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은 명예를 잃은 것도 모자라 치료도 받으러 가야 했다.그렇게 그는 진성을 떠날 때는 위풍당당했지만 돌아갈 때는 위소의 병마에 호송되어 초라하게 복귀하게 되었다.무상은 연왕이 여자를 마음에 들어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둘러댔지만 방시원은 조사가 끝나기 전까지 진실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며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사사들은 모두 꼼짝달싹할 수 없이 체포되었다. 이전에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붙잡힌 사사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태도가 매우 강경하여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었다.하지만 이번에 그들은 사사로서의 신분을 부인했다. 만약 그들이 사사임을 인정한다면 위소 근처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방시원이 군영 기습을 시도한 중대한 죄로 그들을 처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연황실의 부병이라고 주장하며, 연왕을 호위하여 진성으로 오고 연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했다. 부병은 신분이 특별하여 진성에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서산구의 별장에서 머물렀다고 해명했다.이 말은 겉으로 보기엔 일리가 있었지만, 그들의 검은 옷차림은 사여묵과 방시원에게 약점을 잡힐 구실을 제공할 수 있었다.그들을 압송하여 진성으로 돌아올 때, 송석석과 시만자는 같은 말에 올라탔다.시만자는 아까 전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두려움을 느껴 송석석에게 감사함을 전했다."석석아, 네가 제때 날 구하러 와줘서 정말 다행이야.""고맙게 여겨야 할 사람은 우리 오사형이지. 오사형이 널 먼저 구했거든."시만자는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네가 뛰어들어와 날 구해준 게 아니었어?""널 먼저 구해준 건 오사형이였어."그러자 시만자는 놀라 목을 길게 빼고 뒤를 살폈는데, 대열 맨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한 마리 당나귀가 보였다. 거리가 좀 멀어서 당나귀가 마치 개처럼 보일정도로 거리가 좀 멀었지만, 그 당나귀 위에는 원숭이 한 마리가 올라타 있는 것 같았다.사여묵이 없는 것 같자 시만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대화에 집중했다. 그리고 순간 왕노오가 자신을 안고 뛰어와
사여묵은 본질적으론 여전히 무장이었기에 무기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와 관련된 일에는 더욱 많은 열정을 쏟아냈다.하지만 심청화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일단 돌아가게. 석석과 좀 틀어졌지않나. 그녀는 아마 아직도 모르는 것 같긴 하다만."사여묵은 순간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틀어지지 않았습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그럼 됐고. 어서 가지.”심청화는 채찍을 휘두르며 앞서갔다.사여묵은 말을 이끌고 몇 걸음 걸은 뒤에야 말에 올라타 그를 따라갔다. 그는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왜 일이 생기면 송석석은 항상 자신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 않는 것인지, 왜 항상 마지막에야 모든 것을 알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알리기는커녕 혼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쫓아갔다.사람을 보내 몽동이를 부르라고는 했지만, 대리사에 소식을 전하라고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위가 성문을 봉쇄해야 한다는 이유로 그를 찾았기 때문에 그가 상황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만약 성문 봉쇄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시만자가 구출된 뒤에야 가볍게 이 일을 전하기만 하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끝냈을지도 모른다.사실 그는 이전부터 송석석이 자신에게 온전히 마음을 주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들 사이는 겉으로는 다정해 보였지만,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항상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그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믿음? 석석이 자신을 믿는 것은 확실했다.호감? 최소한 석석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녀가 입에 올리지는 않았더라도 말이다.호흡? 그는 자신들이 서로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공무든 사적인 일이든 둘 사이의 호흡은 매우 잘 맞았다. 어쩌면 염선생과의 호흡만큼이나 완벽했을지도 모른다."지금의 석석이 예전에 알던 석석과 같지 않다고 느낀 건가?"심청화가 바람을 맞으며 묻자 사여묵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동안 많은 일을 겪었으니 변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녀가 여전히 그녀라면, 저에게는 변한
시만자는 여러 번 목욕을 하며 온몸을 깨끗이 씻어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송석석에게 애교를 부리며 한참 동안 머물렀다.그 사이 보주가 다른 시녀들과 함께 야식을 들고 들어왔다. 시만자는 맛있는 음식이 보이자마자 송석석을 무시하고 곧바로 식탁으로 달려갔다.“보주, 오사형은 잘 모셨느냐?” 그러자 송석석이 보주에게 물었다.“노 집사께서 직접 모셨습니다. 정위원에 머물고 계신데 이 시간쯤 야식을 드셨을 겁니다. 방금 노 집사께서 말씀하시길, 오사형이 만둣국 두 그릇을 드셨다고 하더군요.”송석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분이 그걸 좋아하시잖아. 일찍 주무시라고 전해라. 내일 내가 직접 만자와 함께 가서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알겠습니다.” 보주는 공손히 인사하고 물러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서주와 명주가 옆에서 시중을 들며 시만자에게 국물이 빌때마다 계속 따라주었다.“양 마마께서 말씀하시길, 이 국을 드시면 빠르게 숙면에 취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밤 잘 못 주무실까 봐 준비했습니다.”시만자는 잘 먹다가 서주의 말을 듣고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송석석은 그 모습을 보고 막 위로하려다 시만자가 손으로 눈물을 닦고 다시 먹기 시작하는 것 보고는 말을 멈췄다.마치 폭풍처럼 음식을 쓸어 담고 나서 젓가락을 내려놓은 시만자는 석석을 올려다보며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황실은 마치 우리 집 같아. 모두가 날 이렇게 잘 챙겨주네. 석석, 나 여기 평생 살아도 될까?"송석석은 웃으며 말했다.“평생 살아도 좋지.”시만자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난 이번 생에 이렇게 큰 모욕은 처음이야. 사금이 모욕을 당한 후 왜 죽으려 했는지 알겠어. 석석, 겪어보지 않으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운지 몰라.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끔찍해.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어.”송석석이 위로하며 말했다.“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 시만자는 진지하게 송석석을 바라
송석석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어딘가 모를 아쉬움이 묻어났다.모든 무술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이런 꿈을 꾸었을 것이다. 바로 검을 들고 천하를 누비며 불의를 보면 칼을 뽑아 정의를 실현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을 보고 여협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꿈 말이다.어릴 적에는, 특히 막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고 조금씩 성과가 보일 때에 이런 꿈을 자주 꾸곤 했다. 자부심이 넘치던 시절, 꿈속에서 자신은 무적의 고수가 되어 수많은 악당들을 처단했다. 악당들이 자신의 칼날 아래에서 용서를 빌어도, 한 마디의 말만 남기며 끝내 악인을 처단하곤 했다."이 세상의 공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다."하지만 어른이 되고 나서야 이것이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협심을 발휘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이 사실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협객은 법을 집행할 권한이 없고 관청에 소속된 사람도 아니니 말이다.게다가 사람을 죽이려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했다. 설령 범인이 눈앞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목격했더라도 그 증거를 관청에 제출하고, 관청의 조사와 대리사의 재심을 거쳐야만 비로소 처형할 수 있었다.이 모든 번거로운 과정은 억울한 누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권력과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 판결을 뒤집을 여지를 주기도 했다.그때 평 사저에게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어떤 관청은 범죄가 입증되더라도 범인의 집에서 충분한 은화를 제공하면 증거의 일부를 삭제하거나 증언을 뒤집기도 한다고 했다. 죄명을 감형할지 무죄로 만들지는 결국 보낸 뇌물의 액수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그 당시 그녀는 정말 큰 환멸을 느꼈다.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는지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평 사저와 한참 동안 논쟁을 벌이며 법이라는 건 악을 저지른 자를 처벌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어떻게 은화로 판결을 바꿀 수 있냐고 반박했다. 관리는 조정에서 봉급을 받으며 그 봉급은 백성이 낸 세금에서 나온다. 그렇다면 그들은 백성의 부모와 같
사여묵은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천만다행입니다. 그 협객이 어느 정도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다른 불편함은 목숨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 사건은 제가 직접 황제께 보고하겠습니다. 만약 그 여인이 나서서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 일은 이대로 지나간 걸로 처리될 겁니다. 그리고 황숙을 다치게 한 그 협객을 굳이 추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황숙께서 반드시 추적을 원하신다면 제가 경조부와 경위에 협조를 요청하겠습니다. 하지만 강호의 협객들은 잡아내기가 쉽지 않지요. 결국 황숙께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이 일을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그러자 연왕은 온몸을 떨며 소리쳤다. 이는 고통 때문이기도 했고, 분노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음험하고 독살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꺼져!""그럼 저는 황숙의 휴식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사여묵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황숙께서는 부디 상처를 잘 돌보십시오. 이곳 진성은 풍요로운 곳이니 한두 달 더 머무르셔도 괜찮을 겁니다. 다만 낮에 이미 짐들을 공방으로 보냈으니, 지금 텅 빈 이 저택에선 어떻게 생활하시겠습니까? 짐들을 다시 가져오길 원하십니까?"눈을 감은 연왕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온몸의 힘을 모두 고통을 참는 데 쏟은 그는 꺼지라는 한 마디를 내뱉은 뒤 더 이상 사여묵과 한 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사여묵은 이들의 문제에 너무나도 신경을 쓴 듯 보였다. 연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그는 무상을 불러 별청으로 나갔다. 측비 김씨는 이를 보고 급히 따라가 문 앞에 서서 엿들었다.사여묵은 상석에 앉아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오늘 밤의 일은 누구의 잘잘못도 따지지 않겠소. 그저 죄에는 마땅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뿐이오. 선생께서 숲속에서 말씀하시길, 황숙께서 그 여인 때문에 군영 근처에 주둔했던 것이지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였소. 이 점은
궁문이 열리자 사여묵과 방시원은 함께 궁으로 들어가 황제폐하를 만났다.숙청제는 아침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는데, 그들을 보자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오 대반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전에서 기다리도록 했다.두 사람이 왔을 땐 이미 말을 맞추어 모든 일을 말할 수 있지만 유독 왕정과 장기문이 성 밖에 나타난 일만을 숨겼다.왕정은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적어서 괜찮지만 장기문은 이제 승진해서 황제의 현철위 소속인데 이렇게 아랑곳하지 않고 함부로 나가 사람을 때렸으니 황제가 책망하진 않아도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 나중에 그의 앞길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그랬던 것이었다.두 사람의 보고를 듣고 있던 숙청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릇에 담긴 좁쌀죽을 계속 마시더니 떡을 한 조각 먹고서야 천천히 내려놓았다.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머릿속으로 이 일을 한 번 되새기며 고개도 들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많이 다쳤느냐?”그러자 사여묵이 대답했다.“다른 건 괜찮은데 앞으로 아이를 가지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떡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떡을 다 먹은 후에야 말했다.“그럼 그가 백성을 납치한 것으로 치자. 시 씨 가문의 명성을 더럽힐 수는 없지 않느냐? 그 여자도 구해졌고 그도 협객에게 맞아서 벌을 받은 셈이니 조사하는 척하다가 사건을 종결하거라.”그는 말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고생했으니 너희들은 계속 먹거라.” 사여묵과 방시원도 밤새 고생을 한 탓에 배가 고파,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숙청제의 아침 식사는 워낙 간단해서 그는 사람을 시켜 더 만들어주라고 분부했다. 숙청제는 오 대반에게 분부하여 연왕에게 신칙 명령을 내리게 했다. 그 명령을 내리면 이틀도 가지 않아 온 진성에 연왕이 백성을 모욕하려다가 지나가던 협객에게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 퍼질 것이었다. 게다가 연왕은 성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숙청제를 가장 기쁘게 한 건 일부 사사를 파낸 것이었는데 사사들이 진성에 남아있는
사여묵은 방시원을 데리고 북명황실로 돌아갔다. 방시원은 시만자가 예전처럼 활발한 모습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다. 어젯밤 몽동이가 위영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놀라서 즉시 휘하를 소집해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원래는 책망할 생각이었지만, 눈 밑이 빨개진 시만자를 보자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지금의 연왕이 많이 다쳤는데 장기문이 한 바탕 때려서 더 이상 남자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려주기만 했다. 시만자는 어젯밤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화가 나면서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제자들이 모두 그녀를 구하러 성 밖으로 나갔고 장기문은 연왕을 때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녀의 제자들 중엔 장기문의 앞길이 가장 창창하고 또 가장 이성적인 사람인데 그 순간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녀를 위해 분풀이를 했다. 방시원은 차마 시만자를 책망할 수 없었지만 몇 마디 당부했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당하든 항상 침착해야 해. 특히 너에게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쉽게 믿어서는 안 돼.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이 오라버니를 찾아와도 되고 왕야님과 왕비님, 혹은 염 선생에게 물어도 된다.” “알았어, 오라버니.” 이번에 시만자는 제대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방시원은 그녀를 보며 자랑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비록 이번에 사고가 날 뻔했지만 다행히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동안 네가 공방을 위해 뛰어다녀서 공방이 설립할 수 있었으니 너의 공이 큰 것 같아. 이 오라버니가 참으로 자랑스럽구나.”방시원은 그녀가 의리가 있고 충성심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대부분이 위대한 꿈을 품고 있다거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큰 일을 할 것이라고 했지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만자와 왕비는 모두 실용적인 사람이라 먼 훗날의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과 일을 보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
목욕탕에는 자욱한 안개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고, 물도 뜨겁지 않고 적당했다. 사제가 화난 이유가 아마도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진성을 떠나 만자를 쫓아갔기 때문이기에 혼자 반성을 했었다. 그래서 두 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조용히 설명했다. “그땐 만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급해서 그랬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만자는 나 때문에 진성으로 온 것이고 평시에 날 지지하지 않는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도 만자가 다치는 게 싫었습니다.” 온화한 목소리, 미안한 말투,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약간 붉어진 얼굴, 약간 거친 목소리는 마치 부드러운 깃털처럼 그의 마음을 쓸어내렸다. 사여묵은 대사형은 자신도 홀몸이면서 무슨 감정을 알겠냐며 다른 사람의 감정에 좋은 스승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송석석은 이제 그의 부인이니 몸도 마음도 모두 그의 것이 된다. ‘부부가 되었으니 이제 같은 북명황실,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죽은 후에도 같은 무덤에 묻히게 될 텐데… 이런 것 때문에 질투하고 화를 내다니.’ 그는 팔을 뻗어 송석석의 아름다운 허리를 껴안고 몸을 바짝 붙였다. “난 기분 나쁜 것이 아니오. 당신이 시만자를 구한 건 맞는 일이오. 내가 다시 이 일을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당신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소. 당신은 경위의 지휘사이니 사람을 얼마든지 배치하 수 있고 당신도 제일 치밀한 계획을 짰을 것이오. 그리고 만약에 내가 필요하다면 당신의 부하가 날 찾아오겠지요. 성문을 봉쇄하기 전에도 경위가 날 찾아오지 않았소? 그러니 내가 미리 알든 늦게 알든 아무 상관 없소. 내가 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이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었을 테니. 당신에겐 잘못 없으니 사과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그곳에 도착할 땐 당신이 깔아 놓은 대로 연기를 했을 뿐이오. 내가 가지 않았어도 이 일은 완벽하게 해결되었을 것이오.” 송석석은 사여묵의 말을 듣고 촉촉한 속눈썹을 치켜올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신이 와서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