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이 터진 뒤로 최씨가 왕청여를 보러 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침대에 누워있는 왕청여는 이불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하인이 의자를 가져와 침대 곁에 놓으며 최씨에게 앉으라고 했고, 최씨는 의자에 앉아 침대 위에서 몸을 조금씩 떨고 있는 왕청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도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어차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잖아. 어머님은 나한테 노씨 부인을 찾아가서 빌어보라고 하셨어. 노씨 부인이 해명만 잘해주면 조용하게 해결될 거라고 하셨어. 노씨 부인이 우리 뜻대로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내가 오늘 장군부에 찾아갔어. 전북망 씨는 오래 전부터 너에 관한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고 했어. 다만 대놓고 너한테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야. 네가 전북망 씨와 다시 잘 살 생각이 있다면 전북망 씨는 이 일을 그냥 조용하게 흘려 보낼 거라고 했어. 하지만 한 가지, 전북망 씨는 군대로 복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조용하게 듣고 있던 왕청여가 이불을 확 제치더니 퉁퉁 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은 몰라요. 그 사람이 알 리가 없어요... 근데 저랑 이혼하지 않는 대신 조건을 내걸지 않았나요?”“말했잖아. 군대로 복귀할 거라고.”“계급도 안 되는 군인이나 하겠다고요?!”왕청여가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친정으로 돌아갈 거예요. 엄마가 나 살 곳을 확실하게 마련해준다고 했어요. 어떤 일이 생겨도 난 평서백부 셋째 딸이에요. 내가 전씨 가문에 가지고 간 예물만으로도 나 혼자서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계속해야 돼요? 내가 왜 그런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야 하냐고요?”침대에 축 처져 있는 왕청여의 목에는 조인 흔적이 여전히 벌겋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던 왕청여가 서럽게 소리를 질렀다.“다들 날 무시하고 있다는 거
최씨는 더 이상 왕청여와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네가 끝까지 이혼하고 싶다면 나도 노씨 부인에게 찾아가 부탁할 필요도 없겠네.”최씨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대답했다.“새언니… 그래도 노씨 부인에게 찾아가서 이 오해를 확실하게 설명하고 푸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노세진과 함께했을 때 노세진은 아직 결혼하기 전이었어요. 그러니.. 이걸 전부 제 탓으로 돌리면 안 되잖아요. 그리고 새언니도 지금 조카에게 어울릴만한 남자를 찾아주고 있다고 하셨잖아요.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조카가 좋은 남자를 못 만날 수도 있잖아요.”최씨는 화가 치밀었지만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대꾸했다.“제 명이라고 봐야지 뭐. 넌 운이 좋아서 평서백부에서 태어났지만 네 조카는 명이 안 좋아서 너랑 같은 가문에서 태어난 거지. 운명이 그렇게 정해져 있으니 서러워도 참아야지 어쩌겠어. 자신을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는 건 잘못이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잖아.”“새언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나한테 전씨 가문으로 돌아가라고 강요라도 하는 거예요?”최씨는 왕청여의 말에 대꾸도 하기 싫어서 홱 돌아서서 떠났고 이제부터 이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왕청여가 끝까지 전북망과 이혼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노씨 부인에게 찾아가서 부탁해도 전혀 소용없었다. 이 일에 잘못 엮이는 순간엔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지 않는 이상 절대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한편, 북명황실에서.송석석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던 시만자는 입을 떡 벌린 채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세상이 그런 사람들이 있어. 방화나 살인 같은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냥 눈에 거슬리고 이유 없이 싫단 말이야. 지금 보니 왕청여 그여자랑 전북망이 꽤 어울리는 한 쌍이네.”시만자의 말에 송석석이 대꾸했다.“오늘 약왕당에서 나를 본 사람들이 꽤 있을 거야. 난동을 부린 주인공들이
”시부귀, 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비관적으로 변한 것이야?”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왕이장이 송석석과 시만자의 뒤에 서서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끼어 들었다.. “너보다 힘든 사람들도 인생을 낙관적으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넌 그 사람들에 비해 돈도 많고 실력도 뛰어나고 얼굴도 예쁘잖아. 이 세상 여자들이 바라는 건 거의 다 가진 것 같은데 안 좋은 일을 한 번 겪었다고 그렇게 우울해 있으면 안 되지. 널 훌륭한 집안에 보내준 하늘에게 미안하지도 않아?!”시만자가 고개를 돌려 왕이장을 쳐다보았다. 건장한 몸매에 수려한 외모를 지닌 왕이장은 평소와 똑같이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은은한 불빛에 비춰진 구릿빛 피부는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고 실눈을 살짝 뜬 눈빛으로는 진지하게 시만자를 위로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장난으로 비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가자. 기분이 우울할 땐 하늘을 훨훨 나는 게 좋아.”시만자의 손목을 덥석 잡은 왕이장은 단번에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하늘 위를 자유롭게 활보했고 그 모습에 시만자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왕노오의 경공이 이렇게 뛰어났었나?’시만자는 지금까지 왕이장을 별 볼일 없게 생각하고 있었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송석석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뭐지? 선배가 날 못 본 건가? 나한테 눈길 한 번 안 주고 인사도 하지 않는다니…’왕이장은 시만자를 데리고 왕경루의 맨 꼭대기층으로 갔다. 두 발이 허공에 뜬 채로 자리에 털썩 앉은 두 사람 눈 앞에 화려한 진성의 불빛들이 펼쳐졌다.꼭대기층으로 날아올라가기 전에 두 사람은 왕경루 안에서 술 두 병까지 몰래 챙겼고 사이좋게 한 병씩 손에 들고 마시고 있었다.햇빛이 뜨거운 낮과 달리, 밤바람은 무척이나 시원했다.어둠이 깃든 탓에 시만자와 왕이장은 서로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으며 이렇게 술까지 마시고 있으니 왠지 분위기가 야릇했다.눈치를 보던 왕이장은 이내 주머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는 야명주 한 알을 꺼냈고 주변을 순식간에 환하게 비췄다.“반짝이고 있는 저
하지만 왕이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술병을 들고 술을 벌컥벌컥 마시며 야명주를 다시 주머니에 넣을뿐이었다. 환하게 비추던 불빛이 사라지고 남은 건 은은한 달빛과 별빛뿐이었다.한편, 시만자는 왕이장에게 이런 출생의 비밀이 있을 줄은 몰랐으며 전에 송석석도 시만자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평소에 이곳저곳 기방들을 돌아다니면서 여인들의 노래소리에 취해 살거나 여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걸 좋아하는 탕자가 백부의 도련님이라니.왕이장이 침묵하고 있던 사이에 시만자의 머릿속에는 이미 집안 서열 싸움의 한 장면이 펼쳐졌다.왕이장의 출생은 아버지에게 행운이라고 했으니 왕이장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것이다.하지만 첩의 아들이 사랑을 받는다는 건 적모와 적자에게 곧 신분의 도전이고 위협이 되는 일이다. 아직 왕이장의 친모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서열 싸움에 강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친모가 수단 있는 사람이고 기싸움에 능했다면 왕이장은 지금처럼 돌아갈 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밖을 떠돌아다니지는 않았을 테니까.“평서백부 노부인이 널 집에 못 돌아가게 막고 있는 거야? 네가 돌아가서 가업을 빼앗기라도 할까 봐?”시만자가 조심스럽게 묻자 왕이장이 억지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 사람들은 내가 살아있는지도 몰라. 그러니 차라리 잘된 일이야. 평서백부는 겉으로 보기엔 무한한 영광을 누리는 듯하지만 사실 많은 위기가 잠재되어 있어. 그 사람들이 내가 살아있는 걸 알면 나한테 난장판이 된 집안을 해결해 달라고 할 거야. 난 그딴 뒤처리를 하기 싫어. 다만 진성에 있는 며칠 동안 내 형수님의 어려운 처지를 알게 돼서 마음이 좀 안타까워. 평서백부에서 형수님이 가문을 지키는 주모인 건 맞지만 결국 성씨도 다른 남이잖아. 형수님은 감당할 필요가 없는 책임들을 너무 많이 짊어지고 계셔.”시만자는 왕이장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네가 최씨 부인을 도와주려는 거야?”“도울 수는 없어. 그래서 마음이 더 불편하
왕이장은 또다시 침묵한 채 술만 벌컥벌컥 들이마실 뿐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술병을 비우고는 시만자의 술병까지 빼앗으려 했지만 시만자는 그가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아서 끝까지 자신의 술을 넘겨주지 않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왕경루 맨 꼭대기에서 티격태격 싸우고 있었으며 어느새 조금 전의 무거운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다.시만자는 왕이장의 비밀을 송석석에게 얘기하지 않았다.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왕이장이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싫어하는 눈치였기에 시만자는 굳이 이 비밀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왕이장이 시만자를 친한 벗으로 생각하여 속마음을 얘기했기에 시만자가 당연히 그 비밀을 떠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하지만 왕이장이 며칠 동안 계속 평서백부 주변을 맴돈 탓에 결국 순방영 사람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오진은 이 사실을 송석석에게 알렸고 송석석은 왕이장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선배가 왜 평서백부 주위를 맴도는 거지? 혹시 그 집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그날 저녁, 식사 자리에서 송석석은 왕이장에게 물었다.“선배, 요즘 뭐 하고 계세요?”송석석의 물음에 왕이장이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딱히 하는 일은 없어.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지.”“평서백부 주변을 돌아다니고 계신 거 맞죠?”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왕이장은 고개를 돌려 시만자를 쳐다보았고 화들짝 놀란 시만자는 얼른 손을 내둘렀다.“난 아무 말도 안 했어.”송석석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한 명은 화가 난 듯 씩씩거리고 있었고 나머지 한 명은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뭔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었다.송석석이 두 사람에게 물으려던 그때, 사여묵이 송석석에게 반찬을 덜어주며 말했다.“일단 밥부터 먹게.”송석석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시만자와 왕이장을 쳐다보았고 시만자와 왕이장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다급하게 젓가락질을 했다.이때, 곁에 앉아있던 심청화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며칠 전에 두 사람이 왕경루에 술을 마
식사를 마친 뒤, 사여묵과 송석석은 심청화의 양팔을 꽉 잡은 채 서재로 끌고 갔다. 그러고는도망칠 틈도 전혀 주지 않게 앞을 단단히 막아섰다. “어허, 자네들 행동이 너무 거칠어. 이 손 좀 놓고 얘기하게.”결혼을 한 심청화는 말투에서 교양이 철철 넘쳐 흘렀지만 사여묵과 송석석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심청화를 의자에 강제로 앉혔다. 어린 후배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심청화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그냥 대놓고 물어봐.”사여묵이 먼저 질문을 던졌다.“자, 그럼 첫 번째 질문할게요. 오사형은 왜 요즘 평서백부 주변을 맴도는 거예요? 혹시 사숙이나 사부께서 따로 뭔가 분부하신 말씀이라도 있는 건가요? 혹시 왕표에 관해 뭔가를 알아낸 거 아니에요?”곁에 있던 송석석의 표정은 더욱 진지해졌다.“두 번째 질문은 제가 할게요. 오늘 따라 만자를 쳐다보는 오사형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심지어 둘이 티격태격 싸우지도 않잖아요. 분명 분위기가 평소와 다른데 대사형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계세요?”심청화는 평소에도 입이 아주 무거웠기에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왕이장의 출신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하게 알고 있지만 굳이 가깝게 지내는 후배들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사부는 오래 전에 이미 심청화에게 왕이장의 출생에 대해 얘기해주며 왕이장을 잘 타이르라고 당부도 했었다. 심청화는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릴 필요가 없다고 왕이장을 설득했지만 왕이장은 만종문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전혀 상관없다고 반박했다.“왕이장은 평서백부 왕표와 왕준의 친동생이야. 왕청여가 왕이장의 친누나이고 최씨 부인은 왕이장의 형수야. 왕이장이 며칠 동안 평서백부 주변을 맴돌았던 건 평서백부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싶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아. 노부인께서 앓아 누우셔서 단설환이 필요
심청화는 그 뒤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도 두 사람에게 얘기해주었다.점쟁이는 절에서 쫓겨난 왕교여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나중에 늑대들에게 잡아 먹히면 뼈도 남지 못할 것이기에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하지만 상황은 점쟁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때 당시 임양운이 우연히 그 근처를 지나가다가 저녁쯤 되었을 때 갓난애가 우는 듯한 미세한 울음소리를 듣게 되었고 요괴가 아닐까 관심이 생긴 임양운은 미약한 울음소리를 쫓아갔다. 그런데 바닥에 쓰러져 있던 왕교여가 발견되자 너무 실망스러웠다. 요괴도 아니고 갓난아이도 아닌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대여섯 살 정도의 남자아이라니. 심지어 이곳에 방치된 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발가락 하나가 쥐들에게 뜯겨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이 근처에 독사도 자주 나타나지만 움직일 힘조차 없었던 왕교여가 꿈쩍도 하지 않은 덕분에 독사는 왕교여를 공격하지 않았다.불행 중 다행인 것은 임양운이 곧 죽어가는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며칠 동안 쌀죽을 먹이고 약도 달여서 먹인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가 기적처럼 살아났다. 진성에 있을 때 수많은 명의의 손을 거쳐도 전혀 호전이 없던 아이는 두 그릇의 탕약과 쌀죽으로 벌떡 일어난 것이다.실로 신기한 일이었지만 임양운은 여전히 아이가 크게 달갑지 않았다. 온몸에 뼈밖에 남지 않은 아이는 여섯 살이나 됐는데도 서너 살처럼 보였기에 이 아이를 키우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았다.임양운은 왕교여를 내쫓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야산에서 아이를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 독사에게 둘러싸여서도 전혀 겁도 먹지 않았고 소리 한 번 지르지 않았던 이 아이가 실로 강심장인 것 같았다.두려운 게 없는 사람이 가장 강한 자라고 생각했기에 임양운은 일단 아이를 키우기로 했다.한편, 여섯 살 왕교여는 모든 걸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사부를 믿은 왕교여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전부 얘기했고 임양운은 사람을 시켜 확실하게 조사하고 나서야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다.절이 불에 타버린
심청화는 사여묵이 얘기한 부분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왕전이 승작을 하지 않았다고? 그럼 사부께서 조사하라고 보낸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거야?”심청화의 말에 사여묵이 대답했다.“염 선생한테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겠죠.”조금 뒤, 서재로 들어선 염구진은 예전에 평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자 확실히 뭔가 알고 있는 듯했다.명문 가문들의 집안일은 위로 삼대까지 알고 있지만 대충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뿐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다.“왕전이 승작한 적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때 당시 평서백부 어르신께서 병을 앓고 계셔서 세자를 정하지 않으셨거든요. 왕전이 전공을 세우고 돌아온 뒤, 어르신은 왕전을 세자로 임명했고 그 뒤로부터 어르신의 몸 상태가 점점 호전되다가 기적처럼 완치가 되셨어요. 그래서 승작에 관한 일도 계속 뒤로 미루어진 거죠.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르신께서 장손 왕표를 세손으로 책봉했어요.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외부인은 아무도 모르죠. 물론 저도 모릅니다. 아마 평서백부 몇몇 어르신들과 현재의 평서백부 노부인만 정확한 내막을 알고 계실 거예요.”염구진의 말에 이 일은 더욱 미궁속으로 빠지게 되었다.만약 그때 당시 왕전이 승작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세자로 임명된 것으로 아들인 왕이장이 자신의 운명의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한 것인지 싶었다. 왕이장이 태어난 그 해에 왕전은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다섯 살이 된 왕이장이 점쟁이한테 보내질 때까지도 왕전은 승작을 하지 못했다.이렇게 듣고 보면 왕이장의 출생은 아버지가 아닌 할아버지의 운명을 바꾼 것 같기도 하다.어찌 됐든 이 속에는 문제가 많다. 그리고 어쩌면 평서백부의 몇몇 어르신들도 정확한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모든 사실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평서백부의 노부인밖에 없을지도 모른다.“일단 조사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오사형이 직접 결정해야죠. 저희는 그냥 알고 있기만 하다가 오사형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지지하
안풍친왕이 말했다."이번 여정은 서경과 상국을 위한 것이지만, 북당을 위한 것이기도 하니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가 간의 교류는 언제나 이익을 우선으로 하니까요. 개인적인 인연이 있을 때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죠."송석석은 깨달음을 얻은 동시에 궁금한 점이 있어 물었다."혹시 제 사부 임양운을 아십니까?"안풍친왕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알지요. 그는 북당에 와서 제 채성루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습니다. 제 호위 지휘사인 흑영위가 당신의 사부와 매우 친한 사이입니다. 그들은 자주 함께 술을 마셨죠.""그렇군요." 송석석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중 어떤 사람이 흑영위 선배인지는 모르겠지만, 만날 수 없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었다.안풍친왕은 이내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챘는지 웃으며 말했다.“우리 북당은 3년 혹은 5년 후에 상국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그때 흑영위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송석석이 막 감사의 말을 하려는데, 시만자가 말했다."왜 3년 혹은 5년 후인가요? 좀 더 일찍 갈 수 없나요? 왕야와 왕비께서 가시는 걸 기대하고 있습니다."안풍친왕은 미소를 지으며 깊은 뜻이 담긴 말을 했다."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닙니다."그들이 말하지 않으니 더 이상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안풍왕비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며, 그저 눈앞의 간식들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아무것도 특별할 것 없는 설탕절임과 육포였지만, 그녀는 그것을 매우 맛있게 먹었다.송석석은 탁자 아래에서 그들이 손을 서로 맞잡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의 사랑이 누구보다 깊다는 것을 느꼈다.두 나라 간의 교류에 대해 더 얘기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들은 잠시 가볍게 잡담만 나눈 뒤 그들을 보내주었다. 떠나기 전에 안풍친왕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송대감, 시 소저, 4년 후에 상국에서 뵙겠습니다."송석석은 급히 손을 모으며 말했다."네. 왕야와 왕비께서는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그들이 떠난 후, 별관 문이 닫혔다.송석석과 시만자
이틀 동안 돌아본 후, 수란키가 송석석에게 말했다. "귀국에 단신의라는 신의가 계십니다. 그분이 만든 단설환의 한 가지 재료인 설연화가 귀국에서 생산량이 매우 적다고 알고있습니다. 남강에 있기는 하지만, 설산 정상에 자생하고 있어 채집하기 매우 어려우며, 또한 드뭅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는 설연화가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닙니다. 고산지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요. 그가 사용하는 설연화는 모두 서경 약장수에게 몰래 사서 쓰는 것으로,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그 가격으로 단설환을 팔면, 한 알을 팔아서 한 알을 잃는 셈입니다."송석석은 단설환이 부족한 이유가 일부 약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백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약재가 부족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서경과 상국은 그동안 무역을 하지 않았고, 특히 약재는 더 조심스럽게 다뤄졌기 때문에 그가 서경 사람에게 약재를 산 것을 비밀로 한 이유가 이해가 됐다.수란키와 원신제는 한 마음으로 이렇게 세세하게 조사를 진행했으며, 두 나라 간에 상호 교역을 이루려는 계획이 이미 있었을 것이다. 안풍친왕을 불러들인 것도 이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단설환은 생명 구제용 약이라, 만약 약재만 부족하지 않다면 평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실로 민생에 큰 이익이 된다. 송석석은 그들이 지나쳤던 약재 시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왜 약재 시장에서는 설연화를 본 적이 없죠?" 수란키가 웃으며 답했다.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 서경에서 설연화가 많이 자생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희귀한 재료입니다.고산지대를 올라가야만 채집할 수 있기에 위험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약효가 뛰어나지 않습니까. 심장을 강하게 하고 통증을 멈추는 효과가 있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법이 없습니다. 송대감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제가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상국으로 가져가서 단신의께 검증받으시면 됩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시 사람을 시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
그가 앉은 자리는 북당이 이번 협상에서 취한 입장을 대표했다.그는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송석석은 다시 한 번 국가가 강성한 것이 정말 좋다며 감탄했다. 협상의 처음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고, 양쪽의 역관들이 그것을 전달하며, 모두 역사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양보를 한다면 계속해서 양보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번째 협상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그쳤다.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협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반에는 전날처럼 양쪽에서 강조하는 말들이 오갔다.그러다가 잠시 후, 안풍친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국경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본왕은 두 나라가 서로 친선을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두 나라가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안풍친왕은 한 장의 목록을 꺼냈다. 그 목록에는 양국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곡물, 가축, 비단, 직물, 수공예품, 찻잎, 모피, 도자기, 종이, 벼루, 각자의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약초, 향료, 청염, 철광, 옥석 광물 등이 있었다. 양쪽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 어떤 일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잠시 미룰 수도 있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국고를 이미 소진시켰기에 양쪽 모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북당의 발전 경험에 따르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은 뒤처진 생각이며,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상업세 또한 매우 높았다. 안풍친왕의 이 목록 덕분에 두 나라는 국경
하지만 송석석은 서경의 종친과 관리들이 북당이 협상에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역력했다.놀란 마음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기쁨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북당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서경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송석석은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안심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원신제가 미리 그들에게 이를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협상에 참여하는 관리들에게는 알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이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지만, 궁정의 문무 백관들 중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복하는 북당 안풍친왕을 초대한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어제 원신제가 그녀와 시만자를 궁으로 부른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여성의 과거 시험을 예로 든 것은, 그녀의 많은 결정들이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여기까지 분석을 마친 송석석은 점점 더 낙관적이게 되었다.궁중 연회가 끝난 후, 북당 사람들은 대접을 받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 한 끼를 제외하고는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으며, 단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상국의 사절단도 일어나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모두가 돌아가서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수란키가 제공한 일정을 따르면, 이틀 후부터 협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황궁 별관에 돌아가자, 이덕회는 모두를 모아 앉히고 논의했다.사실상 또 다른 진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양보를 해야 한다면, 모두가 지도 위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황제가 이미 양보의 한계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를 하게 되면 돌아가기도 어렵고,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도만 바라보며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