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준재가 내려다보니 고다정의 눈에는 원한이 가득 차 있었다.하지만 이게 나쁜 것은 아니다. 원한이 있으면 풀 수 있고, 모든 감정을 마음속에 담아 두지는 않을 것이다.“이미 몇 가지 단서를 찾았어요. 인력을 늘려 추적하고 있으니 곧 소식이 있을 거예요. 잡으면 당신에게 넘길게요.”“그 여자가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할 거예요!”고다정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그녀가 한 사람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다.여준재는 주먹을 불끈 쥔 그녀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뭘 하든 다 지지할게요.”...그날 점심부터 고다정과 친분이 있는 지인들이 찾아와 강말숙을 추모했다.그들은 초췌한 얼굴로 빈소를 지키는 고다정을 보고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랐고, 결국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저녁이 되어서야 점차 조문 행렬이 뜸해졌다.여준재는 고다정과 함께 향에 불을 붙여 꽂은 뒤 그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나지막이 말했다.“흰죽을 끓이라고 했으니 먹고 좀 쉬어요. 저녁에는 제가 지킬게요.”하지만 고다정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저녁은 제가 지킬게요. 외할머니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함께하고 싶어요.”“우리도 외증조할머니와 좀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요.”쌍둥이가 옆에서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그들의 고집스러운 눈빛을 보고 여준재는 결국 말리지 않았다. 다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의사를 배치했다.그 후 이틀 동안 고다정은 안간힘을 다해 빈소를 지켰다.그녀가 나날이 야위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여준재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하지만 외할머니를 안장하기 전까지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것을 안다.그래서 그는 요 며칠 메뉴를 바꿔가며 고다정에게 밥을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고 애썼다.쌍둥이도 오동통하던 볼이 쏙 들어갔다.비가 3일 동안 계속 내렸다. 하느님도 고다정을 위해 슬퍼하는 건가?눈 깜짝할 사이에 화장해 안장하는 날이 됐다.고다정은 강말숙의 유골함을 들고 묵묵히 묘지로 향했다
여준재가 방에 돌아와 보니 고다정이 언제 깨어났는지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언제 깼어요? 왜 저를 부르지 않았어요?”그는 고다정의 곁에 다가와 앉으며 관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배고프지 않아요? 주방에 닭가슴살죽을 데워놓으라 했어요. 당신이 깨어나면 바로 먹을 수 있게.”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고개를 들더니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남자의 잘생긴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배고프지 않아요. 요 며칠 고생했어요.”여준재가 요 며칠 얼마나 고생했는지 고다정은 다 안다.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여준재의 표정은 더없이 부드러웠다.“저는 하나도 고생스럽지 않아요. 당신만 무탈하면 돼요.”고다정은 그 따뜻한 미소를 보면서 마음속의 슬픔도 다소 해소되는 것 같았다.그녀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애들은요? 왜 안 보여요?”“당신 상태가 안 좋으니 애들도 정서가 불안정해서 부모님께 본가에 데려가라고 했어요.”여준재는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고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피곤한 얼굴을 보며 마음 아파했다.“이제 일이 다 끝났어요?”“다 끝났어요. 씻고 와서 곁에 있을게요.”고다정의 뜻을 아는 여준재는 바로 일어나 욕실로 갔다.그 후 며칠 고다정은 계속 집에서 쉬었다.그사이 임은미가 부모님, 채성휘와 함께 병문안을 왔다.임은미 부모님은 고다정을 안쓰럽게 생각하며 올 때마다 마음을 풀어주었다.“고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지금 중요한 건 살아있는 사람이야.”“외할머니는 네가 이렇게 자신을 들볶는 것을 원치 않으실 거야. 그리고 너는 자신만 들볶는 것이 아니라 배 속의 아기까지 들볶고 있잖아.”고다정은 그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나지 않았다.그래도 여준재와 사람들은 그녀를 몰아세우지 않았고, 그녀에게 조금씩 조정할 시간을 주었다.여진성 부부도 매일 쌍둥이를 데리고 돌아왔다.여준재도 틈만 나면 그녀를 데리고 외출했다.이렇게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아서인지 고다정은 점차 외할머니를 떠
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결국 타협했다.그녀는 여준재를 따라 다이닝룸에 가서 식사했다.여준재가 옆에서 궁금해하며 물었다.“당신이 뭘 하고 있는지 나한테 말해줄 수 있어요?”고다정은 그를 힐끗 보더니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다.“사람을 죽였으면 목숨으로 보상해야죠. 그 여자가 저의 외할머니한테 한 짓을 그 백배, 천배로 갚아줄 거예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그는 고다정이 손에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쓰레기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하지만 그는 자기가 고다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못 하게 하면 평생 그녀의 가슴에 응어리로 남을 것이다.그의 속마음을 모르는 고다정은 마지막 한 입을 삼킨 후 젓가락을 내려놓고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다 먹었어요. 먼저 약제실에 갈게요.”“네, 안전에 주의해요.”여준재는 결국 고다정을 막지 않고 그녀가 떠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하루 밤낮을 거쳐 이튿날 새벽 고다정은 끝내 자기가 원하는 독약을 만들어냈다.하지만 이때 그녀의 배가 갑자기 쿡쿡 쑤시며 아프기 시작했다.가슴이 철렁한 고다정은 급히 책상 위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여준재에게 전화했다.하지만 여준재는 전화를 받지 않고 직접 문을 열고 들어왔다.“다정 씨, 왜 그래요?”고다정의 창백한 얼굴과 배를 붙잡고 있는 동작을 본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황급히 달려오더니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돌아섰다.“이 집사님, 이 집사님, 빨리 차를 대기시켜요!”방에서 나온 후 여준재는 즉시 이상철을 향해 소리쳤다.그가 고다정을 안고 황급히 위층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일이 생겼음을 짐작한 이상철은 급히 대답한 후 처리하러 갔다.한바탕 질주한 결과 두 사람은 10여 분 만에 병원에 도착했다.병원 입구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은 여준재가 차에서 고다정을 안고 내리는 것을 보고 즉시 환자 이송 침대를 밀고 왔다.고다정이
고다정이 눈을 뜬 건 오후였다.그녀는 머리 위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자신이 병실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막 일어나려는 순간, 두 아이의 들뜬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엄마, 드디어 깨어났네요.”병상 옆에 누워 있던 두 아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다정을 바라보며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빛내고 있었다.“엄마 몸은 좀 어때요. 아빠가 엄마 몸이 안 좋다고 하던데 요즘 제대로 쉬지 못했어요?”“엄마, 할머니가 떠나셔서 슬픈 건 알지만 할머니가 떠나면서 엄마한테 몸조심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말을 안 들으니까 다음에 할머니 보러 갈 때 내가 말해서 엄마 꿈에 나타나서 혼내주라고 할 거예요.”하준이는 유치한 말투로 어른 흉내를 내며 고다정을 혼내고 있었다.이 모습을 본 고다정의 얼굴에 시무룩하고 멋쩍은 표정이 번졌다.이때 여준재도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일어나요, 내가 의사 선생님 불러줄게요.”그렇게 말한 뒤 그는 고다정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돌아서서 의사를 찾으러 갔다.그가 화가 났다는 걸 모를 리 없는 고다정은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더욱 마음이 불안해졌다.“엄마, 아빠 화난 것 같아요.”두 아이도 여준재의 태도를 눈치채고 고다정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고다정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코를 슥 만지며 말했다.“괜찮아, 엄마가 나중에 잘 달래볼게.”“엄마, 아빠는 엄마가 몸을 돌보지 않아서 화났어요.”두 꼬마는 고다정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고다정은 몸을 챙기지 않은 게 아니라 사고였을 뿐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다시 삼켜버렸다.두 아이의 말에서 여준재가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굳이 입 밖으로 내서 두 아이의 마음속에 증오의 감정을 심어주고 싶지 않았다.고다정은 그런 생각에 일부러 옅은 미소를 지으며 두 아이를 달랬다.“그래, 이번엔 엄마가 잘못했어. 조만간 아빠한테 제대로 사과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 뒤에 일은 엄마가 알아서 할게.”그들이 말하는 동안 여준재가 의사와 함께 돌아왔
고다정의 말을 들은 심해영은 손을 흔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가족끼리 고맙긴 뭘. 정말 고마우면 빨리 나아. 나와 네 아버님, 할아버님까지 널 걱정하고 있어.”“네, 의사 선생님께 협조해서 잘 치료할게요.”고다정은 심해영을 향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가족들은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고다정이 피곤해하자 심해영은 두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이들을 배웅한 여준재는 병동으로 다시 들어와 아직 잠들지 않고 병상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고다정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세운 채 다가갔다.“방금 전에 회복을 위해 의사에게 적극 협조하겠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죠?”“인터넷으로 뉴스만 볼게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다정은 여전히 휴대폰을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고개를 들어 여준재의 진한 다크서클을 본 순간 가슴이 아팠던 그녀는 몸을 옆으로 옮긴 뒤 침대의 빈 공간을 두드리며 말했다.“잠깐 올라와서 나랑 같이 잘래요?”이를 본 여준재는 당연히 마다하지 않고 재킷을 벗고 병상에 누워 있는 고다정을 두 팔로 감쌌다.고다정은 잠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의 가슴에 기대어 물었다.“유라는 어떻게 잡았어요?”“외할머니한테 그런 짓을 하고 난 뒤 사람들을 시켜서 온 동네를 뒤졌어요. 어차피 이제 혼자라 모든 걸 직접 해야 하는 데 아무리 압도적인 능력이 있어도 결국은 소홀할 수밖에 없죠. 그 단서들을 토대로 잡는 건 매우 쉬워요.”여준재는 유라를 붙잡은 과정에 대해 나지막하게 말했고 고다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고 있다가 말을 이어갔다.“유라를 잡고 나서 왜 외할머니한테 그런 짓을 했는지 심문은 했어요?”이 말을 들은 여준재는 침묵을 지켰다.유라를 잡은 후 그는 유라를 만나 유라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물었고 당시 유라는 이렇게 대답했다.“내 부하들은 너한테 잡혔고, 고다정 옆에는 성씨 가문의 경호원들과 네 부하들이 있으니까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을 노릴 수밖에 없지.”어두운 공간에서 유라는 광기 어린 표정으로 여준재를 노려
점심시간이 끝나고 고다정은 여준재에게 유라에게 복수하러 가자고 재촉했고 여준재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고다정이 병원에 혼자 있는 것이 불안했던 여준재는 어머니에게 오라고 연락드렸다.마침 성시원과 임은미도 고다정을 찾아왔고, 여준재는 두 사람에게 고다정을 부탁했다.“여 대표님 바쁘시니까 얼른 가세요. 다정이는 제가 지켜볼 테니 괜찮을 거예요.”임은미는 가슴을 두드리며 그를 안심시켰고 이 모습을 본 여준재는 갑자기 조금 불안해졌다.임은미는 큰일을 할 때는 꽤 믿음직스럽지만, 다른 때는....됐다. 그래도 어르신도 계시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여준재는 그렇게 말하며 일행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뜨려고 돌아섰다.한동안 병실에는 고다정과 성시원, 그리고 임은미만 남았다.아직 고다정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던 임은미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침대 곁으로 다가와 더듬더듬 물었다.“다정아, 왜 이렇게 됐어, 전에는 멀쩡했는데.”“음... 아마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가 봐.”고다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비록 임은미가 외부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임은미가 그런 어두운 일을 알기를 원치 않았다.그 말을 들은 임은미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곧바로 이렇게 설교했다.“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잖아.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프고 속상한 건 알지만 자기 몸을 함부로 하면 안 돼. 이것 봐, 결국 이렇게 문제가 생겼잖아. 다음에 외할머니 보러 갈 때 할머니와 아줌마한테 일러바칠 거야 내가.”고다정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말했다.“왜 준이, 윤이랑 같은 말을 하는 거야?”“준이윤이도 그렇게 말했어? 역시 내 조카들답네. 이렇게 통하잖아.”임은미는 더 환하게 웃었고 성시원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고다정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저녁 늦게 채성휘가 임은미를 데리러 온 뒤에야 고다정은 또 한 번의 설교를 피할 수 있었다.“너 점점 더 대담해지는 것 같다. 준재가 널 제때 병원에 데려오지 않았으면
“그리고 한 가지 틀린 게 있어. 다정 씨 외할머니를 죽이면 평생 고통스러울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네가 그 사람을 과소평가한 거야. 다정 씨는 직접 외할머니의 복수를 할 테니까. 외할머니를 죽인 원수에게 죽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면서 평생 인간도, 귀신도 아닌 채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행복한 자기 모습을 보여줄 거야.”여준재는 유라를 바라보며 한 마디 한 마디 말했고 유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상태로 고다정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니....그런 장면을 생각만 해도 유라의 마음은 괴로웠다.아니, 그렇게 살길 원하지 않았다.“허, 내가 살아 있으면 또 도망가서 고다정한테 나쁜 짓할까 봐 두렵지 않아? 넌 내 능력 알잖아”유라는 일부러 여준재를 자극했지만 그걸 모를 리 없는 여준재는 비꼬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내가 너한테 도망갈 기회를 줄 것 같아? 오늘 이후로 넌 폐인이야.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서 남은 생을 이곳에서 속죄하는 데 써.”그 말을 끝으로 그는 유라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자리를 뜨려고 돌아섰고 이 모습을 본 유라는 잔뜩 당황했다.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싶지 않았던 유라가 큰 소리로 외쳤다.“여준재, 날 죽일 수 있으면 죽여. 그렇지 않으면 내가 살아있는 한 반드시 탈출할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반드시 네 아이들을 고통스럽게 죽게 할 거야!”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준재는 걸음을 멈추고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고개를 돌려 유라를 바라봤다.유라는 겁이 났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자극했다.“어머, 무섭네. 차라리 지금 날 죽여. 안 그러면 반드시 네 아이를 흔적도 없이 죽여버릴 테니까!”“그래? 네가 어떤 방법으로 내 아이들을 죽일지 지켜볼게.”여준재의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서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고 이윽고 그가 바깥에 있는 경비원에게 지시했다.“들어가서 팔다리를 잘라버리되 사람은 죽이지 마요. 사모님께서 살려
시간이 흘러 어느덧 3개월이 지나고 고다정, 임은미의 배가 눈에 띄게 불룩해졌다.특히 임은미는 쌍둥이를 임신한 탓인지 8개월 차인 배가 일반 임산부보다 더 컸다.그 결과 채성휘는 어디 부딪힐까 봐 아예 외출까지 막았다.하지만 외출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의사 선생님은 지금부터라도 임은미가 제대로 걸어 다녀야 출산할 때 순조로울 거라고 했다.결국 채성휘는 임은미를 전혀 제어할 수 없었다.임은미는 매일 고다정을 보러 왔고 두 임산부가 함께 있는 모습은 어린아이보다 더 철이 없었다.특히 무언가 먹고 싶을 때는 더욱 그랬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아이스크림 먹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이상철이 가정부의 보고를 받고 서둘러 뒷마당으로 가보니, 임산부 두 명이 수풀 뒤에 쪼그리고 앉아 힘겹게 얼굴만 한 아이스크림 상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게다가 두 사람의 주변 바닥에는 각종 과자 봉지들이 흩어져 있었다.“어머 들켰네. 다정아, 빨리 먹어.”임은미는 한 입씩 조금 먹는 대신 걸신들린 듯 아이스크림 상자에 있던 나머지 아이스크림을 그대로 입에 넣었고 고다정이 그대로 따라 했다.그도 그럴 게 전에 약물을 만든 탓인지 지난 몇 달 동안 몸이 약해져서 여준재에게 먹고 마시는 것을 통제당하고 있었다.하지만 사람은 이상한 동물이라 갇혀 있으면 반항적인 생각을 하기 마련이었다.게다가 임산부는 식탐이 생기기 쉬웠기에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또다시 임은미와 함께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훔쳐 먹던 날, 지저분한 음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둘 다 배탈이 나서 병원에 실려 갔고 공교롭게도 병원에서 만났다.처음엔 여준재와 채성휘도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사의 진찰을 받은 후 두 사람은 이것이 전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산모에게 아무거나, 대충 이런 말은 안 통합니다. 간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 배탈이 난 거예요. 앞으로는 주의하시고 아무거나 막 먹게 하지 마세요. 약은 아이에게 좋지 않으니 처방하지 않겠습니다.”의사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