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이 가까이 다가가 송석석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우리가 결코 상황을 최악으로 몰고 가게 두진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그의 장담이 실은 확실한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 마음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나 서경의 신임 황제는 태자에 오른 후부터 녹분성 사건을 서경에 퍼뜨려 백성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그런데 이제 황제가 되었으니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다. 염선생이 정보를 정리해 결론을 내렸다. “정원제는 황제 자리에 큰 미련이 없어 보입니다. 다만 그 엄청난 권력을 이용해서 그의 태자 형과 학살당한 백성들을 위해 정의를 되찾고 우리에게 국경선에서 물러서라고 요구하려 합니다. 심지어 그는 전쟁을 발발하려는 듯합니다. 다만 서경이 사국을 도왔던 일로 인해 병력을 크게 잃었고, 우리와의 오랜 대치 속에서 성릉관에서도 대규모 전투를 겪었기에 서경 역시 재정비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조정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냉옥 장공주가 그 주축이 되어 전쟁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냉옥 장공주가 사절단을 이끌고 오는 것은 정원제가 우리와의 협상에 양보할 의지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아마도 이번이 유일한 양보일 겁니다. 만일 협상이 결렬된다면 전쟁을 반대하는 이들은 완전히 힘을 잃게 될 겁니다.”냉옥 공주는 서경 선황제의 적장녀로, 선태자와 지금의 정원제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정원제가 즉위하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장공주가 되었다.정원제를 황위에 앉힌 것도 사실 그녀의 힘이었다. 당시 서경 선황제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녀가 대신 국정을 다스렸고, 서경에서 그녀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서경에는 이런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장공주가 여성이 아니라면 반드시 태자로 책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경에서는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고 벼슬을 할 수는 있어도 황제로 즉위할 수는 없었다.심청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장공주와 몇 번 마주친 인연이 있는데, 그녀는 술수도 있고 결단력도 대단하더
사여묵은 밤새 조용히 송석석을 품에 안고 잠을 청했다. 송석석은 어떤 작은 움직임도 없이 그의 품에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숨소리 하나하나가 계산된 듯 고르게 이어졌다. 사여묵은 단숨에 그녀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 차렸다. 송석석은 단지 사여묵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성릉관 소 장군부 안에 황제의 뜻을 전하는 어명이 도착했다. 남강으로 어명을 전달하러 가는 이는 바로 치석정찰대의 제방과 노홍이었다. 물론, 어전시위와 금군도 동행하였다.제방과 노홍은 현재 사품무관으로, 아직 황제가 본격적으로 그들을 등용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번 명령 전달이 그들의 첫 임무라고 볼 수 있다. 이 일을 잘 수행하면 황제의 신임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그러나 이 임무는 그들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무장과 병사들은 소승과 송회안을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임무가 단순한 명령 전달이 아니라 사실상 압송과 같아 제방과 노홍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원래 어전시위 척귀가 오늘 당장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방과 노홍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소 대장군에게 가족과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을 주기 위해 출발을 하루 미루었다.오늘 저녁의 장군부는 평소와 다름없이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올렸고, 평소 먹던 몇 가지 음식만 차려졌다. 오늘이라고 해서 음식을 더 추가하지는 않았다.이 날이 언젠가는 올 거라는 것을 모두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이 식사에서 소 대장군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한입도 제대로 삼킬 수 없었다.“아버지!” 소삼야가 젓가락을 내려놓고 붉어진 눈으로 나이 든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아버지와 함께 가겠습니다!”소승은 침착하게 음식을 먹으며 가볍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황제께서 팔야에게 군권을 맡기셨으니, 제가 아버지와 함께 돌아가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어차피 저는 한쪽 팔을 잃은 몸이니 어떤 책임이라도 제가 혼자 짊어지겠습니다."“허튼소리 하지말거라!” 소승은 그를
남씨는 속이 상해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났다. 자신의 남편이 전북망을 구하려다가 한쪽 팔을 잃었고, 그 덕에 평생 갈고 닦은 무예 실력은 반으로 줄어버렸다. 다행히 그동안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 한 손으로 검술을 연습하며 나름 무예 실력을 유지하려 애썼으나, 이제 긴 창은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도와준 것은 도와준 것이라 쳐도, 상대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라니. 더군다나 그들의 눈앞에서 이방과 몰래 관계를 맺고 있었다니! 어째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것인지, 그때는 정말 눈이 멀어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들이 당시 좀 더 세심하지 못했던 탓도 있었다. 그때 알아챘더라면 성릉관에서 바로 혼쭐을 냈을 텐데…… 어찌 그들을 돌려보내 석석을 해치도록 두었단 말인가!남씨는 송석석을 무척 아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도 남씨는 마침 진성에 있었는데, 그렇게 사랑스럽고 보드라운 아기는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옥을 깎아 만든 것처럼, 그녀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한 보물이었다. 송석석이 세 살이 될 때까지 남씨는 며칠에 한 번씩 진북후부에 달려가 귀한 아이를 안아보곤 했다.그 후 남씨는 남편을 따라 성릉관으로 향했다. 초반에는 두 해에 한 번씩 진성으로 돌아오곤 했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학문과 무예를 익혀야 했고, 성릉관과 서경 사이의 마찰도 끊이지 않아 점차 자리를 비울 수 없게 되었다.송회안과 그의 아들 일곱 명이 희생되었을 때, 남씨는 남편을 따라 한 차례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때 석석은 매산에서 무예를 익히고 있었기에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지 못한 탓에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이후에 일어난 일들은 모두 편지를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석석이 전북망과 이혼한 후 돌아왔을 때, 남씨 부부는 함께 돌아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석석이 이미 남강 전장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어서 그녀가 공을 세워 돌아와 북명왕 사여묵과 혼인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진성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그들은 녹분성에서
소승의 부하 장군들은 관각에 머무는 제방과 노홍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거무스레한 피부의 장군들이 초조하고 애타는 눈빛으로 녹분성 사건에 대해 설명하자, 기방과 노홍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정말 사실입니다! 소 대장군은 전혀 몰랐습니다! 당시 그는 화살을 맞아 군의관들조차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스스로 견뎌냈고 침상에 누운 지 석 달 만에야 겨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몸 상태도 전과 같지 않아 고통을 겪고 있단 말입니다!”“맞습니다! 전북망이 녹분성으로 간 건 제 의도였지, 소 대장군과는 무관합니다! 저를 데려가 조사하고 처분하십시오. 목숨이 필요하다면 진성에 도착하자마자 드리겠습니다!"“제 장군님, 노 장군님, 여러분은 이전에 남강 전장에서 송 원수와 함께 싸우지 않았습니까? 우리끼리는 숨김없이 말해봅시다. 이 일을 해결할 방도가 있습니까? 황제의 진짜 의도는 무엇입니까? 정말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누군가 나서서 이 일을 짊어져야 한다면 저 노여가 짊어지겠습니다!”장군들 한 명 한 명 모두 자신이 죄를 짊어지겠다며 소 대장군이 돌아가는 걸 원치 않다고 했다.그러자 제방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장군님들, 저와 노홍은 황제의 명을 전하러 온 것일 뿐, 결정할 권한이 없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북명왕이 분명히 해결책을 찾을 것입니다.”“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통상적으로는 이렇게 명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대들을 보낸 것은 실질적으로 소 대장군을 압송하라는 의미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전령을 보냈을 것입니다!”노여는 눈이 빨개지도록 애가 탔고 목소리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대장군께서는 곧 칠순이십니다. 그 나이에도 성릉관을 지키며 일생을 국경 관문에 바쳤습니다. 평생을 우리 상국의 국토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셨단 말입니다! 어찌 남의 잘못을 그분에게 덮어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노정 역시 답답함에 발을 굴렀다. “맞습니다! 그들은 원래 성릉관의 병사도, 무장도 아닙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그들은 저녁 내내 여러 번 기회를 노려 장기문과 단둘이 이야기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장기문과 척귀가 한 방을 썼고, 출입 또한 항상 함께 했기 때문에 척귀를 따돌릴 방법이 없었다. 이때 마침 장기문이 화장실로 가자 노홍이 척귀를 감시하고, 제방은 화장실 밖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장기문은 물과 음식이 맞지 않아 화장실에 오래 머물다 나왔다. 그가 나오기만을 계속 기다린 제방은 추위에 떨어 거의 몸이 얼어붙은 상태였다. 이곳은 불빛이 매우 어두컴컴했다. 장기문은 나오면서 사람 그림자를 보고 까무라치게 놀랐다. “제 장군이셨군요! 놀라서 혼났습니다!”제방이 다가가 말을 꺼내려 하자 장기문이 웃으며 말했다. “아직 숨을 참을 수 있으면 잠깐 참으시죠. 안에 냄새 좀 빠지게요.”제방도 웃으며 대답했다.“장 시위님, 사실 저는 시위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무슨 말씀이든 여기서 할 건 아니죠. 돌아가서 합시다. 춥지는 않으십니까?” 장기문은 다리까지 저려왔는지 다리를 탁탁 털었다. 제방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장 시위님, 오늘 밤 저를 찾아온 장군들은 모두 소 대장군을 오랫동안 모신 부하들입니다. 그들은 단지 대장군을 염려하는 마음에 잠시 무례하게 말한 것입니다. 아무런 의도가 없었습니다.”장기문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제 장군께서는 제가 황제께 보고하지 않길 바라십니까? 이미 그런 말을 떠들어댔으니 무의식적으로 한 말이라곤 할 수 없겠죠. 제 장군께서도 괜한 일에 참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보고할지 말지는 내 일입니다. 이번이 그대들에게 공식 임무로 복귀하는 첫 번째 기회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앞날도 없을겁니다.”제방은 매우 실망스러웠다. 그는 호칭까지 바꿔가며 친밀함을 내세워 설득하려 애썼다. "장 형제, 당신의 사촌인 장문수 형님을 봐서라도 그 말을 못 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앞으로 우리 형제끼리는 뭐든 다 좋게 해결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나와 노홍이 당신에게 신세를 지는
소육야는 노정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관각에 가서 제 장군을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로 들었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들은 것은 확실합니다." 노여는 고개를 들고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수천 군대와 맞서도 두려워하지 않던 그가 지금은 겁이 나는 듯했다. "노정이 그렇게 큰 소리로 외쳤는데, 귀먹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다 들었을 겁니다." "그럼 내가 가서 그들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이 말이 절대로 황제께 전달돼서는 안 됩니다." 소육야이 크게 호통쳤다. "거기 누구 없느냐! 말을 준비하거라!" 그리고는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소삼야는 이들이 아버지와 반평생을 함께해 온 사이로 걱정하는 마음에서 제방을 찾으러 간 것임을 알고 있어 그들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형님들, 화는 입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반드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 꺼내지 마십시오.”그러자 모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잘못을 깨달은들 과연 만회할 수 있을지는 몰랐다. “설령 어전 사위가 없었다 해도 제방과 노홍 앞에서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어. 아이고……"소팔야는 머리가 아픈 듯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황제의 명에 따라 진성으로 가시는데 지휘권은 삼야형이 아닌 자신에게 맡겨졌다. 그는 막내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친아들도 아니었다. 이를 통해 황제가 내부 갈등을 조장하려는 속셈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분란이 생기기라도 한다면 황제는 곧바로 총지휘관을 성릉관에 파견할 것이다.현재 성릉관을 안정시킬 수 있는 무장은 북명왕 외에 아무도 없다. 하지만 황제가 북명왕을 이곳에 보낼 리는 없고, 만약 다른 이를 보낸다면 실력이 부족하거나 공을 세워 후작에 오르려는 야망을 품은 자일 것이다.다행히도 소가의 아들들은 단합이 잘 되어 있었다. 누가 지휘권을 쥐든 간에 아버지가 계실 때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고, 아버
진성에서는 홍시가 성릉관에서 온 전서를 받자 마자 열어 보지도 않고 왕비에게 전하라며 시만자에게 넘겼다. 시만자는 성릉관에서 온 소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전서를 열어 읽었고 깜짝 놀라 곧장 말을 타고 달려 경위부로 달려갔다. 송석석이 경위부에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시만자가 경위부를 드나드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이제 막 특별 초빙된 무술 사범이기 때문이다. 숙청제는 그녀의 무예 실력이 뛰어남을 알았고, 또 그녀가 스스로 무관이 되길 원하지 않는 것을 이해했기에 그녀에게 현갑군의 무예 교육을 맡겼다. 비록 어전시위가 독립되었지만 무예 훈련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이들은 여전히 경위부로 와 시만자에게 무예를 배우러 와야 했다.송석석은 전서를 읽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실수였다. 이 내용을 가볍게 본다면 노정 장군이 순간적인 실수로 입을 잘못 놀린 것으로 가벼운 훈계를 내리거나 군봉 스무대를 맞는 선에서 끝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심각하게 본다면 이는 대단히 큰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 발언이 마치 성릉관의 장군들이 일제히 녹분성의 죄책이 황제에게 있다고 여기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더욱이 이 사건은 애초에 황제의 책임이라고 볼 수 없었다.“어떻게 해야 해…? 염선생과 사형은 지금 부재 중이고 왕야도 대리사에 있어서 너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어.” 시만자 역시 그 발언의 파급력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황제는 물론 상대적으로 관대한 선황제조차도 이와 같은 말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황제가 성릉관에 지원군을 보냈고 지원군은 소 대장군의 지휘를 받았다. 만약 황제가 이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 모든 전투에서 패할 때마다 그 책임이 황제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전북망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송석석은 손에 든 전서를 등불에 가져가 태워버렸다. 장기문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새어 나가서
단신의가 떠난 후, 장문수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장기문을 막아야 합니다.”선평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내가 더 이상 소 대장군이 이런 불의의 재난에 휘말리게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다.”설령 영예와 부귀를 버려야 한다 해도 온 마음을 다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는 법이다. 선평후는 무장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후작의 지위는 전장에서 피땀 흘려 얻은 것이었다. 소 대장군을 위해서라면 작위를 잃더라도 조상이 그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다만 그는 조카 장기문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장기문은 어릴 때부터 주관이 뚜렷하고 자신의 미래를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사람이었지만, 불행히도 늘 운이 없었다. 중요한 임무가 주어질 때마다 병에 걸리거나 불운이 닥쳐 공을 세울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오랫동안 동궁에서 보낸 그이지만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해 여전히 평범한 시위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황제가 즉위하고 나서야 그는 현갑군으로 편입되어 어전 시위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별다른 출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번 성릉관 파견도 척귀가 오월에게 추천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장기문은 항상 성공을 꿈꾸어 왔다. 이제 눈앞에 절호의 기회가 생겼는데, 그가 쉽게 포기할 리가 있겠는가?단신의는 선평후부에서 나와 북명왕부에 소식을 전했다. 사여묵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장기문이 약간의 운이 부족한 인물일 뿐, 비교적 올바른 사람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스스로도 이를 고발할지 망설이고 있을 것이다. 선평후와의 대화를 나눈 뒤라면 고발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게다가 장기문이 정말로 그 말을 출세를 위해 이용하려고 한다면, 차라리 이를 기회로 삼아 황제께 보고하는 대신 제방과 직접 얘기를 나누는 편이 더 유리할 것이다. 제방은 제가의 사람이며 제수찬은 황제의 사위이니 그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고발로 얻는 것보다 훨씬 클 터이니 말이다.심지어 장기문은 황제 곁에서 오랫동안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