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루의 간식은 종류가 다양하고 정교하며 맛 역시 뛰어났다. 평범한 대추 케이크조차 달콤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아 향긋한 느낌을 주었다. 시만자는 한입 베어 물고 웃으며 말했다. “내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것이 이와 같은 단 케이크였습니다. 집에 상주하는 요리사는 만들지 못해 오라버니께서 몰래 나가 사다 주었지요. 그래서 대추나무 아래에 숨어 함께 몰래 케이크를 먹곤 했습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스며들어 추억으로 가득한 그녀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종종 이렇게 맑은 가을날도 있었지요. 그러나 그때의 구월은 지금 진성과는 다르게 쌀쌀하지 않았습니다. 때론 무척 덥기도 하였지요. 햇살이 대추나무 틈새로 내려앉아 오라버니 얼굴에도 햇살 가득하였지요.” 그녀는 말을 이어가며 옆에 있는 토끼 장식을 살짝 쓰다듬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오라버니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아는 멍하니 그녀가 언급한 장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시선은 여전히 그 토끼에 머물러 있었다.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가슴이 불편하게 조여오는 느낌에 매우 괴롭기만 하였다.“이것은 토끼입니까?”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시만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그렇습니다. 이는 오라버니가 저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그해 제가 대추나무에서 떨어져 어머니께서 저를 벌하여 방에 가두셨지요. 추석이었지만 밖에 나가 등불을 감상할 수 없어 오라버니가 직접 이 토끼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말 못나지 않았습니까?그때는 저도 마음에 들지 않아 망가뜨렸지요. 이 귀 부분은 바로 그때 부딪혀서 부러진 것입니다.” 그녀는 토끼를 주아에게 내밀었다.“보시겠습니까?” 주아는 자신 앞에 다가온, 정말 못난 토끼 인형을 바라보자 귀가 먹먹해졌다.“너는 처자인데 어찌 나무를 타고 있냔 말이다! 누가 가르쳤느냐? 결국에는 다쳤구나! 울음을 그치지 않겠느냐? 그만 그치지 못할까? 추석에는 함께 등불을 보러 갈 생각은 하지 말거라.” “울지 말거라.
이전에 그녀는 부모님과 오라버니가 있는 장난꾸러기였고, 집안 사람들 모두 그녀를 귀여워하였다. 이 토끼 인형도 시만자의 오라버니가 아닌 그녀의 오라버니가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이 사실을 모두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부모님과 오라버니의 얼굴이 기억나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녀에게는 조부모도 있었다. 조부모는 그녀를 매우 아끼셨고, 기억 속에 아직 따스하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희진이가 언제쯤 커서 좀 더 이해할 수 있겠느냐?” 시만자는 그녀 곁에 다가서 남강의 풍경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정말로 아름다운 강경이군요.” ‘강경’이라는 두 글자가 번개처럼 그녀의 뇌리에 꽂혔다. “염강경, 당신이 계속 봐주니까 점점 무법천지가 되는 거잖습니까? 나중에 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여보! 염강경! 아이가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녀의 가슴은 급격하게 요동쳤다. 바람이 찬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온몸에 땀이 흐르고 이마에까지 송글송글 맺혔다. “저는…” 그러고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저의 아버지 존암은... 염강경이고 이 토끼 인형은 저의 오라버니께서 만들어 주신 겁니다. 그쪽이 방금 한 말들 모두 저의 이야기입니다.. 그쪽은 우리 가족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요? 그들은 저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납치당한 거…” 눈물이 그녀의 하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녀는 당황했는지 재빨리 닦았다. 그러고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시선을 밖에 고정한 채 감히 시만자를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굴을 보면 눈물이 멈추지 않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대 오라버니는 염구진이고 현재 북명왕부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는 왕부의 장사로서 왕부에 발을 들인 후 왕부의 힘을 빌려 그대를 찾고자 했지요. 그대가 사라진 후, 아버지께서는 관직을 그만두고 그대를 찾아 나섰고 그렇게 무려 십 년 동안 쉬어 본 적이 없으셨지요. 그러다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난 후 결국 멈추
비록 사람은 없었지만, 매우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작은 테라스에는 두세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그네까지 놓여 있었다. 모든 테라스에는 난간이 없었기에 꼭 잡고 있지 않으면 쉽게 떨어질 수도 있다. 시만자는 염희진을 그네에 앉히고 강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부드럽게 밀어주었다.염희진은 조금 겁이 났다. 그녀의 무공은 높지 않았고 경공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그네의 끈을 꼭 잡을 뿐이었다.“구후부에서 만났을 때는 저의 신분을 알지 못하셨는데, 어찌 돌아가자마자 바로 확신하신 겁니까?” 염희진은 이 점이 이해가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일치처럼 보였고 설계된 함정 같게 느껴졌다. 시만자는 답했다.“그날 그대를 보았을 때 익숙함을 느꼈습니다. 그대 입술 위의 점은 북명왕비의 어머니를 보는 듯했습니다. 눈매와 눈썹 모양도 북명왕비와 조금 닮아 있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대의 행동과 태도에서 익숙함이 느꼈습니다. 당시에는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그 사람이 염 선생이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염 선생?” 이 세 글자를 음미하는 염희진은 순간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희미하게 한 소년의 기억을 떠올랐다. 대추나무 아래에서 그녀에게 설탕 과자를 주던 소년, 해가 얼굴에 비추어 미소가 예쁘고 찬란하였다. 그러나 그 소년의 모습은 기억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소년은 지금 염 선생이 되었고, 북명왕부의 장사이다. “아직도 말씀하지 않았셧습니다. 어찌하여 제가 염희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까?” 그녀는 시만자에게 재차 물었다. “사실, 우리는 장공주가 한 사람을 방시원과 혼인시키려는 계획을 일찌감치 알았습니다. 즉 저의 의형이지요. 그들은 군에 자신들의 사람을 심으려 했기에 아마 이 일은 그대에게 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대를 움직이려니 자연히 알려야 했겠지요.” 염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대 말이 맞습니다. 그대를 처음 보았을 때, 저는 무엇인가 불편한 느낌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반주를 따라 생계를 유지했기에 사람의 마음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일찍 깨달았다. 장공주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었기에 그녀를 구해주고 시집도 보내주겠다 하니 모두 거짓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녀가 진성에 온 지 오래되었건만 혼사를 제안한 적이 없었고 어느새 스물여섯이 되었다. 진정으로 시집보내려 했다면 일찌감치 이야기했을 것이 분명했다. 사실 그녀는 정확한 자신의 나이를 알지 못했다. 반주가 그녀를 구했을 때 칠, 팔 세가량의 아이였으니, 대략 계산하면 스물다섯, 여섯 될 것이었다.또한, 집안에서 매번 연회를 열 때마다 나가서 얼굴을 내비치게 했을 터인데 그녀는 항상 후원에 갇히게 되었고 나가기는커녕 방문조차도 나갈 수 없었다. 유모가 말하길 그녀가 규칙을 완전히 익히지 못하여 혹여 귀한 손님께 실수라도 저지를까 염려된다는 핑계만 댔다.“장공주께서 저를 구한 것에 뭔가 내막이 있을 것이란 말입니까?” 그녀는 숨이 가쁜 듯해 보였다.“확실치 않으니 조사해야 합니다. 그때의 상황을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잡기단이 해산된 일에 대해서도요.” 고개를 끄덕인 염희진은 옹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시만자에게 털어놓았다. 시만자는 돌아가서는 사여묵과 염 선생에게 전해야 하므로 자세하게 물어보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질문을 다 하였다.염희진도 상세히 이야기하였고, 특히 잡기반 해산 후 혼자 생계를 꾸려가는 과정과 도적을 만난 일 전후를 면밀하게 전해 주었다.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목이 마른 듯하였다. 한참 후에야 괜찮아진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는 언제 그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까?” “현재 그대는 고후부에 있으니 출입이 불편할 것이고 방씨 가문에서도 그대를 자주 불러낼 수는 없을 터이니 돌아가 염 선생과 함께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대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대의 조부와 모친도 현재 진성에 계시고, 아버지는 운현에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시니, 그대의 신분이 확정되면 염 선생이 반드시 사람을 보내 진성
염희진이 고후부로 돌아가자, 고후부인이 즉시 다가와 상황부터 물었다. 후부의 부인인 그녀가 잡기단 출신이었던 여인에게 이토록 공손하였던 것은 장공주의 체면 때문이라 하겠으나, 두 눈이 충혈되어 있음에 그만 예의를 잃은 듯 거친 말투를 보였다. “울었느냐? 정말 그녀들 앞에서 울었단 말이냐?” 여전히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는 염희진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는 듯하였다.“부인께서는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가 간 곳은 왕경루였고 이미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였거늘 시 아가씨께서는 방시원이 무장 출신이기에 그의 아내로서 용기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며 내 손을 잡고 최고층으로 날아올랐습니다. 진실로 무섭더이다. 그러나 저는 그 여인 앞에서는 울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곳의 바람이 너무 세서 눈시울이 붉어졌을 뿐이고 마차에 올라탈 때까지 눈물을 참았습니다. 미덥지 않으신다면 탕미에게 여쭈어보시지요.” 고후부인이 고개를 들어 해탕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이냐?” 탕미는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확실히 그러하였습니다. 시 아가씨께서 창가에서 살펴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겠냐며 도발하였습니다. 방시원의 부인으로서 이리도 용기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였지요. 그때 저는 해치려는 것은 아닐 테니 따라가 보라 하였습니다. 그러다 내려올 때쯤 바람이 세게 불어 머리도 헝클어지고 두 사람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제서야 고후부인의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너는 계속 곁에 있었던 것이냐?” “그녀들이 올라갈 때 따라갈 수 없었지만, 야간 문밖에 항상 있었기에 그녀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고, 또한 그녀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고후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미간은 여전히 찌푸리고 있었다.“시만자라… 솔직히 말하자면, 방시원과 의형제라 칭하였고, 말끝마다 의모라고 부르지만, 서약을 한 사이도 아니니 시만자 또한 방시원과 혼인하고자 마음먹고 너를 일부러 괴롭히는 것일 수 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염희진이 놀란 눈으로 고후부인을 바라보
시만자도 왕부로 돌아가 송석석과 염 선생을 따로 서재로 불렀다. 사여묵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결과를 듣고 싶었던 염 선생은 사여묵을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첫 마디에 염 선생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염 선생, 저는 그녀가 그대의 여동생임을 확신합니다!” 시만자가 떠난 후로 그는 가만히 앉지 못했다. 혹여 시만자가 그에게 고개를 젓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하여 시만자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는 너무나도 초조해져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오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으로 마침내 시만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가 마음의 준비도 하기 전에 시만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 말에 깜짝 놀란 그는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왕비와 시만자도 함께였기에 떨리는 다리를 옮겨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책상에 엎드린 채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아가씨께서 한 말에 책임질 수 있습니까? 정녕 확신하시는 겁니까?” “확신하였습니다. 그녀는 기억하고 있는 옛일들을 말해주었습니다. 염 선생은 왜 그런 것들은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머니한테 먼지떨이로 맞은 적 있지요? 도랑에 빠져나오지 못했던 적도 할머니께서 키우시던 닭을 팔아 탕후루로 바꿨던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개똥을 주워 아버지 서재 문 앞에 둔 적도 있을 겁니다.”염 선생은 흐느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감격에 겨워 몸을 떨었다.“그녀가 착각한게 분명합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아이이고 저는 절대 아닙니다.” 그의 반응에 시만자와 송석석은 그 아이가 맞다는 것을 확실했다. 더불어 주아가 염희진이라는 것도 거의 단정 지은 뒤였다. 어린 시절의 창피한 일을 목격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염 선생은 현재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그는 여동생이 진성에 있을 줄은, 그것도 공주부에 이토록 오래 머물렀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는 항상 그녀를 찾고자 하였으나, 언젠가부터 찾을 수 없다
이때 갑자기 송석석이 말을 끊어 버렸다.“몇 년 전 잡기단이 여러 차례 파괴되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말했어?” “응. 몇몇 장난꾸러기들이 그들의 밥줄인 도구들을 모조리 부숴 여러 번 새로 사 왔다고 했어. 그런데 그러면 또 와서 망가뜨려 버려서 화가 난 단장은 피를 토할 정도였다고 했어.” “언제 적 일이야?” “그녀가 말하기를, 다섯 해 전의 일이라고 했고 반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해.”“음, 다섯 해 전 대장공주가 옹현에 가거나 혹은 그곳에 사람을 보낸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거라.” 송석석이 염 선생에게 명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다행히 왕비께서 저를 일깨워 주었군요. 저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느라 장공주께서 이른바 생명을 구했다는 사적에 대한 조사를 잊었습니다.” 염 선생은 이렇게 조심스럽지 않은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얼이 빠진 듯하였다.시만자가 계속하여 말을 이어 나갔다. “잡기단이 해산한 이후, 모두가 떠나가 버려서 그녀만 혼자 남아 무척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단장이 건강이 나빠져 다시 돌아왔고, 결국 옹현에 남아 그를 돌게 되었지요. 적어도 친척이 있었음에 당행이라 여겼답니다. 그녀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산에 가서 약초를 캐고 사냥을 하였습니다. 희귀한 것들을 캐면 값을 높게 부를 수 있었지요. 처음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약초를 캐고 사냥하여 산에서 난 것들을 팔아 은전을 조금씩 벌었고, 단장의 병 치료를 위해 쓰고도 은전을 저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0 냥이 모이면 또 다른 집을 임대하여 살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지요. 하지만 그곳은 사람이 많아 시끄러웠고, 심지어 주방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가끔은 산물도 도둑맞곤 하였기에 그녀는 혼자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석창을 캐러 갔을 때, 마적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마적은 수가 많아 그녀 홀로는 대항할 수 없었지요. 마침, 장공주가 옹현으로 가던 도중 그 지역을 지나면서 부하들에게 그녀를 구하
지금은 방시원이 이 혼인 어떤 식으로 미루느냐는 것이 제일 관건이었다.고후부는 반드시 재촉할 것이니 이제는 방시원의 지혜에 달렸다.만약 방시원이 거절한다면 염희진은 당장 버려질 것이고 대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고후의 첩이 되거나 한 늙은 자의 첩이 되는 것이었다.방시원이 우선 동의하게 하려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방시원은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처음 마음에 들어 했던 오 씨도 계략임을 알게 되었으니 분명히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두 가문이 서로 맞아 정말로 혼인을 논의하게 된다 하여도, 여자 쪽 어른은 염 선생이 되어야 하니 그는 분명히 여동생을 괴롭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감정의 소용돌이를 거친 염 선생도 결국엔 이 문제를 마주하게 되다니..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정녕 그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녀만은 안 됩니다. 순결한 여인으로서 계획이란 이유만으로 성급하게 혼인하여 명예를 훼손시킬 수는 없습니다.” 드디어 되찾은 여동생이니 한 점의 억울함도 당해서는 아니었다. 그러자 송석석이 급히 해명했다.“염 선생, 우리는 그런 생각이 없다. 지금은 방시원이 어떤 식으로 시간을 끌지 지켜봐야 하니 곧바로 옹현에 사람을 보내 그 이른바 생명을 구한 사실에 대해 조사할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전혀 없다면 염희진은 장공주부를 당당하게 떠날 수 있고 왕부가 그녀를 보호할 것이다.” 날짜를 따져보면 그쯤이면 이미 한의절을 훌쩍 지난 시점이니 장공주는 진성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 후일 것이다.그러나 조사를 통해 사실이 밝혀지면 염희진은 장공주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길 것이니 조사는 반드시 신속히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공주가 염희진에게 위험한 일을 지시하기라도 한다면 연희진은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금 비록 시만자가 이른바 생명의 은인이 속임수를 썼을 가능성이 있다 귀띔했으나, 실질적인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니, 정을 중히 여기는 염희진은 의심을 품고 있
이날 저녁, 송석석은 약왕당에서 받아온 약을 사여묵에게 건넸고 약의 위험성까지 자세하게 얘기했다.사여묵은 망설이는 듯한 송석석의 모습에 환하게 웃으며 위로했다.“이 정도 상해는 충분히 견딜 수 있소. 그리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약들도 이렇게 잔뜩 가지고 오지 않았소? 나중에 어의에게 진단만 받으면 바로 단설환을 먹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남강으로 가는 길에도 단 신의의 당부를 잊지 않고 매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겠소.”“그래도 결국 독약 아닙니까? 그러지 말고 저희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송석석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내가 보기엔 지금으로써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소. 단 신의가 말을 무섭게 해서 그렇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해를 입히지 못할 거요. 그렇게 위험한 약이었다면 애당초 꺼내지도 않았겠지.”“그럼 일단 염 선생과 상의라도 해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그럴 필요 없소!”사여묵이 약을 내려놓은 뒤, 커다란 손으로 송석석의 허리를 감싸며 말을 이어갔다.“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유리하오. 나중에 내가 대리사에서 쓰러지면 진이가 내 옥패를 들고 어의를 찾아갈 것이고 황실로 달려온 어의가 우왕좌왕하는 염 선생을 보아야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은 사여묵의 가슴팍에 기대어 불안한 마음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전 장군님이 너무 걱정됩니다. 몸이 회복되기도 전에 남강으로 출발해야 하는데 가는 내내 제대로 쉴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남강에 가서도 몸 상태가 회복되지 않으면 전장에 어떻게 나가시려고 그러십니까?”송석석의 걱정에 기분이 좋아진 사여묵이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난 왕표를 무조건 대체하겠다는 게 아니오. 일단 제린을 찾아 병사들 속에 숨어 있다가 왕표가 제대로 군을 이끈다면 난 남강 구경이나 하다 올 것이오.”사여묵의 위로에도 송석석은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왕표가 군을 제대로 이끌지 못할 거라는 확신 때문에 두 사람이 지금 이런 모험을 하고 있는
화가 난 단 신의는 송석석의 말에 설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난 멍청한 사람을 돕지 않소. 당신들은 그런 천하의 멍청이가 따로 없소!”“세상에 이런 멍청이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 한번만 더 모험하고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약속할게요.”송석석이 환하게 웃으며 말하자 단 신의가 미간을 찌푸렸다.“모험을 하고 싶어도 이제 못할 수도 있소. 돌아오면 황제께서 그 죄를 어떻게 물으실 줄 알고 이러는 것이오. 그러다가 머리가 잘릴 수도 있소.”“정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저에게 방법이 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단 신의는 고집을 부리는 송석석을 보며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백성들에게는 두 사람과 같은 멍청이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단 신의는 그 멍청이가 송석석과 사여묵은 아니길 바랐다.결국 단 신의는 먼지가 뽀얗게 쌓인 작은 상자를 꺼내 먼지를 툭툭 털어내곤 조심스럽게 열었다.상자 안에는 땅콩 만한 검은 알약 하나가 있었다.“똑똑히 기억하시게. 이건 독이오. 이 약을 먹고 나면 맥박이 이상해지고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네. 그리고 짧은 시간내에 심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이건 그저 보여지는 현상이 아니라 실제로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네. 이 약을 먹고 3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3일 뒤에는 반드시 단설환을 복용해야 하오. 그러지 않으면 심장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을 수도 있소.”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이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정말로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그럼 당연하지. 이건 독이오.”“그럼 단설환을 먹고 나면 바로 정상적인 몸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겁니까?”“그렇지 않소. 며칠 동안 안정을 취해야 하네. 눈속임을 하고 나서 바로 출발하면 절대 안 되오.”위험할 수도 있다는 단 신의의 말에 송석석은 단 신의가 건네는 약을 받지 않았다.“그럼 혹시 다른 약은 없는지요? 폐하를 속이고 나서 장군님은 바로 출발하려고 할 겁니다. 실제로 중독되
사여묵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채 침대에 앉아 등을 벽에 기대고 있었다.남강에서 돌아와 병권을 황제께 바친 뒤에도 황제는 여전히 사여묵을 의심하고 경계했지만 사여묵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황제가 의심과 경계를 조금은 풀 수 있도록 사여묵은 지금까지 최대한 언행에 조심했으며 서경과의 담판이 끝나고 나서도 황제 앞에서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다.나중에 혹시라도 전쟁이 일어났을 때 더 이상 황제의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황제의 태도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사국이 이번에 다시 쳐들어온 건 사국과 손잡은 내국 역적이 남강에 이미 함정을 파 놓았다는 사실을 폐하께서도 알고 계신 것이오. 그래서 사국은 저렇게 겁도 없이 남강을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폐하는 내가 폐하께 대한 위협이 사국 병사들을 물리치는 것보다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소.”사여묵이 씁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술을 벌컥벌컥 마시자, 송석석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황제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사여묵은 송석석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그녀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고 조금 전 혼자 술을 마시고 있을 때부터 계속 이렇게 숨막히는 인고를 견뎌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다.“난 무조건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을 것이오.”송석석을 놓아준 사여묵은 강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보탰다.“난 당신처럼 용감하게 변할 것이오.”예전에 송석석이 입궁하여 황제께 상황을 보고했을 때 황제는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때 당시 송석석은 마냥 기다리거나 손을 놓은 것이 아니라 홀로 남강까지 찾아갔다.송석석은 그때 자신의 생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한편, 사여묵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바로 뜻을 알아챘고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전 장군님을 응원합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폐하께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신다면 전 평소와 같이 진성을 지키고 있을 것이고 만약 폐하께서 죄를 물으신다면 전 북명
사여묵이 방시원을 잘 달래어 돌려보낸 뒤, 염구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다들 감정이 격해지는 것도 당연합니다. 남강 땅을 되찾기 위해 그들은 청춘을 다 바쳤는데 이제 또 전쟁이 난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요.”말을 하던 염구진은 고개를 돌려 사여묵을 힐끔 쳐다보았으며 방시원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사여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한편, 한참동안 말이 없던 사여묵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잘 지켜보고 있다가 무슨 소식이 들리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게.”“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사여묵은 다시 연주에 관한 일에 대해 물었다.“연주에서 성문을 봉쇄했다고 들었는데 소식은 끊기지 않은 것이오? 혹시 그쪽에서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나? 계획대로 행동하고 있는 건가?”“아직 확실한 소식은 접하지 못했지만 소인은 모성을 믿습니다. 계획한대로 잘 하고 있을 겁니다.”“그래. 나도 그자를 믿네.”염구진의 대답에 사여묵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성은 연주 좌부승이었고 연왕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여묵은 바로 사람을 시켜 모성에게 접근했다.총명하고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모성은 선황제 때부터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성격이 너무 오만했기에 아직까지도 직급은 그저 부승이었다. 평소에 시를 즐겨 쓰는 모성은 시문의 대부분 내용이 세상을 향한 불만 표시였기에 연왕은 모성이 조정에 불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그를 곁에 두기로 했다.그렇게 모성은 오랜 세월동안 외로운 싸움을 했다. 그 중 더 높은 관직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성은 연왕의 반역죄 증좌를 수집하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하고 연주에 남았다.하지만 연왕은 섣불리 움직이지도 않고 핵심 병력의 상황도 모성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중요한 일을 논의할 때에는 모성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기도 했다.때문에 모성은 하상지의 잡일을 처리해주면서 간간이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확실한 증좌가 없는 탓에 모성은 지금까지도 연왕
”소인도 오늘 폐하께 감히 많은 얘기를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혹시 폐하께서 오해하실까 봐 왕야를 찾아가지도 못했지요.”이덕회가 대답하자 목 승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잘하셨습니다. 병부는 최대한 사적으로 북명왕을 접촉하지 않아야 합니다. 아니면 혹시 병사 감찰대로 폐하께 한 사람을 추천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혹시 왕표 그자가 남강 전쟁 원수를 맡기엔 걱정된다면 방시원 장군을 황제께 추천해보십시오.”“하지만 방시원 장군님은 주군 총병이라 남강 전쟁에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 장군을 보낼 바에는 차라리 방천허와 제린에게 전사를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내란이 터지고 있는 지금 진성 주군에 대장이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이덕회의 말에 목 승상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대꾸했다.“도리는 그게 맞지요. 제 말은 폐하께 왕야 한 사람만 추천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더 추천하라는 뜻입니다.”이덕회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소인이 솔직한 성격이라 말을 돌려서 할 줄 모르니 그냥 말하겠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왕야가 가장 적합한 원수인데 어차피 역적은 아직 나라에 위협이 될만한 존재는 아니니까 나중에 목종욱한테 처리하라고 하면 되지요.”“그 어떤 반역자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알다시피 반역자들은 사국 사람들과도 엮여 있습니다. 사국과 손을 잡았다는 건 그만큼 충분한 준비를 해왔다는 뜻이지요.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목 상승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덕회가 대답했다.“승상 말씀도 일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럼 소인 북명왕과 함께 내일 다시 궁으로 가서 폐하를 만나 뵙고 내란에 대해서도 의논해보겠습니다.”“그렇게 합시다!”목 승상이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사청엽은 여전히 옥에 갇혀 있었다. 황제가 아직 명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사청엽은 자신이 사형을 면치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이날 저녁, 혼인을 앞둔 방시원이 황실을 찾아왔다. 치석
한편, 목종욱은 최선을 다해 산적들을 잡아들이고 있었다. 싹을 다 자르진 못했지만 크게 겁을 먹은 산적들이 산 속에 꽁꽁 숨어서 다시는 문제를 일으키진 않을 것이다. 숙청제도 제린이 보낸 소식을 접했고, 사국 대군들이 변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제린은 사국 대군이 25만 명 정도 된다고 보고를 했고 여전히 빅토르가 대군을 이끌고 있다고 했다.숙청제는 바로 병부 대신들을 불러 남강에서 사국의 25만 대군을 상대로 승산이 있는지 의견을 물었다.이덕회는 황제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전쟁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 관건이다.“폐하, 남강은 오랜 시간의 전사와 왜란으로 지칠 대로 지친 상태입니다. 남강 땅은 아직 전쟁에 버틸 수 있지만 백성들은 더 이상 전쟁을 견딜 힘이 없습니다. 만약 정말 전쟁이 난다면 확실한 한 방으로 빠르게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메뚜기 떼처럼 매년 한 번씩 이렇게 날뛸 것입니다. 이는 저희 남강 지역의 치안에 치명적인 상해를 입힐 수밖에 없습니다.”“그럼 자네 생각엔 송씨 가문 병사들과 북명군이 적들을 신속하게 물리치지 못할 것 같은가?”숙청제의 물음에 이덕회가 바로 대답했다.“이제 송씨 가문 군대아 북명군을 나눌 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남강 병사들입니다.”이덕회는 숙청제가 남강의 병사들을 모은 게 송씨 가문과 북명왕이라고 생각할까 봐 일부러 강조했지만 숙청제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만약 남강 전쟁이 오래 전에 끝난 전쟁이고 사여묵이 병권을 상납한지 꽤 오래 됐다면 숙청제는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왕표가 군심을 얻지 못하고 있는 지금, 남강에 있는 병사들이 송씨 가문 군대이든 북명군이든 결국 전부 사여묵의 명령에 따르고 있다.사여묵을 남강에 보낸다는 건 병권을 다시 사여묵에게 쥐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현재 연왕도 역모를 일으켰고 황제 자리를 대놓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
숙청제가 사여묵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그건 사국이 네 위엄에 겁을 먹은 것이야. 빅토르가 너를 많이 두려워하는 것 같아.”사여묵은 숙청제의 말이 진심이 아니라 살짝 비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황제께서 소인을 너무 높이 평가하고 계신 겁니다. 소인은 그렇게 대단한 능력도 없고 빅토르도 소인에게 겁을 먹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전쟁 때문에 너무 많은 걸 잃었기 때문입니다.”“네 말대로 전쟁으로 많은 걸 잃었다면 짧은 시간 내에는 원기를 쉽게 회복할 수 없지 않느냐?”“소인이 감히 추측을 해보자면 사국은 원기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절대 저희 남강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가끔씩 비열한 수법으로 훼방을 놓아야 정상인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한 번도 없는 게 너무 수상합니다.”숙청제가 사여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그럼 네 말은 누군가가 사국과 손잡고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냐?”“그럴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사여묵은 전에도 숙청제와 이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당시 숙청제도 사여묵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관적으로 보았을 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숙청제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여묵은 그런 황제를 힐끗 쳐다보고는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지만 꾹 참았다.사실 숙청제도 왕표가 무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사국을 상대하려면 사여묵을 다시 남강 전장으로 내보내는 게 가장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하지만 숙청제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그때 당시 겨우 송석석을 이용하여 사여묵에게서 병권을 빼앗았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내놓을 수가 없었으며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는 이상, 숙청제는 절대 사여묵을 전장에 내보낼 생각이 없었다.때문에 사여묵이 며칠동안 어서방에 남아 숙청제와 이런저런 상의를 해봤지만 숙청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그렇게 어서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아무도 먼저
그날 밤, 연왕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게 되었다.솔직히 지금 상황은 연왕의 오랜 계획과 차질이 조금 있었다. 지방 지역에서 역모를 일으키고 심지어 진성에 준비된 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진성까지 쳐들어간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연왕과 무상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일단 병사들을 일정한 수량까지 늘이고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진성 일대로 전이하여 병사들을 안치한 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생각이었다.그땐 사온이 진성에서 계략을 짜고 있을 것이고 많은 세가들의 지지도 받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예전에 고부진의 딸들을 세가에 시집 보냈기에 세가들은 지지할 수밖에 없다.그리고 나서 적절한 시기만 잘 고르면 반드시 성공한다. 진성에 전란이 일어나고 산적과 유랑민들이 판을 칠 때 연왕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성내로 쳐들어가 바로 궁 전체를 포위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지금, 갑자기 대석촌에 일이 터져 버려 사청엽이 체포된 탓에 연왕은 급하게 병사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승산이 너무 낮았기에 연왕도 망설였던 것이며 지방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고 해서 진성까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물론 백성들은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한동안 수군거리겠지만 대부분 백성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반란과 격문을 그저 우습게 생각할 것이다.그뿐만 아니라 사국에서 남강을 공격한다고 해도 처음 있는 일이 아니고 사국에서 오래 전부터 호시탐탐 야망을 보였기에 황제가 나랏일에 관심이 없어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아직 사국과의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전패했다는 소식도 없기에 상국 무장이 무능하다는 비판을 하기에도 애매했다.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태평한 상황에서 연주도 꽤 부유한 땅이었기에 괜히 문제를 만들고 싶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때문에 모두 그저 연왕이 언제 잡히는지, 언제 역모죄로 목이 잘릴지를 보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리고 상국에는 사국 사람들을 물리친 북명왕이 있기에 다들 역적 따위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으며 되레 연왕이 왜 역모를 일으키
무상이 아니라는 말에 연왕은 회왕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화들짝 놀란 회왕이 변명하려던 그때, 연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회왕일 리는 없어.”회왕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연왕의 태도에 기분이 조금 묘했다.한편, 연왕은 당연히 회왕을 의심할 리가 없었다. 회왕은 무일푼으로 연주로 왔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진성에서도 아무런 성과도 따내지 못했으며 사온의 비교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었다.회왕이 연주에 온 뒤로 연주 백성들은 회왕을 만나면 겉으로는 왕야라고 부르며 인사를 올리긴 하지만 뒤에서는 다들 그를 만만하게 여기고 아니꼽게 생각했다.때문에 회왕은 절대 마총우를 명령하지 못한다.조금씩 차분해진 연왕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말했다.“다들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총우 그자가 귀순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트리고 싶어서 일부러 꾸민 짓인가?”여전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무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마총우가 귀순한 건 절대 아닐 것입니다. 왕야께서 격문을 보낸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고 더군다나 저희 병력은 대여섯 군데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전의하는 데만 6개월 넘게 걸렸는데 조정에서 절대 쉽게 조사해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마총우 그자를 찾아서 귀순 시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날 일부러 무너트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네. 그럼 그자가 누구일 것 같은가?”연왕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연왕이 몇 년 동안 끌어 모은 사람들 중에 황제의 친인척과 세도가들도 있지만 친왕은 연왕과 회와 두 사람밖에 없었다.연왕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상대가 없었다. 연왕의 부하들 중에서 황제의 친인척들이 제일 무능하고 멍청했으며 파장을 일으킬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합적으로 생각해보았을 때 가장 의심되는 상대는 여전히 무상이었다.하지만 역모의 마음을 품은 연왕이 무상을 끌어들이고 나서 지금까지 무상은 강한 충성심을 보였고 심지어 평소에 연왕에게 쓸만한 제안도 가장 많이 하고 계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