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이 나간 뒤, 시만자는 그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연왕, 회왕과 장공주의 음모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시만자도 어느 정도 보류한 상태에서 말을 꺼냈기에 한의절의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난 방시원이 자신의 조사를 바탕으로 접근했고, 그러자 진실에 거의 가까워져서 그녀들이 장공주 쪽에서부터 손을 쓸 것이라 짐작했다. 연왕의 세력이 연주에 있으니, 진성에는 전적으로 장공주와 회왕에게 의존해야 했다.장공주의 신분으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고 장공주가 진성에서 그를 위해 여러 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장공주가 없었다면 연왕은 오른팔을 잃게 되었을 것이다. 회왕 또한 깊숙한 곳에 잡입한 상태라 누구와 접촉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방시원은 그제야 왕께서 북명왕부와의 잦은 접촉을 삼가하라 한 이유를 이해하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황제가 그들을 경계할 것을 방지한다고 여겼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니 서로 관계를 맺지 않아야만 그를 위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비록 왕께서 직접 말씀하시지 않았고, 시만자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치석은 왕께서 남긴 후수라고 굳게 믿었다. 이 사건을 자세히 되새기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사실 고부진도 내가 그 주아를 아내로 맞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지?” “그는 고후부를 끌어들이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만약 실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방 씨 가문은 고후부를 원망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자신의 가문을 위해 고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했다. 그럼 나는 이 혼인을 일단 미뤄두겠다. 장공주가 의심할 수 없게, 또한 고부진도 지나치게 안심할 수 없을 만큼 잘 조절하겠다.” 시만자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저는 이 문제를 알리러 왔으나 주아를 만날 수 있어 뜻밖이었습니다. 고부진이 말하기를 주아의 본래 신분은 잡기단의 일원이었고 나중에 잡기단이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해체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여인은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다 결국 마적에게 찍혔고 이를 장공주가 구해 주었지
닮았다..정말 너무 닮았다! 얼굴형, 눈썹, 눈, 코, 입술의 그 붉은 점까지, 오늘 본 주아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다. 그녀는 순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았다. 이건 너무 말이 되지 않았다.심지어 그가 주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냈으니 놀랄만도 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염 선생과 심청화를 바라보았다. 그들 또한 마침 한 폭의 그림 앞에 서 있었다.“이건 어떻소? 만약 잘 살고 있는 것이라면 이렇게 둥글게 생겼을 것이오.” “그리고 이 그림도 마찬가지요. 단지 눈썹과 머리 모양을 바꿨을 뿐이오. 옆에 이 그림속에서는 비교적 힘든 생활을 해 배고프고 따뜻한 옷도 입지 못하여 비쩍 말랐소.” 심청화는 염 선생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며 시만자에게 손을 흔들었다.“만자 너는 저쪽으로 가 있거라. 방해 된다.” 시만자는 눈앞의 그림을 가리키며 애써 자신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이 사람을 제가 오늘 봤습니다!” 그러자 네 사람의 시선이 그녀가 가리킨 그림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시만자는 침을 삼키며 심청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동공은 흔들리고 있었다. “혹시 오늘 저를 따라 고후부에 간 것입니까? 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리도 똑같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옷 색깔까지 동일합니다.” 한편, 염 선생은 평생 이토록 격렬한 감정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는 평소의 격조도 지킬 겨를이 없이 성별의 경계도 무시한 채 두 손으로 시만자의 어깨를 꽉 잡고 힘껏 흔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정녕 고후부에서 이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보았단 말입니까?” 시만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고,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염 선생을 보며 본능적으로 외쳤다. “석석아!” 사여묵이 급히 다가와 염 선생을 떼어냈다. “자네 무례하지 말게.” 시만자의 손을 잡은 송석석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고후부에 갔었어? 누구를 봤단 말이야? 고후부에서 이 그림 속 인물과 닮은 그 사람이 대체
송석석이 먼저 물었다. “그녀가 정말 내 어머니와 닮았어?” “솔직히 말하면 처음 본 순간 익숙한 느낌을 확 받았어. 그때는 무엇 때문이지 알 수 없었는데.. 지금 이 그림들을 보니 알 것 같아. 사형이 분위기까지 너무나 생동하게 그려서 닮았다는 걸 알게 된 거야. 주아는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상태고, 행동하나 하나에서 귀족 여인의 품격을 지니고 있어. 그래서 비슷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던 거지.” “아니, 왕비께서 저더러 먼저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염 선생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저려왔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비현실감은 너무나 강렬했다. 그는 한창 심청화와 함께 지금 그녀와 잘 어울릴만한 그림을 추정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사람을 시켜 찾아보기로 했다.그러나 아직 선택하기도 전에 시만자가 만났다고 하니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를 찾기 위해 수많은 위험과 어려움을 겪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였다. 상상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것은 당연했다.그런데 그녀가 지금 고후부에 있고, 게다가 장공주의 부하라고 하니.. 장공주의 부하들은 결국 비극을 맞이했다고 전해 들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그는 자세히 물어보아야 했다. 그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시만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장공주가 구출해 줬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주십시오.”시만자는 그런 염 선생이 너무 가여웠다. 빨개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시만자는 송석석의 물음은 뒤로 하고 먼저 염 선생의 질문부터 답하기로 했다.“모두가 알다시피…… 장공주는 송부인과 비슷한 여인들을 모아 고부진의 첩으로 삼고 아이를 낳도록 하고...” 그때 갑자기 “쿵!” 소리와 함께 염 선생이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는데, 얼굴은 이미 창백해져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무엇이라 했습니까?” “염 선생!” 그러자 시만자가 급히 외쳤다.“진정하세요. 만약 그녀가 고부진
심청화도 그제서야 이해하고 머리를 저었다.“그랬지. 요즘은 만종문에 갇혀 있어 바보가 되었구나.” 송석석은 시만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만자는 오늘 고후부에 다녀왔기에 고후부에서도 그녀가 방시원의 의동생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아를 초대할 수 있을 것이지요. 고후부에서 만자가 왕부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더라도 방씨 가문 사람을 불러들이면 고후부인도 동의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염 선생은 간절한 눈빛으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시 아가씨,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의리가 하늘을 찌르는 시만자기에 그녀는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알겠습니다. 그럼,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야지 그녀 앞에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입니다. 대화를 하면서 반응을 살펴볼 수 있으니,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염 선생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사여묵이 힘껏 눌러 앉혔다. “앉아서 말하거라.” 하지만 염 선생은 다시 몸을 일으키려했다. “그게 아니.…”그러자 사여묵이 화난 목소리로 가차 없이 그의 말을 잘랐다.“앉으라 하였다!”어쩔 수 없었던 염 선생이 의도를 밝혔다.“그녀의 어린 시절 물건 하나를 가져가려 합니다. 시 아가씨께서 그것을 챙기시면 좋을 듯합니다.” 사여묵도 내민 손을 거두고 허락했다.“알겠다.”자리에서 일어선 염 선생은 먼저 시만자에게 사과를 건넸다. “방금 너무 흥분하여 아가씨께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습니다. 저도 너무 놀랐던 탓입니다.” 서재에 주아의 그림이 걸려 있어 너무 놀란 탓에 견문이 짧았던 그녀는 부모님과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지금의 모습을 추론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다시 한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건을 가지러 가겠습니다.” 염 선생은 비틀거리며 밖으로 걸어 나가다가 잠시 멈춰 허리를 굽히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다시 허리를 편 그는 천천
염 선생은 토끼 인형 하나를 가져왔다. 보기에도 꽤 세월이 지나 보였고 거칠어져 한쪽 귀가 부러진 상태였다. 밖에서 산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를 잃어버린 해인 추석즈음에 제가 그녀를 위해 직접 만든 토끼 인형입니다. 그해에 그녀가 잘못을 저질러 어머니에게 감금되어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하인에게 토끼 인형을 사다 주라고 하였으나 아버지께서 이를 금지하시여 그녀를 벌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몰래 하나 만들었고 집안의 부엌에서 구워냈고 구운 후에 색을 입혔지요. 지금은 색이 다 벗겨졌네요. 그녀는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하며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렇게 귀가 하나가 부러진 것입니다.” 염 선생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이 토끼 인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싫어했다가 더 맞은 표현이겠지요. 너무 싫었던 만큼 울기까지 했으니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거칠고 색이 벗겨져 귀조차 부러진 토끼 인형을 바라보던 시만자가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이리도 못난 토끼 인형을 선물한다면 저도 울어버릴 것입니다. 이생에서 절대로 잊지 못할 것이지요.”“그렇지요. 물건은 매우 아꼈거나 싫어해야만 깊이 기억되는 법이니까요.” 염 선생은 아쉬운 손길로 토끼 인형을 건넸다.“어린 시절에 가지고 놀던 물건들이 몇 가지 더 있지만 모두 너무 평범해서 보통 집안에서 대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유일하게 이것만이 세상에 하나뿐이지요.” “하나뿐? 저라면 더 큰 소리로 울어버릴 것입니다.” 시만자는 눈살을 찡그리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의 이목구비는 이미 흐려질 대로 흐려져 있었다. 더 이상 이보다 못 날 수는 없었다.염 선생은 상처받은 듯 그녀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시지요. 저도 배운 적 없이 처음 만든 것이지 않습니까?” “뒷면은 다 타버렸군요.” 시만자는 이리저리 돌려보며 덧붙였다.“사실 전체가 다 검은색이였는데, 이 색들은 나중에 입힌 것이겠지요?” 그러자 염 선생이 머리를 긁적였다.“계속 벗겨져서 색을
염 선생의 목소리는 슬픔으로 가득했다.“여동생의 일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밤낮으로 우셨고, 아버지는 관직을 그만두고 하인 두 명과 함께 여동생을 찾아 나섰지요. 2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는 정도였습니다. 집안은 오로지 조부의 지원으로 버텼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도 아버지는 여동생을 찾고 있었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해에야 돌아오셨지요. 그때는 여동생을 찾은 지 1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아버지는 결국 포기하셨습니다.” 듣고 있는 모든 이의 마음이 아팠다. 자식을 잃는 고통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여동생이 사라진 날부터, 기쁨과는 완전히 인연이 없게 되었지요. 2년 전부터 조부와 어머니의 건강이 나빠져 진성으로 모셨습니다. 아버지는 운현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으셨지요. 아버지께서는 희망을 잃지 않으시며 언젠가 여동생이 자신의 집을 기억하고 돌아올 것이라며 누군가는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저 또한 포기하지 않았고 왕부의 사람들을 빌려 여동생을 찾으러 다녔지요. 왕부를 위해 힘쓰는 전제는 왕께서 사람을 선뜻 내어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찾지 않으면 마음이 아프고 소용이 없을지라도 그녀를 위해 무언가 하고 나면 마음이 좀 나아지더군요.” 심청화는 의자에 앉은 채 어느새 잠이 들었다. 메산에서 급히 달려와 차도 한 모금 마실 여유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니 피곤했을 것이다.그러나 흐릿하게라도 염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비참한 일들을 많이 겪어지만, 다행히 무감각해지진 않았다. 그는 이 여인이 대충 여동생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 중에 반드시 현재의 염희진에 가까운 그림이 있을 것이라 믿었기에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이야기를 듣고 난 시만자는 눈물을 닦으며 진정하고는, 사람을 시켜 방 부인더러 고후부에 초대장을 보내길 요청했다. 내일 수연과 함께 왕강루에서 차를 마시며 경치를 즐기고 싶다는
왕강루의 또 다른 이름은 왕경루이며, 진성 민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이다.이곳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북쪽의 남강 항구가 보이면서 진성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자태가 위풍당당하고 화려하여 절경이 따로 없다.하지만 왕경루의 가장 높은 층에 있는 아간에 오르기 위해서는 만만치 않았다. 차 값만 해도 오냥이 필요하고, 음식을 주문하면 보통 몇십 냥이 드는 경우도 있으며, 고가의 음식을 주문하면 백 냥, 심지어 천 냥이 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왕경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이는 거의 드물었고 그저 매일 돈을 쓸어 담아 부유하다는 정도 밖에 모른다. 아는 이들도 함부로 떠들지 않았고 메산의 그분 관계가 있는 이도 오늘날 진성에는 많지 않았다.시만자는 방 부인과 함께 먼저 도착하였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재주가 있어 방 부인에게도 올케라 부르며 곧잘 따랐고 방 부인 또한 그녀를 매우 귀여워하였다. 몇 번이고 그녀와 같은 시누이가 있다는 것이 삼생삼세에 걸쳐 쌓은 복이라며 기뻐하였다.그들이 왕강루에 도착했을 때, 주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시만자는 화려한 환경에 매우 만족하며 주위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바빴다.“의모와 서약할 때 여기서 상을 차려야 겠습니다.”그러자 방 부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얼마나 많이 들겠느냐? 차라리 집에서 연회를 차리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네 올케가 연회를 마련하는 솜씨는 이웃들이 모두 아는 바인데 그 기회를 주지 않을 셈인가?” 시만자가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저는 단지 고생할까 봐 걱정되어 감히 요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천허 오라버니께서 노여워하실까 봐 두렵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말이다..” 방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고 그리움이 솟구치기 시작했다.“지금은 얼굴조차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전쟁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는데 언제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시만자가 위로했다.“방심할 수 없습니다. 그곳은 여전히 혼란스러워 중병이 필요하지요
왕경루의 간식은 종류가 다양하고 정교하며 맛 역시 뛰어났다. 평범한 대추 케이크조차 달콤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아 향긋한 느낌을 주었다. 시만자는 한입 베어 물고 웃으며 말했다. “내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것이 이와 같은 단 케이크였습니다. 집에 상주하는 요리사는 만들지 못해 오라버니께서 몰래 나가 사다 주었지요. 그래서 대추나무 아래에 숨어 함께 몰래 케이크를 먹곤 했습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스며들어 추억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종종 이렇게 맑은 가을날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때의 구월은 지금 진성과는 다르게 쌀쌀하지 않았습니다. 때론 무척 덥기도 하였지요. 햇살이 대추나무 틈새로 내려앉아 오라버니 얼굴에도 햇살 가득하였지요.” 그녀는 말을 이어가며 옆에 있는 토끼 장식을 살짝 쓰다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오라버니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아는 멍하니 그녀가 언급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시선은 여전히 그 토끼에 머물러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이 불편하게 조여오는 느낌에 매우 괴롭기만 하였다.“이것은 토끼입니까?”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그렇습니다. 이는 오라버니가 저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해 제가 대추나무에서 떨어져 어머니께서 저를 벌하여 방에 가두셨지요. 추석이었지만 밖에 나가 등불을 감상할 수 없어 오라버니가 직접 이 토끼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말 못나지 않았습니까?그때는 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망가뜨렸지요. 이 귀 부분은 바로 그때 부딪혀서 부러진 것입니다.” 그녀는 토끼를 주아에게 내밀었다.“보시겠습니까?” 주아는 자신 앞에 다가온, 정말 못난 토끼 인형을 바라보자 귀가 먹먹해졌다.“너는 처자인데 어찌 나무를 타고 있냔 말이다! 누가 가르쳤느냐? 결국에는 다쳤구나! 울음을 그치지 않겠느냐? 그만 그치지 못할까? 추석에는 함께 등불을 보러 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울지 말거라.
연왕은 그제서야 자신이 정말로 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입술을 덜덜 떨었고,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당황함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밀려와, 역대 왕조들 중 역정의 후과를 떠올리니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이전에도 비록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기껏해야 자신의 목숨을 끝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포로가 되어 비녀까지 빼앗겨 산발이 된 채로 이곳에 갇혀 버렸다. 세 면이 창살이고 한쪽만 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단했지만 머리를 박는다고 해도 죽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감옥 밖에는 사람이 지키고 있어, 박는다고 해도 아프기만 할 뿐 고생할 것이 뻔했다. 그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지? 설령 실패하더라도 내 곁엔 생사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야 하건만, 지금은 곁에 사람은 있지만 한마음이 아니다.’ 그러고는 분노와 증오가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가 날 배신하고 좋은 결과가 있을 줄 알았느냐? 결국은 나와 함께 갇힌 죄수가 되지 않았느냐? 사청엄이 너희를 구해준다더냐?” 죽음이 두려운 회왕은 그 말을 듣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상의 곁으로 가서 그의 소매를 덥석 잡았다. “대체 무슨 상황이오? 그들이 우릴 구하러 오긴 온 단 말이오…? 말 좀 해 보오. 죽더라고 이런 건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자 무상이 거칠고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우릴 구하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추몽과 하상지가 모두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성 밖에서 매복 공격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보름 동안 포위되어 소식이 늦으니 아마도 목종욱은 일찍 각처의 대란을 평정하고 매복해 있었을 것입니다.”무상의 말을 들은 회왕의 눈빛은 절망으로 변했다. ‘어쩐지 그들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더라니, 지금 보니 목종욱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는 거지? 애초에 사청엄의
야외에서의 전쟁 또한 싸우면서 물러설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기만 하면, 상황은 쉽게 되돌릴 수 있었다.그래서 방시원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길 때까지 그들이 도망갈 수 없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한편, 연주 성내에서 무상도 붙잡혀 연왕 등의 사람들과 함께 갇혔다.그 모습에 회왕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무상 선생, 당신은 대체 왜 잡힌 것이오? 추몽이 전패했소?”무상의 옷은 엉망진창이 됐고 온몸에 상처가 났으며 입가의 고인 피는 굳어 낭패하기 그지없었다.연왕은 아직도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밤새도록 왜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지 걱정만 했다. 그러고는 추몽을 바랄 수는 없는 것 같으니,하상지라도 오길 바랐다. 왜냐하면 하상지는 반드시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상까지 갇힌 것을 보자,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그는 이전에 자신의 몸으로 적을 성으로 유인하려고 할 때 실패할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반면, 회왕은 아니었다. 그는 줄곧 추몽과 하상지가 도착하기만 하면 경군을 모조리 섬멸할 수 있다고 했기에, 무상이 갇히는 것을 보고 당황해하며 말했다.“어서 말해보시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추몽이 전패한 것이오, 아니면 오지 않는 것이오?”무상은 입을 오므리고 있었는데, 그의 눈 밑에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기색이 띠었다.그는 결국 두괴산으로 도망치기로 결정했고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곧장 진성으로 달려가 영군왕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두괴산은 이미 경군에 의해 봉쇄되어 도망칠 수 없었기에, 무상은 그렇게 그들에게 체포가 된 것이었다. 그러자 회왕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말을 안 하는 걸 보니, 정말 추몽이 안 왔다는 말이오?! 추몽이 왔다면 하룻밤 만에 전패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린 그들에게 속은 것이오… 무상, 모두 당신 때문이오. 당신이 영군왕에게 의탁하고 셋째 형을 배신하라고 하지 않았소? 우린 당신과 영군왕에게 속은 것이오!
김수덕도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분명히 추몽 선생이 직접 말씀하셨는데 말이오.” 그러자 무상은 점점 두려움이 앞섰다. 추상이 평소에 시간을 정하면 일찍 오면 왔지 늦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도중에 매복이라도 당했단 말이오? 그럴 리가 없소. 전에 조사한 바로는 목종욱의 병마가 분리되어 비적을 토벌하고 있다고 했소. 지금쯤 이미 월지로 갔으니 돌아올 리가 없소.” “만약 병마가 도중에 가로막았다면 추몽 선생은 바로 사람을 보내 통지할 것이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들에게 정탐꾼이 있는 것 같소.” 김수덕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공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무상 선생, 이제 어떡한 단 말이오? 우리는 경군을 이길 수 없소.” 무상은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 진정하고 말했다. “그러니 지금 우린 탈출하여 추몽과 합류할 수밖에 없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연주는 함락될 것이오.” 김수덕이 조급해져서 말했다. “가족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탈출한 단 말이오? 그들이 성문을 막고 있는 탓에 두괴산으로 밖에 도망갈 수 없소. 노약자와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대체 어찌 두괴산으로 도망간단 말이오?” 그러자 무상이 연황실의 하인과 호위를 지휘하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소. 일단 우리 먼저 탈출하고 다시 계획을 짜봅시다. 방시원은 평민을 죽이지 않으니 가족들은 무사할 것이오.” 김수덕이 급히 뒤뜰로 달려갔는데, 측비 김 씨는 이미 소식을 들은듯 짐을 싸고 있었다. 그녀는 무상의 분석을 듣지 않아도 지금 도망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왕의 아들 딸들 또한 모두 놀라서 비싼 물건을 정리하려고 했으나 하인들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는 장신구를 모두 빼앗아 뒷문으로 도망쳐 버렸다. 김수덕이 검을 들고 연달아 몇 명을 죽이고 나서야 하인들이 더 이상 날뛰지 않았다. 측비 김 씨가 오라버니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오라버니, 얼른 사람을 파견해 우리가 도망가는 것을 보호해 주
두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 무소위는 이미 무림인들을 데리고 영주에 도착했다. 시간까지 모두 잘 맞춰져 있었는데 이때쯤이면 영주에 일을 결정지을 만한 사람이 없었고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은 거의 출동하여 천 명의 사람과 관아의 관리만이 남아서 영주를 지키고 있었다. 무소위는 영패를 들고 곧장 지부의 관아로 가서 지부를 파면하고 관아를 차지했다. 그와 동시에 시 씨 가문의 가주는 직접 여러 표국과 상회의 호위들을 이끌고 왔다. 노 휘왕의 영패가 있어 영군황실이 모두 봉쇄되었기 때문에 영주는 가장 공략하기 좋은 곳이었다. 더불어 영군황실에는 더 이상 노휘왕의 사람은 없었고 예전의 사람들은 모두 마을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무소위는 관아를 점거한 후, 사람을 이끌고 영군황실로 가서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고 고문 끝에 그들이 연락하는 암호를 모두 알아냈다. 게다가 추몽이 기르던 전서구까지 모두 챙겼다. 전서구는 정해진 노선이 있었는데 그중 몇 마리는 특별히 영군왕에게 연락하는 데만 사용되었다. 추몽이 대승하면 전서구의 다리에 붉은 비단을 묶고 실패하면 전서구의 다리에 흰색 비단을 묶었다. 만약 전황이 교착되어 승부를 가리기 어렵다면 전서구의 다리에 아무것도 묶지 않고 보내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그리고 각종 은밀한 언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전서구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심지어, 참모들이 제출한 암어록에는 암어의 뜻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돼지, 개, 소, 말, 늑대, 호랑이, 뱀, 여우 등의 호칭이 있었는데 참모들의 진술에 따르면 모두 지정된 상대가 있다고 했다. 돼지는 연왕, 개는 회왕, 뱀은 숙청제, 늑대는 송석석, 호랑이는 사여묵, 그리고 용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중 승상과 육부상서는 그들만의 호칭이 있다고 했다.그리고 영군왕과 역모를 꾸민 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도 찾아냈는데 그중 많은 단어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시 씨 가주와의 서신 왕래는 명확했는데 생명을 구해준 은혜로 그
무상이 직접 보내 연왕과 회왕은 함께 성문에서 압송되었다. 회왕은 인수할 때 무상이 자신을 풀어줄 줄 알고 있엇는데, 경군들이 그들을 억류할 때까지 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며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안심하라는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도 그를 묶어 놓고, 나중에 같이 나간다고 했지만 결국엔 셋째 형만 넘겨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무상이 자신까지 경군에게 넘기는 것을 본 회왕은 그가 자신까지 진성으로 보내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자 당황해서 크게 소리쳤다. “나는 무죄요! 내가 연왕을 체포한 것이니 난 놔주오!” 그러자 방시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어리석긴.” “무상…!” 회왕의 얼음처럼 차가워진 눈빛으로 무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나운 표정에서 이내 애원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무상 선생, 당신은 내가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얼른 방 장군에게 말해주시오!” 하지만 무상은 눈을 내리깔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황제폐하께서 유무죄를 잘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저희 황제폐하’라는 말을 힘 있게 말하자 회왕은 일말의 희망을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때가 되어 추몽이 병마를 이끌고 쳐들어오면 경군의 목숨은 모두 연주에 남게 될 테니 난 당연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무상이 왜 미리 말하지 않는 것이지?’ 그는 마음속으로 걱정하면서도,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어. 그들이 정말로 날 버린 것이라면 직접 죽이겠지 왜 방시원의 손에 넣겠어? 내가 추몽이 병마를 이끌고 성을 포위해서 습격할 것을 말할까 봐 두렵지도 않나?’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무상을 바라보자, 무상이 그를 향해 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되었든 경군은 연주를 떠
연왕은 이번 협상이 단지 허위 계략일 뿐이며, 자신이 결국 방시원에게 넘겨져 그를 성 안으로 유인하는 미끼로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을 역시나 몰랐다.방시원이 협상에 동의하며 단독으로 이동했고, 무상 또한 단독으로 이동했다. 양측 뒤에는 호위병이 따랐으나 모두 열 장 떨어진 거리에서 머물렀다.무상은 자신과 연주의 대다수 관리들이 연왕의 반란 계획을 알지 못했으며, 설령 알았던 사람들이라도 연왕의 세력에 눌려 감히 말하지 못했음을 설명했다.그러나 방시원은 이를 믿지 않았다. 방시원은 그들이 모두 오래전부터 음모를 꾸민 자들이라고 단언했었기에, 그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으며, 이는 무상에게 그가 영군왕의 배후와 비밀 병력의 존재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는 확신을 줄 수 있었다.무상은 그의 태도를 통해 확인하려 했을 뿐 아니라 추몽을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이 신뢰와 존경은 그가 시씨 가문을 설득했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무상과 연왕은 오랫동안 시간 시씨 가문을 공략했었지만, 시철진은 결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었다. 그들이 처음으로 연왕을 배신하기로 결정한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영군왕의 실력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무상은 참모이니 자연히 승산 있는 자를 따라야 했다. 연왕은 이미 몰락하였으니 그를 따라 계속 반란을 도모한다면 죽음뿐이었다.협상 과정 자체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았다. 양측 모두의 목적은 성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단지 각자 계산이 다를 뿐이었다.무상은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보며 생각했다. 추몽이 요구한 대로 해가 지기 전, 방시원의 군대를 성 안으로 유인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진 남짓이었다.그래서 협상은 오래 지연되지 않았다. 무상은 연왕을 그들에게 넘기기로 동의했지만, 방시원에게 반드시 약속을 지켜 진성으로 돌아간 뒤 관대한 처분을 황제께 청할 것을 요구했다.사실 연왕을 넘기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래야 방시원의 경계를 느슨하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수장이 없으면 방시원은 그들이 더는 큰일을 벌일 수 없다고 생각할
방시원은 이미 첩자의 보고를 받아 몇몇 신비한 부대가 영주 밖에서 합류하여 연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보다 더 일찍, 그는 염선생으로부터 받은 서신을 통해 연왕이 항복하는 척하며 군대를 성 안으로 유인한 뒤, 안팎에서 협공을 가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았었기에, 연왕이 단지 영군왕의 한 수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았다.방시원은 오랫동안 정보 첩자로 일한 경험이 있어, 이런 두세 개의 정보만으로도 실제 상황을 분석하고 전략을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한편, 노홍과 제방은 원래 진성에 남아 있어야 했지만, 어제 갑작스럽게 연주 밖에서 그와 합류하게 되었는데, 방시원은 처음에 진성이 가장 위험할 때에 왜 이 둘을 보낸 건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송대감의 사부이자 만종문의 문주가 직접 진성에 왔고, 심지어 많은 무림인을 데리고 내려와 지원 중이라는 제방의 설명을 듣고 이내 안심했다.일반적으로 무림인은 조정의 다툼에 관여하지 않지만, 만약 반란이 발생하면 정의를 지키기 위해 산에서 내려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방시원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만종문의 문주 임양운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략과 용맹을 겸비하면서 묵가의 기술에 능했고, 특히나 기계 무기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육안통 또한 그의 손에 의해 개량되었으니 말이다.그가 진성을 지키고 있으니 영군왕은 결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이틀 후, 정말로 염선생의 말대로 연주 성벽 위에서 누군가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방 장군, 우리는 이미 역적 연왕과 사청엽, 회왕과 사청엄을 붙잡았습니다. 많은 관리와 병사들은 그들에게 미혹당했을 뿐 반역할 의도는 없었으며, 지금은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공적을 세움으로써 죄를 보상하려하니 방 장군께서는 성에 들어와 상의해 주시길 바랍니다.”소리치는 사람은 김수덕으로, 측비 김씨의 오라버니였다.방시원은 천리경을 들어 확인해보았다. 김수덕 옆에는 무상이 서 있었고, 연왕과 회왕은 온몸이 결박된 채 대검이 그들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
밤이 되자, 김수덕이 첩자를 데리고 돌아와 급히 보고했다."왕야, 하상지가 이미 흩어져 있던 병력을 모두 소집하였으며, 시씨 가문의 군마 500필을 얻었습니다. 지금 돌아오는 중으로, 걸음 속도로 보아 사흘 뒤 도착할 것입니다."연왕은 벌떡 일어나며 크게 기뻐했다."정말인가?!""정말 확실합니다! 첩자가 바로 문밖에 있으니 왕야께서 직접 물어보십시오 .""어서 들여 라!"연왕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병력을 모두 소집하게 되었지만, 시씨 가문에서 군마 500필이 나온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만자의 사건 이후로 시씨 가문과는와는 이미 갈라선 사이였는데 말이다.그때 첩자가 들어와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왕야, 하대감께서 소인을 보내 보고하도록 하셨습니다. 사병은 모두 소집되었으며, 영군왕의 참모인 추선생도 5천 병력과 500필의 군마를 이끌고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단, 영군왕의 요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노 휘왕을 구출하는 것입니다."연왕은 영군왕이라는 말을 듣고 잠시 멍해졌다. 그는 이전에도 영군왕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그의 태도는 모호하기만 했고, 도저히 속내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이미 영군왕을 배제한 상태였다.이번에는 오히려 처음에는 동조했던 사람들이 모두 발을 뺀 상황에서 영군왕이 나서준 것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의 아버지인 노 휘왕은 진성에 있었지만, 실상은 인질로 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청엄이 화가 난 것은 당연했다.그는 사청엄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학문이 깊고 의젓한 군자였고, 효심이 깊어 그의 효성은 강남 전역에 알려져 있었다.노 휘왕이 홀로 진성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사청엄도 어쩔 수 없이 이쪽으로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연왕은 즉시 사람들을 소집하여 사흘 뒤의 계획을 논의했다.그는 거짓 항복 계략에 동의했다.무상이 처음 이 계략을 제안했을 때는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이제 안팎으로 협공만 할 수 있다면 방시원을 속여 성 안으로 유인해 잡는 것이 가능할 것 같
노 휘왕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뒤따라갔다.의원이 진찰한 결과, 정삼숙의 두 다리는 부러졌고 이가 세 개나 빠졌으며 얼굴의 여러 뼈에도 골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노 휘왕을 향해 웃으려 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몰골이었지만 끝내 웃음을 잃지 않으며, 게속 괜찮다고 했다.노 휘왕은 순간 마음이 아파져 고개를 돌렸다. 평생을 함께한 사람이 이런 참혹한 꼴을 당했으니,그는 분노하면서도 동시에 무력감을 느꼈다.그의 영패는 이미 영주에 있을 때 하나 더 만들어 두었었다. 이는 혹시 누군가가 후에 영패를 훔쳐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다른 영패를 사용해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쓰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한편, 수로 작업의 혼란은 빠르게 진정되었고, 김창명은 관리 소홀의 책임으로 체포되어 황실 감옥에 갇힌 탓에 이후 수로 작업은 선평후가 직접 감독하게 되었다.하도사의 다른 관리들도 모두 직무 태만의 문제로 교체되었다.이렇게 모두 겉으로는 김창명이 수로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듯 보였지만, 숙청제와 송석석은 실제로 이미 내부에 또 다른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김창명이 죽는다고 해서 큰 영향은 없을 것이었기에 사청엄은 조금도 급하지 않았다. 그는 추몽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만 있었다.연주에서의 연왕은 이미 마음이 불안해진듯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방시원이 성을 포위한 지 2주나 넘었지만 아무런 움직임이나, 공격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기에더욱 초조해진 것이다. 성을 포위했다는 말은 외부의 소식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또한, 각지에 퍼뜨린 도적들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목종욱이 방시원과 합류했는지, 그리고 진성의 상황이 어떤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포위된 상황에서도 소식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었다. 단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산길을 타고 밀림을 넘어가면 연주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즉, 만약 소식이 도착했다면 그것은 열흘 전의 상황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