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망은 잠시 회상에 잠겼다. "녹분성에서 곡식을 태우자는 것은 내가 제안한 것이오. 그 당시 서경은 연속으로 패배하고 있었고 철수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오. 소육야는 우리와 서경은 언제나 이렇게 소규모의 전투를 진행했고 진짜 싸움이 시작되면 서로 자제를 할 것이니 서경이 철수하면 우리가 쉬워진다고 했소. 헌데 서경이 갑자기 강력한 공세를 퍼부었고 소육야는 그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지…""틀렸습니다." 송석석은 다시 그의 말을 끊으며 반문했다. "장군님이 성릉관에 처음 갔을 때 제 삼촌은 전란 속에서 팔을 절단했습니다. 그때 전투 상황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지요. 양측이 서로 자제를 한다면 증원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전북망이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자제해 오다가 그런데 왜 갑자기 치열해졌냐면, 수란키가 전선에서 철수하고 수란석이 전장에 나와 지휘하게 되었기 때문이오. 그는 수란키의 아우인데 매우 잔인하고 용맹했소. 이전의 수란키 전술을 변경해 적을 압박하고 경계를 설정하려고 했었지.""그 당시 남강 전투는 중요한 상황이었고 성릉관에서 군대를 파견했기 때문에 수란석이 빈틈을 타고 들어온 것이오. 그래서 폐하께서 내게군대를 지원하라고 한 것이고, 이것은 알아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오."송석석은 진작부터 이를 알고 있었기에 전북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서경이 퇴각할 거라 생각할 때 수란키가 전장에 돌아왔다는 것입니까?""맞소." 그는 소 대장군과 함께 모여 논의했던 것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 소육야는… 아니, 소 육대장군은 수란키의 전술이 항상 그러하다며, 큰 싸움을 원하지 않으며 많은 인명을 희생하기 싫다고 하셨지. 게다가 우리도 손해를 보지 않아 그저 지키기만 했소. 허나 수란키가 갑자기 수란석으로 바뀌더니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오."송석석은 곧바로 그의 말을 듣고 분석했다. 수란석이 전투를 지휘할 때, 수란키는 서경의 태자를 전장에서 막기 위해 돌아가야 했고 그때 서경 황제는
송석석이 떠나자 왕정도 자연스럽게 그 뒤를 따랐다.왕정은 입이 무거운 편이 아니기에, 오늘 송석석과 전북망이 나눈 이방이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하지만 이 일에는 소 대장군도 연관되어 있었고, 그는 그 당시 중상을 입어 거의 죽을 뻔했기 때문에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화 협정에 서명한 이가 이방이라는 소문이 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왕정은 소 대장군의 억울함에 대해 분개하며 금군위소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금군 중에 송회안 대장군과 소 대장군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왕정의 말에 많은 이들이 소 대장군의 억울함에 대해 분개했다.물론 금군들은 직접 나서서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자연스레 외부로 퍼져 나갔다.송석석의 첫걸음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외조부가 백성들로부터 믿음과 존경을 얻도록 하고, 동시에 수도 내 무장과 무관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하려했다. 이런 일들이 차근차근 쌓여야 이후 큰일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다행인 것은, 과거 성릉관 대첩에서 황제가 전북망과 이방을 키우고자 하여 모든 공을 그들에게 돌렸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황제가 그들을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젊은 무장으로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황제가 송석석의 외조부와 외삼촌에게는 크게 포상을 하지 않았었다. 원수의 공을 무시하고 아랫사람을 치켜세운 전례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과거 송석석의 아버지도 그렇게 진급했으나, 그는 착실한 군공으로 인한 진급이었고 이방과 같이 조작된 사기와는 달랐다.이방이 옥에 갇히자 형부에서 즉시 심문이 시작되었다. 이 심문은 비밀리에 진행되는 것이었으나 황제는 전북망과 오월을 동행시켰다. 오월은 동궁의 시위장이자 동궁 시절부터 숙청제를 따라온 인물이다. 숙청제는 그동안 비밀리에 인력을 키워왔으나 이들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드러난다면 그가 쥔 모든 패들이 노출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숙청제가 태자
사여묵이 가까이 다가가 송석석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결코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가게 두진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그의 장담이 실은 확실한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나 서경의 신임 황제는 태자에 오른 후부터 녹분성 사건을 서경에 퍼뜨려 백성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런데 이제 황제가 되었으니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 염선생이 정보를 정리해 결론을 내렸다. “정원제는 황제 자리에 큰 미련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그 엄청난 권력을 이용해서 그의 태자 형과 학살당한 백성들을 위해 정의를 되찾고 우리에게 국경선에서 물러서라고 요구하려 합니다. 심지어 그는 전쟁을 발발하려는 듯합니다. 다만 서경이 사국을 도왔던 일로 인해 병력을 크게 잃었고, 우리와의 오랜 대치 속에서 성릉관에서도 대규모 전투를 겪었기에 서경 역시 재정비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조정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냉옥 장공주가 그 주축이 되어 전쟁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냉옥 장공주가 사절단을 이끌고 오는 것은 정원제가 우리와의 협상에 양보할 의지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번이 유일한 양보일 겁니다. 만일 협상이 결렬된다면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은 완전히 힘을 잃게 될 겁니다.”냉옥 공주는 서경 선황제의 적장녀로, 선태자와 지금의 정원제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정원제가 즉위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장공주가 되었다.정원제를 황위에 앉힌 것도 사실 그녀의 힘이었다. 당시 서경 선황제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녀가 대신 국정을 다스렸고, 서경에서 그녀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서경에는 이런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장공주가 여성이 아니라면 반드시 태자로 책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경에서는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고 벼슬을 할 수는 있어도 황제로 즉위할 수는 없었다.심청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장공주와 몇 번 마주친 인연이 있는데, 그녀는 술수도 있고 결단력도 대단하더
사여묵은 밤새 조용히 송석석을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송석석은 어떤 작은 움직임도 없이 그의 품에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숨소리 하나하나가 계산된 듯 고르게 이어졌다. 사여묵은 단숨에 그녀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송석석은 단지 사여묵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성릉관 소 장군부 안에 황제의 뜻을 전하는 어명이 도착했다. 남강으로 어명을 전달하러 가는 이는 바로 치석정찰대의 제방과 노홍이었다. 물론, 어전시위와 금군도 동행하였다.제방과 노홍은 현재 사품무관으로, 아직 황제가 본격적으로 그들을 등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번 명령 전달이 그들의 첫 임무라고 볼 수 있다. 이 일을 잘 수행하면 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그러나 이 임무는 그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무장과 병사들은 소승과 송회안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임무가 단순한 명령 전달이 아니라 사실상 압송과 같아 제방과 노홍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원래 어전시위 척귀가 오늘 당장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방과 노홍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소 대장군에게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해 출발을 하루 미루었다.오늘 저녁의 장군부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올렸고, 평소 먹던 몇 가지 음식만 차려졌다. 오늘이라고 해서 음식을 더 추가하지는 않았다.이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는 것을 모두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이 식사에서 소 대장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한입도 제대로 삼킬 수 없었다.“아버지!” 소삼야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붉어진 눈으로 나이 든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겠습니다!”소승은 침착하게 음식을 먹으며 가볍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황제께서 팔야에게 군권을 맡기셨으니, 제가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어차피 저는 한쪽 팔을 잃은 몸이니 어떤 책임이라도 제가 혼자 짊어지겠습니다."“허튼소리 하지말거라!” 소승은 그를
남씨는 속이 상해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났다. 자신의 남편이 전북망을 구하려다가 한쪽 팔을 잃었고, 그 덕에 평생 갈고 닦은 무예 실력은 반으로 줄어버렸다. 다행히 그동안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 한 손으로 검술을 연습하며 나름 무예 실력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이제 긴 창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도와준 것은 도와준 것이라 쳐도, 상대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라니. 더군다나 그들의 눈앞에서 이방과 몰래 관계를 맺고 있었다니! 어째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지, 그때는 정말 눈이 멀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들이 당시 좀 더 세심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그때 알아챘더라면 성릉관에서 바로 혼쭐을 냈을 텐데…… 어찌 그들을 돌려보내 석석을 해치도록 두었단 말인가!남씨는 송석석을 무척 아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도 남씨는 마침 진성에 있었는데, 그렇게 사랑스럽고 보드라운 아기는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옥을 깎아 만든 것처럼, 그녀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이었다. 송석석이 세 살이 될 때까지 남씨는 며칠에 한 번씩 진북후부에 달려가 귀한 아이를 안아보곤 했다.그 후 남씨는 남편을 따라 성릉관으로 향했다. 초반에는 두 해에 한 번씩 진성으로 돌아오곤 했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문과 무예를 익혀야 했고, 성릉관과 서경 사이의 마찰도 끊이지 않아 점차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송회안과 그의 아들 일곱 명이 희생되었을 때, 남씨는 남편을 따라 한 차례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때 석석은 매산에서 무예를 익히고 있었기에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지 못한 탓에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석석이 전북망과 이혼한 후 돌아왔을 때, 남씨 부부는 함께 돌아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석석이 이미 남강 전장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어서 그녀가 공을 세워 돌아와 북명왕 사여묵과 혼인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진성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그들은 녹분성에서
소승의 부하 장군들은 관각에 머무는 제방과 노홍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거무스레한 피부의 장군들이 초조하고 애타는 눈빛으로 녹분성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 기방과 노홍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정말 사실입니다! 소 대장군은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그는 화살을 맞아 군의관들조차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스스로 견뎌냈고 침상에 누운 지 석 달 만에야 겨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몸 상태도 전과 같지 않아 고통을 겪고 있단 말입니다!”“맞습니다! 전북망이 녹분성으로 간 건 제 의도였지, 소 대장군과는 무관합니다! 저를 데려가 조사하고 처분하십시오. 목숨이 필요하다면 진성에 도착하자마자 드리겠습니다!"“제 장군님, 노 장군님, 여러분은 이전에 남강 전장에서 송 원수와 함께 싸우지 않았습니까? 우리끼리는 숨김없이 말해봅시다. 이 일을 해결할 방도가 있습니까? 황제의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정말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누군가 나서서 이 일을 짊어져야 한다면 저 노여가 짊어지겠습니다!”장군들 한 명 한 명 모두 자신이 죄를 짊어지겠다며 소 대장군이 돌아가는 걸 원치 않다고 했다.그러자 제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장군님들, 저와 노홍은 황제의 명을 전하러 온 것일 뿐,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북명왕이 분명히 해결책을 찾을 것입니다.”“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통상적으로는 이렇게 명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대들을 보낸 것은 실질적으로 소 대장군을 압송하라는 의미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전령을 보냈을 것입니다!”노여는 눈이 빨개지도록 애가 탔고 목소리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대장군께서는 곧 칠순이십니다. 그 나이에도 성릉관을 지키며 일생을 국경 관문에 바쳤습니다. 평생을 우리 상국의 국토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셨단 말입니다! 어찌 남의 잘못을 그분에게 덮어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노정 역시 답답함에 발을 굴렀다. “맞습니다! 그들은 원래 성릉관의 병사도, 무장도 아닙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그들은 저녁 내내 여러 번 기회를 노려 장기문과 단둘이 이야기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장기문과 척귀가 한 방을 썼고, 출입 또한 항상 함께 했기 때문에 척귀를 따돌릴 방법이 없었다. 이때 마침 장기문이 화장실로 가자 노홍이 척귀를 감시하고, 제방은 화장실 밖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장기문은 물과 음식이 맞지 않아 화장실에 오래 머물다 나왔다. 그가 나오기만을 계속 기다린 제방은 추위에 떨어 거의 몸이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곳은 불빛이 매우 어두컴컴했다. 장기문은 나오면서 사람 그림자를 보고 까무라치게 놀랐다. “제 장군이셨군요! 놀라서 혼났습니다!”제방이 다가가 말을 꺼내려 하자 장기문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숨을 참을 수 있으면 잠깐 참으시죠. 안에 냄새 좀 빠지게요.”제방도 웃으며 대답했다.“장 시위님, 사실 저는 시위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무슨 말씀이든 여기서 할 건 아니죠. 돌아가서 합시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장기문은 다리까지 저려왔는지 다리를 탁탁 털었다. 제방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장 시위님, 오늘 밤 저를 찾아온 장군들은 모두 소 대장군을 오랫동안 모신 부하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대장군을 염려하는 마음에 잠시 무례하게 말한 것입니다. 아무런 의도가 없었습니다.”장기문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제 장군께서는 제가 황제께 보고하지 않길 바라십니까? 이미 그런 말을 떠들어댔으니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라곤 할 수 없겠죠. 제 장군께서도 괜한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보고할지 말지는 내 일입니다. 이번이 그대들에게 공식 임무로 복귀하는 첫 번째 기회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앞날도 없을겁니다.”제방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는 호칭까지 바꿔가며 친밀함을 내세워 설득하려 애썼다. "장 형제, 당신의 사촌인 장문수 형님을 봐서라도 그 말을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앞으로 우리 형제끼리는 뭐든 다 좋게 해결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와 노홍이 당신에게 신세를 지는
소육야는 노정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관각에 가서 제 장군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들었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들은 것은 확실합니다." 노여는 고개를 들고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천 군대와 맞서도 두려워하지 않던 그가 지금은 겁이 나는 듯했다. "노정이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는데, 귀먹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다 들었을 겁니다." "그럼 내가 가서 그들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이 말이 절대로 황제께 전달돼서는 안 됩니다." 소육야이 크게 호통쳤다. "거기 누구 없느냐! 말을 준비하거라!" 그리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소삼야는 이들이 아버지와 반평생을 함께해 온 사이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제방을 찾으러 간 것임을 알고 있어 그들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형님들, 화는 입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 꺼내지 마십시오.”그러자 모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잘못을 깨달은들 과연 만회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설령 어전 사위가 없었다 해도 제방과 노홍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어. 아이고……"소팔야는 머리가 아픈 듯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황제의 명에 따라 진성으로 가시는데 지휘권은 삼야형이 아닌 자신에게 맡겨졌다. 그는 막내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친아들도 아니었다. 이를 통해 황제가 내부 갈등을 조장하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분란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황제는 곧바로 총지휘관을 성릉관에 파견할 것이다.현재 성릉관을 안정시킬 수 있는 무장은 북명왕 외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황제가 북명왕을 이곳에 보낼 리는 없고, 만약 다른 이를 보낸다면 실력이 부족하거나 공을 세워 후작에 오르려는 야망을 품은 자일 것이다.다행히도 소가의 아들들은 단합이 잘 되어 있었다. 누가 지휘권을 쥐든 간에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아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
진성 전체에 대한 순찰을 강화하자 예상대로 왕표가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하지만 왕표가 찾아간 사람은 왕청여가 아니라 최숙심이었다.이날 최숙심은 딸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어준 옷을 주러 북명 황실에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소주방 여인들을 위해 이런저런 필요한 물건들을 사기도 했다.눈앞에 갑자기 나타난 왕표를 봤을 때, 최숙심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왕표는 분명 왕청여에게 자신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건가?’“부인, 나일세.”커다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왕표가 확실했다. 최숙심은 잠시 넋을 잃고 있다가,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를 꽉 깨문 채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몰래 주변을 쓱 살폈는데, 골목 안에는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최숙심은 왕표가 절대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었는데, 그녀의 판단이 틀려 버린 것이었다.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이를 악문 최숙심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는데, 왕표는 그녀가 자신을 오랜만에 보게 되어 흥분한 거라고 착각했다.왕표는 이내 삿갓을 위로 슬쩍 올려 삐쩍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 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눈썹은 전부 잘라버렸는데, 그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우스꽝스러 보였다.“부인, 정말 나일세!”왕표는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있다가 이내 주변을 경계하듯 쳐다보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인하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가족들이 걱정돼서 이렇게 진성으로 다시 돌아온 거라네. 다들 무사한 걸 보니까 이제 한시름 놓이는군.”하지만 최숙심은 가식적인 왕표의 모습에 헛구역질이 날 정도였다.“진성 곳곳에 당신의 체포 공문서가 붙어있는데 어떻게 감히 진성으로 돌아온 것입니까?”“다들 무사한 걸 봤으니, 이제 이곳을 떠날 생각이오.”왕표는 말을 하며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앞으로 평생 이렇게 여기저기 숨어 다녀야 할지도 모르오. 부인, 내가 예전에 부인에게 많은 잘못
최숙심은 왕청여에게 언제 어디에서 왕표를 어떻게 만났는지 자세하게 물으며, 왕표 곁에 아이가 없었는지도 확인했다.“어제 냄비를 사러 밖에 나갔는데 소주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라버니가 갑자기 작은 골목에서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요. 나쁜 사람인 줄 알고 겁을 먹고 있다가 오라버니가 제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오라버니를 알아보았거든요. 얼굴은 까맣고 눈썹도 다 잘랐는데 몸도 심하게 야위어서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오라버니라는 걸 절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어요. 아이를 데리고 있지는 않았고 혼자였어요. 누군가에게 협박을 받아서 도주하게 되었는데 체포 공문이 떠서 여기저기 숨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했어요. 이제 가진 돈도 다 썼고 아이까지 키워야 하는데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저와 어머니에게 어떻게든 3천냥을 구해달라고 부탁했어요.”“돈을 구하면 그자에게 어떻게 주기로 했어?”최숙심이 다급하게 물었고 왕청여가 대답했다.“그건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일단 저희에게 돈부터 구하라고 하곤, 나중에 오라버니가 날 찾아오겠다고 했어요.”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최숙심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그자가 눈썹이 없다고 했나?”“네, 오라버니는 눈썹이 짙어서 알아보기 쉽거든요. 그래서 다 잘라버린 것 같아요.”왕청여가 말한 것처럼 왕표가 눈썹을 자른다면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사실을 얼른 북명 왕비에게 알려야 하지만 눈썹을 다시 그릴 수도 있기에 눈썹이 없는 사람만 유의해서 될 일도 아니다.“그럼 넌 이틀에 한 번씩 밖을 돌아다녀서 관찰해봐. 병부에 가서 왕이장을 만나기도 하고. 네 오라버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너를 몰래 미행할 거야. 난 석소에게 지금 당장 북명 왕비를 찾아가 순찰에 더욱 힘써 달라고 부탁할게. 그래야 네 오라버니가 한 시라도 빨리 널 찾아올 거야.”“알겠어요.”고개를 끄덕이던 왕청여가 다시 물었다.“그럼 어머니께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돈을 마련하고 있다고 해. 왕이장이 돈을 주기로 했고 지금 점포를 팔고 있는 중
한편, 최숙심은 뜨개질로 딸에게 옷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현재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는 딸이 먹고 쓰는 것까지 황실에게 부탁할 수는 없었다.최숙심은 뜨개질을 하면서도 왕비가 했던 말들이 실제로 벌어질 가능성이 클 것 같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왕표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으면 무조건 진성으로 돌아올 테지만 진성에 돌아온 그가 자신을 찾아올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왕표는 일단 노부인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할 것이고 노부인이 도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면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아들을 걱정하고 아끼는 노부인은 어떻게든 그의 이 일을 해결해주려고 할 것이다. 비록 오늘 노부인과 왕청여를 미행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이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왕표가 진성으로 돌아온 이유가 돈을 구하기 위해서이니 돈만 구해지면 바로 진성을 떠날 것이다.노부인 현재 가지고 있는 돈이 없지만 진성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인맥은 넓다. 여기저기서 돈을 조금씩 빌린다면 그건 상대방들을 구렁이에 빠트리는 거나 다름없다.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탓에 노부인은 직접 돈을 빌리러 나갈 수도 없고 창피해서라도 절대 직접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럼 보낼 사람은 남희나 왕청여밖에 없다.최숙심이 속으로 이런저런 분석을 하고 있을 때, 왕청여가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 최숙심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냐?”왕청여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물부터 줄줄 흘렸다.“새언니, 제가 예전에 멍청한 짓을 많이 저질렀어요. 저 때문에 새언니가 얼마나 많은 피해를 받고 조카들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다 잘못했어요. 예전에 했던 행동들이 너무 후회돼요.”최숙심은 왕청여가 감옥에서 간신히 살아나온 뒤로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먼저 찾아와서 사과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다 지난 일이야. 이제 미래를 보면서 살아야지. 앞으로 다 잘 될 거야.”최숙심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위로했다. “
왕청여는 결국 왕이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뻔뻔하게 왕이장도 평서백부 핏줄이니 가족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반드시 도와야 하는 게 맞다고 얘기하겠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왕청여는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많았다. 평서백부가 무한한 영광과 명예를 누릴 때 왕이장은 덕을 조금도 보지 못했다면 왕씨 가문이 패가망신한 지금, 왕이장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왕청여는 그보다 이 사실을 새언니에게 알려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다. 오라버니가 죽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왕청여는 나무 그늘 밑에 앉아 한참동안 멍 때리고 있었다.이때, 석소 사저가 마침 이곳을 지나가다가 왕청여를 보자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바로 방향을 틀었고 조금 전의 말실수가 떠오른 왕청여가 다급하게 석소 사저를 불러 세웠다.“석소 사저, 조금 전에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절대 나쁜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었습니다.”“예.”그러자 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바로 자리를 뜨려고 했다.왕청여는 자유롭게 사는 무림의 여인은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을 해줄 것 같아서 돌아서는 석소 사저에게 말을 걸었다.“석소 사저, 혹시 사저와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걸음을 멈춘 석소 사저가 잠시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왕청여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그렇게 나무 그늘 밑에 나란히 앉았다.“무슨 얘기하고 싶은데요?”왕청여는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석소 사저 손에 들고 있던 재봉실을 보며 물었다.“재봉실을 사신 거예요?”“아니요. 이씨 부인께서 보내왔어요.”석소 사저의 대답에 왕청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씨 부인은 사람이 참 선하네요. 소주방에 신경도 많이 써주고.”“다들 선한 사람들이죠.”“맞아요.”석소 사저는 대충 대답을 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그러자 왕청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함께 사는 얘기나 하려고 그런 겁니다. 아
왕청여는 석소 사저가 자신의 뜻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사과할 겨를이 없었다. 문을 굳게 닫은 왕청여는 어머니에게 약을 건네며 말했다.“어머니, 일단 약부터 드세요. 나머지는 다시 천천히 생각하시고요.”그러자 노부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청여야, 네가 솔직히 얘기해 보거라. 네 오라버니가 평소에 너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느냐?”“어머니, 하지만 저희는 이제 오라버니를 도울 능력이 없어요. 우린 지금 소주방에서 빌붙어서 살고 있고 어머니께서 드시는 약도 시만자 아가씨가 돈을 줘서 살 수 있었던 거예요.”왕청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하자 노부인이 반박했다.“네가 틀렸어. 그 돈들은 왕이장이 준 거야. 비록 왕이장이 우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였었다고.”“그자의 돈이라고 해도 우리는 오라버니를 위해 그자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어요.”입술을 꽉 깨물고 있던 노부인이 솔직하게 얘기했다.“그 돈들은 왕이장 돈이 아니야. 그때 당시 왕이장이 돌아왔을 때 네 새언니가 왕이장에게 보상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어. 그래서 점포 여러 개를 왕이장에게 준 거야.”“그자에게 줬으면 그자의 것이잖아요. 그리고 왕이장 그자도 암암리에서 저희를 많이 챙기고 도왔는데 이제 와서 도로 내놓으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어머니, 이건 왕이장에게 불공평해요.”왕청여의 말에 노부인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어차피 우리는 왕이장에게 미안한 짓을 이미 많이 저질렀어. 지금도 왕이장은 우리를 원망하고 있을 텐데 더 원망하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네 오라버니가 잘못을 저지른 건 맞아. 잠시 정신이 나가서 그랬을 거야.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는데 네 오라버니가 이대로 죽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잖아.”고개를 푹 숙인 왕청여는 약 그릇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어머니, 차라리 새언니에게 말하는 건 어떨까요? 새언니는 좋은 방법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그건 절대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