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칼국수 한 그릇을 내왔는데 사여묵의 배를 채우기엔 부족해 보였다. 그러자 제린이 사람들에게 양고기를 구우라고 시켰다. 지금의 군영은 예전과 달리 식량이 많이 있어 백성들도 마음껏 고기를 먹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여묵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릇을 들고 국물을 다 비워냈다. 국물이 짜고 맛이 강해서 그는 물 한 주전자를 마시고 나서야 체력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아직도 말 위에서 흔들리고 있어, 눈앞의 사람들이 다 뒤로 물러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그들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오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께서도 많이 지치셨지요?” 사여묵이 자신의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군의를 불러와 내 얼굴에 침을 놓으라고 하거라. 하도 바람을 맞아 얼굴이 돌아간 것 같아.” 눈을 똑바로 떠 보니 사여묵의 얼굴은 확실히 약간 삐뚤어져 있었다. 그때 제린이 물었다. “원수께서 여기까지 오는데 조금도 휴식하지 않으셨지요?” “어떻게 쉬겠어?” 이어서 사여묵이 중대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내가 꾀병을 부려서 몰래 전장으로 온 것이야.” 그는 허약한 손으로 한 무더기의 약을 꺼내더니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사실 꾀병을 부린 게 아니라 진짜 아팠지. 여기로 오는 길에 이 약들을 먹어야 하는데 가끔은 잊어서 먹지를 못했어. 지금이라도 먹지 않으면 송 장군이 날 때려죽일 것이다.” 그의 말에 사람들은 서로 마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사람을 보내 군의를 불러와 왕야의 몸을 진단한 후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군의가 먼저 맥을 짚더니 말했다. “어찌 이렇게… 허약하십니까?” 그러자 방천허가 다급하게 물었다. “심각합니까?”군의가 말을 하지 않자 사여묵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천천히 회복하면 되니까 다들 긴장하지 말거라.”그러자 군의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이미 원기를 상했으니 아마 단기간엔 회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여묵처럼 태어났을 때부터 전쟁 체질인 사람이 있다. 전장에서의 사여묵은 진성에서보다 훨씬 과감했는데, 심리적으로 속박을 받지 않으니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일동안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 모두 체포했다. 그들을 연병장으로 끌고 가서 곤장으로 20대 때리자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묻는 대로 대답했다. 그들은 누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고 단지 돈을 받고 소식을 퍼뜨리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명령에 따랐을 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까지는 상관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국의 80만 대군이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문과, 북명왕이 바로 이 자리에 있으니 숙청제가 북명왕을 죽였다는 소문도 역시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왕 원수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도망갔다는 소문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죽음이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었다. 헛소문이 하나둘씩 밝혀지자 병사들은 격분해서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다. 헛소문을 퍼뜨려 군심을 흔들었으니 당연히 때려죽여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여묵은 차가운 눈빛으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애초에 헛소문을 믿었던 사람들은 모두 반성하거라. 반성한 후엔 남은 전투에 최선을 다하고.” 군심을 흔드는 자는 적군이니, 적군의 피는 첫 전투의 패배로 인한 좌절을 씻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큰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소문을 퍼뜨린 자를 곤장으로 때려죽인 후 사여묵은 제린에게 북명왕이 남강에 왔다는 급보를 진성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황제의 지시가 없어도 자신의 명령에 따를 것인지 물었다. 하지만 급보를 보낸 지 사흘 만에 황제의 지시가 도착했다. 사여묵은 조금 의외였지만 송석석이 한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 왕표가 도망쳤다는 소식이 진성으로 전해지마자 송석석이 반드시 성지를 청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제린에게 진성으로 급보를 보내라고 한 이유는 황제에게 남강군은
염 선생이 휘황실을 조사한 결과, 요 몇 달 사이에 휘황실의 하인 몇 명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염 선생은 진성의 모든 중매업에게 물어서 그들이 중매업에서 사들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떠난 사람들에겐 다른 출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관청에 달려가 노예 제도 문서를 조사했지만 여전히 찾지 못했다. 논의 끝에 시만자가 스스로 휘황실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시만자가 송석석에게 말했다. “우리가 노 휘왕과 오랫동안 왕래했으니 나는 그를 믿어. 만약 그가 정말 황작이라면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송석석은 시만자를 혼자 보내지 않고 만두와 신신을 함께 보냈다. 만약 노 휘왕이 정말로 위협을 느꼈다고 하면,만두와 신신까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 그런 게 아니라면 그가 시만자를 부른 것은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일 것이다. 송석석이 직접 그들을 휘황실까지 데려다줬는데 노 휘왕이 반갑게 마중 나오더니 친구 두 명을 더 데려왔다는 말을 듣고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 나는 시끌벅적한 것을 가장 좋아한단다.” 그러자 시만자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내 집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래준다면 나야 좋지.” 노 휘왕은 즉시 주방에 오늘 밤 요리를 더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러자 송석석도 웃으며 함께 들어갔다. 그녀는 이전에도 노 휘왕을 몇 번 보았었는데 특히 오늘 정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다만 그 기쁨이 진심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다. 송석석은 점심을 먹고 다시 경위부로 돌아갔다. 시만자는 고청영에게 정원을 구경시켜 달라고 했다. 휘황실의 꽃은 아주 잘 피었다. 매산과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이곳의 꽃도 아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고청영은 느릿느릿하게 걸어가며 시만자에게 황실의 곳곳을 소개해주었는데 원래는 그녀와 노 휘왕 두 명의 주인 뿐이었고, 관백이라는 집사가 한 명 있었는데 반쯤 주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자 시만자가 놀라며
시만자는 그들을 훑어보았는데 두 사람은 비록 키가 크지 않았지만 팔뚝이 유난히 굵어 보였고 목까지 힘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도 키가 큰 편이었는데 숨소리를 들어서는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어 보였는데, 신발을 내려다보니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심법을 연마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심법을 깊게 수련하면 할수록 호흡을 스스로 통제할 수가 있는데 그들의 호흡으로 봐서는 수련이 얕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공을 할 줄 아느냐?” 시만자의 물음에 그들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만자는 다시 그들을 훑어보더니 갑자기 키가 작은 사람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키가 작은 사람을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시만자는 손을 거두었고 무술을 익힌 자의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는 스스로 제어할 수 있어서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위는 오히려 자신을 폭로한 셈이 되었다. 무술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군가 얼굴에 주먹을 날리면 손으로 막게 되어 있는데 그는 막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만자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고, 몇 몇 사람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보곤 천천히 물러났다. 머리를 받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고청영의 표정은 기대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전처럼 담담해 보이진 않았다. 그들은 모두 노 휘왕의 옥경원 옆에 배치되었다. 그곳은 장미가 가득한 마당이었는데 이름은 장미원이라고 했다.벽 하나를 사이에 둔 방이기 때문에 옥경원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하면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고청영도 옥경원에 거주하지만 같은 방에 있지는 않았다. 원래는 장공주가 그녀를 노 휘왕에게 첩으로 보냈는데 노 휘왕은 첩이 필요 없다며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고 친구로 삼았다. 그녀에게도 따로 거처가 있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줄곧 옥경원에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는 몰랐는데 옥경원에 거주하고부터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시만자는 웃으면서 재미없다고 말하더니 만두와 신신을 만나 정보를 교류한 후 황실을 나왔다. 그녀는 황실에서 나오자마자 경위부로 가서 송석석을 찾았다. 송석석은 그녀를 보자마자 관아로 끌고 가서 조용히 물었다. “어때? 뭐 좀 알아냈어?” 그러자 시만자가 휘황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모두 말해주었다. “밤에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순찰하는 것 같았는데 날만 밝으면 그 사람들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없어져. 내가 황실의 많은 정원을 관찰해 보았는데 확실히 거주하는 사람은 없었어. 하인들의 침대 수량도 고청영이 말한 하인 숫자와 일치하고.” 송석석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혹시 땅굴이나 암실 같은 게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은 야간 통행금지가 있어 밤이 되면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어. 게다가 밤이 되었다고 해서 바로 잘 수는 없으니 네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 사람들은 휘황실에 거주하고 있을 거야.” 그러자 시만자가 말했다. “하지만 만약 땅굴이나 암실이 있다면 조사하기 더욱 어려워질 거야.” 그녀는 순간 만두가 주방 상황을 말했던 게 생각이 났다. “만두가 주방에도 수백 명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군.” 송석석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이 음식들을 어디로 보내는지 눈여겨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네.” 시만자는 송석석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이 급해서 그 점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건 만두가 지켜보고 있을 거야. 만두가 지금 얼마나 믿음직한지 넌 모를 거야.”친구들이 모두 성장한 것 같자 송석석은 정말로 기뻤다. “노휘왕과 고청영에게는 다른 문제 없었어?” “없는 것 같았어. 어제 우리가 정원을 구경할 때 다섯 명의 남자가 나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모두 무공을 익힌 사람들 같아 보였어. 그래서 고청영에게 물어보니 왕야님이 우릴 보호해 주려고 파견해 온 사람들이라고 하더군.” “그 다섯 사람들은 뒷 채에 거주하던가?” “맞아. 하인들과 함께 살고 있었지. 그 다섯 명 외에는 이상한
숙청제와 평무종의 조사 결과는 같았는데 영군왕은 봉지를 떠난 적이 없었고 거의 매일같이 처자를 데리고 연극을 보러 다녔다. 영주에 있는 자유원이 몇 곳도 모두 그가 설립한 것이었다. 그곳은 그가 고아들과 의지할 곳이 없는 노약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한 곳이었는데 그는 대부분 곡을 들은 후엔 자유원에 가곤 했다. 하지만 평무종은 숙청제가 찾지 못한 한 가지 정보를 찾아냈다. 바로 영군왕이 시 씨 가문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7~8년 전의 일이었다. 시만자의 아버지가 가주가 되기 전에 목장에 순찰하러 갔다가 습격을 당했는데 마침 영군왕이 사람을 데리고 지나가다 그를 구해준 것이었다. 영군왕은 사람이 겸손한 데다 시 씨 가문과 왕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시 씨 가주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겐 아주 쉬운 일이었고 보답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함께 습격을 당한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시 씨 가문의 가주와 심복인 마삼만이 목숨을 건졌다. 평무종도 마침 마삼이 화물을 호송하다가 도적떼의 습격을 당했을 때 그를 도와준 적이 있었기에 그가 알려준 것이었다. 평무종의 편지가 전해온 후 송석석이 시만자에게 묻자 시만자는 오히려 아연실색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난 몰랐는데.” 7~8년 전이면 시만자가 매산에 있을 때였기에 가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시만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이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아버지한테 편지라도 쓸까…?” ‘아버지께 그가 생명의 은인이니깐 만약 그가 황작이라면 아버지께서 도와주시지 않을까?’ 전에도 여러 번 시 씨 가문에 연루되었지만 시만자는 아버지가 조정에 충성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황궁의 상인으로서 조정을 위해 군마를 키우고 병부의 무기를 주조하는 장사를 하고 있으니 역적을 도울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이 생명의 은인이라면 장담하기 어려웠다.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도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는 도리는
다음날, 송석석은 궁으로 들어가 황제를 만나 현철위에 있는 현갑군을 모두 휘하에 두고 자신이 통솔할 것을 제안했다.숙청제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경사의 모든 병력을 너에게 넘기라는 말이냐?”“현갑군입니다.”송석석은 고개를 들어 다시 확고한 눈빛으로 말했다.“황제폐하, 신화영을 포함한 경외 위소의 병마 15000은 모두 연주로 파견되었으니 경사에 남은 현갑군은 더 이상 흩어질 수 없습니다.”하지만 숙청제는 방금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내 친위를 포함한 경사의 모든 병력을 너에게 맡기라는 것이냐?”그러자 송석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굳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맞습니다.”숙청제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네 부군은 남강에서 남강군을 거느리고, 네 외조부와 외숙부는 성릉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데다 목종욱은 네 아버지의 옛 부이고, 방시원은 너희가 구해온 것이지. 그런데 지금 진성의 모든 병마를 너에게 넘기라니. 송애경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왕야께서는 남강에서 병사를 거느리며 적을 물리치고, 외조부와 외숙부는 성릉관에서 서경과 저항하고 있습니다. 목종욱 장군은 도적떼를 토벌하고, 방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역적을 포위하러 갔습니다. 저는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상국의 땅과 백성들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그녀의 말에 숙청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지만, 그 웃음은 그의 눈빛을 더욱 서늘하게 했다.“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나라와 모든 사람의 생명을 모두 너희에게 맡기는 것이 될 텐데, 그게 얼마나 큰 믿음이 필요하는지 아느냐?”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숙청제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상주문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 너의 제안을 허락하마. 참, 태후가 지금 대황자를 돌보고 있으니 나는 혜태비와 서우를 궁으로 불러들여 서우와 동반해서 공부를 시킬 계획이다.” 하지만 이것은 송석석의 의견을
송석석이 북명황실로 돌아오자마자, 심청화는 화가 나 있는 그녀를 위로했다. “혜 태비와 서우를 궁에 들여보내면 좋지 않으냐? 적어도 역적이 정말 쳐들어오면 궁 안의 수비가 가장 삼엄하고 상대적으로 가장 안전하니 서원이나 황실에 머무는 것보다 낫지 않겠느냐?” 송석석은 답답한 마음에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는데, 오히려 마음이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승낙한 것인데 여전히 화가 납니다. 그는 서우와 혜 태비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인질로 삼으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죽는 한이 있어도 황궁의 안전을 사수할 테니까요.” 역적이 진성에 쳐들어오면 먼저 북명황실을 토벌할 것이고 이용할 만한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외조부와 왕야를 통제하는 데 사용할 것이었다. 송석석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황제의 행위가 짜증 날 뿐이었다. 그리고 혜 태비와 서우가 궁에 들어가지 않아도 그녀는 그들을 잘 배치할 수 있었다. 비록 황제가 말끝마다 강산을 지켜야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서 강산은 자신의 것뿐이다. 그는 줄곧 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의 가족을 억류하고, 무슨 일이 있든 그들의 동기와 야망을 의심해왔다. 송석석은 그런 그가 너무 지겨웠다. 그러자 심청화가 그녀의 비녀를 만지며 말했다. “됐어. 근데 넌 현갑군을 통일하고 싶지 않아?” “그가 제가 통일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그러는 것일 겁니다.” 송석석은 마음이 답답했다. 통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지금 상황에 각자의 우두머리가 있긴 하지만 역적이 쳐들어온다면 그들은 오합지졸일 뿐 정예가 아닐 것이었다.그러자 심청화가 말했다. “사람에게 권력이 생기면 모든 것을 통제하려고 하지. 마음도 마찬가지고. 그러니 너도 불평불만을 모두 털어버리고 네 일에만 전념해. 그렇게 해서 일이 성사되면 우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될 거야.” “이 사실을 서우의 외숙부께 말씀드려야 해요.” 송석석이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대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