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여묵은 약간 짜증이 났다. 전북망이 도무지 눈치가 없어서였지, 질투 때문은 아니었다.송석석이 방금 어서방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뒤였는데 전북망이 그런 자리에서 그녀를 붙잡고 질문을 하다니, 정말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어서방에는 궁인들뿐만 아니라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는 대신들도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송석석이 말했다."상대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가 다시 이방에 대해 물어볼 줄은 몰라서 조금 의외였을 뿐이에요.""신경 쓰지 마시오." 사여묵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 서우를 데리러 가자."마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노을의 잔광이 마차 커튼 틈새로 스며들어 두 사람의 얼굴에 따스한 금빛을 드리웠다.서원에 도착하자 장대성이 마차를 세우고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후, 그가 서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서우는 이제 훨씬 차분해졌다. 서원에 막 다니기 시작했을 땐 고모와 고모부가 자신을 데리러 오면 신나서 깡충깡충 뛰어 달려 나왔지만 이제는 단정하게 걸어 나왔다. 비록 표정은 잔뜩 신이나 있었지만 말이다.서우는 마차에 올라 사여묵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린 후에야 고모의 품에 안겨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고모! 오늘 선생님이 저를 칭찬해 주셨어요. 제가 쓴 글이 훌륭하대요!"송석석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오, 우리 서우가 이제 글도 쓰는구나?""네!"서우는 신난 얼굴로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송석석에게 내밀었다."고모, 보세요. 이게 제가 쓴 글이에요!"송석석은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글을 배우기 시작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았기에 글씨에 역동적인 멋은 없었지만, 글자 하나하나가 반듯하고 힘이 느껴졌다. "글씨가 참 예쁘구나.” 그녀는 서우를 칭찬한 뒤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글의 표현은 다소 유치했지만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이 분명하고 주제가 뚜렷했다. 서우가 똑똑하고 생각이 명확한 아이임을 엿볼 수 있었다.송
대황자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빛이 모두 변했다.서우는 고모 옆에 서 있다가 조금 당황한 듯 옷자락을 꼬집었다. 사실 그에게서는 약간의 냄새가 나긴 했다. 매번 집에 돌아오면 단신의가 지어준 약물로 목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우 자신은 그 냄새에 익숙해져 있어서 더 이상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그의 마음속에 있던 열등감이 다시금 서서히 올라왔다. 거지였던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냄새나니까 꺼져!”송석석은 한 손으로는 서우의 손을 꼭 쥐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고모는 이 약초 향이 좋은데?"서우는 고모의 따뜻한 눈빛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렇다. 남들이 한두 마디 한다고 이렇게 위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그는 고모에게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는 눈빛을 보냈다. 제 황후는 태후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 대황자를 끌어오며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하라고 가르쳤느냐? 당장 송국공께 사과드려라!”대황자는 턱을 쭉 내밀며 말했다."저는 거지한테 사과하기 싫어요!"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황자는 자신의 몸이 공중에 뜨는 것을 느꼈다.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엉덩이를 두 차례 강하게 얻어맞았다. 그는 아파서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어서 눈물 닦지 못할까!”사여묵이 그를 안아 들고 매섭게 소리쳤다.대황자가 아무리 거만하게 횡포를 부려봤자 겨우 일곱 살에 불과했다. 어린 아이가 사여묵의 이런 엄한 태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대황자는 곧 울음을 꾹 삼켰다. 훌쩍이며 눈물을 그렁그렁한 채로 제 황후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제 황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얼굴 또한 굳었다."사과해. 안 그러면 황숙이 네 아바마마께 이 일을 모두 말씀드릴 거야."그녀는 말하면서 태후를 흘끗 바라보았다. 태후는 천천히 차를 들며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대황자는 마지못해 서우에게 사과했다.서우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위로했지만 대황자는 이를
어전에서 숙청제가 오 대반의 보고를 들었을 때 숙청제는 얼굴이 새파랗게 될 정도로 화가 났고 분노에 차 외쳤다."이 못난 놈 같으니라고!" 그러자 오 대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폐하, 태후께서 혜 태비에게 명하시어 왕야와 왕비를 궁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태후께서 송국공만 남겨 함께 식사하시고, 궁문이 닫힐 때쯤 내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숙청제가 명을 내리며 말했다."직접 어선방에 가서 태후께서 좋아하시는 요리를 몇 가지 준비하게 하라. 내가 태후와 함께 식사를 하러 갈 것이다.""예!"숙청제는 이어 명령을 덧붙였다."또 장춘궁에 가서 내 명을 전하라. 전북망에게 대황자를 데리고 태묘에 가서 무릎 꿇고 참배하게 하라. 그리고 전북망에게 송가가 치른 모든 전투에 대해 그에게 가르치게 하라. 내가 나중에 질문할 것이다."오 대반은 이 명령이 아주 좋다고 여겼다 특히나 대황자를 전북망이 데리고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오 대반이 물러난 후, 숙청제는 눈앞에 쌓인 상소문들을 보며 갑자기 모든 의욕을 잃었다.최근 2년 동안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이 태자를 책봉해달라고 청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역대 왕조에서도 태자 책봉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조정 앞과 궁궐 뒤, 공신과 외척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복잡한 구도를 형성해왔다.하지만 이 조정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태자를 세운다면 장자와 적자를 우선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대황자는 장자이자 적자로서 신분의 존귀함이 다른 황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태자 책봉에 있어 의심할 여지없이 대황자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황후와 제씨 가문도 여러 차례 그의 반응을 살피며 의사를 떠보았지만 숙청제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대황자는 능력이나 성품 모두 태자로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상국을 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숙청제는 한없이 불안해졌다.다행히도 그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태
숙청제가 죄책감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모든 것이 소자의 잘못입니다."그러자 태후가 이어서 말했다."내가 본래는 황제와 송씨 가문 자제들 간의 친분을 이야기하고 함께했던 지난날을 들려주며, 황제께서 황제라는 신분을 잠시 잊고 단지 어른으로서 서우를 대하도록 말씀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합니다. 누군가 계속해서 일깨워야만 기억할 수 있는 감정이라면 그 감정 자체가 이미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께 직접 통첩을 드립니다. 반드시 그 아이를 잘 대우하고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십시오."태후의 말은 숙청제로 하여금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그는 이 순간에서야 자신에게도 한때 절친한 벗들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당시 송씨 가문과의 교류는 온전히 순수한 의도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 우정만큼은 진심으로 소중히 여겼다.송씨 가문의 부자가 희생되었을 당시, 그는 막 황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았었다. 그의 마음은 무엇보다 전조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며 다시 공을 세워 나라를 재건하는 데 더 많이 쏠려 있었다.그는 남강을 되찾는 공로를 매우 중시했기에 송씨 가문의 부자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슬픔이 아니라 극심한 걱정이었다. 이후 동생을 남강으로 파견했고 매 순간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기만을 기다렸다.그 기다림 속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송씨 가문의 부자들이 희생된 슬픔을 외면했다. 그렇게 마침내 대승을 거두자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만이 가득했다.태후의 말은 숙청제를 깊은 회상으로 이끌었다. 오랜 시간 추억 속에 잠긴 그는 죄책감과 슬픔에 조금씩 잠식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그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숙청제는 몸을 굽히며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소자가 약속드리옵니다. 오늘과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소자가 살아 있는 한 아무도 감히 서우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태후는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황제가 약속을 반드시
황후의 말에 숙청제는 용안이 일그러지며 크게 분노했다. 그는 찻잔을 거칠게 휘둘러 황후 앞에 내던졌다.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황후는 그 소리에 놀라서 얼어붙었고 순간 멍해졌다.하지만 그녀는 황제가 지나치게 과민하다고 여겼다."폐하, 그저 어린 아이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일 뿐이지 않습니까. 서우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크게 화를 내시는지요?"숙청제는 차갑게 대답했다."황후가 그 아이가 장차 그저 평범한 어린아이로 남길 원한다면, 그 뜻을 따르겠소."제 황후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이런 말이 외부로 전해진다면 조정의 신하들이 이를 마음에 새길까 두렵습니다."숙청제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그것이야말로 좋지 않소? 어차피 황후는 그 아이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니, 장차 그는 한가한 왕자로 남아 동생들의 그늘 아래서나 밥을 빌어먹게 될 것이오."제 황후는 그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거의 기절할 뻔한 그녀는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휩싸였다.오랜 시간 편안한 궁중 생활에 익숙해진 황후는 황권이라는 것이 본래 가시밭길임을 잊고 있었다. 단지 신분만으로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에 그 아이가 제멋대로 행동하게 했습니다. 앞으로 그 아이가 큰 능력을 갖추지 못하거나 중요한 일을 맡지 못하게 된다 해도, 이는 모두 제 탓입니다. 오늘부터 그 아이를 엄격히 지도하여 넓은 마음과 올바른 품성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숙청제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냉정하게 말했다."빈말을 듣고 싶지 않소. 일년을 기한으로 하겠소. 그때까지도 그 아이가 여전히 경중을 모른 채 경솔하게 행동하고 학업에 뒤처지며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는 고려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을 것이오."황후는 숙청제가 일년의 기한을 주겠다고 하자 안도의
북명황실은 밤이 되어서도 환한 불빛으로 밝았다.염선생은 황제가 내린 하사품을 하나하나 장부에 적어 따로 정리했다. 나중에 서우가 국공부로 돌아가 작위를 계승할 때 다시 돌려보내기 위함이었다.한편 송석석은 서우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산책을 하며 둘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서우의 기분과 오늘 일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서우는 고개를 들어 밝은 얼굴로 고모를 쳐다보며 말했다."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요? 그냥 한마디 말일 뿐인데요. 화낼 가치도 없어요. 태후 마마와 황제께서 저를 정말 잘 대해 주시잖아요. 하사품도 그렇게 많이 주셨는데, 그 말 한마디와 비교가 되겠어요? 게다가 대황자는 아직 어리잖아요. 조금 더 크면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거예요."송석석은 그의 코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웃었다."꼬마야, 대황자가 아직 어리다고 하지 말거라. 너는 얼마나 크다고 그러니?"하지만 서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대황자보다는 제가 더 크잖아요."서우는 고모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챘다. 그리고 아저씨조차도 안심하지 못한 채 뒤에서 몰래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서우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정말 별일 아니에요. 오늘 모두 돌아가신 뒤에 태후마마께서 저에게 말씀하셨거든요. 앞으로 저는 매일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고요. 우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송가의 모든 죄를 대신 받으시고 행복과 즐거움을 저희에게 남겨주셨대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분들의 행복이래요."송석석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찔린 듯 아릿했다.이 모든 말이 위로를 위한 것이란 걸 알지만, 그녀와 서우는 이미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자 그들이 바라던 모습일 것이다.고모와 조카는 맞잡은
송석석은 지금껏 태자 책봉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그 이유는 첫째로 황제가 아직 젊기에 이렇게 이른 시기에 태자를 책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둘째는 본 조정에는 적장자가 있었는데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관료 가문에서도 서장자가 있는 경우가 흔한데, 하물며 황제의 삼궁육원에서는 후궁이 황후보다 먼저 임신하면 장자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훈작세가의 관례로서는 정실 부인이 들어오기 전에 통방이 아이를 낳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통방이 잠자리를 가진 뒤에는 피임약을 먹어야 했고, 실수로 임신했다 하더라도 낙태약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황실은 달랐다. 후궁이 임신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황실의 혈통으로 인정되었다.공비가 황후보다 먼저 임신했을 때, 당시 황후는 공비가 황실의 장자를 낳을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다행히 공비가 낳은 아이는 공주였고 황후는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이 모든 것은 송석석이 당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송석석은 그 이후로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황제가 적장자를 두고 있는 만큼 반드시 훌륭히 키울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지금과 같은 성격으로 자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송석석은 황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온 진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규수로, 문무를 겸비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황후는 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읽은 사람이었으니 아이를 지나치게 방임하면 결국 해롭게 된다는 도리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게다가 그 아이는 장차 황태자가 될 존재인데 말이다."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오. 생각하면 마음만 복잡해지오. 황태자 문제는 황제께서 매우 신중하게 결정하실 거요." 사여묵이 손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말했다. 그의 수려한 얼굴은 은은한 등불 아래서 더욱 부드럽게 빛났다."황태자 문제는 우리 북명황실이 감히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니 그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소. 어머니께서도
안운여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조용히 물었다."이제 소대장군도 군대를 철수하기로 약속했는데 향병은 어떻게 처분하실 생각이십니까?""그녀를 위해 변호하려는 것인가?"안운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그녀가 공주님을 해치려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하지만 본래 여관의 수는 적지 않습니까. 상병은 승진 가능성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아마 더 이상 위로 올라갈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공주님께서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수 없으십니까?"냉옥 장공주는 눈빛을 차갑게 가늘게 뜨며 단호히 말했다."아니, 그녀에겐 기회가 없어.""그녀도 태자를 위해 복수하려던 것이지 않습니까……""안운여!"장공주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냉랭하게 경고했다."정말 그녀의 자리가 여성이 올라가기 어려운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녀를 위해 변호지 말아야지. 너희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비난할 것이다. 특히 그녀는 누구보다도 신중했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중히 세 번은 생각했어야 했다. 여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걸어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꾸로 행동하며 복수만을 위해 서경을 위험에 빠뜨렸고, 백성들의 생사와 수십만 장병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역이 이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조금의 계획도 없이 오직 복수를 모든 것보다 중요시 여기며, 나를 해치려 한 것도 모자라 두 나라의 전쟁을 부추겼다. 전쟁을 일으킨다고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으냐? 서경이 전쟁을 치른다면 군량미는 어디서 나오겠느냐? 황제가 화풀이하듯 말했던 것처럼 정말 민간에서 장정을 징집해야겠느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일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안운여는 지금의 서경이 국력을 다해 싸울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그러자 송석석이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왕씨 가문에서는 그녀를 아주 잘 대해줍니다. 조카딸의 혼담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시집간 부군이 잘 대해준다 하더군요. 다만 그녀는 자신이 두 번 시집갔음에도 처가에 머무는 것이 조카들에게 미칠 영향이 걱정되어 그러는 모양입니다.”그 말에 전북망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순간 번개처럼 날렵하지만 마음씨 따뜻한 최씨 부인이 떠올랐다. 최씨 부인에게는 적자와 서자녀들이 있었고, 아직 혼담이 정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런 그녀가 혼인 문제로 얼마나 많은 유언비어에 시달렸을지 생각하니, 전북망은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형수로서의 최씨 부인을 존중하며, 그녀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할 바 없었다. 이때 송석석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그럼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전북망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물었다. “우리 단둘이 여기에 있으면, 섭정왕이 질투하지 않을까요?” 송석석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침착하게 답했다. “이 정도 신뢰도 없다면, 제가 어찌 현갑군 지휘사로 오래 근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숨김없이 모든 걸 공유합니다. 이번 만남 역시 그분께 이미 알려두었죠.”송석석이 떠나자 전북망도 따라나섰다. 그는 섭정왕이 어딘가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의심했지만, 정작 별청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앞마당에서야 섭정왕을 발견했는데, 그는 대장군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송석석을 보자 미소로 맞이하며 불러세우는 섭정왕의 모습에 전북망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정한 부부란 저런 것일까.'그러나 성릉관이든 진성이든, 남녀의 단독 만남은 명예에 흠이 될 수 있음도 잘 알았다. 특히 높은 지위에 오른 이들은 더욱 조심해야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걱정하는가.’자조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왕청여의 제안은 여전히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5일의 고민 시간이 주어졌다. 사여묵과 송석석이 진성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씨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답은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 전북망은 송석석과 다시 만났다. 사실 그전에도 송석석이 성릉관으로 갔을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먹해서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이 매번 성릉관을 떠날 때마다 몰래 배웅하곤 했다. 전북망은 자신이 당시 어떤 마음으로 그런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늘 송석석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이방과 왕청여에게도 미안하긴 하지만, 그들과는 서로 감정을 소모하고 다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장군부만 송석석에게 상처를 줬을 뿐, 송석석은 장군부에게 조금의 상처도 주지 않았다. 비록 이혼한 후에는 전북망 어머니의 병세에 대해 상관하지 않았지만 큰형수에게 어떻게 단설환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주기까지 했다. 소 대장군의 팔순 생신 때는 이미 섭정 왕비가 되어있고 나서였다. 변방의 전사들에겐 양식과 무기가 풍부하고, 봉록까지 올라, 그들에겐 이득이기에 이제는 조정의 정세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섭정왕은 한때 장수였기에 병사들이 배불리 먹어야만 국토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북망과 송석석이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섭정왕과 함께 소 대장군에게 생신을 축하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보는 소 대장군의 눈빛은 여전히 자애롭고 인자했다. 전북망은 사람들을 사이에 두고 멀리서 그 광경을 보며, 그때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면 지금 송석석과 함께 노장군의 생신을 축하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것이라는 후회를 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같은 생각인 걸 보니, 자신만 제자리에서 멈춰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송석석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생일잔치가 끝난 후에 송석석이 뜻밖에도 먼저 그를 찾았다. 그와 송석석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섭정왕은 이상한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지도 않는가?’전북망은 당황하고 불안해 보였고, 송석석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먼저 입을 열지도 못하고 송석석이 말하기만을 기다리
전북망은 성릉관에서 몇 년 동안 두 번이나 발탁되었고, 지금은 장군의 신분으로 수천 명의 병사를 관리하고 있다. 계속 성릉관에 주둔하고 있어 다시 진성으로 돌아간 적이 없었고, 진성의 부름 없이는 제멋대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재혼도 하지 않고 여전히 혼자 살아갔다. 성릉관의 모래바람은 해마다 그의 얼굴에 흔적을 남겨 또래들보다 몇 살이나 더 늙어 보였다. 심지어는 몇 년 동안 불면증에 시달렸기에, 진정제를 먹어야만 잘 수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그때 이방과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송석석과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부부가 되었을까? 아마도 우린 귀여운 자녀도 낳았겠지. 그리고 나는 군대에서 열심히 일하고 석석은 가문의 내무를 책임지며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돌보고 있었겠지? 설령 내가 승진을 하지 못하고 평생 장군으로만 살아도 그는 날 떠나지 않았겠지.’ 이전의 전북망은 송석석이 하늘을 나는 독수리였는데 자신을 위해 날개를 부러뜨리고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며 군부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책임지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리고 그가 알아차렸을 땐 이미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전북망에게는 이미 이방이 있었고 이방을 사랑한다고 했으니, 송석석이 이혼하자고 했을 때 그는 심한 말을 하고 후회하지 말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송석석 또한 후회할 게 없었다. 이혼을 하면서 전북망을 위해 부러뜨렸던 날개가 다시 자라나 전쟁터로 날아가 쉽게 공을 세웠으니까 말이다. 이방은 송석석이 큰 가문의 아가씨인 데다가 부친과 오라버니가 그를 위해 길을 닦아주었기에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북망은 송석석의 성공은 그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주된 원인은 아닐 것이다. 만종문에서 송석석의 무공은 거의 최고였는데, 그건 송석석이 그만큼 노력을 했고, 그만큼 땀을 흘렸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전북망은 송석석을 존경했지만 그는 자신이 송석석을
어머니께 간청해도 소용이 없자 신이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더 심한 꾸지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신이가 이 혼사를 반대하는 것은 양지춘과 접촉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양지춘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서 놀며 감정을 쌓으라고 했다. 신이는 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억지로 그녀를 마차에 태웠고, 심지어는 하녀에게 그녀가 부적절한 말을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엄명했다. 양지춘의 얼굴은 그나마 멀쩡하게 생겼는데, 처음에는 신이를 조금이나마 존중하는 척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신이의 외모와 품평을 논하며 신이가 외모가 예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그를 부인으로 들이지 않겠다고까지 했다. 그의 오만한 태도는 신이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단지 이것뿐이었다면 아마도 신이가 결혼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양지춘은 일부러 신이를 마차에 태워주는 척하며 그녀의 엉덩이를 꼬집었다!그 순간 신이는 온몸의 피가 머리 위로 솟구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경박한 눈빛에 신이는 이내 눈물이 쏟아졌고, 모욕감에 온몸을 떨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집에 돌왔는데, 하녀와 마부는 그의 동작을 보지 못한 탓에, 오히려 그가 세심하고 자상하다며 그녀의 어머니 앞에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이는 억울해서 어머니에게 그 일을 말했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그녀가 일부러 꾸민 말이라고 생각해, 그녀를 꾸짖으며 사흘 동안이나 외출을 금지했다. 신이는 그렇게 방에 갇혔고, 매일매일을 눈물로 얼굴을 씻었다. 심지어 그날 선비의 말을 듣고 호수에 뛰어들지 않은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 ‘내가 양지춘에게 시집가는 것이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대체 무엇이 다른가?’ 사흘 후, 외출 금지가 해제되자마자 신이는 다시 경산사로 가서 같은 핑계로 하녀를 내보냈다. 이번엔 정말 죽을 각오로 호숫가에 간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곳에서 다시 그 선비를 만났다.그는 쓸쓸하게 호숫가에 앉아 작은
신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고, 나무 그늘에 몸이 가려져 있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초라해 보였고 눈 밑에는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바로 다리 앞에서 그림을 팔던 선비이자, 학정이 말하던 퇴학 해서 기녀를 키우는 학생이었다!“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신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짜증을 냈지만, 그가 한 말을 떠올리자 내심 두려웠다. “나는 여기에 물귀신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거짓말하는 것이겠지요.” 신이는 죽음은 두렵지 않았지만, 귀신은 두려웠고 진흙탕에 영원히 깔려 있는 건 더욱 두려웠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가 걸어 나오자 얼굴은 더욱 여위어 보였다. “호숫가의 주변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아름다운 경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건 사람들이 이곳으로 예불하기 위해 오는 것이지, 경치를 보러 오는 것은 아니니까요. 절을 하고 바로 돌아가니 당연히 보지 못하겠지요.” 신이는 그렇게 말했지만, 순간 깊이가 보이지 않는 호수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그는 여전히 굳게 서서 말했다. “예불하는 사람은 천지와 자연을 경외하기 때문에 이런 좋은 경치가 있다면 반드시 한 번 보러 올 것입니다. 이런 곳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는 좋은 곳일 텐데 아무도 없다는 게 아기씨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것이 사실인지는 몰랐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히 그런 무서운 곳에서는 죽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자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한 번뿐인 인생이니 절대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고 싶어도 살 지 못하지 않습니까?” 신이는 그의 말이 이상하게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 밑은 이내 붉어졌고 눈물이 고여 반짝이는 것 같
신이의 사촌 여동생과 하녀는 신이를 찾으러 돌아왔다. 신이가 하녀보고 이순에게 삼백문을 주라고 하자 이순은 웃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원래는 우연한 만남일 뿐이라 다시는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 조모님의 생신 때 가문 연회에서 공학정이 데리고 온 제자들 중에 이순이 있었다. 강남의 예의 규율은 진성처럼 엄격하지 않아서 연회에 참석할 때 여인들도 앞마당에 갈 수 있었다. 이순은 신이를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신이는 그때 면사포를 쓰고 있었고 두 눈만 드러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순은 식사를 하지 않고, 신이의 조모에게 생신 축하 그림만 드린 후에 집에 일이 있다며 작별을 고했다. 그가 떠나자마자 학정이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운 말투로 말했다. “총명하긴 한데 진취심이 없어서 계속 학교를 그만두겠다는 걸 여기로 데려와 진취성이 있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게 하려고 했는데… 이 정도로 사리분별을 할 줄 모르다니. 정말 실망이군. 학교를 그만두겠다면, 이젠 마음대로 하라고 해야겠어.” 그러자 신이의 부친이 위로했다. “화내실 필요 없습니다. 선생님껜 학생이 많으니 그가 나간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학정은 마치 울화가 쌓인 것처럼 말했다. “그는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네. 그런데 진취성만 없는 것이 아니라 여기저기 동창에게 돈을 빌리질 않나, 게다가 집에 기녀까지 키우고 있다더군.” 신이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런 사람은 얘기할 가치도 없습니다.” 신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속으로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날은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같다고 생각해 마음이 갔던 것 같았다. 그렇게 몇 달 후, 신이의 혼사도 낙착되었다. 그녀의 약혼자는 회주 지부의 둘째 아들인 양지춘이고, 올해 22살이었다. 22살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던 건 첩을 통해 서자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좋은 가문은 그
그의 이름은 신이었는데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해서 말할 때, 경멸하는 기색을 띠었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모르는 사람까지 모두 침을 뱉으며 뻔뻔하다고 할 정도였다. 알다시피 애인과 야반도주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것보다 더 욕먹을 일이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후회하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는 시집간 것을 후회하지 않지만 죄책감을 느끼긴 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시 씨 가문의 명성이 손상되어 형제자매들과 조카들이 혼사에 어려움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신이는 시 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태어날 때부터 온갖 보살핌을 받아왔다. 먹는 것은 물론 모두 산해진미이고, 입는 것도 모두 능라 비단이었다. 게다가 보모님과 오라버니의 총애까지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한 가지 결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열네 살 때까지 월사가 오지 않은 것이었다. 많은 의사들을 불러 진찰을 받고 밤낮으로 약을 먹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녀에게 몸이 차서 그러니 몸조리를 하면 나을 수 있다고 위로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몰래 의사가 부모님께 하는 말을 들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차서 그런 병이 생긴 것이 아닌, 아이를 키우는 곳이 어린아이와도 같아서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마치 작은 꽃병과 같아서 꽃을 꽂을 수는 있지만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건 불가능하다고 비유했다.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좋은 사람에게 시집가서 부군에게 첩을 들인 후, 첩이 낳은 아이를 친자식처럼 키우라고 조언해주었다.시 씨 가문이라는 후원이 있으면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없어도 아무도 그녀의 지위를 흔들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 씨 가문의 재물은 그녀가 평생 부귀하게 살기에 충분했다. 신이의 조모도 그녀에게 아이를 낳을 수 없으니 자세를 낮춰야 한다고 했다. 시 씨 가문의 딸이라고
추운 겨울이 되자 눈이 내려 성릉관은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마치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이황자는 몇 년 동안 너덜너덜한 승복을 입고 발우를 받쳐 들고는, 가는 길에 동냥을 하다가 절을 보면 이틀 묵으며 부처님께 참회하면서 살았다. 사실 그는 원래 있던 절에서 계속 지낼 수 있었다. 편안하진 않지만 풍찬노숙할 필요도 없고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곳에서는 평생 죄를 씻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계속 길을 걷고 계속 고생해야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했다. 그가 성릉관에 도착했을 때 짚신은 이미 찢겨 있었고 발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이제는 신발을 신지 않고도 자갈이 가득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추운 날씨에는 모든 옷을 껴입어도 추위를 막을 수 없었지만 이미 익숙해진 뒤였다. 그는 눈보라를 맞으며 성릉관에 위치한 감은사로 향했는데, 몇 년 동안 발걸음을 멈춘 적이 없는 탓에 고단함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심지어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아 그는 눈이 가득 쌓인 길에서 의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는 따뜻한 두꺼운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그가 있는 방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살짝 열린 창문으로 눈에 눌려 허리가 굽은 나뭇가지가 보였다. 그는 눈동자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렇게 편안하고 따뜻한 느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순간 욕심이 생겨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어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문이 활짝 열렸다.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더니 다시 힘없이 침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있거라.” 이때 누군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면서 약그릇을 그의 침대 옆에 놓았다. 그는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익숙해,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돌려보니, 그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서우 형?!’ 그는 자신이 잘못 보았을까 봐 다시 자세히 보려 했지만, 몸이 너무 어지러운
대황자는 봄 사냥 때 숙청제에게 꾸중을 듣고 돌아간 후 앓아누웠다. 당시 이황자와 서우가 모두가 걱정했는데 덕비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는 이번 일을 겪으면서 황제폐하께서는 분명히 대황자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덕비는 이황자를 안고 반드시 부지런해야 하고, 태부와 황숙의 말을 잘 듣고 누구보다 잘 배워 황형을 제압해야 한다고 당부까지 했다. 그로 인해 이황자의 마음은 몹시 복잡했다. 덕비가 줄곧 그에게 태자와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지 말해주었을 때 비록 그도 마음이 설렜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 그와 대황형, 서우 형, 그리고 셋째 동생이 사이가 좋아 도저히 대황형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매일 모순적으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학업이 나빠졌고 승마 연습을 할 때도 여러 번 실수를 했다. 하지만 덕비는 이상하게 그를 탓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계속 게으르게 하라고 했다. 그렇게 덕비는 이황자를 데리고 복마마를 자주 뵈러 갔고, 복마마 궁전에서 숙청제를 만날 수도 있었다. 덕비는 며칠 동안 그곳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굳은 표정으로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가운 말투로 청이에게 자신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이가 태어날 수 있는지 보겠다고 했다. 황제폐하를 자주 뵈러 갈 수 없어 아쉬웠지만 이황자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부와 승마술에 전념했다. 이황자는 당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몰랐고, 비록 매일 힘들긴했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기에, 계속 이렇게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숙청제의 천추세에 승마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세 황자와 서우도 가서 겨뤄 보기로 했다. 원래 그런 대회에서 황자들은 재미있게 참석만하면 되지만, 덕비는 그 경기를 몹시 중시했다. 덕비가 이황자에게 마름쇠를 건넬 때, 그는 하늘이 무너져내리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이황자는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대황형의 목숨을 앗으려 하다니, 이황자는 처음으로 어마마마가 무서워졌다.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