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자는 요즘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기에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황실에서 나갔고, 공방에서 한 시진 정도 머물기도 했다. 공방에는 진문숙이라는 여자 한 명이 더 생겼는데, 이혼을 당해 쫓겨난 상황이였다. 그녀의 친정 오라버니는 그녀를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형수가 허락하지 않아 오라버니가 곤란해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공방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들은 함께 자수를 만들며 아무도 과거를 언급하지 않고 미래만 이야기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시만자는 이런 분위기에 큰 감동을 먹어서 바쁜 와중에도 가끔 가서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석소사저와 라사저와의 관계도 부쩍 친해진 것 같았다. 최 씨도 가끔씩 오군 했는데 이날 마침 시만자를 만나 그녀와 잡담을 나누었다. 시만자는 현이가 몽동이에게 무술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말했다. “현이가 부지런하긴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부족해서 오히려 공부할 감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최 씨는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놀라운 무공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길에서 시달려 죽지 말라고 말입니다.” 최 씨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시만자는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의 걱정을 알 수 있었다. 백작가의 세자는 어디에 가든 시종들이 때를 지어 보호를 할 것이고, 공명을 따서 다른 곳의 관직으로 떠난다고 해도 고생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괴롭힘을 받을 일이 생긴다고 하면 아마 유배일 것이었다. ‘평서백부가 비록 가장 절정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잘 나가고 있는데 최 씨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시만자가 물어보려던 참에 최 씨 곁에 있던 시녀인 금숙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시만자가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급히 보고를 했다. “부인님, 둘째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 부인님을 모셔오라고 합니다. 셋째 아가씨께서 자결을 하셨답니다.” 최 씨가 놀라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왜? 사람은 구해냈느냐?”
왕청여의 일은 송석석도 알고 있었다. 송석석이 마침 그곳을 지나던 참이었기 때문에 왕청여의 일은 송석석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몰래 순방영의 순시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최근 몇 가지 항목을 심사하고 있었는데 순시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나쁜 기풍을 바로잡긴 했지만 많은 상인들이 순시를 보기만 하면 예전처럼 물건을 드려 환심을 사려고 했다. 원래는 사람을 파견해 지켜보도록 했는데 몰수는 하지만 게을러서 순찰을 돈 지 얼마 되지 않아 찻집을 찾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였다. 그래서 송석석은 직접 잡아 본때를 보여줘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그 일을 목격한 것이었다. 송석석은 약왕당까지 둘러보고 들어가서 물 한 그릇을 얻어 마시고 뒷마당의 푸른 커튼 뒤에서 모든 일의 경과를 목격했다. 처음에 그녀는 왕청여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뒷마당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약을 사고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사려는 약이 단설환일 줄은 몰랐다. 약왕당의 직원이 그녀에게 없다고 했는데 그녀는 믿지 않았다. 마침 노세진이 약재를 들여와 그녀와 면전에서 마주쳤다. 왕청여는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약왕당에 숨겨둔 단설환 몇 개가 있는지 알고 있다며 자기의 체면을 봐서 한 알만 팔아줄 순 없냐고 물었다. 약왕당엔 워낙 사람이 많았는데 그녀가 대중 앞에서 묻자 노세진은 당연히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에 왕청여는 억울해서 울며불며 예전엔 친척이지 않았냐며 통곡했다. 마침 노 씨 부인이 오늘 부군이 약재를 운반해 온다는 것을 알고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다가 그 장면을 마주친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 자리에서 싸웠고, 노 씨 부인의 입을 통해 송석석은 더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육씨 부인은 원래 그 일을 알지 못했지만 부군을 사랑했다. 그녀는 부군이 방 씨 가문에서 머물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왠지 방시원이 돌아
한편, 평서백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되었다.옥이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탓에 사람들은 최씨가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해주고 나서야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오 부인이 왕청여의 뺨을 몇 번이나 강하게 내리쳤고 이 광경을 약왕당에 있던 환자들만 본 게 아니라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들 약왕당으로 들어가 구경하기 바빴다.왕청여를 모시던 시녀의 말에 의하면 난리 난 와중에 누군가가 약왕당 안에 왕비가 계신다고, 이건 큰 실례를 범하는 거라고 외쳤다고 한다.최씨는 시녀의 말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약왕당 안에 있던 왕비가 송석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석석은 평소에도 약왕당에 자주 찾아갔으니까.하지만 다이 약왕당에 있던 왕비가 누구든 이 일에 관한 소문이 퍼지게 되면 평서백부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씨는 외원에 앉아 한참동안 차를 마시다가 그제야 일어서서 일단 노부인을 찾아갔다.노부인은 최씨를 보자마자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눈물을 보이면서 말했다.“아가야,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아예 소문이 안 나게 막아버리거나 오 부인을 찾아가서 원하는 건 뭐든 줄 테니까 나서서 해명 좀 해달라고 할까? 오 부인이 이 모든 게 오해라고 말해야 이 일이 잠잠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최씨는 노부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노부인은 화가 많이 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보려고 많은 고민을 한 듯했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통할 것 같은 방법을 최씨에게 얘기한 것이다.최씨는 남희를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옆에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멍하니 앉아있었다. 남희는 남편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녀에겐 자식도 있었다. 가족들 중 한 명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흥하거나 망할 수도 있어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이건 간통에 관한 예민한 문제는 언급하기도 조심스러운 부분이기에 남희도 어쩔 수가 없었으며 그저 큰형님이 잘 처리해주기를 지켜볼 뿐이었다.이때, 최씨가 입을 열었다.“일단은 그
최씨는 노부인의 이런 태도를 바란 건 맞지만, 실제로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쓰럽고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노부인이 평소에 사리에 밝고 명석한 사람이긴 하지만 친자식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불공평해질 수밖에 없다.홧김에 모진 말을 내뱉긴 했지만 딸 생각에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한편, 최씨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가 제일 고통스러웠다. 최씨에게 닥친 일도 매우 머리가 아프기에 혹시 노부인이 조금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노부인이 왕청여를 대하는 태도로 보면 왕표가 평처를 들인다고 해도 노부인은 결국 최씨에게 참으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노부인은 사리가 밝은 편이지만 유독 자신의 아들과 딸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포용심이 깊었다.왕청여가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노부인은 말로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할 뿐, 결국은 딸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셋째 아가씨는 이렇게 끔찍하게 아껴주는 어머니가 있어서 참 좋겠네요.”최씨의 말에 노부인은 곧바로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최씨의 손을 덥석 잡았다.“난 너희들을 다 똑같이 아끼고 있어. 혹시라도 나중에 왕표가 너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면 이 어미가 절대 왕표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맙습니다… 어머님.”최씨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가볍게 웃으면서 대꾸했다.‘똑같이 아낀다고? 어머님이 정말 우리를 똑같이 아낀다면 그때 당시 왕표가 남강에 가기 전에 집안에 첩을 들였을 때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야.’그때 당시 노부인은 부부의 일에 끼어들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이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한 노부인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옆에 놓인 비단 이불을 손에 꽉 쥐고는 최씨와 남희 두 사람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너희 두 사람에게 확실하게 얘기해둘 게 있어. 만약 이 일이 잘 해결되지 못하고 전씨 가문에서 끝까지 청여를 쫓아내겠다고 하면 난 청여를 집안으로 데려올 거야. 청여가 평서백부에서
전북망은 전소환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며 손마마를 불러 모든 하인을 물러나게 했다.그렇게 거실에는 전북망과 전북망의 부친, 그리고 형만 남았다.며칠동안 술을 진탕 마신 전북망은 얼굴이 창백해져 초췌해 보였으며 메마른 입술은 여기저기 다 터져서 피까지 고여 있었다. 온몸에서는 술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퇴폐했다.최씨는 그런 전북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머릿속에 전북망이 왕청여와 결혼하겠다고 찾아왔던 예전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의 전북망은 외모도 수려하고 기품도 꽤 넘쳤는데 현재는 이런 몰골이 되어버렸다.전북망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앉아있던 부친 전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모님, 지금 밖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부터 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어요. 정말 난리도 아닙니다. 저희 장군부가 손꼽힐 정도로 명문 가문은 아니지만 품행이 올바르지 못한 며느리를 계속 집안에 두고 있을 그런 허접한 가문도 아닙니다.”찾아오기 전부터 전씨 가문의 태도를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최씨는 전기의 말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으며, 전북망에게 아내를 내쫓지 말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최씨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다른 부탁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더라도 내년에 이혼하면 안 되는지 여쭤보고 싶네요.”최씨의 말에 전기가 위엄 넘치는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사모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내년까지 이 며느리를 집안에 두고 있으면 저희 장군부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더군다나 왕청여도 계속 내 아들과 이혼하고 싶어 했잖아요. 이제 왕청여 뜻대로 이혼을 해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죠? 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서부터 거의 매일 싸웠어요.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죠. 겨우 임신을 했는데 결국 아이도 지키지 못한 걸 보면 두 사람은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인연도 아닌 두 사람을 굳이 강제
일이 터진 뒤로 최씨가 왕청여를 보러 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침대에 누워있는 왕청여는 이불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하인이 의자를 가져와 침대 곁에 놓으며 최씨에게 앉으라고 했고, 최씨는 의자에 앉아 침대 위에서 몸을 조금씩 떨고 있는 왕청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도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어차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잖아. 어머님은 나한테 노씨 부인을 찾아가서 빌어보라고 하셨어. 노씨 부인이 해명만 잘해주면 조용하게 해결될 거라고 하셨어. 노씨 부인이 우리 뜻대로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내가 오늘 장군부에 찾아갔어. 전북망 씨는 오래 전부터 너에 관한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고 했어. 다만 대놓고 너한테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야. 네가 전북망 씨와 다시 잘 살 생각이 있다면 전북망 씨는 이 일을 그냥 조용하게 흘려 보낼 거라고 했어. 하지만 한 가지, 전북망 씨는 군대로 복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조용하게 듣고 있던 왕청여가 이불을 확 제치더니 퉁퉁 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은 몰라요. 그 사람이 알 리가 없어요... 근데 저랑 이혼하지 않는 대신 조건을 내걸지 않았나요?”“말했잖아. 군대로 복귀할 거라고.”“계급도 안 되는 군인이나 하겠다고요?!”왕청여가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친정으로 돌아갈 거예요. 엄마가 나 살 곳을 확실하게 마련해준다고 했어요. 어떤 일이 생겨도 난 평서백부 셋째 딸이에요. 내가 전씨 가문에 가지고 간 예물만으로도 나 혼자서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계속해야 돼요? 내가 왜 그런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야 하냐고요?”침대에 축 처져 있는 왕청여의 목에는 조인 흔적이 여전히 벌겋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던 왕청여가 서럽게 소리를 질렀다.“다들 날 무시하고 있다는 거
최씨는 더 이상 왕청여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네가 끝까지 이혼하고 싶다면 나도 노씨 부인에게 찾아가 부탁할 필요도 없겠네.”최씨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새언니… 그래도 노씨 부인에게 찾아가서 이 오해를 확실하게 설명하고 푸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노세진과 함께했을 때 노세진은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어요. 그러니.. 이걸 전부 제 탓으로 돌리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새언니도 지금 조카에게 어울릴만한 남자를 찾아주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조카가 좋은 남자를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최씨는 화가 치밀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꾸했다.“제 명이라고 봐야지 뭐. 넌 운이 좋아서 평서백부에서 태어났지만 네 조카는 명이 안 좋아서 너랑 같은 가문에서 태어난 거지.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 서러워도 참아야지 어쩌겠어. 자신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잘못이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새언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나한테 전씨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강요라도 하는 거예요?”최씨는 왕청여의 말에 대꾸도 하기 싫어서 홱 돌아서서 떠났고 이제부터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왕청여가 끝까지 전북망과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노씨 부인에게 찾아가서 부탁해도 전혀 소용없었다. 이 일에 잘못 엮이는 순간엔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지 않는 이상 절대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한편, 북명황실에서.송석석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던 시만자는 입을 떡 벌린 채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세상이 그런 사람들이 있어. 방화나 살인 같은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냥 눈에 거슬리고 이유 없이 싫단 말이야. 지금 보니 왕청여 그여자랑 전북망이 꽤 어울리는 한 쌍이네.”시만자의 말에 송석석이 대꾸했다.“오늘 약왕당에서 나를 본 사람들이 꽤 있을 거야. 난동을 부린 주인공들이
”시부귀, 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비관적으로 변한 것이야?”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왕이장이 송석석과 시만자의 뒤에 서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너보다 힘든 사람들도 인생을 낙관적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넌 그 사람들에 비해 돈도 많고 실력도 뛰어나고 얼굴도 예쁘잖아. 이 세상 여자들이 바라는 건 거의 다 가진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을 한 번 겪었다고 그렇게 우울해 있으면 안 되지. 널 훌륭한 집안에 보내준 하늘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시만자가 고개를 돌려 왕이장을 쳐다보았다. 건장한 몸매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왕이장은 평소와 똑같이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은은한 불빛에 비춰진 구릿빛 피부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고 실눈을 살짝 뜬 눈빛으로는 진지하게 시만자를 위로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장난으로 비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가자. 기분이 우울할 땐 하늘을 훨훨 나는 게 좋아.”시만자의 손목을 덥석 잡은 왕이장은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하늘 위를 자유롭게 활보했고 그 모습에 시만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왕노오의 경공이 이렇게 뛰어났었나?’시만자는 지금까지 왕이장을 별 볼일 없게 생각하고 있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송석석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뭐지? 선배가 날 못 본 건가? 나한테 눈길 한 번 안 주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니…’왕이장은 시만자를 데리고 왕경루의 맨 꼭대기층으로 갔다. 두 발이 허공에 뜬 채로 자리에 털썩 앉은 두 사람 눈 앞에 화려한 진성의 불빛들이 펼쳐졌다.꼭대기층으로 날아올라가기 전에 두 사람은 왕경루 안에서 술 두 병까지 몰래 챙겼고 사이좋게 한 병씩 손에 들고 마시고 있었다.햇빛이 뜨거운 낮과 달리, 밤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했다.어둠이 깃든 탓에 시만자와 왕이장은 서로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으며 이렇게 술까지 마시고 있으니 왠지 분위기가 야릇했다.눈치를 보던 왕이장은 이내 주머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야명주 한 알을 꺼냈고 주변을 순식간에 환하게 비췄다.“반짝이고 있는 저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