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송석석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일어나 말채찍을 들고 집을 나섰다. 전북망이 중상을 입고 휴가를 신청하자 숙청제는 경과를 알고는 분노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가 정말로 일편단심인 남자라면 애초에 석석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일개 죄인 때문에 자해를 해서 장군부의 일도 상관하지 않다니. 효도도 충성도 없는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오대반은 황제가 전북망을 몇 번이고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전 노장군을 봐 서고, 두 번째 이유는 그를 이용해 현갑군을 견제하기 위해서이고, 세 번째는 성릉관의 장군들에게 영향을 끼칠까 봐 당분간 그를 파면할 수 없어서였다. 이젠 서경의 철수 소식도 전해졌으니 황제도 더 이상 그를 멋대로 두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조정의 신하들이 밖에서 소리를 지를 때 오대반은 특별히 허어사를 기다렸다가 황제폐하께서 전북망 때문에 화를 냈다는 일을 무심코 언급했다. 허어사가 이유를 묻자 오대반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허어사가 조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서경인이 이방을 처치하여 전북망이 벽에 머리를 박았다는 보고가 허어사에게로 보내졌다. 허어사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이런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어사대에서는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전 씨 가문의 자손으로서 가문을 빛낼 생각을 하지 않고 신하로서 관직을 잘 완수하지 못해 황은까지 저버렸으니 차라리 그 죄인을 따라가는 게 낫지 않소?” 그러고는 탁자에 앉아 상주본을 쓰기 시작했다. 허어사가 상주본을 쓰자 많은 관리들도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는데 그들이 전북망의 가치를 알아채지 못한 게 아니라 그가 이방을 위해 벽에 박았다는 말이 서경인의 귀에 들어가면 어떤 말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3일 동안 계속 상주본을 올리자 원래도 위태롭던 전북망의 벼슬자리가 결국 사라졌고 숙청제는 그의 관직을 해임하고 자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북망을 면직시킨 후 장기문이 승진을 했고 척귀가 장기문의 원래
왕청여는 한참을 의자에 앉아 있다가 결국 타협을 택했다. “그럼 두 가지 일만 약속해 주십시오. 그럼 이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전북망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말해보시오.”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다시는 송석석과 이방을 언급하지 마십시오. 적어도 내 앞에선 그 두 사람의 이름을 꺼내지 마십시오.” 전북망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왕청여는 계속 말했다. “두 번째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현철위로 돌아가 부령이 되는 것입니다.” 전북망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이미 면직이 되었는데 어찌 현철위로 돌아간 단 말이오?” 그러자 왕청여가 말했다. “내가 형수님에게 당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그저 복직되면 반드시 일을 잘 처리해서 승진하고 앞으로 내 말을 듣겠다고 약속하면 됩니다.” 하지만 전북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내 일로 형수님께 폐를 끼칠 생각 없소. 나는 이미 황제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오. 그러니 형수님께서 날 도우려면 반드시 많은 돈과 인맥을 써야 할 것이오. 헌데 그것들은 형수님이 자식들을 위해 모은 것이니 내 일에 낭비해서는 안 되오.” 그러자 왕청여가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어찌 낭비란 말입니까? 난 평서백부의 셋째 아가씨입니다. 그녀의 인맥과 은전 모두 평서백부의 것이니 그녀의 자식이 사용할 수 있으면 나도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은 이미 시집을 갔지 않소?” “시집을 갔어도 난 평서백부의 셋째 아가씨입니다.” 전북망은 한숨을 내쉬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것입니까?” 왕청여는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전북망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만약 내가 군영으로 돌아가 졸병부터 시작하겠다고 하면 당신 장군부에 남아있을 것이오?” “당신 미쳤습니까?” 왕청여는 벌떡 일어나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군영으로 돌아가 졸병부터 시작하겠다니요? 그럼 무엇으로 장군
왕청여의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자신이 왜 계속 이런 일을 당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이혼은 제일 마지막 방법이었다. 그녀도 떠나고 싶지 않아 시아버지 전기와 큰 아주버니인 전북경에게 설득을 부탁했고 심지어 둘째 노부인에게까지 부탁했다. 둘째 노부인은 민 씨의 일로 실망을 해 줄곧 그들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청여의 말을 들은 그녀는 전북망이 다시 군대에 가는 것을 지지한다고 했다. 사실 왕청여는 둘째 노부인에게 희망을 걸지 않았다. 다만 가문의 어르신이니 그녀가 설득한다면 전북망이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원하지 않는 답을 들은 왕청여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비아냥거리지나 마시지요.” 말을 마친 그녀는 급히 일어나 떠났다. 전기와 전북경도 별로 설득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북망이 졸병이 되는 것을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혼인을 한 후에 두 가문에서 서로 도와 세력을 키우는 게 마땅한 것이지만 장군부엔 더 이상 세력이 없었다. 그러니 계속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왕청여는 한바탕 돌아다녀도 결과가 없자 친정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혼하겠다는 태도를 표명했다. 그녀는 그렇게 큰 장군부의 남자 주인이 졸병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장군부도 언제 황제에게 회수될지 모르는 상황이니 나가서 셋집에 살 수도 없는 것이고. 노부인은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고 사람을 보내 최 씨를 모셔오라고 했다. 하지만 최 씨가 소진소주방으로 가서 모셔오지 못했다.사실 최 씨는 일부러 나간 것이었다. 그녀는 홍이를 통해 왕청여의 계획을 미리 알고 도와줬다가 되려 원망받을까 봐 일부러 피한 것이었다. 최 씨는 툭하면 친정으로 돌아오는 왕청여가 싫었다. 자신의 두 자녀의 혼인 문제도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비록 시집간 딸은 처가의 가족
결국엔 이 씨 부인이 찾아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들이 만 씨 가문에 만근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앞으로 만근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이고 만 씨 가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오.” 송석석과 시만자는 만 씨 가문이 냉담하다고 느꼈지만 이 씨 부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문을 찾는다고 해도 현재의 상황을 바꿀 수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었다. 만근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을 막으려면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말하게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중요했다. 그리고 최 씨는 약속대로 만근의 마음을 풀어주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좁쌀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가 침대에 누워 생기가 하나도 없는 소녀를 보았다. 하지만 창백한 와중에도 소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최 씨는 들어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손수건으로 그녀의 얼굴과 두 손을 닦아준 뒤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때 만근이 입을 열었다. “더럽습니다.” 그건 그녀가 소진소주방으로 온 후 처음 한 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최 씨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더럽긴, 하나도 더럽지 않단다.” 만근은 최 씨의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최 씨는 잠시 후 좁쌀죽을 떠서 어린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자, 죽 한 입 먹자꾸나.” 만근은 입술을 움직였지만 입을 벌리진 않았다. “입 벌리거라.” 최 씨는 도자기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갖다 대고 말했다. “착하지?” 하지만 만근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고 심지어 최 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마치 자신의 더러워진 몸이 눈앞의 화려한 옷을 더럽힐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최 씨가 말했다. “네가 살기 싫다는 걸 나도 알아. 그래서 죽에 독약을 탔으니 편해지고 싶으면 어서 먹으렴. 다 마신 후에 누가 너에게 상처를 줬는지 말해보거라. 우리가 복수를 해줄 테니.” 죽에 독약을 탔다는 말에 만근의 눈엔 서서히 빛이
송석석은 여학의 일로 바빠 시만자가 대신 이 일을 처리하러 갔다. 송석석은 이미 다섯 명의 선생님을 찾았다. 태부의 손녀 안여옥, 민지 장공주의 형수 허부인, 정국태부인, 심청화, 그리고 애초에 민지 장공주와 함께 공부를 했던 무 씨 아가씨였다. 무 씨 아가씨는 올해 서른이 되었고 약혼자는 그녀의 죽마고우였는데 혼례를 준비하던 해에 전쟁터에서 전사했다. 그 후로 무씨 아가씨는 더 이상 혼담을 나누지 않았고 결혼을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심 사형은 유일한 남자이지만 상국에서 유명한 수재였고 인품이 좋고 덕행이 고결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해서 그가 여학의 스승이 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명성 덕분에 더 많은 학생을 모집할 수 있었다. 정국태부인은 사교계에서 은퇴한 지 오래다. 그녀는 젊었을 때 유명한 재녀였고 한때는 부군을 따라 상국의 곳곳을 돌아다녔으며 ‘산하지’라는 책까지 썼다. 오늘날 상국의 지도가 바로 그녀의 부군인 정 대인이 쓴 것이었다. 그들 부부는 상국에서 큰 공을 세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줄곧 외유 중이었는데 정 대인이 세상을 떠나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국태부인은 이미 일흔이 넘었지만 몸은 여전히 건장했다. 단지 접대를 거의 하지 않을 뿐이었다. 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부인은 흔쾌히 승낙했다. 그녀는 노안이 와서 눈은 침침하지만 마음속의 불씨는 아직 꺼지지 않았다며 그 불씨를 학생들에게 물려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심 사형은 송석석이 그를 이용해 학생을 모집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 누구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정해진 선생님은 총 다섯 명이고, 학생은 백 명정도 모집할 계획이었다.지금은 아직도 여자들은 집안일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송석석은 학생을 모집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줄 알았는데 학생을 모집하는 발표를 한지 하루 만에 100명의 인원수가 다 찼다. 여학의 이름은 태후께서 아군여학이라고 지었는데 고상하고 정아 한 여군자라는 뜻이었다
사여묵은 대리사에서 소문을 들은 것이었다. 그는 대리사에서 회의를 하다가 중간에 잠시 휴식하였었는데 그는 진의와 차를 마시러 들어갔고 사람들이 밖에서 하는 말을 들었다. 만주사가 재임한 지 이미 5년이나 되어 승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마침 이부상서인 제 대인에게 외실이 있었는데 지금은 암자로 보내져 딸까지 낳았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제 상서가 여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딸인 만근을 첩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제 상서에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만주사는 원래 파고드는 것을 좋아해서 제 대부인께서 질투를 해서 첩을 들이지 못하는 줄 알고 몰래 딸을 제 상서에게 바칠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는 겨우 제 상서가 매번 휴가마다 부인을 데리고 예불하거나 소풍을 간다는 정보를 받았다. 그래서 미리 문지기를 매수해서 그들이 예불하고 탕천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딸을 보냈다. 하지만 착오가 생겼는데 제 대부인께서 어지러워 제 상서가 예약한 탕천에 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만주사는 이미 딸에게 약을 먹이고 들여보냈는데 어떤 자식이 와서 딸의 몸을 더럽히고 도망을 친 것이었다. 그는 나중에야 제 대인께서 탕천에 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딸이 결백을 잃었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만근은 누구인지 말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헛수고를 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데다 탕천의 사람이 말한 건지 그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만주사는 자신의 앞길에 영향이 있을까 봐 딸이 조신하지 못해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딸을 처리해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었다. 시만자의 말을 들은 송석석은 화가 나서 탁자를 힘껏 내리치자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럼 만주사가 딸의 몸으로 승진을 도모하려 다가 일이 성사되지 않자 딸을 죽이려고 했다는 건가?” 그러자 시만자도 화가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알아본 것이랑 비슷한데 내가 들은 것이 더 상세한 것 같아. 만주사는 딸을 속여 예불하러 간 것이었는데
시만자는 가슴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계속 여식을 해치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합니까? 벼슬길을 위해 여식들을 물건 취급하며 하나하나 희생하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왜 만근을 자결하게 한 걸까요? 그렇게 비열한 생각을 가진 자라면 차라리 만근을 계속...” 시만자는 문득 말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 정말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네요.” 사여묵은 입맛이 없었던 건지 음식을 짚던 젓가락을 그대로 내려놓았다. "그건 그자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일이 밖으로 알려진 이상 화근이 될까 두려워 만근을 죽게 하고 딸이 없었다고 부정해 버리는 거지. 그래야 앞으로도 약점을 잡히지 않으니까. 아마 족보에서도 이미 지워버렸을 것이다."시만자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럼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그냥 자기 여식을 망치도록 놔둬야 한단 말입니까? 관직이란 게 이렇게 더러운데 황제는 이런 일을 신경 쓰지도 않습니까? 목 승상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입니까?"사여묵이 말했다. “조사는 할 수 있다. 대리사에서 조사할 것이다.” 사여묵은 송석석을 힐끗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만근을 끌어들이지 않으려면 다른 방면을 조사하는 수밖에 없어. 어쨌든 예부주사는 변변찮은 관직이야. 부패를 저지르기엔 위치가 부족하고 직무 태만을 따지자니 맡은 일이 대단한 일도 아니다. 결국 사생활이나 품행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이 사람이 밖에서는 꽤 평판이 좋은 편이라. 그가 가진 가장 큰 악행이라면 딸과 여동생을 팔아 자기 배를 불린다는 것이다.” 그러자 시만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렇다면 오직 두 가지 방도 뿐입니다. 첫번째 방법은 만근을 끌어들이는 것인데… 그건 제가 원치 않습니다. 두 번째는 그에게 죄를 덮어씌우는 것입니다!”그러자 송석석이 손가락 관절을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세 번째 방도도 있다. 평생 침상에서 못 일어나게 만드는 거지. 더는 관직에 나갈 수 없게 하고 연명하듯 살아가면서 집사람과
송석석은 직접 금경루를 찾아 금소주를 만났다.금소주는 비록 상인이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정직하며 순수한 면모를 겸비한 인물로 사업에서 철저히 이익을 추구했지만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거액을 기꺼이 기부하며 애국심을 보여왔다. 금소주는 평소 송석석을 존경하며 친분을 쌓고 싶었지만 신분상의 차이로 그녀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직접 찾아왔으니 금소주는 자연스레 극진히 그녀를 대접하며 협조를 약속했다.그는 탕천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여러 관료의 비밀이 얽힌 일이라 그가 직접 조사하기는 어려웠고 단지 어떤 여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하니 그는 망설임 없이 돕겠다고 나서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송 대감, 이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그로부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금소주는 경위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탕천에서 한 귀한 객관이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옥패를 잃어버렸으니 순방영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대부분 물건을 잃어버리면 관청에 신고해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엔 잃어버린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신분을 가진 퇴직 관료였기에 상황이 달랐다. 그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는 소문은 익히 퍼져 있었다.게다가 이 사건 자체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피해자가 요청했으니 순방영은 충분히 조사에 나설 명분이 있었다. 옥산탕천의 이용료는 상당히 비쌌고 항상 하인들이 객관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사건 당일 옥산탕천에 출입했던 사람들을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제상서가 예약했던 곳은 비취탕였지만 그는 사건 당일 절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에 의심에서 제외되었고, 이는 절의 사미가 증언해 주었다.송석석은 먼저 오진과 함께 탕천 일대를 둘러보며 지형을 파악했다.탕천은 절의 동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으며, 약 3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크고 웅장한 정문이 세워져 있고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