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석은 직접 금경루를 찾아 금소주를 만났다.금소주는 비록 상인이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나고 정직하며 순수한 면모를 겸비한 인물로 사업에서 철저히 이익을 추구했지만 나라에 어려움이 닥치면 거액을 기꺼이 기부하며 애국심을 보여왔다. 금소주는 평소 송석석을 존경하며 친분을 쌓고 싶었지만 신분상의 차이로 그녀를 쉽게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직접 찾아왔으니 금소주는 자연스레 극진히 그녀를 대접하며 협조를 약속했다.그는 탕천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여러 관료의 비밀이 얽힌 일이라 그가 직접 조사하기는 어려웠고 단지 어떤 여인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송석석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하니 그는 망설임 없이 돕겠다고 나서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송 대감, 이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곧 좋은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그로부터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금소주는 경위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탕천에서 한 귀한 객관이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온 옥패를 잃어버렸으니 순방영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는 것이었다.대부분 물건을 잃어버리면 관청에 신고해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엔 잃어버린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신분을 가진 퇴직 관료였기에 상황이 달랐다. 그의 신분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단한 인물이라는 소문은 익히 퍼져 있었다.게다가 이 사건 자체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지만 피해자가 요청했으니 순방영은 충분히 조사에 나설 명분이 있었다. 옥산탕천의 이용료는 상당히 비쌌고 항상 하인들이 객관을 보필하고 있었기에 사건 당일 옥산탕천에 출입했던 사람들을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제상서가 예약했던 곳은 비취탕였지만 그는 사건 당일 절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에 의심에서 제외되었고, 이는 절의 사미가 증언해 주었다.송석석은 먼저 오진과 함께 탕천 일대를 둘러보며 지형을 파악했다.탕천은 절의 동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으며, 약 3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크고 웅장한 정문이 세워져 있고
워낙 이 일을 모르고 있던 제상서는 송석석의 말을 듣고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는 이미 이런 일에서 실수를 저질렀고 외실이 낳은 사생아는 그의 오점이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면 그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고 사람들은 그가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화가 난 제상서는 바로 그 시위병을 끌어냈다. 시위병은 진삼이라 불리는 사람으로 부모도 제씨 가문 일을 맡고 있기에 학문을 익혀 시위병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만가가 문간방에 제상서가 탕천으로 가는 사실을 염탐했다는 소식을 듣고 제상서 부부를 따라 절에 갔다가 그가 탕천에 가지 않자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만근을 더럽힌 사람이 바로 진삼이었기에 제상서는 당장이라도 진삼을 죽이고 싶었다. 게다가 송석석은 제상서의 외실을 파내고 사생아까지 진숙의 손에 넘긴 여자였다. 고고한 국장이자 이품 이부상서로 수많은 관리의 앞날이 그의 손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그는 송석석을 두려워했고 그녀 앞에서 감히 머리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여도 이보다 덜했을 것이다.송석석은 그의 앞에서 진삼을 발로 걷어찼는데 그 힘은 당장이라도 진삼의 목숨을 앗아갈 듯했다. 진삼은 피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져 배를 움츠린 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제상서는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송석석이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제 대인께서 알아서 하십시오. 제대로 된 설명은 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제상서는 얼굴을 한 번 쓱 만지더니 답답한 듯 긴숨을 내쉬었다. “하… 진삼이의 잘못이 맞긴하나 여식을 팔아먹은 본인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그건 제 대인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진삼을 어찌 해결할 것일지만 말씀하십시오.” 제상서는 진삼을 죽이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봐왔던 아이라 마음이 독해지지 못했다. 진삼은 배를 끌어안은 채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소인 잠시 귀신에 홀려 부
송석석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질책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글쎄요. 제상서께서는 그 질책을 견뎌낼 자신이 있으신 겁니까?"제상서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는 지금 그저 조용히 지내길 바랄 뿐이었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자신에게 쏠리는 건 피하고 싶었다. 하필이면 그의 막내 여식이 진영실의 곁으로 돌아와 양육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태자도 정해지지 않은 시기에 만약 외척이 일을 저질러 체면을 구긴다면 대황자에게도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다. 어쨌든 진삼은 고작 하인일 뿐이고 여태 그를 잘 봐줬기에 호위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제상서가 결정을 내렸다. 그의 눈빛에 서늘한 살기가 떠오르자 진삼은 온몸을 떨며 머리를 바닥에 찧어댔다."대인,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부끄러운 짓을 저질렀으니 죽어도 싸다 하시겠지만 제발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그러자 제상서는 매섭게 꾸짖었다."이 자식이, 감히 살려달라고?! 죄 없는 여인을 해쳤으니 네놈 목숨 하나로도 부족할 지경이다!"진삼은 흐느끼며 소리쳤다."대인, 그 여인에게 어찌 죄가 없단 말입니까? 만가에서는 그 여인을 대인께 바치려고 보낸 게 아닙니까? 대인께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셨지만 저는 순간의 실수로... 허나 그 여인은 최음제를 먹었고 저는 그 여인을 구하려 했던 겁니다... 그러니 죽을죄는 아닙니다!"제상서는 만귀가 더더욱 증오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오래전에 만귀의 딸을 첩으로 삼으라는 제안을 거절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런 비열한 수를 쓸 줄이야.제상서는 송석석을 보며 다시금 결심을 굳혔다."왕비께서 한마디만 해주십시오. 목숨을 거둬야 한다면 곧바로 그리하겠습니다."송석석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어찌 됐든 제상서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처분할지는 제상서에게 달렸습니다.” 교활한 송석석의 모습에 제상서는 속이 끓어올랐다. 진삼의 목숨을 원하면서도 이를 직접 밝히지 않으니 어떤 결과가 생기든 그녀는 책임을 회피할 명분을 가진 셈이었다.송석석은 북명왕부를 철통
줄곧 마당에 서 있던 제대부인은 송석석이 나오자 몸을 낮춰서 배웅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한 제대부인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그 아씨는 지금 어떠신지요?” 그녀는 함께 문까지 나서며 물었다. "지금 공방에 머무르고 있으나 아직도 자결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송석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참으로 죄악이군요."제대부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문 앞까지 동행했다."왕비님, 그 아씨를 돕는 데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지요. 고맙습니다, 부인."제대부인은 다시 몸을 낮추어 인사하며 송석석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배웅했다.그녀는 문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때 진승이 아내와 함께 다가와 진삼을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대인에게 부탁하거라. 이 일까진 내가 관여할 수 없다."진승의 아내는 제대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흐느끼며 말했다."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는 아들이란 단 하나뿐입니다. 대가 끊어질 수는 없습니다."제대부인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스스로 죄를 지었는데 누구를 탓한단 말이냐?"그녀는 치맛자락을 힘껏 당기고 뒤돌아섰다. 진승의 아내는 바닥에 주저앉아 절규했지만 제대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제대부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그러자 동희가 다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부인, 정말 보고만 계실 겁니까? 이러다 아래것들까지 마음이 떠나면 어찌합니까?” 제대부인은 여태 하인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는 그녀의 성품이 너그러워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집안 노비들을 잡아두어 제부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배려였다.평소라면 그녀는 죄를 물은 뒤에도 은혜를 베풀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씨 일가는 제부에서 오래 지내온 사람들로 제부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악심을 품는다면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동희는
다음 날, 순방영과 경위대는 예부 만주사의 집에 자객이 잠입해 만주사를 심각한 부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의원은 완치되더라도 앞으로 먹고 마시며 배설까지도 모두 침상에서 해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천자의 발밑에서 조정 관리에게 이렇게 과감한 폭행을 가하다니, 이는 천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였다.송석석이 조사를 거쳐 인증을 찾은 바로는 경성으로 온 한 무림인사가 만귀가 자기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가 폭행을 가했다는 것이다. 추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만근에 대한 외부의 추잡한 소문은 모두 거짓으로 그녀의 정조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만귀는 이 헛된 소문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딸이 정조를 잃었다고 오해하여 그녀를 집에서 내쫓았다.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은 소녀는 소문에 상처받은 끝에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그녀가 이젠 세상을 떠났기에 공방이 대신 장례를 치러주었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만귀를 향한 비난은 점점 쇄도해졌다.사람들은 그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동시에 그 무림인의 정의로운 행동을 칭송했다.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만근의 무덤 앞에서 향을 피우며 그녀가 다음 생에는 좋은 운명을 타고나길 기원했다.그것은 만근의 의관총이었다. 그 의관총은 그녀가 생을 마감하려 했을 때 입고 있던 옷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공방의 스승인 석소사저와 라사저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18년 인생을 닮고 있었다. 시만자는 그녀를 위해 사금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비단처럼 아름답게 펼쳐질 삶을 의미하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현재 그녀는 송석석과 심만자와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의관총 앞에 모여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자 사금이 시만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여태 살아오며 저를 이리도 아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자결하려 한다면 목숨을 걸고 절 지켜주신 두 분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사람들의
잠시 고민하던 시만자는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만나러 가지 못한 것도 미안하니 서신을 써서 은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긴, 돈을 써주는 것도 효도를 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서신을 써 오겠습니다.” 연왕이 웃으며 말했다. “급할 것 없다. 며칠 뒤에 갈 생각이니 서신은 내일 주도록 하거라. 자매끼리 잡담이나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송석석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졌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건가? 시만자는 고개를 돌린 채 웃었는데 그 웃음은 왠지 사악해 보였다. “그러지요.” 송석석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지?’시만자는 마치 송석석의 경고를 느낀 것처럼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계속 시만자를 주시하는 연왕의 모습에 사여묵은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아직도 시만자한테서 이득을 얻어 시씨 가문을 조종하려는 속셈인가? 게다가 보아하니 사심도 있는 것 같군. 천박한 사람 같으니라고!’사여묵은 이전부터 연왕을 무시했기에 당연히 식사 제안도 하지 않았고, 어쩌다 쉬는 날 연왕을 마주해야 하는 건 정말 고역 같은 일이었다. “황숙은 언제 연주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사여묵이 물었다. “사흘 뒤면 떠날 것이다. 폐하께도 이미 상주 드렸다.” 연왕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숙청제가 승낙하지 않을까 봐 감히 진성을 떠나지 못했는데 의외로 숙청제는 흔쾌히 찬성했다. 그러자 사여묵은 웃으며 말했다. “조카는 공무로 배웅하러 못 갈 것 같으니, 미리 황숙께서 평안히 가시길 기원드립니다.” 그러자 연왕이 웃으며 말했다. “굳이 배웅할 필요 없다.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연주로 찾아오거라.”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꼭 그러겠습니다.” 얄미운 일가를 보낸 뒤 송석석은 시만자의 머리를 잡고 편청으로 들어갔다. “너 아주 주견이 있구나.” 송석석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쳐다봤다.그러자 시만자는 웃으며 말했다. “주견이 없는 게지. 네가 승낙하지
시민주에 대한 시만자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시만자는 채찍을 휘두르며 시민주를 쫓아냈고 시민주는 머리를 감싼 채 쥐새끼처럼 도망쳤다. 연왕의 음흉한 속셈을 잘 알고 있는 송석석은 연왕이 진성을 떠나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홍시를 보내 혹시라도 시만자가 연왕부에 가지 않는지 감시하게 했다. 며칠 연속 감시했지만 시만자는 오직 소진 소주방에만 드나들 뿐 연왕부에는 가지 않았다. 그제야 송석석도 조금 안심되었다. 소진 소주방과 여학은 점차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여학은 송석석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여학에 들어와 여인들은 사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다들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루 종일 다과나 자수품, 혹은 선물로 귀족 아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뿐이었다. 일부 귀족 아씨들은 작은 관직의 여식들에겐 오만하게 굴며 차츰 파벌을 형성했다.하여 진심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여인들은 오히려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또 일부는 훗날 혼인을 하게 되면 가정을 책임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정국태부인에게 예법을 배우거나 가정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개학 초기와 완전히 달랐다. 당시에 많은 이들은 심청화의 명성을 듣고 여학에 왔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심청화에게 그림을 부탁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의 글 한 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설령 퇴학을 하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송희희는 훈장으로서 이런 문제를 항상 처리해야 했다.백 명도 넘는 여인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 정말 골치가 아팠다. 훌륭한 가문의 여식들이 어찌 이렇게 시끄럽게 군단 말인가? 규방에서 배운 예법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송석석은 급히 꾸짖기보다는 우선 누가 앞장서서 소란을 일으키는지 조사를 했고 조사 끝에 문제의 주동자 몇 명을 알아냈다. 첫 번째는 제 황후의 작은 사촌 동생인 제자예였다. 그녀는 올해 열다섯 살로 갓 성년이 되었고, 아버지는 제 상서의 친동생인 태상시경이다.두 번째는 전
때로는 여성 간의 악의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안태부는 청류의 수장이지만 안여옥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녀들은 안여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런 간단한 문제라면 송석석은 어떻게든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아군여학을 망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더 컸다. 현재로서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제부의 여식들로 보였지만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약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여학을 건드리려 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송석석은 그녀가 이번 일로 상처를 받았을까 봐 우선 안여옥을 달래주기로 했다. 안여옥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글씨 연습장을 한 장씩 넘기며 살피던 중이라 송석석이 다가오는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송석석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 속에 담긴 억눌린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훈장, 언제 오셨소? 아무래도 내가 실례를 범한 것 같군.”송석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안주강, 앉으시오.” 자리에 앉은 뒤 송석석은 그녀 앞에 놓인 글씨 연습장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방금까지도 안여옥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학도들이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않은게요?”안여옥은 첫 몇 장을 송석석에게 건네주며 설명을 시작했고 송석석은 안여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글을 더 단정히 쓰게 하려고 천자문을 따라 쓰도록 했소. 헌데 이 몇 명은 천자문이 아닌 전고를 마치 낙서처럼 썼더군. 날 상대로 일부러 이러는 게 뻔하오!” 송석석은 몇 장을 넘겨 살펴보았는데 적힌 전고는 모두 같은 내용이며 전조의 나여옥이라 불리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난을 싫어하고 부귀영화를 탐하는 그녀는 약혼자의 가문이 몰락하자 단호히 파혼을 요구했지만 3년 후 약혼자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전조 승상의 여식과 혼인해 나여옥은 그만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결국 수식루에서 약혼자의 부인을 만나 비녀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했고 그녀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