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은 진성을 떠날 수 없어 며칠동안 고민하다가 결국 연왕에게 말했다. “지금은 왕야님께서 몸조리를 하느라 연주로 돌아가실 수 없지만. 연주를 떠난 지 오래되어 회왕이 연주에서 왕노릇을 할 수 도 있어 저라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연왕은 약간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지금 날 버리고 연주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 이 난장판을 나보고 어떻게 수습하란 말인가!” 무상은 그가 화를 낼 것을 진작에 짐작하고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왕야님, 어차피 왕야님은 움직이질 못하시니 여기에서 상처를 치료하십시오. 백성들은 며칠 동안 얘기하다가 그칠 것입니다. 제가 연주로 돌아가서 회왕과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상의해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사사들이 반은 그들 손에 들어갔으니 다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왕야님께서는 연주를 회왕에게 책임지게 하는 것이 안심이 되십니까?” 연왕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지만 혼자서 이 난장판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 괜히 화를 낸 것이었다. 무상은 계속 말을 이었다. “지금 왕비님께서 시 씨 가문에서 쫓겨났으니 왕야님과 시 씨 가문도 더 이상 혼인을 맺은 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의 군마도 무기도 불가능할 테고 은전은 더욱 불가능할 테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다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면 기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병마를 먹여야 하고 매일 돈이 필요하는 와중에 장공주께서도 더 이상 은전을 공급해주지 않으니 제가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 사실이지만, 더 이상 남자의 도리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의 자신감과 오기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는 바로 무상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저 며칠 더 머물라고 하고 숙청제가 다른 지시가 있는지 기다려보려고 했다.그가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아무 여자나 데려와서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다고 하면 변명도 하지 못하고 계획 짤 사람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무상은 그의 걱정을 들은 후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왕야님께서 이런
전북망은 그의 말을 듣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전북망이 울 줄 알았는데 눈물 한 방울 없이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여령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술 한 주전자를 건넸다. 전북망은 단숨에 모든 술을 받아 마시고 취해 버렸다. 그도 전북망을 데려다주지 않고 별장에서 하룻밤을 재웠다. 이튿날, 집사에게서 전북망이 날이 밝기도 전에 돌아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후에도 몇 번 왔었는데 두 사람은 별로 할 말이 없어 그저 술친구로 지냈다. 사여령은 그의 부인이 친정으로 돌아가서 그와 이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술에 취한 전북망은 부인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는데 그 비밀은 그의 가슴에 바늘처럼 박혀서 빼내기 힘들었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은 빼내든 말든 모른 척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부인이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사여령은 그에게 무슨 비밀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말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하면 그녀를 해칠 것입니다. 만약 이혼을 한다면 그녀가 다시 시집을 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백작부의 아가씨이니 충분히 다시 시집갈 수 있습니다.” 그러자 사여령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말하면 해로운 안방 부인의 비밀이라고 해봤 자 사람의 목숨을 해쳤거나 다른 남자와 바람을 핀 것이겠지. 그들은 술친구일 뿐이고 전북망은 가난해서 매번 그가 술값을 내지만 사여령은 그래도 함께 술 마실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최 씨는 요즘 여러 가지 일로 바빠서 공방에 가지 않았다.하나는 남강 쪽에서 온 편지 때문이었는데 원래 따라갔던 두 여인이 병에 걸려 사망을 해서 지금 부군의 곁에는 첩 한 명만 남았다고 했다. 두 여인이 병에 걸렸을 때 첩이 세심하게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남강의 바쁜 일상생활도 아주 잘 돌보았기에 그녀를 평처로 삼겠다는 내용이었다.편지에서 첩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아마 감히 언급하지 못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고청우의 신분을
송석석은 약간 의아해하며 말했다. “당신의 아들이 공부를 잘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무예를 익히려는 것입니까? 부인, 나는 좋은 스승이 되는 법을 모릅니다. 게다가 그는 앞으로 작위를 계승할 것 아닙니까? 공부를 해서 벼슬을 따는 것이 가장 좋은 길 아닙니까?” 송석석은 제자를 받기 싫었다. 그녀는 공직이 있어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최 씨의 아들은 이제 열몇 살이라 무공을 가르치는 것 외에 사람 됨됨이를 올바로 가르치기도 해야 했다. 만자에게도 제자가 있지만 그녀의 제자들은 그녀보다도 나이가 많고 모두 관직을 맡고 있었다. “작위 말입니까?” 최 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시울을 붉히고 말했다. “왕비님. 작위가 그때까지 남아있을지도 나는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그 작위는 뜨거운 감자와도 같아서 받는 사람이 다칠지도 모릅니다. 꼭 왕비님께서 제자로 받아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찾아서 가르쳐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그저 아들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으면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적어도 강인한 신체와 정신으로 대처해야 하니까요. 며칠 동안 시달리다가 버티지 못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러자 송석석은 속으로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부인께서 왜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최 씨는 자신의 마음처럼 차가운 비녀를 만지며 말했다. “나야 모든 것이 평안하기를 바라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송석석은 마음속에 의심이 많았지만 그녀가 깊이 얘기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 씨가 원래 생각이 깊은 사람이니 자식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송석석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 “내가 직접 가르치면 잘 가르치지 못할 것이니 몽교두에게 시간 날 때마다 가르쳐주라고 하겠습니다. 부인은 알아서 그에게 은냥을 조금 주면 어떻겠습니까? 그는 서원에 있
이튿날 최 씨가 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몽동이에게 연봉으로 삼백 냥을 주겠다고 했다. 몽동이가 재물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급히 거절했다. “안 됩니다. 일 년에 육십 냥도 많은데 삼백 냥이라니요.” 최 씨가 아무리 말해도 몽동이는 삼백 냥을 받지 않고 육십 냥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최 씨가 애원하듯 송석석을 쳐다보며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그럼 몽 사부의 말대로 육십 냥으로 합시다. 하지만 육십 냥이든 삼백 냥이든 가르치는 건 똑같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그에게 너무 큰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지 맙시다.” 왕비가 그렇게 말하니 최 씨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공부를 하든 무술을 배우든, 최 씨는 자신의 감수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상관없었다. 보통 백성들은 일 년에도 다섯 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몽동이는 한 달에 다섯 냥도 큰돈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단지 무공을 지적해 줄 뿐 전력을 다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 더욱 받을 수 없었다. 현이 같은 경우엔 이미 열 살이 넘었으니 좀 늦은 편이라 큰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현이는 확실히 최 씨 말대로 부지런하고 얌전하며 교양도 있어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비록 몽동이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몽 사부라고 부르며 존경하며 후작자제들의 오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이는 첫날 몽동이를 따라 기초 체력 단련을 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잡술이라 기본기도 없었지만 무학에 대해서 그는 고생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동이가 아무리 엄격하게 가르쳐도 그는 이를 악물고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송석석은 찻잔을 들고 옆에서 지켜봤는데 소년은 체격이 작아 선비 같았는데 이목구비는 어머니를 닮아 부드러웠지만 미간에는 영이가 서려 있었다. 송석석은 최 씨가 왜 아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는지 몰랐지만 왕표가 남강에서 고청우와의 일은 그녀도 들었다. 왜냐하면 남강의 방 장군은 아버지의 휘하이기도 하고 사여묵
사여묵도 사실 다른 부부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냥 소문을 듣고 한 말이었다. 현이는 두 시진 동안 연습하고 거의 해시가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갔다. 연속 며칠 동안 연습해도 그는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지금 배우는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론 그는 책을 외우면서 무릎을 구부리고 서있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송석석은 가끔 그를 보면 왕표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최 씨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또 합리적인 것 같았다. 이때 염 선생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왕야님, 회신이 왔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여묵은 의아해하지 않고 물었다. “누군가가 몰래 호송한다는 것인가?” “네, 고수들이 호송해서 삼 회 싸웠지만 우리에게도 손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여묵이 물었다. “사사인가?” 송석석은 옆에서 듣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들이 사람을 보내 무상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때 사여묵이 말했다. “그럼 연왕의 사람은 아닌 것 같군. 내 추측이 옳다면 무상의 뒤에 다른 사람이 있어. 그리고 연왕은 그 자의 바둑알일 뿐이야.” “누구일까요? 회왕? 그럴 리가 없는데…” 염 선생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가 회왕을 얕잡아보는 것이 아니라 회왕은 독한 사람이지만 요 몇 년 동안 인맥과 능력을 갖추지 못해 사온과 연왕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부병도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독한 들 배후에서 수단을 부릴 뿐 연왕이 연주에서 몇 년 동안 경영한 세력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우리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럼 지금은 아직 쫓고 있는가?” 사여묵이 묻자 염 선생이 대답했다. “네, 아직도 쫓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답니다.” 사여묵이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일단 쫓아가보라고 하게. 누구든지 얼굴을 내미는 때가 있겠지. 지금 연왕이 진성에서의 처지가 예전과 달라서 그 사람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아.” 원래 연왕은 진성에서 어머
시만자는 요즘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기에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황실에서 나갔고, 공방에서 한 시진 정도 머물기도 했다. 공방에는 진문숙이라는 여자 한 명이 더 생겼는데, 이혼을 당해 쫓겨난 상황이였다. 그녀의 친정 오라버니는 그녀를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형수가 허락하지 않아 오라버니가 곤란해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공방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들은 함께 자수를 만들며 아무도 과거를 언급하지 않고 미래만 이야기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시만자는 이런 분위기에 큰 감동을 먹어서 바쁜 와중에도 가끔 가서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석소사저와 라사저와의 관계도 부쩍 친해진 것 같았다. 최 씨도 가끔씩 오군 했는데 이날 마침 시만자를 만나 그녀와 잡담을 나누었다. 시만자는 현이가 몽동이에게 무술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말했다. “현이가 부지런하긴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부족해서 오히려 공부할 감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최 씨는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놀라운 무공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길에서 시달려 죽지 말라고 말입니다.” 최 씨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시만자는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의 걱정을 알 수 있었다. 백작가의 세자는 어디에 가든 시종들이 때를 지어 보호를 할 것이고, 공명을 따서 다른 곳의 관직으로 떠난다고 해도 고생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괴롭힘을 받을 일이 생긴다고 하면 아마 유배일 것이었다. ‘평서백부가 비록 가장 절정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잘 나가고 있는데 최 씨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시만자가 물어보려던 참에 최 씨 곁에 있던 시녀인 금숙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시만자가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급히 보고를 했다. “부인님, 둘째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 부인님을 모셔오라고 합니다. 셋째 아가씨께서 자결을 하셨답니다.” 최 씨가 놀라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왜? 사람은 구해냈느냐?”
왕청여의 일은 송석석도 알고 있었다. 송석석이 마침 그곳을 지나던 참이었기 때문에 왕청여의 일은 송석석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몰래 순방영의 순시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최근 몇 가지 항목을 심사하고 있었는데 순시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나쁜 기풍을 바로잡긴 했지만 많은 상인들이 순시를 보기만 하면 예전처럼 물건을 드려 환심을 사려고 했다. 원래는 사람을 파견해 지켜보도록 했는데 몰수는 하지만 게을러서 순찰을 돈 지 얼마 되지 않아 찻집을 찾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였다. 그래서 송석석은 직접 잡아 본때를 보여줘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그 일을 목격한 것이었다. 송석석은 약왕당까지 둘러보고 들어가서 물 한 그릇을 얻어 마시고 뒷마당의 푸른 커튼 뒤에서 모든 일의 경과를 목격했다. 처음에 그녀는 왕청여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뒷마당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약을 사고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사려는 약이 단설환일 줄은 몰랐다. 약왕당의 직원이 그녀에게 없다고 했는데 그녀는 믿지 않았다. 마침 노세진이 약재를 들여와 그녀와 면전에서 마주쳤다. 왕청여는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약왕당에 숨겨둔 단설환 몇 개가 있는지 알고 있다며 자기의 체면을 봐서 한 알만 팔아줄 순 없냐고 물었다. 약왕당엔 워낙 사람이 많았는데 그녀가 대중 앞에서 묻자 노세진은 당연히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에 왕청여는 억울해서 울며불며 예전엔 친척이지 않았냐며 통곡했다. 마침 노 씨 부인이 오늘 부군이 약재를 운반해 온다는 것을 알고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다가 그 장면을 마주친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 자리에서 싸웠고, 노 씨 부인의 입을 통해 송석석은 더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육씨 부인은 원래 그 일을 알지 못했지만 부군을 사랑했다. 그녀는 부군이 방 씨 가문에서 머물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왠지 방시원이 돌아
한편, 평서백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되었다.옥이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탓에 사람들은 최씨가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해주고 나서야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오 부인이 왕청여의 뺨을 몇 번이나 강하게 내리쳤고 이 광경을 약왕당에 있던 환자들만 본 게 아니라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들 약왕당으로 들어가 구경하기 바빴다.왕청여를 모시던 시녀의 말에 의하면 난리 난 와중에 누군가가 약왕당 안에 왕비가 계신다고, 이건 큰 실례를 범하는 거라고 외쳤다고 한다.최씨는 시녀의 말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약왕당 안에 있던 왕비가 송석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석석은 평소에도 약왕당에 자주 찾아갔으니까.하지만 다이 약왕당에 있던 왕비가 누구든 이 일에 관한 소문이 퍼지게 되면 평서백부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씨는 외원에 앉아 한참동안 차를 마시다가 그제야 일어서서 일단 노부인을 찾아갔다.노부인은 최씨를 보자마자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눈물을 보이면서 말했다.“아가야,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아예 소문이 안 나게 막아버리거나 오 부인을 찾아가서 원하는 건 뭐든 줄 테니까 나서서 해명 좀 해달라고 할까? 오 부인이 이 모든 게 오해라고 말해야 이 일이 잠잠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최씨는 노부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노부인은 화가 많이 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보려고 많은 고민을 한 듯했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통할 것 같은 방법을 최씨에게 얘기한 것이다.최씨는 남희를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옆에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멍하니 앉아있었다. 남희는 남편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녀에겐 자식도 있었다. 가족들 중 한 명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흥하거나 망할 수도 있어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이건 간통에 관한 예민한 문제는 언급하기도 조심스러운 부분이기에 남희도 어쩔 수가 없었으며 그저 큰형님이 잘 처리해주기를 지켜볼 뿐이었다.이때, 최씨가 입을 열었다.“일단은 그
임양운은 한동안 경사에 계속 머물렀다. 예전에는 신화기 연구에 몰두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진성의 일을 놓을 수 없다는 핑계로 더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송석석을 걱정하고 있었다.처음 신화기를 연구할 때, 특별히 사람을 보내 북당으로 가서 처방을 받았던 것도 남강과 송회안, 그리고 결국은 사여묵과 송석석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부로서 제자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그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임양운은 항상 자신이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뛰어났고, 인품마저 매우 훌륭했다. 그 누구도 그를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송석석만은 걱정이 되었다. 송석석은 놀고 싶어만 하는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술을 출중하게 익힐 만큼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펼쳐진 자유롭고 밝은 웃음을 볼 때마다 임양운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강제로 빠르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언제나 마음의 긴장을 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받은 상처들은 시간만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도와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사여묵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웃게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결핍까지는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양운은 아픈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러고는 궁에 가서 황제와 대면했다.한때 번성했던 임씨 가문에는 지금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제자들만 있을 뿐 자식이나 후손은 없었기 때문이다. 임왕 임병일은 당시 한때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그 공로가 너무 커서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아마도 여러 가지 은혜와 원한이 있었을 것이지만, 숙청제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임씨 가문은 결국 사씨 가
거리를 돌며 공개적으로 조롱받는 동안, 영군왕은 완전히 무너져 미쳐버린 듯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 무지하고 어리석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백성들이 조정에 속아 폭군을 현명한 군주로 착각하였으며, 자신 사청엄만이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쉰 목소리는 백성들의 저주 속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외치며 요참형조차 그에게는 너무 관대하다며, 차라리 천 번의 칼질과 만 번의 난도질을 하는 능지처참으로 갚아야 한다고 외쳤다.연왕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억울함과 사청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만약 사청엄이 자신의 사람들을 배반시키지 않았다면 자신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사청엄은 어둠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독사처럼 그가 모르는 사이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사청엄 때문에 그는 이제 단순한 역적이 아니라 어리석은 역적으로 전락했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을 남에게 넘겨야 했고,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묶여 조정의 군대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훗날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이름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그는 평생 동안 권력과 명성을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형틀에 묶여 처형대로 끌려가는 순간, 그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증오와 조롱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그는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이 모든 순간을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의 뜻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고, 아내를 맞이하고 첩을 들인 것조차 모두 이용을 위한 수단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마음껏 사랑해보려 했지만, 그로 인해 무상과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눈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는 군중 속에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옷을 입은 그녀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드디어 대청산이 시작되었다.대리사와 경위 형부의 공동 조사 끝에, 연왕과 영군왕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사실로 밝혀졌다.모두 죄목이 확실했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의 모든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다.연왕 일가는 정보를 제공한 공을 세운 사여령을 제외하고 모두 황실 감옥에 갇혔다.사여령은 황실 족보에서 이름이 제외되었다. 여전히 대리사에서 감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진이는 그를 일시적으로 직무에서 배제시켰고, 처분이 끝난 후 복직시키겠다고 했다.진이는 선의를 베풀어 그에게 앞으로 이 직책을 계속 맡고 싶다면 황실 감옥에 가까이 가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반성하라고 당부했다.진이는 사여령이 어리석기는 해도 성실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우유부단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진이는 여전히 그를 돌보아 주려 했다.진이는 송석석에게도 사여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송석석은 사여령이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아 무슨 일이 생겨도 반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랐지만, 다행히 적모 밑에서 자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아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사여령을 특별히 돌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여령이 진성에 머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황제를 안심시킬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이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여령이 이번 처벌을 피할 수 있던 이유도 연왕의 사병 정보를 제공한 덕이었지만, 일이 지나간 후 황제가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가 그의 직책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자신의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그가 진성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조정 회의에서 숙청제는 영군왕과 연왕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죄목을 발표했다. 그들의 죄목은
추몽의 눈빛에 섬뜩함이 스쳤다."좋습니다. 위선적인 말 어디 한번 들어보지요."숙청제는 원래 의심이 많아 항상 북명황실을 경계해 왔다. 송석석에게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반기를 들겠냐고 묻는 것도, 비록 그녀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송석석이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묻는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녀는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아직 송석석이 대답도 하기 전에, 추몽은 비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먼저 아첨하며 숙청제를 치켜세워 보시지요. 그의 정책이 여성을 얼마나 잘 대우했는지 떠들어 보십시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마음껏 칭송하시지요."송석석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비꼬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럴듯하게 가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상이 어리석고 폐쇄적이라 당신의 기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인정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당신 개인의 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지도 못하며,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들에게 원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더 큰 혐오와 배척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를 안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꾸짖고 비난할 것입니다."추몽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그는 이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이라는 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니 제가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시는군요." 추몽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송석석이 차분히 대답했다."살 길이 막혔다는 것과 대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같은
제제사와 추몽은 대리사의 심문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송석석은 서리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리 않았기에 그들이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더라도 송석석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한숨 소리 전부 말이다.하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 시선을 몇 번 마주하지도 않았다. 마치 강제로 한자리에 앉혀진 낯선 이들처럼 거리감과 냉담함이 느껴졌다.송석석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그 어색함을 어쩔 수 없이 함께 견뎌야 했다.오랜 침묵 끝에 제제사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왜 이런 짓을 한 거냐?”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추몽은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굳이 따져 묻을 필요가 있나?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는 법이지.”“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 아니더냐?” 제제사가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로 묻자, 추몽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어차피 이 생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선황제가 그러지 않았나? 나는 패역한 자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가진 생각들이 진정 패역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짜로 패역한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른 모든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제제사가 그의 시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너희 반란으로 수천수만 명이 죽었고, 피비린내는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네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다.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겼느냐?”추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심히 차갑고 냉담해 보였다.“추몽,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냐?” 제제사가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