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고 숙청제 역시 자리에 있었다.숙부와 조카는 각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달랐지만 태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그저 집안일과 예전 이야기를 나눴다.태후는 깊은 감회에 젖은 듯 선제가 살아 있을 때 항상 연왕과 그들 형제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고 했다.“언제는 형제 몇이 선제를 따라 사냥에 나섰는데 연왕은 어리기도 하고 기운이 넘쳐 본인만큼 큰 말을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그런데 그 말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연왕은 땅에 내던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선제가 재빨리 말을 타고 연왕에게 달려가더니 채찍으로 연왕을 감았으나 두 사람 모두 결국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다행히도 선제 덕분에 큰 부상은 면했지만 선제 본인은 등이 바위에 긁혀 피를 철철 흘리는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선제는 형제들 중에서도 연왕을 가장 아낀다고 하셨어요. 총명하고 착하며 효심도 깊어서 좋은 것이 있으면 항상 연왕의 몫도 챙겼지요. 당시 분봉할 때도 연왕이 부귀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해서 연주를 준 겁니다.” 태후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선제의 그 깊은 마음만은 꼭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형제의 정을 마음에 새길지는 결국 연왕 본인에게 달린 일이었다.연왕은 선제를 추억하는 듯 눈물을 흘리며 감성에 빠졌지만 숙청제는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 태후의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사여령에게 물었다.“짐이 그대가 학문이 깊고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을 들었다. 혹시 조정에 나아가 관직에 나설 뜻이 있는가?”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사여령은 잠시 멈칫했지만 연왕이 재빨리 말했다. “여령아, 어서 폐하께 감사드려라!” 그러자 사여령이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히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동생이 도움이 될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다만 조정에 나가 관직을 맡는 일은 신제가 재주와 학식이 부족하여 감당할
진성을 떠나기 전 시민주는 다시 왕부에 찾아와 시만자에게 시철진에게 보낼 서신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송석석의 경고를 받은 이후 시만자는 시민주와 더는 할 말이 없다며 서신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바로 내보냈다. 심 씨는 또다시 무시당했지만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눈물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만자야. 네가 날 업신여기는 건 안다만 난 진심으로 널 동생으로 생각한다. 진성에서 살면서 마련한 물건이 많은데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다. 만약 소진 소주방에 쓸모가 있다면 전부 보내줄 것이다.” 시만자는 팔짱을 낀 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갑자기 호의적이라고?” 시민주는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다. “나도 여인인데 어찌 여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없겠느냐? 게다가 우리도 쓸모없는 물건들이야. 곡식이며 옷감, 바느실, 꽃 같은 것들인데 연주까지 가져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정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사람을 보내 확인하거라.” 시만자는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진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저 사람의 마음을 사는 행동일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 물건들이 공방에 유용할 것은 확실했다. 특히 연왕부의 꽃들은 품종이 다양하고 아름다워 마침 란이 군주에게 맡기기에 딱이었다.모종윤과 사금도 이런 꽃을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석석이가 돌아오면 같이 가겠다.” 송석석은 이틀에 한 번씩 저녁이면 공방에 들리곤 했기에 시만자가 신중히 말했다. 그러자 시민주가 말했다. “그럼 언제 오는지 물어보거라. 한 시진 내로 진성을 떠나야 해서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 아니면 내가 열쇠를 줄 테니 직접 사람을 보내 옮기거라.” 하지만 시만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싫다. 그러다 나중에 뭘 잃어버렸다고 하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송석석이 돌아오려면 유시쯤은 되어야 했다. 요즘 순방영은 재정비로 새로운 평가를 시작하느라 그녀도 상당히 바빴다.시만자의 말에
물건은 무려 다섯 대의 마차로 실어 갈 정도로 많았다. 화초는 손수레로 옮겼는데 왕부의 하인이 총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떠날 때 연왕도 나와 시만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왕은 사내다운 매력을 풍기며 세상 모든 것을 아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 물건들이 공방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왕부에 아직 여러 색상의 실이 많은데 고급 자수를 만드는 데 적합할 것 같구나.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와 한번 구경하거라.” 시만자는 바로 경계하며 말했다. “들어갈 것 없이 전부 밖에 내놓아 주십시오.” 그러자 연왕도 억지로 권하지 않고 하인에게 명령했다.“실타래도 전부 실어라. 마차가 모자라면 사람을 보내 더 빌려오도록 하라.” 말을 마친 연왕은 연한 분홍빛 중의에 옅은 초록빛 백 첩 치마를 입어 상큼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를 부드럽게 쳐다봤다. “만자의 목이 마르겠구나. 다과와 차를 가져오게 하겠다.” 다정한 연왕의 호칭에 시만자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목이 마르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습니다.” 시만자는 정중히 거절하며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그저 호의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연왕은 그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그렇다면 억지로 권하지 않겠다. 본왕도 챙겨야 할 물건이 있으니 이만 들어가겠다.”시만자가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이쪽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만자는 이렇게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공방을 맡은 후 자기 언행에 특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공방은 이미 수많은 비난과 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물론 각계각층에서 들어오는 기부 물품에 대해 그녀는 송석석과 이씨 부인과 상의한 적이 있는데 필요하다면 모두 받기로 했다. 공방에서는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모두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기부 물품이 꼭 필요했다. 또한 선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이해를 얻는 일종의 방식이었다. 물론 기부 물품은 그녀들이 책임지고 수용하며 모종윤과 사금에게
송석석은 오늘 연왕 일가가 진성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순방영 사람들에게 그들이 성을 떠나는 걸 주의 깊게 지켜본 후 돌아와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오진은 직접 사람을 데리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연왕부의 마차들이 웅장하게 성문을 빠져나갔는데 연왕의 신분으로 인해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나 연왕은 마차 가리개를 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성문 수비장인 진천 장군은 두 손을 모아 그를 배웅했다. 왕족들은 따로 명령이 없으면 감히 검문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친왕이 성을 나갈 때면 영패만 보여주기만 해도 곧바로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그들이 떠난 후 오진은 진성 경위부로 돌아와 송석석에게 보고했고 그제야 송석석은 안심할 수 있었다. 요즘 순방영에서는 한창 체력 검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체력 검문으로 일부 사람을 솎아낸 뒤에도 순방영은 여전히 정예라 부르기 힘들었는데 과거의 현갑군 출신이 가득하다는 이름값을 하지 못한 셈이다. 몇 년간의 나태함으로 인해 부패한 이들이 자율성을 가진 이들마저 나쁜 방향으로 이끌었다. 대부분이 녹봉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굳이 고생할 필요 없다고 여겼다. 물론 스스로 절제하며 자기가 현갑군이라는 걸 잊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극소수로 유혹에 넘어가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먹물 한 방울이면 맑은 물 전체를 더럽히지만 맑은 물 한 방울은 탁한 물을 정화하지 못하듯 말이다.송석석은 자기의 지휘사 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비하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한 나태함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진의 위신은 여전히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오늘 훈련은 그녀가 직접 나섰다. 달리기, 뛰기, 등반, 격투까지 그녀는 도전장을 내미는 이들을 모두 환영하며 상대했다. 시만자는 일찍이 순방영의 그 고인물들은 전혀 성실하지 않다고 말했고 어쩌면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을 거라고 했다. 시만자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송석석이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이 지난 후, 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했다.“시만자 아씨는 댁에 없습니다. 왕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씨가 공방에 가셨다고 해서 공방으로 가보았지만 거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연왕부에서 물자가 도착했지만 아씨가 직접 확인하지 않아 물건이 밖에 쌓여있습니다.” 송석석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왕부가 공방에 물자를 보냈다고?그렇다면 홍시와 다른 이들은? 정말 시만자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그녀는 놀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만소를 불렀지만 만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소가 오늘 분명 그녀 옆을 따랐는데 어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너무 이상했다.“송 대감님, 어찌 그러십니까?” 오진이 달려와 물었다. “만소를 찾으십니까? 소인이 아까 마주치긴 했다만 어딜 급히 가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디서 마주쳤느냐?” 송석석이 다급히 물었다. “경위부 외곽 거리였습니다. 소인이 성문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지요.” “그렇다면 연왕이 떠나던 시점이 아니더냐?” 송석석은 조급한 마음에 급히 마구간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오늘 훈련은 취소되었으니 모두 나와 함께 시만자를 찾으러 간다. 필명의 경위도 불러라.” 시만자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이 불안감이 솟구쳤다. 오진은 그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송 대감, 사부님은 단순히 왕부에도 공방에도 안 계신 것일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찾으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송석석은 섬광에 올라탄 뒤 빠르게 성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그녀는 먼저 망경루에 들러 운익각의 지부를 확인하며 혹시 홍시가 여기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망경루의 주인은 홍시를 본 적 없으며 심지어 다른 정탐들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오진이 사람을 데리고 도착하자 송석석이 다급히 말했다. “넌 공방에 가서 네 사부가 오늘 공방에 들렀는지 확인하거라. 그리고 왕부에 사람을 보내 오늘 네 사부가 연왕부를 제외한 다른 곳에는 가지 않았는지 확인해.”
송석석은 그녀의 말을 따라 재빨리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했다. 마음은 어지럽고 불안했지만 애써 진정하고 다시 물었다. “지금 홍시 혼자서 쫓아가고 있는 것이냐?” “홍시와 비윤이 쫓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시만자 아씨가 정말 연왕에게 끌려갔다면 연왕 곁에는 고수가 많아서 두 사람만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원을 요청하려고 급히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허나 지금으로선 시만자 아씨가 그들에게 끌려갔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송석석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섬광이라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시만자가 아직 경성에 있다면 큰 위험은 없어도, 혹여나 연왕에게 끌려갔다면 정말 위험했다. 송석석이 청미에게 말했다. “너는 곧장 돌아가 필명을 찾아가 진성을 수색하라 전한 뒤 북명왕부로 돌아가 몽교두에게 사람을 데리고 내 뒤를 따르라 하거라. 가는 길에 내 길목마다 표식을 남겨둘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채찍을 휘두르며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홍시는 항상 시만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시만자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이는 평범한 일이 아니기에 송석석은 잔뜩 긴장한 채 연왕을 쫓아갔다. 청미가 진성으로 돌아오니 경위와 순방영은 이미 수색을 시작했다. 금군인 왕정도 사람을 파견했고 장기문 또한 현철위의 비용위를 동원해 시만자를 찾고 있었다. 사부가 실종되자 그들 또한 불안했던 것이다. 경위는 성문을 봉쇄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는 바로 대리사로 달려가 사여묵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알게 된 사여묵은 송석석이 연왕을 쫓아갔다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간 것이냐?” “그렇습니다, 왕야. 지금 중요한 것은 성문을 봉쇄하는 것입니다. 사부가 연왕에게 끌려간 게 아니라면 그들은 아마 어딘가에 숨긴 뒤 우리가 찾는 혼란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려 할 겁니다.”사여묵은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서 쫓아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여묵은 즉시 범인을 추격한다는 명
당나귀의 방울 소리가 관도 위에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입에 풀 한 가닥을 물고 있던 남자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그는 밤길을 걷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어둠은 항상 묘한 신비로움을 주었다. 어둠 속에서는 마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극이 되었다."요괴 한두 마리라도 만나면 좋겠네. 같이 앉아 한 잔 하면 얼마나 즐거울까!"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호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 호리병 안에는 사숙의 술이 들어 있었다. 이 술을 훔치는 바람에 자신의 말도 타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말을 빌리러 고월파로 빠르게 향했다.하지만 고월파에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늙은 장문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늙은 당나귀 한 마리를 겨우 끌고 나왔다. 그리고는 신신당부하며 그에게 당나귀를 최대한 끌고 다니기만 하고 절대 타지 말라고 말했다. 늙은 당나귀가 그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 과로로 죽을 수도 있으니, 짐만 싣는 걸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당나귀를 끌고 내려갈 거라면 차라리 내가 짐을 직접 메고 내려가는 게 낫지. 왜 굳이 당나귀를 데리고 가야 한단 말인가?’하지만 그는 곧 노인의 말을 얕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나귀는 비록 나이가 들긴 했지만 달릴 때 사람보다 빠르고 지구력도 꽤 괜찮았다. 매산에서 하주까지 오는 동안 숨을 헐떡이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한 시진 정도만 더 가면 하주에 도착할 듯했다.왕이장은 콧노래를 더욱 크게 흥얼거리며 생각했다."진성은 얼마나 번화한가? 끝내주게 맛있는 술도 많고 게다가 귀여운 사매들도 있으니, 이게 인생의 절정 아니겠어?"그는 들고 있던 막대기를 들어 당나귀 앞에 매달려 있던 당근을 조금 뒤로 움직였다. 드디어 당근에 입을 댈 수 있게 된 당나귀는 아삭아삭거리며 정말 맛있게 먹어댔다.그는 여관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다만 하주 밖 경치 좋은 곳에서 술병을 열어 요괴 한두 마리라도 만나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그가 막 눕자마자 어느곳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 들렸다. 매우 가벼운 발소리와 몇 마디 욕설이 섞여 있었다.그는 벌떡 일어나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는데, 반대편 산에서 한 무리가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리의 모든 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있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단 한 사람만 검은 옷이 아니었는데 무슨 색인지조차 정확히 보이지 않았다. 다만 검은 옷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욕설 소리는 금방 사라졌다. 마치 누군가에 의해 입이 봉인된 듯했다.그와 무리의 거리가 꽤 멀었고, 그곳에 주둔한 사람들과의 거리보다 훨씬 더 멀었기 때문에 그의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똑똑히 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의 움직임이 굉장히 빠르고 주둔 중인 사람들과 합류하려는 듯 보였다.왕이장은 일어서며 표정에 긴장감을 드러냈다. 요괴는 없었지만 음모가 시작된 듯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자들과 욕설을 내뱉던 여자를 끌고 가는 모습까지……그는 당나귀의 등에 실려 있던 사부가 준 신화기를 꺼내 닦았다. 이 물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까진 아직 완벽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사부가 이걸 만들어냈을 때 허리에 손을 얹고 산 꼭대기에서 한 시진 동안이나 크게 웃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웃음에 산속 뱀, 벌레, 쥐, 개미들까지 모두 놀라서 도망쳤다고 했다.그는 소리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당연히 이 물건 하나만 믿을 수는 없었기에 항상 몸에 무기를 지니고 다녔다.그는 관도 옆의 풀숲 속에 숨어서 그 두 무리가 합류하려 준비하는 것을 주시했다. 여전히 그들의 얼굴이나 생김새를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남녀를 구분하는 정도는 가능했다.그가 기어가며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멀지 않은 나무 한그루에서 빛이 반사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나뭇가지를 보았다. 거기엔 한 여자가 서 있었는데, 앞쪽을 긴장한 눈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잘 보이지 않는 상황 때문인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이 사람…… 사저의 수중에 있던 홍현 같은데?’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