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녀의 행동이 느렸기에 자식들이 그녀를 붙잡을 시간은 충분했다. 그녀는 그저 사여묵을 겁주어 부대가 물건을 부수는 것을 멈추게 하려 했던 것이었는데, 사여묵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무표정하게 서 있었고 부대원들 또한 전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보이는 족족 부수어 댔고 일부 겁에 질린 부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후원으로 도망치기 바빴다.조월순은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사여묵이 이 정도로 무정한 인간인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그녀의 자살 협박에도 눈 깜빡하지 않을 줄은 몰랐다.부대는 내원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내원은 남자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고 몽동이는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전원과 화청만 있는 힘껏 망가뜨렸다.그 광경에 승은백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오늘 밤 사여묵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를 짐작했다. 바로 란이가 오늘 량소에게 밀려 태기가 움직였기 때문일 것이다.량소를 처벌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이빨이 부러지고, 피범벅 된 입을 본 노태부인이 너무나도 마음 아파했기 때문에 그를 더 이상 처벌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회왕부에서도 아무런 대응이 없었기에, 그들은 잠시나마 방심하고 있었다.혜태비가 밤늦게 찾아온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부러 분쟁을 일으켜 사여묵과 왕비를 불러들인 것이다.잘못은 그들 쪽에 있었기 때문에 사여묵이 오늘 밤 무슨 일을 하든 승은백부는 그저 참아야 했다. 이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승은백부의 사람이 혜태비를 때린 죄로 반역의 죄목이 쓸 것이다.더 나아가 파면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는 량소가 정실을 박대하고 첩을 편애해 태기가 움직여 한 달 동안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알려질 것이다.그 중의 어떤 것이든 지금의 승은백부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차라리 사여묵의 분노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그러면 황제에게까지는 일이 번지지 않을 것이다.량소는 오
승은백부의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가 보았더니 홀의 모습과 다를 바 없이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승은백은 창백한 얼굴로 앞으로 나가더니 사여묵에게 공손히 말했다.“이제 분이 좀 풀리셨는지요?”사여묵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대신 송석석이 입을 열었다.“그대는 어떻소?”승은백은 뒷니를 꽉 물고 대답했다.“어찌 감히 원한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감히?” 송석석의 얼굴에는 미소 한 점 보이지 않았다.“감히 그럴 마음조차 없기를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엔 승은백부가 평지가 될 것이오.”승은백은 그녀가 출가할 때의 화려한 모습을 보았기에, 그녀 뒤에 북명왕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무림의 인사들도 그녀의 지휘를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승은백부에도 그녀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승은백부를 부수는 것은 물론이고, 승은백부를 몰살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하지만 오늘 밤 그는 조상들의 얼굴에 먹칠을 단단히 하고 말았다.이번 일이 소문이 나면 그는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것이다.그는 송석석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그의 속도 모르고 량소가 난데없이 날뛰었다.“권세로 사람을 억누르는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그를 바라보던 송석석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내일 아침이면 경성의 학자들을 모아 북명왕부를 비난하는 글을 쓸 생각이시지요? 게다가 천자 제자의 명성을 이용해 오늘 밤의 일을 크게 벌리려 하실 테지요?”량소는 순간 멈칫했다. ‘그녀가 어찌 알았지?’그는 당당하게 턱을 들고, 입가의 피를 닦으며 말했다.“이제야 겁이 나오? 하지만 이미 늦었소. 내 두 손을 잘라내지 않는 한, 나는 반드시 당신들 비난하는 글을 쓸 것이오.”송석석은 차분했다.“그대 두 손을 자를 이유는 없지요. 그대처럼 글 쓰는 자는 글을 쓰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낭비지요. 기억하세요. 글은 잘 써야 합니다. 충효와 인의
시만자가 송석석을 바라보자, 송석석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시만자는 냉랭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네가 청관이라 하였느냐? 량소 같은 모자란 자는 속일 수 있어도 감히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그 말에 량소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감히 그녀를 비방하다니!”하지만 시만자는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비방이라니? 그런 것은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연유야, 네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 이 자들에게 말해줄까? 네 아비가 네게 지어준 그 아름다운 이름 말이다. 아마 ‘고청우’라 하였겠지? 하지만, 장공주는 너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 장공주는 너를 ‘무녀’라 불렀을 것이야.”연유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러나 곧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승은백과 그의 가족들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모두가 연유의 아름답고 고상한 얼굴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그녀가 장공주의 딸이라니?장공주의 친딸은 아닐 것이다. 장공주는 슬하에 딸인 가의군주만을 본인의 딸로 두었다. 그러고 보니 장공주가 남편에게 많은 첩을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첩들은 외부에 나서는 일이 없었고, 그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이 일은 너무도 말이 안 된다.장공주의 친딸이 아니어도 장공주를 적모로 불러야 했을 터이니 장공주가 서녀를 홍등가로 내몰리게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시만자는 콧방귀를 뀌었다.“이미 샅샅이 조사했으니 부인할 생각은 하지 마라. 그 작은 비밀로 왕비님을 정말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느냐?”“아니야, 그런 거 아닙니다.” 연유는 눈물을 흘리며 처절하게 량소의 소매를 붙잡았다.“제가 장공주의 딸이라면, 어찌 홍등가에 머물고 있었겠습니까?”눈물을 흘리고 있는 연유의 모습이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량소는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나는 그대를 믿소. 저 자는 당신을 통해 장공주를 비방하려는 것이오.”“어리석은 놈!” 사여묵이 차갑게 비웃었다. 송석석은 승은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녀
연유는 여전히 울먹였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손가락만은 량소의 옷자락을 단단히 잡고 있었다. 몹시 두려움에 차 있는 모습이였다.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울음소리는 여전히 억울하고 가련하게 들려왔다.“일어나시오. 이 지저분한 곳에 더 있을 필요가 없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사여묵이 송석석의 손을 잡고, 옆에 서 있던 혜태비를 향해 말했다.“어머니, 이제 돌아가시지요.”그러자 혜태비도 놀란 표정을 거두고 일어서고는 회왕비를 한 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아까 제가 란이를 보러 갔을 때, 그대가 온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아니어서 실망했지요. 어미가 이토록 나약하니, 딸도 그 뒤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소란을 피운 것이 누구를 위한 일인지 그대도 잘 알고 있지요? 어미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싶다면, 오늘 일은 쉽게 넘기지 말도록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저는 그대를 경멸할 것입니다.”송석석이 담담하게 말했다.“어머니, 가시지요. 어머니라면 누구든 모성애를 가질 것이니 숙모께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실 겁니다.”“석석아!” 그녀를 불러 세운 회왕비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네가 란이를 위해 온 것은 알겠다만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란이가 승은백부에서 지내기가 더욱 힘들어질 것은 생각해 보았느냐?”“지금은 뭐, 잘 지내고 있습니까?” 송석석은 반문하며 방 안을 한 번 쭉 가리켰다. “이들을 보세요. 란이를 위해 나서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석소 사저가 그를 때리지 않았다면, 란이를 밀친 일도 그저 몇 마디 질책으로 끝났을 겁니다.”송석석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그녀는 회왕부부가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회왕은 실권이 없고 조정에서 직무를 맡고 있지 않더라도, 친왕이라는 칭호는 작은 백작부를 능가하기에 충분했다.그러나 란이가 이토록 큰 고통을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왕비는 오히려 그녀를 질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회 왕비가 그녀의 입을 막고 경고했다.“다시는 그 두 글자 절대 꺼내지 말거라. 너는 군주라 연봉과 식읍이 나오는데 승은백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너 자신을 먹여 살릴 수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나는 량세자가 반드시 잘못을 반성하고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그 여자는 장공주의 딸이다. 그녀가 저택으로 들어온 것은 분명 음모가 있을 것이다.”란이는 속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란이는 그 여자의 수단이 아무리 비겁해도 량소가 자신을 믿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란이는 그렇게 량소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회 왕비는 란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말 대로 하겠다는 뜻인 줄 착각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내 말을 듣거라. 아이가 태어나면 량세자가 아이를 보아서라도 변할 것이고, 노부인께서도 증손자를 예뻐하지 않을 리가 있겠나?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면 그들도 너에게 잘해줄 것이야. 이 기간만 버틴다면 괜찮아질 것이니 좀만 참거라.”“사실 아무리 말해봤자 모두 그 여자의 문제다. 너희 시부모는 그 천한 년을 집에 들이는 것을 반대했다. 내가 오늘 그녀를 만나보니 량세자가 왜 그녀에게 현혹되었는지 바로 알겠더구나. 모습은 다소 낭패스럽긴 했지만 예쁘장하게 생긴 게 남자 다 홀리게 생겼더군.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백부에서는 그녀를 들일 리가 없다. 그녀는 장공주가 홍등가로 보낸 사람이다. 들이면 분명 장공주와 맞서는 게 될 텐데 그렇게 할 리가 없잖니?”회 왕비가 란이의 야윈 얼굴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그리고 량세자는 네가 고른 남편이니 잘못 골랐더라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넌 우리 가족이 왜 이렇게 겸손하게 행동하는지 아느냐? 네 아버지의 분배받은 땅이 혹독하게 추운 곳에 있는 데다 만약 겸손하지 못하게 행동하다 사고를 쳐서 황제폐하를 불쾌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 같니? 남은 생에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 것 같냐?”
회왕 부부가 떠나자 승은백부의 하인들이 저택을 청소하기 시작했다.량소와 연유만 화청에 남았고, 승은백도 부인과 함께 노부인을 배웅하러 떠났다.다른 방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졌다. 노부인은 밖으로 나가면서 승은백에게 다시금 량소를 곤란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우리 가문에 량소처럼 뛰어난 자가 어디 있더냐? 그는 황제가 친히 책봉한 탐화랑이니 면직도 일시적일 것이다. 지금 첩이 없는 남자가 또 어디 있느냐?“어머니, 이제 그만 돌아가 쉬세요.”승은백은 노부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부인보고 노부인을 부축하라고 말할 뿐이였다. 그러고는 량소 품에 안겨 흐느끼는 연유를 보고 짜증이 나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네가 울긴 왜 우느냐? 오늘 네가 군주를 도발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겠냐?”그러자 량소가 연유를 감싸며 말했다.“아버지, 어떻게 연유 탓할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도 군주 방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악독한지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들은 나도 감히 때릴 수 있습니다.”“못난 놈, 닥치거라!”승은백은 그만 화가 치밀어 올라 연유를 향해 소리쳤다. “넌 당장 가서 무릎 꿇거라. 내 명령 없이는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된다.”그러자 량소가 말했다.“그럴 순 없습니다. 연유의 얼굴을 보십시오. 연유는 이미 그 악독한 여자에 의해 온 몸이 다 상했습니다.”승은백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량소의 뺨을 후려갈겼다.“이런 못난 놈, 너는 아직도 어떤 재앙이 닥칠지 감이 안 잡히느냐?”여러 번 뺨을 맞은 량소는 결국 분노가 극에 달해 소리쳤다.“그래요. 모두들 나와 연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니 세자의 신분도 포기하고 우린 백부를 떠나겠습니다. 나도 이 작은 백부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닙니다.”그는 말을 한 후 당장 방에 들어가 짐을 싸기 시작했다.승은백은 의자에 앉아 세자가 짐을 싸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연유가 세자를 말리던가?” “아니요. 오히려 세자와 함께 짐을 쌌습니다.” 승은백은 눈을 감고 북명왕비
량소는 정착하자마자 북명황실을 규탄하는 글을 썼다.랑소는 예전에 친하게 지냈던 학생 열여 명을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 온 학생은 그저 서너 명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학생들조차도 그가 쓴 글을 보고 놀라서 일이 있다는 저마다의 핑계로 재빨리 자리를 떴다.량소는 어리둥절해서 급히 뒤쫓아가 그들 중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너희는 왜 북명황실이 사람을 괴롭히는 걸 뻔히 보고서도 나를 돕지 않느냐?”그 학생은 성이 무 씨고, 이름은 무삼랑이다. 그는 작년에 국자감에 입학해 량소를 존경해 왔다. 하지만 그건 량소가 홍등가의 여인을 첩으로 맞기 전에 일이고 사실 오늘 이 자리에 온 것도 량소의 체면을 세워준 것이었다.량소가 쓴 글 속엔 남강을 수복한 친왕을 규탄하는 듯했지만 잘 들여다보면 북명왕이 연유라는 여인을 경시하는 내용들이었다.무삼랑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이 글이 발표되는 순간 량소가 세상 사람들에게 꾸짖음을 당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이 일에 엮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몸가짐이 바르면 말하지 않아도 따르고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말을 해도 따를 수 없느니라.”량소의 질문에 무감랑은 이렇게 대답하고 떠났다.그러자 량소는 화가 나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난 황제폐하께서 직접 책봉한 탐화랑인데 몸가짐이 바르지 않을 리가 있나? 권세에 빌붙어 아부나 하는 것들이라고! 예전엔 그들이 기골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북명왕의 명성을 이렇게나 두려워하다니.’량소는 화가 나 찻집에서 물건을 부쉈다. 그리고 그가 아무리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신분이 얼마나 존귀한지 호통을 쳐도 찻집 주인은 차가운 얼굴로 그에게 배상을 요구했다.북명황실에서 사여묵이 관아로 돌아간 후 혜 태비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송석석이 문안드리러 오자 황급히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석석아, 그 연유라는 여인은 어떻게 된 것이냐? 진정 장공주의 서녀란 말이냐?”그러자 송석석이 대답했다.“어머님, 모두 사실이옵니다. 그리고 고청우.. 그러니까 연
송석석은 만자에게 사람을 보내 량소를 감시하게 했다. 탐화랑이 노부인의 보살핌을 받아 여전히 패기가 넘쳤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쓴 글을 들고 국자감으로 가 황제에게 제출해 줄 사람을 찾았지만 국자감에선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국자감의 사람들이 인재를 질투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분개하여 한림원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려 하였으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기만 하면 피하기 바빴다. 황제께서 직접 면직을 선포한 탐화랑이 첩을 들여 아내를 냉대한 것도 모자라 백부를 떠나 세자까지 포기했다는 소문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그가 상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아내의 돈으로 홍등가의 여인을 데리고 나온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학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욕하 바빴다. 그리고 연유의 신분이 정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모두 꺼려했다. 량소는 며칠을 계속 뛰어다녔으나 성과가 없자 분노가 극에 달했고 시여묵의 압박 때문에 자신과 왕래하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자 속으로 분해서 술을 잔뜩 마시고 주먹을 휘두르며 마구 소리쳤다. “황권은 권세만 지켜주는구나! 사여묵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 군공을 믿고 멋대로 행패를 부리는데 어쩜 나서서 막는 사람 한 명 없느냐? 조정의 문무백관은 모두 겁쟁이인 것이냐?!” 그가 공적인 자리에서 심한 말을 하자 불과 3일 만에 돌풍처럼 온 진성을 휩쓸어 결국 조정의 문무백관들까지 다 알게 되었다. 그 말에 탐화랑이 안하무인격으로 잘난 체한다는 문무백관들의 상주문이 승상에게로 날아왔다. 묵 승상은 이 일을 숨기지 않고 황제에게 바로 알렸다. 그러자 황제가 사여묵에게 물어 그날의 일을 알게 되었다. 란이는 황제의 사촌 여동생이다. 황제는 사촌 여동생이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철이 들어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기에 그녀에게 그렇게 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연유의 신분이 장공주의 서녀라는 사실에 황제는 이상을 느꼈다.연유의 정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