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홍심의 지휘 아래, 이 사병들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용감해졌다.그들은 연왕의 사병이 아니었지만, 만 명이 넘는 병사들은 모두 사청엄이 수년간 정성껏 고른 병사들이었고 수많은 훈련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그중 많은 이들이 비참한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에 대한 분노를 품고 있었기에, 그들은 이 전투를 통해 인생을 역전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지휘를 하는 이상 쉽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현갑군은 그들을 이길 수 있지만, 쉽고 빠르게 승리하긴 어려웠다.송석석은 그들이 항복하지 않으면 죽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정예병을 뽑기로 했다. 그들 중에는 매산 분대도 포함되었으며, 반란군 중에서 석홍심의 목을 취할 계획을 세웠다.군대에는 장수부터 사라져야 전쟁을 더 빨리 끝낼 수 있다.송석석은 계획을 세운 후, 만두와 몽둥이가 먼저 그들의 진형을 무너뜨린 뒤, 그녀와 시만자가 앞서 나가 적장들의 목을 베고 신속히 후퇴할 계획이었다.천군만마 속에서 적장의 목을 베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전투에 열중해 있었고, 혹시라도 주저할 새에 적의 무차별 공격에 맞을 수도 있었다.석홍심은 전장에서 많은 경험을 가진 장군이었다. 그는 단번에 송석석의 계책을 알아챘고, 일부러 빈틈을 보여 송석석와 시만자가 그에게 다가올 수 있도록 하였다.그도 송석석의 생각과 같이 상대의 장군부터 잡으려 했다.송석석과 그는 서로를 잡으려고 했다.빈틈이 보이자, 그는 빠르게 공중으로 뛰어들며 검을 내려쳤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짧은 무기를 사용했다. 경공으로 공격하려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기에, 석홍심의 대검이 더욱 유리한 상황이었다.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죽이 척척 맞게 협력했다. 시만자는 그를 향해 몸을 던져 그의 배를 머리로 가격했지만, 석홍심의 칼이 결국 송석석의 어깨에 떨어져 버렸고, 시만자도 석홍심의 병사에게 상처를 입고 말았다.이 상황에 만두와 몽둥이가 신속히 두 사람을 도우러 왔다. 한명은 유성추를 휘둘
숙청제는 높은 곳에서 그를 내려다보며,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증오를 담으며 말했다. “그래? 네 아버지를 대신해 벌을 받겠다고 해도, 나는 무고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들 수는 없다. 역모를 꾸미고 나라를 빼앗으려 한 자가 누구인지, 짐이 직접 조사하여 밝혀내겠다.”“폐하...”사청엄이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고통스럽게 말했다.“조사를 할 필요 없이 제 죄를 물어주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잠시 이성을 잃고 실수하신 것뿐입니다.”숙청제가 냉소를 띠었다.“실망이구나. 황위를 노렸던 자가 이렇게 기개가 없다는 말이냐? 이 꼴로 황제가 되려고 하느냐? 그러면 사청엄, 너를 따르는 사람들 모두가 실망할 것이다.”“아버지를 대신해 벌을 받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아버지를 용서해 주십시오.”사청엄은 아무리 황제가 뭐라고 말해도, 이 한마디밖에 할 수밖에 없었다.그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다들 그의 야심을 비난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고 비난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아버지를 더 이상 욕하지 마시지요. 그도 그저 잠시 실수를 한 것 뿐일 겁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그의 말에 대부분의 관리는 큰 분노를 느꼈다. 그의 터무니없는 말에 어이가 없어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때, 숙청제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수년 동안 계획을 세우며 영리한 척했지만, 결국 궁문도 통과하지 못하는 자가 어찌 황제가 되려고 했단 말이냐? 연왕처럼 무식한 자였다면 아마도 이런 꼴은 안 당했겠지?”그동안 사청엄은 늘 자신이 연왕보다 똑똑하고 뛰어나다며 자부했었고, 연왕의 신하 앞에서도 그런 태도를 보였었다. 그 후부터 연왕의 부하들도 사청엄을 따른 후 연왕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연왕의 무능함을 비웃었던 것이다. 그러니 숙청제가 연왕보다 못하다고 말하자, 사청엄은 마음이 괴로울 것이다.하지만 사청엄은 그저 낫빛이 잠시 바뀌었을 뿐, 다시 같은 말만 되뇌었
휘왕이 자결했다는 말에 잠깐 흠칫하던 사청엄은 곧바로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부왕…! 부왕께서 자결할 필요는 없으셨습니다…! 이 아들이 대신 죄를 뒤집어쓰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안 그래도 더 이상 살 마음이 없었던 고청영은 사청엄의 말을 듣고 입술을 꽉 깨물더니 빠르게 달려가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화들짝 놀란 사청엄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한참동안 넋을 잃고 있다가 고개를 홱 돌려 싸늘하고 음산한 눈빛으로 고청영을 노려보았다.하지만 고청영은 그런 사청엄에게 오히려 침을 툭 뱉으며 화를 냈다.“짐승만도 못한 놈 같으니라고! 넌 지금까지 영주 백성들의 목숨과 왕야 저택 사람들의 목숨으로 왕야를 협박하지 않았느냐! 심지어 왕야께 너의 죄를 뒤집어쓰라고 강요했어! 왕야께서는 반역의 마음을 단 한번도 품은 적이 없어! 심지어 너의 감시 속에서도 어떻게든 송 대감께 정보를 알리려고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까 왕야의 명예를 더럽힐 생각하지도 마!”사청엄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고청영은 이내 앞으로 한발짝 나서더니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폐하, 부디 고명한 판단을 내리시어 주시옵소서. 왕야는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고, 이 모든 건 사청엄 저자의 협박 때문입니다. 사청엄은 자신의 계획이 성공하면 만사대길이지만 실패할 경우 영주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왕야 곁에서 왕야를 보필하던 사람들도 전부 살해당해서 몇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왕야께서는 저런 사악한 아들을 낳고 키운 게 너무 창피하고 폐하와 백성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결국 자결하신 겁니다. 폐하, 어서 영주의 백성들을 지켜주십시오. 더 늦어지면 그자들은 전부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한편, 이덕회는 오열하는 고청영이 흥분해서 황제에게 실례되는 일을 저지를까 봐 얼른 고청영을 부축하며 말했다.“울지 마십시오. 영주 백성들은 무사할 겁니다. 폐하께서 이미 영주에 사람을 보냈고 그자는 왕야의 옥패를 들고 영주로 출발했습니다. 현재 영주는 조정의 관할 지역이 되
그렇게 5일에 걸려 역적의 잔여 세력을 전부 숙청했다.방시원과 목종욱도 역적 추몽을 생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고 연왕과 회왕 그리고 무상 등 죄인들을 진성으로 압송하고 있기에 오늘 안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다.왕표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죄인이 잡혔다.7월 25일, 휘황실 내부에서 휘왕을 위해 상을 치렀다. 사청엄이 반역을 저지른 탓에 상은 매우 조촐하게 치러졌으며 숙청제는 휘왕을 친왕릉에 안장할 지에 대해 대신들을 불러 진지하게 논의했다.휘왕은 비록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만 사청엄이 저지른 죄는 가문 전체에 연좌되는 중죄이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한편, 송석석은 이번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황실 사람들을 거느리고 휘왕의 장례에 참석했다.장례식에는 관원이 거의 참석하지 않았으며 황제께서 휘왕을 친왕릉에 안장하지 않는 이상, 관원들은 감히 함부로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다.휘왕의 시신은 이미 관 안에 들어가 있었지만 관을 아직 봉쇄하지는 않았다.고청영은 상복을 차려 입은 채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고 송석석과 시만자 등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눈을 감은 휘왕의 시신을 볼 수 있었다.관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휘왕과 정삼숙의 시신이 들어있는 관 외에 하나가 비어 있었다.고청영이 얼음으로 시신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었던 덕분에 지금까지도 시신이 전혀 부패되지 않았던 것이다.고청영은 한참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왕야께서는 전에 자신이 죽으면 이 옷을 입혀서 관에 넣어달라고 하셨는데 그나마 그 소원은 제가 들어드렸습니다.”“휘왕께서는 사청엄이 반역을 일으키는 순간부터 자결하기로 마음을 먹으신 겁니까?”시만자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묻자 고청영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저희는 오래전부터 함께 죽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왕야께서 자결하실 때 제가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정삼숙이 먼저 돌아가시고 왕야께서는 한참동안 버티다가 저에게 꼭 살아남으라고 말씀하신 뒤 눈을 감으셨습니다.”송석석이 비어 있는 관을 힐끔 처
풍수가 좋은 땅은 흠 천감이 엄선했으며 산이 푸르고 물이 맑은 곳으로 근처에는 작은 마을도 두 개나 있었다.황릉 근처라고 하지만 사실 황릉에서 30리도 넘게 떨어진 곳이었다.발인이 끝난 뒤, 고청영은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찾아가 작별 인사를 했고 휘왕의 시신이 묻힌 땅 근처의 마을로 가서 작은 집을 짓고 살 거라고 말했다.시만자는 고청영에게 금전적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지 물었지만,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으며, 전에 갖고 있던 장신구들을 전부 팔면 평생 먹고 살 걱정은 없다고 말했다.고청영이 진성을 떠나던 날, 마침 방시원이 연왕 등 사람들을 압송하여 진성으로 돌아왔고 성문 앞에서 창에 갇힌 연왕과 회왕을 본 고청영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하지만 백성들이 너도나도 손가락질하면서 썩은 야채 이파리를 마구 던지는 모습에 고청영은 모든 원망과 증오를 내려놓았다.나쁜 놈은 언젠가 그 벌을 확실하게 받게 될 것이다.고청영은 이제 자유의 몸으로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일에도 속박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한편, 진성에 압송된 죄인들 사이에는 영주의 관원들과 추몽도 있었으며 송석석은 의외의 인물도 발견하게 되었다.그자는 바로 고청우였다.송석석과 대리사 소경 진이는 죄인들을 인계 받으면서 방시원에게 왕표를 보았는지 물었지만 방시원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성문을 봉쇄했다가 다시 열었을 때 고청우의 행적을 발견하게 되었고 바로 그녀를 체포한 것이었기에, 죄인들은 아직 심문을 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숙청제는 중죄를 저지른 죄인들은 대리사로 끌고 가고 나머지 죄인들의 심판은 경위부에 맡기라고 했다.연왕과 회왕, 추몽, 무상에 이어 하상지와 김수덕 6인은 논란의 여지 없이 중범죄자들이었기에, 현장에서 바로 대리사에게 넘겨졌고, 그들을 심문할지 말지는 황제가 결정하기에 대리사에서는 먼저 그들을 감옥에 가뒀다. 나머지 죄인들인 영주와 연주의 관원들 그리고 고청우는 경위부의 심문을 받았다. 범죄 정황이 심각한 죄인들도 그렇게 결국 대리사로 이송 되었
고청우는 주먹을 꽉 쥔 채 다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송석석을 쳐다보았다.“그래서 다들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겁니다.”“네가 말한 것처럼 출생이 좋은 걸 뭐 어떡하겠느냐? 근데 네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못난 본처인 그 여인도 귀한 집에서 태어나셨거든.”송석석이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담담한 말투로 말하자, 고청우는 그녀에게서 예전의 장공주가 생각나 너무도 싫었다.장공주 앞에서 고청우는 기어다니는 벌레보다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였었기 때문이다.화가 잔뜩 난 고청우가 씩씩거리면서 말했다.“귀하게 태어났다고 해도 결국 부군에게 버림받는 꼴이지 않습니까?”“왕표 그자를 얘기하는 건가? 그분은 왕표를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아. 너만 왕표 그자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송석석의 말에 고청우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반박했다.“왕표 그자는 저에게도 소중한 존재가 아닌 걸요? 그저 무능한 버러지일 뿐입니다!”“그럼 내가 아는 사실과는 다르구나. 넌 왕표 그자를 위해 아이까지 낳아주지 않았느냐? 왕표 그자가 야반 도주로 큰 죄를 저질렀음에 불구하고 넌 그자를 따라갔지. 이렇게 너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을 난 많이 봤다.”송석석이 경멸의 눈빛으로 피식 웃으면서 말하자 고청우가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만 고청우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듯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이런 방법으로 저에게서 뭔가 알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왕비님 말이 다 맞습니다. 전 그 남자를 미친 듯이 사랑합니다. 그래서 함께 야반 도주까지 한 겁니다.”송석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그래, 너에게 들켰구나. 하지만 상관없다. 난 그저 절차에 따라 너에게 심문하는 것이야. 나중에 내가 원하는 심문의 답을 만들어서 폐하께 제출하기만 하면 돼.”고청우는 눈이 휘둥그레졌다.“지금 저를 모함하겠다는 뜻입니까?”“모함이 아니라 사실이다. 왕표가 장군들에게 약을 탄 일도 네가 꼬드긴 것이고 야반 도주도 네 머리에서 나온
솔직히 송석석은 왕표의 상황이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믿을 만한 조력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최소 3년은 숨어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도주하자마자 금전을 빼앗기고 여자에게 버림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지금 왕표는 어떤 심정일까? 혹시 자신의 무모한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중년이 되어서도 진정한 사랑 따위를 믿고 전전긍긍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본처를 버릴 생각까지 하다니.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고청우의 성격에 분명 떠나기 전 갖은 말로 왕표를 모욕했을 것이다.그녀는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남자를 홀리고 다니면서, 한 편으로는 줄곧 자신의 미모를 탐하는 남자들을 증오했었기 때문이다.그러자 송석석은 왕표가 어쩌면 옹현에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주하고 있는 죄인으로 절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할 것이며 여기저기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니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왕표는 아이까지 데리고 있으니 결국 숨을 곳을 못찾고 몰래 진성으로 돌아오지는 않았을까는 생각이었다. 왕표가 조금 멍청하긴 하지만 완전히 바보는 아니기에 가장 위험한 곳이 바로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한때 남강을 지키는 장군이도 했으니, 도망치기 전에 가짜 신분을 만들어 아이를 데리고 신분을 바꾼 채로 진성으로 돌아온다면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송석석은 바로 오진에게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남자를 유의하라고 지시한 뒤, 이 사실을 최숙심에게 알리러 소주방으로 향했다.만약 최숙심이 왕표를 발견하여 제보하는 공을 세운다면 가문에 큰 도움도 될 것이다.하지만 송석석은 누군가가 마음이 약해질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무릎을 꿇고 사정하면 결국 용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한편, 송석석에게서 왕표의 상황을 들은 최숙심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녀가 왕표가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할 사람이 아니니 분명 긴박한 상황이
최숙심은 이 사실을 평서백부 노부인과 왕청여에게 얘기하지 않았다.그렇게 다음날 두 사람이 약왕당으로 출발한 뒤, 최숙심은 농가의 부녀로 위장하여 몰래 두 사람을 따라 나섰는데, 다시 소주방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두 사람에게 접근하는 수상한 자는 없었다.노부인과 왕청여는 도중에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바로 소주방으로 돌아왔고, 왕청여는 돌아오자마자 바로 약을 달이기 시작했다. 소주방에는 시녀나 하인이 없었기에 둘이 서로 돌아가면서 밥을 해야 했다.왕청여는 처음에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녀가 처음 만든 요리는 차마 입에 넣을 수도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불 피우는 것도 3일 내내 배우고 나서야 겨우 익힐 정도였다.소주방에서 사는 사람들은 서로를 돕기도 하지만 비웃기도 했었기에, 다들 왕청여가 아직도 부잣집 아가씨 티를 완전히 벗지 못했다며 수군거렸다.왕청여는 처음에 그런 말들을 들었을 때 서럽기도 하고 화도 났으며 자신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러다가 고청락이 소주방에 방문했을 때 사람들을 위해 직접 요리 한 상을 차린 모습을 보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고청락이 예전에 어떤 성격이었는지 왕청여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위풍당당했던 군주가 부군에게 버림을 받고 친정으로 돌아간 후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소주방에 있는 여인들에게 밥을 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왕쳥여를 진정으로 놀라게 한 건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영안 군주마저 직접 맛있는 요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고 있었다.그 뒤로부터 왕청여는 주막에서 요리하는 여인들을 도와주기 시작했으며 조금씩 배우고 익히며 이제는 요리 수준이 고청락을 뛰어넘을 정도가 되었다.“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약은 약한 불로 천천히 달여야 하는데 왜 그렇게 멍을 때리고 있는 겁니까?”바로 그때, 마침 주막에 들어온 모종윤은 왕청여가 넋을 잃은 채 앉아있는 모습을 보곤 화를 내자, 화들짝 놀란 왕청여가 얼른 뚜껑을 열려고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