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후, 오진과 그 동료들은 스승을 모시는 예식을 준비하며 시만자를 왕강루로 초대하였다. 왕과 왕비께 증인을 부탁드리는 것이라 예식은 성대하게 준비되었다. 사실 시만자는 그날 집에 돌아온 후 다소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본래 성격이 자유롭고 구속받기 싫어했기에 제자를 받아들인다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보다 나이도 어린 터라 굳이 스승의 위엄을 세우지 않아도 될 것을, 그냥 '심 사부'라 불리며 가르치기만 하면 될 텐데 싶었다. 그래서 거절할 방도를 찾고 있었지만, 그들이 이미 왕강루에서 예식을 준비하였다고 하니 그녀도 도리 없이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런 성대한 예식을 듣고 있자니 무언가 허영심마저 살짝 느껴졌다. 생각을 거듭하던 끝에, 어차피 훗날 적염문을 물려받을 몸이니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마음을 정한 뒤 그녀는 제자들에게 맞는 무기를 골라잡고, 사여묵과 송석석과 함께 왕강루로 향했다. 시만자는 그들의 절과 차를 받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만 분명히 하지! 너희 셋이 나를 스승으로 모시는 일은 함부로 외부에 퍼트리지 말거라. 그날 너희가 나에게 절한 것을 여러 사람이 보긴 했지만, 차를 올려 정식으로 스승을 모신 일은 아니니, 정식 스승이라 할 순 없다. 오늘 이 예식에서 스승으로 모시기로 하였으니 이제는 우리 몇 사람만 알고 있기로 하자. 바깥에서는 나를 스승이라 부르든, 심 사부라 부르든 상관없다." 그러자 셋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고, 시만자는 준비해 온 무기들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필명아, 네가 큰형이다. 검법이 상당히 훌륭하더구나. 이 청풍검은 네게 적합할 터이니 검법이 더욱 정진되기를 바란다.""감사합니다, 스승님!" 필명은 두 손으로 검을 받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오진아, 넌 둘째다. 평소 칼을 자주 사용했지? 이 자금도는 네게 주마.""자금도요?!" 오진은 자금도라는 사실에 기쁨에 들뜬 채 방방 뛰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공을 익히는 이에게 무기가 얼마나 소중한
제자 예식 후 집으로 돌아온 후, 시만자가 송석석에게 말했다.“이번 제자 예식이 어찌 보면 일종의 희극 같지 않니? 나조차도 제대로 제자로서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제 제자를 거두다니. 게다가 그들은 나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현갑군의 군인들이잖아. 내가 가르침이 부족하면, 훗날 네게 누가 될까 걱정이 돼.”송석석은 시만자의 손을 꼭 잡고 그녀를 안심시키며, 먼저 사여묵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그리고 시만자와 함께 정원을 거닐며 조용히 말했다.“네가 원치 않는다면, 그냥 이번 예식은 없었던 일로 여겨도 된다. 여전히 그들에게 '심 사부'로만 불리면 되는 거야. 그리고 잘 가르치고 못 가르치고는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사부는 입문만 시켜줘도 충분해. 수행은 각자의 몫이니까. 네가 무공이 출중하고, 이미 그들에게 충분히 존경을 받았으니 만약 그들이 실력을 쌓지 못한다면 그건 그들의 재능 문제지, 네 탓이 아니란다.”시만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망설이는 것 같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정의 관료들이잖아. 내가 무림의 방식으로 그들에게 무공을 가르치는 게 과연 괜찮을까?”이에 송석석은 부드럽게 답했다.“황제께서도 당연히 현갑군이 더 강해지기를 바라실 거야. 현갑군과 경사 주둔군은 황성의 방패와 같기 때문이지.”시만자가 작은 목소리로 칭찬했다. “그토록 중요한 군을 감히 너에게 맡기다니, 황제께서도 참 대단하셔.”그러자 송석석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황제는 아직 반역자를 색출하지 못하셨는데, 북명왕부의 인물들은 반역자가 아니라고 믿고 있는 거지. 어쨌든, 황제는 우리를 이용해 그 반역자를 찾아내려는 거야. 반역자가 드러나지 않더라도, 만약 사태가 터진다면, 우리가 적을 막고 황제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시만자는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내가 보기엔, ‘사냥할 새가 다 떨어지면 활은 장롱에 보관될 운명’일 것 같군.”송석석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새 사냥이 끝났다는 것은 태평성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지
오늘 밤, 드디어 북명왕부 사람들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게 되었다. 송석석은 그제야 심청화가 매산으로 돌아가지 않았음을 알게 되어 놀랐다. “대사형, 아직 돌아가지 않으셨습니까?! 전 이미 가신 줄 알았는데요. 제가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신 줄 알고 어떻게 해야하지 싶었습니다.”그러자 심청화는 송석석의 머리를 콕 쥐어박으며 못마땅하게 말했다. “양심도 없는 것. 몇 번이나 불러도 답이 없어서 난 내가 너한테 실수라도 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날 보지도 못했던 게구나!” 옆에 있던 사여묵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쓰다듬고는 대신 변명해 주었다. “요즘 일이 많다 보니 생각에 잠겨 대사형의 부름을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너무 심하게 말씀하지는 마십시오.”사여묵은 비록 예의 바르게 말했지만 말투에는 약간의 원망이 섞여 있었다. 그러자 심청화가 웃으며 말했다. “세게 친 것도 아니고, 석석이도 익숙해져서 괜찮을 것이다. 게다가 석석이를 가장 많이 혼낸 건 다름아닌 네 사부이자 내 사숙이지!” 사여묵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사부님께서 가끔씩 도가 지나치시지요. 제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심청화는 자리에 앉으며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그는 이 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라고 확신했다. 사여묵은 송석석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 덕분에 감정에 무딘 송석석도 서서히 깨우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염선생은 술을 올리라 분부했고 몽동이도 자리에 앉아 함께 식사를 했다. 요즘 왕부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바삐 보냈지만 다들 은밀히 행동한 것이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식사 중엔 술잔이 오가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져 최근 사건의 어두운 기운이 조금씩 사라져간듯 했다. 문무를 겸비한 염선생은 심청화의 마음에 들고자 술 한 병을 꺼내 들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꺼냈다. “술도 있으니 어찌 비화령을 해보지 않겠습니까?”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몽동이와 시만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시에 외쳤다.“아이고, 배가 아주 터질 것
이때 염선생이 대답했다. “약은 이미 보내졌으나 무사히 지내고 있는지는 아직 전해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평소 정치에 간여하지 않던 심청화가 걱정하듯 말했다. “서경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렇소. 태자는 이미 국정을 관할하고 있으나 황제는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현재 조정의 반 수가 태자의 과격한 정책에 반대하고 있소. 태자는 선태자와 형제로서의 정이 깊긴 하지만 선태자의 정치 방침에 전혀 동의하지 않소. 수란키는 예전에는 선태자를 열렬히 지지했기에 그가 살아 있다고 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오.”“황제의 목숨줄이 참으로 끈질기군요.” 시만자가 굳게 동의하며 말했다. “예! 분명 곧 승하한다고 했는데 여전히 숨을 쉬고 있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요?”심청화가 답했다. “물론 대란 때문이지. 선태자는 민심을 얻었고 늙은 황제와 태자 사이의 교대가 거의 완료되었지만, 선태자가 세상을 떠나고 새로운 태자가 들어섰소. 조정의 신하들 대다수가 선태자의 측근이며 새 태자는 수란키조차 지지하지 않으니 모두가 그를 불신하기에 상황이 아주 어지럽다오. 며칠 전 소식에 의하면 이미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니, 아마 지금쯤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르지. 다만 소식이 아직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오.”“대사형, 평사저가 전갈이라도 보낸 겁니까?” 심청화는 줄곧 이런 일에 참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송석석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래, 전갈이 왔더군.” “허나...!” 송석석이 묻기도 전에 심청화는 그녀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뭘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내 사매가 조정의 일에 연루되었는데 내가 어찌 외면한단 말이냐? 그럴 수는 없다!”송석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모두를 곤경에 빠뜨리게 한 것 같네요. 다들 매산에서 자유롭게 살고 계셨거늘... 대사형은 그림을 그리고 산과 물을 노니셨는데 저 때문에 진성에 몸이 묶여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사여묵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스승님도 말씀하셨다시피 석석이는 사부님이 만난 사람 중에 무술 재능이 가장 뛰어난 제자라고 했다. 석석인 많은 무공과 기술을 단 한 번 보고도 익힐 수 있지.” 그러자 심청화가 웃으며 말했다. "비록 그렇게 말씀하시긴 했다만 그 뒤에 한마디 더 하셨어. 석석이는 너무 게을러서 하루 종일 산에서만 뛰어다니고 또 나무에 올라 새집을 뒤지고 구멍을 파서 독사를 잡고, 쥐를 잡아 아이들을 놀라게 한다고 말이야.” 그러자 몽동이가 무표정을 지었다. “저 또한 당해봤습니다. 글쎄 쥐 꼬리를 잡고 달려오더니 제 몸에 던지는 바람에 제가 너무 놀라 울면서 사부님에게 고했지 뭡니까? 아니 근데, 사부님께서는 사내놈이 울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오히려 저를 혼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에 만종문에 가서 따지셨답니다.” 시만자도 이 일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결국 화해가 이루어졌고 1년 치 임대료를 면제받았다지.” 그러자 송석석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서경의 일을 말하는데 내 어린 시절 얘기는 왜 꺼내는 것이냐! 밥이나 먹어!”몽동이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시만자를 보며 말했다. “1년 치를 면제했다니! 그게 사실이더냐? 넌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것이지?” “우리 적염문 또한 매산에 있었는데 모를 리가 있겠어? 온 매산이 다 아는 사실이다. 매년 임대료를 낼 때마다 너희 사부님은 너에게 석석이와 한번 겨뤄보라고 하시지?” “아!” 몽동이는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네 말은... 우리 사부님이 판을 짰다는 말이냐? 내가 석석이에게 맞으면 사부님은 그 대가로 임대료를 면제받으셨다는 거지?” 시만자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온 매산이 다 아는 일이야.” 몽동이는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니, 그럴 리가! 우리 사부님이 얼마나 품위 있고 신중하신 분인데 그런 판을 짠다니! 내가 매번 석석이에게 얻어터졌을 때마다 사부님은 내가 무공이 부족해서 그런 거라 하셨는데 말이다. 무공을
장군부. 왕청여는 한바탕 성질을 부린 후에야 조용해졌다. 하지만 김순희의 병세는 겨울이 되자 더 심해졌고 약을 더 많이 써도 늘 병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게다가 아직도 단신의를 모셔 오지 못했기에 김순희는 왕청여가 송석석만큼 인맥이 넓지 못한 것을 탓했다.왕청여도 더는 김순희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았고 병간호는 물론 안부도 묻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종일 큰며느리 민소진만이 그녀의 시중을 들었다.김순희는 전북망에게 하소연했다. “넌 이제 어전 시위령이 되었는데 어찌 안사람 하나도 단속하지 못한단 말이냐? 그년은 불효하고 불순하며 늘 이 어미에게 대든다. 현숙하지 않은 며느리는 삼대를 해친다고 했거늘!”전북망은 요즘 승승장구하는 시기였기에 지금 굳이 왕청여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매번 그녀와 다툰 뒤에는 진이 빠진 탓에 그저 어머니를 달래며 큰형수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민소진도 난처해하며 말했다. “둘째 서방님, 어머니를 돌보는 건 제 본분입니다. 서방님이 말씀 안 하셔도 그리해야죠. 그런데 제 몸도 좋지 않은 데다 집안에 돈이 부족하네요. 서방님의 안사람은 집안일에 신경을 안 쓰고 돈만 쓰니 어머니가 다음 달에 드셔야 할 단설환을 살 돈도 없습니다. 서방님, 차라리 작은 시누님께 한번 부탁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그래도 지금 평양후부 사람이니 돈이 있을 겁니다.” 전북망이 말했다. “돈은 내가 알아보겠습니다. 소환에게 부탁하는 건 말이 안 됩니다.”그 말에 민소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 안 되면 사람을 조금 줄이든가 하지요. 이 많은 사람을 먹이고 재우는 데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시절마다 옷까지 지어줘야 하니…”전북망이 말했다. “이 일은 형수님과 어머니께서 의논해 주시길 바랍니다.”“의논할 수 있었으면 제가 서방님께 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죠. 어머니는 하인을 내보내는 걸 싫어하십니다. 특히 서방님께서 이제 어전 시위령이 되셨으니 집안의 위세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민소희는 잠시 멈칫하
전장 안으로 들어서자 왕청여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는데 한바탕 성질을 부리고 나서는 확실히 조용해진 듯했다.전북망은 약간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살림을 민소진에게 맡기겠다고 말했고 왕청여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그건 원래 맏며느리가 해야 할 일 아닙니까? 전 지금 임신 중입니다. 그렇지 않았어도 제가 어찌 살림을 맡는단 말입니까?”전북망은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느질은 눈을 상하게 하니 어머니께 맡기시오. 보아하니 홍이도 바느질 솜씨가 좋던데 홍이에게 맡겨도 괜찮을 것 같소.”“그래도 어미로서 아이에게 옷 한두 벌은 만들어주고 싶어서요.”왕청여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게다가 아무리 우리 집에 녹봉을 받는 사람이 셋이나 있다고 한들 한 집안을 먹여 살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도 약을 드셔야 하니 절약할 수 있으면 절약해야지요.”전북망은 그녀가 왜 절약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녀가 화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집안에 분쟁만 없다면 일이 자연히 잘 풀릴 것이다. 그는 지금 출세를 바랄 여력이 없었고 그저 집안이 평온하기만을 바랐다.“오늘 일찍 오셨으니 마침 잘됐네요. 요즘 들어 배가 많이 나왔으니 유모도 찾아야 하고 산파도 최고로 좋은 사람을 구해야 합니다. 아이를 낳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 준비를 철저히 해야하지요. 지난번 영안 군주가 난산했다는 소식 들었지요? 우리도 미리 약왕당에 가서 약을 사두는 게 좋겠어요. 어머니께서 단설환을 사시러 가신 김에 함께 사오시면 될 것 같네요.”전북망도 산고의 위험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좋소, 그 약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내일 집에 오는 길에 사 오겠소.”“심고환이라고 해요. 인삼과 아교에 진통제 성분이 더해진 약이죠. 출산 시 고통이 심하고 기운이 부족할 때 먹으면 제일 좋다고 하네요.”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내일 사 오겠소. 산파와 유모는 형수님에게
다음 날, 전북망은 직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늦어지는 바람에 심고환을 사지 못한 탓에 민소진에게 다음 날 약왕당에서 심고환 여덟 알을 사 오고 유모와 산파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다해이 민소진이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시어머니를 위한 단설환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비록 예전엔 몸이 불편해 가사를 돌보지 못했지만 그녀는 장군부가 얼마나 큰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약을 사러 가기 전날 장부에 들러 은자를 찾으려 했을 때, 장부에는 은자 열 냥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돈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장군부 전체에 고작 은자 열 냥만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최소한 이삼백 냥 정도는 남아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둘째네는 아직 분가 전이기에 대부분의 돈도 공금으로 바쳤다. 그녀의 서방과 시아버지, 그리고 전북망의 녹봉에 하사받은 황금 백 냥까지 포함하면 아무리 적어도 2,300냥은 남았을 텐데 왜 열 냥밖에 남지 않은 거지?장부를 확인했더니 시누이가 혼수품에 사용한 은자도 상당했고 이방의 인출과 왕청여의 월간 지출도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시어머니의 약값과 하인들에게 들어가는 돈까지 어느 하나 적은 것이 없었는데 그녀는 한 달에 연자육을 한 근이나 먹었고, 다른 보약들도 꾸준히 챙겼다. 민소진은 그런 왕청여의 소비가 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집에 이미 보약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북망이 부상을 당했을 때 많은 이들이 보약을 보내왔고 왕청여의 친정에서도 여러 번 보약을 보내왔었다. 집에 있는 보약을 먹으면 되는데 왜 굳이 외부에서 따로 사야 하는 건지, 민소진은 답답한 마음에 문희거로 찾아가 왕청여에게 물었다. 민소진은 워낙 성품이 온화해 그저 궁금해서 찾아간 것일 뿐 다른 뜻은 전혀 없었는데, 왕청여는 그녀가 임신 중인 자기의 소비를 문제 삼는다고 오해해 크게 화를 냈다. 심지어 가위까지 들고 와 민소진에게 뱃속의 아이를 찔러서 없애라며 그러
상서원과 지안궁에서 벌어진 일은 순식간에 숙청제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마음이 나날로 초조해져갔다.게다가 연일 계략까지 모색하느라 두통이 심해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정도였다.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한 것도, 대황자를 태자로 책봉하기 위한 준비였다. 태자가 될 인물에게 금족된 어머니가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숙청제는 금족된 황후가 자식을 방치하는 것이 곧 자식을 해치는 일임을 깨달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황후는 반성하긴 커녕, 오히려 황자가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다고 확신할 뿐이었다. 한편, 숙청제는 입맛이 없는듯 저녁 식사를 대충 때운 뒤 약탕을 마셨다. 아무리 지쳐도 약은 반드시 복용해야 했다.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매번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누구나 겪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항상 죽음은 먼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이리도 갑자기, 예고도 없이 다가온 것이니 말이다. 그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국가의 중대사나 미래의 계획 같은 무거운 이야기가 아닌 단순히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숨을 돌리며, 마음을 편히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참을 머리를 굴린 끝에 떠오른 인물은 단 한 사람, 송석석뿐이었다. 송석석은 부상 치료로 며칠간 어서방에 오지 않았다. 숙청제는 임태의를 불러 침술로 두통을 진정시켰으나, 어지러운 증상과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어지러움 때문인지, 검은 하늘이 빙글빙글 도는가 싶더니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러다 문득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단순한 충동이 아닌 의심할 여지조차 없는 확신이었다.한편, 북명왕부에서 노 집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달려왔다.“무슨 일이오?” 염 선생이 서재에서 나오며 물었다. 노 집사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서는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왕비마마를 뵙고 싶다 하시옵니
황후는 시간을 맞춰 다시 상서원으로 간 후, 대황자를 데리고 함께 지안궁으로 가서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앞뒤로 늘어선 수행원들의 위세는 대단했다.대황자마저 어린 환관의 등에 업혀 궁문에 이르러서야 그를 내려놓았다.황후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대황자의 손을 잡고 지안궁으로 들어갔다. 꿇어앉아 예를 올린 후, 태후의 안부를 여쭈어 보았다. 비록 예법은 완벽했으나, 태후는 한동안 그녀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다만 대황자를 불러 물었다. “오늘 태부께 칭찬을 들었느냐?” 그러자 대황자는 태후의 눈치를 살짝 살피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태부께서 칭찬을 잊으신 것 같사옵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후가 서둘러 말을 보탰다. “태부께서는 엄격하시어 쉬이 칭찬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황후는 태후가 이미 태부와 약속을 해둔 일을 모르고 있었다.대황자가 그날 착실하고 성실히 임하면 수업이 끝날 때 한마디 칭찬을 해 주기로, 그렇지 않으면 칭찬은 없기로 말이다. 이를 통해 태후는 대황자의 하루 태도를 알 수 있었다. 태후는 황후의 말을 무시한 채 담담히 대황자를 향해 말했다. “규율은 기억하고 있느냐?” 그러자 순간 대황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그는 급히 변명하며 말했다. “태부께서는 어머니가 저를 찾으신 것을 못마땅히 여기셔서 칭찬하지 않으신 것 같사옵니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하는 건 너냐, 아니면 네 어미냐?” 태후가 묻자, 대황자는 황후를 가리키며 재빨리 말했다. “어머니를 벌하옵소서! 어머니께서는 글을 베끼시는 것을 가장 즐기시옵니다!” “맞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저는 글을 베끼는 것을 좋고 자식을 가르치지 못한 죄도 있으니 응당 벌을 받아야 하옵니다.” 황후도 서둘러 맞장구를 치자, 태후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금마마에게 명했다. “대황자를 저녁을 차려주고 작은 서재로 보내라. 해시 전까지 모두 베끼지 못하면 출입을 금하라.” 그러자
두 사람은 그렇게 어서방에서 거의 한 시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태후가 떠난 뒤, 숙청제는 황후의 금족령을 해제하라는 어명을 내릴 뿐, 후궁을 관리하는 권한은 돌려주지 않았다.오대반으로부터 어명을 전해 들은 제황후는 처음엔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금족령이 해제했단 말인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아마도 자신이 전에 퍼뜨리도록 지시했던 말들이 효과를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후가 살아 있는데, 적자를 태후궁에서 보살피는 것은 규율에 어긋난다는 말이었다.금족령이 해제된 제황후는 감사의 인사는 뒤로하고 대신, 곧장 서대신, 곧장 대황자를 만나러 상서원으로 향했다. 대황자는 황후를 보자마자 봅시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태부가 강의를 하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니, 아들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사옵니다! 언제쯤 저를 다시 데려가시겠나이까!” 황후는 허리를 숙여 그의 어깨를 잡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들을 찬찬히 살폈다. 초구를 걸치지 않은 대황자는 많이 야워어 턱선이 뽀쪽하게 드러난 모습에 황후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어찌 이렇게 수척해졌느냐? 잘 먹지 못한 것이냐?” 대황자는 입을 삐죽이더니 금세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재에서 돌아가면 황조모께서는 또 글을 외우게 하십니다. 외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으시니 황조모궁에 더는 있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빨리 돌아가고 싶사옵니다!” 제황후는 태후가 엄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방금 금족령이 풀린 상황에서 태후와 맞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다만 대황자를 달래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어미가 네 부황을 설득할 것이다.” 대황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말하려다, 안만수 태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문을 닫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때 안만수가 제황후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마마, 대황자께서는 수업 중이시옵니다.” 제황후는 안
이튿날, 목 승상은 바로 태의원으로 향하였다. 태의원에서는 모든 태의와 원정이 대기 중이었다. 자리에 앉은 목 승상은 그들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딱 한 가지만 묻겠다. 폐하의 병을 치료할 자신이 있느냐?” 태의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오원정이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목 승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없사옵니다.” “조금이라도 말이냐?” 목 승상은 쉽게 납득할 수 없어 다시 물었다. “단 한 가닥의 희망이라도, 혹 다른 방도라도 없단 말이냐?” 모두가 다시 침묵하자, 목 승상의 눈빛은 점차 어두워졌고 그러다 완전히 빛을 잃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의원의 명성을 걸고서라면, 이 기한을 2년으로 늘릴 수는 없겠느냐?” 오원정은 얼굴에 깊은 자책감이 서려 있었다. “승상, 폐적증은 발작하면 기세가 매우 심각하여 2년은커녕 1년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이번에는 목 승상이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는 마침내 한 마디 내뱉었다.“입들 조심하거라.” 그는 천천히 태의원을 나서며 망토를 단단히 여몄다. 이렇게도 빨리 또 연말이 다가왔다. 날씨가 갈수록 추워져 뼛속까지 스며들었다.태후는 겉으로는 아무 일도 모르는 듯했지만, 태의원의 밤새 꺼지지 않는 불을 보고일이 터졌음을 짐작했다. 그녀는 두통을 핑계로 오원정을 불러 진맥을 청했다. 그러자 진맥을 마친 오원정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수면이 부족하신 듯하옵니다.” 꼿꼿이 서 있는 그는 태후가 이미 무엇인가를 눈치챘음을 알고 있었다. 궁에서 태후의 눈과 귀를 피해 갈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후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때만 예외였다. 태후는 주변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오원정만 남게 했다. 문지방 위로 햇살이 드리웠지만 매서운 바람이 드리워, 그 햇살조차 싸늘하게 느껴졌다. “말해보거라.” 태후는 자리에 앉아, 오원정의 멍든 눈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폐하께서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기에
오늘 밤, 목 승상은 궁에 묵기로 하였다. 한편, 숙청제는 여전히 후궁에 들지 않았으며, 자신의 침전에 돌아가지도 않고 어서방 안의 침상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목 승상은 황제가 약을 다 마시는 것을 보고 사탕 하나를 건넸다.숙청제는 사탕을 받아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가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어릴 적, 부황에게 호되게 꾸짖음을 당하고 나면 승상께서 꼭 사탕 하나를 건네며 격려의 말을 해주시곤 하였지요.” 목 승상도 그를 바라보았다.“그렇습니다. 저 역시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황상께서 당시 말씀하셨지요. 훗날 현군이 되겠노라고 말입니다.” “혹 승상을 실망시킨 적이 있었는지요?” 숙청제는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로 인해 목소리가 다소 흐릿해졌다. “없사옵니다. 소인에게 폐하는 이미 현군이시옵니다.” 숙청제는 고개를 저으며, 눈에 실망스러운 빛을 띠우고 말했다. “난 현군이 아닙니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이제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태의원에서 아직 진단을 내리지 않았으니, 폐하께서는 비관하시면 안되옵니다.” 목승상의 위로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아쉽기는 하지만 더 많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숙청제는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 채 무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우선, 태자를 정해야 할 텐데 승상께서는 대황자가 어떠신지요?” 목승상이 답했다. “대황자는 장남이자 중궁의 적자로서, 지금은 태부의 가르침 아래 점점 나아지고 있사옵고 예전의 제멋대로이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더욱 믿음직스러운 인물이 될 것입...” 그러자 숙청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현재를 이야기하시지요. 그럼, 이황자는 어떻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목 승상이 답했다. “이황자는 영민하고 총명하지요. 비록 이제 막 학문을 시작하셨으나, 근면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강한 점이 눈에 띕니다. 다만 이를 지속할 수 있을지는
너무나도 큰 일이라 송석석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황제가 만약 승하한다면, 의심할 여지도 없이 대황자가 황위에 오를 것이고, 조만간 태자로 책봉될 것이다. 어린 황제가 즉위한다면, 반드시 보정 대신이 필요할 것이며, 그 수는 한 명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조정은 여러 당파로 갈리게 될 것이고, 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만약 보정대신을 두지 않는다면, 태후나 제황후가 수렴청정할 것이다. 황후는 야망이 가득한 사람으로, 현재 금족 된 상태에서도 대황자를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제씨 가문의 세력이 너무나 강해져 최근 황제가 억누르고는 있으나, 만약 황제가 승하하고 대황자가 즉위하면 제씨 가문은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었다. 누군들 권력을 탐하지 않겠는가? 목승상은 고령이라 퇴의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신황을 위해 나라를 돌보려 해도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벌어질 일들이고 현재 가장 우려되는 것은 황제에게 1년이란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그가 승하하기 전에 황후는 대황자를 위해 모든 장애물과 위협을 제거하려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북명왕부가 가장 큰 위협이었다. 오대반도 이 점을 깨달았는지,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그는 황제의 병세를 알게 되었을 때, 오직 북명왕만이 어린 황제를 도와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하지만 송석석의 근심 어린 얼굴을 마주하게 되자 그 끔찍한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아니, 이것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현실이 될 가능성이 너무나도 컸다. “왕비마마, 차라리 떠나시는 것이…” 송석석이 서둘러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만하시옵소서. 지금은 태의조차 확실히 진단 내리지 못하였으니, 어쩌면 단순한 두통이거나 종기일 수도 있사옵니다.” 그녀는 오대반이 조언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 혹여 훗날 황제에 대한 자신의 불충함을 느끼고 괴로워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먼지떨이를 꽉 쥔 오대반은 그녀의 뜻을 바
와야 할 사람들은 모두 만났기에, 이제 송석석은 마음 놓고 쉴 수 있을 것 같았다.간혹 임 태의가 상처 치료와 흉터 제거를 위한 약을 챙겨 찾아오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염 선생이 그를 환대해 주었고 황제께 대신 감사를 전해줄 것을 바랐다. 이날은 임 태의가 오대반과 함께 찾아왔다. 염 선생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임 태의에게 흉터 제거에 관련한 질문이 있다며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서 송석석이 오대반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것이옵니까?” 송석석이 묻자, 오대반은 손에 든 먼지떨이를 팔꿈치 위에 걸친 채 문밖에 함께 온 친위병들을 힐끗 보며 답했다. “황상께서 보내신 것도 맞고, 내 스스로도 오고 싶었사옵니다. 왕비 마마는 좀 나으셨사옵니까?” 잠시 망설이던 송석석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어때 보이시나요?” 오대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통찰력이 깊으시옵니다. 좀 나아진 듯하나, 아직은 거동이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만.” 송석석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공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좀 나아지긴 했으나 아직 걸을 수는 없사옵니다.” “왕비마마께서는 마음 졸이지 마시고, 우선 몸부터 잘 돌보셔야 하옵니다.” 오대반이 위로하자,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음이 급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단신의 말로는 골절은 백일이 걸린다 하였으니, 이 백일 동안 잘 요양해야 할 듯하옵니다.” 그때 시만자가 안쪽을 들여다보며 미소를 지었다.“멀리서 보고 척귀대인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 와보니 내가 착각했군.” 그 말을 들은 친위병들은 그녀가 장기문 대감의 사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했다. 시만자는 그들의 이름을 물은 뒤,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재미있군요. 내 제자들이 그대들 무예가 뛰어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던데, 오늘 잘 만났군. 내 그대들과 몇 수 겨루도록 하지.” 그 말에 친위병들의 눈이 반짝였
안여옥이 몸을 굽히며 작별 인사를 했다.“그럼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사옵니다.” “살펴 가세요.” 최숙심은 미소를 띈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안여옥이 떠난 후, 최숙심이 왕청여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는 또 다시 후회를 하고 있다는 증거였다.“이미 지난 일을 되새긴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서 들어가시지요.” 왕청여가 송석석을 문병하러 온 것은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그녀는 송석석에게 사과와 감사를 동시에 전해야 했기에, 오늘은 그저 형수님들을 따라온 척했지만, 사실은 과거의 모든 일을 마주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석석을 마주할 용기는 냈지만, 안여옥을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쳤다. 마치 무언가로 세게 맞은 듯 머릿속이 하얘졌고, 그 미소조차 억지로 지어낸 것이었다. 심지어 자신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까 두려웠다. 멍하니 형수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간 왕청여는 송석석을 마주한 순간 이미 눈물은 시야를 가렸다. 그녀를 한 번 쳐다보던 송석석은 미소 지으며 자리에 앉으라 권하고 차를 내렸다. 그녀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던 최숙심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닌지요? 얼마나 많이 아프셨습니까?” 그녀의 진심 어린 염려에 송석석은 오히려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 작은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어찌 아프지 않을 수 있겠사옵니까? 듣자 하니 뼈까지 부러졌다던데, 얼마나 오래 요양해야 한답니까? 나중에 걷는 데 지장은 없겠사옵니까?” “이것 보세요. 아주 멀쩡하지 않습니까? 정말로 괜찮습니다. 전장에서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송석석은 태연하게 다리를 살짝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의연한 모습에 최숙심의 눈이 더더욱 슬퍼졌다. “전장에서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늘 있는 일이지요. 이제 다 나았사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남희가
그렇게 궁을 떠난 혜태비는 왕부에 들어서자마자 서우와 함께 곧장 송석석에게로 향했다. 계속 입이 근질거렸던 그녀는 송석석과 대화를 마치자마자 돌아서서는 서우가 멀어지기 바쁘게 오늘 궁에서 들은 이야기와 태후가 내린 엄벌 조치를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모든 것을 전해 들은 송석석은 오히려 혜태비를 위로했다. 후궁에 갇혀 있다 싶이 하는 자들이라 너무나 한가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그녀처럼 거리를 산책하거나 연극을 보러 갈 수도 없기에 자연스레 이야기를 꾸며내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을거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길고 지루한 나날을 어떻게 보내겠냐며 말이다.하지만 혜태비는 여전히 화가 났다."그렇다 해도 함부로 입을 놀리면 안 되는 것이니라. 게다가 듣기 거북할 정도이니 용서할 수 없느니라. 우리 묵이가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도 있다니, 이게 사람이 할 소리냔 말이다! 나이만 먹었지. 기본 예의라곤 없는 사람이니라!" 송석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 이상함을 느꼈을 때 자신이 곧장 액션을 취하지 않았음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그 탕약을 마시기 전에는 이상하다고 느꼈어도 이렇게까지 심각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고, 도리어 황제가 만종문의 일을 알아내려는 줄로만 여겼다. 지금까지도 황제가 무슨 의도로 그러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원체 생각이 많은 그인지라 생각을 꿰뚫었다는 느낌이 왔어도 크게 어긋날 때가 더욱 많았다. 비록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군정 회의에 직접 참여할 수는 없으니, 전선의 소식은 오직 사매에게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가한 나날들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문병하러 찾아왔기 때문이다.아프지 않을 때는 알 수 없던 관계망이, 병환에 있게 되니 얼마나 넓은지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선물 꾸러미와 약재를 한가득 들고 찾아왔다.모두 오래 머물지는 않는다 하였으나 날마다 많은 이들이 찾아오니 일일이 응대해야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