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마당에 서 있던 제대부인은 송석석이 나오자 몸을 낮춰서 배웅을 했다. 이 모든 상황을 목격한 제대부인의 표정은 무겁기만 했다. “그 아씨는 지금 어떠신지요?” 그녀는 함께 문까지 나서며 물었다. "지금 공방에 머무르고 있으나 아직도 자결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송석석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참으로 죄악이군요."제대부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문 앞까지 동행했다."왕비님, 그 아씨를 돕는 데 필요한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지요. 고맙습니다, 부인."제대부인은 다시 몸을 낮추어 인사하며 송석석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배웅했다.그녀는 문 앞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이때 진승이 아내와 함께 다가와 진삼을 살려달라고 무릎을 꿇고 애원하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대인에게 부탁하거라. 이 일까진 내가 관여할 수 없다."진승의 아내는 제대부인의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흐느끼며 말했다."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저희는 아들이란 단 하나뿐입니다. 대가 끊어질 수는 없습니다."제대부인의 눈에 분노가 스쳤다."스스로 죄를 지었는데 누구를 탓한단 말이냐?"그녀는 치맛자락을 힘껏 당기고 뒤돌아섰다. 진승의 아내는 바닥에 주저앉아 절규했지만 제대부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제대부인은 머리가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그러자 동희가 다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 “부인, 정말 보고만 계실 겁니까? 이러다 아래것들까지 마음이 떠나면 어찌합니까?” 제대부인은 여태 하인들에게 관대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는 그녀의 성품이 너그러워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집안 노비들을 잡아두어 제부의 명성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배려였다.평소라면 그녀는 죄를 물은 뒤에도 은혜를 베풀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진씨 일가는 제부에서 오래 지내온 사람들로 제부의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악심을 품는다면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동희는
다음 날, 순방영과 경위대는 예부 만주사의 집에 자객이 잠입해 만주사를 심각한 부상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의원은 완치되더라도 앞으로 먹고 마시며 배설까지도 모두 침상에서 해야 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천자의 발밑에서 조정 관리에게 이렇게 과감한 폭행을 가하다니, 이는 천하를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였다.송석석이 조사를 거쳐 인증을 찾은 바로는 경성으로 온 한 무림인사가 만귀가 자기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가 폭행을 가했다는 것이다. 추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만근에 대한 외부의 추잡한 소문은 모두 거짓으로 그녀의 정조는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만귀는 이 헛된 소문을 그대로 믿고 자신의 딸이 정조를 잃었다고 오해하여 그녀를 집에서 내쫓았다.아버지에게 신뢰를 잃은 소녀는 소문에 상처받은 끝에 삶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강물에 몸을 던졌다.그녀가 이젠 세상을 떠났기에 공방이 대신 장례를 치러주었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만귀를 향한 비난은 점점 쇄도해졌다.사람들은 그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동시에 그 무림인의 정의로운 행동을 칭송했다.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만근의 무덤 앞에서 향을 피우며 그녀가 다음 생에는 좋은 운명을 타고나길 기원했다.그것은 만근의 의관총이었다. 그 의관총은 그녀가 생을 마감하려 했을 때 입고 있던 옷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공방의 스승인 석소사저와 라사저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것이었으며 그녀의 18년 인생을 닮고 있었다. 시만자는 그녀를 위해 사금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비단처럼 아름답게 펼쳐질 삶을 의미하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현재 그녀는 송석석과 심만자와 함께 마차에 타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의관총 앞에 모여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이 보이자 사금이 시만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여태 살아오며 저를 이리도 아껴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가 다시 자결하려 한다면 목숨을 걸고 절 지켜주신 두 분과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사람들의
잠시 고민하던 시만자는 괜히 죄책감이 들었다. 만나러 가지 못한 것도 미안하니 서신을 써서 은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다. 하긴, 돈을 써주는 것도 효도를 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러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곧 서신을 써 오겠습니다.” 연왕이 웃으며 말했다. “급할 것 없다. 며칠 뒤에 갈 생각이니 서신은 내일 주도록 하거라. 자매끼리 잡담이나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송석석의 눈빛은 순간 차가워졌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건가? 시만자는 고개를 돌린 채 웃었는데 그 웃음은 왠지 사악해 보였다. “그러지요.” 송석석이 그녀를 째려보았다. ‘대체 뭘 하려고 그러지?’시만자는 마치 송석석의 경고를 느낀 것처럼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계속 시만자를 주시하는 연왕의 모습에 사여묵은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아직도 시만자한테서 이득을 얻어 시씨 가문을 조종하려는 속셈인가? 게다가 보아하니 사심도 있는 것 같군. 천박한 사람 같으니라고!’사여묵은 이전부터 연왕을 무시했기에 당연히 식사 제안도 하지 않았고, 어쩌다 쉬는 날 연왕을 마주해야 하는 건 정말 고역 같은 일이었다. “황숙은 언제 연주로 돌아가실 생각입니까?” 사여묵이 물었다. “사흘 뒤면 떠날 것이다. 폐하께도 이미 상주 드렸다.” 연왕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숙청제가 승낙하지 않을까 봐 감히 진성을 떠나지 못했는데 의외로 숙청제는 흔쾌히 찬성했다. 그러자 사여묵은 웃으며 말했다. “조카는 공무로 배웅하러 못 갈 것 같으니, 미리 황숙께서 평안히 가시길 기원드립니다.” 그러자 연왕이 웃으며 말했다. “굳이 배웅할 필요 없다. 시간이 나면 언제든지 연주로 찾아오거라.” 사여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꼭 그러겠습니다.” 얄미운 일가를 보낸 뒤 송석석은 시만자의 머리를 잡고 편청으로 들어갔다. “너 아주 주견이 있구나.” 송석석은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쳐다봤다.그러자 시만자는 웃으며 말했다. “주견이 없는 게지. 네가 승낙하지
시민주에 대한 시만자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시만자는 채찍을 휘두르며 시민주를 쫓아냈고 시민주는 머리를 감싼 채 쥐새끼처럼 도망쳤다. 연왕의 음흉한 속셈을 잘 알고 있는 송석석은 연왕이 진성을 떠나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홍시를 보내 혹시라도 시만자가 연왕부에 가지 않는지 감시하게 했다. 며칠 연속 감시했지만 시만자는 오직 소진 소주방에만 드나들 뿐 연왕부에는 가지 않았다. 그제야 송석석도 조금 안심되었다. 소진 소주방과 여학은 점차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여학은 송석석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여학에 들어와 여인들은 사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다들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루 종일 다과나 자수품, 혹은 선물로 귀족 아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뿐이었다. 일부 귀족 아씨들은 작은 관직의 여식들에겐 오만하게 굴며 차츰 파벌을 형성했다.하여 진심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여인들은 오히려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또 일부는 훗날 혼인을 하게 되면 가정을 책임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정국태부인에게 예법을 배우거나 가정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개학 초기와 완전히 달랐다. 당시에 많은 이들은 심청화의 명성을 듣고 여학에 왔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심청화에게 그림을 부탁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의 글 한 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설령 퇴학을 하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송희희는 훈장으로서 이런 문제를 항상 처리해야 했다.백 명도 넘는 여인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 정말 골치가 아팠다. 훌륭한 가문의 여식들이 어찌 이렇게 시끄럽게 군단 말인가? 규방에서 배운 예법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송석석은 급히 꾸짖기보다는 우선 누가 앞장서서 소란을 일으키는지 조사를 했고 조사 끝에 문제의 주동자 몇 명을 알아냈다. 첫 번째는 제 황후의 작은 사촌 동생인 제자예였다. 그녀는 올해 열다섯 살로 갓 성년이 되었고, 아버지는 제 상서의 친동생인 태상시경이다.두 번째는 전
때로는 여성 간의 악의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안태부는 청류의 수장이지만 안여옥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녀들은 안여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런 간단한 문제라면 송석석은 어떻게든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아군여학을 망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더 컸다. 현재로서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제부의 여식들로 보였지만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약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여학을 건드리려 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송석석은 그녀가 이번 일로 상처를 받았을까 봐 우선 안여옥을 달래주기로 했다. 안여옥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글씨 연습장을 한 장씩 넘기며 살피던 중이라 송석석이 다가오는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송석석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 속에 담긴 억눌린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훈장, 언제 오셨소? 아무래도 내가 실례를 범한 것 같군.”송석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안주강, 앉으시오.” 자리에 앉은 뒤 송석석은 그녀 앞에 놓인 글씨 연습장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방금까지도 안여옥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학도들이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않은게요?”안여옥은 첫 몇 장을 송석석에게 건네주며 설명을 시작했고 송석석은 안여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글을 더 단정히 쓰게 하려고 천자문을 따라 쓰도록 했소. 헌데 이 몇 명은 천자문이 아닌 전고를 마치 낙서처럼 썼더군. 날 상대로 일부러 이러는 게 뻔하오!” 송석석은 몇 장을 넘겨 살펴보았는데 적힌 전고는 모두 같은 내용이며 전조의 나여옥이라 불리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난을 싫어하고 부귀영화를 탐하는 그녀는 약혼자의 가문이 몰락하자 단호히 파혼을 요구했지만 3년 후 약혼자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전조 승상의 여식과 혼인해 나여옥은 그만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결국 수식루에서 약혼자의 부인을 만나 비녀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했고 그녀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학도들의 글을 살폈다. 그녀가 글을 쓰게 한 이유는 학도들이 먼저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대부분의 글씨는 그럭저럭 봐줄 만 했고, 심지어는 정말 훌륭한 몇 여인도 있었다. 글씨가 단정하고 꼼꼼한 것이 단 한 획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송석석이 물었다. “기분이 언짢아 보였던 연유가 이거였소? 그렇다면 그녀들이 안주강과 방시원의 일로 떠드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오?” 안여옥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입이 그녀들에게 달린 것인데 내가 어찌 막는단 말이오? 밥을 못 먹게 하는 것도 아니고 잠을 못 자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내 살을 베어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경 쓸 연유가 없소.” 안여옥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전조의 이야기를 끌어다 써서 날 비난하다니, 나름 참신하지 않소?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탐하는 추하고 흉악한 인간을 운운하는 단조로운 비난보다 훨씬 괜찮소.”그 말에 송석석은 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세간의 악의적인 풍문을 이토록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다니, 얼마나 강한 마음가짐과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할까?그러다 안여옥은 문득 걱정이 스쳤다.“헌데 혹 방 장군께는 피해가 가지 않겠소?”송석석은 담담히 대답했다.“걱정할 것 없소. 이런 일이 보통 사내들에게 상처를 주진 못하오.”잠시 생각하던 송석석이 이어 말했다. “게다가 그녀들이 지어낸 이야기에서 방 장군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소. 오히려 평판이 더 올라갔 셈이지. 요즘은 그의 군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그가 태부의 손녀를 떠나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야기하더군.”연여옥은 씁쓸한 듯 미소를 지었다.“영향이 없다면 다행이오. 허나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오. 방 장군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높은 명망을 얻어야 할 사람인데 이렇게 애정 문제로 인해 군공이 가려지고 있으니 말이오. 참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송석석은 연여옥이 이런 이야기를 하며 아쉬움을 느
여인들은 하나 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방금 말하던 여인은 연분홍 비단 테두리가 둘린 중의와 청록색 백접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사랑스러우면서도 귀티가 흘렀다. 그리고 목에는 영락을 걸고 허리에는 파란색 향낭이 달려 있었는데 향낭네는 ‘제’자가 수놓아져 있어 한눈에 그녀의 신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옆에 있던 여인들도 보통 가문 여식들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웃었지만 송석석은 오히려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한창 웃고 떠들기 좋아하는 나이인 것 같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한 시진 동안 실컷 웃거라. 한 시간이 지나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가 손뼉을 치자 모퉁이에서 홍시의 자매인 만소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공손히 손을 모으며 "왕비님"이라고 하며 인사를 건넸다. 홍시, 청미, 비윤, 만소는 평사저가 진성에 두고 간 사람들인데 홍시는 주로 조사를 맡고 만소는 그녀 옆을 따랐는데 굳이 그녀가 필요한 상황은 많이 없었다.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다. 비록 안여옥에게 직접 처리하라고 했지만 그녀를 건드렸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송석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소야. 한 시진 동안 웃고 있는지 잘 지켜보거라. 만약 한 시진을 채우지 못한다면 아군 여학에서 당장 내쫓거라.” 그러자 제자예는 싸늘한 얼굴로 송석석을 가로막았다. “우린 정식으로 명첩을 가지고 입학했는데 지금 내쫓겠다고 하신 겁니까?”"아군 여학의 규율을 지키지 않고 감히 훈장을 조롱하고 도발한 것은 퇴학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일이다." 말을 마친 송석석은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그러자 제자예가 억울한 표정으로 솔리 질렀다. “저희가 언제 조롱했습니까? 뭐가 찔리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송석석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찔리는 건 없다만 넌 곧 웃음거리가 될 것이야. 여학에서 쫓겨난다면 최소 한 달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테야.””제 조부는 제제사이시고, 제 언니는 황후마마이십니다. 부친은 예부상서로 상국 관료의 승진을
제자예는 얼굴이 얼어붙은 채 마지못해 한 시진 동안 웃었다. 그 후 그녀는 바로 정국태부인에게 고하러 갔다. 국태부인은 인자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처음에 그녀는 예의, 다과, 장부 관리, 사람 부리는 법과 하인을 다스리는 법 등만 가르쳤는데, 이는 이들 학도들의 출신 배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귀한 집안에 시집가든 낮은 집안으로 시집가든 가정을 맡아야 할 일이 많을 테니 말이다.예의는 대부분 이미 배웠지만 그래도 가볍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것은 그녀가 학생들에게 나중에 손님을 대하거나 타인을 응대할 때 실례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장부를 읽고 사람을 관리하는 것은 여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인 지식이다.전통상 여성은 집안일을 맡아야 하기에 기본적인 능력을 익혀야만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었다.그녀의 교육 방식은 현실적이었다.여인은 사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동등한 대화를 나눌 자격조차 없었다.국태부인의 교육은 제자예가 자신과 같은 귀족 출신은 당연히 지위가 다르고 시녀는 누구의 하인이라도 하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그녀는 국태부인이 그녀의 편들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러나 국태부인은 천천히 온화한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그렇다면 훈장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제자예는 깜짝 놀랐다. 국태부인이 자신들의 편들지 않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말했다.“국태부인, 설령 훈장이라 할지라도 제멋대로 학생을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국태부인은 표정이 싸늘해졌다.“모욕? 내가 보기에는 훈육이었다. 학도라면 당연히 선생의 말을 들어야지. 왕비는 아군여학의 훈장이다. 나 역시 그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녀를 비웃었다지? 이는 선생에 대한 불경이다. 불경이 어떤 죄목인지 너희 조부께 여쭤보거라. 훈장이 오늘 너희들에게 내린 처벌은 가벼운 편이다. 만약 나였다면 오늘 당장 너희들을 떠나게 했을 것이다.”국태부
임양운은 한동안 경사에 계속 머물렀다. 예전에는 신화기 연구에 몰두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진성의 일을 놓을 수 없다는 핑계로 더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송석석을 걱정하고 있었다.처음 신화기를 연구할 때, 특별히 사람을 보내 북당으로 가서 처방을 받았던 것도 남강과 송회안, 그리고 결국은 사여묵과 송석석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부로서 제자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그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임양운은 항상 자신이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뛰어났고, 인품마저 매우 훌륭했다. 그 누구도 그를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송석석만은 걱정이 되었다. 송석석은 놀고 싶어만 하는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술을 출중하게 익힐 만큼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펼쳐진 자유롭고 밝은 웃음을 볼 때마다 임양운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강제로 빠르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언제나 마음의 긴장을 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받은 상처들은 시간만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도와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사여묵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웃게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결핍까지는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양운은 아픈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러고는 궁에 가서 황제와 대면했다.한때 번성했던 임씨 가문에는 지금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제자들만 있을 뿐 자식이나 후손은 없었기 때문이다. 임왕 임병일은 당시 한때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그 공로가 너무 커서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아마도 여러 가지 은혜와 원한이 있었을 것이지만, 숙청제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임씨 가문은 결국 사씨 가
거리를 돌며 공개적으로 조롱받는 동안, 영군왕은 완전히 무너져 미쳐버린 듯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 무지하고 어리석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백성들이 조정에 속아 폭군을 현명한 군주로 착각하였으며, 자신 사청엄만이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쉰 목소리는 백성들의 저주 속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외치며 요참형조차 그에게는 너무 관대하다며, 차라리 천 번의 칼질과 만 번의 난도질을 하는 능지처참으로 갚아야 한다고 외쳤다.연왕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억울함과 사청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만약 사청엄이 자신의 사람들을 배반시키지 않았다면 자신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사청엄은 어둠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독사처럼 그가 모르는 사이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사청엄 때문에 그는 이제 단순한 역적이 아니라 어리석은 역적으로 전락했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을 남에게 넘겨야 했고,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묶여 조정의 군대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훗날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이름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그는 평생 동안 권력과 명성을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형틀에 묶여 처형대로 끌려가는 순간, 그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증오와 조롱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그는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이 모든 순간을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의 뜻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고, 아내를 맞이하고 첩을 들인 것조차 모두 이용을 위한 수단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마음껏 사랑해보려 했지만, 그로 인해 무상과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눈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는 군중 속에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옷을 입은 그녀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드디어 대청산이 시작되었다.대리사와 경위 형부의 공동 조사 끝에, 연왕과 영군왕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사실로 밝혀졌다.모두 죄목이 확실했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의 모든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다.연왕 일가는 정보를 제공한 공을 세운 사여령을 제외하고 모두 황실 감옥에 갇혔다.사여령은 황실 족보에서 이름이 제외되었다. 여전히 대리사에서 감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진이는 그를 일시적으로 직무에서 배제시켰고, 처분이 끝난 후 복직시키겠다고 했다.진이는 선의를 베풀어 그에게 앞으로 이 직책을 계속 맡고 싶다면 황실 감옥에 가까이 가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반성하라고 당부했다.진이는 사여령이 어리석기는 해도 성실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우유부단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진이는 여전히 그를 돌보아 주려 했다.진이는 송석석에게도 사여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송석석은 사여령이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아 무슨 일이 생겨도 반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랐지만, 다행히 적모 밑에서 자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아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사여령을 특별히 돌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여령이 진성에 머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황제를 안심시킬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이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여령이 이번 처벌을 피할 수 있던 이유도 연왕의 사병 정보를 제공한 덕이었지만, 일이 지나간 후 황제가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가 그의 직책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자신의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그가 진성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조정 회의에서 숙청제는 영군왕과 연왕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죄목을 발표했다. 그들의 죄목은
추몽의 눈빛에 섬뜩함이 스쳤다."좋습니다. 위선적인 말 어디 한번 들어보지요."숙청제는 원래 의심이 많아 항상 북명황실을 경계해 왔다. 송석석에게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반기를 들겠냐고 묻는 것도, 비록 그녀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송석석이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묻는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녀는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아직 송석석이 대답도 하기 전에, 추몽은 비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먼저 아첨하며 숙청제를 치켜세워 보시지요. 그의 정책이 여성을 얼마나 잘 대우했는지 떠들어 보십시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마음껏 칭송하시지요."송석석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비꼬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럴듯하게 가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상이 어리석고 폐쇄적이라 당신의 기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인정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당신 개인의 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지도 못하며,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들에게 원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더 큰 혐오와 배척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를 안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꾸짖고 비난할 것입니다."추몽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그는 이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이라는 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니 제가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시는군요." 추몽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송석석이 차분히 대답했다."살 길이 막혔다는 것과 대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같은
제제사와 추몽은 대리사의 심문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송석석은 서리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리 않았기에 그들이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더라도 송석석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한숨 소리 전부 말이다.하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 시선을 몇 번 마주하지도 않았다. 마치 강제로 한자리에 앉혀진 낯선 이들처럼 거리감과 냉담함이 느껴졌다.송석석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그 어색함을 어쩔 수 없이 함께 견뎌야 했다.오랜 침묵 끝에 제제사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왜 이런 짓을 한 거냐?”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추몽은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굳이 따져 묻을 필요가 있나?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는 법이지.”“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 아니더냐?” 제제사가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로 묻자, 추몽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어차피 이 생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선황제가 그러지 않았나? 나는 패역한 자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가진 생각들이 진정 패역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짜로 패역한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른 모든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제제사가 그의 시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너희 반란으로 수천수만 명이 죽었고, 피비린내는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네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다.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겼느냐?”추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심히 차갑고 냉담해 보였다.“추몽,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냐?” 제제사가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