탰다. “태부께서는 엄격하시어 쉬이 칭찬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태후가 이미 태부와 약속을 해둔 일을 모르고 있었다.대황자가 그날 착실하고 성실히 임하면 수업이 끝날 때 한마디 칭찬을 해 주기로, 그렇지 않으면 칭찬은 없기로 말이다. 이를 통해 태후는 대황자의 하루 태도를 알 수 있었다. 태후는 황후의 말을 무시한 채 담담히 대황자를 향해 말했다. “규율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러자 순간 대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급히 변명하며 말했다. “태부께서는 어머니가 저를 찾으신 것을 못마땅히 여기셔서 칭찬하지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냐, 아니면 네 어미냐?” 태후가 묻자, 대황자는 황후를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어머니를 벌하옵소서! 어머니께서는 글을 베끼시는 것을 가장 즐기시옵니다!” “맞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베끼는 것을 좋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죄도 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황후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자, 태후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금마마에게 명했다. “대황자를 저녁을 차려주고 작은 서재로 보내라. 해시 전까지 모두 베끼지 못하면 출입을 금하라.”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어서방에서 거의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태후가 떠난 뒤, 숙청제는 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하라는 어명을 내릴 뿐, 후궁을 관리하는 권한은 돌려주지 않았다.오대반으로부터 어명을 전해 들은 제황후는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금족령이 해제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이 전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던 말들이 효과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가 살아 있는데, 적자를 태후궁에서 보살피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는 말이었다.금족령이 해제된 제황후는 감사의 인사는 뒤로하고 대신, 곧장 서대신, 곧장 대황자를 만나러 상서원으로 향했다. 대황자는 황후를 보자마자 봅시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태부가 강의를 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사옵니다! 언제쯤 저를 다시 데려가시겠나이까!” 황후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초구를 걸치지 않은 대황자는 많이 야워어 턱선이 뽀쪽하게 드러난 모습에 황후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어찌 이렇게 수척해졌느냐? 잘 먹지 못한 것이냐?” 대황자는 입을 삐죽이더니 금세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에서 돌아가면 황조모께서는 또 글을 외우게 하십니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으시니 황조모궁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사옵니다!” 제황후는 태후가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방금 금족령이 풀린 상황에서 태후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만 대황자를 달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어미가 네 부황을 설득할 것이다.” 대황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려다, 안만수 태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 안만수가 제황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마마, 대황자께서는 수업 중이시옵니다.” 제황후는 안
이튿날, 목 승상은 바로 태의원으로 향하였다. 태의원에서는 모든 태의와 원정이 대기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목 승상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딱 한 가지만 묻겠다. 폐하의 병을 치료할 자신이 있느냐?” 태의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원정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 승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조금이라도 말이냐?” 목 승상은 쉽게 납득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단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혹 다른 방도라도 없단 말이냐?” 모두가 다시 침묵하자, 목 승상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러다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의원의 명성을 걸고서라면, 이 기한을 2년으로 늘릴 수는 없겠느냐?” 오원정은 얼굴에 깊은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승상, 폐적증은 발작하면 기세가 매우 심각하여 2년은커녕 1년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목 승상이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한 마디 내뱉었다.“입들 조심하거라.” 그는 천천히 태의원을 나서며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도 빨리 또 연말이 다가왔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태후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모르는 듯했지만, 태의원의 밤새 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두통을 핑계로 오원정을 불러 진맥을 청했다. 그러자 진맥을 마친 오원정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수면이 부족하신 듯하옵니다.” 꼿꼿이 서 있는 그는 태후가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챘음을 알고 있었다. 궁에서 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후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만 예외였다. 태후는 주변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오원정만 남게 했다. 문지방 위로 햇살이 드리웠지만 매서운 바람이 드리워, 그 햇살조차 싸늘하게 느껴졌다. “말해보거라.” 태후는 자리에 앉아, 오원정의 멍든 눈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
오늘 밤, 목 승상은 궁에 묵기로 하였다. 한편, 숙청제는 여전히 후궁에 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침전에 돌아가지도 않고 어서방 안의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목 승상은 황제가 약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사탕 하나를 건넸다.숙청제는 사탕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어릴 적, 부황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고 나면 승상께서 꼭 사탕 하나를 건네며 격려의 말을 해주시곤 하였지요.” 목 승상도 그를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저 역시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황상께서 당시 말씀하셨지요. 훗날 현군이 되겠노라고 말입니다.” “혹 승상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지요?” 숙청제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로 인해 목소리가 다소 흐릿해졌다. “없사옵니다. 소인에게 폐하는 이미 현군이시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저으며, 눈에 실망스러운 빛을 띠우고 말했다. “난 현군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이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태의원에서 아직 진단을 내리지 않았으니, 폐하께서는 비관하시면 안되옵니다.” 목승상의 위로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숙청제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우선, 태자를 정해야 할 텐데 승상께서는 대황자가 어떠신지요?” 목승상이 답했다. “대황자는 장남이자 중궁의 적자로서, 지금은 태부의 가르침 아래 점점 나아지고 있사옵고 예전의 제멋대로이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더욱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될 것입...” 그러자 숙청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를 이야기하시지요. 그럼, 이황자는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목 승상이 답했다. “이황자는 영민하고 총명하지요. 비록 이제 막 학문을 시작하셨으나, 근면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점이 눈에 띕니다. 다만 이를 지속할 수 있을지는
너무나도 큰 일이라 송석석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황제가 만약 승하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황자가 황위에 오를 것이고, 조만간 태자로 책봉될 것이다. 어린 황제가 즉위한다면, 반드시 보정 대신이 필요할 것이며, 그 수는 한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은 여러 당파로 갈리게 될 것이고,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만약 보정대신을 두지 않는다면, 태후나 제황후가 수렴청정할 것이다. 황후는 야망이 가득한 사람으로, 현재 금족 된 상태에서도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제씨 가문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져 최근 황제가 억누르고는 있으나, 만약 황제가 승하하고 대황자가 즉위하면 제씨 가문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 누군들 권력을 탐하지 않겠는가? 목승상은 고령이라 퇴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신황을 위해 나라를 돌보려 해도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벌어질 일들이고 현재 가장 우려되는 것은 황제에게 1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가 승하하기 전에 황후는 대황자를 위해 모든 장애물과 위협을 제거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명왕부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오대반도 이 점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는 황제의 병세를 알게 되었을 때, 오직 북명왕만이 어린 황제를 도와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송석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그 끔찍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아니,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현실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컸다. “왕비마마, 차라리 떠나시는 것이…” 송석석이 서둘러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만하시옵소서. 지금은 태의조차 확실히 진단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단순한 두통이거나 종기일 수도 있사옵니다.” 그녀는 오대반이 조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혹여 훗날 황제에 대한 자신의 불충함을 느끼고 괴로워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먼지떨이를 꽉 쥔 오대반은 그녀의 뜻을 바
와야 할 사람들은 모두 만났기에, 이제 송석석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간혹 임 태의가 상처 치료와 흉터 제거를 위한 약을 챙겨 찾아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염 선생이 그를 환대해 주었고 황제께 대신 감사를 전해줄 것을 바랐다. 이날은 임 태의가 오대반과 함께 찾아왔다. 염 선생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임 태의에게 흉터 제거에 관련한 질문이 있다며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송석석이 오대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것이옵니까?” 송석석이 묻자, 오대반은 손에 든 먼지떨이를 팔꿈치 위에 걸친 채 문밖에 함께 온 친위병들을 힐끗 보며 답했다. “황상께서 보내신 것도 맞고, 내 스스로도 오고 싶었사옵니다. 왕비 마마는 좀 나으셨사옵니까?” 잠시 망설이던 송석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보이시나요?” 오대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통찰력이 깊으시옵니다. 좀 나아진 듯하나, 아직은 거동이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만.” 송석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좀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 걸을 수는 없사옵니다.” “왕비마마께서는 마음 졸이지 마시고, 우선 몸부터 잘 돌보셔야 하옵니다.” 오대반이 위로하자,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단신의 말로는 골절은 백일이 걸린다 하였으니, 이 백일 동안 잘 요양해야 할 듯하옵니다.” 그때 시만자가 안쪽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멀리서 보고 척귀대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보니 내가 착각했군.” 그 말을 들은 친위병들은 그녀가 장기문 대감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시만자는 그들의 이름을 물은 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내 제자들이 그대들 무예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오늘 잘 만났군. 내 그대들과 몇 수 겨루도록 하지.” 그 말에 친위병들의 눈이 반짝였
안여옥이 몸을 굽히며 작별 인사를 했다.“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사옵니다.” “살펴 가세요.” 최숙심은 미소를 띈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안여옥이 떠난 후, 최숙심이 왕청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또 다시 후회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이미 지난 일을 되새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왕청여가 송석석을 문병하러 온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사과와 감사를 동시에 전해야 했기에, 오늘은 그저 형수님들을 따라온 척했지만, 사실은 과거의 모든 일을 마주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석석을 마주할 용기는 냈지만, 안여옥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마치 무언가로 세게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고, 그 미소조차 억지로 지어낸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까 두려웠다. 멍하니 형수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왕청여는 송석석을 마주한 순간 이미 눈물은 시야를 가렸다.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던 송석석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으라 권하고 차를 내렸다. 그녀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던 최숙심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지요? 얼마나 많이 아프셨습니까?” 그녀의 진심 어린 염려에 송석석은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작은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듣자 하니 뼈까지 부러졌다던데, 얼마나 오래 요양해야 한답니까? 나중에 걷는 데 지장은 없겠사옵니까?” “이것 보세요. 아주 멀쩡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장에서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송석석은 태연하게 다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 최숙심의 눈이 더더욱 슬퍼졌다. “전장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늘 있는 일이지요. 이제 다 나았사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남희가
그렇게 궁을 떠난 혜태비는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서우와 함께 곧장 송석석에게로 향했다. 계속 입이 근질거렸던 그녀는 송석석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돌아서서는 서우가 멀어지기 바쁘게 오늘 궁에서 들은 이야기와 태후가 내린 엄벌 조치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오히려 혜태비를 위로했다. 후궁에 갇혀 있다 싶이 하는 자들이라 너무나 한가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그녀처럼 거리를 산책하거나 연극을 보러 갈 수도 없기에 자연스레 이야기를 꾸며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길고 지루한 나날을 어떻게 보내겠냐며 말이다.하지만 혜태비는 여전히 화가 났다."그렇다 해도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는 것이니라. 게다가 듣기 거북할 정도이니 용서할 수 없느니라. 우리 묵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니, 이게 사람이 할 소리냔 말이다! 나이만 먹었지. 기본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니라!"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 이상함을 느꼈을 때 자신이 곧장 액션을 취하지 않았음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 탕약을 마시기 전에는 이상하다고 느꼈어도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도리어 황제가 만종문의 일을 알아내려는 줄로만 여겼다. 지금까지도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원체 생각이 많은 그인지라 생각을 꿰뚫었다는 느낌이 왔어도 크게 어긋날 때가 더욱 많았다. 비록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군정 회의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전선의 소식은 오직 사매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한 나날들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문병하러 찾아왔기 때문이다.아프지 않을 때는 알 수 없던 관계망이, 병환에 있게 되니 얼마나 넓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선물 꾸러미와 약재를 한가득 들고 찾아왔다.모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하였으나 날마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니 일일이 응대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