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이 왜요?” 고다정의 말을 들은 여준재는 그녀의 의도를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다정은 준재를 힐끗 쳐다보았다.“그럼 여 대표님 본인 몸은 어떤지 아세요? 당연히 모르시겠죠. 맥박을 재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여 대표님의 몸은 한계에 다다랐어요.”말을 마치자 다정은 즉시 눈살을 찌푸리고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솔직히 말해보세요, 여 대표님, 아침에 집에 가서 쉬지 않고 바로 회사로 가셨죠?”“…….”준재는 머쓱하게 코를 만지작거리며 마음에 찔리는 눈빛이 요동쳤다.다정은 그에게 어떠한 대답도 듣지 못한 채 콧방귀를 끼며 옆에 있는 구남준을 노려보았다.“구 비서님, 제가 평소에 여 대표님이 알맞게 시간을 배분하는지 감시하라고 하지 않았나요?”남준은 두 손을 흔들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저는 대표님의 비서일 뿐인데, 어떻게 대표님의 일을 간섭할 수 있겠어요.”남준의 억울한 모습을 본 아이들은 웃기만 했다.다정도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따지지 않고, 준재를 방으로 불러 치료를 했다.준재는 오전에 거의 쉬지 않았기 때문에, 치료를 받는 도중에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한 시간 후, 치료가 끝나자 다정은 침대에 엎드려 깊이 잠든 그를 바라보며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여 대표님, 일어나세요. 치료 끝났어요, 집에 가서 쉬세요.”“여 대표님…….”다정은 이어서 여러 번 불렀지만, 침대에서 잠든 준재는 전혀 깨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옆에 있던 남준이 상황을 보고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고 선생님, 오늘은 그냥 여기서 재우시는 게 어떠세요? 어젯밤부터 대표님께서 거의 주무시지 못하셨고, 오늘도 하루 종일 바쁘게 업무를 보셨거든요. 엄청 피곤할 거예요.”이 말을 들은 다정도 거절하기 쉽지 않다.“그래요, 그럼 여기서 주무시게 해요. 저는 아이들이랑 같이 자면 돼요.”“네, 고 선생님 부탁드리겠습니다.”남준은 정중하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다정은 별일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그녀는 돌아서서
이틀 동안 다정은 집에서 푹 쉬었고, 셋째 날이 되자 다정은 완전히 회복되어 신수 노인에게 연락해 무료 진료 일에 대해 물었다.“어르신, 무료 진료 행사 시간을 물어보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언제부터 시작해요?”[너 몸은 좀 괜찮아졌니?]신수 노인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를 걱정했다.다정은 웃으며 말했다.“다 나았어요. 걱정하지 마세요.”[다 나았으면 됐어. 행사 시간은 지금 조정하고 있어. 늦어도 모레부터 시작할 것 같아.]이렇게 두 사람은 무료 진료의 세부적인 내용을 잠시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잠시 후, 신수 노인은 무료 진료의 세부적인 내용을 정하여 사람들에게 알렸다.이 소식이 퍼지자, 오직 이번 무료 진료에 신수 노인뿐만 아니라 문성 노인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운산시의 모든 상류사회가 떠들썩해졌다.진찰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기회를 통해 문성 노인이나 신수 노인과 친해질 수 있었기에 이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그래서 무료 진료가 시작된 당일에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신의약방에 가서 줄을 섰고, 문성 노인과 신수 노인과 친해질 기회를 얻길 바랐다.다정은 이러한 상황을 모르는 상태로 약방 근처에 오니 많은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주차된 것을 발견했다. 다정이 약방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밖은 대기 줄이 늘어서 있었다.그녀가 이 모습에 놀라 넋을 놓고 있을 때, 귓가에 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 어떤 의사가 내진하는지 모르겠네, 아마도 신수 어르신과 문성 어르신이 내진하러 오지 않을까?”“두 어르신에 대해선 잘 모르는데 어떻게 진료할지 궁금해. 일반적으로 쉽게 진찰을 안 해준다던데?”“설마 헛걸음한 건 아니겠지? 나는 오늘 어르신들 때문에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어떤 사람은 걱정을 늘어놓았고, 어떤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다정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서 약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에 또 누군가가 명의를 언급하는 것을 들었다.“내가 들어보니 오늘 신수 어르신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고다정을 아니꼽게 쳐다봤다.5년 전, 고씨 집안의 스캔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저 여자가 그 뻔뻔한 고씨 집안의 큰딸이었어? 진짜 낯짝도 두껍다, 어떻게 여기를 올 생각을 해?”“누가 아니래, 그런 짓을 했다는 거 자체가 우리 같은 여자한테 먹칠한 거랑 뭐가 달라!”“이런 사람이 여기 있다니, 공기마저 더러워진 것 같아!”누가 먼저 이런 말을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다정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다정은 사람들이 날카롭게 말하는 모습을 보고서 급격히 얼굴색이 어두워졌다.다정은 눈길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옆에 서 있는 고다빈을 바라보았다.‘보아하니 다빈이는 일을 망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이렇게 기회를 틈타 나를 못살게 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네.’그리고 다빈도 다정의 눈빛을 보고 당당하게 다정을 쳐다보며 눈썹을 치켜세웠다.김재원은 두 사람이 다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다빈은 다정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인내심의 한계가 온 것을 느끼고서 밖을 향해 소리쳤다.“경비 아저씨, 여기 어떤 사람이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빨리 이 사람 쫓아내 주세요!”이 말을 들은 다정은 다빈이 자신을 가리키며 당당하게 외치는 것을 보았다.다빈은 제대로 말하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몇 마디 건넸다.“천박한 인간아, 난 너가 잘 사는 꼴은 절대 못 봐!”다정은 다빈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쳐다보며 비웃었다.“저기요, 김재원 씨,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제가 뭘 잘못 생각해요?”김재원은 다정의 비웃음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물었다.다정은 재원을 보고 싸늘하게 웃었다.“제 생각이 틀리지 않는 한, 여기는 무료로 진료해 주는 곳이고, 신수 어르신의 무료 진료소예요. 그리고 이 무료 진료의 뜻은 일반 시민들도 진료받을 수 있죠. 근데 대체 언제부터 이 여기가 당신과 같은 상류층 사람들 것이 되었죠?”이 말을 들은 재원은 말문이 막혔다.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
신수 노인의 말이 끝나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소란을 피우더니 속삭이기 시작했다.“그래서 저 고다정이라는 사람이 신수 어르신과 문성 어르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젊은 명의라는 거야?”“아, 생각났어! 고다정 씨는 문성 어르신의 생일 잔치에도 참석했었어, 어쩐지 낯익더라.”“왜 진작에 말을 안 했어? 방금 우리는 고다정 씨를 화나게 했다고!”“미움을 샀으면 미움을 받아야지, 저렇게 예쁘게 생긴 사람이 무슨 수로 두 어르신의 사랑을 받을지 누가 알았겠어?”“게다가, 저 여자는 이렇게 젊은데 무슨 능력이 있겠어!”사람들의 의심을 들은 다정은 놀라지 않았다.‘어쨌든 내가 어린 건 어린 거니까.’더군다나, 그녀는 말을 잘 하지도 못하고, 지금 당장 보여줄 성과도 없으니 침묵을 지키며 행동으로 보여주려 했다.신수 노인도 이를 알아차리고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다정이는 거만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아서 참 마음에 든단 말이야’“오늘 진료의 주치의는 바로 고 의사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그녀를 찾아 진료를 받으십시오.”신수 노인은 다시 한번 대중 앞에서 발표했다.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노인의 말을 듣고 서로를 쳐다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그렇게 한참 동안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다정은 이러한 상황에 서두르지 않았고, 신수 노인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나오더니 다정을 바라보고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오랫동안 허리랑 다리가 말썽이에요. 신수 선생님께서 침술에 아주 능통하시다는데 치료해 주시겠어요?”다정은 누군가가 실제로 그녀를 믿고 자신을 치료하도록 허용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기에 다소 의외였다.그녀는 노인을 위아래로 살펴보았고 그 노인은 인자한 눈매와 함께 성품이 올곧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호감이 배가되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어르신을 봐 드릴 수는 있지만, 먼저 알아봐야 할 사항이 있으니 이쪽으로 오세요.”다정은 노인을 자신 앞에 앉혔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 맞은편 의
“어린 친구가 실력이 장난이 아니네, 신수 선생님이 인정하신 이유를 알겠어,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야.” 노인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치료실을 나와 고다정을 칭찬했다.이 말을 들은 다른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그렇다면 고씨 집안 큰딸이 정말 명의라는 말인가?’동시에 문진혁은 살며시 다가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고 선생님, 제가 밖에서 지켜봤는데 고 선생님의 침술은 뭔가 다른 것 같아요.”그는 다정이 치료실을 들어서자마자 한 노인을 치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가 다정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게 생각이 나 호기심에 치료실로 다가갔다.그러나 진혁은 들어가 방해하지 않고, 창문 쪽에 서서 가만히 지켜봤다.다정 역시 진혁이 창밖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그녀는 미소를 지었다.“사실 다 똑같아요, 다만 침을 놓은 혈 자리만 달랐을 뿐이에요.”그녀의 침술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다.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스승은 고대 의술을 계승하는 사람이어야 하므로 그녀와는 다른 케이스였다.이를 생각한 다정은 더 질문하려는 진혁을 막고 입을 열었다.“전 진혁 씨가 뭘 묻고 싶은지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무료 진료소가 우선이에요, 나중에 제가 다시 혈 자리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릴게요.”“네, 꼭 잊지 말고 알려주세요.”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을 바라보았고, 그는 학자의 기질을 한껏 발휘한 채 만족해하고 있었다.다정은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잊지 않을게요.”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진료를 시작했다.아직도 많은 사람이 다정의 의술을 의심했지만, 다른 의사들의 줄이 길어지자 일부 사람들은 시도하는 마음으로 다정에게 진찰을 받았다.이에 다정은 불만을 가지지 않고 최선을 다해 치료했다. 반나절이 지나도 바깥의 환자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한동안 다정과 다른 사람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바빴다.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자,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가 쳐다보니 김재원은 얼굴에 뚜렷한 손바닥 자국을 드러낸 채 신의 약방 문 앞에서 다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여준재는 다소 의아해하며 옆에 있던 고다정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다정이 말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소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여 대표님, 오전에 오지 않으셔서 모르시겠지만, 이 여자가 얼마나 나쁜 여자인지 몰라요.”그녀는 그 말과 함께 재원이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여 다정을 배제한 일을 말했다.준재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하마터면 다정을 쫓아낼 뻔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고 불쾌감을 드러내며 그녀를 차갑게 바라봤다.다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가 냉철한 것이 아니라 재원이 부탁한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기에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다.‘내가 입을 열었다가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재원이 부른 신수 노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몸이 불편하시면 병원에 모시고 가세요.”이 말을 들은 재원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신수 어르신, 제발 저희 할아버지 좀 살려주세요!”그녀는 앞으로 나가 신수 노인을 붙잡고 애원하려 했지만 신수 노인은 그녀의 행동을 읽고 일찌감치 피했다.이로 인해 바닥으로 넘어진 재원은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흐느꼈다.“신수 어르신, 제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요. 오늘 아침에 제 무례했던 행동은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제발 저희 할아버지 좀 살려주세요!”땅바닥에 엎드려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주위 사람들은 동정심을 느꼈다.신수 노인은 그것을 보고 뭔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눈썹을 찌푸렸다.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재원은 다시 울먹이며 말했다.“아침에도 할아버지께서 오래된 지병 때문에 온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너무 괴로워하시고 침대에서도 내려오지 못하세요.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의사는 집에 돌아가서 요양하라고 했지만, 상태가 악화될 뿐이에요. 신수 어르신
신수 노인은 고다정의 결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퉁명스럽지만 참 사랑스러운 아이야.’다른 사람들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선생님은 정말 대인배야.”“신수 어르신과 문성 어르신이 좋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어. 보통 사람이라면 무시했을 거야.”“나라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았을 텐데.”이 말을 들은 김재원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과연 신수 노인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사과했을까?‘난 신수 어르신한테 부탁했는데 저 여자가 무슨 상관이야?’이를 생각한 재원은 머뭇거리며 신수 노인을 바라봤다.“신수 어르신, 이건…….”“오늘 무료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는 고 선생뿐입니다. 의사로서 실력은 저보다 뒤떨어지지 않고요. 안심하고 할아버지를 그녀에게 맡기세요.”신수 노인은 재원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고 솔직하게 말했다.이 말을 들은 재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정을 쳐다보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할아버지를 부축해 왔다.여준재는 근처에 서서 이 장면을 그의 두 눈으로 보았고 따뜻한 눈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던 재원이 부하들과 함께 들것에 기운이 없는 할아버지를 눕힌 채 돌아왔다.분명히 이 노인이 김씨 집안의 할아버지였다.다정은 김씨 집안 할아버지의 얼굴색이 잿빛이고 숨을 헐떡이며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재원이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자 다정은 바로 앞으로 나가 무릎을 꿇고 그의 맥을 짚었다.재원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고 다정의 움직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맥을 짚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정의 미간은 더 찌푸려졌다.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할아버지의 상태는 보통 나쁜 것이 아니었다.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고, 몸살 기운이 있어 이불을 덮어도 손발이 차가웠다.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그리고 어르신의 맥박이 무섭도록 비정상적이었고, 정신이 없었다.동시에 그는 큰 돌에 짓눌린 것처럼 숨을 크게 쉬었고, 언제
화가 난 김재원은 주위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다.재원은 화가 치밀어 오른 두 눈으로 다정을 쳐다보며 욕설을 퍼부었다.“저는 고 선생이 좋은 마음을 품고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제가 당부하는데 우리 할아버지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저는 절대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다정은 그럼에도 몸을 곧게 펴고 서서 얼굴이 굳어졌다.특히 용서할 수 없는 욕을 퍼붓는 것을 보고 그녀의 말이 점점 더 듣기 싫어져 말문이 막혔다.다정은 결국 참지 못하고 뺨을 한 대 내리쳤다.재원은 그대로 맞고 뺨을 가린 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다정은 손을 걷어 내고서 싸늘하게 말했다.“이제 좀 정신이 들어요?”이 소리를 들은 재원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았다.“네가 감히 나를 때려?”“제가 왜 못 때리겠어요? 방금 당신은 악을 쓰면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했잖아요! 근데 저는 김재원 씨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다정은 두려워하지 않고 재원을 쳐다보면서 당당하게 계속 말했다.“당신은 정말 무식하고 자제할 줄 모르는 사람이군요. 여기서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건 정말 용납할 수 없어요. 할아버지의 병을 치료하고 싶지 않으면 당장 모시고 나가세요!”마지막 말에 다정은 목소리를 높여 재원을 놀라게 했다.몇 초가 지나서야 재원은 이에 반응하며 억지를 피우기 시작했다.“우리 할아버지가 당신 같은 사람한테 치료받다가 문제가 생겼는데, 나보고 우리 할아버지를 데리고 나가라고 하다니 어이가 없네. 절대 그렇게 못 해!”“내가 경고하는데, 우리 할아버지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난 죽어도 용서 못 해!”신수 노인과 문진혁은 김씨 할아버지의 건강 검진을 마쳤는데 이 말을 듣고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졌다.“그만 해요, 이미 할 만큼 했잖아요!”신수 노인은 소리를 질렀다.불쑥 튀어나온 소리에 재원은 깜짝 놀랐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침착한 신수 노인을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다 결국 건방진 행동을 멈추고 주눅이 든 채 다시 입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