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제가 죄책감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모든 것이 소자의 잘못입니다."그러자 태후가 이어서 말했다."내가 본래는 황제와 송씨 가문 자제들 간의 친분을 이야기하고 함께했던 지난날을 들려주며, 황제께서 황제라는 신분을 잠시 잊고 단지 어른으로서 서우를 대하도록 말씀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합니다. 누군가 계속해서 일깨워야만 기억할 수 있는 감정이라면 그 감정 자체가 이미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께 직접 통첩을 드립니다. 반드시 그 아이를 잘 대우하고 아무도 그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십시오."태후의 말은 숙청제로 하여금 많은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그는 이 순간에서야 자신에게도 한때 절친한 벗들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당시 송씨 가문과의 교류는 온전히 순수한 의도였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최소한 그 우정만큼은 진심으로 소중히 여겼다.송씨 가문의 부자가 희생되었을 당시, 그는 막 황위에 오른 지 얼마되지 않았었다. 그의 마음은 무엇보다 전조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며 다시 공을 세워 나라를 재건하는 데 더 많이 쏠려 있었다.그는 남강을 되찾는 공로를 매우 중시했기에 송씨 가문의 부자들이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슬픔이 아니라 극심한 걱정이었다. 이후 동생을 남강으로 파견했고 매 순간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기만을 기다렸다.그 기다림 속에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송씨 가문의 부자들이 희생된 슬픔을 외면했다. 그렇게 마침내 대승을 거두자 그의 마음속에는 기쁨만이 가득했다.태후의 말은 숙청제를 깊은 회상으로 이끌었다. 오랜 시간 추억 속에 잠긴 그는 죄책감과 슬픔에 조금씩 잠식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때 그의 눈가에는 이미 눈물이 가득했다. 숙청제는 몸을 굽히며 목이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소자가 약속드리옵니다. 오늘과 같은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소자가 살아 있는 한 아무도 감히 서우를 괴롭히지 못할 것입니다."태후는 마침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황제가 약속을 반드시
황후의 말에 숙청제는 용안이 일그러지며 크게 분노했다. 그는 찻잔을 거칠게 휘둘러 황후 앞에 내던졌다.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황후는 그 소리에 놀라서 얼어붙었고 순간 멍해졌다.하지만 그녀는 황제가 지나치게 과민하다고 여겼다."폐하, 그저 어린 아이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일 뿐이지 않습니까. 서우에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크게 화를 내시는지요?"숙청제는 차갑게 대답했다."황후가 그 아이가 장차 그저 평범한 어린아이로 남길 원한다면, 그 뜻을 따르겠소."제 황후는 크게 놀라며 말했다."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만약 이런 말이 외부로 전해진다면 조정의 신하들이 이를 마음에 새길까 두렵습니다."숙청제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그것이야말로 좋지 않소? 어차피 황후는 그 아이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았으니, 장차 그는 한가한 왕자로 남아 동생들의 그늘 아래서나 밥을 빌어먹게 될 것이오."제 황후는 그 말을 듣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거의 기절할 뻔한 그녀는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공포에 휩싸였다.오랜 시간 편안한 궁중 생활에 익숙해진 황후는 황권이라는 것이 본래 가시밭길임을 잊고 있었다. 단지 신분만으로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에 그 아이가 제멋대로 행동하게 했습니다. 앞으로 그 아이가 큰 능력을 갖추지 못하거나 중요한 일을 맡지 못하게 된다 해도, 이는 모두 제 탓입니다. 오늘부터 그 아이를 엄격히 지도하여 넓은 마음과 올바른 품성을 갖추도록 하겠습니다."숙청제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냉정하게 말했다."빈말을 듣고 싶지 않소. 일년을 기한으로 하겠소. 그때까지도 그 아이가 여전히 경중을 모른 채 경솔하게 행동하고 학업에 뒤처지며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는 고려 대상이 될 자격조차 없을 것이오."황후는 숙청제가 일년의 기한을 주겠다고 하자 안도의
북명황실은 밤이 되어서도 환한 불빛으로 밝았다.염선생은 황제가 내린 하사품을 하나하나 장부에 적어 따로 정리했다. 나중에 서우가 국공부로 돌아가 작위를 계승할 때 다시 돌려보내기 위함이었다.한편 송석석은 서우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산책을 하며 둘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서우의 기분과 오늘 일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서우는 고개를 들어 밝은 얼굴로 고모를 쳐다보며 말했다."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요? 그냥 한마디 말일 뿐인데요. 화낼 가치도 없어요. 태후 마마와 황제께서 저를 정말 잘 대해 주시잖아요. 하사품도 그렇게 많이 주셨는데, 그 말 한마디와 비교가 되겠어요? 게다가 대황자는 아직 어리잖아요. 조금 더 크면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거예요."송석석은 그의 코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웃었다."꼬마야, 대황자가 아직 어리다고 하지 말거라. 너는 얼마나 크다고 그러니?"하지만 서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대황자보다는 제가 더 크잖아요."서우는 고모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챘다. 그리고 아저씨조차도 안심하지 못한 채 뒤에서 몰래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서우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정말 별일 아니에요. 오늘 모두 돌아가신 뒤에 태후마마께서 저에게 말씀하셨거든요. 앞으로 저는 매일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고요. 우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송가의 모든 죄를 대신 받으시고 행복과 즐거움을 저희에게 남겨주셨대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분들의 행복이래요."송석석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찔린 듯 아릿했다.이 모든 말이 위로를 위한 것이란 걸 알지만, 그녀와 서우는 이미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자 그들이 바라던 모습일 것이다.고모와 조카는 맞잡은
송석석은 지금껏 태자 책봉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그 이유는 첫째로 황제가 아직 젊기에 이렇게 이른 시기에 태자를 책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둘째는 본 조정에는 적장자가 있었는데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관료 가문에서도 서장자가 있는 경우가 흔한데, 하물며 황제의 삼궁육원에서는 후궁이 황후보다 먼저 임신하면 장자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훈작세가의 관례로서는 정실 부인이 들어오기 전에 통방이 아이를 낳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통방이 잠자리를 가진 뒤에는 피임약을 먹어야 했고, 실수로 임신했다 하더라도 낙태약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황실은 달랐다. 후궁이 임신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황실의 혈통으로 인정되었다.공비가 황후보다 먼저 임신했을 때, 당시 황후는 공비가 황실의 장자를 낳을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다행히 공비가 낳은 아이는 공주였고 황후는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이 모든 것은 송석석이 당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송석석은 그 이후로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황제가 적장자를 두고 있는 만큼 반드시 훌륭히 키울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지금과 같은 성격으로 자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송석석은 황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온 진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규수로, 문무를 겸비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황후는 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읽은 사람이었으니 아이를 지나치게 방임하면 결국 해롭게 된다는 도리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게다가 그 아이는 장차 황태자가 될 존재인데 말이다."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오. 생각하면 마음만 복잡해지오. 황태자 문제는 황제께서 매우 신중하게 결정하실 거요." 사여묵이 손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말했다. 그의 수려한 얼굴은 은은한 등불 아래서 더욱 부드럽게 빛났다."황태자 문제는 우리 북명황실이 감히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니 그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소. 어머니께서도
안운여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조용히 물었다."이제 소대장군도 군대를 철수하기로 약속했는데 향병은 어떻게 처분하실 생각이십니까?""그녀를 위해 변호하려는 것인가?"안운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그녀가 공주님을 해치려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하지만 본래 여관의 수는 적지 않습니까. 상병은 승진 가능성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아마 더 이상 위로 올라갈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공주님께서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수 없으십니까?"냉옥 장공주는 눈빛을 차갑게 가늘게 뜨며 단호히 말했다."아니, 그녀에겐 기회가 없어.""그녀도 태자를 위해 복수하려던 것이지 않습니까……""안운여!"장공주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냉랭하게 경고했다."정말 그녀의 자리가 여성이 올라가기 어려운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녀를 위해 변호지 말아야지. 너희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비난할 것이다. 특히 그녀는 누구보다도 신중했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중히 세 번은 생각했어야 했다. 여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걸어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꾸로 행동하며 복수만을 위해 서경을 위험에 빠뜨렸고, 백성들의 생사와 수십만 장병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역이 이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조금의 계획도 없이 오직 복수를 모든 것보다 중요시 여기며, 나를 해치려 한 것도 모자라 두 나라의 전쟁을 부추겼다. 전쟁을 일으킨다고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으냐? 서경이 전쟁을 치른다면 군량미는 어디서 나오겠느냐? 황제가 화풀이하듯 말했던 것처럼 정말 민간에서 장정을 징집해야겠느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일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안운여는 지금의 서경이 국력을 다해 싸울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그러자 이방은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그 두 마을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이방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양팔로 땅을 짚고 앞으로 기어가며 말했다."아니, 안 돼! 나는 절대로 가지 않을거야! 너희들이 나를 서경으로 데려간다면서!""물론 데려가긴 하지." 안운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의 머리만. 그 편이 훨씬 간단하니 말이야."이방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그녀는 간신히 두 손으로 철창을 붙잡으며 말했다."안 돼, 제발…… 나를 청주촌으로 보내지 말아줘. 서경으로 데려가서 태자릉 앞에서 나를 죽여줘."안운여는 증오에 찬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무슨 자격으로 살아서 태자릉 앞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이방, 네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비겁한 남편이 와서 널 구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런 헛된 희망은 품지 마라. 그는 절대로 오지 않아.""아니, 아니야, 오해다!" 이방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어.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녹분성 백성들을 해쳐서는 안 됐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희들에게 빌게. 용서를 바라진 않아. 다만 나를 서경 태자릉 앞으로 데려가줘. 내가 직접 죄를 고백하고 싶어.""정말 우스운 소리군." 안운여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그녀의 기만을 조롱했다."우리는 계속 보고를 받았고 전북망은 단 한 번도 진성을 떠난 적 없어. 그러니 네가 청주촌으로 가든, 서경으로 가든 널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야."안운여는 몸을 살짝 숙여 충격에 가득 찬 이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넌 죽을 거야. 아주 비참하게 말이지."이방은 땅에 엎드린 채 철창을 잡을 힘도 없어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은 움츠러들며 떨고 있었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온몸을 떨게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전북망은 그렇게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비겁하고 무능할지 몰라도 자신에게 했던 약속은 대부분 지켰었다."겁나지? 겁나는 게 정상이야." 안운여는
안운여는 등불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던 곽아정과 향병 앞으로 다가갔다.향병은 구속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이방이 능지처참 당하여 처참히 죽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다."이미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몹시 겁에 질려 있더군요." 안운여가 곽아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옆에 있는 향병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곽아정이 대답했다."죽음을 앞둔 공포를 체험하게 하는 것도 괜찮지." 향병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그녀가 죽으면 나도 눈을 감을 수 있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둑이 터진 강물처럼 얼굴을 따라 쏟아졌다.곽아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넌 본래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야. 이방은 우리에게 반드시 잡혀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지."향병은 눈물을 닦으며 단호히 말했다."후회하지 않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거야."안운여의 눈빛에 짜증이 번졌다."아직도 그렇게 말하시는군요? 잘못을 모른다면 왜 공주님 앞에서는 후회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까?"밤바람이 향병의 옷자락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의 눈과 코는 붉게 물들었지만 눈빛에는 깊은 원망과 억울함이 가득했다."공주님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공주님을 항상 존경해왔으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 태자는 공주님의 친동생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건지…… 태자가 공주님에게 정말 그렇게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거야? 태자를 위해서라면 나라 전체가 상국을 공격한다 한들 어떻단 말이야? 나는 공주님이 팔을 들어 호소하기만 하면 장정을 징집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기꺼이 응답할 것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식량을 가지고서라도 나설 것이라고 믿어."곽아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반문했다."백성들이 정말 그렇게 하길 원한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태자가 치욕을 당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모든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시선들이 불길로 변해 하나로 모였다. 그 불길은 마치 그녀를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타올랐고, 그녀는 마치 불 위에 올려진 듯한 고통을 느꼈다.공포가 그녀의 온 몸을 가득 채워 심장을 으스러뜨릴 것 같았고,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사방에서 외침이 울려 퍼졌다."죽여라! 저 악마를 죽여서 학살당한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자!"이방은 그 자리에서 크고 작은 실금을 하며 쇠창살 우리 안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외침과 소란이 귀에 울려 댈 뿐이었다.수란석이 팔을 들고 외쳤다."모든 마을 사람들은 물러나 길을 비켜라! 이 악행의 원흉을 큰 구덩이 묘지로 데려가겠다. 그곳에서 내가 그녀를 풀어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단 한 가지는 꼭 지켜야 한다. 그녀의 머리는 서경으로 가져가 황제께 보고드려야 하니 반드시 남겨야 한다. 그러니 그녀의 살을 한 조각씩 베어내는 건 상관없지만 머리를 훼손해 황제가 알아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사람들은 이 날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억눌렸던 원한이 폭발하려는 순간이었지만, 이방이 이미 잡혀왔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큰 구덩이 묘지로 데려가 그곳에서 처단하여 비참히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이 원한을 오늘은 반드시 갚아야 했다.황소는 수레를 끌며 앞으로 나아갔고 마을 사람 중 몇몇이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두 마을의 주민을 다시 세어 보니 이제 고작 30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그들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걸으면서 겉옷을 벗어 안에 입은 흰 상복을 드러냈다. 팔에는 가는 삼베를 묶어 놓았다. 그들은 모두 한때 부모와 자식이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삶이 비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누군가가 앞에서 흰 깃발을 높이 들었고, 그들은 작은 갈림길에서 나와 스스로 대열을 이루었다
이튿날 아침, 송석석은 경위부로 돌아갔는데, 회왕비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이번에 회왕이 진성으로 잡혀왔을 때, 그의 아들은 아직 잡히지 않았기에 목종욱은 여전히 병사들을 이끌고 회왕의 아들을 수색하고 있었다.회왕비는 자신의 아들도 왕표처럼 요참형에 처형당할까 봐 걱정되어 급하게 송석석을 찾아온 것이다.사실 전에 회왕이 진성으로 압송되었을 때에도 회왕비가 란이를 찾아가 송석석에게 도움을 청해보라고 시켰지만 란이는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심지어 송석석 앞에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기에, 송석석도 석소 사저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회왕비가 재빨리 송석석에게 다가가 조급한 표정으로 말했다.“석석아! 이모가 너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일단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할까?”“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서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송석석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자 회왕비는 얼른 두 팔을 활짝 벌려 다시 그녀의 앞을 막았다.“몇 마디만 하면 돼. 네가 네 사촌 오라버니를 좀 살려주면 안 돼? 네 사촌 오라버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전부 걔 아버지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제발 네가 좀 구해줘!”송석석은 눈시울이 붉어진 회왕비를 보며 예전에 외할아버지가 진성으로 돌아와 관아에 갇혀 있었을 때 회왕비가 단 한번도 외할아버지를 보러 가지 않았던 일이 떠올랐다.송석석은 이기적이고 냉정하며 나약한 회왕비와 단 한 마디도 섞고 싶지 않았으며 회왕비를 슬쩍 피해 경위부 안으로 들어갔고 경위대에게 회왕비를 쫓아내라고 지시했다.이때 등 뒤에서 회왕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석석아, 너 어찌 이리 인정머리가 없을 수 있느냐? 네가 어렸을 때 이모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벌써 다 잊은 거야?”송석석이 뒤도 안 돌아보자 회왕비는 더욱더 큰소리로 외쳤다.“송석석, 네 어머니는 나를 제일 사랑하고 아꼈다! 네가 날 이렇게 모른 척하면 분명 네 어머니 상심이 클 것이다!”자신의 어머니가 언급되자, 걸음을 멈춘 송석석은 싸늘하게 굳은
한편, 송석석은 서재에서 편지 한 장을 쓴 뒤, 편지를 염구진에게 주면서 사람을 시켜 남강에 있는 사여묵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송석석은 현재 남강의 상황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빅토르는 병사들만 끌어 모을 뿐 공격도 하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은 채 대치를 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시간을 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남강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황제에게 먼저 얘기한 빅토르는 전쟁을 이기지 못하면 군령에 의해 처벌을 받겠다는 서약서까지 썼지만 사청엄이 반역에 성공하지 못했기에 빅토르에게 성을 나눠줄 수 없었고 빅토르도 공을 세울 수 없었다.이대로 섣불리 자신의 나라로 돌아갔다가 자신이 쓴 서약서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빅토르는 초원과 연합하여 자신의 퇴로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초원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초원은 애초부터 전쟁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어 마음을 졸이면서 어렵게 생존하고 있었기에 반드시 중립을 유지해야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만약 둘 중 한 나라를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면 초원은 반드시 상국을 선택할 것이다.전에 사제가 송석석에게 보낸 서신에 의하면 남강 병사들은 빅토르를 확실하게 공격하여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송석석이 생각에 잠겨 있었던 그때, 시만자가 문을 두드렸다.“석석아!”“들어와.”송석석의 말에 시만자가 최숙심과 함께 방으로 들어왔다.“최씨께서 너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 모시고 왔어.”최숙심은 한걸음 앞으로 다가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왕비님, 그동안 신경 써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송석석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농담을 던졌다.“전 여색을 즐기지 않으니 몸으로만 갚지 않으시면 됩니다.”송석석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서 농담을 하자, 흠칫하던 최숙심도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시만자는 잠깐 앉아있다가 왕경루로 가야 한다고 방을 나섰다. 종문파와 시씨 가문 사람들은
오후 3시 정각, 커다란 판대기가 처형장에 올라왔다. 철로 만들어진 판대기는 매우 단단했으며 상국에서 요참형에 쓰이는 유일한 판대기였기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문엄 황제 때 요참형이 너무 잔인하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죄가 아무리 중한 범인이라고 해도 요참형을 내리지 않았다.하지만 이 형이 현재까지 폐지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반역자에게 겁을 주기 위한 것이다.요참형을 처형할 때 백성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국정을 어지럽히고 역적들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배신한 건 역천 대죄이기에 이러한 방식으로 반역의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려고 했다.왕표는 이내 입고 있던 옷이 전부 벗겨졌고 관원 부하 두 명이 왕표를 판대기에 눕혀 어깨를 꾹 누른 뒤 꿈쩍도 못하게 제압했다.공포에 질린 왕표는 순간 정신을 잃은 채 기절했고 망나니가 대도를 치켜 들자 대부분 사람들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구경꾼들과 달리 영군오아과 연왕 등 사람들은 전방을 직시하게 고정되어 있었기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고 눈을 꼭 감은 채 온몸을 덜덜 떨었다.연왕은 그 중에서 가장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망나니가 대도를 든 순간 눈을 꽉 감은 연왕은 심지어 비명까지 질렀다.하지만 겁을 먹은 사람들과 달리 추몽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전방만을 직시했다.망나니의 대도가 왕표의 허리를 자른 순간에도 추몽의 표정은 한 치의 변화도 없었다.왕표에 이어 고청우가 처형당할 때에도 그는 눈을 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비명소리나 흐느끼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왕표와 고청우가 발버둥 치다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빤히 지켜 보았다.한편, 왕청여는 왕표가 처형되기 전에 노부인을 데리고 이미 처형장을 떠났고, 최숙심은 처형이 끝나고 나서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최숙심은 결국 왕표가 처형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주변에 모여 있던 백성들이 왕표가 죽었다는 말에 그제야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가족들이 시체를 거둬가지 않으면
경위대가 노부인과 최숙심 그리고 왕청여를 처형장 안으로 호송했고 다리에 힘이 쫙 풀린 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이 멍청한 놈아! 넌 우리 집안 조상님들과 네 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이제 하늘나라로 가면 어떻게 마주하려고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그러고는 노부인은 엉엉 울면서 왕표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한편, 감당할 수 없는 공포에 영혼이 나간 왕표는 어머니를 보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소리를 질렀다.“어머니, 저를 구해주세요!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전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고요!”“네가 이렇게 큰 죄를 저질렀는데 내가 무슨 수로 너를 구해? 황제 폐하께서 너를 얼마나 중히 여기고 믿어줬는데 네가 어찌 이런 배은망덕한 짓을 저지른단 말이냐!”“어머니, 저 정말 잘못했어요. 제 죄를 다 뉘우쳤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거예요!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게요. 제발 이 아들을 살려주세요!”왕표가 오열했지만 노부인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때, 곁에 서있던 최숙심이 직접 만든 음식과 술을 꺼내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당신과 나 사이에 부부의 연은 끝났지만 어머님과 아이들은 제가 잘 돌볼게요. 그러니 걱정 말고 떠나세요.”왕표는 담담하게 말을 하는 최숙심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 서방을 배신한 천박한 년! 감히 나에게 부부의 연을 운운해?”“그래요. 저희는 이제 부부가 아닙니다. 그러니 앞으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좋겠지요.”“나쁜 년!”왕표가 잔뜩 분노한 목소리로 외치자, 이를 들은 백성들이 너도나도 최숙심을 불쌍하게 여겼다. 평생 전전긍긍하면서 왕표를 위해 아들과 딸을 낳고 집안일을 처리하면서 시부모에게도 최선을 다했는데 결국 저런 말을 듣다니.뒤로 한 걸음 물러난 최숙심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한편, 고청우는 왕씨 가문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모여 있는 백성들을 자세하게 쓱 훑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정말 아무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눈물을 그친 노부인은 결국 왕표를 구하는 일은 포기했지만, 그의 형이 집행되기 전에 최후의 만찬을 직접 먹일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노부인의 눈은 퉁퉁 부었고, 목소리도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형이 집행되기 전에 범인은 가족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 그러니까 이것만 하게 해줘. 아들이 마지막으로 배불리 먹고 길을 떠날 수 있게 해줘.”노부인은 다시 최숙심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다.“며느리 너도 자식이 있으니 부모의 마음을 이해할 거야. 세상 사람들 눈에 걔가 백 번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라고 해도 나에게는 그저 한없이 어린 아이일 뿐이야.”한참동안 침묵하던 최숙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어머님, 형이 집행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난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집행장에서 아들이 요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정말 직접 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노부인은 온몸을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네가 가서 북명 왕비에게 부탁을 좀 해보거라. 난 감옥에 가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노부인의 말에 고청락이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참 말씀을 쉽게 하시네요. 어머님께서 부탁하면 왕비님께서 무조건 그 부탁을 들어줘야 하시는 겁니까?”“어머님, 전 그런 부탁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일은 왕비께서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최숙심이 대답하자 노부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술을 꽉 깨문 채 말했다.“집행장이라도 갈 것이다. 절대 내 아들을 굶겨서 하늘나라로 보낼 수는 없어.”“어머니, 오라버니는 안 굶어요. 형이 집행되기 전에 감옥에서 오라버니에게 맛있는 밥을 준비해줄 거예요. 심지어 술도 준비해준다고 들었어요.”왕청여의 말에도 노부인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건 달라!”최숙심이 계속 한숨을 살짝 내쉴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곁에서 지켜보던 모종윤이 고청락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집행 당일 날이 되었고, 하늘은 한없이 맑았다.문엄
궁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보고하자, 최숙심의 딱한 사정을 운운하면서 그녀의 선한 마음씨 또한 찬양했다.그녀의 삶도 이토록 엉망진창인데 힘든 사람들에게 죽도 나눠주고 갈 곳 없는 여인들을 소주방에서 지내게 도와준 사실들을 일일이 읊으면서 감탄했다. 솔직히 숙청제에게는 지금 최숙심처럼 백성들을 교화할 수 있는 모범적인 사람이 필요했다. 때문에 바로 어명을 내려 그녀에게 순금 백 냥과 집 한 채까지 하사했다. 그리고 유방 당했던 왕씨 가문 남자들도 남강 전쟁만 끝나면 북명왕과 함께 진성으로 돌아오는 것에 허락했다.그렇게 최숙심은 죽을 고비를 넘어 인생 역전까지 이뤄냈다!한편, 왕표에게는 요참형이 내려졌고 역적과 손잡고 왕표를 선동한 고청우에게도 똑같은 형을 내렸다. 그러자 숙청제는 예전에 고씨 가문 여인들을 살려준 일이 후회되었다. 고청우를 진작 감옥에 가뒀다면 남강에 이렇게 큰 화란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니 말이다.이후 숙청제는 척귀에게 걱정되니깐 암자에 가끔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실은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송석석은 척귀를 보자마자 황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사람을 보내 고씨 여인들에게 고청우의 형이 집행될 때 고청우와의 옛정 때문에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지 말라고 확실하게 당부했다.한편, 소주방에 있는 노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왕표가 결국 체포되었고 요참형을 받는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죄 없는 왕청여와 최숙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갖은 욕설을 퍼부으며 화풀이를 했다. 노부인은 두 사람이 어떻게 가족이며, 서방인 왕표를 배신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점점 더 흥분하다가 결국 최숙심과 왕청여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그리고는 지금 당장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왕표를 구해내라고 억지를 부렸다.최숙심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노부인에게 노여움을 풀라고 빌었지만, 노부인은 오히려 점점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최숙심도 더 이상 참지 못해 벌떡 일어나 주막에서 칼을 가져오더니 바닥에 툭 던졌다
왕표는 중범죄자이기에 바로 대리사로 이송되어야 하지만, 송석석은 그를 일단 경위부로 압송했다. 경위부에서 심문을 마친 후, 어전에 보고를 올리며 최숙심의 공을 황제에게 잘 얘기한다면,왕준과 현이 하루 빨리 진성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더군다나 고청우도 아직 경위부에 갇혀 있기에 왕표와 고청우가 만난다면 더욱 많은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었다.그렇게 고청우와 왕표는 같은 곳에 갇혔으며, 중간에 나무 울타리 하나를 세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고청우와 왕표가 서로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으며 왕표가 먼저 이를 갈면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천박한 놈! 결국 네 놈 꼴도 이렇게 되었구나! 드디어 벌을 받은 게야!”그러자 고청우가 실눈을 살짝 뜨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내가 천박한 년이면 왕표 너는 뭔데? 나도 벌을 받았지만 너도 결국 이렇게 갇혀 있잖아! 넌 뭐 다를 것 같아?”“이게 다 네 놈 때문이야!”왕표가 울타리 사이로 손을 뻗어 고청우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고 뒤로 살짝 물러난 고청우는 오아표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버러지 같은 놈!”“네 놈이 감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 놈이 역적과 손잡고 날 꼬셔서 야반 도주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난 지금 남강 원수의 신분으로 잘 살고 있었을 거야! 절대 이런 꼴을 당할 리 없었을 거라고!”왕표가 씩씩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고청우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널 꼬셨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넌 결국 죽음이 두려워서 그런 선택을 한 거야. 넌 내가 무엇인가 노리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잖아. 그런데 내가 아이까지 낳으니 이제 날 곁에 묶어 둘 수 있겠다고 확신한 거지.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이 네 본처처럼 아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줄 알아? 가족애라는 건 이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거야. 그딴 걸로 날 묶어 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멍청한 놈! 내가 널 버리고 갈 때 분명하게 얘기했잖아. 넌 무능하고 무술 실력도 보잘것없는데
한편, 송석석은 시만자를 데리고 일반 손님으로 위장한 채 직접 보화사로 향했다. 보화사에 도착한 뒤 절을 올리고 초를 꽂고는 주지 스님을 찾아 신분을 밝힌 뒤, 여람 스님에 관해서 물었다.주지 스님은 바로 지객 스님을 불러왔다. 각지 스님들이 보화사에 찾아와 며칠 묵고 갈 때마다 지객 스님이 그자들을 모셨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을 제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보화사는 진성 3대 절 중의 하나일 정도로 꽤 유명했기에, 매년 보화사에 찾아와 경을 들으면서 며칠동안 이곳에 묵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실제로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에 대해 인상이 꽤 깊었다. 수련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원칙대로라면 이곳에서 지낼 수 없는데 몇 년 전부터 남강에서 죽은 이의 영혼들을 제도했기에 그 자비로운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덕행도 많이 쌓았기에 지객 스님은 의례적으로 여람 스님을 받아준 것이다.“며칠동안 매일 여람 스님께서 밖에 돌아다니셨습니다. 진성 내에 전란이 일어나 사상자가 많았기에 여람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은 이들의 영혼을 제도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지객 스님은 여람 스님을 매우 좋게 평가했다. 송석석은 그런 지객 스님의 말을 조용하게 듣고 있을 뿐, 반박하지는 않았다.그러고는 지객 스님에게 여람 스님을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하며, 여람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돈을 기부하며 여람 스님을 위해 따로 절 하나를 지어주고 싶다는 말도 함께 전해달라고 했다.한편, 지객 스님은 송석석과 시만자의 신분을 알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수수한 옷차림과 달리 기품이 넘쳐 흘렀기에 모 훈작 세가의 부인이나 아가씨일 것이라고 추측해,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왕표에게 말을 전했다.왕표는 자신을 찾아온 자가 있다는 말에 흠칫 놀랐다가 절을 만들어주며 돈까지 기부하겠다는 소식에 바로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평서백이었던 왕표는 가문의 번영을 위해 절에 돈을 기부하는 명문 가문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렇게
이내 표정을 숨긴 최숙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얼른 가십시오. 돈을 구하면 바로 서방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아, 그리고 요즘 진성 순찰이 삼엄하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십시오.”왕표는 자신을 걱정하는 최숙심의 말을 듣자, 그녀가 밖에서 아무리 대단한 여인이라고 불려도 결국 자신에게 만큼은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뿌듯함에 경계심이 완전히 풀렸다.“최대한 3일 안에 마련해주면 고맙겠소.”그러자 최숙심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그건 안 됩니다. 지금 상황이 어려운데, 어떻게 3일 안에 그 큰돈을 마련할 수 있겠습니까?”“우리 딸 지아가 지금 북명 황실에서 지내고 있지 않소? 그러니 난 부인이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소. 부인의 소식을 기다리겠소. 그리고 내가 부인을 찾아왔다는 말은 아무한테도 하지 마오. 어머니와 왕청여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되오!”말을 마친 왕표는 삿갓을 쓰고는 돌아서서 빠르게 떠났다.표정이 확 어두워진 최숙심은 그를 얼른 따라갔지만 골목 밖에도 순찰하는 경위대가 보이지 않았기에 섣불리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왕표는 궁지에 몰린 순간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어떻게든 진성을 벗어나려고 할 것이고 만에 하나 왕표가 진성을 빠져나가게 되면 그를 찾아내는 건 더 어려워질 것이다.최숙심은 빠른 걸음으로 소주방에 돌아와 석소를 구석으로 불렀다.“석소 아가씨, 얼른 왕비에게 찾아가서 왕표 그자가 보화사에 여람 스님 신분으로 위장하여 숨어있다고 전하시오.”“네, 지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렇게 석소가 돌아서서 소주방을 떠나려던 그때, 최숙심이 그를 불러 세웠다.“잠깐만요! 왕비님께 너무 대놓고 보화사에 왕표를 잡으러 가지는 말라고 전해주세요. 저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몇 사람만 데리고 가서 상황만 파악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전하세요.”현재 수색이 삼엄해서 왕표는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이는 최숙심이 공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고 단번에 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