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여성 간의 악의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안태부는 청류의 수장이지만 안여옥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녀들은 안여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런 간단한 문제라면 송석석은 어떻게든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아군여학을 망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더 컸다. 현재로서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제부의 여식들로 보였지만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약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여학을 건드리려 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송석석은 그녀가 이번 일로 상처를 받았을까 봐 우선 안여옥을 달래주기로 했다. 안여옥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글씨 연습장을 한 장씩 넘기며 살피던 중이라 송석석이 다가오는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송석석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 속에 담긴 억눌린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훈장, 언제 오셨소? 아무래도 내가 실례를 범한 것 같군.”송석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안주강, 앉으시오.” 자리에 앉은 뒤 송석석은 그녀 앞에 놓인 글씨 연습장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방금까지도 안여옥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학도들이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않은게요?”안여옥은 첫 몇 장을 송석석에게 건네주며 설명을 시작했고 송석석은 안여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글을 더 단정히 쓰게 하려고 천자문을 따라 쓰도록 했소. 헌데 이 몇 명은 천자문이 아닌 전고를 마치 낙서처럼 썼더군. 날 상대로 일부러 이러는 게 뻔하오!” 송석석은 몇 장을 넘겨 살펴보았는데 적힌 전고는 모두 같은 내용이며 전조의 나여옥이라 불리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난을 싫어하고 부귀영화를 탐하는 그녀는 약혼자의 가문이 몰락하자 단호히 파혼을 요구했지만 3년 후 약혼자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전조 승상의 여식과 혼인해 나여옥은 그만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결국 수식루에서 약혼자의 부인을 만나 비녀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했고 그녀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학도들의 글을 살폈다. 그녀가 글을 쓰게 한 이유는 학도들이 먼저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대부분의 글씨는 그럭저럭 봐줄 만 했고, 심지어는 정말 훌륭한 몇 여인도 있었다. 글씨가 단정하고 꼼꼼한 것이 단 한 획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송석석이 물었다. “기분이 언짢아 보였던 연유가 이거였소? 그렇다면 그녀들이 안주강과 방시원의 일로 떠드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오?” 안여옥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입이 그녀들에게 달린 것인데 내가 어찌 막는단 말이오? 밥을 못 먹게 하는 것도 아니고 잠을 못 자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내 살을 베어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경 쓸 연유가 없소.” 안여옥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전조의 이야기를 끌어다 써서 날 비난하다니, 나름 참신하지 않소?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탐하는 추하고 흉악한 인간을 운운하는 단조로운 비난보다 훨씬 괜찮소.”그 말에 송석석은 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세간의 악의적인 풍문을 이토록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다니, 얼마나 강한 마음가짐과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할까?그러다 안여옥은 문득 걱정이 스쳤다.“헌데 혹 방 장군께는 피해가 가지 않겠소?”송석석은 담담히 대답했다.“걱정할 것 없소. 이런 일이 보통 사내들에게 상처를 주진 못하오.”잠시 생각하던 송석석이 이어 말했다. “게다가 그녀들이 지어낸 이야기에서 방 장군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소. 오히려 평판이 더 올라갔 셈이지. 요즘은 그의 군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그가 태부의 손녀를 떠나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야기하더군.”연여옥은 씁쓸한 듯 미소를 지었다.“영향이 없다면 다행이오. 허나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오. 방 장군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높은 명망을 얻어야 할 사람인데 이렇게 애정 문제로 인해 군공이 가려지고 있으니 말이오. 참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송석석은 연여옥이 이런 이야기를 하며 아쉬움을 느
여인들은 하나 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방금 말하던 여인은 연분홍 비단 테두리가 둘린 중의와 청록색 백접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사랑스러우면서도 귀티가 흘렀다. 그리고 목에는 영락을 걸고 허리에는 파란색 향낭이 달려 있었는데 향낭네는 ‘제’자가 수놓아져 있어 한눈에 그녀의 신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옆에 있던 여인들도 보통 가문 여식들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웃었지만 송석석은 오히려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한창 웃고 떠들기 좋아하는 나이인 것 같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한 시진 동안 실컷 웃거라. 한 시간이 지나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가 손뼉을 치자 모퉁이에서 홍시의 자매인 만소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공손히 손을 모으며 "왕비님"이라고 하며 인사를 건넸다. 홍시, 청미, 비윤, 만소는 평사저가 진성에 두고 간 사람들인데 홍시는 주로 조사를 맡고 만소는 그녀 옆을 따랐는데 굳이 그녀가 필요한 상황은 많이 없었다.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다. 비록 안여옥에게 직접 처리하라고 했지만 그녀를 건드렸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송석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소야. 한 시진 동안 웃고 있는지 잘 지켜보거라. 만약 한 시진을 채우지 못한다면 아군 여학에서 당장 내쫓거라.” 그러자 제자예는 싸늘한 얼굴로 송석석을 가로막았다. “우린 정식으로 명첩을 가지고 입학했는데 지금 내쫓겠다고 하신 겁니까?”"아군 여학의 규율을 지키지 않고 감히 훈장을 조롱하고 도발한 것은 퇴학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일이다." 말을 마친 송석석은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그러자 제자예가 억울한 표정으로 솔리 질렀다. “저희가 언제 조롱했습니까? 뭐가 찔리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송석석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찔리는 건 없다만 넌 곧 웃음거리가 될 것이야. 여학에서 쫓겨난다면 최소 한 달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테야.””제 조부는 제제사이시고, 제 언니는 황후마마이십니다. 부친은 예부상서로 상국 관료의 승진을
제자예는 얼굴이 얼어붙은 채 마지못해 한 시진 동안 웃었다. 그 후 그녀는 바로 정국태부인에게 고하러 갔다. 국태부인은 인자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처음에 그녀는 예의, 다과, 장부 관리, 사람 부리는 법과 하인을 다스리는 법 등만 가르쳤는데, 이는 이들 학도들의 출신 배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귀한 집안에 시집가든 낮은 집안으로 시집가든 가정을 맡아야 할 일이 많을 테니 말이다.예의는 대부분 이미 배웠지만 그래도 가볍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것은 그녀가 학생들에게 나중에 손님을 대하거나 타인을 응대할 때 실례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장부를 읽고 사람을 관리하는 것은 여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인 지식이다.전통상 여성은 집안일을 맡아야 하기에 기본적인 능력을 익혀야만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었다.그녀의 교육 방식은 현실적이었다.여인은 사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동등한 대화를 나눌 자격조차 없었다.국태부인의 교육은 제자예가 자신과 같은 귀족 출신은 당연히 지위가 다르고 시녀는 누구의 하인이라도 하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그녀는 국태부인이 그녀의 편들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러나 국태부인은 천천히 온화한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그렇다면 훈장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제자예는 깜짝 놀랐다. 국태부인이 자신들의 편들지 않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말했다.“국태부인, 설령 훈장이라 할지라도 제멋대로 학생을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국태부인은 표정이 싸늘해졌다.“모욕? 내가 보기에는 훈육이었다. 학도라면 당연히 선생의 말을 들어야지. 왕비는 아군여학의 훈장이다. 나 역시 그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녀를 비웃었다지? 이는 선생에 대한 불경이다. 불경이 어떤 죄목인지 너희 조부께 여쭤보거라. 훈장이 오늘 너희들에게 내린 처벌은 가벼운 편이다. 만약 나였다면 오늘 당장 너희들을 떠나게 했을 것이다.”국태부
진성을 떠나기 전, 연왕은 궁에 들어와 영비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영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너에게 효심이 있다면 폐하께 청을 드려 나도 연주로 데려가거라. 모자가 떨어져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 상황을 나는 피하고 싶다.” 연왕은 땅에 무릎을 꿇고 목이 메어 말했다.“아들 역시 모비를 떠나기 싫으나 연주는 아무래도 궁처럼 편하지 않습니다. 먼 길을 가시다 병환이라도 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영비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예전에는 네 여동생이 날 돌봐주었지만 지금은 그 아이가 종인부에 들어갔다. 헌데 너마저 떠난다면 난 여기서 뭘 기대하겠느냐? 난 병이 다 나았으니 먼 길을 떠나는 건 문제가 없다. 제가 청을 드리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주청을 드릴 것이다. 폐하께서는 자애로우니 반드시 허락하실 거라 믿는다.” "모비, 저희 모자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영비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 병환으로 그녀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여위었지만 힘은 아주 강했다."아들아, 지금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다. 남강도 수복되었고 성릉관 전쟁도 끝났다. 앞으로 잘만 다스리면 우리 상국은 네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태평성대가 될 것이다. 모두가 부유하고 평화로운 시대 말이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모비는 평생을 이 깊은 궁궐에서 보냈기에 세상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백성들이 평안한 날을 바란다는 건 알고 있다."연왕은 표정이 잠시 굳어졌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모비, 모비께서는 평생을 궁궐에서 보내셨기에 어쩌면 들으신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성이 부유한 건 사실이나 아직도 많은 백성이 물과 불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따뜻한 옷도 입지 못한 채 아들딸을 팔며 아내를 전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과와 부역이 그들을 숨도 쉴 수 없게 짓누르고 있습니다."영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왕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게다가 남강
연왕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짜증도 났다."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들이 모비 곁에 있을 수 없으니 태후가 모비를 잘 돌봐주길 바라는 겁니다. 그래야 아들이 날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됐으니 그만하고 이제 가거라. 꼭 몸조심하고."영비는 손을 저었다.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인데 어찌 그의 성정을 모를까? 그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아들이 불효자식입니다. 지금이 칠월의 찌는 더위가 아니었다면 모비를 봉지로 모시고 갈 수 있었을 텐데, 모비를 모셔간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설령 아들이 결백하다 한들 폐하의 의심 많은 성정을 생각하면 아들은 틀림없이 몇 가지 죄목을 뒤집어쓸 겁니다."영비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겠으니 이만 가거라."연왕은 큰절을 올린 뒤 시민주와 측비 김씨 그리고 네 자녀를 불러 영비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영비는 며느리들과 손주들을 보았음에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들이 모두 물러난 뒤 영비가 몇 차례나 기침을 하자, 곁에 있던 고 공공이 영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더운 날씨에 길을 떠나는 것도 불편하니 왕야께서도 마마님을 위해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영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너도 저 아이를 어려서부터 봤으니 잘 알지 않느냐? 정말 효성이 있다면 왜 삼사월에 떠나지 않고 굳이 이 찌는 더위에 떠나겠느냐. 그 번지르르한 말들은 그냥 흘려들으면 된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지. 좋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천 가지, 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 자신을 변명하니 다들 그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연왕은 명성을 아끼는 사람이다.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성정으로 그런 계략을 꾸미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내가 비록 여인이지만 큰일을 이루려면 소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안다. 천하를 훔칠 생각을 하면서도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결국 둘 다 잃을 것이
연왕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고 숙청제 역시 자리에 있었다.숙부와 조카는 각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달랐지만 태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그저 집안일과 예전 이야기를 나눴다.태후는 깊은 감회에 젖은 듯 선제가 살아 있을 때 항상 연왕과 그들 형제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고 했다.“언제는 형제 몇이 선제를 따라 사냥에 나섰는데 연왕은 어리기도 하고 기운이 넘쳐 본인만큼 큰 말을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그런데 그 말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연왕은 땅에 내던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선제가 재빨리 말을 타고 연왕에게 달려가더니 채찍으로 연왕을 감았으나 두 사람 모두 결국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다행히도 선제 덕분에 큰 부상은 면했지만 선제 본인은 등이 바위에 긁혀 피를 철철 흘리는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선제는 형제들 중에서도 연왕을 가장 아낀다고 하셨어요. 총명하고 착하며 효심도 깊어서 좋은 것이 있으면 항상 연왕의 몫도 챙겼지요. 당시 분봉할 때도 연왕이 부귀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해서 연주를 준 겁니다.” 태후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선제의 그 깊은 마음만은 꼭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형제의 정을 마음에 새길지는 결국 연왕 본인에게 달린 일이었다.연왕은 선제를 추억하는 듯 눈물을 흘리며 감성에 빠졌지만 숙청제는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 태후의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사여령에게 물었다.“짐이 그대가 학문이 깊고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을 들었다. 혹시 조정에 나아가 관직에 나설 뜻이 있는가?”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사여령은 잠시 멈칫했지만 연왕이 재빨리 말했다. “여령아, 어서 폐하께 감사드려라!” 그러자 사여령이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히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동생이 도움이 될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다만 조정에 나가 관직을 맡는 일은 신제가 재주와 학식이 부족하여 감당할
진성을 떠나기 전 시민주는 다시 왕부에 찾아와 시만자에게 시철진에게 보낼 서신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송석석의 경고를 받은 이후 시만자는 시민주와 더는 할 말이 없다며 서신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바로 내보냈다. 심 씨는 또다시 무시당했지만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눈물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만자야. 네가 날 업신여기는 건 안다만 난 진심으로 널 동생으로 생각한다. 진성에서 살면서 마련한 물건이 많은데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다. 만약 소진 소주방에 쓸모가 있다면 전부 보내줄 것이다.” 시만자는 팔짱을 낀 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갑자기 호의적이라고?” 시민주는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다. “나도 여인인데 어찌 여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없겠느냐? 게다가 우리도 쓸모없는 물건들이야. 곡식이며 옷감, 바느실, 꽃 같은 것들인데 연주까지 가져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정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사람을 보내 확인하거라.” 시만자는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진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저 사람의 마음을 사는 행동일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 물건들이 공방에 유용할 것은 확실했다. 특히 연왕부의 꽃들은 품종이 다양하고 아름다워 마침 란이 군주에게 맡기기에 딱이었다.모종윤과 사금도 이런 꽃을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석석이가 돌아오면 같이 가겠다.” 송석석은 이틀에 한 번씩 저녁이면 공방에 들리곤 했기에 시만자가 신중히 말했다. 그러자 시민주가 말했다. “그럼 언제 오는지 물어보거라. 한 시진 내로 진성을 떠나야 해서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 아니면 내가 열쇠를 줄 테니 직접 사람을 보내 옮기거라.” 하지만 시만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싫다. 그러다 나중에 뭘 잃어버렸다고 하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송석석이 돌아오려면 유시쯤은 되어야 했다. 요즘 순방영은 재정비로 새로운 평가를 시작하느라 그녀도 상당히 바빴다.시만자의 말에
임양운은 한동안 경사에 계속 머물렀다. 예전에는 신화기 연구에 몰두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진성의 일을 놓을 수 없다는 핑계로 더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송석석을 걱정하고 있었다.처음 신화기를 연구할 때, 특별히 사람을 보내 북당으로 가서 처방을 받았던 것도 남강과 송회안, 그리고 결국은 사여묵과 송석석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부로서 제자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그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임양운은 항상 자신이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뛰어났고, 인품마저 매우 훌륭했다. 그 누구도 그를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송석석만은 걱정이 되었다. 송석석은 놀고 싶어만 하는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술을 출중하게 익힐 만큼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펼쳐진 자유롭고 밝은 웃음을 볼 때마다 임양운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강제로 빠르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언제나 마음의 긴장을 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받은 상처들은 시간만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도와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사여묵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웃게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결핍까지는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양운은 아픈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러고는 궁에 가서 황제와 대면했다.한때 번성했던 임씨 가문에는 지금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제자들만 있을 뿐 자식이나 후손은 없었기 때문이다. 임왕 임병일은 당시 한때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그 공로가 너무 커서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아마도 여러 가지 은혜와 원한이 있었을 것이지만, 숙청제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임씨 가문은 결국 사씨 가
거리를 돌며 공개적으로 조롱받는 동안, 영군왕은 완전히 무너져 미쳐버린 듯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 무지하고 어리석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백성들이 조정에 속아 폭군을 현명한 군주로 착각하였으며, 자신 사청엄만이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쉰 목소리는 백성들의 저주 속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외치며 요참형조차 그에게는 너무 관대하다며, 차라리 천 번의 칼질과 만 번의 난도질을 하는 능지처참으로 갚아야 한다고 외쳤다.연왕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억울함과 사청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만약 사청엄이 자신의 사람들을 배반시키지 않았다면 자신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사청엄은 어둠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독사처럼 그가 모르는 사이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사청엄 때문에 그는 이제 단순한 역적이 아니라 어리석은 역적으로 전락했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을 남에게 넘겨야 했고,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묶여 조정의 군대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훗날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이름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그는 평생 동안 권력과 명성을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형틀에 묶여 처형대로 끌려가는 순간, 그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증오와 조롱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그는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이 모든 순간을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의 뜻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고, 아내를 맞이하고 첩을 들인 것조차 모두 이용을 위한 수단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마음껏 사랑해보려 했지만, 그로 인해 무상과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눈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는 군중 속에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옷을 입은 그녀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드디어 대청산이 시작되었다.대리사와 경위 형부의 공동 조사 끝에, 연왕과 영군왕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사실로 밝혀졌다.모두 죄목이 확실했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의 모든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다.연왕 일가는 정보를 제공한 공을 세운 사여령을 제외하고 모두 황실 감옥에 갇혔다.사여령은 황실 족보에서 이름이 제외되었다. 여전히 대리사에서 감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진이는 그를 일시적으로 직무에서 배제시켰고, 처분이 끝난 후 복직시키겠다고 했다.진이는 선의를 베풀어 그에게 앞으로 이 직책을 계속 맡고 싶다면 황실 감옥에 가까이 가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반성하라고 당부했다.진이는 사여령이 어리석기는 해도 성실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우유부단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진이는 여전히 그를 돌보아 주려 했다.진이는 송석석에게도 사여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송석석은 사여령이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아 무슨 일이 생겨도 반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랐지만, 다행히 적모 밑에서 자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아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사여령을 특별히 돌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여령이 진성에 머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황제를 안심시킬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이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여령이 이번 처벌을 피할 수 있던 이유도 연왕의 사병 정보를 제공한 덕이었지만, 일이 지나간 후 황제가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가 그의 직책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자신의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그가 진성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조정 회의에서 숙청제는 영군왕과 연왕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죄목을 발표했다. 그들의 죄목은
추몽의 눈빛에 섬뜩함이 스쳤다."좋습니다. 위선적인 말 어디 한번 들어보지요."숙청제는 원래 의심이 많아 항상 북명황실을 경계해 왔다. 송석석에게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반기를 들겠냐고 묻는 것도, 비록 그녀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송석석이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묻는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녀는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아직 송석석이 대답도 하기 전에, 추몽은 비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먼저 아첨하며 숙청제를 치켜세워 보시지요. 그의 정책이 여성을 얼마나 잘 대우했는지 떠들어 보십시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마음껏 칭송하시지요."송석석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비꼬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럴듯하게 가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상이 어리석고 폐쇄적이라 당신의 기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인정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당신 개인의 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지도 못하며,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들에게 원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더 큰 혐오와 배척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를 안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꾸짖고 비난할 것입니다."추몽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그는 이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이라는 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니 제가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시는군요." 추몽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송석석이 차분히 대답했다."살 길이 막혔다는 것과 대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같은
제제사와 추몽은 대리사의 심문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송석석은 서리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리 않았기에 그들이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더라도 송석석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한숨 소리 전부 말이다.하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 시선을 몇 번 마주하지도 않았다. 마치 강제로 한자리에 앉혀진 낯선 이들처럼 거리감과 냉담함이 느껴졌다.송석석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그 어색함을 어쩔 수 없이 함께 견뎌야 했다.오랜 침묵 끝에 제제사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왜 이런 짓을 한 거냐?”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추몽은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굳이 따져 묻을 필요가 있나?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는 법이지.”“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 아니더냐?” 제제사가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로 묻자, 추몽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어차피 이 생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선황제가 그러지 않았나? 나는 패역한 자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가진 생각들이 진정 패역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짜로 패역한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른 모든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제제사가 그의 시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너희 반란으로 수천수만 명이 죽었고, 피비린내는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네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다.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겼느냐?”추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심히 차갑고 냉담해 보였다.“추몽,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냐?” 제제사가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