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는 회왕부의 무상 선생이었지만, 그의 복장이 왕부에 있을 때와 달랐고, 얼굴도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손을 모아 인사했다. “장군님, 어머님과 민씨의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삼가 애도 드립니다.”여전히 낯선 사람인 탓에 전북망은 거리를 두었다. “고맙소. 허는 성함을 밝히지 않으신다면 이만 가보겠소.”무상이 대답했다. “소인은 만씨로 회왕부의 가신입니다. 회왕비께서 위로차 소인을 보냈습니다. 허나 장군님과 송 대감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서둘러 방문하기 어려웠습니다.”전북망은 회왕부의 사람을 몇 명 보았기에 만씨 성을 가진 관리가 있다는 것은 알고있었고, 눈앞의 그가 바로 그 사람 같았다. 그에게선 학자의 기품이 느껴졌는데 아무리 봐도 관리처럼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왕부의 가신인 만큼 분명 학자의 신분은 틀림없을 것이다.그는 회왕비가 그를 직접 찾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해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 교차했다. “회왕비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시게. 내 부족함으로 인해 송 부인과 회왕비의 기대를 저버렸으니.”“다과점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나누면 어떻겠습니까? 회왕비께서 전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전북망은 결혼식 날 성릉관에 갔고 그 후 이혼했지만 회왕비는 송석석을 돕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회왕비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었다. 게다가 회왕부는 진성에서 항상 저자세로 지내왔기에 몇 번의 교류는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좋소. 그렇게 하지.” 전북망이 말했다.사방에선 많은 숨겨진 눈들이 그들이 다과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상은 전북망을 바라보았다. 사실 이전부터 그는 항상 그의 동태를 살펴보았고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관찰하고 있었다. 한 해가 지나자 전북망은 한층 더 여윈 탓에 얼굴은 각이 졌고, 눈빛도 이전보다 훨씬 침착하고 진지해졌다.하지만 무상은 약간 실망했다. 전북망의 얼굴에선 이전같은 적개심이나 숨겨진 야망의 기미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북망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비록 그가 어전시위령을 맡은 기간이 짧았지만 황제가 어전시위를 독립시키려는 의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북명왕을 두려워하기에 송석석에게 모든 안전을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나는 어머니의 상을 치러야 하니 효는 지킬 것이오.”무상은 미소를 지으며 직접 차를 따르더니 조용히 말했다. “왕야께서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그 말에 전북망은 약간 놀랐다. ‘회왕은 진성에서 거의 아무와도 교류가 없는데 그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단 말이지? 어쩌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죄책감 때문인 걸까?’그는 절대 어리석지 않았다. 회왕이 도움을 줄 수 있더라도 그로 인해 자기가 그의 하수인이 될 것을 알았다. “만 관리, 효를 지키는 건 조상 대대로의 규칙이오. 황제가 특별히 명령하지 않는 한, 나는 조정의 핵심 인물도 아니고 국경을 지키는 원수도 아니라는 말이오. 게다가 황제께서 나를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오.”무상은 웃으며 말했다. “장군님께서는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십니다. 비록 장군님께서 여러 번 황제를 실망시켰지만 황제께서는 여전히 기회를 주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를 아십니까?”전북망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게 뭐란 말이오?”“그것은 장군님께서 북명왕에게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상이 설명했다. “현갑군은 본래 사여묵이 지휘했고 대리사를 맡은 후에도 여전히 지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조정의 많은 관료들은 여러 직책을 맡고 있지만 왜 황제가 송 대감을 현갑군 지휘관으로 임명했겠습니까?”전북망은 곰곰이 생각했지만 여전히 명확하게 알지 못해 반문했다. “연유가 무엇이란 말이오?”무상은 그의 경계를 무시한 채 직설적으로 말했다. “현갑군의 수장을 교체하는 것이 불만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 군대는 사여묵이 선발하고 육성한 것이니까요. 만약 사여묵의 지위가 송석석으로 교체된다고 해도 어차피 그들은 부부 관계니까 쉽게 받아들일
그의 깊은 눈 속에서 느껴지는 음모의 기운에 전북망은 소름이 돋았다. ‘장공주의 반란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황제 곁에 사람을 심으려 한다니.. 회왕이 겁이 많다는 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그는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거지?‘ 전북망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기에 본인은 절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특히 황제 곁에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은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랄 일이었다. 그는 즉시 일어나서 말했다. “만 관리, 내가 집안에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하겠네.” 말을 끝낸 그는 바로 돌아서서 떠났다.무상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표정이 점점 진지해졌다. ‘정말로 큰 뜻이 없단 말인가? 어전시위령의 의미를 모르는 걸까?’그 직책은 황제의 심복 친위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가에 전북망은 확실히 야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접근하기 전, 만 관리는 전북망에 대해 충분히 조사했는데, 장군부의 명예를 되찾고 싶어 하던 전북망이 3년 동안 효를 지키는 것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혹시 누군가가 먼저 그에게 접근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북망이 효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었으니 먼저 행동에 나서는게 이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즘 그를 주시한 바 따르면, 설 연후에 그는 경위부의 훈련장 외에는 별다른 곳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집안에 상이 있어 다른 사람을 방문할 수도 없었고 방문하는 사람도 없었다. 평서백부 외에는 말이다.그러면 혹시 평서백부일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왕표는 남강에 있고, 왕준은 쓸모없는 인물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여인일 뿐인데 어찌 그를 도울 수 있겠는가. 무상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전북망은 회왕부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수년간 회왕은 그저 움츠러든 거북이에 불과했으니깐.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방법이 없다. 장공주가 끌어모은 대신들은 이제 모두 물러났으니 그렇다고 연왕부의 신
이틀 후, 심청화는 평무종이 보낸 전갈을 가지고 어두워진 얼굴로 사여묵을 찾아왔다.“서경 황제가 상국에 사자를 보낼 것이니 곧 국서가 도착할 것이다.” 사여묵의 얼굴도 같이 어두워졌고, 결국 올 것은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월이 지나기도 전에 숙청제는 어전시위의 독립을 발표했다. 이로써 어전시위는 송석석의 관할을 받지 않으며 어전시위령은 여전히 전북망이 맡게 되었다. 전북망은 믿을 수 없어 만 관리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속으로 의심했다. 정말 회왕부가 그를 도와주는 것인지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의 복직은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는 딱히 상의할 사람이 없어 돌아가서 왕청여에게 말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어요. 그저 제자리로 돌아가면 됩니다. 이제 어전시위는 송석석의 관할도 벗어나니 이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전북망은 심각하게 생각했다. “아니오. 어쩌면 음모가 있을지도 모르오. 폐하께 이 사실을 알리고 싶소.” 왕청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겁니까? 폐하께 말하면 오히려 부군을 파면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평생 자리도 못 잡을 거란 말입니다. 어전시위령은 고사하고 심지어 경위 자리조차 어려워질 겁니다.” 전북망은 침묵했다. 그 역시 그런 걱정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절대 말하면 안 됩니다. 회왕부가 당신을 도와주려는 것은 송석석과의 이혼 때문이지요. 괜히 부군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그러는 겁니다.” 전북망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 것이오. 회왕비가 미안함을 느낀다 해도 송석석에게나 느끼는 것이지, 어찌 나한테 느낀단 말이오? 송석석에게 상처를 준 건 나인데 말이오.” “부군!” 그의 말을 들은 왕청여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화를 냈다. “됐습니다.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도와주든 상관없이, 회왕은 야망이 없는 사람이니 반란을 꾀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부군을 도와주려는 건 나중에 부군에게 도움을 받기 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말이 안 되오. 내 자
숙청제와 조정의 문무백관 앞에는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었다.첫 번째는, 민간인 학살 사건을 전면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원래 이 사건을 몰랐던 것처럼 행동하며 국서를 받은 뒤 서경의 조사를 협조하고 처벌할 인물을 처벌해 사태를 수습함으로써 국위 회복에 나서는 것이다.국서에는 국경 문제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므로 이 사안은 신중히 다뤄져야 했다.서경은 국서를 통해 직접 고발했기 때문에 충분한 증거가 있었다. 게다가 서경 내에서 이 사건에 대한 여론이 이미 많이 일어난 상황이기도 했기에 만약 책임을 회피한다면 전쟁으로 직결될 가능성이 높았다.두 번째 선택을 하게 된다면, 처벌할 인물은 반드시 처벌해야 했다.결정을 내린 후, 황제와 목승상은 잠시 눈을 맞추었고, 다른 이들은 조용히 침묵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소 대장군을 소환해 처벌해야 했다.하지만 소 대장군은 평생 전쟁을 해온 인물로 문제가 발생한 당시에도 진압 작전에 참여했으며 남강 전선에서도 싸웠고 야심 가득한 유목민까지 물리쳤다. 그러다 마지막엔 청릉관을 수비하였다. 게다가 아들들도 전장에 나가 몇 명은 이미 목숨을 잃었다.돌아오는2월 19일은 그의 칠순 잔치지만 그 나이에 아직도 국경을 지키고 있는 무장은 오직 소 대장군뿐이다. 그런데 누가 감히 그를 소환해 처벌하라고 입을 열 수 있을까?결국 황제는 시선을 사여묵에게로 돌렸다. “북명왕, 그대는 남강의 원수였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황제가 왜 갑자기 북명왕에게 질문하는지 몰라 모두가 당황했다. 북명왕비는 소 대장군의 외손녀로 그가 만약 소 대장군을 소환하자고 한다면 부부 사이가 틀어질 것이 아닌가?순간 이덕회는 동정심이 솟구쳐 올라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말했다. “폐하, 신은 소 대장군을 소환하여 이 사건을 조사하실 것을 건의합니다. 청릉관의 지휘는 소 대장군의 양자 소 삼랑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그는 병부 상서로 황제는 응당 먼저 승
형부시랑은 직접 사람을 거느려 장군부로 향했다. 그들은 이방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장군부를 먼저 포위했다. 이로 인해 왕청여는 크게 놀라 문희거에 숨어 나가지 못하다가 이방을 체포하러 온 것임을 알고서야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이방은 바로 상황을 눈치채고 검을 든 채 길상거 복도에 섰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망가진 반쪽 얼굴을 스쳤고 주변은 고요함이 감돌았다. 그녀는 길상거로 침입한 관리들을 바라보며 검을 휘둘렀다.“이방, 어서 손을 들고 항복하거라!” 길상거 밖의 형부시랑 주창이 큰 소리로 외쳤다.“전북망은 어디 있소?” 이방이 냉담하게 물었다. 그녀는 전북망이 복직한 사실을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전북망은 이 사실을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주창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더 엄숙하게 말할 뿐이었다.“반항하지 않는 게 좋다. 장군부는 이미 포위됐다.”그러자 이방은 검을 자기 목에 대고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전북망을 부르시오!”그녀가 항복하지 않자 왕청여는 장군부에 해가 갈까 걱정되어 소리쳤다. “이방, 그러지 말거라!”이방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여전히 주창에게 말했다. “물어볼 말이 있으니 전북망을 불러주시오. 나는 어차피 죽을 목숨이오. 차라리 빨리 죽는 게 고통을 덜 받는 길이지 않겠소?”주창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그녀는 서경 사자의 분노를 견뎌야 했고 설령 죽더라도 사자 앞에서 죽어야 했다.“이방, 네가 죽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이렇게 죽으면 너의 부모와 가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니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거라.”“부모와 가족?” 이방은 싸늘하게 웃었다. “그들은 나를 한 번도 걱정한 적 없소. 게다가 떠도는 헛소문에 그들은 바로 진성을 떠나버렸소. 그들이 날 여식으로 생각지 않으니 그들의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왕청여는 분노로 손가락이 떨렸지만 길상거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어쩜 그리 독한 것이냐?”이방은 목에 검날이 긁히며 피가 흐르기 시
전북망은 급히 장군부로 돌아왔다. 주창이 소식을 전할 때 그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이방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다. 그녀는 비록 모순적이고, 강인하지만 두려움이 많기에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발버둥을 칠 것이고, 절대 쉽게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그녀와의 감정이 이미 사라진 지금 이방이 생존을 위해 무엇을 할지 전북망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최근 그녀는 진성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길상거를 나서는 것이 두려웠다. 암살 사건이 그녀를 겁먹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방이 미리 준비할까봐 염려되어 서경 사자가 요청한 일을 미리 알리지 않았다. 길상거에 도착한 전북망은 목에 검을 대고 있는 이방의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이 무너졌다. “이방, 검을 내려놓으시오!”이방은 표정이 싸늘했고 두 개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검처럼 날아왔다. “전북망!”왕정도 두 명의 금군을 데리고 도착하자마자 전북망을 막았다. “너무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전북망은 복잡한 눈빛으로 왕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왕정이 걱정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이방, 주 대인과 함께 형부로 가시오.” 전북망은 왕정을 사이에 두고 이방을 설득했다. “일을 번거롭게 만들지 마시오. 조사에 협조하면 형부는 부인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오.”“헛소리!” 이방의 눈에서 매서운 불꽃이 튀었다. “괴롭히지만 않는다면 저는 차라리 장군부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전북망, 한 가지만 여쭙지요. 부군은 지금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그렇지요?”그러자 전북망은 난감한 기색을 보였다. “이건 우리 둘의 사적인 일이오. 먼저 형부의 조사에 협조하시오.”이방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협조? 좋습니다. 서방님이 직접 나를 직접 끌어가세요. 어차피 어전시위령이잖습니까?”전북망은 움직이지 않아 이방의 분노는 점차 가라앉았고 곧 슬픔이 스며들었다. “서방님, 우리는 함께 성릉관 전장에서 싸우며 죽음을 넘나들었습니다. 녹분성으로 가는 길에 나에게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
이방은 두 손이 뒤로 묶였고 엎어질 때 자갈에 얼굴이 긁힌 탓에 몇 군데에 피가 흘렀다. 그녀는 전북망을 한 번 쳐다보았는데 그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곧이어 그녀는 다시 송석석을 향해 노려보았다. 송석석이 입고 있는 관복은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녀는 그것을 만질 기회조차 없어졌다.송석석은 채찍을 거두고 이방 앞에 섰다. 서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하나의 눈빛에는 원망과 증오가 가득 차 있었고 다른 눈빛엔 감정을 숨기지 못한 분노로 가득했다. 송석석은 이번에 이방에 대한 증오를 숨기지 않았다. 부모의 위패 앞이기에 그녀는 어느 정도 이런 감정들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오늘은 그 증오를 억제할 수 없었다. 이방은 그녀의 가족을 해쳤고 외할아버지까지 끌어들였다. 이 원한은 결코 풀 수 없다.이런 증오 앞에서 이방의 질투와 달갑지 않은 마음은 아주 하찮게 보였다.그녀는 눈을 돌려 전북망을 바라보았는데, 이번에는 진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전북망은 복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아까 왕정에게 자신을 일부러 막게 했을 때 실제로는 그가 먼저 왕정을 막고 있었다. 이방이 자신을 인질로 삼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형부시랑을 인질로 삼으면 모든 관리들이 물러날 것이었다.그는 이방의 의도를 단숨에 파악했으며 둘 사이에는 여전히 마음이 통했다. 성릉관에서의 1년 동안 그와 이방은 함께 전투를 겪었다. 이 묘한 일치는 마음이 통했던 시절의 연장선이었다. 이방은 그에게 만약 그녀가 위험에 처한다면 그는 어떻게 할 것인가고 물은 적이 있었고 그는 모든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녀를 구하고 심지어 목숨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지금도 그는 그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설령 그 대가가 관직을 잃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하지만 송석석의 출현은 그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방에 대한 약속을 지키고 싶었으면서 왜 송석석와의 약속은 지키지 못한 것일까? 마음이 복잡해지며 발목에 느껴지는 통증이 그를 다시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