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의 얼굴에 점점 불쾌한 기색이 나타났다. "아이구, 내가 몇 번이나 말했소? 그만 좀 떠들어 대시오. 손마마처럼 구질구질하게 굴면 다들 싫어한다지 않았소? 내가 주인이라면 자네 같은 하인은 필요 없을 것이오!"그러자 손마마가 불쑥 나타나 반문했다. "그럼 직접 주인이 되셔서 마음에 꼭 맞는 하인을 구하십시오!""당연히 그럴 것이오. 여기서 고생하며 자네 같은 늙은 하인 얼굴 볼 바에야!"가의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어서 가십시오. 옷 챙길 필요도 없겠습니다. 가면 좋은 옷이 많을 테니깐요.” 그러자 가의가 고개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경고하는데 내 옷 건드리지 마시오! 줬다 뺐는 건 부도덕한 일이오."그러자 손마마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인색하긴, 어차피 입지 못하는 옷인데 가져가서 뭘 하시려고요? 후부의 하인도 그런 옷은 입지 않을 겁니다.” “입고 안 입고 난 반드시 가져갈 것이오.” 그러자 손마마가 말했다."알겠습니다. 내가 챙겨줄 테니까 빨리 가십시오."그러자 가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내 물건은 내가 챙길 테니 건드리지 마시오!” 그러더니 다급히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사란은 잠시 시만자를 바라보다가 시만자에게 얼른 그녀를 따라가라고 손짓했다. 방 안은 그리 깨끗하지 않았는데 바닥엔 심지어 진흙도 있었다. 의자에는 새 옷 한 벌이 걸려 있었는데 땀 냄새가 났고 바닥에는 신발 두 켤레가 널브러져 있었는데 하나는 새 신발이고 또 하나는 진흙이 묻은 짚신이다.가의는 그 옷을 품에 안았다. 그 옷은 단순한 색깔로 아무런 자수나 장식이 없었지만 바느질이 매우 섬세했다.사란이 물었다. "언니, 아주 비싼 옷이오?"그러자 가의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비싸긴 개뿔, 손마마가 못 쓰는 안감으로 만들어 준 옷이다. 노파가 어찌나 깍쟁인지 나한테 옷 한 벌 만들어주는 것도 아까워하더구나. 흥, 절대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그러자 사란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무랐다. “언니, 그런 말은 하지 마시
가의는 눈앞의 비통함이 가득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만약 살길을 찾고 싶다면 들어가시오. 비록 생활은 궁핍할지 몰라도 여기선 아무도 당신을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니.”여인의 눈물은 순간 둑이 터진 강물처럼 쏟아졌다.그녀의 이름은 모종윤이었다.원래 그녀와 남편 진성은 서울에서 염색 공방을 운영하며 딸 하나를 두고 살았다.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부부 사이는 원만했고 금전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어 나름 행복한 생활이었다.하지만 그녀가 딸을 낳을 때 대출혈을 겪으며 의원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다만 이후로는 아이를 다시 가질 수 없다는 소식에 큰 슬픔에 빠진 것이었다.그녀는 낙담했지만 진성은 오히려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딸 하나면 충분하오. 나에겐 아우가 둘이나 있으니 아우들이 대를 이어갈 것이오.”그녀는 장며느리로서, 또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기에 두 소숙에게 각자 아내를 맞이하도록 도왔고 그들은 모두 아들을 낳았다.그 시절 두 소숙은 그녀를 존경하며 모든 일을 상의했다.그러나 1년 전, 남편과 딸이 고향에 다녀오는 길에 산적을 만나 참변을 당했다.떠날 때는 생기 넘치는 두 사람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이미 부패 직전의 시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그 충격에 거의 삶을 포기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부모님과 시부모님이 계신다는 생각에 자식으로서, 며느리로서 마지막까지 봉양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떨칠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생각한 것과 달리 시부모와 두 소숙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남편이 죽고 아들도 없는 그녀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로 여겨졌다.그들은 염색 공방과 그녀가 모은 재산을 전부 가져갔고 결국 그녀를 쫓아내 버렸다.심지어는 그녀에게 시어머니를 때렸다는 누명까지 씌웠다. 그 일은 관아까지 알려졌고 시부모에게는 증인이 있었으며 심지어 몸에 상처가 있었다.그녀는 억울하다고 외쳤지만 하인들과 두 소숙의 아내들이 직접 증언하는 바람에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친정
모종윤이 평자호의 세 번째 방에 들어가게 되면서 소진 소주방은 마침내 첫 번째 입주자를 맞이했다.시만자는 그녀가 자수틀 앞에 앉아 꽃을 수놓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비록 시작은 너무나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드디어 첫 발을 내딛은 셈이었다. 막다른 길에 몰린 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소진 소주방을 떠올리길 간절히 바랐다.전소환은 남편에게 이혼당한 뒤 친정으로 돌아갔다. 왕청여는 그녀를 몹시 싫어했기에 원래는 집에 들이는 것조차 꺼려했다. 하지만 전북망이 그녀를 집으로 받아들일 것을 고집하자 화가 난 왕청여는 본인의 친정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다.왕청여는 친정에서 어머니에게 울며 하소연했다. 이제 전북망은 봉급도 없고 맡은 일도 소홀히 하며, 하루 종일 폐인처럼 지내니 도저히 이런 삶은 살 수 없다며 울부짖었다.노부인은 이제 왕청여의 울음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녀가 하소연하며 우는 일이 너무 잦다 보니 처음엔 위로라도 했던 노부인도 이제는 무덤덤해져서 그저 내버려 둘 뿐이었다.다만 최씨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그렇게 살기 힘들면 이혼을 하지 그래? 이혼한 뒤에는 친정에 돌아오지 말고 소진 소주방에 가면 되잖아. 다만 공방에서 너를 받아줄 것 같진 않구나. 예전에 민씨가 투신했을 때 네가 한 역할이 적지 않았으니 말이야."왕청여는 민소진의 이름을 듣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동시에 큰형수인 최씨도 두려워했다. 결국 친정에서 이틀만 머무른 뒤 할 수 없이 머리를 숙이고 다시 장군부로 돌아갔다.한편 최씨도 소진 소주방에 들러 모종윤을 만났다. 모종윤의 사정을 얼핏 들은 적이 있었던 최씨는 시만자에게 그녀를 도와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시만자가 이미 홍현을 보내 상황을 확인하도록 했다며, 억울함을 풀어줄 수는 있겠지만 염색 공방은 아마 되찾지 못할 것이라고 전했다.최씨는 한 동안 침묵을 유지하고는 시만자의 말이 사실임을 묵묵히 인정했다.모종윤의 염색 공방은 그녀와 남편이 함께 만든 것이었지만 공방은
송석석 덕분에 대리사는 매우 바빠졌다. 송석석은 앞뒤로 열심히 뛰며 직접 사여묵에게 음식을 보내 그의 편의를 세심히 챙겼다.사건의 증거는 사실 이미 전부 확보된 상태였다. 대리사에서는 이를 확인하고 용의자들을 체포해 심문해야 했다.이런 일들은 본래 사여묵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관련된 인물들 뒤에는 모두 막강한 세력들이 있었기에 송석석이 원망을 사기보다는 자신이 원망을 받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 스스로 나섰다.그냥 이 세가들이 자신을 미워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가장 신이 난 사람은 오진이었다. 최근 그는 무예 훈련에 더욱 힘을 쏟았다. 이번 일이 제대로 정리되면 순방영이 진성을 수호하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는 너무 빨리 기뻐했다. 대리사의 철저한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순방영과 경위의 직무가 중복된다며 순방영을 철폐하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송석석도 순방영과 경위의 직무를 새로이 구분할 것을 요청하는 상주문을 올렸다.숙청제는 이 문제를 조정에서 즉각 허락하지 않고 조례가 끝난 뒤 송석석을 어서방으로 불러 물었다.“어제 태후께 문안을 드리러 갔더니 태후께서 여학에 대해 물으시더군.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송석석이 답했다.“폐하께 아뢰옵니다. 여학의 보수 공사는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현재 책상과 의자, 붓과 먹, 종이와 벼루를 준비해 두었으며 학자 또한 물색 중에 있습니다.”“태후께서 여학을 매우 중시하고 계시니 그 일에 더 신경을 쓰도록 하라. 순방영의 문제는 당분간 미뤄두도록 하라.”송석석은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놀라지 않고 격식있게 대답했다.“예, 알겠습니다.”조정 회의에서 황제가 허락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이 일이 성사되기 어렵겠다고 직감했다.그녀는 숙청제에게 순방영을 철폐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짐작했다. 일부 병력을 줄여 경위로 보내고 남은 병력 중 불필요한 인원은 해산시키며, 쓸 만한 인원은 현철위로 재배치할 생각인 듯했다.숙청제는 그녀가
이방이 서경의 사신에게 끌려간 이후로 그는 거의 매일 밤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이방은 서경 사람들에게 온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리고, 살점이 한 조각씩 도려내어져 피가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집어삼켰다.대낮에 근무를 할 때조차도 줄곧 이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때는 도와달라 외쳤고, 어떤 때는 그를 배신자라고 욕하며, 또 어떤 때는 비참한 비명 소리가 들리기까지 했다. 그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이방에게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두가지의 생각이 계속 충돌하면서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도 쇠약해지고 완전히 지쳐버렸다.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사령관이라는 자리가 사실상 허울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가 그에게 아무 임무도 주지 않으니 매일 그냥 허둥지둥 거리를 배회하다 집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집에서도 평안하지 않았다. 왕청여는 소란을 피웠고, 전소환은 그에게 후부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라고 부추겼기 때문이다.어디에서도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답답함과 고통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이제 그의 곁에는 그런 친구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었다. 아무도 그와 왕래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송석석은 사실 이방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익각에서 온 소식에 따르면 냉옥 장공주는 아직도 녹분성에 갇혀 있었다.수란석은 녹분성으로 돌아간 뒤 사령관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지만 병력을 주둔시키며 퇴각하지도 않았다.그 역시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을 저울질하며 신중하게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국과의 회담을 거친 뒤 그는 상황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단순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공격을 하자니 식량과 무기가 부족하고, 물러서려니 황제의 밀지가 있어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처지였다.그는 직접적으로 공격할지 후퇴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냉옥 장공주에게 무장들과의 협상을 맡겼다. 때가 되면 그 흐름에 맞춰 행동하
사여묵은 약간 짜증이 났다. 전북망이 도무지 눈치가 없어서였지, 질투 때문은 아니었다.송석석이 방금 어서방에서 황제를 알현하고 나온 뒤였는데 전북망이 그런 자리에서 그녀를 붙잡고 질문을 하다니, 정말 생각 없는 행동이었다. 어서방에는 궁인들뿐만 아니라 황제의 부름을 기다리는 대신들도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송석석이 말했다."상대도 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가 다시 이방에 대해 물어볼 줄은 몰라서 조금 의외였을 뿐이에요.""신경 쓰지 마시오." 사여묵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 서우를 데리러 가자."마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노을의 잔광이 마차 커튼 틈새로 스며들어 두 사람의 얼굴에 따스한 금빛을 드리웠다.서원에 도착하자 장대성이 마차를 세우고 서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잠시 후, 그가 서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서우는 이제 훨씬 차분해졌다. 서원에 막 다니기 시작했을 땐 고모와 고모부가 자신을 데리러 오면 신나서 깡충깡충 뛰어 달려 나왔지만 이제는 단정하게 걸어 나왔다. 비록 표정은 잔뜩 신이나 있었지만 말이다.서우는 마차에 올라 사여묵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린 후에야 고모의 품에 안겨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고모! 오늘 선생님이 저를 칭찬해 주셨어요. 제가 쓴 글이 훌륭하대요!"송석석은 손수건을 꺼내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웃으며 말했다. "오, 우리 서우가 이제 글도 쓰는구나?""네!"서우는 신난 얼굴로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 송석석에게 내밀었다."고모, 보세요. 이게 제가 쓴 글이에요!"송석석은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글을 배우기 시작한 지 아직 얼마되지 않았기에 글씨에 역동적인 멋은 없었지만, 글자 하나하나가 반듯하고 힘이 느껴졌다. "글씨가 참 예쁘구나.” 그녀는 서우를 칭찬한 뒤 글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글의 표현은 다소 유치했지만 단어 선택과 문장 구성이 분명하고 주제가 뚜렷했다. 서우가 똑똑하고 생각이 명확한 아이임을 엿볼 수 있었다.송
대황자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빛이 모두 변했다.서우는 고모 옆에 서 있다가 조금 당황한 듯 옷자락을 꼬집었다. 사실 그에게서는 약간의 냄새가 나긴 했다. 매번 집에 돌아오면 단신의가 지어준 약물로 목욕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우 자신은 그 냄새에 익숙해져 있어서 더 이상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그의 마음속에 있던 열등감이 다시금 서서히 올라왔다. 거지였던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냄새나니까 꺼져!”송석석은 한 손으로는 서우의 손을 꼭 쥐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고모는 이 약초 향이 좋은데?"서우는 고모의 따뜻한 눈빛에서 위안을 얻었다. 그렇다. 남들이 한두 마디 한다고 이렇게 위축될 필요는 없는 것이다.그는 고모에게 환하게 웃으며 괜찮다는 눈빛을 보냈다. 제 황후는 태후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 대황자를 끌어오며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누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하라고 가르쳤느냐? 당장 송국공께 사과드려라!”대황자는 턱을 쭉 내밀며 말했다."저는 거지한테 사과하기 싫어요!"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황자는 자신의 몸이 공중에 뜨는 것을 느꼈다.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엉덩이를 두 차례 강하게 얻어맞았다. 그는 아파서 곧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어서 눈물 닦지 못할까!”사여묵이 그를 안아 들고 매섭게 소리쳤다.대황자가 아무리 거만하게 횡포를 부려봤자 겨우 일곱 살에 불과했다. 어린 아이가 사여묵의 이런 엄한 태도를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대황자는 곧 울음을 꾹 삼켰다. 훌쩍이며 눈물을 그렁그렁한 채로 제 황후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제 황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얼굴 또한 굳었다."사과해. 안 그러면 황숙이 네 아바마마께 이 일을 모두 말씀드릴 거야."그녀는 말하면서 태후를 흘끗 바라보았다. 태후는 천천히 차를 들며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대황자는 마지못해 서우에게 사과했다.서우는 괜찮다고 말하며 그를 위로했지만 대황자는 이를
어전에서 숙청제가 오 대반의 보고를 들었을 때 숙청제는 얼굴이 새파랗게 될 정도로 화가 났고 분노에 차 외쳤다."이 못난 놈 같으니라고!" 그러자 오 대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폐하, 태후께서 혜 태비에게 명하시어 왕야와 왕비를 궁 밖으로 내보내셨습니다. 태후께서 송국공만 남겨 함께 식사하시고, 궁문이 닫힐 때쯤 내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숙청제가 명을 내리며 말했다."직접 어선방에 가서 태후께서 좋아하시는 요리를 몇 가지 준비하게 하라. 내가 태후와 함께 식사를 하러 갈 것이다.""예!"숙청제는 이어 명령을 덧붙였다."또 장춘궁에 가서 내 명을 전하라. 전북망에게 대황자를 데리고 태묘에 가서 무릎 꿇고 참배하게 하라. 그리고 전북망에게 송가가 치른 모든 전투에 대해 그에게 가르치게 하라. 내가 나중에 질문할 것이다."오 대반은 이 명령이 아주 좋다고 여겼다 특히나 대황자를 전북망이 데리고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했다.오 대반이 물러난 후, 숙청제는 눈앞에 쌓인 상소문들을 보며 갑자기 모든 의욕을 잃었다.최근 2년 동안 조정의 모든 문무백관이 태자를 책봉해달라고 청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역대 왕조에서도 태자 책봉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조정 앞과 궁궐 뒤, 공신과 외척이 서로 힘겨루기를 하며 복잡한 구도를 형성해왔다.하지만 이 조정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태자를 세운다면 장자와 적자를 우선하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대황자는 장자이자 적자로서 신분의 존귀함이 다른 황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태자 책봉에 있어 의심할 여지없이 대황자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황후와 제씨 가문도 여러 차례 그의 반응을 살피며 의사를 떠보았지만 숙청제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대황자는 능력이나 성품 모두 태자로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상국을 그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만 하면 숙청제는 한없이 불안해졌다.다행히도 그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태
어떤 힘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걷기도 버거워 보이던 노부인이 갑자기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금숙과 천마마조차 그녀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였다.노부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눈앞에는 정원의 풍경도, 주변의 사물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머릿속에는 수년간 불타오르던 큰` 화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불길 속에서 울려 퍼지던 처절한 비명이 귀를 맴돌았다.그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끌리고 붙잡혀 움직이면서도 그 불길이 모든 것을 삼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그녀의 막내아들은 그렇게 불 속에서 죽었다.불길 속에서 여러 시신이 끌려 나왔지만 그녀는 그 시신들 중 어느 것이 자신의 아들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그녀는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정도로 크게 오열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죽지 않았을 가능성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병약해 걷는 것조차 누군가의 부축이 필요했던 아들이 어떻게 그 불바다 속에서 살아남았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노부인이 본채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눈에는 오직 한 사람만이 보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눈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그녀의 시야는 더욱 흐릿해졌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그 희미한 그림자를 따라 걸어갔다.노부인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힘없고 불확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네가 내 아들이냐?"왕이장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마음속으로 가장 원망스러워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순간 노부인의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을 보고 왕이장은 가슴 한구석에서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그는 움직이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어머니, 저 아이가 교여예요." 왕준이 울면서 옆에서 외쳤다."아……!"노부인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왕이장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기억 속 깊은 과거가 검고 짙은 밤을 뚫고 되살아났다. 그녀의 가슴은 마치 한 조각이 도려내
왕준이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여기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어머니께서 언제 친아들을 버린 적이 있다고 그래? 나도, 큰형도 잘 지내고 있지 않느냐!""너희는 잘 지낸다고? 그럼 나는?"왕이장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위와 목이 자극을 받아 고통스러워졌다. 그는 위를 부여잡고 웅크린 채 앉아 내력으로 속을 진정시키려 애썼다.그의 말에 왕준은 한동안 얼어붙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떠올린 듯 그를 급히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최씨 역시 무언가 기억난 듯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녀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들었던 이야기였다. 어머니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었고, 막내아들은 병에 걸려 치료하지 못해 사찰로 보내져 길러졌다. 그러나 사찰에 화재가 발생해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불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설… 설마 그때 죽지 않았던 건가?’"이름이 무엇이냐?"왕준은 이미 울먹이며 물었다. 그의 입술은 계속해서 떨렸다. 그는 왕이장을 간절히 바라보았다."노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노부인에게."왕이장은 위를 부여잡고 힘겹게 의자에 앉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더 이상 힘이 없었다.최씨는 다가가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기억났어요. 당신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여러 번 백부 문 앞에서 서성였잖아요."왕이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최씨는 곧바로 시만자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시만자 또한 최씨를 보지 않고 왕이장에게 말했다. "왕노오, 여기까지 왔으니 이들에게 분명히 말해. 왕교여라는 이름으로 어릴 적 여자 아이처럼 길러졌고, 다섯 살 때 사찰에 버려졌으며 학대받아서 몇 달 만에 죽을 뻔하다가 또 다시 버려졌다고. 사부가 널 주워서 살려줬지.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잘못한 건 이들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따져봐."왕준은 마치 벼락을 몇 차례나 맞은 사람처럼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았다.그리고 곧 크
술에 취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평서백부에 도착했다. 시만자의 신분을 아는 덕분에 밤늦은 시간임에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최씨가 병을 앓고 있는 관계로 하인은 왕준과 남희에게 이를 알리러 갔다.소식을 들은 왕준과 남희는 다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늦은 밤에 시 소저가 대체 무슨 일로 온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왕준이 먼저 물었다.“남자를 데려왔다고? 그 남자는 누구인가?" 문지기가 답했다."전혀 본 적이 없는 이였고, 태도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의자를 두 개나 발로 차서 넘어뜨렸습니다. 입으로는 험한 말을 뱉으며 정말 너무한다며 계속 중얼거렸습니다."왕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분란을 일으키러 온 건가? 혹시 왕청여가 화를 산 사람인가?"그는 최근 이런 일이 몇 차례 있어 겁을 먹은 상태였다. 누군가 찾아와 문제를 일으키면 첫 번째로 왕청여가 일을 벌인 게 아닌지 의심하곤 했다."아닐 겁니다." 문지기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그 사람이 욕한 대상은 노부인과…… 돌아가신 선대대인 이었습니다."왕준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기에 백작이라 불리지 못했다. 그래서 평서백부의 하인들은 그를 선대대인이라 부르며 존경을 표했다.왕준은 효심이 매우 깊은 아들인지라, 어머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욕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크게 분노했다. 시만자가 데려온 사람인지 아닌지는 상관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가자, 내가 직접 나가서 누군지 보겠다. 평서백부에 와서 감히 행패를 부리다니, 무슨 배짱을 가진 놈인가 보자!"왕준은 죽은 자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죽은 이를 욕하는 것은 성격이 비열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만이 할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노에 차 남희를 데리고 성큼성큼 나갔다.한편 왕이장이 의자를 발로 차는 소란이 있자, 다른 하인이 이를 최씨에게 보고하러 갔다. 모두가 이런 문제를 진정시킬 사람은 오직 최씨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왕준도 관직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대게
심청화가 급하게 그를 따라 나서서 붙잡자, 왕이장은 걸어가며 손을 휘저으면서 말했다."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심청화는 왕이장에 대해 너무 잘 알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괴로움이 있어도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고 그저 다른 곳으로 떠나 은둔하는 것을 선택했다."이건 우리가 추측한 것일 뿐이야. 진실이라고 단정할 수 없어."왕이장이 웃으며 말했다."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이제 술을 마시러 갈 겁니다. 마침 지금 가을바람도 불고 날씨도 시원한데, 미인과 함께하면 더할 나위 없겠죠."시만자가 나서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가자. 내가 함께 마셔줄게."시만자도 지금이 되어서야 그가 사실 첩의 아들이 아니라 평서백부인의 친아들이며, 왕표와 왕청여와 같은 친남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왕이장은 시만자가 따라오는 것 또한 원하지 않았다. 그는 시만자에게 말했다."내가 가려는 곳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시만자는 막무가내로 그의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술값은 내가 계산해줄게."하지만 왕이장은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태도가 날카롭고 신랄하게 변한 것이다."돈 있어. 따라오지 마. 정말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냐? 정말 네가 나를 먹여 살려야된다고 생각해? 나는 네가 자꾸만 살려준 은혜를 갚으려 해서 그랬던 거야. 너희 여자들은 정말 진절머리가 나. 스스로 얼마나 귀찮은지조차 모르잖아."시만자는 전혀 화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여자들만 귀찮아? 남자들은 안 귀찮고?"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며, 왕이장은 못마땅한 듯 말했다."다 귀찮아. 똑같이 귀찮아."시만자는 그의 손을 계속 잡아끌며 마구간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그럼 말타러 가자. 남자도 여자도 보지 않으면 되잖아. 바람이 얼마나 시원한데. 바람 맞으며 말을 타면 모든 걸 날려버릴 수 있을 거야.""안 간다고!"“가자니까!”시만자는 웃음을 거두고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 타러 가지 않으면 술을 마시러 갈 거야. 네가 나랑 같이 가야 해. 나도
염선생과 노 집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조사한 결과, 이 일이 결코 간단한 사건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심청화의 말에 따르면, 사부님께서 처음 조사한 바로는 왕전은 그 아이가 자신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했었다. 다만 몸이 상해 이미 건강이 나빠진 탓에, 진성의 많은 명의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어서 결국 어느 사찰로 보냈다는 것이다.이 점은 왕전이 이 아이에게 부성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막내아들은 대개 더 많은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하지만 노 집사와 평서백부의 몇몇 노관리와 노집사들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왕전은 죽은 그 아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어떤 태도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정말로 냉대했다는 것이다.그들은 몇 가지 사례도 제시했다.지금의 왕이장이 옛날 그 당시에는 왕교여라고 불렸다. 때는 할아버지의 생신 날, 할아버지는 그를 직접 안고 생신 연회장에 데리고 들어갔다. 그때는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정정하게 걸으실 수 있었다.그러나 그 일 이후, 왕교여가 할아버지를 피곤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전은 그를 끌어내 손바닥을 열 대나 맞는 벌을 내렸다.이 일은 다른 이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목격했다고 한다.또 다른 예로, 할아버지가 왕교여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흰 여우를 잡아 여우 가죽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 가죽은 셋째인 왕청여가 입고 있었다.그 외에도 왕전이 왕교여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다는 이야기는 하인들 사이에서 여러 번 회자되었다. 노 집사에게 정보를 제공한 이들도 이를 보았다고 말했다.당시 분가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같은 저택에서 생활했다. 왕전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본인조차 이를 자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또한 왕교여의 병을 치료할 때 당시 의원은 모두 그의 할아버지가 초빙한 명의들이었다. 그렇게 약을 달이는 과정에서 몇 가지 약재가 바뀌었는데, 왕전은 약을 달이는 하녀나 하인들에게
하지만 그녀는 순간 집사의 보고가 매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매각한 점포가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으며, 그 가격 또한 상당히 높게 책정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세보다 10~20% 더 높은 가격이었다.그녀는 집안을 관리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점포 거래를 여러 번 해보았다. 거래는 대개 시세를 기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간혹 한두 건 정도 시세를 약간 웃도는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매각한 모든 점포가 이처럼 높은 가격에 거래되니 매우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왕비가 자신이 점포를 매각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급히 은자가 필요한 줄로 여겨 일부러 높은 가격에 매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집사에게 매매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계약서에 써 있는 매수인의 이름이 고효풍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북명황실에 고효풍이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느냐?" 최씨가 집사에게 물었다."들어본 적 없습니다.""그럼 이 매수인은 대체 누구인 것인가?"그녀의 마음속에 약간의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세보다 이렇게 높은 가격에 매수하다니, 혹시 나중에 어떤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되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모든 거래가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진행되었으며 공식 문서를 통해 등기되었고, 또한 증인이 보증한 합법적인 절차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이유는 없어 보였다."됐다. 일단 신경 쓰지 말고 남은 점포는 더 이상 팔지 마라. 어머니를 놀라게 할 필요는 없으니." 그녀거 집사에게 말했다.점포를 매각하는 일은 그녀가 노부인 몰래 진행한 것으로, 심지어 왕준이나 남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들이 집안일은 관리하지 않으니 이런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이 이를 알게 되더라도 나중에 이유를 설명하면 될 터였다. 어차피 이 일은 그녀만을 위해 진행한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매수인에 대한 의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송석석이 그녀를
홍이의 말에 왕청여가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대답했다.“하지만… 내 서방님은 출세를 못하잖아. 가서 계급도 달지 못한 병사를 한다는데.. 그럼 내 체면은 어떡하라고? 난 내 자신을 더욱 소중하게 대하고 싶은 거야. 그때 당시 송석석이 내 서방과 이혼할 땐 어명까지 내려졌잖아. 그런데 난 왜 안 되는 거야? 내가 뭐가 부족해서 이렇게 손가락질을 받고 욕을 먹어야 하는 거냐고.”홍이는 이 모든 게 왕청여가 자초한 일이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사람과 사람 사이를 비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각자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북명 왕비님보다 못한 사람도 있지만 더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행복한 건 아닙니다.”왕청여가 씁쓸하게 웃으며 물었다.“왜 예전에는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냐?”“제가 얘기를 해도 아가씨께서는 제 말을 듣지 않았을 겁니다.”문발을 내린 홍이가 마부에게 말했다. “이보시게, 이만 출발합시다.”마차 안에 멍하니 앉아있던 왕청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고 앞으로 그녀를 원하는 남자는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생각에 너무 불안했다.‘송석석은 한 번 이혼을 하고도 외모가 수려하고 나라에 큰 공까지 세운 서방을 만날 수 있는데 난 왜 안 되는 걸까?’이런 생각에 왕청여는 홍이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홍이야, 설마 나중에 전북망 그 사람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우는 일은 절대 없겠지?”홍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아가씨, 사람 일은 모르는 겁니다. 그분은 나중에 다시 장군님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평생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결국 장군부까지 잃을 수도 있겠죠.”“그 사람 능력으로 다시 재기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내가 그 사람과 이혼하지 않고 계속 산다면 늙어 죽을 때까지 예물마저 다 탕진하고 결국 장군부까지 빼앗겨 길바닥에 나앉게 될 수도 있어. 그럼 내 인생은 정말 망가지는 거야. 내
시만자는 오늘 계속 방씨 가문에 있었다. 오수인의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약왕당의 청작을 불러서 방씨 가문으로 같이 간 것이다.저녁이 될 때까지 방씨 가문에 있었던 시만자는 방씨 가문 사람들을 통해 오늘 편서백부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방천허의 부인은 이 사실을 절대 오수인에게 알리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그리 오래 숨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간 남자와 간통한 것도 모자라 낙태까지 하다니. 방시원은 이제 더 이상 왕청여의 서방이 아니지만 왕청여가 방씨 가문에 있을 때 벌어졌던 일이기에 방시원도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외부에 방시원이 잠자리에 약해서 왕청여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도 남발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전장에 나간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이와 반대로 왕청여가 태생부터 한 남자에 만족하지 못하는 천박한 여자라는 비판도 무성했으며 노세진을 뻔뻔하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방씨 가문에서 착한 마음으로 노세진을 거둬줬는데 노세진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파렴치한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사람들의 평가를 종합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세진과 왕청여는 천벌 받아 마땅한 나쁜 놈들이고 방시원은 아무 잘못 없이 억울하게 엮였다는 결론이 내렸다. 반면, 전북망을 언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전북망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왕청여와 이혼한 사실도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이날 밤, 함께 황실로 돌아온 시만자와 송석석은 오늘 서로에게 있었던 일을 상대방에게 얘기해주다가 이내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전에는 구경 삼아 지켜보던 일이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시만자와 송석석도 걱정되고 마음이 불편했다.한편, 현이는 오늘 밤에도 무술을 연습하러 찾아왔고 평소보다 더 열정적으로 연습에 임했다. 현이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도울 수 없는 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빨리
송석석은 사람을 시켜 약왕당으로 가서 홍작을 모셔왔다. 다행히 이마의 상처가 깊지 않았고 신속적으로 지혈도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하지만 며칠 동안 고열을 앓고 있었던 최씨는 몸이 허약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화까지 낸 탓에 새까만 피를 왈칵 토했을 뿐만 아니라 의식도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최씨 눈가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송석석이 아무리 닦아도 눈물은 계속 흘렀다.“의원님, 상황은 좀 어떤가요?”홍작이 최씨에게 진맥 검사를 마치자 송석석이 물었고 홍작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부인께서 고열을 며칠이나 앓으셨는데 조금 전에 등을 확인해보니 폐에 문제가 조금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화병 때문에 간에도 어혈이 생겼습니다. 전에 복용하시던 약으로는 더 이상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일단 극약 처방으로 간과 폐를 치료하고 나머지 부분은 몸조리를 통해 천천히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렇게 과로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말을 하던 홍작은 송석석을 구석으로 끌고 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간에 어혈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는 마음속에 늘 화병이 잠재되어 있어서 생긴 현상입니다. 부인께서 마음속에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계속 이렇게 혼자서 쌓아 두면 나중에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송석석은 최씨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혹시 왕표가 반역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집안 사람들까지 엮이지 않을까 매일 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을 것이다.“일단 약을 좀 복용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홍작은 말을 마치자마자 돌아서서 떠났다.송석석은 밖으로 나와 순방영 사람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다.이내 순방영 사람들까지 떠났고 송석석은 돌아선 순간, 기둥에 가까스로 기댄 채 눈이 벌겋게 충혈된 왕청여를 발견하게 되었다.왕청여는 다음 순간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송석석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북명 왕비님, 제가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