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천감 말 대로 올해는 비가 확실히 많이 내렸다. 7월 18일, 진성에도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교외에 있던 영군왕의 비밀 정탐꾼은 비를 맞으며 진성으로 달려가는 부대를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마을 사람들이라 진성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리 번거롭지 않았기에, 우두머리가 추몽인 것을 보자마자 바로 과일 한 바구니를 메고 진성으로 들어갔다. 왜냐하면 하루에 많은 장인들이 과일 바구니를 메고 진성으로 들어와 팔거나 훈귀의 가문으로 보내기 때문에, 아무한테도 주목받지 않을 딱 좋은 기회였다. 그는 순조롭게 휘황실의 후문에 도착할 수 있었고, 문이 열리자마자 재빨리 몸을 꾸겨넣어 들어가는 것에 성공했다. 한편, 서재에서 사청엄은 위엄 있게 앉아 그의 보고를 듣고 말했다. “추 선생인 게 확실하냐?” 그의 말투는 차분했고 조금의 흥분도 없었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예, 분명히 추 선생이었습니다.” “비가 이렇게나 많이 오는데, 정말 똑똑히 본 것이냐?” 사청엄은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자신의 목소리를 덮을 정도로 요란한 것을 듣고 물었다. “똑똑히 보았습니다. 게다가 그가 이끄는 군대들 모두 우리의 복장을 입고 있어서 틀림없습니다.” 사청엄이 붉은 비단을 만지작거리더니 다시 그 사람을 노려보며 물었다. “추 선생 손목에 정말 붉은 비단이 매어져 있던가?” 그러자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럼 추 선생이 가짜라는 말씀입니까?”그는 그들이 대부분 암호나 표식을 통해 연락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군왕이 진작에 추 성생과 손목에 붉은 비단을 묶는다고 약속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점 마음이 급해져서 말했다. “군왕님, 만약 가짜라면 미리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청엄은 그의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었다. “네가 똑똑히 보았다고 하니 가짜일 리는 없을 것이다. 추 선생이 진성으로 들어오는 길에 붉은 비단을 묶는 걸 잊었나 보구나.” 그러자 남자는 또 어리둥절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잊
사청엄은 우산을 받쳐 들고 노휘왕의 마당에 도착한 후,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 단번에 수하를 물리쳤다. 심지어 고청영도 남겨두지 않았다. 노휘왕은 방금 식사를 마치고 하인들이 치우려던 중이었고, 사청엄은 앉아서 노 휘왕의 젓가락과 그릇을 들고 남은 음식들을 먹는 중이었다. 그는 예전과 같은 엄중한 모습으로 먹는 반면, 노 휘왕은 화가 치밀었고 역겹기까지 했다. 어릴 적부터 그를 잘 양성해서 그의 행동은 모두 번왕의 기질에 부합했지만 아쉬운 건 야망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잔인한 점이었다. 그는 노 휘왕이 먹다 남긴 음식을 다 먹고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낭비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마침 제가 배가 고파서 먹었는데 괜찮지요?” 그러자 노 휘왕이 차갑게 답했다. “괜찮다. 남아도 개를 먹일 것이니, 그건 네가 먹어도 같은 것이다.” “제가 개면 부왕은 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전 그저 부왕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온 것 뿐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곧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 휘왕은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애써 진정하며 말했다. “예로부터 역적에겐 좋은 결말이 없었으니 너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청엄은 오히려 가볍게 웃었다. “부왕께서 제 걱정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 반드시 예외일 것입니다. 그러니 부왕께서는 용포를 입고 황제가 되는 것만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노 휘왕이 냉소하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자신 있다니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 일이 마음에 계속 걸리는데, 답해주겠느냐?” 사청엄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답했다. “제가 한 거 맞습니다.” 그러자 노 휘왕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갑자기 탁자를 치며 소리쳤다. “대체 왜 그런 것이냐?!”사청엄은 한숨을 쉬며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본래 목표는 성릉관의 소 씨 가문이었지만, 소 씨 온 가문이 멸망한다면 성릉관에선 더 이상 수란석을 죽일 수
사청엄은 자신의 계획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듯 계속해서 말했다. “수란키라는 자는 제가 일찍이 사적으로 접촉해서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서경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진성에서 알아낸 소식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서경 내부의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하던 참에 수란석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수란석은 자신의 형님 밑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저는 그의 야망을 알고 있었고 무슨 짓이든 그는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당시 서경 태자가 전장에 나간 것도 수란석이 장수들이 봉급을 받고 공을 세우기 위해 백성을 죽인다는 소식을 퍼뜨려 태자가 신분을 숨기고 조사하러 간 것입니다.” “그가 녹분성으로 간 게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느냐?” 노 휘왕이 물었다. “제가 나서서 그를 설득해 동맹을 맺는 게 원래 목적이었지요.” 사청엄은 유감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중간에 이방이 나타나서 제 계획을 다 망쳐버렸습니다. 그래도 수란석은 자신이 전장에서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제가 그에게 만들어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수란석이 왕위에 오른 후, 죽은 태자의 복수를 한다는 이유로 새 황제에게 중용되었고, 새 황제와 세력을 형성하여 냉옥 장공주와 대항했지요. 그리고 서경이 혼란스러워진 것이 내가 바라던 바입니다. 그들이 혼란스러워야 그 틈을 타서 제게 유리한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성릉관에 도발을 일으키는 것이지요.” 그의 말투는 평범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의기양양했다. “사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빅토르는 전패해서 돌아간 후 문책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냉대와 굴욕까지 당했지요. 그가 다시 일어날 생각이 없겠습니까? 제가 그에게 준 조건은 남강의 몇 개의 성이었으니 그가 사국에서 명성을 펼치기엔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기회를 잡았고 모든 힘을 동원해서 사국왕에게 전쟁을 허락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그렇게 전쟁이 일어났고, 드디어 제게 기회가 온 것입니다. 부왕, 이 모든 일을 하기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온갖 정성과
비는 여전히 많이 내렸기에, 그들은 몇 개의 가게를 둘러보다 진성 제일의 금은방인 금경루가 아직 문을 닫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고청영이 장신구를 몇 개 사고 싶다고 하자 노 휘황이 손을 흔들며 말했다. “그럼 바로 가지!” 금경루의 금소주도 마침 가게에 있었는데, 그가 노 휘왕을 보자마자 3층의 별실로 모시자, 암영위도 자연스럽게 따라 올라갔다. 노 휘왕은 고청영을 데리고 이곳에 몇 번 왔었고, 그들은 중요한 고객이었기에 금소주 외에도 두 명의 점원이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정교한 다과가 나오자 노 휘왕은 암영위를 불러 함께 앉아 차를 마시라고 하고는, 고청영에게 직접 고르라고 했다. 하지만 암영위는 감히 앉지 못하고 곁에 서서 노 휘왕이 다정하게 금소주와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다른 물건을 주고받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리고 가끔씩 고청영도 한 번 쳐다보았는데 고청영은 풍채가 있는 탓에 계산대에 놓인 장신구를 가려서 조금도 보이지 않아, 그는 다가가서 그녀가 장신구를 착용하는 것은 재빨리 확인하고는 바로 노 휘왕의 곁으로 돌아왔다. 노 휘왕과 금소주는 최근에 비가 많이 내린다는 둥 수로가 뚫렸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홍재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올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농작물이 피해를 볼 것 같다며 한탄했다. 농작물에 피해가 가면, 백성들이 굶주릴 수 있기에 노 휘왕은 연신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금소주에게 농담을 했다. “금 씨 가문도 쌀장사를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나중에도 절대로 쌀 가격을 올려서는 안 된다.” 그러자 금소주는 급히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당연히 저희 금경루는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노 휘왕은 금소주의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무슨 일을 하든지 겉모습만 보는 게 아니라 속마음도 봐야 한다. 알겠느냐?” 금소주는 웬지 모르게 찔려 민망했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웃었다. “네, 왕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방금 전, 암영위는 점원만 주시했었다. 회계사가 점원에게 은표를 주는 것을 보고, 암영위가 문간에서 그의 몸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해 결국 놓아주었던 것이다.점원은 큰 모욕감을 느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금경루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면서, 많은 손님들이 은표를 지불한 후에 차나 간식을 줬던 반면, 휘황실처럼 몸을 수색한 경험은 드물었다.암영위는 이 일을 사청엄에게 보고했지만 사청엄은 이미 수색했고, 금경루에 있을 때도 계속 주시했으니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는 그저 고청영이 온갖 방법을 써서 장신구를 사려는 욕심 많은 여자라고만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고청영을 관찰하면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며, 금은보석만 좋아하는 별 생각 없는 여자라고 여겼다. 그리고 뚱뚱해서 무엇을 입어도 예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청영은 사실 돈을 위해 노인에게 시집을 온 것이었다. 암영위가 이전에 그녀와 부왕의 대화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부왕이 죽으면 따라 죽겠다고까지 말했었다.그는 부왕이 어린 여자에게 속아서 매일 그녀를 데리고 먹고 마시고 금은보화를 사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정말 그 여자의 말을 믿는 건가? 부왕도 참 단순하긴.’송석석은 암살을 겪은 후에도 매일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오늘은 비가 너무 세게 와서 심청화가 막아서야 외출하지 않았다.계획에 따르면 내일 큰 전쟁을 위해 이미 명령을 내린 상태이기에, 오늘 경위부로 가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그래서 금소주가 북명황실에 왔을 때 그녀는 경과를 들은 후 즉시 편지를 열었는데, 편지를 다 본 그녀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심청화는 상황을 보더니 편지를 가지고 염 선생과 함께 보았다. 두 사람 또한 편지를 다 본 후, 약속이나 한 듯이 함께 이를 갈며 말했다.“그 놈이었다니…!”그때, 금소주가 물었다. “상황이 긴급해서 나와 집사가 편지를 보긴 했는데 밑으로 보지 않았으니 죽임을 당하지 않겠지요?” “그럴 리가요?” 염 선생은 엄숙한 표정을 감추고 공
그들은 순간 노 휘왕의 처지가 떠올랐다. 그가 편지를 보내는 것조차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은 것을 보면 그의 처지도 좋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만자 등 사람들이 휘 황실에 거주할 때는 줄곧 알아차리지 못하다가 떠날 때가 되어서야 관백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었다. “휘왕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려나 보군요.” 염 선생이 탄복하는 말투로 말했다. 사 씨 가문의 자손으로서 노 휘왕은 이 역모 전쟁을 원하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아들이 역적이라는 것은 더욱 받아들이지 못해 마음이 찢어질들 아플 게 분명했다. 염 선생은 전에도 조사를 해서 내막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청엄은 노 휘왕의 이름으로 역모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려는 것입니다. 말년에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런 오명을 뒤집어씌우다니.” 부자일체라고, 설령 노 휘왕이 어쩔 수 없이 황위에 오른 것이라고 해도 천하의 사람들은 그가 무죄라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을 되찾았고, 송석석은 바로 싸울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일단 지금은 내일 아침의 전쟁을 위해 준비해야 했다. 북명황실은 바로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시만자는 밤새 자신에게 어울리는 무기를 골랐는데, 가까이서 싸우는 것이 좋을 테니 쌍두 단검을 골랐다. 만두는 망치로 적의 머리통을 깨트리겠다며 잽싸게 망치를 골랐다. 신신은 검술과 채찍 기술이 모두 뛰어났는데, 전쟁에 나가 적을 죽이기 위해서 쉽게 피를 볼 수 있는 검을 선택했다.심청화는 깃털로 만든 옥골 부채와 피리 대신 단도를 선택했다.뒤에서 지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이들 모두 최전선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몽동이는 쇠몽둥이를 골르며 한 대에 다섯 명이나 죽이겠다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들은 무기를 고르며, 전투의 긴장감 없이 모두 웃고 떠들었다. 이전부터 그들은 이미 수도 없이 연습을 했고, 궁 안의 수비도 충분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낮에 진성에서 전쟁이 시작되면 백성
휘황실.잔잔한 비가 방 처마 끝에서 주르륵 떨어지며, 왕부 전체를 축축하게 만들었다.한편, 늙은 휘왕은 복도에 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했고, 빗소리인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방으로 들어갔다.정삼숙 또한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데, 두 다리가 부러져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되었다.다리뿐만 아니라 얼굴에도 골절상이 있어, 뼛속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주며 계속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휘왕이 올 때마다 정삼숙은 아픈 척 연기를 한 탓에, 그는 이곳에 자주 오지 않았고, 정삼숙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은 더욱 아파왔다.방 안에서는 고청영이 정삼숙의 얼굴을 닦아주고, 손과 등을 주물러주고 있었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에 욕창이 생길까 염려해서였다.휘왕이 들어오자, 고청영이 물을 들고 나가며 말했다.“죽을 대령하던 참입니다. 전하께서서는 진지를 잡수셨습니까?”“아직 먹지 않았다. 죽 한 그릇을 더 가져오너라. 함께 먹자꾸나.”휘왕이 의자를 하나 가져와 침대 옆에 두며 말했다.정삼숙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으나, 갈라진 입술이 아직 낫지 않은듯 부어오른 상태였기에, 웃을 때마다 다시 터질까 봐 걱정스러워, 비바람에 시달리는 단풍잎처럼 억지스러워 보였다. “웃지 않아도 된다.”휘왕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아프면 말을 하거라.”“안 아픕니다.”휘왕이 죽그릇을 들어 그녀에게 떠먹여주자, 정삼숙은 붉어진 눈으로 천천히 죽을 받아먹었다.하지만 많이 먹지는 못하고 몇 숟가락만 넘길 뿐이었다. 이전에 사청엄이 의원을 불러 주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더 아픈 것 같았다. 휘왕은 고청영이 죽을 더 가져오기도 전에 정삼숙이 먹다 남은 죽을 먹기 시작했다.그러자 정삼숙이 놀라며 말했다.“더럽습니다.”그때, 휘왕의 앞에 놓여진 죽 그릇에 무엇인가 툭하고 떨어졌다. “삼숙아, 우리 한평생을 함께 살았구나.”정삼숙은 멍하니 그런 그를 바
사청엄은 마차를 타고 갈 때 멀리서 추몽을 보곤, 그제야 진심으로 안심했다.그는 추몽이 얼마나 단호한 성격인지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이 전력을 다해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큰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전쟁은 그가 가장 갈망하던 것이었다. 자신의 위대한 계획을 위해 싸우는 것이기에 그는 지금 과거의 침착함과 여유로움을 모두 잃었지만,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열정이 온몸을 타고 돌기 시작했고 세상을 지배하고 싶은 갈망이 그에게 강력한 힘과 신념을 주었다.그는 야망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며,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진실을 알지 못했다. 야망은 결코 가장 강력한 힘이 아니라는 것을,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랑과 증오, 정의와 단결이라는 것을 말이다.진정한 야망은 현갑군 통령 송석석의 애국심이며, 현갑군 통령 송석석의 가족을 잃은 증오이다.그리고 병사들과 무림 사람들이 하나로 결합하여 반역자를 쫓아내며 백성을 위한 정의를 지키려는 마음이다.사청엄은 순간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꼈다. 추몽이 이끄는 병사들이 모두 병복을 벗고 평상복을 드러내었으며, 평상복에는 ‘沈’자의 문양이 자수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그들은 모두 심가 사람들이었다!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곳에 온 자는 추몽이 아니라 심가 사람들과 무림 인사였던 것이다. 그의 무공이 아무리 뛰어난다고 해도, 임양운이 나타나면 곤경에 처할 것이며, 심지어는 지휘권조차 얻지 못할 것이다.석홍심의 반군은 정말 강력했다. 그들은 단번에 기세 좋게 강을 건너 동서 두 거리로 쳐들어갔고, 좀만 앞으로 나가면 곧 어길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송석석는 그들을 어길로 이끌었다. 어길은 왕궁과 가장 가까운 곳이지만, 백성이 거의 없어서 백성을 다치지 않기 딱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경성의 귀족들과 대신들의 집안 대문은 꽉 닫혀 있었고, 가장 유능한 호위들이 문을 지켰다. 백성들 대부분은 반군이 쳐들어와 자신들을 포로로 잡을까 봐 두려워했지만,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