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없어? 목 말라.”차우미가 말했다.“저기 있어.”말을 마친 그녀는 침대머리로 생수를 가지러 다가갔다.임상희가 말했다.“손이 다쳐서 불편하지? 내가 할 테니까 거기 있어.”주혜민이 다가왔다.“내가 따라줄게.”“괜찮아. 손을 다친 것도 아닌데 뭘.”임상희는 침대머리에 놓인 포트를 잡고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아 뜨거!”그 순간 물펍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차우미가 놀라서 다가가는데 임상희가 갑자기 몸을 돌리며 옆에 있던 주혜민을 밀쳤다.차우미는 쓰러지는 주혜민을 잡아주려고 손을 뻗다가 그대로 같이 쓰러져 버렸다.쾅!“악! 숙모, 괜찮아?”차우미는 주혜민의 몸 위로 쓰러지며 다친 손이 바닥에 부딪혔다.극심한 통증에 이마에 식은땀이 났다.하지만 밑에 깔린 주혜민이 걱정돼서 억지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그 순간, 다가온 임상희가 그녀를 확 밀쳤다.힘이 워낙 셌기에 차우미는 그대로 침대머리에 머리를 부딪히며 쓰러졌다.“악! 피! 숙모, 피 나!”차우미는 소리를 듣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임상희가 앞을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이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자 어느새 안으로 달려온 남자가 주혜민을 품에 안았다.“외삼촌, 빨리 숙모 데리고 응급실로 가!”나상준은 굳은 표정으로 품 안의 여자의 상태를 살피고는 밖으로 나갔다.그는 바닥에 쓰러진 차우미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마치, 주혜민을 제외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처음부터 그의 마음에는 그녀의 자리가 없었던 것처럼.차우미는 멍하니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병실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홀로 남겨진 차우미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엄마가 곧 돌아올 텐데 이런 모습을 보면 또 속상해하실 것이다.그녀는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기 싫었다.하지만 손을 움직일 때마다 뼈를 가르는 고통이 전해지고 조금 전 침대 모서리에 부딪힌 허리에서도 묵직한 통증이 전해졌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다시
온이샘이 걸음을 멈추었다.“왜? 뭐 더 필요해?”그는 고개를 돌리고 긴장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의 이런 모습은 그를 두렵게 했다.차우미는 미안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일단 바닥에 유리조각부터 좀 처리해 줄래?”온이샘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하지만 지금은 네 치료가 더 시급해.”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일단 저거부터 좀 치우고 의사 부르자. 엄마가 곧 오실 텐데 저거 보면 걱정하실 거야.”그제야 온이샘은 하선주가 병실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는 고통에 눈시울까지 붉어진 그녀를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그래.”결국 그는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모두 정리하고 물기를 다 닦은 뒤에야 의사를 부르러 밖으로 나갔다.의사가 병실로 오자 차우미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의사가 겉옷을 들어올리자 등에 퍼렇게 멍자국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온이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의사가 어떻게 다쳤는지 묻자 차우미는 부주의로 넘어졌다고 답했다.그녀는 임상희나 주혜민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어차피 둘은 목적을 달성했으니 그녀도 더 이상 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차우미는 조금 양보해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일단은 엑스레이 한번 찍어봐야 할 것 같네요.”의사가 온이샘에게 말했다.온이샘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제가 데리고 갈게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휠체어를 가져오는 게 좋겠어요. 골절은 아닌 것 같고 당분간 걷는 건 자제하는 게 좋겠네요.”“알겠습니다. 지금 가지러 갈게요.”의사는 휠체어 대여하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잠시 후, 온이샘이 휠체어를 끌고 병실로 돌아왔다.그는 차우미를 부축해서 휠체어에 태웠다. 차우미는 바깥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엄마 곧 오실 시간인데.”나간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지금쯤이면 돌아올 시간이었다. 차우미는 오히려 엄마가 무슨 일로 늦어진 건지 걱정이 되었다.온이샘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엑스레이 검사결과를 확인한 의사가 나상준에게 말했다.“정말 아무 문제 없는 건가요?”“그 여자가 외숙모를 밀쳐서 바닥에 쓰러졌어요. 그때 저도 자리에 있었는데 너무 놀랐다고요. 뇌진탕은 아니겠죠? 머리는 엑스레이를 찍어봤나요?”의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임상희가 끼어들어 종알종알 떠들었다. 의사는 줄곧 말이 없는 나상준의 표정을 힐끗 살피고는 말했다.“다 찍어봤어요. 뇌진탕 증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아, 검사를 다 해봤어요? 저는 안 해본 줄 알고.”“외삼촌, 이렇게 하자. 며칠 입원해서 경과를 지켜보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렇게 심하게 넘어졌는데 나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잖아. 외삼촌 생각은 어때?”임상희가 눈을 반짝이며 나상준에게 말했다.그는 주혜민을 안고 의사를 찾은 뒤로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당황하거나 걱정되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줄곧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임상희의 질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나상준에게 쏠렸다.나상준은 주혜민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그는 시선을 돌려 의사를 바라보았다.의사가 말했다.“저도 며칠 경과를 지켜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그럼 입원해.”임상희는 주혜민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주혜민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3년 동안 마음에 존재했던 가시 같은 존재를 드디어 뿌리뽑았다는 성취감에 가슴이 벅찼다.‘상준 씨는 나를 신경 쓰고 있었어. 아니, 날 잊은 적 없었던 거야.’주혜민의 입원 절차는 빠르게 처리되었다. 절차가 마무리되자 나상준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병실에 남은 임상희는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문을 닫고 침대로 다가갔다.“어때? 이제 만족해?”임상희가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주혜민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나상준의 눈빛이었다. 마치 속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
온이샘은 차우미를 끌고 일련의 검사를 진행했다. 잠시 후 겸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자세히 살피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골절이나 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며칠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다 나을 때까지는 최대한 움직임을 줄이고 누워서 쉬는 게 좋겠어요.”골절이 아니라는 말에 온이샘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그는 휠체어를 끌고 병실로 돌아왔다. 차우미가 아파할까 봐 그는 아주 천천히 걸었다.차우미는 휠체어에 앉아 이 상황을 부모님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했다.상황을 설명하기 조금 난감했다.온이샘은 유난히 조용해진 그녀의 모습에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난감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그녀를 보자 그는 안쓰러운 마음에 입을 열었다.“가현 씨한테 전화해서 간호를 부탁하고 아저씨랑 아줌마는 집에 돌려보내는 게 어때?”차우미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온이샘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아줌마가 너 넘어져서 다친 거 알면 또 자책하실 거 아니야. 연세도 있으신데 자꾸 놀라게 하는 건 좋지 않아.”그녀는 배려심 넘치고 부모님에게 극진한 딸이었다. 겉보기에는 강하고 겁도 없어 보이지만 가족에게만은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생각을 읽힌 차우미는 난감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가현이한테 말할 수는 없어. 걔가 사실을 알게 되면 아빠랑 엄마보다 더 날뛸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그녀의 미소에 온이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그럼 어쩔 수 없지. 간병인 부르자.”차우미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간병인은 이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선택이었다.“난 왜 그 생각을 못했지?”그녀는 드디어 안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온이샘이 웃으며 말했다.“내가 좀 똑똑하긴 하지. 너도 간병인 부르는 방안이 제일 괜찮지?”차우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거 괜찮네. 고마워, 선배.”예전의 예의 바른 미소와는
“아니야, 됐어.”그들의 3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그녀는 이혼 후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오늘 밤 병실에서 있었던 일을 다시 겪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와는 멀리 떨어지는 게 서로에게 좋을 거라고 판단했다.“그래.”온이샘은 담담한 그녀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휠체어를 끌고 병실로 들어갔다.나상준은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짜증을 느꼈다.열 시가 넘어 병원은 점차 인기척이 줄어들고 고요가 찾아왔다.나상준은 병원 밖 가로등 밑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상황 보고를 듣고 있었다.“8시 40분, 여가현 씨가 병원을 떠나셨습니다. 8시 50분, 온이샘 씨와 차동수 씨가 병원을 나갔고요. 9시에 차우미 씨의 어머님께서 병실을 나가셨습니다.”“9시 20분에 임상희 씨와 주혜민 씨가 차우미 씨의 병실에 들어가셨고 9시 25분에 대표님께서 병실 복도에 나타나셨습니다.”나상준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는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뱉고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주변이 다시 조용해졌다.허영우는 조용히 그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지시는 들려오지 않았고 그렇다고 전화를 끊지도 않았기에 그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상사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다.그와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그가 감정기복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는 조용히 지시를 기다렸다.“주영그룹의 공동 투자 제안을 받아들이고 계약서 준비해.”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허영우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전화가 끊어졌다.핸드폰을 내려놓은 허영우는 주영그룹에 관한 정보를 취합하기 시작했다. 주영그룹은 부동산 업계에서 큰 업적을 이루어내며 최근 10년 사이 일류 기업으로 급부상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부동산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면서 주영의 발전도 조금 주춤하게 되었다.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제는 내리막길만 남았다. 주영도 최근 2년 사이 많은 변화를 시도하고 다른 사업에도
나준우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상황을 설명했다.“조금 전에 당직 의사를 만났는데 차우미 씨 손에 상처가 벌어졌대. 넘어지면서 허리도 삐끗했다는데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런데 차우미 씨가 고생 좀 하게 생겼어.”나준우는 그 시간에 수술실에서 중요한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술실을 나온 그는 나상준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차우미가 입원해 있는 외과 병동을 찾았다.분명 오전에 진료를 볼 때까지만 해도 차우미의 상태는 꽤 안정적이었고 이틀 뒤면 퇴원할 예정이었다.그런데 이 밤중에 나상준이 문자를 보냈다는 건 분명 무슨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기에 그는 문자를 보자마자 당직 의사를 찾아갔다.당시 병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모르지만 당직 의사에게서 상황을 들은 그는 곧바로 나상준을 찾아왔다.모든 상황을 설명한 그는 음침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을 잠시 바라보았다. 평소의 냉철한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딱 봐도 누군가를 걱정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나 내일 출장 있어. 내가 없는 사이 그 사람 좀 잘 신경 써줘.”나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걱정 마.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야.”“수고해.”“형도 일봐.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연락할게.”나상준의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아니다. 다른 중요한 일 없으면 내일 청주로 돌아가.”나준우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보았다.조금 전까지 신경 좀 써달라던 사람이 갑자기 돌아가라니,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쪽 상황은 전화로 보고 받아도 되잖아.”나준우는 그제야 그의 뜻을 이해했다.혹시라도 이 일로 대학병원 업무에 차질이 생길까 봐 배려 차원에서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일 청주로 돌아갈게.”이번에 이곳으로 온 것도 차우미 때문이었는데 이제 별문제 없다는 것이 확인 되었고 나상준이 청주로 돌아가라고 하는데 굳이 이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허 비서한테 티켓 예매해 놓으라고 할게.”나상준이 떨떠
차우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선배는 원래 좋은 사람이었어.”하선주는 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안색이 전보다 창백한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너 안색이 왜 그래?”“아줌마.”이때, 온이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저녁에 간병인 여기 있을 테니까 호텔까지 모실게요. 오늘 저녁은 제가 여기 있을 테니까 푹 쉬세요.”“응? 자네가?”하선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요. 두분도 왔다갔다 하느라 피곤하셨을 거잖아요. 병원에는 저랑 간병인이 있을 테니 돌아가서 아저씨랑 푹 쉬세요.”“아니… 아무리 그래도….”하선주는 저도 모르게 딸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 외로 차우미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하선주는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온이샘을 바라보았다.“아까 우미랑 얘기를 나눠봤는데 두분 연세도 있으시고 밤새 병실을 지키는 게 힘드실 것 같다고 해서 오늘은 제가 밤에 남기로 했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우미 잘 돌볼게요.”하선주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딸의 표정을 다시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가 아프면 우미도 걱정할 테니까. 그럼 우리 우미 잘 부탁해. 자네가 수고가 많아.”“수고는요. 제가 할 일인 걸요.”“당연한 게 어딨어. 자네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우미야, 엄마는 호텔로 돌아갈 테니까 푹 자. 나 배웅할 필요 없어.”하선주는 그 자리에서 짐을 챙겨 일어났다.온이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우미에게 말했다.“쉬고 있어. 아줌마 바래다드리고 올게.”차우미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걸 처리해 주고 있었다.차우미는 어쩌면 이 선배와 한번 만나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시선을 거둔 그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굳은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오던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는 이대로 다시 만나지 말고 서로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열이 조금 있네요. 상처에도 염증이 생긴 것 같고. 어제보다 좀 심각해졌어요. 며칠 더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군요.”차우미의 진료를 마친 뒤, 나준우가 한 말이었다.그녀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척추가 살짝 삐끗한데다 손의 상처에 염증까지 생겼다.안색도 어제에 비해 좋지 않았다. 미열 때문에 안색은 초췌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어젯밤 새벽부터 그녀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여기저기 아파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그녀의 옆을 밤새 지켰던 온이샘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당직의사를 호출했다.의사가 해열제와 진통제를 주사한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나준우가 찾아왔다.차우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며칠이나 더 있어야 하나요?”부모님은 이틀 뒤에 퇴원한다고 알고 있었다.이 일로 부모님이 더 속상해하실까 봐 걱정됐다.“상처가 회복되는 속도를 봐야 해요. 며칠이라고 지금 장담할 수는 없어요.”차우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는 병원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고 자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기도 싫었다.그녀의 마음을 아는 온이샘이 물었다.“열은 주사 맞으면 내리는 거지? 염증은 오늘 안에 좋아질 수 있어?”나준우는 창백한 차우미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열은 아마 오후가 되면 알아서 내릴 거야. 하지만 염증은 나도 장담할 수 없어. 게다가 나도 오늘 청주로 돌아가야 해서 주치의가 바뀔 거야.”“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이쪽으로 잘하는 선생님으로 추천했거든요.”차우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 때문에 먼길 오시고, 고생 많았어요.”나준우는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 나상준이 떠올랐다. 어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상준에 비해 차우미는 아주 덤덤한 모습이었다.그의 추측이 맞다면 나상준은 차우미를 신경 쓰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면 전혀 나상준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상처가 심각해진 것을 보면 어제 분명
시간은 어느새 9시가 되어 태양이 점점 더 뜨거워졌는데 양산이 차우미의 머리 위를 가리는 순간 햇빛과 단절되어 약간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이건 양산의 공로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온이샘의 공로였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서 있었는데 여름 바람이 살살 불면서 그의 몸에서 풍기는 치자꽃 향기가 그녀의 코끝을 감쌌다.차우미가 웃으며 말했다.“나는 괜찮아.”“그냥 해.”온이샘은 양산 손잡이를 꼭 잡고 차우미를 바라보았는데 새하얀 피부에 버들잎 같은 눈썹을 보자마자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양산은 태양의 뜨거움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햇빛도 막아서 차우미 눈 밑에 있는 다크서클마저 잘 보였다.온이샘이 마음아파하며 물었다.“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어?”“왜?”차우미는 온이샘의 난데없는 질문에 의아했다.온이샘은 그녀의 다크서클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눈 아래에 다크서클이 심해서 잠을 잘 자지 못한 것 같아.”차우미도 아침에 씻고 거울을 볼 때 봤었다.그녀는 밤에 늦게 자고 수면 시간이 짧기만 하면 다음 날에 곧바로 다크서클이 나왔는데 컨디션이 좋으면 그나마 조금은 괜찮았었다.지금 컨디션도 좋고 졸리지도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온이샘의 눈을 속이지 못했다.차우미는 눈을 만지며 말했다.“어젯밤에 늦게 자서 그래. 혜지 씨가 관강동 별장에 예은이 데리러 왔는데 그때가 밤 10시였거든, 그리고 상준 씨와 얘기를 조금 하느라 호텔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이었어.”차우미는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속이지 않고 온이샘에게 이야기했다.온이샘은 그녀가 어젯밤에 있었던 일들을 속이지 않고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그녀의 선명한 눈빛을 바라보며 마음이 따뜻했다.온이샘의 눈에는 온통 차우미로 가득 찼다.“그럼, 아침 먹고 호텔로 데려다 줄 거니까 한잠 자. 점심때 되면 연락할 테니 같이 식사하고 오후에 안평으로 가자.”온이샘은 차우미의 일이 끝나서 이제 나상준과 더 이상 엮일 일이 없으니 마음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조금 전에 호텔 앞에서 봤던 표정인데 그때는 햇빛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차 안이어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것이 그대로 눈에 보였다.순간 온이샘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이 조여왔는데 마치 뭔가 안 좋은 일이 발생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자기도 모르게 핸들을 꽉 잡았는데 얼굴에 가득하던 미소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차우미는 고개를 저으며 눈웃음을 지었다.“선배, 여기서 일은 다 끝났어?”차우미는 아무것도 생각한 적이 없다는 듯 표정을 회복했다.온이샘은 차우미의 안색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조금 전의 표정이 보이지 않자 억지로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말했다.“응, 어젯밤까지 다 처리했어.”온이샘은 정말 일했다는 것을 강조하듯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그의 대답은 차우미가 미리 예상했었는데 그녀는 온이샘이 정말로 일이 있었고 자기를 속이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그때 차우미는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앞을 바라보며 웃었다.“선배, 우리 어디 가서 아침 먹는 거야?”온이샘은 차우미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편안함을 들었다.그는 차우미에게 무슨 일이 있지만 별로 심각한 것 같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무후문으로 갈 건데 혹시 들어봤어?”차우미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아. 거기가 옛날 건물들이 있는 곳이지?”온이샘은 차우미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무후문은 청주에서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거리에 있는데 이 도시에서 3년 동안 생활한 차우미가 모를 리가 없었다.무후문은 소문이 많이 나서 청주에 여행 오는 사람들 거의 모두 반드시 다녀가는 곳이기도 하다.외부에서 여행으로 잠깐 오는 사람들도 아는 곳을 청주에서 생활했던 차우미가 모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하지만 온이샘은 자기가 지금 차우미를 데리고 가려는 그곳은 절대 모를 거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거기는 아주 외진 곳이기 때문이다.온이샘이 흐뭇해하며 웃었다.“거기는 아침 먹기에 조금 불편해. 내가 지금 가려는 곳은 그 옆
온이샘은 차우미 앞에 부드럽게 차를 멈추고 문을 열고 나왔다.자기 앞에 서 있는 차우미를 바라보며 그는 진정으로 차우미가 자기 손이 닿는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이 실감 났다.온이샘은 빠른 걸음으로 차우미의 앞으로 갔는데 그녀는 그를 보는 순간 잠깐 멍해 있었다.햇빛이 강렬한 관계로 그녀는 눈을 찌푸려서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하지만 온이샘도 차우미의 이런 표정은 처음으로 보았는데 조금은 귀엽고, 또 조금은 매혹적이었다.온이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차우미의 귀에 들어갔는데 그제야 눈썹을 흠칫하며 온이샘이 자기 앞에서 부드러움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차우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웃으며 말했다.“아니야. 선배, 아침 먹었어? 안 먹었으면 내가 살게.”차우미가 그를 보자마자 첫마디가 그에게 아침 사준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온이샘이 웃는 것을 본 차우미는 왜 웃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 표정을 본 온이샘은 더 크게 웃었다.그러다가 헛기침하며 웃음을 꾹 참았는데 입꼬리는 여전히 참지 못하고 치켜올라갔다.“우미야, 여기는 청주이니 내가 살게.”그의 진지한 표정에 차우미가 웃었다.“알았어. 안평으로 돌아가면 내가 살게.”“약속한 거야?”차우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당연하지.”“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니까 아침 사주기로 한 거 까먹으면 안 돼.”온이샘은 특별히 차우미가 이번에 아침을 사주기로 한 것과 기존에 밥 사기로 한 것을 구분해서 강조했다.전에 약속한 것과 지금 약속한 것을 반드시 별도로 해야 했는데 같이 있을 수 있는 차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차우미가 대답했다.“알았어.”“가자. 내가 먹어 본 중에서 아침을 제일 잘하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가자.”“좋아.”온이샘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었고 차우미가 올라타자, 본인도 즉시 운전석에 타고 출발했는데 교통 체증은 여전했다.“오래 기다렸어?”교통 체증 때문에 천천히 달리는 차에서 차
나상준이 만약 아무 일도 없으면 자기와 같이 안평으로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차우미는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생각하다가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흰색 BMW 차 한 대가 멈춰 섰다.차가 브레이크 밟는 소리를 내며 앞에 멈춰서자, 차우미는 고개를 들었는데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흰색 셔츠에 회색 캐주얼 바지를 입은 온이샘이 내려왔다.시간은 8시가 넘어서 햇빛이 적당하여 너무 덥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몸 전체를 짱짱하게 따뜻하게 내리 비춰주었다.온이샘이 차에서 내리자 밝은 햇빛이 즉시 그를 감쌌는데 얼굴도 더욱 맑고 우아해졌다. 그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지그시 뜨더니 입꼬리를 치켜올리고 미소를 아끼지 않으며 차우미를 보고 있었다.그건 만족의 눈빛이었다.차우미는 온이샘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사람으로서 가장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진심이라고 하는 데 진심은 분명히 통하게 된다.차우미는 온이샘이 자기를 대하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는데 여가현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후로는 그 마음이 더 잘 보였다.온이샘은 차우미를 각별히 챙기고 돌봐주었는데 모든 면에서 온이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온이샘은 연인으로도 남편으로도 너무나 좋은 사람이다.처음에 차우미는 그냥 한 번 시도해 보려고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피치 못 할 일이 생길 거라는 생각에 이제 더 이상 시도하고 싶지 않았다.온이샘은 남자로서 훌륭하고 심지어 나상준보다도 더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차우미는 만약 이혼한 경력만 없었으면 아무 고민 없이 온이샘과 함께했겠지만, 본인의 상황이 온이샘 인생에 흠집이 될까 봐 걱정되었다.그녀는 본인은 자격이 없기에 온이샘은 자기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온이샘은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차우미의 호텔을 향해 달렸는데 아마 평생 처음으로 이렇게 빨리 운전했을 것이다.청주의 7~8시는 모두가 출근하는 시간이기에 자전거, 스쿠터, 자동차로 이동하는 사람들로 붐볐다.어쩔
휴대폰 화면에 나상준의 이름이 나타났다.온이샘이 아닌 것을 보고 차우미는 잠깐 멈칫했다가 메시지를 클릭했다.[일 끝나면 연락해.]너무 간결한 한 마디였지만 뜻은 분명했는데 동시에 차우미의 머릿속에는 나상준이 어젯밤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일 끝나면 연락해. 너랑 같이 안평으로 갈 거니까.”어제저녁부터 나상준은 차우미와 같이 안평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녀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미룬 것이다.차우미는 나상준이 정말로 일이 있고 타임이 맞아서 같이 안평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그냥 쉽게 미루니까 급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어젯밤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가 순식간에 차에 올라타면서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그 후 집중해서 운전하느라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지금 차우미는 나상준의 메시지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정말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건가?’차우미는 나상준과 같이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답변했다.[오늘 나와 같이 안평으로 가겠다는 거야?]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나상준이 메시지를 보낸 시간을 보고 엘리베이터로 갔다.그녀는 아까 연락한 시간에서 20분 정도 지났기에 온이샘이 이제 곧 도착할 것 같아서 호텔 입구에서 기다리기로 했다.같은 시각, 관강동 별장에서 나상준은 차우미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욕실로 들어갔다.그는 어젯밤에 회사에서 밤을 새우고 방금 집에 왔는데 샤워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바로 다시 회사로 나가야 했다.나상준이 욕실로 들어가자마자 물소리가 들렸는데 침대 머릿장에 올려놓은 휴대폰에서 그때 메시지 도착 음이 울렸다.휴대폰은 짧게 두 번 울리고 곧바로 침실에 정적이 흘렀다.별장 전체가 차우미와 나예은이 떠나면서 고요함은 더욱 짙어졌다.욕실의 물소리가 아무리 크게 들려도 별장 내의 고요함과 차가운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나상준은 시원하게 씻고 머리를 닦으며 나와서 곧바로 머릿장으로 가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는데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는
순간 여가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차우미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어쩐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목소리에서 슬픔과 무력함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가현아, 난 괜찮아. 이혼을 결심했을 때 남은 생을 살면서 다시 결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어. 원래는 선배와 잘 지내면서 연애도 해보고 나중에 천천히 결혼 생각도 해보려고 했어. 이샘 선배와 같은 좋은 사람을 놓치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선배가 좋으면 좋을수록 내가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것 같아. 선배는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래서 계속 이렇게 선배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오늘 선배한테 확실하게 얘기하고 더 좋은 여자를 만나라고 할 거야. 그리고 나는 당분간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일에 매진하고 결혼은 나중에 다시 생각할 거야.”어떤 일들은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다.산도 보기에는 가까워 보여도 정작 가려면 엄청 멀듯이 말이다.온이샘은 차우미에게 바로 그런 가까이에 있는 같지만 사실상 멀고 먼 곳에 있는 존재인 것 같다.여가현은 크게 벌렸던 입을 다물며 속상해했다.“우미야, 나도 지금 세상이 이혼한 여자한테 불공평하다는 거 알아. 현재로서 세상 사람들의 그런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나는 이혼을 한 사람도 자기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샘 선배가 너를 지켜줄 거라는 것도 믿어. 너도 이샘 선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거 인정하잖아. 더 중요한 건 이샘 선배의 마음속에서 너의 자리는 아무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거야.”차우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현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얻지 못한 것은 언제나 좋아 보이는데 정작 얻고 나면 달라질 거라고. 너 그거 알아? 그날 나상준과 같이 예은이를 데리고 식당에 갔는데 선배가 밖에서 우리를 만났을 때의 표정을 보며 재혼이라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 왜냐하면 아무리 이전의
여가현은 서류의 맨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사인을 하려다가 차우미의 말을 듣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할 말이라는 건 뭐야? 무슨 뜻이야? 해야 할 말이 뭔데? 그러니까 네 말은 이샘 선배가 고백하기 전에 네가 먼저 거절하겠다는 거야?”역시 차우미와 함께 자란 사람으로서 차우미의 간단하게 한 말에서 그 의도를 알아챘다.차우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응.”탁!여가현이 펜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두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거절한다고? 왜? 이틀 동안 나상준 씨가 또 무슨 말로 너를 꼬셨는데 이샘 선배를 거절한다는 거야? 차우미, 제발 멍청한 짓 하지 마!”여가현은 어찌나 흥분했는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여가현의 반응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클 줄은 몰랐다.이어서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큰 목소리에 차우미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뒀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가현의 다급한 목소리는 여전히 잘 들렸다.여가현이 말을 다 하고 잠깐 숨을 쉬는 사이에 차우미가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진지하게 말했다.“가현아, 일단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휴대폰으로 차우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니, 여가현은 화가 치밀어 올라 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애써 참고 심호흡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그래, 우선 진정하자.’차우미는 휴대폰 건너편이 조용해지고 거친 호흡 소리가 들리자, 여가현이 듣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속해서 말했다.“가현아, 상준 씨랑 상관없이 나도 오랫동안 생각했어. 얼마 전에 선배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만난 적이 있는데 너무 좋은 분들이었어. 이번에 청주에 와서 선배 어머니를 또 뵀었는데 너무너무 좋은 분이셔. 상준 씨의 어머니보다도 엄청 좋았어. 그분도 나를 예쁘게 봐주셨고 나도 선배 어머니가 너무 좋았는데 그렇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 나는 이혼했고 선배의 가족과 배경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런
차우미는 스카이빌리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기에 거기에서 호텔까지 거리도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온이샘이 스카이빌리지에서 출발하는지를 확인하지 않아서 그냥 마음 놓고 짐을 준비했다.그녀가 모든 짐을 챙겼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익숙한 전화벨 소리에 차우미는 캐리어를 한편에 놓고 손잡이를 거둔 다음 휴대폰을 들었다.휴대폰에서 여가현이라는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차우미는 온이샘이 도착했다는 전화인 줄 알았는데 여가현인 것을 보고 조금 놀라면서 전화를 받았다.“가현아, 무슨 일이야?.”“이틀 동안 괜찮았어? 나상준 씨가 괴롭히지 않았어? 너 다친 데 없지? 그 아이를 돌봐주는 건 이제 끝난 거야?”휴대폰 건너편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와 함께 여가현의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녀는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차우미는 그제야 오늘이 월요일이라는 알아채고 웃으며 말했다.“월요일인데 나한테 전화할 시간이 있어?”월요일은 모두에게 바쁜 날이다.“흠! 사실은 어제 너에게 전화하려다가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참았어. 어차피 나상준 씨도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에 감히 너를 어떻게 하지 못할 테니까. 만약 나상준 씨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내가 직접 나씨 가문의 어르신을 찾아갈 거야. 그분은 자기 집안 사람이라고 감싸주는 분이 아니니까.”여가현의 말에 차우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나상준은 이미 여가현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서 믿음이라고 전혀 없었다.차우미는 통유리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아침 햇살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아니야. 괴롭히거나 다치게 한 것 없어. 이틀 동안 나와 같이 나예은과 아주 잘 놀아 줬어. 상준 씨가 예은이을 얼마나 예뻐하는지 몰라.”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차우미도 절대 믿지 못했을 것이다. 이틀 동안의 나상준은 전에 전혀 본 적이 없던 다른 사람이었다.“쳇! 그 아이는 나씨 가문의 아이니 당연히 친절하게 잘해주겠지. 그런데 너는 다르잖아. 너는 이제 나상준 씨의 전처일 뿐이잖아.”차우미는 입술을 살짝
차우미는 온이샘에게 할 일이 끝났다고 아주 간단하게 메시지를 보냈었다.온이샘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온이샘이 오늘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대화창을 누르고 답변했다.[호텔에 있어.]윙윙.휴대폰 진동소리였는데 또 온이샘의 메시지가 왔다.[알았어. 호텔에서 기다려. 지금 바로 갈게.]온이샘이 오겠다는 말에 차우미는 깜짝 놀랐다.‘선배가 여기로 온다고?’차우미는 고개를 들고 창밖의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나온 지 한참이 지났고 청주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여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차우미는 창밖의 밝은 햇살을 바라보며 눈을 살짝 찌그리더니 다시 온이샘이 보낸 메시지를 보았다.그녀는 워낙 온이샘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짐을 정리한 다음 아침 먹으러 가려고 했다.그런데 온이샘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답변을 보내고 호텔까지 온다고 할 줄을 몰랐다.차우미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메시지를 보내고 차우미는 짐을 정리하면서 온이샘을 기다리기로 했다.스카이빌리지에서 온이샘은 7시에 강서흔의 전화 소리에 깨어났다.강서흔이 이른 아침에 온이샘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가 청주에 아직 있으면 만나서 차우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강서흔의 말투에서 조금 다급하고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았다.온이샘은 강서흔이 정말 할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아직 청주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 차우미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어서 언제 만날지는 나중에 다시 알려주겠다고 했다.온이샘은 강서흔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차우미와 식사하기로 한 것까지 모두 말했다.그런데 온이샘의 말을 듣고 강서흔은 더 다급해졌다.‘기다리면 어떡해? 주동적으로 연락해야지.’온이샘의 성격은 온화하고 횡포하지 않기에 차우미를 좋아하더라도 항상 차우미를 존중하고 그녀의 의견을 따랐다.강서흔은 그런 온이샘을 답답해하며 오늘 무조건 만나야 하니 기다리고 있을 거니까 만날 수 있는 시간이 확정되면 알려달라고 했다.그는 이런 일은 얼굴 보고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