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운 장막이 바람을 차단했고 방 안에는 네다섯 개의 숯불 그릇이 놓여 있었는데 창문이 살짝 열려 있어 따뜻하면서도 답답하지 않았다.관리는 비단으로 된 사각 쟁반을 두 번째 장막 안으로 옮긴 후 손목을 침대 가장자리에 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허 의원님, 여기 앉으셔서 진맥해 주십시오.”허 의원은 자리에 앉아 왕야의 보기 위해 장막을 열려 했지만 만 관리가 저지했다. “왕야께서 추위를 피해야 합니다.”“맥만 짚을 수는 없소. 안색도 봐야 하오.”허 의원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러단 말인가? 병이 있으면 병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은가?’이때 복구안이 앞으로 나아가 장막을 열었는데, 침대 위의 사람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이건 분명히 회왕이 아니다!한 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만 관리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여러 가지 대책이 떠오르긴 했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그동안 아무도 회왕부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 회왕부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어찌 이런 일이…?!” 허 의원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람을 써서 왕야를 가장하게 하다니?”만 관리는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사실 왕야는 농장에서 요양 중인데 왕비가 태후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어서… 그래서 사람을 불러 왕야를 가장하게 했습니다.”“웃기는 소리!” 복구안이 담담하게 말했다. “허 의원님, 그냥 태후께 보고합시다.”허 의원은 알겠다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회왕비, 그럼 이만.”떠나기 전, 그는 누워 있는 사람을 한번 쳐다봤다. 비록 이불 속에 있었지만 거친 옷깃이 보이는 것이 분명히 하인의 모습이었다.태후를 속이기 위해 하인을 왕야의 침대에 올리다니... 앞으로 저곳에서 어떻게 잠을 자려고?복구안이 물었다. “세자께서는 아직 외부에서 여행 중이시지요?”잔뜩 긴장한 회왕비는 복구안의 질문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래전부터 돌아오시지 않고 계십니다.”복구안은 더는
숙청제는 마음을 가다듬었다.문득 어머니가 왜 갑자기 황숙에게 어의를 보냈는지 궁금해져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궁 안에서 사람들 말로는 오늘 혜태비께서 오셨다면서요?”태후는 웃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 불렀습니다. 사보국에서 새로 들어온 장신구들 중 붉은 금으로 만든 칠색 보요가 있습니다. 황후도 이를 원하고 숙비도 원한다고 하니 고민이 참 많았지요. 황후에게 드리는 것도 좋지만 용종을 잉태한 숙비는 어찌할까요? 그래서 아예 혜태비에게 주었더니 혜태비가 글쎄 날강도가 따로 없었습니다. 보요뿐만 아니라 다른 장신구도 한가득 가져가 버렸어요. 정말 후회스럽습니다.”숙청제는 웃으며 말했다. “혜태비가 즐거우시면 어머님 또한 기쁘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이런 재물에 대해서는 별로 아깝지 않았다. 그에겐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저녁 식사를 마치고 숙청제는 돌아갔고, 태후는 옥춘과 옥하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이 습관은 수년간 유지되어 왔으며 아무리 추운 날씨라도 식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는 꼭 나가서 걷곤 했다.냉혹한 북풍이 휘몰아쳤고 그녀는 하나하나 끊임없이 이어진 궁의 등불을 올려다보았는데, 멀리 있는 등불일수록 마치 수증기 속에 잠긴 유리처럼 희미하게 보였다.옥춘은 태후가 뭔가 말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꽃밭에 도착할 때까지 태후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가끔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심지어 한숨조차 내쉬지 않았다.옥춘은 황제가 북명왕을 의심하게 되어 형제간에 불화가 생길까 두려워하는 태후의 걱정을 잘 알고 있었다. 태후와 황제는 모자 관계로 매우 친밀하지만 전왕조의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껴야 했다. 그녀의 말은 매우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해야 했다.…북명황실.태비는 붉은 금으로 만든 칠색 보요를 송석석에게 주었고, 석류 손목띠는 시만자에게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자기를 위한 보상으로 매일 화려하게 치장했다. 그녀의 언니가 말하기를, 여성은 언제 어디서든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그는 백보재의 주인장에게 하인을 데려와 하나하나 값을 매기도록 했다. 그렇게 상자를 하나씩 정리하다 보니 어머니가 금괴와 여러 가지 귀한 보석을 숨겨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마의 말로는 일부는 어머니의 지참금이고 일부는 그의 할머니가 남긴 것인데 분가하지 않아서 육씨에게 나눠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일부는 송석석이 보낸 것인데 그녀가 이혼할 때 숨겨두었던 것이라며, 다행히도 송석석이 그 보석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고 했다.전북망은 마마에게 송석석이 보낸 것들을 골라내게 하여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러자 마마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돌려줘도 받을 리 없을 것입니다. 차라리 둘째 노부인께 드리는 게 낫지요. 어차피 두 분은 사이도 좋았으니까요.”“송석석이 둘째 노부인에게 주는 것은 그녀의 일이지만 우리는 대신 결정을 내릴 수는 없다.” 전북망은 이렇게 생각했지만 왕청여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돈과 보석에 욕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젠 왕부 사람들과는 아무런 연관을 맺고 싶지도 않아 했으니 어차피 송석석이 가져가지 않았으니 팔거나 맡기는 게 낫고 그 수익은 육씨에게 주면 된다고 생각했다.“송석석은 신경 쓰지 않을 것입니다. 형님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전당 맡긴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걸 되찾는 게 송석석에게 돌려주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수님도 본래 송석석에게 돌려주려 했을 것일 테니.” 전북망이 말했다. 그는 왕청여의 주장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관계를 깔끔히 정리하려 한다면 더욱더 돌려줘야 합니다. 설령 그녀가 버리더라도 그것은 그녀의 결정이지요.”백보재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왕청여는 그의 행동에 화가 나더라도 집안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아 결국 그를 끌고 나가서 대화했다.창고 밖에 나가니 전북망이 자연스럽게 자기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난 후 몸이 별로 회복되지도 않았고 또 오늘은 날씨도 아주 추웠기
상대는 회왕부의 무상 선생이었지만, 그의 복장이 왕부에 있을 때와 달랐고, 얼굴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손을 모아 인사했다. “장군님, 어머님과 민씨의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삼가 애도 드립니다.”여전히 낯선 사람인 탓에 전북망은 거리를 두었다. “고맙소. 허는 성함을 밝히지 않으신다면 이만 가보겠소.”무상이 대답했다. “소인은 만씨로 회왕부의 가신입니다. 회왕비께서 위로차 소인을 보냈습니다. 허나 장군님과 송 대감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방문하기 어려웠습니다.”전북망은 회왕부의 사람을 몇 명 보았기에 만씨 성을 가진 관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고, 눈앞의 그가 바로 그 사람 같았다. 그에게선 학자의 기품이 느껴졌는데 아무리 봐도 관리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왕부의 가신인 만큼 분명 학자의 신분은 틀림없을 것이다.그는 회왕비가 그를 직접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 교차했다. “회왕비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시게. 내 부족함으로 인해 송 부인과 회왕비의 기대를 저버렸으니.”“다과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회왕비께서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전북망은 결혼식 날 성릉관에 갔고 그 후 이혼했지만 회왕비는 송석석을 돕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회왕비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게다가 회왕부는 진성에서 항상 저자세로 지내왔기에 몇 번의 교류는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좋소. 그렇게 하지.” 전북망이 말했다.사방에선 많은 숨겨진 눈들이 그들이 다과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상은 전북망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전부터 그는 항상 그의 동태를 살펴보았고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관찰하고 있었다. 한 해가 지나자 전북망은 한층 더 여윈 탓에 얼굴은 각이 졌고, 눈빛도 이전보다 훨씬 침착하고 진지해졌다.하지만 무상은 약간 실망했다. 전북망의 얼굴에선 이전같은 적개심이나 숨겨진 야망의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북망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비록 그가 어전시위령을 맡은 기간이 짧았지만 황제가 어전시위를 독립시키려는 의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북명왕을 두려워하기에 송석석에게 모든 안전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나는 어머니의 상을 치러야 하니 효는 지킬 것이오.”무상은 미소를 지으며 직접 차를 따르더니 조용히 말했다. “왕야께서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그 말에 전북망은 약간 놀랐다. ‘회왕은 진성에서 거의 아무와도 교류가 없는데 그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이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죄책감 때문인 걸까?’그는 절대 어리석지 않았다. 회왕이 도움을 줄 수 있더라도 그로 인해 자기가 그의 하수인이 될 것을 알았다. “만 관리, 효를 지키는 건 조상 대대로의 규칙이오. 황제가 특별히 명령하지 않는 한, 나는 조정의 핵심 인물도 아니고 국경을 지키는 원수도 아니라는 말이오. 게다가 황제께서 나를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오.”무상은 웃으며 말했다. “장군님께서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십니다. 비록 장군님께서 여러 번 황제를 실망시켰지만 황제께서는 여전히 기회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전북망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게 뭐란 말이오?”“그것은 장군님께서 북명왕에게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상이 설명했다. “현갑군은 본래 사여묵이 지휘했고 대리사를 맡은 후에도 여전히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정의 많은 관료들은 여러 직책을 맡고 있지만 왜 황제가 송 대감을 현갑군 지휘관으로 임명했겠습니까?”전북망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여전히 명확하게 알지 못해 반문했다. “연유가 무엇이란 말이오?”무상은 그의 경계를 무시한 채 직설적으로 말했다. “현갑군의 수장을 교체하는 것이 불만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 군대는 사여묵이 선발하고 육성한 것이니까요. 만약 사여묵의 지위가 송석석으로 교체된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은 부부 관계니까 쉽게 받아들일
그의 깊은 눈 속에서 느껴지는 음모의 기운에 전북망은 소름이 돋았다. ‘장공주의 반란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황제 곁에 사람을 심으려 한다니.. 회왕이 겁이 많다는 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그는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거지?‘ 전북망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기에 본인은 절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특히 황제 곁에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일이었다. 그는 즉시 일어나서 말했다. “만 관리, 내가 집안에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네.” 말을 끝낸 그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무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정말로 큰 뜻이 없단 말인가? 어전시위령의 의미를 모르는 걸까?’그 직책은 황제의 심복 친위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가에 전북망은 확실히 야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접근하기 전, 만 관리는 전북망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는데, 장군부의 명예를 되찾고 싶어 하던 전북망이 3년 동안 효를 지키는 것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혹시 누군가가 먼저 그에게 접근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북망이 효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 먼저 행동에 나서는게 이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즘 그를 주시한 바 따르면, 설 연후에 그는 경위부의 훈련장 외에는 별다른 곳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 상이 있어 다른 사람을 방문할 수도 없었고 방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평서백부 외에는 말이다.그러면 혹시 평서백부일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왕표는 남강에 있고, 왕준은 쓸모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인일 뿐인데 어찌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무상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전북망은 회왕부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수년간 회왕은 그저 움츠러든 거북이에 불과했으니깐.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장공주가 끌어모은 대신들은 이제 모두 물러났으니 그렇다고 연왕부의 신
이틀 후, 심청화는 평무종이 보낸 전갈을 가지고 어두워진 얼굴로 사여묵을 찾아왔다.“서경 황제가 상국에 사자를 보낼 것이니 곧 국서가 도착할 것이다.” 사여묵의 얼굴도 같이 어두워졌고, 결국 올 것은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월이 지나기도 전에 숙청제는 어전시위의 독립을 발표했다. 이로써 어전시위는 송석석의 관할을 받지 않으며 어전시위령은 여전히 전북망이 맡게 되었다. 전북망은 믿을 수 없어 만 관리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속으로 의심했다. 정말 회왕부가 그를 도와주는 것인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복직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는 딱히 상의할 사람이 없어 돌아가서 왕청여에게 말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어요. 그저 제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제 어전시위는 송석석의 관할도 벗어나니 이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전북망은 심각하게 생각했다. “아니오. 어쩌면 음모가 있을지도 모르오.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싶소.” 왕청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겁니까? 폐하께 말하면 오히려 부군을 파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평생 자리도 못 잡을 거란 말입니다. 어전시위령은 고사하고 심지어 경위 자리조차 어려워질 겁니다.” 전북망은 침묵했다. 그 역시 그런 걱정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회왕부가 당신을 도와주려는 것은 송석석과의 이혼 때문이지요. 괜히 부군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그러는 겁니다.” 전북망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것이오. 회왕비가 미안함을 느낀다 해도 송석석에게나 느끼는 것이지, 어찌 나한테 느낀단 말이오? 송석석에게 상처를 준 건 나인데 말이오.” “부군!” 그의 말을 들은 왕청여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화를 냈다. “됐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도와주든 상관없이, 회왕은 야망이 없는 사람이니 반란을 꾀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군을 도와주려는 건 나중에 부군에게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말이 안 되오. 내 자
숙청제와 조정의 문무백관 앞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첫 번째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전면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원래 이 사건을 몰랐던 것처럼 행동하며 국서를 받은 뒤 서경의 조사를 협조하고 처벌할 인물을 처벌해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국위 회복에 나서는 것이다.국서에는 국경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므로 이 사안은 신중히 다뤄져야 했다.서경은 국서를 통해 직접 고발했기 때문에 충분한 증거가 있었다. 게다가 서경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이 이미 많이 일어난 상황이기도 했기에 만약 책임을 회피한다면 전쟁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았다.두 번째 선택을 하게 된다면, 처벌할 인물은 반드시 처벌해야 했다.결정을 내린 후, 황제와 목승상은 잠시 눈을 맞추었고, 다른 이들은 조용히 침묵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소 대장군을 소환해 처벌해야 했다.하지만 소 대장군은 평생 전쟁을 해온 인물로 문제가 발생한 당시에도 진압 작전에 참여했으며 남강 전선에서도 싸웠고 야심 가득한 유목민까지 물리쳤다. 그러다 마지막엔 청릉관을 수비하였다. 게다가 아들들도 전장에 나가 몇 명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돌아오는2월 19일은 그의 칠순 잔치지만 그 나이에 아직도 국경을 지키고 있는 무장은 오직 소 대장군뿐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를 소환해 처벌하라고 입을 열 수 있을까?결국 황제는 시선을 사여묵에게로 돌렸다. “북명왕, 그대는 남강의 원수였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황제가 왜 갑자기 북명왕에게 질문하는지 몰라 모두가 당황했다. 북명왕비는 소 대장군의 외손녀로 그가 만약 소 대장군을 소환하자고 한다면 부부 사이가 틀어질 것이 아닌가?순간 이덕회는 동정심이 솟구쳐 올라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폐하, 신은 소 대장군을 소환하여 이 사건을 조사하실 것을 건의합니다. 청릉관의 지휘는 소 대장군의 양자 소 삼랑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는 병부 상서로 황제는 응당 먼저 승
송석석와 시만자는 궁을 나선 후, 시만자는 공방으로, 송석석는 여학으로 각자 향했다.이미 전에 제자예에게 더는 수작을 부리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문제를 일으킨 것이었다.국태부인은 송석석를 보자마자 그녀가 제자예의 문제를 해결하러 온 것을 알고 말했다.“그 아이는 학문에 뜻이 없는 듯하니, 차라리 퇴학을 권하는 게 어떻소? 스스로 떠난다면 보기 흉하지 않을 것이오. 어쨌든 곧 혼사를 준비해야 할 아가씨지 않소.”국태부인은 제자예의 집안을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녀를 생각하며 말한 것이다. 만약 아군여학에서 쫓겨난다면 그녀의 명성에 큰 타격이 갈 것이 분명했다.국태부인은 여자아이들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깊었다. 혼사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으면 평생 후회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송석석이 말했다.“국태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선 그녀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부터 알아보고 이야기 해보겠습니다.”국태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크게 잘못한 일은 아니오. 그 아이와 벗들이 수업마다 소란을 피우며, 특히 여옥 선생 앞에서 더욱 심했소. 이에 따라 다른 학생들의 불만도 커졌고, 여옥 선생도 꽤 곤란해하고 있소. 선생도 나이가 젊으니, 이런 문제를 처리하는 데 익숙하지 않나 보오.”송석석이 잠시 생각했다. 여옥 선생은 문제를 처리할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 역시 단순한 학생들의 문제가 아니기에, 여학 자체를 흔들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런 것은 그녀가 섣불리 나설 수 없는 문제였다.송석석는 먼저 여옥을 찾으려 했지만, 마침 제자예가 그녀의 두 친구와 향회옥과 주창우와 안에 있는 모습을 보았다.놀랍게도, 그들은 사과하러 왔다.제자예가 앞장서서 고개를 숙이고 진심으로 뉘우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철이 없어서 여옥 선생께 폐를 끼쳤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선생이 처벌을 내려도 달게 받겠습니다. 앞으로는 절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벌을 내려주십시오
황후는 급격히 화가 치밀어 올라 잔을 내던지며 말했다.“정말 눈엣가시구나! 항상 나의 계획을 방해하기만 한다.”그러자 궁녀 란주가 옆에서 말했다.“마마. 북명왕비는 태후의 명으로 여학을 설립하고 아군여학을 도맡은 이후로, 경중의 부인들 사이에서 칭찬받고 있습니다. 지금쯤 경성의 반이 되는 명문가 부인들이 그녀를 존경하고 있으니, 정말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제황후는 순간 지난 동짓날이 떠올랐다. 그날 명부들은 하나같이 송석석을 극찬하였다. 심지어는 북명왕 부부의 금실을 감탄하거나, 그녀의 능력과 역량을 치켜세우며 여인의 모범이라 말했다.‘송석석이 여인의 모범이라면, 나는 황후로서 뭐란 말인가?’이런저런 생각에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투와 분노가 더욱 치밀어 올랐다.“태후께서 한때 이방을 여인의 모범이라 하셨는데, 이제 그 명성을 송석석이 차지하고 있으니, 불쾌하지도 않은 것이냐?”궁녀가 말했다.“마마, 그녀는 지금 돋보이게 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어 한창 주목받고 있습니다. 지금 시기에 그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만사가 극에 달하면 화를 입을 테니, 언젠가 그 관심이 화를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태후께서 그녀를 지키고 있으니, 그녀와 대립하지 않는 것이 현명합니다.”황후가 차갑게 말했다.“태후께서 그녀를 지키는 이유는, 그저 송석석 어머니와의 사소한 옛정 때문 아니겠느냐? 여학은 태후가 하자고 하신 일이지만, 폐하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으셨다. 그저 효도를 위해 마지못해 허락한 것뿐이지. 여학을 도맡아서 대단한 줄 아는 모양인데, 송석석이 글이나 알고 있느냐? 정말 우습지 않은가? 태후는 여학을 중시하신다. 여학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해도 태후께서 그녀를 계속 지킬지 두고 보자.”란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제자예 아가씨를 여학에 들여보내 선생들을 곤란하게 했던 일이 태후의 귀에 들어가지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더 심한 일이 벌어진다면 정말 태후를 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폐하께서도 마마를 도와주시지 않을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태후마마께서 그 아이의 이름까지 기억하시다니, 참 그 아이의 복입니다. 예. 자예 동생은 올해 갓 성인이 되었고, 열다섯 살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숙모가 자예의 혼사를 의논하려고 저를 찾아오신 겁니다.”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래, 나도 들었다. 숙모는 광릉후의 셋째 아들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지? 나도 특별히 알아보았더니 재능도 있고 인품도 좋아서, 훌륭한 배필이라 할 만하더구나. 게다가 나이도 비슷해서 아주 딱 맞다.”그러자 황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태후의 날카로운 눈빛에 자신의 속셈이 전부 간파된 듯한 기분이 들어, 어떻게든 수습하기 위해 더듬거리며 말했다.“혼사는… 신중해야 합니다. 우린 그렇다고 쳐도, 제자예의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말이 맞는다. 그래서 내가 직접 혼사를 정하진 않으마. 스스로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게 하고 정말 마음에 든다면, 나에게 와서 혼사를 정해달라고 요청하게 하거라. 황후의 체면을 봐서라도, 내가 기꺼이 혼사를 내려줄 테니.”황후의 얼굴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는 분명 태후가 그녀가 혼사를 강요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는 말이었다. 대체 누가 고자질을 한 것일까? 어제 금방 사람을 방씨 집안에 보냈고, 오늘 아침 오수인을 궁으로 불렀건만, 말 한마디 나누기도 전에 태후가 그녀를 불러서 경고했다. “딱히 다른 일은 없다. 그저 이번 일로 네 의견을 듣고자 해서 부른 것이니 돌아가 숙모께 전하거라. 네 동생이 스스로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이다. 혼사는 부모의 뜻만 따를 수는 없는 법이다.”태후는 황후를 돌려보냈다.황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며 말했다.“예. 친정의 일로 태후마마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드리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란주는 황후에게 여우 털 외투를 걸쳐주었고 이내 두 사람은 함께 본청을 나섰다.황후가 떠나자마자, 송석석과 시만자가 병풍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
연 공공은 어음과 차를 받고도 입을 꾹 닫고 있었다.“마마를 뵈면 다 알게 될 것이네. 고명 부인께서 어찌 예를 어기시겠는가?“집사가 웃으며 답했다.“예. 공공의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비록 그는 웃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으로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 아니라면 어찌 조금도 얘기를 알리지 않을까?송석석은 제자예가 소란을 일으켜서 오늘 여학에 가봐야 했다. 국태부인이 전날 밤 하인을 보내어 그녀에게 정리해 달라고 전했다.그녀가 막 문을 나서자마자 방씨 가문의 가마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가마꾼들이 몹시 서두르는 걸 보니 급한 일이 있는 듯했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방씨 가문에서 왔소?”가마 안에서 방 부인이 가림막을 걷으며 다급히 말했다.“왕비, 황후께서 숙모님을 궁으로 부르셨는데, 아마도 방시원과 제씨 가문 아가씨 제자예와의 혼사 때문인 듯합니다. 숙모께서 황후가 직접 명을 내리실까 봐 염려하셔서 도와달라고 하십니다.”송석석은 그 말을 듣고 다소 놀랐다.“제자예라면 아군여학의 그 제자예를 말씀하시는 겁니까?”“예. 어제 혼담을 보내왔지만, 숙모가 거절하셨습니다.”방 부인이 다급히 대답하자 송석석은 곧바로 상황을 이해하고 시만자를 불렀다.“태후께 문안을 드리러 궁에 가야겠다.”그렇게 두 사람은 말을 타고 궁으로 달려갔다.그 시각, 오숭인은 이미 마차에 올라 연 공공과 함께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송석석와 시만자는 한발 먼저 도착해 태후를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태후는 평소 후궁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매달 첫날과 보름에만 문안받았다. 그저 이른 아침, 숙청제가 문안을 드리고 갔을 뿐이다.송석석의 말을 들은 태후는 냉소하며 말했다.“함부로 혼담을 꺼내다니. 그녀의 속셈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제씨 가문은 분명 방시원의 병권을 빌려 큰 황자를 지원하려는 속셈이다.“큰 황자가 서우를 깔보고 난 후, 태후는 그에게 몹시 불만이었다. 아직 어리고 곁에서 스승이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릇없고 거만해 깔보지
사여령은 새로 부임했을 때 아버지에 관한 질문을 받을까 봐 매우 두려웠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사여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물어보는 이조차 없어 점점 긴장이 풀렸다. 그 중 대리사 소경인 진이가 몇 마디 말을 건넸다. 그는 모든 일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 온화한 사람이었다. 사여령은 그에게 매우 감사하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예의를 차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그는 태어나서 제대로 된 일을 해본 적이 없었기에, 감옥 관리자 일을 잘 수행해내고 싶었다. 그는 배워야 할 것도 많았고 수하의 옥졸들을 잘 관리해야 했으므로 매일 바빴다.사여묵은 진이에게 당분간 사여령에게 너무 많은 것을 묻지 말고 그가 제대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도록 도우라 했다. 사여령이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지원해 주고, 작은 성취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후 스스로 판단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다.동지가 지나고 나서부터 중매쟁이들이 방씨 가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오수인은 방시원에게 부인을 찾아주고 싶어 했다. 자식 문제야 그렇다 쳐도, 그의 곁에서 그를 잘 챙겨줄 사람 한 명정도는 필요했다.오수인은 아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돌아온 후, 후손에 대한 기대는 크게 없었다. 오수인은 그저 아들이 평온하게 살아가길 바랐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왕청여 사건 이후, 그녀는 며느리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품성을 꼽았다.이전에 혼담이 오갔던 집안은 비록 6품 관원의 딸이었지만, 덕목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왕청여와 노세진 사건이 터지면서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그 후 중매 얘기가 많이 들어오자, 그녀는 먼저 그들의 품성을 알아보고자 했는데, 그러던 중에 뜻밖에도 제씨 가문에서 먼저 혼담을 꺼낸 것이다.제씨 가문의 막내딸인 제자예는 갓 성인이 된 지 반년이 채 안 된 16세도 지나지 않은 나이었다.오수인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품성을 알든 모르든 나이가 너무 어리다고 느꼈다.오수인이 원래 선택했던 아가씨는 모두 18세 이상이었다. 18세가 되도록 혼
노주라는 말 한마디에 사여묵과 송석석은 연회를 마치자마자 급히 북명황실로 향했다. 그들은 의사당에서 지도를 펼쳤다. 노주는 강남에 위치해 있고 당시 이왕의 봉지였다. 이왕은 문엄 황제의 형제였는데 오늘날은 진국장군이 되었다. 진국 장군은 봉호만 있을 뿐 병권은 없었다. 지금의 진국장군은 사청엽이었고 황가의 청짜 돌림이었다. 이제껏 조정의 봉록을 받고 살았지만 지금은 복지가 반 이상 줄었다고 했다. 전에 심사할 때도 그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노주는 비록 부유한 집안이긴 하지만 연주와 옹현에서 멀어 군대를 노주로 이동시키는 것은 꽤 곤란한 일이었다. 게다가 사청엽이라는 사람이 나쁜 일이란 나쁜 일은 다 하고 다녀 대대로 장악해 온 가업까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예전에 그 사람에 대혼 조사에 따르면 그의 집에는 처가 32명이 있었고 미인 통방도 오 육십 명은 되었다. 그가 데려올 수 있는 미녀라면 사든 아니면 빼앗든 반드시 가져야 했다. 그래서 그는 현지 관아와도 관계가 좋지 않아 관아에서도 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1년 동안 그가 말썽을 일으키고 민녀를 강탈한 사건만 해도 수백 건이 넘었다. 하필이면 노주가 그의 봉지라 쫓아낼 수도 없고 맞서자니 아무리 그래도 진국장군이니 감히 그러지도 못했다. 그를 탄핵하는 상주서는 많지 않았다. 노주 지부가 3년에 한 번씩 바뀌는데 모두 황실의 체면 때문에 감히 보고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황실이라고 방임하면 나중에 자신의 벼슬길에 영향을 미칠까 봐 모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그가 나쁜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이때 염 선생이 말했다. “그에게는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횡포하다는 것입니다.” 사여묵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한 사람이 가난이 극에 달하면 당연히 돈을 벌 방법을 생각해 내겠지. 하지만 요 몇 년 동안 그가 노주에서 빈둥빈둥 지내면서 친구는 거의 없고 손에 실권이 없으니 돈을 벌 수도 없겠지. 조사해서 그의 개인 마을이나 산이 있는지 알
“여령아, 무릎을 꿇거라.” 영태비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사여령에게 말했다. “불효자식아, 어서 왕비에게 용서를 빌거라! 그녀는 너의 사촌 여동생이기도 하고 사촌 형수이기도 하다. 그녀가 너를 용서해야 하늘에 계신 네 어머니의 영혼에게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 사여령이 무릎을 꿇으려 하자 송석석은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 “어디 한 번 감히 무릎을 꿇어보십시오.” 그녀의 차가운 말에 사여령은 굽으려던 무릎이 뻣뻣해졌다. 송석석은 영태비에게 말했다. “태비마마께서 다른 일이 없다면 저는 그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녀는 말을 마치고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자 영태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비,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손자와 손녀를 보호해 주게.” 송석석은 제 자리에 서더니 고개를 돌려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태비마마께서 정말 보살님이십니다. 하지만 저희 사촌 이모께서는 태비의 연민을 받아본 적이 없지요. 그러니 그들도 누군가의 연민과 보호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태비는 울며 소리쳤다. “왕비님, 아무리 그래도 친척인데 어떻게 상관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왜 보호가 필요하겠습니까? 황가의 자손이 거지라도 될 수 있단 말입니까? 태비마마께서 괜한 걱정을 하신 것 같습니다. 만약 태비마마께서 괜한 걱정을 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말을 내가 아니라 손자들에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송석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성큼성큼 떠났다. 사여령은 쏜살같이 쫓아나가 그녀를 막았다. “사촌 동생아.” “당신이 내 사촌 이모의 친아들도 아닌데 사촌 동생은 무슨!” 송석석은 줄곧 사여령을 미워했다. 연왕에겐 아들이 세 명 있는데 가장 밉살스러운 것은 그가 아니었지만 첩이 낳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사촌 이모가 그를 키워줬는데 효의가 조금도 없다니. 살아있을 때 효도한 적도 없으면서 죽은 후에야 울고불고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촌 동생. 나는 그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
말을 하고 있을 때, 영태비가 사적으로 사람을 보내 송석석을 초대했다. 송석석은 태후마마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그곳으로 향했다. 영태비는 문엄 황제의 빈이라 아들을 따라 봉지에 가서 복을 누려야 했지만 지금은 궁궐의 외딴곳에 홀로 남아 생활을 했다. 송석석이 고 공공을 따라 영수궁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설 분위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는 몇 개의 전각이 아닌 하늘과 땅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울이 되자 영태비의 병세가 악화되어 연왕의 아들인 사여령이 진성에 남았는데 오늘 입궁해서 조모의 곁을 지켰다. 송석석이 온 것을 보자 사여령은 일어나 인사를 했다. “왕비님, 오셨습니까?” 송석석은 그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큰 도련님도 계셨군요.” “네, 조모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사 여령은 송석석 앞에서 감히 그녀의 눈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고, 송석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태비께 인사를 올렸다. 영태비는 등에 비단 베개 두 개를 받치고 침대에 기대 있었는데 안색이 노란 데다 푸르스름했고, 희끗희끗한 머리는 풀어헤친 채 계속 누워있었던 탓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녀는 연신 기침을 하더니 송석석에게 말했다. “왕비, 어서 앉게.” 영태비는 말하는 속도가 아주 느리고 힘이 없었다. 궁녀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옆에 놓자 고 공공이 말했다. “왕비님, 앉으십시오. 태비마마께서 몸이 허약해서 말소리가 크지 않으니 가까이 앉으셔야 들을 수 있습니다.” 송석석은 태비마마께 감사를 표하고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 “태비마마께서는 좀 괜찮으십니까?” “아마도 낫지 않을 것이다.” 영태비는 말을 하며 입술에 립밤을 좀 발랐는데 혈색을 더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창백해 보였다. 송석석은 영태비를 위로했다. “잘 치료한다면 금방이라도 괜찮아질 것입니다.” 전 중의 숯불은 아주 따뜻하게 타올라서 송석석은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태우는데도 연기 한 점 보이지 않을 것으로 보아 좋은 숯임을 알 수
혜태비는 궁에 들어오자마자 덕귀태비와 제귀테비를 찾아가 정원을 노닐었다. 혜태비는 홍보석 장신구가 오늘 피부색을 잘 받쳐주어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사여묵은 송석석과 함께 태후마마에게 문안을 드리러 태후전에 들어갔는데 많은 명부들 또한 때를 지어 태후에게로 왔다. 마침 방시원의 어머니인 오수인도 태후에게 인사를 드리러 궁으로 들어왔는데, 태후가 이렇게 많은 명부들 앞에서 방시원의 혼사를 물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같았다. 오수인은 마음속으로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감히 태후 앞에서 하소연하지는 못했다. “태후마마, 혼인을 조급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도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방시원이 고생이 많구나. 이유 없이 이런 일에 연루되고, 너희 집안은 더할 나위 없이 인자한데 하필이면 그 사람들 때문에 발칵 뒤집히다니.” 오수인은 그제야 태후께서 왜 갑자기 그 말을 물으셨는지 알았다. 알고 보니 방시원과 방 씨 가문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감격에 겨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복이 천박한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태후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거라. 그는 우리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자 황은을 받들고 있는데 복이 천박하다니? 그의 운명은 분명 찾아올 것이다.” “예, 태후마마께서 좀 더 신경을 써주십시오.” 사건이 일어난 후 사람들은 다소 조롱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었는데, 지금 현장에 있던 명부들의 오수인을 보는 눈빛은 순식간에 달라져 있었다.하지만 태후께서 말씀을 하시니 상황이 달라졌다. 태후는 방시원을 상국의 훌륭한 장군이라고 평가했다. 여태껏 조정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방시원을 위해서 나선 것이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총명한 사람이기에, 태후의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그러니 앞으로 아무도 감히 방 씨 가문을 무시하지도, 함부로 입에 담지도 못할 것이다.태후마마께서는 방시원의 얘기를 길게 하지 않고 다른 가문의 일도 물어보았다. 그리고 제대부인이 보이지 않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