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왕이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술병을 들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야명주를 다시 주머니에 넣을뿐이었다. 환하게 비추던 불빛이 사라지고 남은 건 은은한 달빛과 별빛뿐이었다.한편, 시만자는 왕이장에게 이런 출생의 비밀이 있을 줄은 몰랐으며 전에 송석석도 시만자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평소에 이곳저곳 기방들을 돌아다니면서 여인들의 노래소리에 취해 살거나 여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걸 좋아하는 탕자가 백부의 도련님이라니.왕이장이 침묵하고 있던 사이에 시만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집안 서열 싸움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왕이장의 출생은 아버지에게 행운이라고 했으니 왕이장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것이다.하지만 첩의 아들이 사랑을 받는다는 건 적모와 적자에게 곧 신분의 도전이고 위협이 되는 일이다. 아직 왕이장의 친모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서열 싸움에 강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친모가 수단 있는 사람이고 기싸움에 능했다면 왕이장은 지금처럼 돌아갈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을 떠돌아다니지는 않았을 테니까.“평서백부 노부인이 널 집에 못 돌아가게 막고 있는 거야? 네가 돌아가서 가업을 빼앗기라도 할까 봐?”시만자가 조심스럽게 묻자 왕이장이 억지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는지도 몰라. 그러니 차라리 잘된 일이야. 평서백부는 겉으로 보기엔 무한한 영광을 누리는 듯하지만 사실 많은 위기가 잠재되어 있어. 그 사람들이 내가 살아있는 걸 알면 나한테 난장판이 된 집안을 해결해 달라고 할 거야. 난 그딴 뒤처리를 하기 싫어. 다만 진성에 있는 며칠 동안 내 형수님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돼서 마음이 좀 안타까워. 평서백부에서 형수님이 가문을 지키는 주모인 건 맞지만 결국 성씨도 다른 남이잖아. 형수님은 감당할 필요가 없는 책임들을 너무 많이 짊어지고 계셔.”시만자는 왕이장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최씨 부인을 도와주려는 거야?”“도울 수는 없어. 그래서 마음이 더 불편하
왕이장은 또다시 침묵한 채 술만 벌컥벌컥 들이마실 뿐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술병을 비우고는 시만자의 술병까지 빼앗으려 했지만 시만자는 그가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끝까지 자신의 술을 넘겨주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왕경루 맨 꼭대기에서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으며 어느새 조금 전의 무거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시만자는 왕이장의 비밀을 송석석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왕이장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싫어하는 눈치였기에 시만자는 굳이 이 비밀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왕이장이 시만자를 친한 벗으로 생각하여 속마음을 얘기했기에 시만자가 당연히 그 비밀을 떠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하지만 왕이장이 며칠 동안 계속 평서백부 주변을 맴돈 탓에 결국 순방영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오진은 이 사실을 송석석에게 알렸고 송석석은 왕이장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선배가 왜 평서백부 주위를 맴도는 거지? 혹시 그 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송석석은 왕이장에게 물었다.“선배, 요즘 뭐 하고 계세요?”송석석의 물음에 왕이장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딱히 하는 일은 없어.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지.”“평서백부 주변을 돌아다니고 계신 거 맞죠?”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왕이장은 고개를 돌려 시만자를 쳐다보았고 화들짝 놀란 시만자는 얼른 손을 내둘렀다.“난 아무 말도 안 했어.”송석석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명은 화가 난 듯 씩씩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었다.송석석이 두 사람에게 물으려던 그때, 사여묵이 송석석에게 반찬을 덜어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게.”송석석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시만자와 왕이장을 쳐다보았고 시만자와 왕이장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다급하게 젓가락질을 했다.이때, 곁에 앉아있던 심청화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두 사람이 왕경루에 술을 마
식사를 마친 뒤, 사여묵과 송석석은 심청화의 양팔을 꽉 잡은 채 서재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도망칠 틈도 전혀 주지 않게 앞을 단단히 막아섰다. “어허, 자네들 행동이 너무 거칠어. 이 손 좀 놓고 얘기하게.”결혼을 한 심청화는 말투에서 교양이 철철 넘쳐 흘렀지만 사여묵과 송석석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심청화를 의자에 강제로 앉혔다. 어린 후배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심청화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대놓고 물어봐.”사여묵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자, 그럼 첫 번째 질문할게요. 오사형은 왜 요즘 평서백부 주변을 맴도는 거예요? 혹시 사숙이나 사부께서 따로 뭔가 분부하신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요? 혹시 왕표에 관해 뭔가를 알아낸 거 아니에요?”곁에 있던 송석석의 표정은 더욱 진지해졌다.“두 번째 질문은 제가 할게요. 오늘 따라 만자를 쳐다보는 오사형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심지어 둘이 티격태격 싸우지도 않잖아요. 분명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데 대사형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계세요?”심청화는 평소에도 입이 아주 무거웠기에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왕이장의 출신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하게 알고 있지만 굳이 가깝게 지내는 후배들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사부는 오래 전에 이미 심청화에게 왕이장의 출생에 대해 얘기해주며 왕이장을 잘 타이르라고 당부도 했었다. 심청화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고 왕이장을 설득했지만 왕이장은 만종문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없다고 반박했다.“왕이장은 평서백부 왕표와 왕준의 친동생이야. 왕청여가 왕이장의 친누나이고 최씨 부인은 왕이장의 형수야. 왕이장이 며칠 동안 평서백부 주변을 맴돌았던 건 평서백부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싶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 노부인께서 앓아 누우셔서 단설환이 필요
심청화는 그 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두 사람에게 얘기해주었다.점쟁이는 절에서 쫓겨난 왕교여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나중에 늑대들에게 잡아 먹히면 뼈도 남지 못할 것이기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하지만 상황은 점쟁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때 당시 임양운이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저녁쯤 되었을 때 갓난애가 우는 듯한 미세한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고 요괴가 아닐까 관심이 생긴 임양운은 미약한 울음소리를 쫓아갔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왕교여가 발견되자 너무 실망스러웠다. 요괴도 아니고 갓난아이도 아닌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대여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라니. 심지어 이곳에 방치된 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발가락 하나가 쥐들에게 뜯겨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이 근처에 독사도 자주 나타나지만 움직일 힘조차 없었던 왕교여가 꿈쩍도 하지 않은 덕분에 독사는 왕교여를 공격하지 않았다.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임양운이 곧 죽어가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며칠 동안 쌀죽을 먹이고 약도 달여서 먹인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가 기적처럼 살아났다. 진성에 있을 때 수많은 명의의 손을 거쳐도 전혀 호전이 없던 아이는 두 그릇의 탕약과 쌀죽으로 벌떡 일어난 것이다.실로 신기한 일이었지만 임양운은 여전히 아이가 크게 달갑지 않았다. 온몸에 뼈밖에 남지 않은 아이는 여섯 살이나 됐는데도 서너 살처럼 보였기에 이 아이를 키우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았다.임양운은 왕교여를 내쫓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야산에서 아이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 독사에게 둘러싸여서도 전혀 겁도 먹지 않았고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던 이 아이가 실로 강심장인 것 같았다.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 가장 강한 자라고 생각했기에 임양운은 일단 아이를 키우기로 했다.한편, 여섯 살 왕교여는 모든 걸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사부를 믿은 왕교여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전부 얘기했고 임양운은 사람을 시켜 확실하게 조사하고 나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절이 불에 타버린
심청화는 사여묵이 얘기한 부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왕전이 승작을 하지 않았다고? 그럼 사부께서 조사하라고 보낸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거야?”심청화의 말에 사여묵이 대답했다.“염 선생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겠죠.”조금 뒤, 서재로 들어선 염구진은 예전에 평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자 확실히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명문 가문들의 집안일은 위로 삼대까지 알고 있지만 대충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뿐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다.“왕전이 승작한 적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때 당시 평서백부 어르신께서 병을 앓고 계셔서 세자를 정하지 않으셨거든요. 왕전이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뒤, 어르신은 왕전을 세자로 임명했고 그 뒤로부터 어르신의 몸 상태가 점점 호전되다가 기적처럼 완치가 되셨어요. 그래서 승작에 관한 일도 계속 뒤로 미루어진 거죠.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르신께서 장손 왕표를 세손으로 책봉했어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외부인은 아무도 모르죠. 물론 저도 모릅니다. 아마 평서백부 몇몇 어르신들과 현재의 평서백부 노부인만 정확한 내막을 알고 계실 거예요.”염구진의 말에 이 일은 더욱 미궁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만약 그때 당시 왕전이 승작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세자로 임명된 것으로 아들인 왕이장이 자신의 운명의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인지 싶었다. 왕이장이 태어난 그 해에 왕전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다섯 살이 된 왕이장이 점쟁이한테 보내질 때까지도 왕전은 승작을 하지 못했다.이렇게 듣고 보면 왕이장의 출생은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운명을 바꾼 것 같기도 하다.어찌 됐든 이 속에는 문제가 많다. 그리고 어쩌면 평서백부의 몇몇 어르신들도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모든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평서백부의 노부인밖에 없을지도 모른다.“일단 조사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오사형이 직접 결정해야죠. 저희는 그냥 알고 있기만 하다가 오사형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하
염구진과 노 집사는 자신의 인맥을 통해 예전에 있었던 일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평서백부 방계 어르신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왕이장이 불에 타 죽은 뒤로 왕전 부부가 오랜 세월동안 슬퍼했다고 한다.방계 어르신들의 말은 예전에 임양운이 조사했던 내용과 똑같애 그저 겉으로 보여지는 거짓일 뿐이었다. 한편, 전북망과 왕청여는 결국 합의하에 이혼하게 되었다. 두 당사자가 동의한 일이라 별다른 분쟁도 없었고 예물도 그대로 다 되돌려 받았다.그때 당시 두 사람의 결혼식은 진성 전체가 들썩거릴 정도로 화려하고 성대했지만 이혼할 때만큼은 아무도 모르게 최대한 조용하게 진행했다.왕청여는 최씨에게 장군부의 어려운 상황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큰 예물은 필요 없으니 비단과 액세서리만 돌려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말과 달리 예물로 줬던 집과 땅은 이혼하자마자 사람을 시켜 돌려받았다.최씨는 직접 해결하는 대신, 집안일을 돕는 집사를 보내 처리하게 했다.한편, 왕청여와 노부인은 끝까지 최씨에게 노씨 부인을 찾아가서 해명을 부탁하라고 시켰으며 돈은 얼마든지 줄 수 있다고 하기도 했다.하지만 최씨와 남희 두 사람은 반대했다. 큰돈을 들여 셋째 아가씨의 명성을 되돌릴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자 최씨는 결국 앓아눕고 말았다.야밤에 갑자기 고열을 앓기 시작하더니 의식마저 흐릿해졌다. 급하게 의사를 불러 진료를 받아보니 속에 화병이 나서 온몸에 열이 나는 거라고 했고 더군다나 쌀쌀한 가을바람까지 맞아 상태가 더욱 악화된 것이다.최씨가 아프다는 소식에 친아들과 친딸에 이어 서자와 서녀까지 한걸음에 달려와 최씨를 보살폈다.서녀들은 아군서원에 합격하지는 못했지만 최씨는 그들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마마를 구해서 전문적인 교육까지 받게 했다. 이렇듯 최씨는 결혼 생활에 최선을 다했으며 남들이 절대 못하는 부분도 어떻게든 해내려고 애를 썼다.평서백부 노부인은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 탓에 최씨가 앓아눕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미안한 마음에 왕청
노씨 부인이 평서백부까지 찾아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외부에 떠도는 유언비어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었고 노세진이 약왕당에서 약재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매일 약왕당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왕당은 환자가 많아진 게 아니라 노세진을 한 마디라도 욕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들썩였으며 이 때문에 약왕당은 도무지 제대로 된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사태가 더 이상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해지자 약재를 캐서 돌아온 단신의는 약왕당 앞에 서서 오늘부로 노세진을 약왕당에서 내보내겠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고 노세진은 더 이상 약왕당 직원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얘기했다.그리고 이 외에도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방씨 가문에서 겨우 마음에 드는 여인이 생겼고 방시원의 모친 노수인도 상대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여자 측에서도 좋다고 동의했고 이제 방시원만 동의하면 혼사를 준비할 수 있을 텐데 하필 이 상황에서 이런 일이 터지는 탓에 여자 측에서 바로 중매쟁이를 보내 없던 일로 하자고 말을 전했다.평소에 만나서 차나 마시고 담소는 나눌 수 있지만 혼사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얘기하지 말자고 명확한 뜻을 보였다.화가 잔뜩 난 노수인은 친정으로 돌아가 노씨 가문 어르신들에게 고자질을 했다.노씨 가문 어르신들은 바로 노세진을 집안으로 불러 호되게 나무랐고 형제에게 민폐만 끼치는 멍청한 놈일 뿐만 아니라 노씨 가문 전체에 먹칠한 것도 모자라 방시원과 방씨 가문의 명성까지 더럽혔다고 호통을 쳤다.안 그래도 약왕당에서 쫓겨난 노세진은 노씨 가문 어르신들에게 욕까지 먹자 화도 나고 너무 창피해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부인에게 이혼하자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노세진이 홧김에 이혼 얘기를 꺼냈을 수도 있고 혹은 오래 전부터 이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유가 어찌 됐든 이혼이라는 단어를 들은 노씨 부인 운향월은 분노가 순식간에 치밀었다.운향월의 친정은 6품 관원으로 권력이나 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딸이 이렇게 괴롭힘을 당하는 꼴은 절대 가만
집안 허물은 밖으로 소문내지 않는 것이 법이지만 운향월은 더 이상 그런 체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송석석의 위압감 넘치는 모습에 덜컥 겁을 먹은 운향월은 가가스로 눈물을 참은 채 모친과 친척들을 데리고 평서백부 내부로 들어갔다.왕준이 아직 퇴청하지 않은 탓에 평서백부 안에는 남희 혼자서 하인들을 데리고 서있었다.단 한번도 이런 상황을 처리해본 적 없는 남희는 하인에게 왕청여를 데리고 나오라고 지시했지만 방에 숨어있던 왕청여는 송석석까지 출동했다는 말에 더더욱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결국 상황을 전해들은 최씨가 열이 펄펄 나는 몸을 이끌고 나와서 문제를 수습했다. 송석석은 그런 최씨를 보자마자 마음이 안쓰러웠다. 며칠 사이에 최씨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심각하게 말라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안색이 너무 창백하고 입술은 고열 때문에 벌겋게 변해 있었다. 하인의 부축 없이는 혼자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몸이 허약한 것 같았다.송석석은 평소에도 최씨와 사이가 가까웠지만 최씨가 왕이장의 형수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로부터 최씨에게 더욱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최씨가 이토록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황에서도 왕청여의 뒤처리를 해주기 위해 사람들 앞에 선 모습을 보자 송석석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평서백부 셋째 아가씨께서 끝까지 나오기 싫다고 하신다면 노부인께서라도 나오시라고 하세요. 아픈 사람을 이렇게 혹사시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왕비님, 저희 어머님께서도 몸이 안 좋으십니다…”남희가 대답했다.한편, 운향월은 말이 전혀 안 통하고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일이 이 지경까지 됐으니 왕청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뿐이다. 확실한 대답만 들으면 마음이 조금 풀릴 것 같았다.운향월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전 아무도 힘들게 할 생각 없습니다. 다만 왕청여에게 한 마디 물어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날 약왕당에 일부러 그 사람을 찾아간 건지, 아니면 정말 단순히 약을 사러 간 건지 그것만 솔직하게 대답해주길 바랍니
임양운은 한동안 경사에 계속 머물렀다. 예전에는 신화기 연구에 몰두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진성의 일을 놓을 수 없다는 핑계로 더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송석석을 걱정하고 있었다.처음 신화기를 연구할 때, 특별히 사람을 보내 북당으로 가서 처방을 받았던 것도 남강과 송회안, 그리고 결국은 사여묵과 송석석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부로서 제자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그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임양운은 항상 자신이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뛰어났고, 인품마저 매우 훌륭했다. 그 누구도 그를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송석석만은 걱정이 되었다. 송석석은 놀고 싶어만 하는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술을 출중하게 익힐 만큼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펼쳐진 자유롭고 밝은 웃음을 볼 때마다 임양운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강제로 빠르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언제나 마음의 긴장을 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받은 상처들은 시간만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도와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사여묵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웃게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결핍까지는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양운은 아픈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러고는 궁에 가서 황제와 대면했다.한때 번성했던 임씨 가문에는 지금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제자들만 있을 뿐 자식이나 후손은 없었기 때문이다. 임왕 임병일은 당시 한때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그 공로가 너무 커서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아마도 여러 가지 은혜와 원한이 있었을 것이지만, 숙청제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임씨 가문은 결국 사씨 가
거리를 돌며 공개적으로 조롱받는 동안, 영군왕은 완전히 무너져 미쳐버린 듯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 무지하고 어리석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백성들이 조정에 속아 폭군을 현명한 군주로 착각하였으며, 자신 사청엄만이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쉰 목소리는 백성들의 저주 속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외치며 요참형조차 그에게는 너무 관대하다며, 차라리 천 번의 칼질과 만 번의 난도질을 하는 능지처참으로 갚아야 한다고 외쳤다.연왕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억울함과 사청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만약 사청엄이 자신의 사람들을 배반시키지 않았다면 자신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사청엄은 어둠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독사처럼 그가 모르는 사이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사청엄 때문에 그는 이제 단순한 역적이 아니라 어리석은 역적으로 전락했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을 남에게 넘겨야 했고,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묶여 조정의 군대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훗날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이름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그는 평생 동안 권력과 명성을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형틀에 묶여 처형대로 끌려가는 순간, 그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증오와 조롱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그는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이 모든 순간을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의 뜻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고, 아내를 맞이하고 첩을 들인 것조차 모두 이용을 위한 수단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마음껏 사랑해보려 했지만, 그로 인해 무상과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눈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는 군중 속에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옷을 입은 그녀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드디어 대청산이 시작되었다.대리사와 경위 형부의 공동 조사 끝에, 연왕과 영군왕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사실로 밝혀졌다.모두 죄목이 확실했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의 모든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다.연왕 일가는 정보를 제공한 공을 세운 사여령을 제외하고 모두 황실 감옥에 갇혔다.사여령은 황실 족보에서 이름이 제외되었다. 여전히 대리사에서 감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진이는 그를 일시적으로 직무에서 배제시켰고, 처분이 끝난 후 복직시키겠다고 했다.진이는 선의를 베풀어 그에게 앞으로 이 직책을 계속 맡고 싶다면 황실 감옥에 가까이 가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반성하라고 당부했다.진이는 사여령이 어리석기는 해도 성실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우유부단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진이는 여전히 그를 돌보아 주려 했다.진이는 송석석에게도 사여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송석석은 사여령이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아 무슨 일이 생겨도 반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랐지만, 다행히 적모 밑에서 자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아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사여령을 특별히 돌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여령이 진성에 머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황제를 안심시킬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이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여령이 이번 처벌을 피할 수 있던 이유도 연왕의 사병 정보를 제공한 덕이었지만, 일이 지나간 후 황제가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가 그의 직책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자신의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그가 진성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조정 회의에서 숙청제는 영군왕과 연왕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죄목을 발표했다. 그들의 죄목은
추몽의 눈빛에 섬뜩함이 스쳤다."좋습니다. 위선적인 말 어디 한번 들어보지요."숙청제는 원래 의심이 많아 항상 북명황실을 경계해 왔다. 송석석에게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반기를 들겠냐고 묻는 것도, 비록 그녀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송석석이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묻는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녀는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아직 송석석이 대답도 하기 전에, 추몽은 비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먼저 아첨하며 숙청제를 치켜세워 보시지요. 그의 정책이 여성을 얼마나 잘 대우했는지 떠들어 보십시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마음껏 칭송하시지요."송석석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비꼬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럴듯하게 가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상이 어리석고 폐쇄적이라 당신의 기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인정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당신 개인의 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지도 못하며,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들에게 원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더 큰 혐오와 배척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를 안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꾸짖고 비난할 것입니다."추몽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그는 이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이라는 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니 제가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시는군요." 추몽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송석석이 차분히 대답했다."살 길이 막혔다는 것과 대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같은
제제사와 추몽은 대리사의 심문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송석석은 서리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리 않았기에 그들이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더라도 송석석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한숨 소리 전부 말이다.하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 시선을 몇 번 마주하지도 않았다. 마치 강제로 한자리에 앉혀진 낯선 이들처럼 거리감과 냉담함이 느껴졌다.송석석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그 어색함을 어쩔 수 없이 함께 견뎌야 했다.오랜 침묵 끝에 제제사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왜 이런 짓을 한 거냐?”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추몽은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굳이 따져 묻을 필요가 있나?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는 법이지.”“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 아니더냐?” 제제사가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로 묻자, 추몽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어차피 이 생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선황제가 그러지 않았나? 나는 패역한 자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가진 생각들이 진정 패역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짜로 패역한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른 모든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제제사가 그의 시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너희 반란으로 수천수만 명이 죽었고, 피비린내는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네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다.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겼느냐?”추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심히 차갑고 냉담해 보였다.“추몽,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냐?” 제제사가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