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최 씨가 현이를 데리고 왔을 때 몽동이에게 연봉으로 삼백 냥을 주겠다고 했다. 몽동이가 재물을 좋아하지만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급히 거절했다. “안 됩니다. 일 년에 육십 냥도 많은데 삼백 냥이라니요.” 최 씨가 아무리 말해도 몽동이는 삼백 냥을 받지 않고 육십 냥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최 씨가 애원하듯 송석석을 쳐다보며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송석석이 말했다. “그럼 몽 사부의 말대로 육십 냥으로 합시다. 하지만 육십 냥이든 삼백 냥이든 가르치는 건 똑같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니 그에게 너무 큰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지 맙시다.” 왕비가 그렇게 말하니 최 씨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공부를 하든 무술을 배우든, 최 씨는 자신의 감수할 수 있는 범위 내라면 상관없었다. 보통 백성들은 일 년에도 다섯 냥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몽동이는 한 달에 다섯 냥도 큰돈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단지 무공을 지적해 줄 뿐 전력을 다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니 더욱 받을 수 없었다. 현이 같은 경우엔 이미 열 살이 넘었으니 좀 늦은 편이라 큰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현이는 확실히 최 씨 말대로 부지런하고 얌전하며 교양도 있어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비록 몽동이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몽 사부라고 부르며 존경하며 후작자제들의 오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이는 첫날 몽동이를 따라 기초 체력 단련을 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잡술이라 기본기도 없었지만 무학에 대해서 그는 고생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몽동이가 아무리 엄격하게 가르쳐도 그는 이를 악물고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송석석은 찻잔을 들고 옆에서 지켜봤는데 소년은 체격이 작아 선비 같았는데 이목구비는 어머니를 닮아 부드러웠지만 미간에는 영이가 서려 있었다. 송석석은 최 씨가 왜 아들에게 이런 고생을 시키는지 몰랐지만 왕표가 남강에서 고청우와의 일은 그녀도 들었다. 왜냐하면 남강의 방 장군은 아버지의 휘하이기도 하고 사여묵
사여묵도 사실 다른 부부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그냥 소문을 듣고 한 말이었다. 현이는 두 시진 동안 연습하고 거의 해시가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갔다. 연속 며칠 동안 연습해도 그는 피곤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지금 배우는 것이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때론 그는 책을 외우면서 무릎을 구부리고 서있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 송석석은 가끔 그를 보면 왕표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최 씨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면 또 합리적인 것 같았다. 이때 염 선생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왕야님, 회신이 왔는데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여묵은 의아해하지 않고 물었다. “누군가가 몰래 호송한다는 것인가?” “네, 고수들이 호송해서 삼 회 싸웠지만 우리에게도 손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사여묵이 물었다. “사사인가?” 송석석은 옆에서 듣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다가 그들이 사람을 보내 무상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때 사여묵이 말했다. “그럼 연왕의 사람은 아닌 것 같군. 내 추측이 옳다면 무상의 뒤에 다른 사람이 있어. 그리고 연왕은 그 자의 바둑알일 뿐이야.” “누구일까요? 회왕? 그럴 리가 없는데…” 염 선생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가 회왕을 얕잡아보는 것이 아니라 회왕은 독한 사람이지만 요 몇 년 동안 인맥과 능력을 갖추지 못해 사온과 연왕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부병도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리 독한 들 배후에서 수단을 부릴 뿐 연왕이 연주에서 몇 년 동안 경영한 세력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우리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그럼 지금은 아직 쫓고 있는가?” 사여묵이 묻자 염 선생이 대답했다. “네, 아직도 쫓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답니다.” 사여묵이 고개를 살짝 들고 말했다. “일단 쫓아가보라고 하게. 누구든지 얼굴을 내미는 때가 있겠지. 지금 연왕이 진성에서의 처지가 예전과 달라서 그 사람이 튀어나올 가능성이 높아.” 원래 연왕은 진성에서 어머
시만자는 요즘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기에 매일 날이 밝기도 전에 황실에서 나갔고, 공방에서 한 시진 정도 머물기도 했다. 공방에는 진문숙이라는 여자 한 명이 더 생겼는데, 이혼을 당해 쫓겨난 상황이였다. 그녀의 친정 오라버니는 그녀를 데려가고 싶어 했지만 형수가 허락하지 않아 오라버니가 곤란해하는 것이 싫어서 아예 공방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들은 함께 자수를 만들며 아무도 과거를 언급하지 않고 미래만 이야기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시만자는 이런 분위기에 큰 감동을 먹어서 바쁜 와중에도 가끔 가서 란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석소사저와 라사저와의 관계도 부쩍 친해진 것 같았다. 최 씨도 가끔씩 오군 했는데 이날 마침 시만자를 만나 그녀와 잡담을 나누었다. 시만자는 현이가 몽동이에게 무술을 배우고 있다는 것을 듣고 말했다. “현이가 부지런하긴 하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부족해서 오히려 공부할 감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최 씨는 개의치 않고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습니다. 놀라운 무공을 배우라는 것이 아니라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 배우라고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길에서 시달려 죽지 말라고 말입니다.” 최 씨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시만자는 왠지 마음이 씁쓸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녀의 걱정을 알 수 있었다. 백작가의 세자는 어디에 가든 시종들이 때를 지어 보호를 할 것이고, 공명을 따서 다른 곳의 관직으로 떠난다고 해도 고생을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 괴롭힘을 받을 일이 생긴다고 하면 아마 유배일 것이었다. ‘평서백부가 비록 가장 절정기는 아니지만 아직도 잘 나가고 있는데 최 씨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시만자가 물어보려던 참에 최 씨 곁에 있던 시녀인 금숙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시만자가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급히 보고를 했다. “부인님, 둘째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 부인님을 모셔오라고 합니다. 셋째 아가씨께서 자결을 하셨답니다.” 최 씨가 놀라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왜? 사람은 구해냈느냐?”
왕청여의 일은 송석석도 알고 있었다. 송석석이 마침 그곳을 지나던 참이었기 때문에 왕청여의 일은 송석석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몰래 순방영의 순시를 주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최근 몇 가지 항목을 심사하고 있었는데 순시도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나쁜 기풍을 바로잡긴 했지만 많은 상인들이 순시를 보기만 하면 예전처럼 물건을 드려 환심을 사려고 했다. 원래는 사람을 파견해 지켜보도록 했는데 몰수는 하지만 게을러서 순찰을 돈 지 얼마 되지 않아 찻집을 찾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일쑤였다. 그래서 송석석은 직접 잡아 본때를 보여줘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는데 마침 그 일을 목격한 것이었다. 송석석은 약왕당까지 둘러보고 들어가서 물 한 그릇을 얻어 마시고 뒷마당의 푸른 커튼 뒤에서 모든 일의 경과를 목격했다. 처음에 그녀는 왕청여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와 마주치기 싫어서 뒷마당에 앉아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약을 사고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사려는 약이 단설환일 줄은 몰랐다. 약왕당의 직원이 그녀에게 없다고 했는데 그녀는 믿지 않았다. 마침 노세진이 약재를 들여와 그녀와 면전에서 마주쳤다. 왕청여는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약왕당에 숨겨둔 단설환 몇 개가 있는지 알고 있다며 자기의 체면을 봐서 한 알만 팔아줄 순 없냐고 물었다. 약왕당엔 워낙 사람이 많았는데 그녀가 대중 앞에서 묻자 노세진은 당연히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말에 왕청여는 억울해서 울며불며 예전엔 친척이지 않았냐며 통곡했다. 마침 노 씨 부인이 오늘 부군이 약재를 운반해 온다는 것을 알고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다가 그 장면을 마주친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그 자리에서 싸웠고, 노 씨 부인의 입을 통해 송석석은 더 구체적인 사항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육씨 부인은 원래 그 일을 알지 못했지만 부군을 사랑했다. 그녀는 부군이 방 씨 가문에서 머물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왠지 방시원이 돌아
한편, 평서백부는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되었다.옥이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 탓에 사람들은 최씨가 돌아와서 자초지종을 얘기해주고 나서야 이 일이 얼마나 심각한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오 부인이 왕청여의 뺨을 몇 번이나 강하게 내리쳤고 이 광경을 약왕당에 있던 환자들만 본 게 아니라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도 다들 약왕당으로 들어가 구경하기 바빴다.왕청여를 모시던 시녀의 말에 의하면 난리 난 와중에 누군가가 약왕당 안에 왕비가 계신다고, 이건 큰 실례를 범하는 거라고 외쳤다고 한다.최씨는 시녀의 말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약왕당 안에 있던 왕비가 송석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석석은 평소에도 약왕당에 자주 찾아갔으니까.하지만 다이 약왕당에 있던 왕비가 누구든 이 일에 관한 소문이 퍼지게 되면 평서백부의 체면은 말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최씨는 외원에 앉아 한참동안 차를 마시다가 그제야 일어서서 일단 노부인을 찾아갔다.노부인은 최씨를 보자마자 그녀의 손을 덥석 잡더니 눈물을 보이면서 말했다.“아가야,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아예 소문이 안 나게 막아버리거나 오 부인을 찾아가서 원하는 건 뭐든 줄 테니까 나서서 해명 좀 해달라고 할까? 오 부인이 이 모든 게 오해라고 말해야 이 일이 잠잠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최씨는 노부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노부인은 화가 많이 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해보려고 많은 고민을 한 듯했고 그 중에서 유일하게 통할 것 같은 방법을 최씨에게 얘기한 것이다.최씨는 남희를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녀는 옆에서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멍하니 앉아있었다. 남희는 남편을 많이 사랑하지만 그녀에겐 자식도 있었다. 가족들 중 한 명 때문에 자신의 가족이 흥하거나 망할 수도 있어 걱정이었다. 더군다나 이건 간통에 관한 예민한 문제는 언급하기도 조심스러운 부분이기에 남희도 어쩔 수가 없었으며 그저 큰형님이 잘 처리해주기를 지켜볼 뿐이었다.이때, 최씨가 입을 열었다.“일단은 그
최씨는 노부인의 이런 태도를 바란 건 맞지만, 실제로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쓰럽고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노부인이 평소에 사리에 밝고 명석한 사람이긴 하지만 친자식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불공평해질 수밖에 없다.홧김에 모진 말을 내뱉긴 했지만 딸 생각에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한편, 최씨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가 제일 고통스러웠다. 최씨에게 닥친 일도 매우 머리가 아프기에 혹시 노부인이 조금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있었다.하지만 지금, 노부인이 왕청여를 대하는 태도로 보면 왕표가 평처를 들인다고 해도 노부인은 결국 최씨에게 참으라고 할 것이 분명하다.노부인은 사리가 밝은 편이지만 유독 자신의 아들과 딸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포용심이 깊었다.왕청여가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 노부인은 말로만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할 뿐, 결국은 딸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셋째 아가씨는 이렇게 끔찍하게 아껴주는 어머니가 있어서 참 좋겠네요.”최씨의 말에 노부인은 곧바로 자상한 표정을 지으며 최씨의 손을 덥석 잡았다.“난 너희들을 다 똑같이 아끼고 있어. 혹시라도 나중에 왕표가 너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면 이 어미가 절대 왕표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고맙습니다… 어머님.”최씨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가볍게 웃으면서 대꾸했다.‘똑같이 아낀다고? 어머님이 정말 우리를 똑같이 아낀다면 그때 당시 왕표가 남강에 가기 전에 집안에 첩을 들였을 때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거야.’그때 당시 노부인은 부부의 일에 끼어들 수 없다고 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이때,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한 노부인은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옆에 놓인 비단 이불을 손에 꽉 쥐고는 최씨와 남희 두 사람을 쓱 훑어보며 말했다.“너희 두 사람에게 확실하게 얘기해둘 게 있어. 만약 이 일이 잘 해결되지 못하고 전씨 가문에서 끝까지 청여를 쫓아내겠다고 하면 난 청여를 집안으로 데려올 거야. 청여가 평서백부에서
전북망은 전소환에게 방으로 들어가라고 호통을 치며 손마마를 불러 모든 하인을 물러나게 했다.그렇게 거실에는 전북망과 전북망의 부친, 그리고 형만 남았다.며칠동안 술을 진탕 마신 전북망은 얼굴이 창백해져 초췌해 보였으며 메마른 입술은 여기저기 다 터져서 피까지 고여 있었다. 온몸에서는 술냄새가 강하게 풍기고 있는 그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퇴폐했다.최씨는 그런 전북망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머릿속에 전북망이 왕청여와 결혼하겠다고 찾아왔던 예전의 그날이 떠올랐다. 그때 당시의 전북망은 외모도 수려하고 기품도 꽤 넘쳤는데 현재는 이런 몰골이 되어버렸다.전북망이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앉아있던 부친 전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사모님, 지금 밖에 소문이 쫙 퍼졌습니다.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부터 큰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어요. 정말 난리도 아닙니다. 저희 장군부가 손꼽힐 정도로 명문 가문은 아니지만 품행이 올바르지 못한 며느리를 계속 집안에 두고 있을 그런 허접한 가문도 아닙니다.”찾아오기 전부터 전씨 가문의 태도를 대충 예상하고 있었던 최씨는 전기의 말에 그리 놀라지도 않았으며, 전북망에게 아내를 내쫓지 말라고 간절하게 부탁하지도 않았다.최씨는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저도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 다른 부탁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더라도 내년에 이혼하면 안 되는지 여쭤보고 싶네요.”최씨의 말에 전기가 위엄 넘치는 표정과 말투로 대답했다.“사모님,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내년까지 이 며느리를 집안에 두고 있으면 저희 장군부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겁니다. 더군다나 왕청여도 계속 내 아들과 이혼하고 싶어 했잖아요. 이제 왕청여 뜻대로 이혼을 해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죠? 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서부터 거의 매일 싸웠어요. 조용한 날이 거의 없었죠. 겨우 임신을 했는데 결국 아이도 지키지 못한 걸 보면 두 사람은 인연이 아닌 것 같네요. 인연도 아닌 두 사람을 굳이 강제
일이 터진 뒤로 최씨가 왕청여를 보러 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침대에 누워있는 왕청여는 이불로 얼굴을 가린 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하인이 의자를 가져와 침대 곁에 놓으며 최씨에게 앉으라고 했고, 최씨는 의자에 앉아 침대 위에서 몸을 조금씩 떨고 있는 왕청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 넌 어떻게 할 생각이야? 도피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어차피 반드시 해결해야 할 일이잖아. 어머님은 나한테 노씨 부인을 찾아가서 빌어보라고 하셨어. 노씨 부인이 해명만 잘해주면 조용하게 해결될 거라고 하셨어. 노씨 부인이 우리 뜻대로 할지는 모르는 일이지. 그리고 내가 오늘 장군부에 찾아갔어. 전북망 씨는 오래 전부터 너에 관한 일들을 다 알고 있었다고 했어. 다만 대놓고 너한테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야. 네가 전북망 씨와 다시 잘 살 생각이 있다면 전북망 씨는 이 일을 그냥 조용하게 흘려 보낼 거라고 했어. 하지만 한 가지, 전북망 씨는 군대로 복귀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조용하게 듣고 있던 왕청여가 이불을 확 제치더니 퉁퉁 부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은 몰라요. 그 사람이 알 리가 없어요... 근데 저랑 이혼하지 않는 대신 조건을 내걸지 않았나요?”“말했잖아. 군대로 복귀할 거라고.”“계급도 안 되는 군인이나 하겠다고요?!”왕청여가 금세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이어갔다.“그럴 바에는 차라리 친정으로 돌아갈 거예요. 엄마가 나 살 곳을 확실하게 마련해준다고 했어요. 어떤 일이 생겨도 난 평서백부 셋째 딸이에요. 내가 전씨 가문에 가지고 간 예물만으로도 나 혼자서 평생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데 왜 그런 지옥 같은 생활을 계속해야 돼요? 내가 왜 그런 가난에 찌든 삶을 살아야 하냐고요?”침대에 축 처져 있는 왕청여의 목에는 조인 흔적이 여전히 벌겋게 남아 있었다. 어느새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던 왕청여가 서럽게 소리를 질렀다.“다들 날 무시하고 있다는 거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