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오늘 연왕 일가가 진성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순방영 사람들에게 그들이 성을 떠나는 걸 주의 깊게 지켜본 후 돌아와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오진은 직접 사람을 데리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연왕부의 마차들이 웅장하게 성문을 빠져나갔는데 연왕의 신분으로 인해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나 연왕은 마차 가리개를 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성문 수비장인 진천 장군은 두 손을 모아 그를 배웅했다. 왕족들은 따로 명령이 없으면 감히 검문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친왕이 성을 나갈 때면 영패만 보여주기만 해도 곧바로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그들이 떠난 후 오진은 진성 경위부로 돌아와 송석석에게 보고했고 그제야 송석석은 안심할 수 있었다. 요즘 순방영에서는 한창 체력 검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체력 검문으로 일부 사람을 솎아낸 뒤에도 순방영은 여전히 정예라 부르기 힘들었는데 과거의 현갑군 출신이 가득하다는 이름값을 하지 못한 셈이다. 몇 년간의 나태함으로 인해 부패한 이들이 자율성을 가진 이들마저 나쁜 방향으로 이끌었다. 대부분이 녹봉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굳이 고생할 필요 없다고 여겼다. 물론 스스로 절제하며 자기가 현갑군이라는 걸 잊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극소수로 유혹에 넘어가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먹물 한 방울이면 맑은 물 전체를 더럽히지만 맑은 물 한 방울은 탁한 물을 정화하지 못하듯 말이다.송석석은 자기의 지휘사 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비하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한 나태함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진의 위신은 여전히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오늘 훈련은 그녀가 직접 나섰다. 달리기, 뛰기, 등반, 격투까지 그녀는 도전장을 내미는 이들을 모두 환영하며 상대했다. 시만자는 일찍이 순방영의 그 고인물들은 전혀 성실하지 않다고 말했고 어쩌면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을 거라고 했다. 시만자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송석석이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이 지난 후, 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했다.“시만자 아씨는 댁에 없습니다. 왕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씨가 공방에 가셨다고 해서 공방으로 가보았지만 거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연왕부에서 물자가 도착했지만 아씨가 직접 확인하지 않아 물건이 밖에 쌓여있습니다.” 송석석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왕부가 공방에 물자를 보냈다고?그렇다면 홍시와 다른 이들은? 정말 시만자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그녀는 놀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만소를 불렀지만 만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소가 오늘 분명 그녀 옆을 따랐는데 어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너무 이상했다.“송 대감님, 어찌 그러십니까?” 오진이 달려와 물었다. “만소를 찾으십니까? 소인이 아까 마주치긴 했다만 어딜 급히 가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디서 마주쳤느냐?” 송석석이 다급히 물었다. “경위부 외곽 거리였습니다. 소인이 성문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지요.” “그렇다면 연왕이 떠나던 시점이 아니더냐?” 송석석은 조급한 마음에 급히 마구간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오늘 훈련은 취소되었으니 모두 나와 함께 시만자를 찾으러 간다. 필명의 경위도 불러라.” 시만자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이 불안감이 솟구쳤다. 오진은 그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송 대감, 사부님은 단순히 왕부에도 공방에도 안 계신 것일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찾으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송석석은 섬광에 올라탄 뒤 빠르게 성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그녀는 먼저 망경루에 들러 운익각의 지부를 확인하며 혹시 홍시가 여기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망경루의 주인은 홍시를 본 적 없으며 심지어 다른 정탐들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오진이 사람을 데리고 도착하자 송석석이 다급히 말했다. “넌 공방에 가서 네 사부가 오늘 공방에 들렀는지 확인하거라. 그리고 왕부에 사람을 보내 오늘 네 사부가 연왕부를 제외한 다른 곳에는 가지 않았는지 확인해.”
송석석은 그녀의 말을 따라 재빨리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했다. 마음은 어지럽고 불안했지만 애써 진정하고 다시 물었다. “지금 홍시 혼자서 쫓아가고 있는 것이냐?” “홍시와 비윤이 쫓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시만자 아씨가 정말 연왕에게 끌려갔다면 연왕 곁에는 고수가 많아서 두 사람만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원을 요청하려고 급히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허나 지금으로선 시만자 아씨가 그들에게 끌려갔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송석석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섬광이라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시만자가 아직 경성에 있다면 큰 위험은 없어도, 혹여나 연왕에게 끌려갔다면 정말 위험했다. 송석석이 청미에게 말했다. “너는 곧장 돌아가 필명을 찾아가 진성을 수색하라 전한 뒤 북명왕부로 돌아가 몽교두에게 사람을 데리고 내 뒤를 따르라 하거라. 가는 길에 내 길목마다 표식을 남겨둘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채찍을 휘두르며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홍시는 항상 시만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시만자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이는 평범한 일이 아니기에 송석석은 잔뜩 긴장한 채 연왕을 쫓아갔다. 청미가 진성으로 돌아오니 경위와 순방영은 이미 수색을 시작했다. 금군인 왕정도 사람을 파견했고 장기문 또한 현철위의 비용위를 동원해 시만자를 찾고 있었다. 사부가 실종되자 그들 또한 불안했던 것이다. 경위는 성문을 봉쇄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는 바로 대리사로 달려가 사여묵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알게 된 사여묵은 송석석이 연왕을 쫓아갔다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간 것이냐?” “그렇습니다, 왕야. 지금 중요한 것은 성문을 봉쇄하는 것입니다. 사부가 연왕에게 끌려간 게 아니라면 그들은 아마 어딘가에 숨긴 뒤 우리가 찾는 혼란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려 할 겁니다.”사여묵은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서 쫓아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여묵은 즉시 범인을 추격한다는 명
당나귀의 방울 소리가 관도 위에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입에 풀 한 가닥을 물고 있던 남자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그는 밤길을 걷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어둠은 항상 묘한 신비로움을 주었다. 어둠 속에서는 마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극이 되었다."요괴 한두 마리라도 만나면 좋겠네. 같이 앉아 한 잔 하면 얼마나 즐거울까!"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호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 호리병 안에는 사숙의 술이 들어 있었다. 이 술을 훔치는 바람에 자신의 말도 타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말을 빌리러 고월파로 빠르게 향했다.하지만 고월파에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늙은 장문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늙은 당나귀 한 마리를 겨우 끌고 나왔다. 그리고는 신신당부하며 그에게 당나귀를 최대한 끌고 다니기만 하고 절대 타지 말라고 말했다. 늙은 당나귀가 그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 과로로 죽을 수도 있으니, 짐만 싣는 걸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당나귀를 끌고 내려갈 거라면 차라리 내가 짐을 직접 메고 내려가는 게 낫지. 왜 굳이 당나귀를 데리고 가야 한단 말인가?’하지만 그는 곧 노인의 말을 얕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나귀는 비록 나이가 들긴 했지만 달릴 때 사람보다 빠르고 지구력도 꽤 괜찮았다. 매산에서 하주까지 오는 동안 숨을 헐떡이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한 시진 정도만 더 가면 하주에 도착할 듯했다.왕이장은 콧노래를 더욱 크게 흥얼거리며 생각했다."진성은 얼마나 번화한가? 끝내주게 맛있는 술도 많고 게다가 귀여운 사매들도 있으니, 이게 인생의 절정 아니겠어?"그는 들고 있던 막대기를 들어 당나귀 앞에 매달려 있던 당근을 조금 뒤로 움직였다. 드디어 당근에 입을 댈 수 있게 된 당나귀는 아삭아삭거리며 정말 맛있게 먹어댔다.그는 여관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다만 하주 밖 경치 좋은 곳에서 술병을 열어 요괴 한두 마리라도 만나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그가 막 눕자마자 어느곳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 들렸다. 매우 가벼운 발소리와 몇 마디 욕설이 섞여 있었다.그는 벌떡 일어나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는데, 반대편 산에서 한 무리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리의 모든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단 한 사람만 검은 옷이 아니었는데 무슨 색인지조차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검은 옷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욕설 소리는 금방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입이 봉인된 듯했다.그와 무리의 거리가 꽤 멀었고, 그곳에 주둔한 사람들과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었기 때문에 그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빠르고 주둔 중인 사람들과 합류하려는 듯 보였다.왕이장은 일어서며 표정에 긴장감을 드러냈다. 요괴는 없었지만 음모가 시작된 듯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자들과 욕설을 내뱉던 여자를 끌고 가는 모습까지……그는 당나귀의 등에 실려 있던 사부가 준 신화기를 꺼내 닦았다. 이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까진 아직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사부가 이걸 만들어냈을 때 허리에 손을 얹고 산 꼭대기에서 한 시진 동안이나 크게 웃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웃음에 산속 뱀, 벌레, 쥐, 개미들까지 모두 놀라서 도망쳤다고 했다.그는 소리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당연히 이 물건 하나만 믿을 수는 없었기에 항상 몸에 무기를 지니고 다녔다.그는 관도 옆의 풀숲 속에 숨어서 그 두 무리가 합류하려 준비하는 것을 주시했다. 여전히 그들의 얼굴이나 생김새를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남녀를 구분하는 정도는 가능했다.그가 기어가며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멀지 않은 나무 한그루에서 빛이 반사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보았다. 거기엔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앞쪽을 긴장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때문인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이 사람…… 사저의 수중에 있던 홍현 같은데?’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상대의 머릿수를 굳이 세지 않아도 됐다."너희는 몇 명이냐?""저와 비윤, 둘뿐입니다. 비윤은 저쪽에 있습니다." 홍현이 답하면서 손가락으로 반대쪽을 가리켰다. 관도의 반대편에는 빽빽하게 늘어선 작은 나무들 사이로 한 사람이 천천히 마차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끝났군. 너희 둘에 나까지 합쳐도 셋인데, 저쪽은 백 명이 넘고 게다가 사사까지 포함되어 있지 않나." 왕이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쩌다 산을 내려오자마자 이런 큰 문제에 휘말리게 된 걸까?소탈하고 준수한 그의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였다.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계획을 점검했지만 결과는 명백했다. 승산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구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시만자는 이미 천막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듯했고, 약에 취한 듯 보였다. 남아 있던 이성은 아까 했던 욕설 한 마디로 전부였다. 이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끌려가는 그녀의 온몸엔 힘이 다 빠져 있었다.사람들은 천막을 피해 자리를 떴고, 연왕이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본 왕이장은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리는 느낌이었다.아까 세운 계획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기에 홍현이 움직이는 것을 막으려 했던 그였지만, 지금은 이성을 잃은 채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날렸다.계산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는 시부귀가 더럽혀지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시부귀는 하늘보다 높은 자존심을 가진 인물로, 아무리 훌륭한 남자가 있어도 그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가 연왕 같은 더러운 인간에게 모욕을 당한다면 천지가 무너지는 소동을 일으킬 게 뻔했다. 그녀는 아마 살아갈 의욕조차 잃어버릴지도 모른다.왕이장이 몸을 날리자 홍현과 비윤도 뒤따랐다. 그렇게 셋은 천막 밖에 착지했지만, 곧바로 수십 개의 칼과 검이 그들을 에워싸 버렸다.왕이장은 신화기를 등에 멘 채 피리를 꺼내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한 바퀴 회전하며 쾅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홍현과 비윤의 뒤를 봐줬다.그러나 홍현과 비
왕이장이 소사매를 두고 어떻게 떠날 수 있겠는가? 비록 시만자를 안고 있다 해도 싸움에 나설 수는 있었다.그러나 뒤를 돌아보자 송석석이 채찍으로 연왕의 목을 걸어 당겨 자기 앞으로 끌어와 그의 얼굴 양쪽에 큼지막한 따귀를 몇 차례 날리는 모습을 목격했다.‘그래, 도둑을 잡으려면 우두머리를 잡아야 하는 법이지. 저 놈을 묶어두면 최소한 빠져나갈 수는 있겠어.’그는 시만자를 안은 채 말없이 자리를 떴다. 시만자의 행동과 얼굴에 나타난 홍조로 보아 그녀가 계략에 빠진 걸 알 수 있었다. 은침을 몇 개 놓아 피를 돌게 해야만 해독이 가능할 터였다.한편 송석석은 연왕을 붙잡았지만, 홍현과 비윤은 이미 시위들에게 잡혀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날이 목살에 살짝 파고들어 피가 맺힐 정도였다.연왕도 더는 꾸미지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정말 능력이 있다면 나를 죽여라. 숙부를 시해했다고 하면 사여묵이 세상 사람들에게 뭐라고 변명할지 두고 보자."송석석은 채찍을 더 바짝 당기며 말했다. 그녀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연왕은 목이 하도 세게 졸려 눈이 다 뒤집혀질 지경이였다. 그는 숨이 막혀 어지러움을 느껴 머리를 뒤로 젖혀 간신히 숨을 쉬려 했지만 목에 감긴 채찍이 너무 단단히 조여져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그때 측비 김씨가 서둘러 앞으로 나서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북명왕비님, 왕야께서 대체 무슨 죄를 저질렀다고 이러십니까? 이러고도 왕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무슨 죄냐고요? 시만자를 더럽히려는 음흉한 의도를 가졌지 않습니까. 당당한 친왕이라는 자가 이런 비열한 짓을 저지르다니…… 그를 죽여도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는 것 일뿐입니다!"측비 김씨는 눈을 굴리며 대답했다.“그건 오해입니다.”"우리 쪽 사람이 시 소저가 독에 중독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가 연왕비의 사촌 여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여기로 데려와 해독하려 했던 겁니다. 우리 왕야께서는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으신데, 이런 식
무상은 서서히 머리가 아파왔다. 왕야가 정욕 때문에 판단력을 잃었다는 사실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이 일이 이미 마무리된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떠나기 전 왕야가 굳이 이런 일을 계획하였고, 심지어 일부 사사를 보내 이 일을 실행하게 했으니……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전부 진성에 남아 있어야 했는데 말이다.결국 시만자 한 명 때문에 모든 계획이 뒤틀려 버린 것이다.무상의 눈에 순간 살기가 스쳤다. 이 깊은 밤중에 송석석을 죽이고 시체를 묻었다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지만, 하필 두 사람이 도망쳤고, 게다가 송석석이 왕야를 협박하고 있는 탓에 일이 더욱 복잡해졌다.다행히 그는 모든 가능성을 미리 염두에 두고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다. 원래는 일이 다 끝난 후 시씨 가문에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말이다.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이 일이 아무리 떠들썩해도 크게 번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다만 이제 시씨 가문과의 관계는 틀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송석석은 가슴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비애와 분노가 치밀었다. 그녀는 마차에 숨어있던 두 명의 현주를 보았다. 이 늙은 쓰레기같은 인간은 자신의 딸들에게조차 숨기지 않고, 바로 이곳에서 만자를 더럽히려 하고 있었다.시민주는 인간 취급할 가치도 없고, 측비 김씨 또한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쓰레기들이다."왕비님, 오해하지 마시지요. 시 소저는 왕야의 처제 아닙니까. 그러니 왕야께서 그런 부적절한 마음을 품으실 리가 없지요. 게다가 저희는 지금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런 일을 벌일 이유가 대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시씨 가문과의 혼인 관계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텐데요."측비 김씨는 계속 말했다. 그녀의 말은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변명을 준비해 두었다. 이를 황제 앞에 고한다 해도 고작 몇 마디 꾸지람을 듣는 것으로 끝날 것이고, 결코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오히려 송석석이 분노한 나머지 왕야를 진짜 죽여버린다면 문제가 더 커질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