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선배는 원래 좋은 사람이었어.”하선주는 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다가 안색이 전보다 창백한 것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너 안색이 왜 그래?”“아줌마.”이때, 온이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왔다.“저녁에 간병인 여기 있을 테니까 호텔까지 모실게요. 오늘 저녁은 제가 여기 있을 테니까 푹 쉬세요.”“응? 자네가?”하선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래요. 두분도 왔다갔다 하느라 피곤하셨을 거잖아요. 병원에는 저랑 간병인이 있을 테니 돌아가서 아저씨랑 푹 쉬세요.”“아니… 아무리 그래도….”하선주는 저도 모르게 딸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 외로 차우미는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하선주는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온이샘을 바라보았다.“아까 우미랑 얘기를 나눠봤는데 두분 연세도 있으시고 밤새 병실을 지키는 게 힘드실 것 같다고 해서 오늘은 제가 밤에 남기로 했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우미 잘 돌볼게요.”하선주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딸의 표정을 다시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우리가 아프면 우미도 걱정할 테니까. 그럼 우리 우미 잘 부탁해. 자네가 수고가 많아.”“수고는요. 제가 할 일인 걸요.”“당연한 게 어딨어. 자네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우미야, 엄마는 호텔로 돌아갈 테니까 푹 자. 나 배웅할 필요 없어.”하선주는 그 자리에서 짐을 챙겨 일어났다.온이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차우미에게 말했다.“쉬고 있어. 아줌마 바래다드리고 올게.”차우미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그녀가 뭘 원하는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아서 모든 걸 처리해 주고 있었다.차우미는 어쩌면 이 선배와 한번 만나봐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시선을 거둔 그녀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굳은 표정으로 병실에 들어오던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자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그녀는 이대로 다시 만나지 말고 서로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미열이 조금 있네요. 상처에도 염증이 생긴 것 같고. 어제보다 좀 심각해졌어요. 며칠 더 병원에 있어야 할 것 같군요.”차우미의 진료를 마친 뒤, 나준우가 한 말이었다.그녀의 상태는 예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척추가 살짝 삐끗한데다 손의 상처에 염증까지 생겼다.안색도 어제에 비해 좋지 않았다. 미열 때문에 안색은 초췌했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어젯밤 새벽부터 그녀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여기저기 아파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탓도 있었다.그녀의 옆을 밤새 지켰던 온이샘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당직의사를 호출했다.의사가 해열제와 진통제를 주사한 뒤에야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나준우가 찾아왔다.차우미가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며칠이나 더 있어야 하나요?”부모님은 이틀 뒤에 퇴원한다고 알고 있었다.이 일로 부모님이 더 속상해하실까 봐 걱정됐다.“상처가 회복되는 속도를 봐야 해요. 며칠이라고 지금 장담할 수는 없어요.”차우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그녀는 병원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고 자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기도 싫었다.그녀의 마음을 아는 온이샘이 물었다.“열은 주사 맞으면 내리는 거지? 염증은 오늘 안에 좋아질 수 있어?”나준우는 창백한 차우미의 얼굴을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열은 아마 오후가 되면 알아서 내릴 거야. 하지만 염증은 나도 장담할 수 없어. 게다가 나도 오늘 청주로 돌아가야 해서 주치의가 바뀔 거야.”“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제가 이쪽으로 잘하는 선생님으로 추천했거든요.”차우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나 때문에 먼길 오시고, 고생 많았어요.”나준우는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 나상준이 떠올랐다. 어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나상준에 비해 차우미는 아주 덤덤한 모습이었다.그의 추측이 맞다면 나상준은 차우미를 신경 쓰고 있었다.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면 전혀 나상준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상처가 심각해진 것을 보면 어제 분명
임상희가 주혜민이 탄 휠체어를 끌고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입구에서 마주친 세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나누었다.주혜민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임상희도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준우 삼촌이 왜 여기 있어?”나준우의 시선이 환자복을 입고 있는 주혜민에게 닿았다.“어쩌다 다쳤어요?”주혜민을 살피던 그는 갑자기 차우미가 떠오르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주혜민은 갑자기 바뀐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별거 아니에요. 부주의로 넘어졌어요.”“부주의는 무슨! 그 여자가 밀쳐서 다친 거잖아!”옆에 있던 임상희가 정색하며 소리쳤다.그 말을 듣고 나준우는 임상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는 조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너 머리는 왜….”임상희가 손짓 몸짓 다 해가며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려던 찰나, 나준우의 질문에 당황하고 말았다.“준우 삼촌은 몰랐어? 나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 병원에서 죽다가 살아났는데 상준 삼촌이 아무 말도 안 해줬어?”나준우도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나상준이 여태 말을 안 해줘서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주혜민은 그 모습을 보고 아까 불쾌했던 심정이 조금은 나아졌다.나상준은 임상희가 다친 사실도 그에게 말하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주혜민이 다친 사실만 숨겼더라면 서운했겠지만 아예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으니 서운해할 것도 없었다.주혜민은 임상희가 당한 사건을 간략해서 설명한 뒤, 그에게 물었다.“그런데 준우 씨는 왜 여기 있어요?”설명을 다 들은 나준우는 생각에 잠겼다.주혜민은 임상희의 사고를 얘기할 때 차우미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았지만 셋 사이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수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그는 덤덤한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일 때문에 잠시 왔다가 오늘 돌아가는 길이에요.”“지금요?”주혜민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맞아요. 여기 일정이 끝났으니까 돌아가야죠. 그런데 어디를 다쳤어요? 의사는 뭐래요?”
나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난 일정이 빠듯해서 일단 가볼게요. 푹 쉬고 어디 아픈 곳 있으면 나한테 연락해요.”주혜민은 나준우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약간 서운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조심히 가요.”“갈게, 상희야.”“응, 삼촌. 나중에 같이 밥 먹자.”대화를 마무리한 나준우는 그 길로 병원을 나섰다.주혜민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에 있던 미소를 지웠다.“왜 아무런 반응이 없지?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야 정상 아니야?”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잠겼다.어제 나준우가 차우미의 병실에 들어간 걸 봤다던 임상희의 말에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질투심이 치솟았다.그녀가 다치고 임상희까지 죽을 뻔했는데 나준우는 그들을 한 번도 보러 오지 않고 오히려 차우미의 병실을 방문했으니 어찌 화가 안 날 수 있겠는가?그래서 나준우가 나오는지 보려고 일부러 산책을 하는 척하면서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그렇게 나준우와 마주쳤고 조금 전 있었던 장면이 연출되었던 것이다.잠깐의 대화로 그녀는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주혜민은 나준우가 차우미를 일부러 진료 보려고 이 병원에 온 건 아니라고 추측했다. 차우미가 다친 것에 비하면 그 당시 임상희의 상태가 더 심각했기 때문이었다.‘정말 다른 일정 때문에 여기 왔었던 거네.’그가 왜 차우미를 보러 갔는지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어차피 어제의 목적을 이미 이루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그녀는 더 이상 차우미가 나상준과 자신 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만약 주제를 모르고 자꾸 얼쩡거린다면….주혜민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났다.나준우가 떠나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나상준도 더 이상 병실에 나타나지 않았고 주혜민과 임상희도 그 뒤로 찾아오지 않았기에 차우미는 안심하고 병원에서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온이샘은 줄곧 병실을 떠나지 않고 그녀를 지켰다.하선주와 차동수는 설득 끝에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매일 맛있는 반찬을 가지고 병원
일정을 마친 문은혜가 임상희를 보러 병원에 방문한 것이었다.마침 오늘 임상희와 주혜민도 퇴원하는 날이었다.퇴원 절차를 마무리하고 세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문은혜는 임상희에게 돌아가서 어디 밖에 나다니지 말고 외할머니 집에 얌전히 있으라고 주의를 주었다.임상희를 다치게 한 사람은 이미 절차대로 경찰에 잡혀갔고 곧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하지만 임상희는 여전히 불만족스럽다며 투덜거렸다.그녀는 상대를 감옥에 보내는 것 이상을 원했다.문은혜는 딸을 걱정해서 이번 일을 그냥 덮자고 설득했다.임상희는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엄마의 말을 무시로 일관했다.문은혜는 무슨 말을 해도 딸이 시큰둥한 얼굴로 있자 짜증이 치밀어서 계속해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듣다가 짜증이 난 임상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그만 좀 해! 짜증나!”문은혜는 순간 당황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주혜민은 옆에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모녀의 대화가 거의 싸움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남의 집안 일은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임상희는 원래 고집이 세고 반발심이 강한 아이였다.하지만 점점 언성이 높아지자 그녀도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놓고 문은혜를 바라보았다.문은혜는 상심한 얼굴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혜민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는 임상희에게 말했다.“상희야, 아무리 그래도 엄마한테 소리지르는 건 좀 아니지. 그건 잘못된 거야.”임상희는 울먹이고 있는 엄마를 힐끗 보고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그러니까 누가 옆에서 자꾸 잔소리하래? 시끄러워서 짜증이 난단 말이야!”문은혜가 더 뭐라고 하려 했지만 주혜민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결국 문은혜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주혜민이 말했다.“언니도 이제 그만해.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청주 가면 푹 쉬어.”문은혜는 아직도 자신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딸을 바라보며 속상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할 말은 많은데 결국
주혜민과 문은혜는 차우미의 옆에서 짐을 들어주고 있는 온이샘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그들은 왜 온이샘이 차우미와 함께 있는지, 그들이 무슨 관계인지 무척 궁금했다.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던 길이라고 생각했는데 일가족의 짐을 거의 다 들고 있는 온이샘을 보자 생각이 달라졌다.문은혜는 놀라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온이샘이 이런 곳에서 차우미와 함께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주혜민의 시선도 온이샘과 차우미를 향하고 있었다.하선주는 주혜민을 보자마자 분노가 치밀었지만 꾹 참았다가 문이 열리자 먼저 차우미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그런데 뒤에서 누군가가 차우미의 어깨를 부딪히고 휙 나가버렸다.차우미는 저도 모르게 온이샘 쪽으로 상체가 기울어졌고 온이샘은 재빨리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고 인상을 찌푸리며 나간 사람을 노려보았다.임상희였다.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이었다.온이샘은 싸늘한 표정을 하고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어깨와 손을 동시에 부딪힌 차우미는 통증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대신, 밀치고 지나간 임상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임상희는 뭐에 화가 난 듯, 씩씩거리며 로비까지 걸어갔다.문은혜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차우미와 하선주에게 다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아침에 애랑 다툼이 좀 있었는데 철이 없어서 그래요.”하선주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보다가 문은혜의 사과를 듣자 어쩔 수 없이 표정을 풀었다.“괜찮아요. 어서 애나 따라가 봐요.”화가 났지만 저렇게까지 진지하게 사과를 하는데 안 받아줄 수도 없었다.“정말 죄송합니다.”재차 사과한 문은혜는 다급히 임상희를 쫓아갔다.“상희야, 같이 가.”주혜민은 그들을 따라가는 대신, 차우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있는 온이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확신이 선 듯, 밝은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구나. 이제 안심이네.’주혜민은 그제야 밝은 표정으로 임상희 모녀를 쫓아갔다. 하선주가 떠나는 그들을 보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재수가 없으려니까 쟤만
문은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딸을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주혜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언니, 아까 그 사람 기억해?”문은혜가 멈칫하며 물었다.“가온그룹 후계자 말이야?”주혜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은혜는 잠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더니 말했다.“당연히 기억하지. 그런데 해외에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국내로 들어온 줄은 몰랐어.”잠시 숨을 고른 문은혜가 말했다.“게다가 차우미랑 같이 있을 줄은 몰랐지. 둘은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걸까?”아까 두 사람 모습을 봤을 때 온이샘이 차우미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나상준과 이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신변에 벌써 남자가 생겼을 줄은 몰랐다.주혜민은 차우미를 살뜰히 챙기던 온이샘의 모습과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던 차우미의 태도를 떠올리고 미소를 지었다.“인연이라는 건 참 복잡하고 묘한 거라니까.”문은혜가 말했다.“그래. 너랑 상준이도 마찬가지잖아.”주혜민이 말했다.“이제야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청주 공항.멕시코에서 출발했던 비행기가 서서히 청주 공항에 착륙했다.평소처럼 검은색 정장을 갖춰 입은 나상준이 VIP통로를 나오고 있었다.“차우미 씨는 이미 퇴원하셔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주혜민 씨와 임상희 씨도 오늘 퇴원해서 공항으로 갔고요. 문 박사님께서도 이번에 돌아오셔서 같이 청주로 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그래.”나상준은 앞만 보고 걸으며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티켓은 예매했지?”“당연하죠. 열한 시 십분 비행기입니다.”나상준은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열 시 정각이었다.그들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출구로 향했다.그 시각, 안평.낡은 아파트로 돌아온 뒤, 하선주는 주방에서 바쁘게 돌아치더니 한 시간이 지나 풍성한 밥상을 차렸다.그들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점심 식사를 끝냈다.식사가 끝난 뒤, 하선주는 온이샘이랑 시내를 둘러보고 오라고 딸을
“전화 좀 받고 올게.”온이샘이 휴대폰을 꺼내며 말했다.차우미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녀는 낡은 건물이 줄지은 거리를 조금 앞장서서 걸었다. 오랜 시간 비바람을 견딘 건물은 색이 바래고 세월의 흔적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길가 양쪽에 벚나무가 줄지어 있었는데 나무에도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보였다. 가지가 풍성하게 뻗어나간 나무는 해마다 벚꽃철이 되면 풍성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번화가와는 거리가 먼 이곳은 길가 노점에서 각종 생필품과 지역 특산물을 팔고 있었다. 점주 대부분이 연세가 지긋한 노인이었으며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이었다.돌아온 뒤로 이렇게 느긋하게 거리를 걸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곳은 3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고 여전히 그녀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하지만 이곳이 주는 느낌은 그녀에게 조금 새로웠다. 아마 세월이 흘러 그녀가 성장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차우미는 구석구석을 자세히 둘러보며 이곳의 모든 것을 차분하게 느꼈다.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눈 안에 들어온 그림자가 그녀의 상념을 멈추게 했다.운동복 차림에 가방을 멘 십대 소년이 입에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소년은 자기보다 키가 작은 남자 아이의 멱살을 잡더니 그 소년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험악한 인상을 하고 있는 소년은 차우미도 아는 얼굴이었다.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소년은 외삼촌네 아들 준혁이었다.3년 만에 처음 보는 아이는 키가 훤칠하게 컸고 이목구비도 더 입체적으로 자랐다.그녀가 결혼식을 올리던 해에 소년은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식에 참석하지는 못했다.나중에 엄마한테 들은 바로는 아이는 시험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원하던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들었다.3년이 지났으니 이제 수능을 앞두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반항심이 가득한 아이의 얼굴을 보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어렸을 때부터 준혁이는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비록 외삼촌 내외의 친아들은 아니지만 부부
나상준은 차우미 뒤에서 두 모녀가 포옹하는 것을 지켜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느끼고는 흠칫하며 눈을 들었다.차동수는 하선주의 뒤를 따라 입구로 왔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차우미를 보았고, 이어서 딸의 뒤에 서 있는 나상준을 보았다.그는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다.사위였던 나상준은 나씨 가문의 후손으로서 언제나 예의가 바르고 사려가 깊었다.나상준의 성격은 보통 사람과 달랐는데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잘 웃지도 않으며 내성적이어서 사람들이 잘 접근하지 못한다.차우미와 나상준이 결혼한 3년 동안 차동수도 사위 나상준과 몇 마디 해본 적이 없어서 여전히 낯설었다.차동수에게 나상준은 아주 훌륭하고 교양이 있는 젊은이였고 동시에 따뜻함도 인간미도 없는 사위이기도 했다.이런 사윗감은 좋다고 하기도 나쁘다고 하기도 애매했는데 차우미만 좋으면 그들은 의견이 없었다.그런데 두 사람이 이혼한 이유가 제3자 때문이라는 것이 제일 의외였다.차동수의 마음속에 나상준은 절대 교양이 없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일이 발생하고 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다만 나상준의 신분과 지위를 곰곰이 생각해 봤을 때 있을 법한 일이기도 했다.비록 부모 눈에 자신들의 자식이 제일이겠지만 차우미가 어느 정도인지는 그들도 똑똑히 알고 있었고 또 사람과 사람은 차이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나상준과 같은 훌륭한 아이가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가 아니었다면 절대 차우미와의 결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만약 나상준이 차우미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차동수는 절대 두 사람을 만나게 하지 않았을 건데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가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기에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얼마 전에 차우미가 나상준과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마음이 아팠는데 동시에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맞지 않으면 하루빨리 헤어지는 게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하선주가 나상준을 못마
차우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아니야. 시간도 늦었고 아빠와 엄마는 이제 주무실 거야. 그러니 상준 씨도 일찍 돌아가서 쉬어.”안평에 오기 전에 나상준은 차은평과 소명진을 보러 온다고 했지, 차동수와 하선주도 만나겠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기에 차우미는 조금 놀랐다.하지만 그녀는 금방 나상준의 뜻을 이해했다.후배로서 예의상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안 가면 오히려 말이 안 되는 것이다.하지만 차우미는 나상준이 자기 집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는지는 나상준도 잘 알고 있었다.“가자.”차우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나상준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나상준이 말을 마치자마자 차가 그와 차우미 앞에 멈춰 섰다.나상준은 몸을 옆으로 돌리고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차우미를 타라고 했다.차우미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다음에 가. 그리고 상준 씨는 일도 바쁠 텐데 얼른 가서 일해. 굳이 오늘 갈 필요 없으니 나중에 시간이 많을 때 가도 돼.”“지금 시간이 돼.”“...”차우미는 할 말을 잃었다.그녀가 싫어하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가겠다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순간 차우미는 나상준의 깊은 눈동자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상준은 차우미의 생각을 아예 모르는 듯 대답이 없는 차우미를 향해 말했다.“계속 이러고 있으면 시간이 더 늦어져.”차우미는 입술을 다시며 열려 있는 차 문을 보더니 잠깐 머뭇거리다가 올라탔다.나씨 가문에서 자란 나상준에게 예의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차동수와 하선주가 나상준을 반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겠다고 하니 차우미는 포기했다.차우미가 차에 타자 나상준은 문을 닫고 다른 쪽으로 가서 차에 탔다.그들은 순식간에 청강 아파트를 떠났다.청강 아파트와 차동수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멀지 않았기에 십여 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게다가 지금 시간은 교통이 막히지 않은 시간이고 도
차우미는 걸음을 멈추고 소명진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상준 씨는 좋은 사람이고 아무 문제가 없어요. 저도 그렇고요. 저희는 그냥 맞지 않을 뿐이에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소명진은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평소와 같은 단순하고 깨끗하고 부드러운 얼굴이었지만 눈에는 걱정이 많았다.“알았어. 맞지 않으면 다시 찾으면 되지. 우리 손녀가 얼마나 훌륭한데, 꼭 잘 어울리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거야.”차우미가 웃으며 소명진을 끌어안더니 소명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할머니, 저 꼭 행복할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소명진도 웃었다.“그럼, 우리 우미는 꼭 행복할 거야.”차우미와 소명진은 밖에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고 30분 정도 있다고 신선한 과일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자마자 차우미는 거실의 분위기가 나갈 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차우미는 나상준과 차은평을 번갈아 보았는데 두 사람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표정은 모두 달라졌다.나상준의 표정은 여전히 기쁨과 분노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차우미가 예민한 탓인지 그녀는 나상준이 조금 전과 너무 달라진 것 같았다.반면에 차은평은 표정에 명백한 변화가 있었는데 전처럼 웃는 모습이 아니고 근엄하고 위엄이 느껴졌다.차우미와 소명진이 나가자마자 그다지 좋지 않은 대화를 한 모양이다.차우미는 과일을 테이블에 놓으며 말했다.“할아버지, 할머니,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제 쉬셔야죠. 저희는 이만 갈게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다시 또 뵈러 올게요.”현재의 시간은 노인들에게 있어서 늦은 시간이 확실하다.차운평은 찻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는데 조금 전의 엄숙한 표정은 차우미 집에 들어오는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시 인자한 얼굴로 변했다.“우리도 알아. 걱정하지 마. 너도 지금 금방 도착했으니 얼른 집에 가서 쉬어. 너의 부모도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잖아. 그런데 너 몇 달 못 본 사이에 야윈 것 같아.”매년 청주에서 새해를 맞이하고 차우
주변의 공기가 갑자기 응축되면서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 같았다.차은평은 주전자를 들고 나상준을 바라보았는데 조금 전까지 보이던 후배에 대한 사랑은 온데간데없이 엄숙했다.나상준은 허리를 약간 굽혀 주전자를 받으려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차은평의 진지한 말에 그는 동작을 멈추고 차은평과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네, 사실입니다.”대답을 들은 차은평의 표정은 엄숙하고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낯설게 변했다.그와 동시에 나상준에게 차를 주려고 들었던 주전자를 거두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나상준은 차은평의 행동에 놀라지 않고 다시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저와 우미가 이혼하게 된 건 제3자 때문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제 문제입니다. 하지만 결혼 3년 동안 절대 혼인 생활을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저희 사이에 오해가 좀 있어요. 제3자는 저도 생각을 못 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저의 실수입니다.”차은평은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자기 찻잔을 들고 마셨다.나상준이 담담한 어조로 하는 말을 들으며 차은평은 잠깐 흠칫하고 눈빛이 흔들리더니 계속 차를 마셨다.그 모습은 나상준의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듣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나상준은 조금은 당황한 표정으로 계속 말했다.“할아버지, 저는 우미와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보상하려는 것도 죄책감도 아니고 나씨 가문과 차씨 가문의 관계 때문도 아닙니다. 오로지 우미와 이번 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차은평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를 마시며 눈을 내리깔고 나상준의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나상준은 말을 마치고 차은평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이라도 하기를 기다렸다.두 사람이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거실은 다시 조용해졌다.차은평은 그렇게 나상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듯 고요함을 만끽하며 차를 천천히 마셨다.손에 들고 있던 차를 절반 넘게 마시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차은평은 찻잔을 내려놓고 나상준을 바라보았는데 화는 조금 풀리고 미소가 살짝 보였다.하지만 그 미소는
청강 아파트는 도시 중심이 아닌 외곽에 자리잡고 있으며 입주한 지 2년밖에 안 되는 아파트인데 그 옆에는 강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작은 산이 있다.때문에 청산녹수가 한눈에 보이고 경치가 너무 좋아 어르신들이 살기에 매우 적합한 곳인데 차우미의 조부모님들도 바로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그들은 이제 백발노인이 되었지만, 아파트 앞에서 기분 좋게 오가는 차들을 보고 있었다.차가 멈추려 하자 노인들은 누구인지 궁금해서 차 쪽으로 보고 있었고 차 안에 있는 차우미도 밖에 있는 노인들을 바라보았다.차가 멈추자 차우미는 잽싸게 내려서 노인들에게로 다가가서 손을 잡고 말했다.“할머니, 여기까지 나와서 기다리지 않으셔도 되는데...”오늘 밤 차우미가 나상준과 함께 조부모님 뵈러 가는 것을 하선주는 싫어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하선주와 통화를 마친 후 조부모님께 연락했었다.그리하여 그들이 아파트에 도착하기 전에 차우미는 할머니 소명진의 전화를 받고 도착 예정 시간을 얘기했다.그런데 이렇게 밖에 나와서 그들을 기다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소명진은 차우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괜찮아. 조금 전까지 산책하다가 마침 네가 올 시간이 되는 것 같아서 기다린 거야.”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명진은 차에서 내려 차우미 옆에 서 있는 키가 큰 사람을 보았다.나상준이 말했다.“할머니, 안녕하세요.”소명진은 나상준을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우미를 보고 말했다.“들어가자. 할아버지는 기다리다가 먼저 집에 들어갔어.”“네.”차우미는 소명진의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계속 문질렀다.소명진은 차우미의 일과 생활에 관해 물었고 차우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하나하나 대답했다.나상준은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차우미 옆에서 두 사람이 걷는 속도와 비슷한 페이스를 유지하며 걸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그렇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두 분이 사는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띵. 존경하는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리 비행기는 15분 후에 안평 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착륙 준비를 위해...”기내에서 항공 승무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차우미는 속눈썹을 움직이다가 멍한 표정으로 눈을 떴는데 기내의 희미한 조명과 윙윙거리는 비행기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제대로 한잠을 잤다.무의식적으로 창밖을 바라보니 안평시의 불빛들이 깜빡였는데 밤하늘의 가득 채운 것이 은하수의 별빛처럼 아름다웠다.차우미는 일어나 앉아서 눈을 비볐다.나상준은 옆에 있는 차우미가 일어나면서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잽싸게 손을 뻗어 담요를 잡아 다시 덮어주었다.차우미는 무언가 느끼고 고개를 숙였는데 관절이 명확한 손이 자기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있었다.“고마워”그리고 직접 담요를 가져다가 덮었다.담요를 정리하고 차우미는 자연스럽게 하품하며 계속해서 창문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목적지에 가까워지면서 비행기는 점차 하강했는데 익숙한 도시, 고향이 가까워지자, 차우미는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었다.드디어 돌아오게 되어 그녀는 행복했다.나상준은 미소를 짓고 있는 차우미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는데 눈에 빛이 반짝거렸고 또 하품으로 인해 살짝 촉촉했다.눈빛에서 나상준은 차우미가 고향으로 돌아와서 너무 행복해하는 것을 느꼈다.어느덧 시간이 흘러 비행기는 유유히 안평 공항에 순조롭게 착륙했다.기내는 어느새 등이 전부 켜졌고 승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차우미는 안전벨트를 풀고 가방을 챙겨 일어섰는데 도로 옆에 앉은 나상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가방을 들고 먼저 나갔다.차우미는 하는 수 없이 나상준의 뒤를 따라 기내에서 나갔다.두 사람은 여전히 VIP 통로로 아무 막힘없이 일사천리로 몇 분 만에 공항을 나왔다.차는 이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사는 차우미와 나상준이 나오는 것을 보고 즉시 짐을 받아 트렁크에 넣었다.나상준은 뒷좌석의 차 문을 열어 차우미에게 먼저 타라고 했다.차우미는 사양하지 않고 올라가서 안쪽으로 앉
진문숙은 마음이 어찌 조급했는지 가능하다면 올해에 결혼식까지 치르고 싶었다.파티에서 사람들은 서로 잘 아는 사람들과 모여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며 우아한 음악 선율에 맞춰 각자의 생각과 행복, 그리고 걱정들을 이야기했다....성북동 별장에서.주혜민은 운전해서 별장을 떠난 후 액셀러레이터를 세게 밟고 큰 도로로 빠르게 달렸다.그날 밤, 그녀는 나상준의 냉정한 눈빛이 너무 두려워서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당황했다.주혜민은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나상준과 가까이할 수 없었다.그래서 고민 끝에 문지영을 만나서 상황을 얘기하려고 했다.비록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문지영과 친해지면 그것 또한 자기에게 유리할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주혜민이 문지영이 집에 있을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방문했는데 결국 집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정부의 말에서 문지영이 자신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왜 나를 안 만나려고 하는 거지?’주혜민은 설마 나상준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문지영을 만났고 또 문지영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었는지 궁금했다.그녀는 문지영의 성격을 잘 아는데 절대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그런데 이제 며칠도 되지 않았는데 문지영이 자기를 만나주지 않는다는 건 그 이유 외 다른 건 없다고 생각했다.이제 문지영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여자가 자신을 이겼다는 생각에 화가 났다.‘절대 안 돼!’주혜민은 지금 상황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상대가 자기보다 조건이 좋든 안 좋든 절대 나상준을 포기할 수 없었다.3년을 기다려서 겨우 기회가 왔는데 다시는 나상준을 다른 여자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핸들을 꽉 잡고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그러자 기다란 브레이크 소리가 깊은 밤에 울려 퍼졌다.차를 길옆에 주차하고 주혜민은 분노로 가득 찬 눈으로 앞을 바라보았는데 눈빛에는 분노가 활활 타올랐다.그녀는 더 이상 시간
문지영도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편안하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돌렸는데 한 번에 몇몇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아봤다.거의 모두 만나봤던 사람들인데 그중에 온씨 가문의 진문숙도 있었다.문지영은 친구 사귀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특별히 필요가 있을 때만이 그 필요한 사람과 가까워지려 한다. 예를 들어 지금의 서혜란처럼 말이다.예를 들어 온씨 가문의 진문숙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는데 평소에 가끔 만나면 간단하게 웃으면서 인사만 하는 사이였다.서혜란의 말에 문지영은 궁금해서 물었다.“결혼식이라니? 어느 가문에 결혼식이 있을 것 같아?”문지영 나이대의 사람들은 자식들의 나이가 모두 나상준과 비슷했는데 거의 모두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 어느 가문의 자식이 약혼하고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서혜란은 문지영을 보더니 턱으로 진문숙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가운데 있는 온씨 가문의 며느리 진문숙 씨 알지?”문지영은 진문숙 방향으로 보았는데 거기에는 3~4명이 있었는데 진문숙에 가운데서 제일 기쁘게 웃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무슨 경사가 있는 듯싶었다.문지영이 잠깐 생각하더니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온씨 가문의 아들은 해외에서 무슨 연구를 하는데 괜찮다고 들었어.”예로부터 사람들은 훌륭한 아이와 나쁜 아이들에 대한 인상이 깊게 남는다.“맞아. 온씨 가문의 아들은 모두가 좋다고 해. 최근에 들었는데 그 아들이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고 해. 성격이 조용하고 가문도 좋으며 진문숙 씨도 보고 엄청 마음에 들었나 봐.”문지영이 그제야 이해했다.그들과 같은 가문에서는 며느리를 볼 때 아들만 좋아한다고 되는 거 아니고 가문 어른들의 동의도 받아야 하는데 만약 어른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했다.그런데 서혜란이 진문숙도 만나보고 만족한다고 하니 아마도 성사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럼, 잘된 일이군.”말은 그렇게 했지만, 문지영은 마음속으로 조금 다급했다.주변의 많은 아이들은 모두 결혼
어떤 일은 당사자가 눈치채기 전에 잘못 말하면 미움을 사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 뒤에 주씨 가문에 일이 발생하고부터 문지영은 서혜란과 가까이 지냈는데 그녀를 통해서 더 많은 아기씨를 요해하고 직접 며느리를 고르고 싶었다.그때 서혜란은 마음속으로 기뻐했고 문지영이 장님은 아니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혜란은 주혜민의 나쁜 말은 하지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아가씨들에 대해서만 문지영에게 알려주고 문지영이 직접 만나보고, 조사하고 고려하게 했다.비록 주혜민은 좋아하지 않지만, 서혜란은 나상준을 높이 평가했다.서혜란이 봤을 때 나상준은 능력이 있고 대담하고 용감하며 신중하게 일 처리 하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하지만 결혼은 서로 맞아야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비록 자기 가문에 나이와 조건이 비슷한 소녀를 나상준에게 소개해 주려고 골라봤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포기했다.사람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아야 한다.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려면 서로 맞아야 한다.서혜란은 모든 일을 한 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본다.때문에 문지영이 며느리를 찾는 문제에서 그녀는 특별히 신경을 써서 모두 나상준과 잘 어울릴만한 아가씨들만 문지영에게 말했다.이제 남은 건 나상준의 마음에 달렸는데 그는 아무나 쉽게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다.문지영이 주혜민을 얘기하는 것을 듣더니 서혜란은 곧바로 문지영이 이제 주혜민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주혜민은 정말로 며느리로 적합하지 않았기에 서혜란도 그냥 준다고 해도 거부할 것이다.“그 아이가 상준이를 많이 좋아하나 봐요.”서혜란은 여전히 주혜민에 대한 나쁜 말은 하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주혜민과 나상준에 대한 소문은 서혜란도 들었지만 믿지 않았다.나씨 가문의 나상준이 만약 정말로 주혜민을 좋아한다면 절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주혜민이 어떤 사람인지 나상준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때문에 나상준이 주혜민을 선택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