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여는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다가 결국 타협을 택했다. “그럼 두 가지 일만 약속해 주십시오. 그럼 이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전북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해보시오.”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다시는 송석석과 이방을 언급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내 앞에선 그 두 사람의 이름을 꺼내지 마십시오.” 전북망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청여는 계속 말했다. “두 번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현철위로 돌아가 부령이 되는 것입니다.” 전북망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이미 면직이 되었는데 어찌 현철위로 돌아간 단 말이오?”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내가 형수님에게 당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복직되면 반드시 일을 잘 처리해서 승진하고 앞으로 내 말을 듣겠다고 약속하면 됩니다.” 하지만 전북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내 일로 형수님께 폐를 끼칠 생각 없소. 나는 이미 황제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오. 그러니 형수님께서 날 도우려면 반드시 많은 돈과 인맥을 써야 할 것이오. 헌데 그것들은 형수님이 자식들을 위해 모은 것이니 내 일에 낭비해서는 안 되오.” 그러자 왕청여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어찌 낭비란 말입니까? 난 평서백부의 셋째 아가씨입니다. 그녀의 인맥과 은전 모두 평서백부의 것이니 그녀의 자식이 사용할 수 있으면 나도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은 이미 시집을 갔지 않소?” “시집을 갔어도 난 평서백부의 셋째 아가씨입니다.” 전북망은 한숨을 내쉬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것입니까?” 왕청여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전북망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내가 군영으로 돌아가 졸병부터 시작하겠다고 하면 당신 장군부에 남아있을 것이오?” “당신 미쳤습니까?” 왕청여는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군영으로 돌아가 졸병부터 시작하겠다니요? 그럼 무엇으로 장군
왕청여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이 왜 계속 이런 일을 당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혼은 제일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녀도 떠나고 싶지 않아 시아버지 전기와 큰 아주버니인 전북경에게 설득을 부탁했고 심지어 둘째 노부인에게까지 부탁했다. 둘째 노부인은 민 씨의 일로 실망을 해 줄곧 그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청여의 말을 들은 그녀는 전북망이 다시 군대에 가는 것을 지지한다고 했다. 사실 왕청여는 둘째 노부인에게 희망을 걸지 않았다. 다만 가문의 어르신이니 그녀가 설득한다면 전북망이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원하지 않는 답을 들은 왕청여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비아냥거리지나 마시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급히 일어나 떠났다. 전기와 전북경도 별로 설득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북망이 졸병이 되는 것을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혼인을 한 후에 두 가문에서 서로 도와 세력을 키우는 게 마땅한 것이지만 장군부엔 더 이상 세력이 없었다. 그러니 계속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왕청여는 한바탕 돌아다녀도 결과가 없자 친정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혼하겠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그녀는 그렇게 큰 장군부의 남자 주인이 졸병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장군부도 언제 황제에게 회수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나가서 셋집에 살 수도 없는 것이고. 노부인은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고 사람을 보내 최 씨를 모셔오라고 했다. 하지만 최 씨가 소진소주방으로 가서 모셔오지 못했다.사실 최 씨는 일부러 나간 것이었다. 그녀는 홍이를 통해 왕청여의 계획을 미리 알고 도와줬다가 되려 원망받을까 봐 일부러 피한 것이었다. 최 씨는 툭하면 친정으로 돌아오는 왕청여가 싫었다. 자신의 두 자녀의 혼인 문제도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비록 시집간 딸은 처가의 가족
결국엔 이 씨 부인이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들이 만 씨 가문에 만근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만근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이고 만 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오.” 송석석과 시만자는 만 씨 가문이 냉담하다고 느꼈지만 이 씨 부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문을 찾는다고 해도 현재의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었다. 만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막으려면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말하게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최 씨는 약속대로 만근의 마음을 풀어주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좁쌀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 생기가 하나도 없는 소녀를 보았다. 하지만 창백한 와중에도 소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최 씨는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과 두 손을 닦아준 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때 만근이 입을 열었다. “더럽습니다.” 그건 그녀가 소진소주방으로 온 후 처음 한 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최 씨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더럽긴, 하나도 더럽지 않단다.” 만근은 최 씨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최 씨는 잠시 후 좁쌀죽을 떠서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자, 죽 한 입 먹자꾸나.” 만근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입을 벌리진 않았다. “입 벌리거라.” 최 씨는 도자기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갖다 대고 말했다. “착하지?” 하지만 만근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심지어 최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의 더러워진 몸이 눈앞의 화려한 옷을 더럽힐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최 씨가 말했다. “네가 살기 싫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죽에 독약을 탔으니 편해지고 싶으면 어서 먹으렴. 다 마신 후에 누가 너에게 상처를 줬는지 말해보거라. 우리가 복수를 해줄 테니.” 죽에 독약을 탔다는 말에 만근의 눈엔 서서히 빛이
송석석은 여학의 일로 바빠 시만자가 대신 이 일을 처리하러 갔다. 송석석은 이미 다섯 명의 선생님을 찾았다. 태부의 손녀 안여옥, 민지 장공주의 형수 허부인, 정국태부인, 심청화, 그리고 애초에 민지 장공주와 함께 공부를 했던 무 씨 아가씨였다. 무 씨 아가씨는 올해 서른이 되었고 약혼자는 그녀의 죽마고우였는데 혼례를 준비하던 해에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그 후로 무씨 아가씨는 더 이상 혼담을 나누지 않았고 결혼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심 사형은 유일한 남자이지만 상국에서 유명한 수재였고 인품이 좋고 덕행이 고결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해서 그가 여학의 스승이 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명성 덕분에 더 많은 학생을 모집할 수 있었다. 정국태부인은 사교계에서 은퇴한 지 오래다. 그녀는 젊었을 때 유명한 재녀였고 한때는 부군을 따라 상국의 곳곳을 돌아다녔으며 ‘산하지’라는 책까지 썼다. 오늘날 상국의 지도가 바로 그녀의 부군인 정 대인이 쓴 것이었다. 그들 부부는 상국에서 큰 공을 세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줄곧 외유 중이었는데 정 대인이 세상을 떠나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국태부인은 이미 일흔이 넘었지만 몸은 여전히 건장했다. 단지 접대를 거의 하지 않을 뿐이었다. 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부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노안이 와서 눈은 침침하지만 마음속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며 그 불씨를 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심 사형은 송석석이 그를 이용해 학생을 모집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 누구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정해진 선생님은 총 다섯 명이고, 학생은 백 명정도 모집할 계획이었다.지금은 아직도 여자들은 집안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송석석은 학생을 모집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줄 알았는데 학생을 모집하는 발표를 한지 하루 만에 100명의 인원수가 다 찼다. 여학의 이름은 태후께서 아군여학이라고 지었는데 고상하고 정아 한 여군자라는 뜻이었다
사여묵은 대리사에서 소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는 대리사에서 회의를 하다가 중간에 잠시 휴식하였었는데 그는 진의와 차를 마시러 들어갔고 사람들이 밖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만주사가 재임한 지 이미 5년이나 되어 승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마침 이부상서인 제 대인에게 외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암자로 보내져 딸까지 낳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제 상서가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딸인 만근을 첩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제 상서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만주사는 원래 파고드는 것을 좋아해서 제 대부인께서 질투를 해서 첩을 들이지 못하는 줄 알고 몰래 딸을 제 상서에게 바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겨우 제 상서가 매번 휴가마다 부인을 데리고 예불하거나 소풍을 간다는 정보를 받았다. 그래서 미리 문지기를 매수해서 그들이 예불하고 탕천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딸을 보냈다. 하지만 착오가 생겼는데 제 대부인께서 어지러워 제 상서가 예약한 탕천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주사는 이미 딸에게 약을 먹이고 들여보냈는데 어떤 자식이 와서 딸의 몸을 더럽히고 도망을 친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야 제 대인께서 탕천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딸이 결백을 잃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만근은 누구인지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헛수고를 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데다 탕천의 사람이 말한 건지 그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만주사는 자신의 앞길에 영향이 있을까 봐 딸이 조신하지 못해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딸을 처리해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었다. 시만자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화가 나서 탁자를 힘껏 내리치자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럼 만주사가 딸의 몸으로 승진을 도모하려 다가 일이 성사되지 않자 딸을 죽이려고 했다는 건가?” 그러자 시만자도 화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알아본 것이랑 비슷한데 내가 들은 것이 더 상세한 것 같아. 만주사는 딸을 속여 예불하러 간 것이었는데
시만자는 가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계속 여식을 해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벼슬길을 위해 여식들을 물건 취급하며 하나하나 희생하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왜 만근을 자결하게 한 걸까요? 그렇게 비열한 생각을 가진 자라면 차라리 만근을 계속...” 시만자는 문득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 정말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네요.” 사여묵은 입맛이 없었던 건지 음식을 짚던 젓가락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건 그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일이 밖으로 알려진 이상 화근이 될까 두려워 만근을 죽게 하고 딸이 없었다고 부정해 버리는 거지. 그래야 앞으로도 약점을 잡히지 않으니까. 아마 족보에서도 이미 지워버렸을 것이다."시만자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그냥 자기 여식을 망치도록 놔둬야 한단 말입니까? 관직이란 게 이렇게 더러운데 황제는 이런 일을 신경 쓰지도 않습니까? 목 승상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입니까?"사여묵이 말했다. “조사는 할 수 있다. 대리사에서 조사할 것이다.” 사여묵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만근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면 다른 방면을 조사하는 수밖에 없어. 어쨌든 예부주사는 변변찮은 관직이야. 부패를 저지르기엔 위치가 부족하고 직무 태만을 따지자니 맡은 일이 대단한 일도 아니다. 결국 사생활이나 품행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이 사람이 밖에서는 꽤 평판이 좋은 편이라. 그가 가진 가장 큰 악행이라면 딸과 여동생을 팔아 자기 배를 불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시만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직 두 가지 방도 뿐입니다. 첫번째 방법은 만근을 끌어들이는 것인데… 그건 제가 원치 않습니다. 두 번째는 그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입니다!”그러자 송석석이 손가락 관절을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세 번째 방도도 있다. 평생 침상에서 못 일어나게 만드는 거지. 더는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하고 연명하듯 살아가면서 집사람과
송석석은 직접 금경루를 찾아 금소주를 만났다.금소주는 비록 상인이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정직하며 순수한 면모를 겸비한 인물로 사업에서 철저히 이익을 추구했지만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거액을 기꺼이 기부하며 애국심을 보여왔다. 금소주는 평소 송석석을 존경하며 친분을 쌓고 싶었지만 신분상의 차이로 그녀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직접 찾아왔으니 금소주는 자연스레 극진히 그녀를 대접하며 협조를 약속했다.그는 탕천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여러 관료의 비밀이 얽힌 일이라 그가 직접 조사하기는 어려웠고 단지 어떤 여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하니 그는 망설임 없이 돕겠다고 나서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송 대감, 이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그로부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금소주는 경위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탕천에서 한 귀한 객관이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옥패를 잃어버렸으니 순방영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대부분 물건을 잃어버리면 관청에 신고해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엔 잃어버린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신분을 가진 퇴직 관료였기에 상황이 달랐다. 그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는 소문은 익히 퍼져 있었다.게다가 이 사건 자체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피해자가 요청했으니 순방영은 충분히 조사에 나설 명분이 있었다. 옥산탕천의 이용료는 상당히 비쌌고 항상 하인들이 객관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사건 당일 옥산탕천에 출입했던 사람들을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제상서가 예약했던 곳은 비취탕였지만 그는 사건 당일 절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에 의심에서 제외되었고, 이는 절의 사미가 증언해 주었다.송석석은 먼저 오진과 함께 탕천 일대를 둘러보며 지형을 파악했다.탕천은 절의 동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으며, 약 3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크고 웅장한 정문이 세워져 있고
워낙 이 일을 모르고 있던 제상서는 송석석의 말을 듣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는 이미 이런 일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외실이 낳은 사생아는 그의 오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면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고 사람들은 그가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화가 난 제상서는 바로 그 시위병을 끌어냈다. 시위병은 진삼이라 불리는 사람으로 부모도 제씨 가문 일을 맡고 있기에 학문을 익혀 시위병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만가가 문간방에 제상서가 탕천으로 가는 사실을 염탐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상서 부부를 따라 절에 갔다가 그가 탕천에 가지 않자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만근을 더럽힌 사람이 바로 진삼이었기에 제상서는 당장이라도 진삼을 죽이고 싶었다. 게다가 송석석은 제상서의 외실을 파내고 사생아까지 진숙의 손에 넘긴 여자였다. 고고한 국장이자 이품 이부상서로 수많은 관리의 앞날이 그의 손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송석석을 두려워했고 그녀 앞에서 감히 머리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여도 이보다 덜했을 것이다.송석석은 그의 앞에서 진삼을 발로 걷어찼는데 그 힘은 당장이라도 진삼의 목숨을 앗아갈 듯했다. 진삼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져 배를 움츠린 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제상서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송석석이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제 대인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제대로 된 설명은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제상서는 얼굴을 한 번 쓱 만지더니 답답한 듯 긴숨을 내쉬었다. “하… 진삼이의 잘못이 맞긴하나 여식을 팔아먹은 본인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건 제 대인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진삼을 어찌 해결할 것일지만 말씀하십시오.” 제상서는 진삼을 죽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봐왔던 아이라 마음이 독해지지 못했다. 진삼은 배를 끌어안은 채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소인 잠시 귀신에 홀려 부
이틀 동안 돌아본 후, 수란키가 송석석에게 말했다. "귀국에 단신의라는 신의가 계십니다. 그분이 만든 단설환의 한 가지 재료인 설연화가 귀국에서 생산량이 매우 적다고 알고있습니다. 남강에 있기는 하지만, 설산 정상에 자생하고 있어 채집하기 매우 어려우며, 또한 드뭅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는 설연화가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닙니다. 고산지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요. 그가 사용하는 설연화는 모두 서경 약장수에게 몰래 사서 쓰는 것으로,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그 가격으로 단설환을 팔면, 한 알을 팔아서 한 알을 잃는 셈입니다."송석석은 단설환이 부족한 이유가 일부 약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백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약재가 부족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서경과 상국은 그동안 무역을 하지 않았고, 특히 약재는 더 조심스럽게 다뤄졌기 때문에 그가 서경 사람에게 약재를 산 것을 비밀로 한 이유가 이해가 됐다.수란키와 원신제는 한 마음으로 이렇게 세세하게 조사를 진행했으며, 두 나라 간에 상호 교역을 이루려는 계획이 이미 있었을 것이다. 안풍친왕을 불러들인 것도 이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단설환은 생명 구제용 약이라, 만약 약재만 부족하지 않다면 평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실로 민생에 큰 이익이 된다. 송석석은 그들이 지나쳤던 약재 시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왜 약재 시장에서는 설연화를 본 적이 없죠?" 수란키가 웃으며 답했다.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 서경에서 설연화가 많이 자생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희귀한 재료입니다.고산지대를 올라가야만 채집할 수 있기에 위험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약효가 뛰어나지 않습니까. 심장을 강하게 하고 통증을 멈추는 효과가 있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법이 없습니다. 송대감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제가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상국으로 가져가서 단신의께 검증받으시면 됩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시 사람을 시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
그가 앉은 자리는 북당이 이번 협상에서 취한 입장을 대표했다.그는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송석석은 다시 한 번 국가가 강성한 것이 정말 좋다며 감탄했다. 협상의 처음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고, 양쪽의 역관들이 그것을 전달하며, 모두 역사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양보를 한다면 계속해서 양보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번째 협상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그쳤다.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협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반에는 전날처럼 양쪽에서 강조하는 말들이 오갔다.그러다가 잠시 후, 안풍친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국경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본왕은 두 나라가 서로 친선을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두 나라가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안풍친왕은 한 장의 목록을 꺼냈다. 그 목록에는 양국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곡물, 가축, 비단, 직물, 수공예품, 찻잎, 모피, 도자기, 종이, 벼루, 각자의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약초, 향료, 청염, 철광, 옥석 광물 등이 있었다. 양쪽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 어떤 일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잠시 미룰 수도 있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국고를 이미 소진시켰기에 양쪽 모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북당의 발전 경험에 따르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은 뒤처진 생각이며,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상업세 또한 매우 높았다. 안풍친왕의 이 목록 덕분에 두 나라는 국경
하지만 송석석은 서경의 종친과 관리들이 북당이 협상에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역력했다.놀란 마음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기쁨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북당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서경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송석석은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안심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원신제가 미리 그들에게 이를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협상에 참여하는 관리들에게는 알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이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지만, 궁정의 문무 백관들 중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복하는 북당 안풍친왕을 초대한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어제 원신제가 그녀와 시만자를 궁으로 부른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여성의 과거 시험을 예로 든 것은, 그녀의 많은 결정들이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여기까지 분석을 마친 송석석은 점점 더 낙관적이게 되었다.궁중 연회가 끝난 후, 북당 사람들은 대접을 받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 한 끼를 제외하고는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으며, 단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상국의 사절단도 일어나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모두가 돌아가서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수란키가 제공한 일정을 따르면, 이틀 후부터 협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황궁 별관에 돌아가자, 이덕회는 모두를 모아 앉히고 논의했다.사실상 또 다른 진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양보를 해야 한다면, 모두가 지도 위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황제가 이미 양보의 한계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를 하게 되면 돌아가기도 어렵고,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도만 바라보며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