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그들을 보자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왜 갑자기 사람들이 나타난 거이지? 게다가 갈고리 밧줄을 이용해야 올라갈 수 있을 정도면 무공도 별로인 것 같은데. 대체 위소로 온 목적이 무엇일까? 그들이 발견되기라도 한다면 오늘 밤의 구조계획은 물거품으로 될 것이다.’그들이 숨어있는 곳은 어두운 곳이라 상대방이 빠르게 벽을 타고 와도 소리를 낼 수 없었다.‘에라 모르겠다. 수비가 끝나기 전에 무조건 쳐들어가야 해.’방시원도 앞에 세 사람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어두운 곳에 숨어있었는데 머리까지 뒤집어쓰지는 않았지만 검은 야행복을 입고 있어 적인지 아군인지 판별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가벼운 몸집으로 자신이 가려고 했던 곳으로 날아가자 방시원은 어리둥절해졌다.‘혹시 우리를 구하러 온 것인가?’하지만 방시원은 바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그럴 리 없을 거야. 비록 그쪽과 연락을 취할 수 없지만 원수가 바뀌었고 지금의 원수는 왕표 뿐이야.’방시원은 왕표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왕표는 왕청여의 오빠라 방시원에겐 형님이었다. 무장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지 않았고 탁상공론에만 능했는데 그렇다고 또 실력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다만 왕표는 성격이 오만해서 장단점을 따져봤을 때 그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을 뿐이었다.협상과 구출, 방시원은 왕표가 분명히 전자를 택하지, 두 가지 모두를 고려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들어 잠입 의사를 표시했다.위소는 매우 커서 모두 열두 채의 건물이 있었다. 그리고 지하 감옥은 열한 동과 열두 동 사이에 단독으로 된 방이 있었는데 그 방으로 내려가면 지하 감옥이었다. 하지만 거긴 분명 많은 병력이 지키고 있을 것이었다. 모든 곳이 방어 태세를 바꾸고 있어 그들이 이리저리 숨어 다니면 무사히 열한 동에 도착할 수는 있을 것도 같았다. 그들은 벽에 붙어 살금살금 걸어가 지하감옥 입구에 병사들이 얼마나 있는지 보려고
세 줄기의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날아갔다. 사실 적절한 시기라는 건 없다. 작은 방 주변에 불이 켜져 있기 때문에 대낮처럼 밝지는 않지만 적어도 어떤 물체나 사람의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수백 개의 시선 아래에서 그들이 아무리 빠르고 경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작은 방 앞에 서서 문을 부숴야 지하 감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하 감옥에 들어가면 그들은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전에 사여묵과 무소위가 이미 조사해 봤기에 이런 상황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원래 계획은 무소위와 염 선생이 호위에게 달라붙어 시간을 끌고 사여묵이 지하 감옥으로 들어가 사람을 구출한 후 재빨리 장대성에게 넘긴 뒤 다시 돌아와 무소위와 염 선생을 돕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방시원이 있어 호위들을 더 쉽게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여묵의 그림자는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문은 철로 되어 있어서 부수기 쉽지 않았지만 사여묵은 쇠도 진흙처럼 쉽게 깎을 수 있는 칼을 꺼냈다. 칼의 무게는 가벼웠지만 칼날은 아주 날카로웠다. 그가 진기를 담아 칼날을 몇 번 내리치자 철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발로 걷어찬 후 뒤를 돌아보자 사부님이 긴 칼을 들고 대문을 지키고 있었고 염 선생은 수비 병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는 사부님을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염 선생이 걱정되었는데 염 선생의 무공은 최고는 아니었지만 경공이 좋아 경공으로 적들을 지치게 한 후 반격할 기회를 노리기만 하면 되었지만 위험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방시원 등인이 쳐들어온 것을 본 사여묵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람이 많으니 철문만 지키고 있으면 내가 지하 감옥으로 가서 사람을 구출할 수 있을 거야.’ 솔직히 말해서 이곳은 감옥이 아니라 밀실과 지하 통로였다. 여긴 전쟁에서 사국이 이기지 못한다면 주장들을 옮기거나 숨길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진 지하 밀실이었다.하지만 사여묵은 이 땅굴과 밀실에 대해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었다. 아래층으로 들어가면 갈
낮에 아당산에서 열린 상담에서 왕표의 태도는 무척 단호했다. 협상 전에 방천허와 제린은 모두 그에게 빅토르 앞에서 북명왕을 언급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왕표는 그들이 북명왕의 부하였으니 북명왕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승낙은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계산이 있었다. 앞서 여러 차례 협상할 때 그는 금이나 곡물, 포목, 비단 등으로 척사를 바꾸자고 흥정했지만, 빅토르가 동의하지 않아 협상은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번엔 왕표의 인내심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는 이미 척사를 위해 많은 양보를 했다고 생각했다. 5천 냥에서 만 냥으로 오른 것도 모자라 식량 3천 석, 비단 2천 필까지. 이런 대가로 인질을 바꾸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표는 그들이 너무 욕심이 많다고 생각했다. ‘시몬성으로 바꾸는 건 절대로 안 돼. 북명왕이 힘겹게 되찾아온 시몬성을 내 손으로 내놓으면 난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들 게 분명해.’ 이번 협상이 시작되자 그는 다시 한번 식량을 5천 석으로 늘렸지만 빅토르는 여전히 거절했다. 그러자 왕표는 화가 치밀어 올라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 성의가 없는 것 같군. 난 이미 최대한 양보를 했는데 아직도 만족을 하지 않다니. 그렇다면 이 협상도 계속할 필요가 없겠군.” 번역관이 그의 말을 번역하자 빅토르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협상하지 않을 건가? 정말로 당신들의 정탐꾼을 희생시키겠다는 것인가?” 그러자 왕표가 말했다. “성의가 없는 건 당신들이지. 협상할 성의가 없다면 안 하면 된다. 이것 또한 북명왕의 뜻이니 마음대로 하게.” 방천허와 제린은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분명 왕야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북명왕이란 세 글자는 빅토르도 알아들을 수 있어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긴장해서 물었다. “북명왕? 북명왕이 왔다는 건가?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왜 그가 협상하러 오지 않았는가?”번역관이 빅토르의 말을 번역했다
왕표는 두 사람의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고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보고 협상하라고 해놓고 내가 분명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는데 두 사람이 빅토르를 막아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남강을 수복한 후에야 통병이 되어서 장성들이 원래 불복했다. 그런데 협상마저 실패한다면 그의 위엄을 손상시킬 테니 그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방천허와 제린에게 명령했다. “그만 돌아오너라.” 그리고 번역관에게 말했다. “빅토르에게 말하거라. 그쪽에서 성의가 없으니 협상 종료하겠다고. 협상할 성의가 있다면 내가 말한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번역관이 말을 전하자 빅토르는 왕표를 보았는데 그의 표정에는 이미 인내심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어 명령했다. “당장 성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제린과 방천허는 쫓아가 빅토르를 계속 막았다. 제린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며 말했다. “빅토르 원수님. 왕 원수님은 척사를 모르니 그에게 정이 없어서 시몬성과 바꾸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흰 척사와 함께 전장에 나간 적이 있어 매우 중히 여깁니다. 그러니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저희가 가서 왕원수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빅토르가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설득할 수 있었다면 벌써 설득했겠지. 그리고 너희 북명왕이 시몬성과 인질을 바꾸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협상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아닙니다. 저희 왕야님은 시몬으로 오시는 길이니 며칠 후면 도착할 것입니다. 왕야께서도 척사를 매우 중시하시니 그가 오면 이 일은 분명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북명왕이 여기로 오고 있다고?” 빅토르는 말하며 제린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자 제린을 고개를 끄덕이며 진정성이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네, 맞습니다. 며칠 후면 도착할 겁니다.” 방천허는 물러나 왕표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원수님, 진정하십시오. 비록 우리가 협상을 종료하기로 결정했지만 협상시간을 최대한 오래 끌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
제린과 방천허는 속으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렇게 성의 없이 협상을 해서야 어떻게 빅토르를 붙잡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지금 왕야께서 빅토르가 돌아가기 전에 척사를 구하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사여묵이 장 씨를 구출해서 밖으로 나와보니 이미 큰 싸움이 벌어졌고 방시원 등인마저도 부상을 당했다. 그나마 사부님이 계셔서 아직은 큰 손해를 보진 않았다. 하지만 적의 수가 점점 많아져 지금 당장 후퇴해야 했다. 그는 뛰쳐나와 십여 명이 뒤엉켜 싸우는 장면을 보고 경공으로 번개처럼 날아서 업고 있던 사람을 장대성에게 맡겼다. 그러자 장대성은 그 사람을 업고 어둠을 틈타 재빨리 떠났다. 그리고 사여묵은 경공을 펼쳐 그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만약 한 명을 구하려다 여러 명이 잡힌다면 이번 구출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여묵은 손에 금착도를 들고 염 선생의 곁으로 날아가 칼을 휘둘러 순식간에 염 선생을 에워싼 병사들을 물리쳤다. 무소위는 고수와 맞섰다. 빅토르가 적지 않은 고수들을 데려갔지만 여전히 십여 명의 고수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무소위는 이미 사람을 구출해 내 더 이상 철문을 지키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자 마음 놓고 싸우기 시작했다. 무소위는 제자인 사여묵과 손을 잡으니 무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아 두 사람은 빠져나오기 쉬워도 다른 사람들은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포위망을 풀어 한 명씩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빅토르가 돌아올까 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도착할까 봐 걱정되어 조금도 우유부단해하지 않고 칼에 진기를 주입해서 돌풍 적인 속도로 한 번에 여러 명씩 처리했다. 이렇게 하면 진기를 더 빨리 소모할 수는 있지만 그들을 물리치고 빨리 도망갈 기회를 찾기는 어려웠다.무소위는 그가 무릅쓰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협력하여 사람들을 데리고 조금
그 묘지는 엄청 컸는데 희생된 병사 대부분이 거기에 묻혀 있었고 묘지의 입구에 아주 큰 묘비가 세워져 있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묘지기가 사는 방이 몇 칸 있었는데 묘지기는 이미 그들에게 제복 당해 갇혀 버렸다. 온몸이 묶인 채 입까지 틀어 막혀 있어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들은 구조하러 가기 전에 식량과 물을 단단히 비축해 놓았다. 물을 비축한 이유는 척사가 고형을 받았을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는데 사국은 전패해서 분명 척사에게 분풀이를 할 것이고 척사의 부상이 심할 경우엔 바로 산을 넘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들은 척사를 구출하러 온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라 준비한 분량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장대성은 이미 척사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다. 사여묵은 방시원을 내려놓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약과 거즈를 사부와 염 선생에게 건네주었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합시다.” 방시원은 등을 다쳐서 겨우 뛰다가 묘지에 도착했을 땐 이미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사여묵은 알약을 부숴 물과 함께 그에게 먹여 주었다. 그리고 옷을 찢었는데 어깨뼈에서 허리까지 뼈가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가 나 있었다. 미리 지혈을 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출혈이 심해져 죽었을 것이었다. 혈을 봉인한 지 너무 오래되어 그들은 손상이 심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였다. 상처를 치료한 후 사여묵은 눈앞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는데 방시원 말고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혼수상태에 빠진 척사도 아무리 봐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방시원은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손을 들었다. “방시원 출석.” 공기가 잠깐 멈춘 듯 조용하더니 모두 보고하기 시작했다. “제방 출석.” “진계 출석.” “진결 출석.” “왕두 출석.” “왕오 출석.” “장태 출석.” “노홍 출석.” “노아금 출석.” 그러자 사여묵은 얼굴을 돌려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감정을 억제하고 말했다. “내가 송가군을 대표해서 당신들의 복귀를 환영한다.”
모두 동정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순간 자신의 부인도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여기에서 노아금만 결혼하지 않았는데 그는 방시원 어머니의 친정 조카로서 처음 전쟁에 참여해 고작 병사에 불과했다. 왕두와 왕오는 수주 출신으로 아금과 장태같은 평범한 병사들이고, 제방은 제육공자의 형으로서 추진화가 주워 온 아들이었다. 공부는 못하지만 무술을 좋아해서 전쟁터에 나가 몇 년을 단련해 포로로 잡히기 전엔 이미 백 부장이 되어 있었다. 제방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약혼을 했지만 그의 희생 소식이 전해지면 약혼녀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것이고 덕망이 높은 제씨 가문은 약혼녀에게 기다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방도 약혼녀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다만 그는 방시원이 불쌍해졌다. 몇 년 동안 방시원은 힘들 때마다 부인을 언급하며 그들 부부의 이야기를 하곤 했기 때문이다. 장 씨도 자신의 부인이 겁이 많아 자신이 희생했다는 걸 알면 분명 오랫동안 슬퍼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 씨는 자신이 살아서 돌아갈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부인이 선평후부에 있지 말고 친정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몇 년 동안 정말 위험했는데 언제든지 잡힐 수 있었고 잡히기만 하면 살 길이 없었다. 그들은 충성을 택하고 의를 저버렸으니 자신이 먼저 부인을 배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계와 진잠은 예부상서의 아들이었는데 진계는 적자였고 진잠은 서자였다. 그들 위에 형이 세 명 더 있었는데 모두 공부를 해서 벼슬에 들어갔고 그들 두 형제만 무술을 익혀 전쟁터로 나갔다. 그들이 ‘희생’했다고 했을 때 진상서는 예부좌시랑의 자리에 있었는데 두 아들의 전공에 자신의 근면함까지 더해 예부상서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 사여묵과 송석석의 결혼식 역시 진상서가 주관했다.방시원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더니 간신히 웃으며 눈가의 눈물을 애써 참고 말했다. “차라리 잘 된 것 같습니다. 시집갔으니 더 이상 외롭게 지내지 않아도 되겠
날씨가 점점 더워져 황실에서는 이미 얼음을 쓰기 시작했다.송석석은 사여묵이 지금까지 편지 한 통도 보내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사숙과 함께 간 것이긴 하지만 인질을 구하기 위해 사국 변성에 침입한 것이고, 사국 병사들이 변성에 집결되어 있어 아주 위험했다.홍시가 탐지해 온 소식에 따르면 장군부 사방에 사복을 입은 경위가 밤낮으로 교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보아하니 황제께서도 누군가가 이방을 해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서경 쪽에서는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이상서가 진성으로 돌아와 멸문 사건을 이미 알아냈다고 보고 했다. 바로 누군가가 그 부인에게 구혼선충을 이용해 이성을 잃게 만들었는데, 그들 일가족을 해친 사람은 그 지역의 도만이라는 상인이라고 했다.범인도 이미 자백했다. 살해 동기는 바로 두 집이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죽은 일가가 모든 장사를 빼앗아가 원한을 품고 있던 중 마침 도만이라는 낭자가 선충을 다룰 줄 안다고 해서 허 씨를 매수하여 선충을 사용해 량 씨를 이성을 잃게 해서 가문을 멸살해버린 것이었다.흠차는 먼저 참수하고 나중에 보고할 권한이 있어 범인이 죄를 인정한 후 이택은 필주 관부에 도만 부부를 참수하여 참사한 피해자를 위로하라고 명령했다.그렇기에 이 사건은 다시 대리사에 회부하여 재심할 필요가 없었다.송석석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청작이 돌아와서 알려준 것이었다. 청작은 범인이 법정에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일시적인 충동으로 벌인 일이라고 가슴을 치며 후회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상서는 그의 자식을 연루시키지 않고 두 사람만 참수해서 사건을 종결했다. 하지만 송석석은 이 일이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장사판에 싸우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일시적인 충동에 의한 살인사건도 적지 않지만 이건 분명히 면밀한 계획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게다가 선충을 사용하는 법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도만 낭자가 알고 있다고 해도 허 씨를 매수해 독을 타고 선충을 이용해 살인을 하는 과정에서 조금도 차질이 있어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