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명황실은 밤이 되어서도 환한 불빛으로 밝았다.염선생은 황제가 내린 하사품을 하나하나 장부에 적어 따로 정리했다. 나중에 서우가 국공부로 돌아가 작위를 계승할 때 다시 돌려보내기 위함이었다.한편 송석석은 서우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지 않았을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천천히 산책을 하며 둘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서우의 기분과 오늘 일에 대한 생각을 조심스레 물었다.그러나 그녀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서우는 고개를 들어 밝은 얼굴로 고모를 쳐다보며 말했다."이게 뭐가 대단한 일이라고요? 그냥 한마디 말일 뿐인데요. 화낼 가치도 없어요. 태후 마마와 황제께서 저를 정말 잘 대해 주시잖아요. 하사품도 그렇게 많이 주셨는데, 그 말 한마디와 비교가 되겠어요? 게다가 대황자는 아직 어리잖아요. 조금 더 크면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거예요."송석석은 그의 코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톡 건드리며 웃었다."꼬마야, 대황자가 아직 어리다고 하지 말거라. 너는 얼마나 크다고 그러니?"하지만 서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래도 대황자보다는 제가 더 크잖아요."서우는 고모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민감하게 알아챘다. 그리고 아저씨조차도 안심하지 못한 채 뒤에서 몰래 따라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서우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이건 정말 별일 아니에요. 오늘 모두 돌아가신 뒤에 태후마마께서 저에게 말씀하셨거든요. 앞으로 저는 매일 행복하게 지내야 한다고요. 우리 조부모님과 부모님이 송가의 모든 죄를 대신 받으시고 행복과 즐거움을 저희에게 남겨주셨대요.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분들의 행복이래요."송석석은 그의 말을 듣고 마음 한구석이 찔린 듯 아릿했다.이 모든 말이 위로를 위한 것이란 걸 알지만, 그녀와 서우는 이미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행복하게, 즐겁게 사는 것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자 그들이 바라던 모습일 것이다.고모와 조카는 맞잡은
송석석은 지금껏 태자 책봉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그 이유는 첫째로 황제가 아직 젊기에 이렇게 이른 시기에 태자를 책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둘째는 본 조정에는 적장자가 있었는데 이는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관료 가문에서도 서장자가 있는 경우가 흔한데, 하물며 황제의 삼궁육원에서는 후궁이 황후보다 먼저 임신하면 장자를 낳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훈작세가의 관례로서는 정실 부인이 들어오기 전에 통방이 아이를 낳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 통방이 잠자리를 가진 뒤에는 피임약을 먹어야 했고, 실수로 임신했다 하더라도 낙태약으로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그러나 황실은 달랐다. 후궁이 임신하면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황실의 혈통으로 인정되었다.공비가 황후보다 먼저 임신했을 때, 당시 황후는 공비가 황실의 장자를 낳을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다행히 공비가 낳은 아이는 공주였고 황후는 그제야 안도할 수 있었다.이 모든 것은 송석석이 당시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송석석은 그 이후로 이런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그녀는 황제가 적장자를 두고 있는 만큼 반드시 훌륭히 키울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지금과 같은 성격으로 자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송석석은 황후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온 진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규수로, 문무를 겸비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황후는 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읽은 사람이었으니 아이를 지나치게 방임하면 결국 해롭게 된다는 도리를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게다가 그 아이는 장차 황태자가 될 존재인데 말이다."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오. 생각하면 마음만 복잡해지오. 황태자 문제는 황제께서 매우 신중하게 결정하실 거요." 사여묵이 손을 들어 그녀의 미간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며 말했다. 그의 수려한 얼굴은 은은한 등불 아래서 더욱 부드럽게 빛났다."황태자 문제는 우리 북명황실이 감히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니 그저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소. 어머니께서도
안운여는 계속해서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주무르며 조용히 물었다."이제 소대장군도 군대를 철수하기로 약속했는데 향병은 어떻게 처분하실 생각이십니까?""그녀를 위해 변호하려는 것인가?"안운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그녀가 공주님을 해치려 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하지만 본래 여관의 수는 적지 않습니까. 상병은 승진 가능성이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은 아마 더 이상 위로 올라갈 기회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공주님께서 그녀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실 수 없으십니까?"냉옥 장공주는 눈빛을 차갑게 가늘게 뜨며 단호히 말했다."아니, 그녀에겐 기회가 없어.""그녀도 태자를 위해 복수하려던 것이지 않습니까……""안운여!"장공주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냉랭하게 경고했다."정말 그녀의 자리가 여성이 올라가기 어려운 자리라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녀를 위해 변호지 말아야지. 너희가 여기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않느냐? 조금이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면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비난할 것이다. 특히 그녀는 누구보다도 신중했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신중히 세 번은 생각했어야 했다. 여관의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걸어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거꾸로 행동하며 복수만을 위해 서경을 위험에 빠뜨렸고, 백성들의 생사와 수십만 장병의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역이 이를 알게 된다면 얼마나 실망하겠느냐?""조금의 계획도 없이 오직 복수를 모든 것보다 중요시 여기며, 나를 해치려 한 것도 모자라 두 나라의 전쟁을 부추겼다. 전쟁을 일으킨다고 원한을 풀 수 있을 것 같으냐? 서경이 전쟁을 치른다면 군량미는 어디서 나오겠느냐? 황제가 화풀이하듯 말했던 것처럼 정말 민간에서 장정을 징집해야겠느냐?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면 큰일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안운여는 지금의 서경이 국력을 다해 싸울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그러자 이방은 온몸이 떨렸다. 그녀는 그 두 마을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이방은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양팔로 땅을 짚고 앞으로 기어가며 말했다."아니, 안 돼! 나는 절대로 가지 않을거야! 너희들이 나를 서경으로 데려간다면서!""물론 데려가긴 하지." 안운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의 머리만. 그 편이 훨씬 간단하니 말이야."이방의 눈동자가 공포로 흔들렸다. 그녀는 간신히 두 손으로 철창을 붙잡으며 말했다."안 돼, 제발…… 나를 청주촌으로 보내지 말아줘. 서경으로 데려가서 태자릉 앞에서 나를 죽여줘."안운여는 증오에 찬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무슨 자격으로 살아서 태자릉 앞까지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지? 이방, 네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비겁한 남편이 와서 널 구할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런 헛된 희망은 품지 마라. 그는 절대로 오지 않아.""아니, 아니야, 오해다!" 이방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어. 그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녹분성 백성들을 해쳐서는 안 됐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너희들에게 빌게. 용서를 바라진 않아. 다만 나를 서경 태자릉 앞으로 데려가줘. 내가 직접 죄를 고백하고 싶어.""정말 우스운 소리군." 안운여는 위에서 내려다보며 냉정하게 그녀의 기만을 조롱했다."우리는 계속 보고를 받았고 전북망은 단 한 번도 진성을 떠난 적 없어. 그러니 네가 청주촌으로 가든, 서경으로 가든 널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야."안운여는 몸을 살짝 숙여 충격에 가득 찬 이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넌 죽을 거야. 아주 비참하게 말이지."이방은 땅에 엎드린 채 철창을 잡을 힘도 없어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몸은 움츠러들며 떨고 있었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온몸을 떨게 했다. 믿을 수 없었다. 전북망은 그렇게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비겁하고 무능할지 몰라도 자신에게 했던 약속은 대부분 지켰었다."겁나지? 겁나는 게 정상이야." 안운여는
안운여는 등불을 들고 밖에서 기다리던 곽아정과 향병 앞으로 다가갔다.향병은 구속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올 운명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그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이방이 능지처참 당하여 처참히 죽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었다."이미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몹시 겁에 질려 있더군요." 안운여가 곽아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옆에 있는 향병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곽아정이 대답했다."죽음을 앞둔 공포를 체험하게 하는 것도 괜찮지." 향병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그녀가 죽으면 나도 눈을 감을 수 있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둑이 터진 강물처럼 얼굴을 따라 쏟아졌다.곽아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넌 본래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야. 이방은 우리에게 반드시 잡혀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네가 어리석은 선택을 했지."향병은 눈물을 닦으며 단호히 말했다."후회하지 않아.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나는 똑같이 행동할 거야."안운여의 눈빛에 짜증이 번졌다."아직도 그렇게 말하시는군요? 잘못을 모른다면 왜 공주님 앞에서는 후회한다고 거짓말을 했습니까?"밤바람이 향병의 옷자락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녀의 눈과 코는 붉게 물들었지만 눈빛에는 깊은 원망과 억울함이 가득했다."공주님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어. 나는 공주님을 항상 존경해왔으니까. 하지만 이해할 수 없어. 태자는 공주님의 친동생이잖아?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건지…… 태자가 공주님에게 정말 그렇게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인 거야? 태자를 위해서라면 나라 전체가 상국을 공격한다 한들 어떻단 말이야? 나는 공주님이 팔을 들어 호소하기만 하면 장정을 징집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기꺼이 응답할 것이고, 심지어 자신들의 식량을 가지고서라도 나설 것이라고 믿어."곽아정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반문했다."백성들이 정말 그렇게 하길 원한다고 치자. 그러면 너는 태자가 치욕을 당한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모든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찬 시선들이 불길로 변해 하나로 모였다. 그 불길은 마치 그녀를 태워버릴 듯 강렬하게 타올랐고, 그녀는 마치 불 위에 올려진 듯한 고통을 느꼈다.공포가 그녀의 온 몸을 가득 채워 심장을 으스러뜨릴 것 같았고, 순식간에 간담이 서늘해졌다.사방에서 외침이 울려 퍼졌다."죽여라! 저 악마를 죽여서 학살당한 마을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자!"이방은 그 자리에서 크고 작은 실금을 하며 쇠창살 우리 안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차마 눈을 뜨고 그들을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살벌한 외침과 소란이 귀에 울려 댈 뿐이었다.수란석이 팔을 들고 외쳤다."모든 마을 사람들은 물러나 길을 비켜라! 이 악행의 원흉을 큰 구덩이 묘지로 데려가겠다. 그곳에서 내가 그녀를 풀어주면 그 다음은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단 한 가지는 꼭 지켜야 한다. 그녀의 머리는 서경으로 가져가 황제께 보고드려야 하니 반드시 남겨야 한다. 그러니 그녀의 살을 한 조각씩 베어내는 건 상관없지만 머리를 훼손해 황제가 알아보지 못하게 해서는 안 된다!"사람들은 이 날을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억눌렸던 원한이 폭발하려는 순간이었지만, 이방이 이미 잡혀왔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녀를 큰 구덩이 묘지로 데려가 그곳에서 처단하여 비참히 죽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이 원한을 오늘은 반드시 갚아야 했다.황소는 수레를 끌며 앞으로 나아갔고 마을 사람 중 몇몇이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두 마을의 주민을 다시 세어 보니 이제 고작 30여 명만이 남아 있었다.그들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걸으면서 겉옷을 벗어 안에 입은 흰 상복을 드러냈다. 팔에는 가는 삼베를 묶어 놓았다. 그들은 모두 한때 부모와 자식이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삶이 비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다.누군가가 앞에서 흰 깃발을 높이 들었고, 그들은 작은 갈림길에서 나와 스스로 대열을 이루었다
그곳에는 작은 산처럼 높이 솟은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그 위에는 수많은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묘비가 서 있었다.이방은 공포가 극에 달해 입에서 비명과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질러댔다.한 시위가 쇠창살 우리 문을 열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질질 끌어내더니 땅에 내던졌다. 이방은 온몸에 고통이 퍼져 몸을 부들부들 떨며 옆으로 기어갔다.시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시 잡아채어 작은 산처럼 높이 솟은 무덤 앞까지 끌고 갔다. 묘비 앞에 그녀를 눌러놓고 새겨진 이름들을 가리키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이 이름들이 보이냐? 알아볼 수 없겠지. 전부 네가 죽인 사람들이다!”이방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마구 흔들며 억울해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라고……!"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분노로 가득 찬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그러자 이방의 비명 소리가 군중 속에서 터져 나오며 산골짜기에 메아리쳤고, 놀란 새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검은 구름이 사방에서 몰려와 하늘을 가득 덮었다. 곧 천둥소리가 크게 울려 이방의 비명 소리를 덮어버렸다.군중 속에서 피가 흘러나와 작은 개울처럼 땅을 적셨다.멀리 떨어져 있던 향병과 곽아정 등은 그들이 이방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명 소리와 분노에 찬 마을 사람들이 휘둘렀던 칼과 도끼, 괭이에 묻은 피를 보며 그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그들은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죽은 가족들을 위해 복수하고 있었다. 굳이 그녀의 살을 한 조각씩 베어낼 필요도 없었다. 이런 악인은 세상에 한순간이라도 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생된 영혼들에게는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비명 소리는 점점 잦아들었고 이방의 온몸은 갈갈이 찢겨져 있었다. 얼굴과 머리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고 나머지 몸과 팔다리는 이미 피투성이가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이방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를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는 크게 숨을 헐떡이며 마치 큰 손이 심장을 꽉 쥔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왕청여는 소리에 깨어 그가 넋을 잃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짜증을 내며 물었다. “또 악몽을 꾸었습니까?” 요즘 그는 잘못한 일이 많은지 자주 악몽을 꾸었다. 하지만 왕청여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그가 악몽을 꾸면서 몇 번이나 이방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그가 가슴을 움켜쥔 채 아무말도 하지 않자 왕청여가 차갑게 말했다. “또 이방 꿈을 꾼 겁니까? 꿈에서 그녀가 죽었습니까?” “죽었소.” 전북망은 눈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말 죽었소.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 머리가 잘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비참하게 죽었소.” 한 밤중에 그가 하는 말을 들은 왕청여는 화가 치밀어 올라 호통쳤다. “됐습니다. 그녀가 죽든 말든 당신과 무슨 상관입니까? 어서 주무십시오.” 그러자 전북망은 맨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당신은 계속 주무시오. 난 서재에 가서 자겠소.” 그 모습을 본 왕청여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당신이 계속 서재에 가서 주무시면 저택의 사람들이 대체 날 어떻게 보겠습니까?” 전북망은 온몸에 힘이 없어 한참 침대를 짚어서야 일어났다. 그는 왕청여가 한 말은 한마디도 듣지 못했고 귓가엔 꿈속 이방의 비명뿐이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나가보니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구슬픈 빗소리가 지붕에 떨어져 물줄기가 되어 흘러내렸다. 그는 회랑에서 걸었는데 처참한 풍등이 이리저리 흔들리자 그의 그림자도 이리저리 흔들리며 거대한 짐승처럼 보였다가 귀신처럼 휘날리기도 했다. 빗소리가 섞인 바람소리는 마치 귀신과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았고 그는 꿈속의 비명소리를 떠올리자 순간 심장을 기름 솥에 던져진 듯 아프고 뜨거웠다. 그는 원래 서재로 가려고 했지만 두 발이 말을 듣지 않는 것처럼 길상거로 갔다.길상거의 문을 열자 그는 이미 온몸이 흠뻑 젖었다.한두 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길상거는 이미 초목이 무성해
이틀 동안 돌아본 후, 수란키가 송석석에게 말했다. "귀국에 단신의라는 신의가 계십니다. 그분이 만든 단설환의 한 가지 재료인 설연화가 귀국에서 생산량이 매우 적다고 알고있습니다. 남강에 있기는 하지만, 설산 정상에 자생하고 있어 채집하기 매우 어려우며, 또한 드뭅니다. 하지만 저희 쪽에서는 설연화가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닙니다. 고산지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요. 그가 사용하는 설연화는 모두 서경 약장수에게 몰래 사서 쓰는 것으로, 가격이 매우 비쌉니다. 그 가격으로 단설환을 팔면, 한 알을 팔아서 한 알을 잃는 셈입니다."송석석은 단설환이 부족한 이유가 일부 약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 백부는 구체적으로 어떤 약재가 부족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서경과 상국은 그동안 무역을 하지 않았고, 특히 약재는 더 조심스럽게 다뤄졌기 때문에 그가 서경 사람에게 약재를 산 것을 비밀로 한 이유가 이해가 됐다.수란키와 원신제는 한 마음으로 이렇게 세세하게 조사를 진행했으며, 두 나라 간에 상호 교역을 이루려는 계획이 이미 있었을 것이다. 안풍친왕을 불러들인 것도 이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단설환은 생명 구제용 약이라, 만약 약재만 부족하지 않다면 평민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어 실로 민생에 큰 이익이 된다. 송석석은 그들이 지나쳤던 약재 시장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럼 왜 약재 시장에서는 설연화를 본 적이 없죠?" 수란키가 웃으며 답했다. "그건 당연합니다. 우리 서경에서 설연화가 많이 자생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희귀한 재료입니다.고산지대를 올라가야만 채집할 수 있기에 위험하기도 하지요. 게다가 약효가 뛰어나지 않습니까. 심장을 강하게 하고 통증을 멈추는 효과가 있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법이 없습니다. 송대감께서 믿지 못하신다면, 제가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것을 상국으로 가져가서 단신의께 검증받으시면 됩니다."그는 말을 마친 후 시 사람을 시켜 설연화 한 바구니를 가
그가 앉은 자리는 북당이 이번 협상에서 취한 입장을 대표했다.그는 중립의 위치에 있었다. 송석석은 다시 한 번 국가가 강성한 것이 정말 좋다며 감탄했다. 협상의 처음 부분은 조금 지루했다. 양쪽 모두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강조하였고, 양쪽의 역관들이 그것을 전달하며, 모두 역사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양보를 한다면 계속해서 양보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따라서 첫 번째 협상에서는 아무런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데 그쳤다. 다음 날, 바로 두 번째 협상이 시작되었다. 역시 초반에는 전날처럼 양쪽에서 강조하는 말들이 오갔다.그러다가 잠시 후, 안풍친왕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렇게 계속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두 나라의 국경 문제는 이미 수십 년간 지속되어 왔고, 이것은 하루아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국경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본왕은 두 나라가 서로 친선을 맺고, 서로 침범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두 나라가 더 이상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며 긍정적인 의사를 내비쳤다. 안풍친왕은 한 장의 목록을 꺼냈다. 그 목록에는 양국의 상품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중에는 곡물, 가축, 비단, 직물, 수공예품, 찻잎, 모피, 도자기, 종이, 벼루, 각자의 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약초, 향료, 청염, 철광, 옥석 광물 등이 있었다. 양쪽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의 긴장감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이익 앞에서, 어떤 일들은 협상이 가능했다. 협상이 되지 않으면 잠시 미룰 수도 있었다. 수년간의 전쟁은 두 국가의 국고를 이미 소진시켰기에 양쪽 모두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북당의 발전 경험에 따르면,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것은 뒤처진 생각이며, 농업과 상업을 동시에 중시하는 것이 살길이었다. 상업세 또한 매우 높았다. 안풍친왕의 이 목록 덕분에 두 나라는 국경
하지만 송석석은 서경의 종친과 관리들이 북당이 협상에 개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람이 역력했다.놀란 마음이 지나고 나자, 그들은 기쁨과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들은 북당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이 서경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송석석은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안심을 했다. 정말 그렇다면 원신제가 미리 그들에게 이를 알려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협상에 참여하는 관리들에게는 알렸어야 하는데, 그녀가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이제야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도 서로 양보하는 방향으로 가길 원했지만, 궁정의 문무 백관들 중 그녀를 지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신복하는 북당 안풍친왕을 초대한 것이었다.이렇게 보니, 어제 원신제가 그녀와 시만자를 궁으로 부른 이유도 이해가 되었다. 처음에 말했던 그런 것들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여성의 과거 시험을 예로 든 것은, 그녀의 많은 결정들이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여기까지 분석을 마친 송석석은 점점 더 낙관적이게 되었다.궁중 연회가 끝난 후, 북당 사람들은 대접을 받으며 떠났다. 그들은 그 한 끼를 제외하고는 의견을 거의 내비치지 않았으며, 단지 짧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그들이 떠난 후, 상국의 사절단도 일어나 인사를 하며 물러났다. 모두가 돌아가서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수란키가 제공한 일정을 따르면, 이틀 후부터 협상이 시작될 예정이었다.황궁 별관에 돌아가자, 이덕회는 모두를 모아 앉히고 논의했다.사실상 또 다른 진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양보를 해야 한다면, 모두가 지도 위에서 함께 논의해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황제가 이미 양보의 한계를 설정해 두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양보를 하게 되면 돌아가기도 어렵고, 역사적인 죄인이 될 수도 있었다.그래서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그저 지도만 바라보며 각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서는 모두 입맛이 그다지 좋지 않기 마련인지라, 많은 음식들이 한 입 먹고 나면 다시 치워지곤 한다.하지만 북당의 사람들은 정말 음식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떤 요리가 나와도 모두 다 먹어버렸으며, 가득 채운 술잔도 순식간에 비웠다. 그들을 시중드는 궁인들도 꽤 힘들었을 것이었다.시만자는 그들이 춘만루에서 먹었던 그 한 끼를 떠올렸다. 그때도 남은 음식이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이 비워졌었다.그녀는 송석석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다. 하지만 식사 소리 외에는 아무 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기에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그러나 그들은 눈짓만으로도 서로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렸다.시만자는 북당 사람들이 이곳에 등장한 것이 협상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했고, 송석석도 그렇게 생각했다.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중재자로 온 것인지, 아니면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만약 중재자라면 협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고 조약을 체결할 수 있을 테니 더 좋을 것이었다.하지만 만약 서경을 돕기 위해 온 것이라면 협상은 공방전이 될 것이 분명했다. 북당이 그들의 방패가 된다면 상국이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 틀림 없으니 말이다.이덕회와 홍려사경 등 상국의 사절단들은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챈 듯 했다. 그래서 그들은 처음의 그 기쁨을 잃은 대신 마음속으로 여러 가지를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눈앞의 음식도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모두가 식사를 하고 있었기에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었다.이 궁중 연회는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 중 가장 이상한 연회였을 것이다. 마치 폭풍이 다가오는 듯한 무서운 고요함이 느껴졌다.궁중에서 준비한 요리는 총 32가지였다. 그러나 각 요리의 양은 매우 적었으며, 궁인들은 음식을 하나씩 들고 들어와서는 다시 하나씩 치워갔다.누군가 술잔을 들고 싶어했지만, 역시 원신제와 마찬가지로 한 번 쓱 훑어본 후, 술잔을 비우고 다시 내려놓고는 식사를 계속했다.마침내 32가지 요리가 모두 올라갔
다음날, 궁중 연회는 신시에 시작되었고, 여전히 수란키가 직접 그들을 맞아 궁으로 안내해주었다.예상했던 대로 즉위식은 이미 끝난 상태였고, 이번 연회의 주요 목적은 국경선의 협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궁에 들어간 후에도 다른 나라의 사절단을 보지 못했다.궁 안은 황실의 측근과 문무 백관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은 상국의 사절단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친근한 분위기도 없었다.이런 자리에서는 역관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대화의 주제가 그리 넓지 않아, 서로 간단한 인사 정도만 나눌 뿐이었다.다른 나라의 사절단이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입석할 때 원신제가 상국의 사절단에게 말했다."오늘 북당에서 귀빈들이 오십니다. 곧 도착할 것인데, 여러분이 그들과 바로 친해질 것이라 믿습니다."이덕회는 즉시 흥분하며 말했다. "북당의 귀빈이라 하셨습니까? 어떤 분이 오시는지요?"그가 흥분하는 것은 당연했다. 왕이장이 가져온 임양운의 육안총과 포차는 모두 북당에서 개량된 것이었고, 임양운 선생이 북당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이다.상국의 병부상서로서 그는 정말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북당은 상국이 항상 배우고자 했던 본보기였다. 그들의 첨단 무기와 치국책은 상국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물론 국가의 상황이 다르기에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을 테지만, 대화를 깊이 나누면 분명히 얻을 것이 있을 것이었다.원신제는 그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알게 될 것입니다."연회는 지루하고 피곤했지만, 북당의 귀빈이 온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모두가 기대하고 있을 때, 한 외침이 들렸다.“북당 안풍친왕과 왕비께서 도착하셨습니다!"이덕회는 놀라서 입을 막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송석석도 사부로부터 안풍친왕의 호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부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고 했다. 생각치도 못하게 오늘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그녀도 말할 수 없이 기뻤다.반면, 만두와 몽동이 그들은 비교적 담담했
원신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씁쓸한 게 한 가지 더 있네. 지금까지 짐은 장공주의 신분으로 여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볼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높이 외쳤지. 하지만 황제가 된 지금, 어쩔 수 없이 각 세력들의 이익을 고려해줘야 하고 그자들이 짐에 대한 적대심과 경계를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네. 짐은 이제 고려한 일이 더 많아졌어. 가끔은 속에 천불이 나서 반대파 세력들의 가슴에 칼을 꽂고 싶기도 하네.”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송석석이 대꾸했다.“사실 한 나라의 황제나 대신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국 최종 목적은 같지 않겠습니까? 폐하께서도 그렇듯 다들 나라의 안정과 백성들의 평안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나라에 영원히 전란이 일어나지 않고 창성해야 폐하께서 원하시는 개혁을 진행하셨을 때 반대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폐하, 현재 가장 중요한 건 폐하의 자리부터 굳건히 지키시는 겁니다.”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원신제는 송석석의 말뜻을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현재까지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고 각 세력들의 제지도 심하기에 이 국면을 해결하는 것도 충분히 힘든 일이다.황제의 자리도 흔들리고 있는 지금, 원신제가 개혁까지 고집하려는 건 더욱 위험한 일이었기에, 미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시만자 또한 송석석의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사실 한 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에 방법이 한 가지밖에 없는 건 아닙니다. 강경하게 상대방과 맞서 싸우는 것도 방법이지만 이는 가장 현명하지 못한 하책입니다. 한 사람의 성격도 바꾸기 쉽지 않은데 천 년이나 넘게 지속된 규정을 바꾸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폐하께서 관념의 씨앗을 심으시면 언젠가 누군가가 폐하께서 남긴 발자국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것입니다.”잠시 머뭇거리던 시만자는 이내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저와 석석도 매산에서 무술을 공부할 때 그랬습니다. 다들 저희를 비웃고 하찮게 여겼지만 저희는 결국 실력으로 그자들을 한 명씩 쓰러트렸습니다. 구호만 외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실력이
서경의 황궁은 금빛으로 반짝였으며 기세가 어마어마했다. 어둠이 깃든 고요한 밤에는 기 장엄함이 더욱 돋보였다.첫 번째 궁문을 들어서고 나서도 마차는 궁 안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궁 안 곳곳에는 커다란 나무들 위에는 등불이 잔뜩 걸려 있어 대낮처럼 밝았으며, 누군가가 몰래 나무 위에 숨어있는다고 해도 너무 밝아서 바로 들킬 정도였다.수란키는 앞장서서 걷다가 한 궁전 밖에 도착했는데, 궁녀 두 명이 다가와 수란키와 서경 언어로 몇 마디 나누다가 고개를 돌려 송석석과 시만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수란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송 대감님, 만자 낭자, 폐하께서 두 분에게 궁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두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궁전 안으로 들어갔다.휘황찬란한 궁전 내부에는 커다란 조각 기둥이 양측에 세워져 있었으며 그 모습은 압박감이 넘쳤다.원신제는 용상에 앉아 환한 미소로 두 사람을 반겼지만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해 보였다.송석석과 시만자는 이내 인사를 올렸고 원신제는 그들에게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그리고는 송석석을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짐은 송 대감이 사절단과 함께 이곳으로 온다고 하여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 너무 반갑네.”송석석은 웃으면서도 진지하게 대답했다.“폐하께서 황위에 오르셨다는 소식을 듣고 소인도 너무 기뻤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신 걸 감축드립니다.”송석석은 원신제를 힐끔 쳐다보았다. 원신제에게서 냉옥 장공주의 모습이 보였고 예전과 크게 변한 건 없었으며 여전히 피로해 보이고 여전히 진중하고 엄숙했다.냉옥 장공주에게 있어서 황제의 역할이든 실권을 손에 쥔 장공주 역할이든 똑같이 신경 쓸 일이 많을 것이다.“원하는 바를 이루느라 많이 힘들었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 일처리는 훨씬 쉬워졌네.”원신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조금 뒤, 궁녀들이 서경 특색이 돋보이는 다과들을 내왔다. 송석석과 시만자는 조금 전에 저녁 식사를 했기에 배가 고프지
서경 수도에 도착했을 땐 8월 13일이었기에, 송석석 일행이 떠난 지 한 달은 족히 넘은 상황이었다. 점심이 되자,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어졌다.진왕은 마차 안에 몸을 웅크려 누운 채 입성에 진입했다. 하지만 마지막 자객들은 머릿수도 많고 기세도 등등해, 서경 지대에 들어서고 나서도 송석석 일행은 총 일곱 번이나 습격을 당했다. 현갑군은 대부분 부상을 당했고 시만자마저 어깨가 칼에 찔렸지만 다행히 신경까지 다치지는 않았다.진왕이 이렇게까지 크게 논란 건, 자객에게 습격을 당할 당시, 그는 변소 안에 있었다.일을 마치고 변소를 나선 순간, 갑자기 나타난 자객이 검으로 진왕의 가슴을 베었고 그 검을 진왕의 가슴에 꽂으려던 순간, 송석석이 제때에 나타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한 발 빠르게 자객의 가슴에 꽂았다.하지만, 이내 자객의 머리채를 뒤로 확 잡아당긴 덕분에 진왕은 무사할 수 있었다.그는 가슴팍이 조금 베인 게 전부였지만 큰 중상을 입은 것 마냥 밤새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고 나서야 겨우 진정이 되었다. 수도에 도착하자 수란키가 관원들을 데리고 성문 앞에 서서 진왕을 반겼다. 수란키는 이제 서경의 승상이 되었다.한눈에 송석석을 알아본 수란키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송 장군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여전히 기품이 넘치시네요.”송석석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인사를 하며 상대방을 힐끗 살폈다. 솔직히 조금 전에 수란키를 알아보지 못했다.전보다 훨씬 늙어 보였고 백발인 데다가 수염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하지만 눈빛은 여전히 카리스마가 넘쳤고 남강 전장에서 봤을 때보다 되레 활기가 넘쳐 보이기까지 했다.남강 전장에서 봤던 수란키는 온몸에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위엄이 넘치고 엄숙한 그는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며 그저 복수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었다.“승상께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오시고.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네요.”송석석이 웃으면서 말하자 수란키가 호탕하게 웃었다.“너
한편, 크게 놀란 진왕은 태의를 불러 심신을 안정할 수 있는 약을 처방받았다.송석석이 찾아갔을 때, 진왕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덜덜 떨리는 입술로 송석석에게 자객은 어떻게 됐냐고 물었다.송석석이 진왕에게 자객이 도망쳤다고 얘기하고 나서야 그는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사실 진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자객이 도망쳤다고 진작 얘기했지만 진왕은 믿지 않았다. 이제 송석석에게서 듣고 나니 그제야 안심이 된 것이다.송석석은 진왕에게 몸조리 잘 하라고 당부한 뒤 방을 나섰다.이와 동시에, 이덕회는 나머지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병부 상서인 이덕회는 지금까지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전부 겪어 보기도 했고 또한 왕비와 현갑군을 믿었기에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한편, 매산 출신 몇 명은 한데 모여 전에 성릉관에서 만났던 검은 복장 차림의 무리들을 의심하고 있었다.어쩌면 그자들이 바로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말이다.이 의심을 가장 먼저 제기한 건 바로 시만자였다. 그는 그 무리들이 갑자기 사라진 게 너무 수상했고 비밀 경로를 통해 계획적으로 도망친 거라고 확신했다.더군다나 조금 전 자객들도 전부 검은색 옷차림이었기에, 비록 머릿수가 조금 차이 나긴 했지만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일부 사람들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성릉관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출동했던 건 아마 우리한테 손을 쓰려고 그랬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성릉관에서 우리를 죽이면 쉽게 도망칠 수 없을 것 같아서 일단 포기한 거야.”시만자는 분석할수록 자신의 의심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고개를 돌려 송석석에게 물었다.“내 말이 맞는 것 같지 않아?”송석석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그자들은 아니야. 정확히 얘기하자면 조금 전 자객들은 그자들보다 무술 실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자들은 성릉관에서도 자유롭게 나타났다가 사라졌어. 그렇게 보면 네 의심이 성립되지 않다는 거지. 그자들은 성릉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