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왕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짜증도 났다."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들이 모비 곁에 있을 수 없으니 태후가 모비를 잘 돌봐주길 바라는 겁니다. 그래야 아들이 날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됐으니 그만하고 이제 가거라. 꼭 몸조심하고."영비는 손을 저었다.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인데 어찌 그의 성정을 모를까? 그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아들이 불효자식입니다. 지금이 칠월의 찌는 더위가 아니었다면 모비를 봉지로 모시고 갈 수 있었을 텐데, 모비를 모셔간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설령 아들이 결백하다 한들 폐하의 의심 많은 성정을 생각하면 아들은 틀림없이 몇 가지 죄목을 뒤집어쓸 겁니다."영비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겠으니 이만 가거라."연왕은 큰절을 올린 뒤 시민주와 측비 김씨 그리고 네 자녀를 불러 영비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영비는 며느리들과 손주들을 보았음에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들이 모두 물러난 뒤 영비가 몇 차례나 기침을 하자, 곁에 있던 고 공공이 영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더운 날씨에 길을 떠나는 것도 불편하니 왕야께서도 마마님을 위해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영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너도 저 아이를 어려서부터 봤으니 잘 알지 않느냐? 정말 효성이 있다면 왜 삼사월에 떠나지 않고 굳이 이 찌는 더위에 떠나겠느냐. 그 번지르르한 말들은 그냥 흘려들으면 된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지. 좋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천 가지, 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 자신을 변명하니 다들 그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연왕은 명성을 아끼는 사람이다.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성정으로 그런 계략을 꾸미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내가 비록 여인이지만 큰일을 이루려면 소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안다. 천하를 훔칠 생각을 하면서도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결국 둘 다 잃을 것이
연왕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고 숙청제 역시 자리에 있었다.숙부와 조카는 각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달랐지만 태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그저 집안일과 예전 이야기를 나눴다.태후는 깊은 감회에 젖은 듯 선제가 살아 있을 때 항상 연왕과 그들 형제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고 했다.“언제는 형제 몇이 선제를 따라 사냥에 나섰는데 연왕은 어리기도 하고 기운이 넘쳐 본인만큼 큰 말을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그런데 그 말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연왕은 땅에 내던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선제가 재빨리 말을 타고 연왕에게 달려가더니 채찍으로 연왕을 감았으나 두 사람 모두 결국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다행히도 선제 덕분에 큰 부상은 면했지만 선제 본인은 등이 바위에 긁혀 피를 철철 흘리는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선제는 형제들 중에서도 연왕을 가장 아낀다고 하셨어요. 총명하고 착하며 효심도 깊어서 좋은 것이 있으면 항상 연왕의 몫도 챙겼지요. 당시 분봉할 때도 연왕이 부귀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해서 연주를 준 겁니다.” 태후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선제의 그 깊은 마음만은 꼭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형제의 정을 마음에 새길지는 결국 연왕 본인에게 달린 일이었다.연왕은 선제를 추억하는 듯 눈물을 흘리며 감성에 빠졌지만 숙청제는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 태후의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사여령에게 물었다.“짐이 그대가 학문이 깊고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을 들었다. 혹시 조정에 나아가 관직에 나설 뜻이 있는가?”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사여령은 잠시 멈칫했지만 연왕이 재빨리 말했다. “여령아, 어서 폐하께 감사드려라!” 그러자 사여령이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히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동생이 도움이 될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다만 조정에 나가 관직을 맡는 일은 신제가 재주와 학식이 부족하여 감당할
진성을 떠나기 전 시민주는 다시 왕부에 찾아와 시만자에게 시철진에게 보낼 서신을 달라고 했다. 하지만 송석석의 경고를 받은 이후 시만자는 시민주와 더는 할 말이 없다며 서신도 주지 않고 그녀를 바로 내보냈다. 심 씨는 또다시 무시당했지만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눈물에 젖은 얼굴로 말했다.“만자야. 네가 날 업신여기는 건 안다만 난 진심으로 널 동생으로 생각한다. 진성에서 살면서 마련한 물건이 많은데 이제는 필요 없게 되었다. 만약 소진 소주방에 쓸모가 있다면 전부 보내줄 것이다.” 시만자는 팔짱을 낀 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갑자기 호의적이라고?” 시민주는 마음이 점점 답답해졌다. “나도 여인인데 어찌 여인을 돕고 싶은 마음이 없겠느냐? 게다가 우리도 쓸모없는 물건들이야. 곡식이며 옷감, 바느실, 꽃 같은 것들인데 연주까지 가져갈 수는 없지 않겠느냐? 정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사람을 보내 확인하거라.” 시만자는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에 오히려 진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저 사람의 마음을 사는 행동일 거라 생각했다. 다만 그 물건들이 공방에 유용할 것은 확실했다. 특히 연왕부의 꽃들은 품종이 다양하고 아름다워 마침 란이 군주에게 맡기기에 딱이었다.모종윤과 사금도 이런 꽃을 보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이다. “석석이가 돌아오면 같이 가겠다.” 송석석은 이틀에 한 번씩 저녁이면 공방에 들리곤 했기에 시만자가 신중히 말했다. 그러자 시민주가 말했다. “그럼 언제 오는지 물어보거라. 한 시진 내로 진성을 떠나야 해서 오래 기다릴 수는 없다. 아니면 내가 열쇠를 줄 테니 직접 사람을 보내 옮기거라.” 하지만 시만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건 싫다. 그러다 나중에 뭘 잃어버렸다고 하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정오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송석석이 돌아오려면 유시쯤은 되어야 했다. 요즘 순방영은 재정비로 새로운 평가를 시작하느라 그녀도 상당히 바빴다.시만자의 말에
물건은 무려 다섯 대의 마차로 실어 갈 정도로 많았다. 화초는 손수레로 옮겼는데 왕부의 하인이 총출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떠날 때 연왕도 나와 시만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연왕은 사내다운 매력을 풍기며 세상 모든 것을 아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이 물건들이 공방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왕부에 아직 여러 색상의 실이 많은데 고급 자수를 만드는 데 적합할 것 같구나.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와 한번 구경하거라.” 시만자는 바로 경계하며 말했다. “들어갈 것 없이 전부 밖에 내놓아 주십시오.” 그러자 연왕도 억지로 권하지 않고 하인에게 명령했다.“실타래도 전부 실어라. 마차가 모자라면 사람을 보내 더 빌려오도록 하라.” 말을 마친 연왕은 연한 분홍빛 중의에 옅은 초록빛 백 첩 치마를 입어 상큼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를 부드럽게 쳐다봤다. “만자의 목이 마르겠구나. 다과와 차를 가져오게 하겠다.” 다정한 연왕의 호칭에 시만자는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목이 마르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습니다.” 시만자는 정중히 거절하며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그저 호의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연왕은 그녀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그렇다면 억지로 권하지 않겠다. 본왕도 챙겨야 할 물건이 있으니 이만 들어가겠다.”시만자가 말했다.“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이쪽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시만자는 이렇게 고분고분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공방을 맡은 후 자기 언행에 특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공방은 이미 수많은 비난과 논란을 겪었기 때문이다.물론 각계각층에서 들어오는 기부 물품에 대해 그녀는 송석석과 이씨 부인과 상의한 적이 있는데 필요하다면 모두 받기로 했다. 공방에서는 아직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었기에 모두의 생계를 유지하려면 기부 물품이 꼭 필요했다. 또한 선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의 관심과 이해를 얻는 일종의 방식이었다. 물론 기부 물품은 그녀들이 책임지고 수용하며 모종윤과 사금에게
송석석은 오늘 연왕 일가가 진성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특별히 순방영 사람들에게 그들이 성을 떠나는 걸 주의 깊게 지켜본 후 돌아와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오진은 직접 사람을 데리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연왕부의 마차들이 웅장하게 성문을 빠져나갔는데 연왕의 신분으로 인해 검문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나 연왕은 마차 가리개를 들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성문 수비장인 진천 장군은 두 손을 모아 그를 배웅했다. 왕족들은 따로 명령이 없으면 감히 검문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친왕이 성을 나갈 때면 영패만 보여주기만 해도 곧바로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그들이 떠난 후 오진은 진성 경위부로 돌아와 송석석에게 보고했고 그제야 송석석은 안심할 수 있었다. 요즘 순방영에서는 한창 체력 검문이 진행되고 있었다. 체력 검문으로 일부 사람을 솎아낸 뒤에도 순방영은 여전히 정예라 부르기 힘들었는데 과거의 현갑군 출신이 가득하다는 이름값을 하지 못한 셈이다. 몇 년간의 나태함으로 인해 부패한 이들이 자율성을 가진 이들마저 나쁜 방향으로 이끌었다. 대부분이 녹봉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굳이 고생할 필요 없다고 여겼다. 물론 스스로 절제하며 자기가 현갑군이라는 걸 잊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극소수로 유혹에 넘어가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 먹물 한 방울이면 맑은 물 전체를 더럽히지만 맑은 물 한 방울은 탁한 물을 정화하지 못하듯 말이다.송석석은 자기의 지휘사 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기에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정비하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심한 나태함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오진의 위신은 여전히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오늘 훈련은 그녀가 직접 나섰다. 달리기, 뛰기, 등반, 격투까지 그녀는 도전장을 내미는 이들을 모두 환영하며 상대했다. 시만자는 일찍이 순방영의 그 고인물들은 전혀 성실하지 않다고 말했고 어쩌면 제대로 배운 적도 없을 거라고 했다. 시만자가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결국 송석석이 나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약 한 시간이 지난 후, 심부름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했다.“시만자 아씨는 댁에 없습니다. 왕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씨가 공방에 가셨다고 해서 공방으로 가보았지만 거기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연왕부에서 물자가 도착했지만 아씨가 직접 확인하지 않아 물건이 밖에 쌓여있습니다.” 송석석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연왕부가 공방에 물자를 보냈다고?그렇다면 홍시와 다른 이들은? 정말 시만자와 함께 있었던 것이 아니란 말인가?그녀는 놀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만소를 불렀지만 만소는 나타나지 않았다. 만소가 오늘 분명 그녀 옆을 따랐는데 어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너무 이상했다.“송 대감님, 어찌 그러십니까?” 오진이 달려와 물었다. “만소를 찾으십니까? 소인이 아까 마주치긴 했다만 어딜 급히 가는 모양이었습니다.” “어디서 마주쳤느냐?” 송석석이 다급히 물었다. “경위부 외곽 거리였습니다. 소인이 성문에서 돌아오던 길이었지요.” “그렇다면 연왕이 떠나던 시점이 아니더냐?” 송석석은 조급한 마음에 급히 마구간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오늘 훈련은 취소되었으니 모두 나와 함께 시만자를 찾으러 간다. 필명의 경위도 불러라.” 시만자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음속 깊이 불안감이 솟구쳤다. 오진은 그녀를 따라가며 말했다. “송 대감, 사부님은 단순히 왕부에도 공방에도 안 계신 것일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찾으러 가야 하지 않겠느냐!"송석석은 섬광에 올라탄 뒤 빠르게 성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그녀는 먼저 망경루에 들러 운익각의 지부를 확인하며 혹시 홍시가 여기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망경루의 주인은 홍시를 본 적 없으며 심지어 다른 정탐들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오진이 사람을 데리고 도착하자 송석석이 다급히 말했다. “넌 공방에 가서 네 사부가 오늘 공방에 들렀는지 확인하거라. 그리고 왕부에 사람을 보내 오늘 네 사부가 연왕부를 제외한 다른 곳에는 가지 않았는지 확인해.”
송석석은 그녀의 말을 따라 재빨리 머릿속에서 상황을 정리했다. 마음은 어지럽고 불안했지만 애써 진정하고 다시 물었다. “지금 홍시 혼자서 쫓아가고 있는 것이냐?” “홍시와 비윤이 쫓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시만자 아씨가 정말 연왕에게 끌려갔다면 연왕 곁에는 고수가 많아서 두 사람만으로는 절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원을 요청하려고 급히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허나 지금으로선 시만자 아씨가 그들에게 끌려갔는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송석석은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섬광이라면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시만자가 아직 경성에 있다면 큰 위험은 없어도, 혹여나 연왕에게 끌려갔다면 정말 위험했다. 송석석이 청미에게 말했다. “너는 곧장 돌아가 필명을 찾아가 진성을 수색하라 전한 뒤 북명왕부로 돌아가 몽교두에게 사람을 데리고 내 뒤를 따르라 하거라. 가는 길에 내 길목마다 표식을 남겨둘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채찍을 휘두르며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갔다. 홍시는 항상 시만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는데 시만자가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다니, 이는 평범한 일이 아니기에 송석석은 잔뜩 긴장한 채 연왕을 쫓아갔다. 청미가 진성으로 돌아오니 경위와 순방영은 이미 수색을 시작했다. 금군인 왕정도 사람을 파견했고 장기문 또한 현철위의 비용위를 동원해 시만자를 찾고 있었다. 사부가 실종되자 그들 또한 불안했던 것이다. 경위는 성문을 봉쇄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는 바로 대리사로 달려가 사여묵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이 일을 알게 된 사여묵은 송석석이 연왕을 쫓아갔다는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 간 것이냐?” “그렇습니다, 왕야. 지금 중요한 것은 성문을 봉쇄하는 것입니다. 사부가 연왕에게 끌려간 게 아니라면 그들은 아마 어딘가에 숨긴 뒤 우리가 찾는 혼란을 틈타 성 밖으로 나가려 할 겁니다.”사여묵은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혼자서 쫓아가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사여묵은 즉시 범인을 추격한다는 명
당나귀의 방울 소리가 관도 위에서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울려 퍼졌다. 입에 풀 한 가닥을 물고 있던 남자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그는 밤길을 걷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어둠은 항상 묘한 신비로움을 주었다. 어둠 속에서는 마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극이 되었다."요괴 한두 마리라도 만나면 좋겠네. 같이 앉아 한 잔 하면 얼마나 즐거울까!"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호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 호리병 안에는 사숙의 술이 들어 있었다. 이 술을 훔치는 바람에 자신의 말도 타지 못하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말을 빌리러 고월파로 빠르게 향했다.하지만 고월파에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늙은 장문인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늙은 당나귀 한 마리를 겨우 끌고 나왔다. 그리고는 신신당부하며 그에게 당나귀를 최대한 끌고 다니기만 하고 절대 타지 말라고 말했다. 늙은 당나귀가 그의 체중을 감당하지 못해 과로로 죽을 수도 있으니, 짐만 싣는 걸로 충분하다는 것이었다.‘당나귀를 끌고 내려갈 거라면 차라리 내가 짐을 직접 메고 내려가는 게 낫지. 왜 굳이 당나귀를 데리고 가야 한단 말인가?’하지만 그는 곧 노인의 말을 얕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당나귀는 비록 나이가 들긴 했지만 달릴 때 사람보다 빠르고 지구력도 꽤 괜찮았다. 매산에서 하주까지 오는 동안 숨을 헐떡이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한 시진 정도만 더 가면 하주에 도착할 듯했다.왕이장은 콧노래를 더욱 크게 흥얼거리며 생각했다."진성은 얼마나 번화한가? 끝내주게 맛있는 술도 많고 게다가 귀여운 사매들도 있으니, 이게 인생의 절정 아니겠어?"그는 들고 있던 막대기를 들어 당나귀 앞에 매달려 있던 당근을 조금 뒤로 움직였다. 드디어 당근에 입을 댈 수 있게 된 당나귀는 아삭아삭거리며 정말 맛있게 먹어댔다.그는 여관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다만 하주 밖 경치 좋은 곳에서 술병을 열어 요괴 한두 마리라도 만나 함께 술을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고
임양운은 한동안 경사에 계속 머물렀다. 예전에는 신화기 연구에 몰두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진성의 일을 놓을 수 없다는 핑계로 더 머물기로 한 것이었다. 사실 그는 송석석을 걱정하고 있었다.처음 신화기를 연구할 때, 특별히 사람을 보내 북당으로 가서 처방을 받았던 것도 남강과 송회안, 그리고 결국은 사여묵과 송석석 때문이었다.하지만 사부로서 제자들이 자신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최선을 다해 그들을 돕고, 그들의 든든한 방패가 되기로 한 것이었다.임양운은 항상 자신이 사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전부 뛰어났고, 인품마저 매우 훌륭했다. 그 누구도 그를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송석석만은 걱정이 되었다. 송석석은 놀고 싶어만 하는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술을 출중하게 익힐 만큼 뛰어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그녀의 얼굴에 펼쳐진 자유롭고 밝은 웃음을 볼 때마다 임양운은 몹시 기뻐했다. 그러나 이후 그녀가 강제로 빠르게 성장하고 성숙해지며, 언제나 마음의 긴장을 놓지 않는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렸다. 이제 그녀의 얼굴에서 진심 어린 미소를 볼 수 없게 되자, 그는 진심으로 마음이 아팠다. 그녀가 받은 상처들은 시간만이 해결 해 줄 수 있는 것이었기에, 다른 이들이 도와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사여묵은 그녀에게 행복을 주고 웃게 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결핍까지는 채워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임양운은 아픈 마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오후까지 잠을 잤다. 그러고는 궁에 가서 황제와 대면했다.한때 번성했던 임씨 가문에는 지금 그 혼자만 남아 있었다. 제자들만 있을 뿐 자식이나 후손은 없었기 때문이다. 임왕 임병일은 당시 한때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그 공로가 너무 커서 황제를 위협할 정도였다. 그 사이에 아마도 여러 가지 은혜와 원한이 있었을 것이지만, 숙청제는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했다.하지만 이유가 어떻든 임씨 가문은 결국 사씨 가
거리를 돌며 공개적으로 조롱받는 동안, 영군왕은 완전히 무너져 미쳐버린 듯했다. 그는 백성들을 향해 무지하고 어리석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는 백성들이 조정에 속아 폭군을 현명한 군주로 착각하였으며, 자신 사청엄만이 진정한 군주가 될 수 있었다고 외쳤다.그러나 그의 쉰 목소리는 백성들의 저주 속에 묻혀버렸다. 사람들은 그를 죽이라 외치며 요참형조차 그에게는 너무 관대하다며, 차라리 천 번의 칼질과 만 번의 난도질을 하는 능지처참으로 갚아야 한다고 외쳤다.연왕은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속은 억울함과 사청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만약 사청엄이 자신의 사람들을 배반시키지 않았다면 자신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사청엄은 어둠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던 독사처럼 그가 모르는 사이 치명적인 한 방을 날렸다.사청엄 때문에 그는 이제 단순한 역적이 아니라 어리석은 역적으로 전락했다. 자신이 평생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을 남에게 넘겨야 했고,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묶여 조정의 군대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훗날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이름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그는 평생 동안 권력과 명성을 위해 애써왔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허사가 되고 말았다.형틀에 묶여 처형대로 끌려가는 순간, 그의 온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바라본 세상은 온통 증오와 조롱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그는 울부짖으며 오열했다.이 모든 순간을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대업을 이루기 위해 그는 단 한 가지도 자신의 뜻대로 해본 일이 없었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고, 아내를 맞이하고 첩을 들인 것조차 모두 이용을 위한 수단이었다. 마음에 드는 여인을 만났을 때 단 한 번이라도 마음껏 사랑해보려 했지만, 그로 인해 무상과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눈물이 뒤섞인 시선으로 그는 군중 속에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 자줏빛 옷을 입은 그녀는 아름답고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드디어 대청산이 시작되었다.대리사와 경위 형부의 공동 조사 끝에, 연왕과 영군왕을 중심으로 한 반란이 사실로 밝혀졌다.모두 죄목이 확실했기에,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의 모든 죄목을 하나하나 나열하여 천하에 알리기 위해서였다.연왕 일가는 정보를 제공한 공을 세운 사여령을 제외하고 모두 황실 감옥에 갇혔다.사여령은 황실 족보에서 이름이 제외되었다. 여전히 대리사에서 감옥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긴 했지만, 앞으로 10년 동안은 승진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진이는 그를 일시적으로 직무에서 배제시켰고, 처분이 끝난 후 복직시키겠다고 했다.진이는 선의를 베풀어 그에게 앞으로 이 직책을 계속 맡고 싶다면 황실 감옥에 가까이 가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며 반성하라고 당부했다.진이는 사여령이 어리석기는 해도 성실하고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자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예전처럼 우유부단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기에 진이는 여전히 그를 돌보아 주려 했다.진이는 송석석에게도 사여령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송석석은 사여령이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아 무슨 일이 생겨도 반항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자랐지만, 다행히 적모 밑에서 자라며 훌륭한 교육을 받아 본성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사여령을 특별히 돌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사여령이 진성에 머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황제를 안심시킬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이는 그 말의 뜻을 이해했다. 사여령이 이번 처벌을 피할 수 있던 이유도 연왕의 사병 정보를 제공한 덕이었지만, 일이 지나간 후 황제가 그를 떠올리면 여전히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황제가 그의 직책을 박탈하지 않은 이유는 그를 자신의 눈앞에 두고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그가 진성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그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었다.조정 회의에서 숙청제는 영군왕과 연왕을 비롯한 관련자들의 죄목을 발표했다. 그들의 죄목은
추몽의 눈빛에 섬뜩함이 스쳤다."좋습니다. 위선적인 말 어디 한번 들어보지요."숙청제는 원래 의심이 많아 항상 북명황실을 경계해 왔다. 송석석에게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반기를 들겠냐고 묻는 것도, 비록 그녀가 부정한다 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에 의심을 남겨두기 위한 것이었다.송석석이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렇게 묻는지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녀는 질문을 들었을 때부터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아직 송석석이 대답도 하기 전에, 추몽은 비웃으며 말을 덧붙였다."먼저 아첨하며 숙청제를 치켜세워 보시지요. 그의 정책이 여성을 얼마나 잘 대우했는지 떠들어 보십시오. 양심에 거리낌이 없다면, 마음껏 칭송하시지요."송석석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그의 비꼬는 듯한 도전적인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럴듯하게 가정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근본적으로 전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세상이 어리석고 폐쇄적이라 당신의 기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고,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방식으로 세상의 인정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당신 개인의 문제일 뿐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지도 못하며,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은 그들에게 원한과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이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더 큰 혐오와 배척을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를 안다면 틀림없이 당신을 꾸짖고 비난할 것입니다."추몽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그는 이내 섬뜩하게 웃으며 말했다."결국 대답하지 않으시는군요. 여성이 억압받아 살 길이 막힌다면, 당신은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까?"그러자 송석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만약이라는 것은 그저 가정일 뿐이고 사실이 아니니 제가 굳이 고민할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여전히 대답하지 못하시는군요." 추몽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자 송석석이 차분히 대답했다."살 길이 막혔다는 것과 대다수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것을 같은
제제사와 추몽은 대리사의 심문실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낡은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송석석은 서리의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그들과의 거리가 그리 멀리 않았기에 그들이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더라도 송석석은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숨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 그리고 간혹 들릴 듯 말 듯한 한숨 소리 전부 말이다.하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고, 심지어 서로 시선을 몇 번 마주하지도 않았다. 마치 강제로 한자리에 앉혀진 낯선 이들처럼 거리감과 냉담함이 느껴졌다.송석석은 자신이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지만,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그 어색함을 어쩔 수 없이 함께 견뎌야 했다.오랜 침묵 끝에 제제사가 겨우 한 마디 꺼냈다.“왜 이런 짓을 한 거냐?”그는 진심으로 의아해했고 이해하지 못했다. 마치 눈앞의 사람이 자신이 기억하는 그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아무리 보아도 과거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겹쳐지지 않았다.추몽은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굳이 따져 묻을 필요가 있나?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는 법이지.”“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 아니더냐?” 제제사가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로 묻자, 추몽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어차피 이 생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을 다 할 수는 없었다. 선황제가 그러지 않았나? 나는 패역한 자라고. 그래서 생각했지. 내가 가진 생각들이 진정 패역한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진짜로 패역한 일을 저질러 보자고. 다른 모든 것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제제사가 그의 시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이번 너희 반란으로 수천수만 명이 죽었고, 피비린내는 지금도 가시지 않았다. 네가 이런 짓을 했다는 걸 나는 믿을 수 없다. 네가 언제부터 사람 목숨을 이렇게 하찮게 여겼느냐?”추몽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은 심히 차갑고 냉담해 보였다.“추몽,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잖나.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거냐?” 제제사가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