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이 직접 보내 연왕과 회왕은 함께 성문에서 압송되었다. 회왕은 인수할 때 무상이 자신을 풀어줄 줄 알고 있엇는데, 경군들이 그들을 억류할 때까지 무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자 당황해서 허우적거리며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무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안심하라는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전에도 그를 묶어 놓고, 나중에 같이 나간다고 했지만 결국엔 셋째 형만 넘겨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무상이 자신까지 경군에게 넘기는 것을 본 회왕은 그가 자신까지 진성으로 보내려고 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자 당황해서 크게 소리쳤다. “나는 무죄요! 내가 연왕을 체포한 것이니 난 놔주오!” 그러자 방시원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어리석긴.” “무상…!” 회왕의 얼음처럼 차가워진 눈빛으로 무상을 바라보았다. 그는 사나운 표정에서 이내 애원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무상 선생, 당신은 내가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얼른 방 장군에게 말해주시오!” 하지만 무상은 눈을 내리깔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저희 황제폐하께서 유무죄를 잘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저희 황제폐하’라는 말을 힘 있게 말하자 회왕은 일말의 희망을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때가 되어 추몽이 병마를 이끌고 쳐들어오면 경군의 목숨은 모두 연주에 남게 될 테니 난 당연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야. 하지만 정말 그런 거라면 무상이 왜 미리 말하지 않는 것이지?’ 그는 마음속으로 걱정하면서도,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어. 그들이 정말로 날 버린 것이라면 직접 죽이겠지 왜 방시원의 손에 넣겠어? 내가 추몽이 병마를 이끌고 성을 포위해서 습격할 것을 말할까 봐 두렵지도 않나?’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무상을 바라보자, 무상이 그를 향해 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되었든 경군은 연주를 떠
두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 무소위는 이미 무림인들을 데리고 영주에 도착했다. 시간까지 모두 잘 맞춰져 있었는데 이때쯤이면 영주에 일을 결정지을 만한 사람이 없었고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은 거의 출동하여 천 명의 사람과 관아의 관리만이 남아서 영주를 지키고 있었다. 무소위는 영패를 들고 곧장 지부의 관아로 가서 지부를 파면하고 관아를 차지했다. 그와 동시에 시 씨 가문의 가주는 직접 여러 표국과 상회의 호위들을 이끌고 왔다. 노 휘왕의 영패가 있어 영군황실이 모두 봉쇄되었기 때문에 영주는 가장 공략하기 좋은 곳이었다. 더불어 영군황실에는 더 이상 노휘왕의 사람은 없었고 예전의 사람들은 모두 마을로 쫓겨난 상황이었다. 무소위는 관아를 점거한 후, 사람을 이끌고 영군황실로 가서 사람들을 모두 체포하고 고문 끝에 그들이 연락하는 암호를 모두 알아냈다. 게다가 추몽이 기르던 전서구까지 모두 챙겼다. 전서구는 정해진 노선이 있었는데 그중 몇 마리는 특별히 영군왕에게 연락하는 데만 사용되었다. 추몽이 대승하면 전서구의 다리에 붉은 비단을 묶고 실패하면 전서구의 다리에 흰색 비단을 묶었다. 만약 전황이 교착되어 승부를 가리기 어렵다면 전서구의 다리에 아무것도 묶지 않고 보내 소식을 알린 것이었다. 그리고 각종 은밀한 언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전서구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심지어, 참모들이 제출한 암어록에는 암어의 뜻이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돼지, 개, 소, 말, 늑대, 호랑이, 뱀, 여우 등의 호칭이 있었는데 참모들의 진술에 따르면 모두 지정된 상대가 있다고 했다. 돼지는 연왕, 개는 회왕, 뱀은 숙청제, 늑대는 송석석, 호랑이는 사여묵, 그리고 용은 자기 자신이었다. 그중 승상과 육부상서는 그들만의 호칭이 있다고 했다.그리고 영군왕과 역모를 꾸민 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도 찾아냈는데 그중 많은 단어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시 씨 가주와의 서신 왕래는 명확했는데 생명을 구해준 은혜로 그
김수덕도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분명히 추몽 선생이 직접 말씀하셨는데 말이오.” 그러자 무상은 점점 두려움이 앞섰다. 추상이 평소에 시간을 정하면 일찍 오면 왔지 늦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도중에 매복이라도 당했단 말이오? 그럴 리가 없소. 전에 조사한 바로는 목종욱의 병마가 분리되어 비적을 토벌하고 있다고 했소. 지금쯤 이미 월지로 갔으니 돌아올 리가 없소.” “만약 병마가 도중에 가로막았다면 추몽 선생은 바로 사람을 보내 통지할 것이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들에게 정탐꾼이 있는 것 같소.” 김수덕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공포에 가득 찬 말투로 물었다. ‘무상 선생, 이제 어떡한 단 말이오? 우리는 경군을 이길 수 없소.” 무상은 심호흡을 몇 번 한 후에 진정하고 말했다. “그러니 지금 우린 탈출하여 추몽과 합류할 수밖에 없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연주는 함락될 것이오.” 김수덕이 조급해져서 말했다. “가족이 이렇게나 많은데 어찌 탈출한 단 말이오? 그들이 성문을 막고 있는 탓에 두괴산으로 밖에 도망갈 수 없소. 노약자와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데 대체 어찌 두괴산으로 도망간단 말이오?” 그러자 무상이 연황실의 하인과 호위를 지휘하며 말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소. 일단 우리 먼저 탈출하고 다시 계획을 짜봅시다. 방시원은 평민을 죽이지 않으니 가족들은 무사할 것이오.” 김수덕이 급히 뒤뜰로 달려갔는데, 측비 김 씨는 이미 소식을 들은듯 짐을 싸고 있었다. 그녀는 무상의 분석을 듣지 않아도 지금 도망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연왕의 아들 딸들 또한 모두 놀라서 비싼 물건을 정리하려고 했으나 하인들은 전혀 말을 듣지 않았고, 심지어는 장신구를 모두 빼앗아 뒷문으로 도망쳐 버렸다. 김수덕이 검을 들고 연달아 몇 명을 죽이고 나서야 하인들이 더 이상 날뛰지 않았다. 측비 김 씨가 오라버니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 “오라버니, 얼른 사람을 파견해 우리가 도망가는 것을 보호해 주
야외에서의 전쟁 또한 싸우면서 물러설 수 있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기만 하면, 상황은 쉽게 되돌릴 수 있었다.그래서 방시원은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길 때까지 그들이 도망갈 수 없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한편, 연주 성내에서 무상도 붙잡혀 연왕 등의 사람들과 함께 갇혔다.그 모습에 회왕이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무상 선생, 당신은 대체 왜 잡힌 것이오? 추몽이 전패했소?”무상의 옷은 엉망진창이 됐고 온몸에 상처가 났으며 입가의 고인 피는 굳어 낭패하기 그지없었다.연왕은 아직도 자신이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고 밤새도록 왜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지 걱정만 했다. 그러고는 추몽을 바랄 수는 없는 것 같으니,하상지라도 오길 바랐다. 왜냐하면 하상지는 반드시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무상까지 갇힌 것을 보자, 마지막 희망조차 사라져 버렸다.그는 이전에 자신의 몸으로 적을 성으로 유인하려고 할 때 실패할 가능성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반면, 회왕은 아니었다. 그는 줄곧 추몽과 하상지가 도착하기만 하면 경군을 모조리 섬멸할 수 있다고 했기에, 무상이 갇히는 것을 보고 당황해하며 말했다.“어서 말해보시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추몽이 전패한 것이오, 아니면 오지 않는 것이오?”무상은 입을 오므리고 있었는데, 그의 눈 밑에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는 기색이 띠었다.그는 결국 두괴산으로 도망치기로 결정했고 상황이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곧장 진성으로 달려가 영군왕에게 의지하려 했지만 너무 늦은 뒤였다. 두괴산은 이미 경군에 의해 봉쇄되어 도망칠 수 없었기에, 무상은 그렇게 그들에게 체포가 된 것이었다. 그러자 회왕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소리쳤다.“말을 안 하는 걸 보니, 정말 추몽이 안 왔다는 말이오?! 추몽이 왔다면 하룻밤 만에 전패하지는 않을 것인데. 우린 그들에게 속은 것이오… 무상, 모두 당신 때문이오. 당신이 영군왕에게 의탁하고 셋째 형을 배신하라고 하지 않았소? 우린 당신과 영군왕에게 속은 것이오!
연왕은 그제서야 자신이 정말로 패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입술을 덜덜 떨었고,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듯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당황함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밀려와, 역대 왕조들 중 역정의 후과를 떠올리니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갔다. 이전에도 비록 실패했을 경우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는 기껏해야 자신의 목숨을 끝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포로가 되어 비녀까지 빼앗겨 산발이 된 채로 이곳에 갇혀 버렸다. 세 면이 창살이고 한쪽만 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단단했지만 머리를 박는다고 해도 죽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감옥 밖에는 사람이 지키고 있어, 박는다고 해도 아프기만 할 뿐 고생할 것이 뻔했다. 그는 화를 참을 수 없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왜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지? 설령 실패하더라도 내 곁엔 생사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야 하건만, 지금은 곁에 사람은 있지만 한마음이 아니다.’ 그러고는 분노와 증오가 찬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가 날 배신하고 좋은 결과가 있을 줄 알았느냐? 결국은 나와 함께 갇힌 죄수가 되지 않았느냐? 사청엄이 너희를 구해준다더냐?” 죽음이 두려운 회왕은 그 말을 듣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상의 곁으로 가서 그의 소매를 덥석 잡았다. “대체 무슨 상황이오? 그들이 우릴 구하러 오긴 온 단 말이오…? 말 좀 해 보오. 죽더라고 이런 건 알고 죽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자 무상이 거칠고 참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우릴 구하러 오지 않을 것입니다. 추몽과 하상지가 모두 오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들은 성 밖에서 매복 공격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는 보름 동안 포위되어 소식이 늦으니 아마도 목종욱은 일찍 각처의 대란을 평정하고 매복해 있었을 것입니다.”무상의 말을 들은 회왕의 눈빛은 절망으로 변했다. ‘어쩐지 그들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지 않더라니, 지금 보니 목종욱을 기다리고 있었구나. 어떻게 이런 실수를 할 수 있는 거지? 애초에 사청엄의
흠천감 말 대로 올해는 비가 확실히 많이 내렸다. 7월 18일, 진성에도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교외에 있던 영군왕의 비밀 정탐꾼은 비를 맞으며 진성으로 달려가는 부대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이라 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 번거롭지 않았기에, 우두머리가 추몽인 것을 보자마자 바로 과일 한 바구니를 메고 진성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하루에 많은 장인들이 과일 바구니를 메고 진성으로 들어와 팔거나 훈귀의 가문으로 보내기 때문에, 아무한테도 주목받지 않을 딱 좋은 기회였다. 그는 순조롭게 휘황실의 후문에 도착할 수 있었고,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몸을 꾸겨넣어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 한편, 서재에서 사청엄은 위엄 있게 앉아 그의 보고를 듣고 말했다. “추 선생인 게 확실하냐?” 그의 말투는 차분했고 조금의 흥분도 없었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 분명히 추 선생이었습니다.” “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정말 똑똑히 본 것이냐?” 사청엄은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덮을 정도로 요란한 것을 듣고 물었다. “똑똑히 보았습니다. 게다가 그가 이끄는 군대들 모두 우리의 복장을 입고 있어서 틀림없습니다.” 사청엄이 붉은 비단을 만지작거리더니 다시 그 사람을 노려보며 물었다. “추 선생 손목에 정말 붉은 비단이 매어져 있던가?” 그러자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럼 추 선생이 가짜라는 말씀입니까?”그는 그들이 대부분 암호나 표식을 통해 연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군왕이 진작에 추 성생과 손목에 붉은 비단을 묶는다고 약속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점 마음이 급해져서 말했다. “군왕님, 만약 가짜라면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청엄은 그의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었다. “네가 똑똑히 보았다고 하니 가짜일 리는 없을 것이다. 추 선생이 진성으로 들어오는 길에 붉은 비단을 묶는 걸 잊었나 보구나.” 그러자 남자는 또 어리둥절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잊
사청엄은 우산을 받쳐 들고 노휘왕의 마당에 도착한 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단번에 수하를 물리쳤다. 심지어 고청영도 남겨두지 않았다. 노휘왕은 방금 식사를 마치고 하인들이 치우려던 중이었고, 사청엄은 앉아서 노 휘왕의 젓가락과 그릇을 들고 남은 음식들을 먹는 중이었다. 그는 예전과 같은 엄중한 모습으로 먹는 반면, 노 휘왕은 화가 치밀었고 역겹기까지 했다. 어릴 적부터 그를 잘 양성해서 그의 행동은 모두 번왕의 기질에 부합했지만 아쉬운 건 야망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잔인한 점이었다. 그는 노 휘왕이 먹다 남긴 음식을 다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낭비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마침 제가 배가 고파서 먹었는데 괜찮지요?” 그러자 노 휘왕이 차갑게 답했다. “괜찮다. 남아도 개를 먹일 것이니, 그건 네가 먹어도 같은 것이다.” “제가 개면 부왕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전 그저 부왕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것 뿐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곧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 휘왕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진정하며 말했다. “예로부터 역적에겐 좋은 결말이 없었으니 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청엄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부왕께서 제 걱정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반드시 예외일 것입니다. 그러니 부왕께서는 용포를 입고 황제가 되는 것만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노 휘왕이 냉소하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자신 있다니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리는데, 답해주겠느냐?” 사청엄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답했다. “제가 한 거 맞습니다.” 그러자 노 휘왕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갑자기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대체 왜 그런 것이냐?!”사청엄은 한숨을 쉬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본래 목표는 성릉관의 소 씨 가문이었지만, 소 씨 온 가문이 멸망한다면 성릉관에선 더 이상 수란석을 죽일 수
사청엄은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듯 계속해서 말했다. “수란키라는 자는 제가 일찍이 사적으로 접촉해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서경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진성에서 알아낸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서경 내부의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하던 참에 수란석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수란석은 자신의 형님 밑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저는 그의 야망을 알고 있었고 무슨 짓이든 그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당시 서경 태자가 전장에 나간 것도 수란석이 장수들이 봉급을 받고 공을 세우기 위해 백성을 죽인다는 소식을 퍼뜨려 태자가 신분을 숨기고 조사하러 간 것입니다.” “그가 녹분성으로 간 게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 노 휘왕이 물었다. “제가 나서서 그를 설득해 동맹을 맺는 게 원래 목적이었지요.” 사청엄은 유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중간에 이방이 나타나서 제 계획을 다 망쳐버렸습니다. 그래도 수란석은 자신이 전장에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제가 그에게 만들어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란석이 왕위에 오른 후, 죽은 태자의 복수를 한다는 이유로 새 황제에게 중용되었고, 새 황제와 세력을 형성하여 냉옥 장공주와 대항했지요. 그리고 서경이 혼란스러워진 것이 내가 바라던 바입니다. 그들이 혼란스러워야 그 틈을 타서 제게 유리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성릉관에 도발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의 말투는 평범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사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빅토르는 전패해서 돌아간 후 문책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냉대와 굴욕까지 당했지요. 그가 다시 일어날 생각이 없겠습니까? 제가 그에게 준 조건은 남강의 몇 개의 성이었으니 그가 사국에서 명성을 펼치기엔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기회를 잡았고 모든 힘을 동원해서 사국왕에게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일어났고, 드디어 제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부왕, 이 모든 일을 하기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온갖 정성과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