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행히 목숨에는 지장이 없으니 천만다행입니다. 그 협객이 어느 정도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다른 불편함은 목숨에 비하면 중요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 사건은 제가 직접 황제께 보고하겠습니다. 만약 그 여인이 나서서 문제 삼지 않는다면, 이 일은 이대로 지나간 걸로 처리될 겁니다. 그리고 황숙을 다치게 한 그 협객을 굳이 추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황숙께서 반드시 추적을 원하신다면 제가 경조부와 경위에 협조를 요청하겠습니다. 하지만 강호의 협객들은 잡아내기가 쉽지 않지요. 결국 황숙께서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이 일을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그러자 연왕은 온몸을 떨며 소리쳤다. 이는 고통 때문이기도 했고, 분노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더 이상 음험하고 독살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꺼져!""그럼 저는 황숙의 휴식을 더는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사여묵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황숙께서는 부디 상처를 잘 돌보십시오. 이곳 진성은 풍요로운 곳이니 한두 달 더 머무르셔도 괜찮을 겁니다. 다만 낮에 이미 짐들을 공방으로 보냈으니, 지금 텅 빈 이 저택에선 어떻게 생활하시겠습니까? 짐들을 다시 가져오길 원하십니까?"눈을 감은 연왕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온몸의 힘을 모두 고통을 참는 데 쏟은 그는 꺼지라는 한 마디를 내뱉은 뒤 더 이상 사여묵과 한 마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사여묵은 이들의 문제에 너무나도 신경을 쓴 듯 보였다. 연왕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그는 무상을 불러 별청으로 나갔다. 측비 김씨는 이를 보고 급히 따라가 문 앞에 서서 엿들었다.사여묵은 상석에 앉아 온화한 태도로 말했다."오늘 밤의 일은 누구의 잘잘못도 따지지 않겠소. 그저 죄에는 마땅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뿐이오. 선생께서 숲속에서 말씀하시길, 황숙께서 그 여인 때문에 군영 근처에 주둔했던 것이지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였소. 이 점은
궁문이 열리자 사여묵과 방시원은 함께 궁으로 들어가 황제폐하를 만났다.숙청제는 아침 식사를 하던 도중이었는데, 그들을 보자 옆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오 대반을 제외하고는 모두 외전에서 기다리도록 했다.두 사람이 왔을 땐 이미 말을 맞추어 모든 일을 말할 수 있지만 유독 왕정과 장기문이 성 밖에 나타난 일만을 숨겼다.왕정은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 적어서 괜찮지만 장기문은 이제 승진해서 황제의 현철위 소속인데 이렇게 아랑곳하지 않고 함부로 나가 사람을 때렸으니 황제가 책망하진 않아도 마음속에 응어리가 남아 나중에 그의 앞길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그랬던 것이었다.두 사람의 보고를 듣고 있던 숙청제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릇에 담긴 좁쌀죽을 계속 마시더니 떡을 한 조각 먹고서야 천천히 내려놓았다.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머릿속으로 이 일을 한 번 되새기며 고개도 들지 않고 담담하게 물었다.“많이 다쳤느냐?”그러자 사여묵이 대답했다.“다른 건 괜찮은데 앞으로 아이를 가지기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숙청제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떡을 먹기 시작했다. 그는 떡을 다 먹은 후에야 말했다.“그럼 그가 백성을 납치한 것으로 치자. 시 씨 가문의 명성을 더럽힐 수는 없지 않느냐? 그 여자도 구해졌고 그도 협객에게 맞아서 벌을 받은 셈이니 조사하는 척하다가 사건을 종결하거라.”그는 말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고생했으니 너희들은 계속 먹거라.” 사여묵과 방시원도 밤새 고생을 한 탓에 배가 고파,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숙청제의 아침 식사는 워낙 간단해서 그는 사람을 시켜 더 만들어주라고 분부했다. 숙청제는 오 대반에게 분부하여 연왕에게 신칙 명령을 내리게 했다. 그 명령을 내리면 이틀도 가지 않아 온 진성에 연왕이 백성을 모욕하려다가 지나가던 협객에게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것이 퍼질 것이었다. 게다가 연왕은 성공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숙청제를 가장 기쁘게 한 건 일부 사사를 파낸 것이었는데 사사들이 진성에 남아있는
사여묵은 방시원을 데리고 북명황실로 돌아갔다. 방시원은 시만자가 예전처럼 활발한 모습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다. 어젯밤 몽동이가 위영으로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놀라서 즉시 휘하를 소집해 말을 타고 미친 듯이 달려갔다. 원래는 책망할 생각이었지만, 눈 밑이 빨개진 시만자를 보자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저 지금의 연왕이 많이 다쳤는데 장기문이 한 바탕 때려서 더 이상 남자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알려주기만 했다. 시만자는 어젯밤의 상황을 알고 있었고, 화가 나면서 감동을 받았다. 그녀의 제자들이 모두 그녀를 구하러 성 밖으로 나갔고 장기문은 연왕을 때리기까지 했으니 말이다.그녀의 제자들 중엔 장기문의 앞길이 가장 창창하고 또 가장 이성적인 사람인데 그 순간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녀를 위해 분풀이를 했다. 방시원은 차마 시만자를 책망할 수 없었지만 몇 마디 당부했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당하든 항상 침착해야 해. 특히 너에게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쉽게 믿어서는 안 돼.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이 오라버니를 찾아와도 되고 왕야님과 왕비님, 혹은 염 선생에게 물어도 된다.” “알았어, 오라버니.” 이번에 시만자는 제대로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방시원은 그녀를 보며 자랑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비록 이번에 사고가 날 뻔했지만 다행히 위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동안 네가 공방을 위해 뛰어다녀서 공방이 설립할 수 있었으니 너의 공이 큰 것 같아. 이 오라버니가 참으로 자랑스럽구나.”방시원은 그녀가 의리가 있고 충성심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대부분이 위대한 꿈을 품고 있다거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큰 일을 할 것이라고 했지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만자와 왕비는 모두 실용적인 사람이라 먼 훗날의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사람과 일을 보고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했
목욕탕에는 자욱한 안개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고, 물도 뜨겁지 않고 적당했다. 사제가 화난 이유가 아마도 그녀가 위험을 무릅쓰고 진성을 떠나 만자를 쫓아갔기 때문이기에 혼자 반성을 했었다. 그래서 두 손을 그의 가슴에 대고 조용히 설명했다. “그땐 만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급해서 그랬습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만자는 나 때문에 진성으로 온 것이고 평시에 날 지지하지 않는 일이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나도 만자가 다치는 게 싫었습니다.” 온화한 목소리, 미안한 말투,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 약간 붉어진 얼굴, 약간 거친 목소리는 마치 부드러운 깃털처럼 그의 마음을 쓸어내렸다. 사여묵은 대사형은 자신도 홀몸이면서 무슨 감정을 알겠냐며 다른 사람의 감정에 좋은 스승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송석석은 이제 그의 부인이니 몸도 마음도 모두 그의 것이 된다. ‘부부가 되었으니 이제 같은 북명황실, 같은 방,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죽은 후에도 같은 무덤에 묻히게 될 텐데… 이런 것 때문에 질투하고 화를 내다니.’ 그는 팔을 뻗어 송석석의 아름다운 허리를 껴안고 몸을 바짝 붙였다. “난 기분 나쁜 것이 아니오. 당신이 시만자를 구한 건 맞는 일이오. 내가 다시 이 일을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당신은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소. 당신은 경위의 지휘사이니 사람을 얼마든지 배치하 수 있고 당신도 제일 치밀한 계획을 짰을 것이오. 그리고 만약에 내가 필요하다면 당신의 부하가 날 찾아오겠지요. 성문을 봉쇄하기 전에도 경위가 날 찾아오지 않았소? 그러니 내가 미리 알든 늦게 알든 아무 상관 없소. 내가 가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이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었을 테니. 당신에겐 잘못 없으니 사과하지 마시오.” “그리고 내가 그곳에 도착할 땐 당신이 깔아 놓은 대로 연기를 했을 뿐이오. 내가 가지 않았어도 이 일은 완벽하게 해결되었을 것이오.” 송석석은 사여묵의 말을 듣고 촉촉한 속눈썹을 치켜올려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신이 와서
왕이장은 의자에 앉아 한쪽 다리를 올리고는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은 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피곤한가?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식사도 하지 않았는가?” 사여묵과 송석석은 어색한 듯 얼굴을 돌려 기침을 했다. 사여묵은 기침을 몇 번 한 후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먹었습니다. 밤새 고생하고 또 궁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목욕을 했더니 피곤하더군요.” 왕이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사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송석석은 그의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사형께선 식사하셨습니까?” 그러자 왕이장이 신이 나서 말했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세끼나 먹었습니다. 양 마마가 만든 완탕이 산해진미보다 맛있더구나.” 그러자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손에 있는 물건을 보면서 물었다. “이건 화통입니까?” “맞다. 사부님께서 만든 신 문물인데 나더러 사제에게 보내 병부에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더군.” 순간 사여묵의 눈빛이 밝아졌다. 그 화통은 일반 화통보다 조금 더 길었고, 기관 같은 것도 있어 심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 화통은 대체 어떻게 개량한 겁니까? 연속으로 2발 3발까지 쏠 수 있습니까?” “여섯 발까지 가능하지. 그리고 이건 화약을 사용한 것이라 심지 없이 방아쇠를 당기면 바로 발사할 수 있지.” 그는 화통을 분해하면서 계속 말했다. “화탈기를 설치하면 보통 세 발을 발사할 수 있는데 이건 여섯 발을 발사할 수 있지. 세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건 사부님께서 몇 년 전에 만든 것인데 사부님께서 세 발은 소용없다고 해서 여섯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을 만들었단다. 이 화통의 이름은 육안통인데 사부님께서 열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것이 좋다며 지금 연구하는 중이란다.”“여섯 발?”사여묵은 순간 피로가 사라지고 급히 다가가서 들어보았다. 그는 원래의 화통이 작동하기가 불편해서 위기에 처했을 때 상당히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매복해서 공격하는 게 아니라면 소용이 없었다.“얼마나 멀리까지 발사
그들은 놀라서 눈알이 빠져나올 지경이었지만 왕이장은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매산에서 많은 것을 보고 파괴한 덕분에 그는 이런 물건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사부님께서 이 물건이 사매와 사제에게 유용하다고 하며 잘 연구하면 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고 해서 보내온 것이었다. 사여묵이 직접 해보겠다고 하자 왕이장은 신나서 가르쳤다. 이번엔 간판을 조준하지 않고 20장이나 더 떨어진 바위를 조준했다. 활솜씨가 좋은 그에게 조준기는 쓸모가 없어 그는 사용하지 않고 화통을 들고 발사했다. 화통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빗겨 나가 바위 옆의 풀밭에 떨어졌다. 하지만 사여묵은 흥분을 참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번엔 50장 떨어진 곳까지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적들의 장수가 50장 밖에 있을 경우에도 한 방에 폭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힌 후 그는 문제를 발견했다. 바로 안의 화약을 다 발사한 후엔 어떻게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왕이장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어 그가 궁금해하는 것을 알고 천천히 공책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모든 문제가 안에 다 들어있으니 혼자 연구해 보거라.” 사여묵은 공책을 받아 재빨리 펴보았다. 거의 알아볼 수 없었지만 병부에는 무기사가 많으니 그는 육안통을 병부상서 이덕회에게 가져가 자랑하려고 했다.사람들은 왕야께서 말도 없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하지만 염 선생은 그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쫓지 않고 장대성과 풀숲으로 가서 불에 탄 망초를 보며 연신 신기하다고 외쳤다.…병부관청.사여묵은 바람처럼 이덕회의 앞에 나타나 휘청거리며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이덕회를 끌고 나갔다. 이덕회는 심지어 그 사람이 북명왕인지도 몰랐다.후청원 마당에 이르자 사여묵은 흥분해서 그에게 화통을 건네며 말했다.“이것 좀 보게.”이덕회는 끌려가 어질어질해서 정신도 차리기 전에 사여묵이 화통으로 그의 가슴을 박아 하마터면 갈비뼈가 부러질 뻔했다.“잠시
그러나 이덕회에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육안통이 아직 정식적인 실험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절대로 소문을 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북명왕이 실험을 해보았다고는 하지만 한 번의 실험으로 정확성을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니 더 많은 실험을 거쳐 폭파 위험이 적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군대에 투입될 수 있었다. 이덕회는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화통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만지작거렸다. “심지를 사용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얼마나 편리한 일입니까? 신궁 진영뿐만 아니라 매복 진영까지 가능하니, 이런 대단한 무기만 있다면 우리가 더 이상 무서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는 만지며 껴안고 울다가 웃다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집에 있는 제 부인도 이 육안통 앞에서는 첩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제가 첩을 들이지 않는 건 부인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마음속에 항상 이 정실에게 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여묵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정실이면 십안통과 대포는 누구란 말인가?” “네?” 이덕회는 입술을 떨며 물었다. “무슨 대포 말입니까? 설마 북당의 그런 대포 말입니까?” 사여묵은 다섯째 사형처럼 느릿느릿 공책을 꺼내 그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 여기 다 있으니 읽어보게.” 이덕회는 거의 뺏아가 듯 공책을 가져가서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한 장 한 장 보았다. 끝까지 뒤져도 도면을 발견하지 못해서 실망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제조하는 방법이 있으니 그는 충분히 파고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내 조상입니다.”이덕회는 공책을 움켜쥐고 사여묵을 그러안고 울기 시작했다.“평화가 더 이상 빈말이 아닙니다. 전쟁만 없다면 우리 상국이 부흥하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사여묵은 이덕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육안통이 50장까지 이르렀을 때 그도 거의 뛰어오를 뻔했기 때문이었다.물론 포차를 제조할 수 있다면 상국의 기세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을 것이었다.사여묵은 사부님이 오셨
숙청제는 흥분한 나머지 뒤에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말했다. 임양운의 선조가 이성왕인 임병일이었으나 세습이 끝났으니 섣불리 왕을 봉하려면 천하에 알릴만한 공로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육안통이 아직 대량으로 생산되지 않았고 신화진영도 아직 세워지지 않았기에, 지금 왕을 봉하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매산을 주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 맞는 말이군. 그건 급하지 않지.” 숙청제의 눈에서 순간 빛이 났다. 이건 그가 즉위한 후 사여묵이 처음으로 보는 모습이었다. 숙청제는 육안통의 위력을 직접 보고 싶어서 현철위에게 냉궁을 봉쇄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냉궁은 아주 커서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았다. 선제가 승하했을 때도 은혜를 베풀어 냉궁의 여자들을 모두 황실 암자로 옮겨서 생활하게 했다. 숙청제는 육안통이 냉궁의 벽을 거의 뚫은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 의아해했다.“쇠구슬도 쓸 수 있나?” 그러자 이덕회가 답했다. “사용할 수는 있지만 아직 가장 큰 위력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제가 돌아가서 병고주사와 무장을 불러 잘 연구해 보겠습니다.” 이덕회는 그 공책을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가장 위력이 큰 것은 화약탄이었는데 적에게 맞으면 터져서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좋아. 그럼 이 일은 당신에게 맡기겠네. 다만 반드시 믿을 만한 사람을 쓰도록.” 숙청제도 긴장했다. 그는 보물을 얻었으니 가장 유용하게 쓰고 싶었는데 또 누군가에게 들킬까 봐 설레고 조마조마했다.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이덕회가 정중히 말했다.숙청제는 다시 공책을 펼쳐 보았다. 공책에는 잘못된 것도 있었고, 수정한 곳도 있었는데 아마 끊임없이 생각을 하며 고쳤을 것이다. 그리고 대포의 구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임양운이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내놓았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아쉬운 건 대포의 도지가 없다는 것이었다.그는 임양운이 막내제자인 송석석을 가장 아끼고 총애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게다가 사여묵도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