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아는 복잡한 감정을 감추고 시녀를 따라나섰다.이제는 그저 방씨 가문에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방시원의 현재 신분으로는 누군들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의 신분은 모두 가짜였다.정홀에 도착하자 그녀는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단순히 걷는 법을 배우는 데에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후부인은 웃음을 띠며 입을 열었다. “연아, 얼른 두 분께 인사드리거라.” 주아는 오 씨와 방 부인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소녀, 두 분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이분은 방참장이시고 옆에 분은 노부인의 의녀, 시 아가씨이다.” 조금 전 시만자가 들어올 때, 오 씨가 시만자의 신분을 소개하였다.부채로 가린 채 얼굴만 살짝 비추는 정도라 교태는 부릴 수 없어 그저 평범하게 인사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 만자도 그녀를 바라보며 답례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방시원 역시 손을 모아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만자는 그녀의 단정한 외모를 살폈다. 큰 눈과 두툼하지도 얇지도 않은 입술, 매력이 돋보이는 곡선이 아름다웠고 입술 위 작은 점에서 은근한 장난기가 있어 보였다.그녀의 미모는 출중하였지만, 귀족 여성의 품격은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누비고 다닐 정도의 대범함이 깃들어 있었다.그렇다고 야만스럽다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예의범절은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한때 강호에서 생계를 유지하던 기운은 감추기 어려운 것이었고 시만자도 많이 보아왔다.사실, 송석석에게도 규칙에 얽매인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었고 가끔씩 드러났다. 이 점에서 송석석과 많이 닮아있었다.비슷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시만자는 다시 한번 그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이 친숙함, 그녀는 심지어 주아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예의 있는 미세한 동작들이 너무나 익숙했다. 마치 고후부인과 고부진이 닮은 것처럼 말이다. 고후부인은 고부진의 어머니
오 씨가 마음에 든다고 말하려는 그때, 방 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신 것 같아 저희도 마음에 듭니다. 다만 결혼은 중대한 일이니 서두른다고 되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각자 돌아가서 물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가씨께서도 태도를 명확히 하지 않으셨고 오늘 겨우 한 번 뵈었기에 먼저 그녀의 뜻을 물어보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제가 즉시 물어보게 하겠습니다.” 그러자 방 부인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급할 것 없습니다. 만약 사람을 시켜서 물어보게 된다면, 거절하자니 거스르게 될 까 걱정일테고 동의하자니 여자로서의 체면도 있으니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이미 두번정도 만났으니 한 번만 더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부모님도 진성에 계시지 않으니, 그녀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요. 고후부인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만 하는 방 부인에 고후부인도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모두가 귀족 가문이다 보니 혼사 논의에 경솔할 수 없었다.그러나 급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오 씨는 방 부인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말도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서 물어본다고 해도 그녀는 거절하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받아들이는게 나을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마음에 든다고 해서 승낙해버리면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인상을 주게 될 것이니 소녀로서 내킬 리 없다.그러다 훗날 맘에 들기라도 하는 날에 부득이하게 “싫다”고 했던 말을 거두어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시만자는 방천허의 아내를 참으로 존경하였다. 항상 일을 철저하게 처리하기에 이러한 신중함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 씨도 웃으며 거들었다.“맞습니다, 두 사람이 인연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도 도망갈 수 없는 것이지요. 하루 이틀이야 상관없다고 봅니다.” 이렇게 된 이상 고후부인도 마지못해 웃으며 응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이틀 후에 다시 방문하도록 하지
그녀들이 나간 뒤, 시만자는 그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연왕, 회왕과 장공주의 음모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시만자도 어느 정도 보류한 상태에서 말을 꺼냈기에 한의절의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난 방시원이 자신의 조사를 바탕으로 접근했고, 그러자 진실에 거의 가까워져서 그녀들이 장공주 쪽에서부터 손을 쓸 것이라 짐작했다. 연왕의 세력이 연주에 있으니, 진성에는 전적으로 장공주와 회왕에게 의존해야 했다.장공주의 신분으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장공주가 진성에서 그를 위해 여러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장공주가 없었다면 연왕은 오른팔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회왕 또한 깊숙한 곳에 잡입한 상태라 누구와 접촉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방시원은 그제야 왕께서 북명왕부와의 잦은 접촉을 삼가하라 한 이유를 이해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황제가 그들을 경계할 것을 방지한다고 여겼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서로 관계를 맺지 않아야만 그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비록 왕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고, 시만자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치석은 왕께서 남긴 후수라고 굳게 믿었다. 이 사건을 자세히 되새기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고부진도 내가 그 주아를 아내로 맞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지?” “그는 고후부를 끌어들이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만약 실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방 씨 가문은 고후부를 원망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했다. 그럼 나는 이 혼인을 일단 미뤄두겠다. 장공주가 의심할 수 없게, 또한 고부진도 지나치게 안심할 수 없을 만큼 잘 조절하겠다.” 시만자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는 이 문제를 알리러 왔으나 주아를 만날 수 있어 뜻밖이었습니다. 고부진이 말하기를 주아의 본래 신분은 잡기단의 일원이었고 나중에 잡기단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여인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 결국 마적에게 찍혔고 이를 장공주가 구해 주었지
닮았다..정말 너무 닮았다! 얼굴형, 눈썹, 눈, 코, 입술의 그 붉은 점까지, 오늘 본 주아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그녀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건 너무 말이 되지 않았다.심지어 그가 주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냈으니 놀랄만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염 선생과 심청화를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마침 한 폭의 그림 앞에 서 있었다.“이건 어떻소? 만약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면 이렇게 둥글게 생겼을 것이오.” “그리고 이 그림도 마찬가지요. 단지 눈썹과 머리 모양을 바꿨을 뿐이오. 옆에 이 그림속에서는 비교적 힘든 생활을 해 배고프고 따뜻한 옷도 입지 못하여 비쩍 말랐소.” 심청화는 염 선생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시만자에게 손을 흔들었다.“만자 너는 저쪽으로 가 있거라. 방해 된다.” 시만자는 눈앞의 그림을 가리키며 애써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이 사람을 제가 오늘 봤습니다!” 그러자 네 사람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킨 그림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시만자는 침을 삼키며 심청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오늘 저를 따라 고후부에 간 것입니까?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리도 똑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옷 색깔까지 동일합니다.” 한편, 염 선생은 평생 이토록 격렬한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평소의 격조도 지킬 겨를이 없이 성별의 경계도 무시한 채 두 손으로 시만자의 어깨를 꽉 잡고 힘껏 흔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정녕 고후부에서 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았단 말입니까?” 시만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염 선생을 보며 본능적으로 외쳤다. “석석아!” 사여묵이 급히 다가와 염 선생을 떼어냈다. “자네 무례하지 말게.” 시만자의 손을 잡은 송석석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고후부에 갔었어? 누구를 봤단 말이야? 고후부에서 이 그림 속 인물과 닮은 그 사람이 대체
송석석이 먼저 물었다. “그녀가 정말 내 어머니와 닮았어?” “솔직히 말하면 처음 본 순간 익숙한 느낌을 확 받았어. 그때는 무엇 때문이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이 그림들을 보니 알 것 같아. 사형이 분위기까지 너무나 생동하게 그려서 닮았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주아는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상태고, 행동하나 하나에서 귀족 여인의 품격을 지니고 있어. 그래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던 거지.” “아니, 왕비께서 저더러 먼저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염 선생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저려왔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비현실감은 너무나 강렬했다. 그는 한창 심청화와 함께 지금 그녀와 잘 어울릴만한 그림을 추정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사람을 시켜 찾아보기로 했다.그러나 아직 선택하기도 전에 시만자가 만났다고 하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찾기 위해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겪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였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했다.그런데 그녀가 지금 고후부에 있고, 게다가 장공주의 부하라고 하니.. 장공주의 부하들은 결국 비극을 맞이했다고 전해 들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는 자세히 물어보아야 했다. 그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시만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공주가 구출해 줬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주십시오.”시만자는 그런 염 선생이 너무 가여웠다. 빨개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시만자는 송석석의 물음은 뒤로 하고 먼저 염 선생의 질문부터 답하기로 했다.“모두가 알다시피…… 장공주는 송부인과 비슷한 여인들을 모아 고부진의 첩으로 삼고 아이를 낳도록 하고...” 그때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염 선생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는데,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엇이라 했습니까?” “염 선생!” 그러자 시만자가 급히 외쳤다.“진정하세요. 만약 그녀가 고부진
심청화도 그제서야 이해하고 머리를 저었다.“그랬지. 요즘은 만종문에 갇혀 있어 바보가 되었구나.” 송석석은 시만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자는 오늘 고후부에 다녀왔기에 고후부에서도 그녀가 방시원의 의동생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아를 초대할 수 있을 것이지요. 고후부에서 만자가 왕부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더라도 방씨 가문 사람을 불러들이면 고후부인도 동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염 선생은 간절한 눈빛으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시 아가씨,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의리가 하늘을 찌르는 시만자기에 그녀는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지 그녀 앞에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반응을 살펴볼 수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염 선생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사여묵이 힘껏 눌러 앉혔다. “앉아서 말하거라.” 하지만 염 선생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게 아니.…”그러자 사여묵이 화난 목소리로 가차 없이 그의 말을 잘랐다.“앉으라 하였다!”어쩔 수 없었던 염 선생이 의도를 밝혔다.“그녀의 어린 시절 물건 하나를 가져가려 합니다. 시 아가씨께서 그것을 챙기시면 좋을 듯합니다.” 사여묵도 내민 손을 거두고 허락했다.“알겠다.”자리에서 일어선 염 선생은 먼저 시만자에게 사과를 건넸다. “방금 너무 흥분하여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너무 놀랐던 탓입니다.” 서재에 주아의 그림이 걸려 있어 너무 놀란 탓에 견문이 짧았던 그녀는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지금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다시 한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건을 가지러 가겠습니다.” 염 선생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잠시 멈춰 허리를 굽히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다시 허리를 편 그는 천천
염 선생은 토끼 인형 하나를 가져왔다. 보기에도 꽤 세월이 지나 보였고 거칠어져 한쪽 귀가 부러진 상태였다. 밖에서 산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를 잃어버린 해인 추석즈음에 제가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든 토끼 인형입니다. 그해에 그녀가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에게 감금되어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하인에게 토끼 인형을 사다 주라고 하였으나 아버지께서 이를 금지하시여 그녀를 벌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몰래 하나 만들었고 집안의 부엌에서 구워냈고 구운 후에 색을 입혔지요. 지금은 색이 다 벗겨졌네요. 그녀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하며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렇게 귀가 하나가 부러진 것입니다.” 염 선생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이 토끼 인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싫어했다가 더 맞은 표현이겠지요. 너무 싫었던 만큼 울기까지 했으니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거칠고 색이 벗겨져 귀조차 부러진 토끼 인형을 바라보던 시만자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이리도 못난 토끼 인형을 선물한다면 저도 울어버릴 것입니다. 이생에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지요.”“그렇지요. 물건은 매우 아꼈거나 싫어해야만 깊이 기억되는 법이니까요.” 염 선생은 아쉬운 손길로 토끼 인형을 건넸다.“어린 시절에 가지고 놀던 물건들이 몇 가지 더 있지만 모두 너무 평범해서 보통 집안에서 대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유일하게 이것만이 세상에 하나뿐이지요.” “하나뿐? 저라면 더 큰 소리로 울어버릴 것입니다.” 시만자는 눈살을 찡그리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 더 이상 이보다 못 날 수는 없었다.염 선생은 상처받은 듯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저도 배운 적 없이 처음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뒷면은 다 타버렸군요.” 시만자는 이리저리 돌려보며 덧붙였다.“사실 전체가 다 검은색이였는데, 이 색들은 나중에 입힌 것이겠지요?” 그러자 염 선생이 머리를 긁적였다.“계속 벗겨져서 색을
염 선생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가득했다.“여동생의 일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밤낮으로 우셨고, 아버지는 관직을 그만두고 하인 두 명과 함께 여동생을 찾아 나섰지요. 2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는 정도였습니다. 집안은 오로지 조부의 지원으로 버텼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는 여동생을 찾고 있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야 돌아오셨지요. 그때는 여동생을 찾은 지 1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포기하셨습니다.” 듣고 있는 모든 이의 마음이 아팠다. 자식을 잃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여동생이 사라진 날부터, 기쁨과는 완전히 인연이 없게 되었지요. 2년 전부터 조부와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져 진성으로 모셨습니다. 아버지는 운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으셨지요. 아버지께서는 희망을 잃지 않으시며 언젠가 여동생이 자신의 집을 기억하고 돌아올 것이라며 누군가는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저 또한 포기하지 않았고 왕부의 사람들을 빌려 여동생을 찾으러 다녔지요. 왕부를 위해 힘쓰는 전제는 왕께서 사람을 선뜻 내어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찾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고 소용이 없을지라도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하고 나면 마음이 좀 나아지더군요.” 심청화는 의자에 앉은 채 어느새 잠이 들었다. 메산에서 급히 달려와 차도 한 모금 마실 여유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니 피곤했을 것이다.그러나 흐릿하게라도 염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비참한 일들을 많이 겪어지만, 다행히 무감각해지진 않았다. 그는 이 여인이 대충 여동생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 중에 반드시 현재의 염희진에 가까운 그림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이야기를 듣고 난 시만자는 눈물을 닦으며 진정하고는, 사람을 시켜 방 부인더러 고후부에 초대장을 보내길 요청했다. 내일 수연과 함께 왕강루에서 차를 마시며 경치를 즐기고 싶다는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