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주에 대한 시만자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시만자는 채찍을 휘두르며 시민주를 쫓아냈고 시민주는 머리를 감싼 채 쥐새끼처럼 도망쳤다. 연왕의 음흉한 속셈을 잘 알고 있는 송석석은 연왕이 진성을 떠나기 전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홍시를 보내 혹시라도 시만자가 연왕부에 가지 않는지 감시하게 했다. 며칠 연속 감시했지만 시만자는 오직 소진 소주방에만 드나들 뿐 연왕부에는 가지 않았다. 그제야 송석석도 조금 안심되었다. 소진 소주방과 여학은 점차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었지만 여학은 송석석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여학에 들어와 여인들은 사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다들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루 종일 다과나 자수품, 혹은 선물로 귀족 아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쓸 뿐이었다. 일부 귀족 아씨들은 작은 관직의 여식들에겐 오만하게 굴며 차츰 파벌을 형성했다.하여 진심으로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여인들은 오히려 배척당하기 일쑤였다. 또 일부는 훗날 혼인을 하게 되면 가정을 책임질 예정이었기 때문에 정국태부인에게 예법을 배우거나 가정을 관리하는 방법을 익히고자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개학 초기와 완전히 달랐다. 당시에 많은 이들은 심청화의 명성을 듣고 여학에 왔었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개인적인 욕심으로 심청화에게 그림을 부탁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의 글 한 점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설령 퇴학을 하더라도 아깝지 않다고 여겼다.송희희는 훈장으로서 이런 문제를 항상 처리해야 했다.백 명도 넘는 여인들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면 정말 골치가 아팠다. 훌륭한 가문의 여식들이 어찌 이렇게 시끄럽게 군단 말인가? 규방에서 배운 예법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송석석은 급히 꾸짖기보다는 우선 누가 앞장서서 소란을 일으키는지 조사를 했고 조사 끝에 문제의 주동자 몇 명을 알아냈다. 첫 번째는 제 황후의 작은 사촌 동생인 제자예였다. 그녀는 올해 열다섯 살로 갓 성년이 되었고, 아버지는 제 상서의 친동생인 태상시경이다.두 번째는 전
때로는 여성 간의 악의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비록 안태부는 청류의 수장이지만 안여옥은 아직 나이가 어리다 보니 그녀들은 안여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런 간단한 문제라면 송석석은 어떻게든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아군여학을 망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더 컸다. 현재로서 이 무리의 우두머리는 제부의 여식들로 보였지만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약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도 여학을 건드리려 하다니 대담하기 짝이 없었다. 송석석은 그녀가 이번 일로 상처를 받았을까 봐 우선 안여옥을 달래주기로 했다. 안여옥은 미간을 찌푸린 채 글씨 연습장을 한 장씩 넘기며 살피던 중이라 송석석이 다가오는 발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송석석이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 속에 담긴 억눌린 분노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듯했다. “훈장, 언제 오셨소? 아무래도 내가 실례를 범한 것 같군.”송석석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안주강, 앉으시오.” 자리에 앉은 뒤 송석석은 그녀 앞에 놓인 글씨 연습장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방금까지도 안여옥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혹시 학도들이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않은게요?”안여옥은 첫 몇 장을 송석석에게 건네주며 설명을 시작했고 송석석은 안여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글을 더 단정히 쓰게 하려고 천자문을 따라 쓰도록 했소. 헌데 이 몇 명은 천자문이 아닌 전고를 마치 낙서처럼 썼더군. 날 상대로 일부러 이러는 게 뻔하오!” 송석석은 몇 장을 넘겨 살펴보았는데 적힌 전고는 모두 같은 내용이며 전조의 나여옥이라 불리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난을 싫어하고 부귀영화를 탐하는 그녀는 약혼자의 가문이 몰락하자 단호히 파혼을 요구했지만 3년 후 약혼자는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전조 승상의 여식과 혼인해 나여옥은 그만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결국 수식루에서 약혼자의 부인을 만나 비녀로 찔러 죽이는 일이 발생했고 그녀
송석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학도들의 글을 살폈다. 그녀가 글을 쓰게 한 이유는 학도들이 먼저 기본기를 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대부분의 글씨는 그럭저럭 봐줄 만 했고, 심지어는 정말 훌륭한 몇 여인도 있었다. 글씨가 단정하고 꼼꼼한 것이 단 한 획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송석석이 물었다. “기분이 언짢아 보였던 연유가 이거였소? 그렇다면 그녀들이 안주강과 방시원의 일로 떠드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이오?” 안여옥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입이 그녀들에게 달린 것인데 내가 어찌 막는단 말이오? 밥을 못 먹게 하는 것도 아니고 잠을 못 자게 하는 것도, 그렇다고 내 살을 베어내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신경 쓸 연유가 없소.” 안여옥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히려 전조의 이야기를 끌어다 써서 날 비난하다니, 나름 참신하지 않소? 가난을 싫어하고 부를 탐하는 추하고 흉악한 인간을 운운하는 단조로운 비난보다 훨씬 괜찮소.”그 말에 송석석은 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세간의 악의적인 풍문을 이토록 담담히 흘려보낼 수 있다니, 얼마나 강한 마음가짐과 자신감이 있어야 가능할까?그러다 안여옥은 문득 걱정이 스쳤다.“헌데 혹 방 장군께는 피해가 가지 않겠소?”송석석은 담담히 대답했다.“걱정할 것 없소. 이런 일이 보통 사내들에게 상처를 주진 못하오.”잠시 생각하던 송석석이 이어 말했다. “게다가 그녀들이 지어낸 이야기에서 방 장군은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소. 오히려 평판이 더 올라갔 셈이지. 요즘은 그의 군공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모두가 그가 태부의 손녀를 떠나보낸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이야기하더군.”연여옥은 씁쓸한 듯 미소를 지었다.“영향이 없다면 다행이오. 허나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오. 방 장군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니 당연히 높은 명망을 얻어야 할 사람인데 이렇게 애정 문제로 인해 군공이 가려지고 있으니 말이오. 참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소.”송석석은 연여옥이 이런 이야기를 하며 아쉬움을 느
여인들은 하나 같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방금 말하던 여인은 연분홍 비단 테두리가 둘린 중의와 청록색 백접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사랑스러우면서도 귀티가 흘렀다. 그리고 목에는 영락을 걸고 허리에는 파란색 향낭이 달려 있었는데 향낭네는 ‘제’자가 수놓아져 있어 한눈에 그녀의 신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옆에 있던 여인들도 보통 가문 여식들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웃었지만 송석석은 오히려 온화하게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한창 웃고 떠들기 좋아하는 나이인 것 같구나. 그렇다면 여기서 한 시진 동안 실컷 웃거라. 한 시간이 지나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가 손뼉을 치자 모퉁이에서 홍시의 자매인 만소가 걸어 나왔다. 그녀는 공손히 손을 모으며 "왕비님"이라고 하며 인사를 건넸다. 홍시, 청미, 비윤, 만소는 평사저가 진성에 두고 간 사람들인데 홍시는 주로 조사를 맡고 만소는 그녀 옆을 따랐는데 굳이 그녀가 필요한 상황은 많이 없었다. 심지어 오늘이 처음이다. 비록 안여옥에게 직접 처리하라고 했지만 그녀를 건드렸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송석석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소야. 한 시진 동안 웃고 있는지 잘 지켜보거라. 만약 한 시진을 채우지 못한다면 아군 여학에서 당장 내쫓거라.” 그러자 제자예는 싸늘한 얼굴로 송석석을 가로막았다. “우린 정식으로 명첩을 가지고 입학했는데 지금 내쫓겠다고 하신 겁니까?”"아군 여학의 규율을 지키지 않고 감히 훈장을 조롱하고 도발한 것은 퇴학당해도 억울하지 않을 일이다." 말을 마친 송석석은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그러자 제자예가 억울한 표정으로 솔리 질렀다. “저희가 언제 조롱했습니까? 뭐가 찔리셔서 그러시는 겁니까?!” 송석석은 고개를 돌려 살짝 미소를 지었다. “찔리는 건 없다만 넌 곧 웃음거리가 될 것이야. 여학에서 쫓겨난다면 최소 한 달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테야.””제 조부는 제제사이시고, 제 언니는 황후마마이십니다. 부친은 예부상서로 상국 관료의 승진을
제자예는 얼굴이 얼어붙은 채 마지못해 한 시진 동안 웃었다. 그 후 그녀는 바로 정국태부인에게 고하러 갔다. 국태부인은 인자하고 자상한 사람이다. 처음에 그녀는 예의, 다과, 장부 관리, 사람 부리는 법과 하인을 다스리는 법 등만 가르쳤는데, 이는 이들 학도들의 출신 배경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고귀한 집안에 시집가든 낮은 집안으로 시집가든 가정을 맡아야 할 일이 많을 테니 말이다.예의는 대부분 이미 배웠지만 그래도 가볍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이것은 그녀가 학생들에게 나중에 손님을 대하거나 타인을 응대할 때 실례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장부를 읽고 사람을 관리하는 것은 여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인 지식이다.전통상 여성은 집안일을 맡아야 하기에 기본적인 능력을 익혀야만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었다.그녀의 교육 방식은 현실적이었다.여인은 사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목소리를 들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동등한 대화를 나눌 자격조차 없었다.국태부인의 교육은 제자예가 자신과 같은 귀족 출신은 당연히 지위가 다르고 시녀는 누구의 하인이라도 하인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그녀는 국태부인이 그녀의 편들어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그러나 국태부인은 천천히 온화한 미소를 거두며 말했다.“그렇다면 훈장의 처벌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제자예는 깜짝 놀랐다. 국태부인이 자신들의 편들지 않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말했다.“국태부인, 설령 훈장이라 할지라도 제멋대로 학생을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국태부인은 표정이 싸늘해졌다.“모욕? 내가 보기에는 훈육이었다. 학도라면 당연히 선생의 말을 들어야지. 왕비는 아군여학의 훈장이다. 나 역시 그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그녀를 비웃었다지? 이는 선생에 대한 불경이다. 불경이 어떤 죄목인지 너희 조부께 여쭤보거라. 훈장이 오늘 너희들에게 내린 처벌은 가벼운 편이다. 만약 나였다면 오늘 당장 너희들을 떠나게 했을 것이다.”국태부
진성을 떠나기 전, 연왕은 궁에 들어와 영비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영비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너에게 효심이 있다면 폐하께 청을 드려 나도 연주로 데려가거라. 모자가 떨어져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이 상황을 나는 피하고 싶다.” 연왕은 땅에 무릎을 꿇고 목이 메어 말했다.“아들 역시 모비를 떠나기 싫으나 연주는 아무래도 궁처럼 편하지 않습니다. 먼 길을 가시다 병환이라도 나시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영비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예전에는 네 여동생이 날 돌봐주었지만 지금은 그 아이가 종인부에 들어갔다. 헌데 너마저 떠난다면 난 여기서 뭘 기대하겠느냐? 난 병이 다 나았으니 먼 길을 떠나는 건 문제가 없다. 제가 청을 드리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주청을 드릴 것이다. 폐하께서는 자애로우니 반드시 허락하실 거라 믿는다.” "모비, 저희 모자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영비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오랜 병환으로 그녀의 손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여위었지만 힘은 아주 강했다."아들아, 지금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히 살고 있다. 남강도 수복되었고 성릉관 전쟁도 끝났다. 앞으로 잘만 다스리면 우리 상국은 네 아버지께서 바라시던 태평성대가 될 것이다. 모두가 부유하고 평화로운 시대 말이다.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모비는 평생을 이 깊은 궁궐에서 보냈기에 세상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백성들이 평안한 날을 바란다는 건 알고 있다."연왕은 표정이 잠시 굳어졌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모비, 모비께서는 평생을 궁궐에서 보내셨기에 어쩌면 들으신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경성이 부유한 건 사실이나 아직도 많은 백성이 물과 불 속에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지도 못하고 따뜻한 옷도 입지 못한 채 아들딸을 팔며 아내를 전당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부과와 부역이 그들을 숨도 쉴 수 없게 짓누르고 있습니다."영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연왕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았다.“게다가 남강
연왕은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짜증도 났다."어찌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들이 모비 곁에 있을 수 없으니 태후가 모비를 잘 돌봐주길 바라는 겁니다. 그래야 아들이 날마다 걱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됐으니 그만하고 이제 가거라. 꼭 몸조심하고."영비는 손을 저었다.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인데 어찌 그의 성정을 모를까? 그의 표정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리 없었다."아들이 불효자식입니다. 지금이 칠월의 찌는 더위가 아니었다면 모비를 봉지로 모시고 갈 수 있었을 텐데, 모비를 모셔간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설령 아들이 결백하다 한들 폐하의 의심 많은 성정을 생각하면 아들은 틀림없이 몇 가지 죄목을 뒤집어쓸 겁니다."영비는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알겠으니 이만 가거라."연왕은 큰절을 올린 뒤 시민주와 측비 김씨 그리고 네 자녀를 불러 영비에게 작별 인사를 올렸다.영비는 며느리들과 손주들을 보았음에도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들이 모두 물러난 뒤 영비가 몇 차례나 기침을 하자, 곁에 있던 고 공공이 영비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더운 날씨에 길을 떠나는 것도 불편하니 왕야께서도 마마님을 위해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영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너도 저 아이를 어려서부터 봤으니 잘 알지 않느냐? 정말 효성이 있다면 왜 삼사월에 떠나지 않고 굳이 이 찌는 더위에 떠나겠느냐. 그 번지르르한 말들은 그냥 흘려들으면 된다. 어릴 적부터 그래왔지. 좋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도 천 가지, 만 가지 핑계를 만들어 자신을 변명하니 다들 그를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연왕은 명성을 아끼는 사람이다. 작은 흠집도 용납하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런 성정으로 그런 계략을 꾸미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지. 내가 비록 여인이지만 큰일을 이루려면 소소한 것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안다. 천하를 훔칠 생각을 하면서도 명성을 얻고자 한다면 결국 둘 다 잃을 것이
연왕은 이별을 고하기 위해 온 가족을 데리고 태후에게 문안을 올리러 갔고 숙청제 역시 자리에 있었다.숙부와 조카는 각자 마음속에 품은 생각이 달랐지만 태후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며 그저 집안일과 예전 이야기를 나눴다.태후는 깊은 감회에 젖은 듯 선제가 살아 있을 때 항상 연왕과 그들 형제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고 했다.“언제는 형제 몇이 선제를 따라 사냥에 나섰는데 연왕은 어리기도 하고 기운이 넘쳐 본인만큼 큰 말을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요. 그런데 그 말이 갑자기 날뛰는 바람에 연왕은 땅에 내던질 뻔하지 않았습니까? 그때 선제가 재빨리 말을 타고 연왕에게 달려가더니 채찍으로 연왕을 감았으나 두 사람 모두 결국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어요. 다행히도 선제 덕분에 큰 부상은 면했지만 선제 본인은 등이 바위에 긁혀 피를 철철 흘리는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선제는 형제들 중에서도 연왕을 가장 아낀다고 하셨어요. 총명하고 착하며 효심도 깊어서 좋은 것이 있으면 항상 연왕의 몫도 챙겼지요. 당시 분봉할 때도 연왕이 부귀하고 평온하게 살았으면 해서 연주를 준 겁니다.” 태후는 이런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선제의 그 깊은 마음만은 꼭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형제의 정을 마음에 새길지는 결국 연왕 본인에게 달린 일이었다.연왕은 선제를 추억하는 듯 눈물을 흘리며 감성에 빠졌지만 숙청제는 마치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 태후의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사여령에게 물었다.“짐이 그대가 학문이 깊고 식견이 뛰어나다는 것을 들었다. 혹시 조정에 나아가 관직에 나설 뜻이 있는가?”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사여령은 잠시 멈칫했지만 연왕이 재빨리 말했다. “여령아, 어서 폐하께 감사드려라!” 그러자 사여령이 즉시 무릎을 꿇고 공손히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동생이 도움이 될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내려주십시오. 다만 조정에 나가 관직을 맡는 일은 신제가 재주와 학식이 부족하여 감당할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