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부의 지하감옥에서 나온 고부진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측청에 이르니 장공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송석석을 만나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 지하감옥에 올 기회를 얻게 되었고, 봉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전할 수 있었기에 지하감옥을 벗어나 후원에서 함께 거닐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장공주에게 알렸으니 이는 그가 이미 고청란을 포기했다고 볼 수 있었다.그는 현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발을 빼기에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다.고후부와 대장공주부는 단단히 엮여 있어 장공주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측청에 들어서니 장공주가 곁을 지키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앉으시게.” “감사하옵니다, 공주님.” 장공주는 차를 들어 천천히 마실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부진 또한 침묵을 지켰다.“그녀를 보았으니 이제는 안심하였겠지.” 장공주가 차 거품을 불며 무심하게 말했다.“주신 약은 감사했습니다.” 장공주는 그를 한 번 쳐다보았다. 비록 몇 가지는 알고 있었지만, 이 위선적인 남자의 모습에 참지 못하고 지적하곤 하였다. “또 왜 그러느냐? 림봉아가 그리도 걱정되서 그러느냐? 이제 그만 좀 하거라! 그 두 아이를 조종하려고 하는 거짓이란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고부진은 그저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장공주의 비아냥에는 침묵이 가장 좋은 대응임을 알았던 것이다.“송석석과는 자주 만나서 더 많은 정보들을 끌어내도록 하거라. 또 10월 15일 날의 계획을 흘려 그녀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일 것인지 자세히 알아내거라.” “알겠습니다. 제가 라나더러 만남을 주선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부진이 대답하였다. “수연과 방시원의 혼사는 너의 어머니에게 재촉하라. 지체해서는 아니 되느니라.” 그러자 고부진이 잠시 머뭇거렸다.“방시원이 주아를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옵니다. 결국 닭이오니 어찌 봉황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녀에게서는 대가의 아우라가 느껴지지
그러자 장공주는 손을 들어 그더러 물러가도록 했다.그녀가 고분진의 눈빛 속에 감춰진 혐오를 못 봤을리는 없겠지만 그럴수록 그와 고후부는 영원히 그녀의 노예임을 영원히 잊지 말아야 했다. 고부진이 떠난 뒤, 그녀는 바로 방마마를 불렀다. "오늘 밤, 부마가 올 테니 일찍 불을 켜고 향을 피우거라. 방에 들기 전 피임약도 잊지 말거라."방 마마가 대답하였다."예, 알겠사옵니다."눈을 감고 있었던 장공주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기에 방 마마는 물러가지 않고 한참을 망설이며 서 있었다. "부마와 가까이하기를 원치 않으시면서 왜 억지로 하시려 하십니까?"장공주께서는 눈을 뜨지 않고 거의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시며 입을 열었다."갑자기 한 사람이 그리워서이다.""부마는 부마고 그 사람은 그 사람입니다. 매번 관계를 가진 후 공주께서는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방마마는 그녀의 유모로서, 집안에서 지위가 매우 높아 이와 같은 말은 오직 그녀만이 할 수 있었다.결국 눈을 뜬 장공주는 조롱어린 눈빛으로 변했다."너는 정말 내가 재미 하나 보려 이런다고 생각하느냐?" "노비는…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그저 공주를 걱정할 뿐이옵니다." 방 마마는 재빨리 손을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두 분은 서로를 혐오하고 있습니다. 평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를 떠시면서 관계를 가지시니 스스로를 너무 괴롭게 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옵니다."장공주는 몸을 살짝 일으켰다. "너는 내가 자식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느냐?" 이 질문에 방마마는 깜짝 놀랐다."자식을 갖고 싶으신 겁니까? 군주를 낳으실 때 다시는 낳지 않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는 그리 생각했지만, 황형이 성공하게 된다면, 내 가업은 누가 이을 것이냐? 가의 군주도 자식을 두지 못하니, 평양후에게 돌아갈 것 아니야?" "자식을 두고자 하시면서 어찌 부마께 피임약을 먹이시는 겁니까?" 방 마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러자 장공주가 냉소를 지어 보였다."내가 어
하지만 장공주는 담담하게 웃었다. "뭐가 그리 급한 것이냐? 아직 납치하지 않았고 다만 명확히 알아보았을 뿐이다. 구 월 삼십 일에 진성을 떠나 수주로 간다고 하더구나. 그때 마부와 하인 모두 공주부로 데려와 먼저 지하 감옥에 가두어 둘 것인데 누가 그들이 사라졌다 할 수 있겠느냐? 한의절이 지나고 거사를 치러도 늦지 않다."방 마마는 가슴이 조여왔다."송회안은 공주님께 아무런 감정도 없었는데 왜 꼭 송씨 가문의 자식을 낳으려 하는 것입니까? 부마가 나약하나, 결국 엄연한 공주님의 남편이지 않습니까?"장공주는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가슴 깊이에서 우러나오며 씁쓸함이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채 태양혈을 만지면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무정하기가 이를 데 없군. 나와는 모든 연을 끊으려 하지만 절대로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송씨 가문의 아들의 낳아 그가 저승에서도 편히 쉬지 못하게 할 것이다!"그러자 방 마마는 답답한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죽은 자에게 화풀이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아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원하셨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테지요. 왜 이제 와서야 아이를 낳겠다고 하시는 겁니까? 월경도 불규칙하시니 임신이 가능한지도 미지수입니다. 제발 자신을 괴롭히지 마세요. 죽은 자는 그저 죽게 내버려두시고 인제 그만 잊으시도록 하고 그를 잊으시도록 하고 다시는 생각하지도 마십시오.""나라고 생각하고 싶겠느냐? 매일 밤 꿈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다.”장공주가 갑자기 눈을 떴다. 그 눈 속에 활활 불꽃은 분노 같기도 젊은 시절 송회안을 바라볼 때의 뜨거움 감정 같기도 했다. "그가 나를 편히 지낼 수 없게 만든 것이고, 죽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그의 눈물이 앞을 가렸고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중이였다. "나도 가끔은 그를 미워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누구보다도 슬퍼하였고 세상에 나처럼 그를 사랑하는 이는 없었
황혼이 깃들자, 공부에서 나온 왕준이 마차에 타기 전 차부에게 말했다.“먼저 장락거리에 가자. 부인이 이틀 전에 장 씨 만두 먹고 싶다 하였으니 조금 사야겠다.” “장사할 시간은 아닙니다만.”장 씨 완탕은 저녁이 되어야 장사를 시작했다. 상국의 진성은 번화하여 저녁 이후 장락거리와 북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곧 시작한다.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그러자 마부가 웃으며 말했다.“부인님을 아끼시는 모습이 매우 보기 좋습니다.” 왕준이 손에 쥔 부채로 마부의 머리를 가볍게 응징했다.“어여쁜 그녀가 나에게 시집왔고 아들까지 낳아주었으니, 그녀를 잘 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 너 또한 애련이를 잘 대해주어야 한다.” 마부도 웃으며 말했다. “알겠나이다.” 마부는 노비가 낳은 아들이고 애련은 어렸을 적에 들인 아이로 2년 전 왕준이 그들을 혼인 시켜주었다. 애련은 현재 이 부인 남 씨의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마차가 장락거리의 끝에 이르니 노점상들이 하나둘 장사를 시작했다. 장 씨는 나이가 많아 동작이 느려 왕준은 마부와 함께 그를 도왔다.왕준을 본 장 씨가 웃으며 말했다.“왕 대감께서 부인을 위해 만두를 사러 오셨군요?” “집 부엌에서 만든 것은 입맛에 맞지 않다며 그대가 빚은 만두만 고집하는구나.” 그러자 장 씨가 부끄러운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이리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제가 스스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준과 마부는 멈추지 않았다. 가판이 설치되자 장 씨는 곧바로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만두피와 속은 미리 준비해 왔다.“곧 해드릴 테니 앉아 계시지요. 이번에는 얼마나 사시겠습니까?” “다섯 근으로 하겠다.” 그러자 장 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대감과 부인 모두 정말 좋은 분들이십니다. 선한 자는 반드시 좋은 대가를 받지요.” 그는 오랫동안 노점을 지켰지만, 장사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만두가 맛이 없어서가 아닌, 그의 동작이 너무 느렸고 도와주는 이도 하나 없어 손님들이 기다리기를 꺼렸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가 상에 올려지자,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만옥은 먼저 왕준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대감께서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다음에 가게에 오시면, 더 저렴히 드리겠나이다.”왕준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얼마나 저렴합니까?”눈을 깜빡이던 만옥이 교묘하게 물었다.“대감께서는 얼마나 저렴하길 바라십니까?”만옥 모습은 매혹적이었고 약간의 천진함도 지니고 있었다. 특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입술의 미소가 피어나는 모습은 마치 밤하늘에 피어난 한 송이 난초와 같아, 정직한 군자라 하여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나 왕준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는 듯, 오로지 차가 얼마나 저렴할지만 걱정하였다. “손대감과 비슷하게 쳐주시면 됩니다.”만옥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웃음을 지었다.“그럴 수는 없지요. 대감께서 만두를 나누어 주신 은혜는 반드시 성심껏 보답할 것입니다. 혹 가게에 직접 오셔서 1근 구입하시면 반 근은 더 드리지요. 어떠십니까?”왕준이 기쁘게 대답하였다. “그리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그러자 만옥이 환히 웃어 보였는데, 마치 고요한 계곡의 난초처럼 차갑고도 아름다웠다.그러나 왕준의 시선은 다시 장 씨에게로 향했다. 그녀가 잘 먹지 못하는 모습이 계속 신경쓰였다. “배고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어찌 드시지 않으시나요?”그녀의 가녀린 손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자, 석류빛 귀걸이가 반짝여 더 아름다워 보였다.“대감을 뵈어 기쁜 나머지 잠시 배고픔을 잊었습니다.”왕준이 미소 지으며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배가 고픈 것이 아니었다면 어찌 일찍 고하지 않았단 말인가? 정작 양보하니 이제는 배고프지 않다고 하다니.. 내 시간만 낭비했군.’만옥은 매우 우아한 자세로 만두를 먹기 시작했다. 얇은 입술을 벌려 작은 만두를 두 입에 나누어 먹었다.그녀를 자세히 살펴보던 왕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피가 얇아 크기도 작았던 장 씨 만두를 그의 아내는 한입에 두 개를 먹은 반면, 만옥은 작은 만두
왕준은 만옥이 그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만약 그 정도로 영리하고 눈치가 빨랐다면, 단순히 공부랑중의 자리만으로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모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만두를 하인에게 넘겨주며 저녁을 준비하게 했다. 그러면 모두가 따뜻한 만두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 최 씨가 슬쩍 농담을 했다.“이토록 늦었던 이유가, 만두를 사러 간 것이었군요. 그대는 이제 오로지 아내뿐이라 어머님조차도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기다려야 하는 군요.” 그러자 왕준은 재빨리 사죄하며 몇 마디 불평을 덧붙였다.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장 씨가 너무 느리고 아가씨까지 끼어들며 배가 고프다고 한 탓에 늦어졌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라는 말에 최 씨가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왕준이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갑자기 나타난 만옥 아가씨란 말에 의아해했다. 하여 그녀는 자세히 물었다. “어떤 아가씨 말입니까?” “찻잎을 파는 가게의 주인이고 전에 손대감의 연회에 찻잎을 배달하러 오던 사람입니다. 손대감이 소개했고 철주를 보내 사게 한 적이 있었지요. 그때 들고 왔던 차잎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희도 거들었다. “맛은 괜찮았는데, 가격이 좀 비쌌습니다.” 남희는 상인 출신으로 물건의 가치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최 씨가 그녀의 가게를 물은 뒤 말했다. “식사하시지요. 어머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왕청여의 일로 앓아누운 노부인은 겨우 회복하고 있었으나, 많이 드실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만두는 괜찮았다. 만두가 삶아지고 반 그릇을 뚝딱 비웠다.“장 씨 만두는 참으로 맛나구나. 남은 것이 있으면 그대로 두었다 내일 아침 식사로 하는 것이 좋겠다.” “내일이 되면 맛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남은 것들은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시지요.” 그러자 남희가 말을 덧붙였다.“내일 며느리가 일찍 일어나 죽을 끓여드리겠습니다.” “알겠다.” 멍하니 있던 노부인은 젓가락을 내
운익각 비둘기들이 사방으로 날아다니며 소식을 주고받았다. 며칠이 지나 한의절 전날 저녁에 진성에 도착한 홍시는 소식들을 정리하여 하나의 서신으로 엮어 밤에 북명왕부에 보냈다. 홍시에게서 받은 서신을 시만자는 열어보지도 않은 채 서재로 달려가 염 선생이 먼저 열어보도록 하였다. 이는 염희진에 대한 일이므로 염 선생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이럴 수가.. 역시나 음모였군요! 생명을 구했다는 일은 없었네요. 모두 정교히 설계된 것이라니요.” 편지를 건네 받은 사여묵이 대강 살펴보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방해꾼들은 현지의 악당들이고 돈을 먹은 것이다. 이를 조종한 이는 옹현 최대의 권세가, 즉 장공주이고 옹현에 가면 거기에 머물군 하였지. 당신이 장공주를 조사하라 하였던 것이 잡기단이 해산하기 전후의 일은 아니었소? 그녀는 아마도 그들의 공연을 보았고 거기서 염희진을 보게 된 것이라 생각하오. 마적들도 조사해 보니, 옹현의 관군이었고 염희진이 장공주를 따라 옹현을 떠난 뒤, 반주는 죽었다.” 그 말에 송석석의 얼굴이 미세하게 변했다.“어찌 죽은 것입니까? 조사하였습니까?” 사여묵은 편지를 움켜잡고 냉랭하게 말했다. “굶어 죽었다. 두 다리가 부러진 채로 작은 방에 버려졌고 시체가 썩기 시작했을 때 이웃이 발견하고 관에 보고하였소.” 급기야 시만자가 분노했다.“그 독한 년이 치료도 해주지 못할망정 다리까지 부러뜨린 거군요. 그렇게 홀로 굶어 죽게 내버려두었다니 참으로 잔인하고 악독한 년입니다.” 화가 치민 송석석 또한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염희진은 그를 위한 은을 남겼기에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다면 굶어 죽지는 않았을 것이지요.” 화가 난 시만자는 얼굴이 붉어졌다. “어찌 이런 독한 여인이 있을 수 있단 밀입니까? 염희진은 어찌 이리도 독한 여인을 믿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송석석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는 염희진을 원망할 문제가 아니다. 그녀는 옹현에서 은혜를 베풀어 온갖 명성을 얻은 장공주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랐
방씨 가문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어 장공주가 또 여러 번 재촉하자 고후부인이 직접 방씨 가문에 찾아갔다.방씨 가문에 가서 물어보니 방시원이 수주에 예전 치석 정찰대의 왕오를 찾으러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오에게 사고가 생겨서 방시원이 제씨 가문의 양아들 제방과 급히 갔다고 했다.오씨가 미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작에 결정했어야 하는 일인데… 시원이가 굳이 전우를 만나고 와서야 결정한다고 하니.. 시원이의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전 사씨 아가씨가 마음에 쏙 든답니다. 아시다시피 그날 사씨 아가씨를 뵀었는데 정말 후광이 보였다니깐요? 하루 일찍 그이를 며느리로 맞이하고 싶사옵니다.”오씨의 진심 어린 태도와 그날 오씨가 정망 사씨 아가씨를 좋아하는 모습을 떠올린 고후부인은 자연스레 이 말을 믿었다. “시원이가 지금 진성에 없지만 그래도 그날 서로 만났잖습니까? 그날 돌아와서도 마음에 드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까? 만약 시원이도 좋다고 하면 혼사를 일찍 정하시지오. 그러면 저도 이제 사씨 아가씨의 혼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요..”고후부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게다가 혼인 문제는 부모의 뜻이 중요하니, 시원이가 싫다고만 하지 않는다면 시원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오씨 부인께서 결정하시면 됩니다.”오씨가 잠시 생각한 후 답했다. “언니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이렇게 하는 건.. 제가 시간을 봐서 둘의 사주팔자부터 확인하고 별문제가 없으면 정식으로 사람을 보내 청혼을 하겠습니다.”고후부인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장공주가 계속 사람 보내 재촉해서 짜증이 난 상태였다. “아이고, 내가 결혼을 재촉하는 것 같군요.. 그런데 사씨 아가씨의 나이도 어리지 않으니깐요. 만약 댁에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하루빨리 다른 집도 알아봐야 하고, 그쪽에도 답변을 해야 하지요. 그래도 이제 정해졌으니 다행이군요. 저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군요.”오씨도 공감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시원이 혼사 때문에 저도 속을 많이 썩였지요.. 그래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