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의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아 임은미와 두 아이는 즉시 떠나지 않았다.그들은 인근 관광지를 돌아다니다 급히 귀국하는 척했다.고다정도 그들이 돌아간 뒤 밖에서는 많이 언짢은 티를 내며 성시원 뒤를 따라 토론회에 참석했다.하지만 여준재는 매일 현지에 설립한YS그룹에 가서 회사 일을 처리해야 했다.이날 오후, 고다정과 채성휘는 성시원을 따라 다시 학술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뜻밖에도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그 의학계의 독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성 교수님, 몇 년 못 본 사이에 많이 초췌해졌네요.”벤저민은 눈앞의 세 사람들을 향해 비웃듯이 말을 건넸다.하지만 성시원은 그런 벤저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답했다.“어쩔 수 없죠. 제가 제일 중시하는 게 양심, 도덕, 그리고 인내심뿐이거든요. 그리고 아무리 연구 결과가 좋지 못하다고 해도 누구처럼 제자의 작품을 뺏지는 않습니다.”이 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벤저민을 저격하는 말이다.역시나 벤저민의 얼굴은 순간 험악해졌다.하지만 성시원은 그의 모습을 아랑곳하지 않고 고다정과 채성휘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의 무시로 벤저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그러다 차가운 눈빛으로 고다정과 채성휘를 훑어보고 다시 그들의 학력을 떠올리더니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성 교수님, 보아하니 10년 전의 일이 당신에게 큰 타격을 준 것 같네요. 지금은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데 점점 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잖아요. 제 기억으로는 예전에 석사생 밑으로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하긴 예전에 그 학생들도 성 교수님이 직접 뽑았지만 결국에는 이익 때문에 모두 배신하고 도망쳤죠.”그의 말을 듣고 성시원의 발걸음이 순간 멈춰졌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그는 제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는데 순간 예전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그를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고다정과 채성휘는 제일 먼저 그가 지금 기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특히 고다정은 성시원이 예전에도 학생들을 받
결국 고다정은 구남준이 가져온 옷들을 입어보지 못했다.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교베르 의학상 시상식이 열리는 장소는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대학 강당이었다.성시원이 고다정과 채성휘를 데리고 도착했을 때, 강당에는 이미 고위층 사람들과 기자들이 많이 도착해 있었다.이때, H 국 기자가 네 사람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듯 장비를 챙겨서 그들에게 다가왔다.“안녕하세요. 성 교수님 팀원들이 이번 교베르 제작자 상 수상자라고 들었는데 혹시 시상식이 끝나면 잠깐 시간을 내서 저희와 단독 인터뷰에 참여해 주실 수 있을까요?”기자들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성시원을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고다정과 여준재에게 시선이 쏠렸다.어쩔 수 없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기만 해도 뛰어난 외모와 범상치 않은 분위기 때문에 도저히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었다.두 사람도 당연히 기자의 시선을 눈치챘지만 개의치 않고 성시원의 뒤에 서있었다.어쨌든 오늘 밤의 주인공은 성시원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성시원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기자들이 아무리 애원하고 성시원을 설득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이날 오전 9시 시상식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주최 측은 특별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MC분을 초청해서 시상식의 진행을 맡겼다.역시나 탑은 탑이었다. 이제 막 무대에 올라섰지만 고작 몇 마디로 장내의 분위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든 것이다.“이제 오늘 첫 번째 교베르 상을 수상할 팀을 발표하겠습니다...”사회자가 한껏 격앙된 표정으로 대본을 낭독하자 객석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수상자는 일반적으로 낮은 상부터 높은 상 순서대로 발표되었고 제일 마지막에 우수상을 발표한다.하여 고다정 일행들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그래도 네 사람은 수상하는 팀마다 그들의 정보들을 알아보고 가끔 그들과 몇 마디 주고받기도 했다.세 사람의 학구 열정에 비교하면 여준재는 많이 조용했다.그는 그저 사업가이기 때문이다.시간이 1분 1초가 지나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시간이나 지나 마침내 고
벤저민과 스미스는 무대에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성시원을 보고 두 눈에 핏발이 섰다.‘젠장! 성시원 저 늙다리가 처방을 공개하면 우리는 어떻게 저것들이 스미스 가문의 특효약을 표절했다고 발표하지?’한순간 두 사람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했다.성시원은 취재진을 상대하면서도 틈틈이 벤저민과 스미스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는 두 사람의 침울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보며 눈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감돌았다.원래부터 성시원을 지켜보고 있던 벤저민은 당연히 그 도발적인 표정을 놓치지 않았고, 가슴에서 다시 분노가 끓어올랐다.특히 성시원이 고다정 일행과 함께 떠나려는 것을 보고 더욱 급해졌다.“스미스 씨, 언제 손을 쓰실 거예요? 지금 가려는 것 같은데!”그는 옆에 있는 남자를 꼬드겨 성시원을 혼내주려 했지만 스미스도 바보가 아니다.“어떻게 손을 쓰라는 거예요? 그들이 처방을 공개한 걸 보지 못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바보로 보여요?”연이은 세 개 질문에 벤저민은 말문이 막혔고, 겁에 질려 뒤로 한 발 물러섰다.스미스는 냉랭한 한마디를 내뱉고 성시원이 있는 방향을 보더니 그를 뿌리치고 가버렸다.그와 거의 동시에 성시원도 고다정 등 세 사람을 데리고 서둘러 시상식장을 빠져나왔다.방금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던 그들이 조용히 시상식장을 떠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운이 좋았는지, 하필 그때 국제 유명 생물학자가 뒤늦게 도착하면서 현장에 있던 언론 기자들이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시상식장을 떠난 그들은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즉시 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부두로 향했다.그곳에 이미 국내 직항 비행기를 준비해 놓았다.가는 길에 고다정은 여준재의 손을 꼭 잡고 이따금씩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녀는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녀의 예감은 곧 현실이 됐다.구남준이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 앞에 검문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어제 뉴스에서 오늘 이 도로에 교통 규제가 없는 걸 확인했는데,
“구 비서, 대기하고 있는 애들에게 전력을 다해 추격자들을 막되 총을 쏘는 자부터 해결하라고 지시해.”여준재가 지시하자 구남준이 바로 부하에게 연락했다.이를 지켜보던 성시원도 자기 부하에게 명령을 내렸다.원래 붐비지 않던 도로에 갑자기 어디서 나왔는지 허머 몇 대가 나타났다.이 차들이 억지로 경찰차 앞에 끼어들면서 추격하고 있던 경찰들이 목표물을 잃었다.“젠장! 당신들 뭐야? 얼른 당신들 똥차를 끌고 꺼져.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 차를 박살 낼 거야!”그중 한 경찰은 총으로 허머를 겨누었다. 허머가 비키지 않으면 쏠 태세였다.하지만 그들을 막고 있는 허머는 떠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을 멈춰 서게 할 기세였다.한편, 주변에 있던 다른 허머들도 잇달아 경찰차에 접근했다.경찰은 그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빨리 지원 요청해. 이 차들은 저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거야!”하지만 이미 늦었다.운전 솜씨가 뛰어난 구남준 덕분에 승용차에 약간의 손상이 있긴 했지만 그렇게 질주했는데 아무런 문제 없었다.적색 신호등을 무시한 채 연거푸 앞차를 추월한 결과, 10분도 되지 않아 그들은 끝내 시내를 빠져나가는 고속도로에 올랐다.하지만 행운은 여기서 끝난 듯했다. M국 군부에서 헬기를 파견한 것이다.“거기 잘 들으세요. 지금 차를 세우면 귀빈 대우를 해 줄 것이나 우리가 손을 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이런 친절은 없을 것입니다.”이 소리에 성시원과 여준재 등은 워낙 좋지 않던 표정이 더욱 음침하고 어두워졌다.M국이 속내를 숨기지도 않고 직접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잡으려 할 줄은 몰랐다.여준재는 구남준의 시선을 느끼고 나지막이 말했다“신경 쓸 필요 없어. 계속 운전해!”이런 태도에 분노한 M국 병사들은 그들의 양쪽 도로에 대고 한바탕 총격을 가했다.구남준의 운전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이 같은 공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승용차 유리가 모두 깨졌고, 총탄이 창문을 뚫고 차 안에 들어와 박혔다.여준재는 고다정을 감싸며 차 의자에 엎드렸다.성시
“작은 사모님, 우리가 추격당하다가 방법이 없어 강에 뛰어내렸어요. 저녁에 누군가가 우리를 데리러 올 거예요.”구남준의 설명을 들은 고다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추격이요? 왜 추격당한 거예요?”이 말이 나오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멍해졌다.그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 고다정을 바라보았다.“또 기억을 잃었어요?”미리 상의하지 않았지만 몇 사람은 똑같은 질문을 했다.여준재는 또 미간을 찌푸렸다.“아니지. 다정 씨가 기억을 잃었다면 방금 내 이름을 부를 수 없잖아.”이 말을 들은 성시원과 채성휘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그러자 고다정이 어리둥절해하며 그들을 쳐다보았다.“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기억을 잃었다니요?”“작은 사모님, 기절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세요?”구남준이 뭔가 알아채고 갑자기 고다정에게 질문했다.그러자 고다정은 머릿속에서 기절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급히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고,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 기억 속의 옷이 아니고 다치지도 않은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했다.“어떻게 이럴 수 있지?”“작은 사모님, 뭔가 이상한가요?”구남준이 또 한 번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들도 고다정을 지켜보고 있었다.“제 기억에는, 제가 기절하기 전에 임초연에게 잡혀 있었고,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지만 임초연이 쏜 총에 맞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다치지 않을 수 있죠?”“사모님, 그건 3개월 전의 일이에요.”구남준이 옆에서 나지막이 귀띔했다.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당혹감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3개월 전의 일이라고요?”그런데 왜 그 뒤의 기억은 하나도 없지?이를 지켜보던 성시원과 채성휘는 고다정이 현재 무슨 상황인지 대충 알았다.여준재도 고다정의 상황을 짐작하고 그녀에게 설명해 주었다.“다정 씨, 어떻게 된 거냐면...”10여 분 후, 무슨 일이 있었고 지금 무슨 상황인지 끝내 알게 된 고다정은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다른 사람들도 조
고다정이 성시원과 함께 윗사람들을 만나러 갔을 때 그들이 귀국했다는 소식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그들이 공항을 빠져나갈 때 연예인을 찍으려고 기다리던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한순간 인터넷에서 고다정이 속한 팀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성시원 교수 팀은 너무 겸손해. 이렇게 조용히 귀국하다니!][그러게. 성시원 교수님 일행이 귀국할 때 공항에 마중 가려고 했는데!][공항에 마중 가지는 못했지만 YS그룹 주식과 고다정 회사 제품을 많이 샀으니 그들의 과학연구를 지원했다고 볼 수 있겠지!][나도 많이 샀어. 앞으로 성시원 교수 팀이 더 많은 불치병 약품을 개발해 환우들의 부담을 덜어줬으면 좋겠어.]누리꾼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날 저녁 고다정 회사 제품과 YS그룹 주식은 열기가 뜨거웠다.고다정 일행은 해외 실험 상황을 보고한 후 각자 귀가했다.“엄마, 아빠, 드디어 돌아왔네요.”고다정과 여준재가 돌아온 것을 본 쌍둥이는 대뜸 소파에서 뛰어내리더니 팔을 벌리고 두 사람을 향해 뛰어왔다.그들은 각각 아빠, 엄마를 끌어안고 올려다보며 물었다.“엄마, 아빠, 다치지 않으셨죠?”“걱정하지 마. 안 다쳤어.”고다정과 여준재는 다정하게 쌍둥이를 끌어안았고, 뒤이어 그들의 손을 잡고 거실로 들어갔다.심해영이 소파에 앉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애들이 너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오자고 졸랐어. 그런데 너희가 돌아오지 않아 계속 기다리고 있었어. 오후에 어디 갔었어?”“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바로 돌아오지 못했어요.”여준재는 길게 말할 생각이 없는 듯 간결하게 대답했다.이를 눈치챈 심해영은 더 묻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너희가 돌아왔으니 나는 좀 쉬어야겠다. 너희를 밤새 기다렸더니 졸려 죽겠어.”“어머니가 그동안 수고하셨어요. 애들은 저희가 돌볼 테니 들어가 쉬세요.”여준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고다정도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그날 저녁 쌍둥이는 고다정과 여준재의 방에 머물렀다.두 아이는 침대에 누워 호기심 어린 눈
빨간색 실크 캐미솔 잠옷을 입은 중년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다름 아닌 채성휘의 어머니 하지유였다.그녀의 뒤에는 군청색 잠옷을 입은 그의 아버지 채은호가 따라 들어왔다.“아버지, 어머니, 왜 여기 계셔요?”채성휘가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이때 전화기 너머로 임은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오셨으니 무슨 문제 있으면 두 분한테 물어봐요. 저는 너무 졸려서 먼저 잘게요.”말하고 나서 임은미는 직접 전화를 끊었다.채성휘는 끊긴 휴대폰을 보며 임은미가 떠난 것이 부모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데, 입을 열기도 전에 하지유가 선수를 쳤다.“너 은미한테 전화하는 거 맞지? 은미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가 돌려보냈어. 너희 둘이 아직 명분이 없는데 은미가 여기 사는 건 아니잖아. 조신한 여자애가 결혼 전에 남자 집에 사는 게 어디 있어?”하지유는 상황을 설명하는 척하면서 실은 임은미의 험담을 하고 있었다.바보가 아닌 이상 어머니의 말에 숨은 뜻을 모를 리 없는 채성휘는 워낙 잔뜩 구겨진 미간이 펴진 적이 없었고, 눈에는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어머니, 은미 씨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저한테 약속하셨잖아요?”“내가 괴롭혔어? 뭘 보고 내가 괴롭혔다고 말하는 거야?”하지유는 얼굴을 찌푸리며 언짢은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채성휘는 말문이 막혔다. 그가 반박할 말을 찾기 전에 하지유가 말을 이었다.“너는 내가 은미가 싫어서 돌려보냈다고 생각하니?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그러는 거야. 너희 둘이 아직 결혼하지 않았는데 혼전 임신한 것도 말이 안 돼. 이 소식이 고향에 전해지면 네 큰 고모랑 친척들이 은미를 어떻게 생각하겠어?”“성휘야, 네 엄마는 정말 은미를 생각해서 돌려보낸 거야. 그리고 은미를 돌보는 사람이 없을까 봐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가 사용인을 딸려 보냈으니까.”하지유가 눈짓하자 채은호도 말을 거들었다.이를 지켜보던 채성휘는 더욱 대책이 없다는 표정을
쌍둥이가 나간 후 고다정은 친구를 바라보며 걱정스레 물었다.“말해 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임은미도 원래 상의하려고 친구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에 숨기지 않았다.“성휘 씨 부모님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어떻게 된 거야?”고다정이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캐물었다.임은미는 자기가 돌아온 후 발생한 일을 털어놓았다.“내가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성휘 씨 부모님이 오셨는데, 나랑 성휘 씨가 결혼 전에 같이 살면 소문이 안 좋게 날 수 있다며 일단 집에 돌아가라고 하셨어. 나를 돌보는 사용인을 보내긴 했지만 어쩐지 나를 못마땅해하시는 것 같아.”이 말을 들은 고다정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그때 구체적으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말해 봐.”“그때...”임은미는 채성휘 부모님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이 말들은 얼핏 들으면 임은미를 위하는 것 같지만 말에 담긴 깊은 뜻을 따져보면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친구와 채성휘의 신분을 구분하고 있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녀는 친구를 바라보며 물었다.“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노력해 보고 싶어. 다정아, 나를 좀 도와줘. 어떻게 하면 될까?”임은미가 간절한 눈빛으로 친구를 바라보았다.친구의 마음을 이해하는 고다정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우선 채성휘 씨 부모님이 왜 너를 싫어하는지 알아내야 해. 너 요 며칠 두 분을 뵈러 간 적이 있어?”“두 분을 모시고 운산을 한 번 둘러볼 생각으로 연락했다가 거절당했어. 내가 임신 중이라 돌아다니면 안 된대.”임은미는 요 며칠 채성휘 부모님과 접촉한 상황을 말하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자기가 뭘 잘못해서 채성휘 부모님이 이렇게 싫어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다정도 이 말을 듣고 뭐라 해야 할지 몰랐다.상대방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하기에는 이치에 맞고 근거가 있어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다정이 생각하다 물었다.“채성휘 씨에게 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아니,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임은미가 고개를 젓자, 고다정은
“하윤 씨, 좋아해요. 제 여자친구가 되어줄래요?”임지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애를 바라보며 긴장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하윤은 잠깐 얼떨떨해하더니 이내 환한 웃음을 지었다.“네.”그녀의 얼굴에 피어난 예쁜 미소를 보고 임지호도 해맑게 웃었다.햇빛 아래 선남선녀는 너무 잘 어울렸다.임은미와 고다정은 구석에 숨어 이를 지켜보며 들떠서 소곤거렸다.“하윤이 저렇게 활짝 웃는 걸 보니 서로 고백한 것 같아.”“고백한 게 맞아. 둘이 같이 앉은 걸 봐.”“역시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어. 내가 나서면 안 맺어지는 커플이 없다니까.”임은미는 마침내 자화자찬하기 시작했다.고다정은 그녀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저 남자애가 하윤을 좋아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나섰다가 맺어주는 게 아니라 끝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한참 더 보다가 호기심이 충족된 듯 제대로 자리에 앉아 요리를 주문했다.기왕 온 김에 뭘 좀 먹어야지.식사하면서 고다정이 감탄했다.“애들이 어느새 커서 애인까지 생겼네.”“그러게. 우리도 늙었어.”임은미도 같이 탄식했다.뒤이어 그녀는 맞은편의 절친을 바라보며 물었다.“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보름 동안 쉬면서 준재 씨랑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후 새로운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할 거야.”고다정은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임은미는 이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너 점점 일벌레가 되어가는 것 같다.”“그건 내가 이 일을 좋아하기 때문이야.”고다정이 웃으면서 말했다.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청아한 목소리가 그들의 귓전을 때렸다.“여하준 씨, 거기 서요.”이 소리를 듣고 눈빛을 주고받는 고다정과 임은미의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이런 우연이!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 두 남매를 모두 만난다고?’하윤도 너무 뜻밖이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여하준 쪽을 바라보았다.“오빠?!”“하윤?!”여하준도 이때 하윤과 그 옆의 청년을 발견하고 미간을
하윤은 정말 돌아오지 않았다.하민이 가지 못하게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여준재에게는 무척 즐거운 밤이었다....이튿날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이불 밖에 나온 고다정의 피부에 내려앉았다.피부에 생긴 흔적에서 어젯밤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여준재는 일찍 깼지만 아침의 따스함을 놓치기 싫어 고다정을 안고 만족스럽게 침대에 누워있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쾅쾅 두드렸다.“엄마, 일어나요.”하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여준재는 순식간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자식은 빚쟁이라는 말이 맞다. 이전에 좋아했던 만큼 지금은 싫다.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품속의 여인이 깨어났다.고다정이 정신이 흐릿한 상태로 물었다.“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려요?”“하윤이에요. 내가 돌려보낼 테니 자요.”여준재가 그녀를 풀어주고 일어나려 했다. 너무 졸렸던 고다정은 막지 않았다.그녀는 오후까지 자고 임은미가 전화해서야 겨우 일어났다.30분 후 두 사람은 시내 중심의 쇼핑몰에서 만났다.임은미는 잠이 덜 깬 것 같은 고다정을 보고 놀려댔다.“너랑 여 대표님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좀 절제해.”“나한테만 그러지 말고 너도 절제해. 목에 난 흔적이 가려지지도 않아.”지금의 고다정은 약간 야한 농담에도 얼굴을 붉히던 10년 전의 고다정이 아니다.지금의 그녀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역습한다.임은미도 말문이 막히지 않았나.그녀는 채성휘와 자주 싸우지만 둘 사이의 감정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었다.그녀가 코웃음을 쳤다.“네가 이겼어. 이제 너를 쉽게 놀리지 못하겠어.”그녀는 말하면서 고다정과 어느 가게에 들어갈지 사방을 둘러보는데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시야에 들어왔다.“다정아, 저기 하윤이 아니야?”“하윤이?”고다정이 놀라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정말 멀지 않은 곳의 레스토랑에 하윤과 깔끔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
이 말을 들은 하윤은 즉시 고다정의 말에 흥미를 보였다.“저, 오빠, 그리고 이모 세 사람 외에 또 있어요?”그녀는 의문스레 고다정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때 아빠, 엄마를 맺어주려고 애쓴 사람이 또 있나?그런데 그녀가 말하자마자 고다정이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일 줄이야.“그래, 너와 오빠, 이모가 도와준 걸 말하는 거야. 그때 너희 셋이 나랑 너희 아빠를 맺어주려고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 그러니까 너 혼자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 이뤄지기 힘들지 않겠어?”“좀 일리가 있네요.”갑자기 엄마한테 설득당한 하윤이 무심코 말했다.“그럼 엄마랑 이모가 좀 방법을 생각해 주세...”‘요’자를 내뱉기 전에 그녀는 씩씩거리며 또 한 번 엄마를 째려보았다.“또 엄마한테 걸려들었어요.”고다정은 이번에는 정말 참을 수 없어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계집애, 어렸을 때와 똑같이 잘 속아.”그녀는 너무 웃어서 눈물까지 나왔다.이를 보고 화가 난 하윤이 손을 뻗어 고다정을 간지럽히려 했다.“엄마 나빠요.”그렇게 모녀는 온천에서 웃고 떠들었다.이쪽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남자 노천탕은 썰렁했다.“자식,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크면 클수록 얄미워.”옆방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여준재는 눈앞의 두 아들이 보면 볼수록 눈에 거슬렸다.하준이 판에 박은 것 같이 똑같은 표정으로 아빠를 힐끗 쳐다보더니 시큰둥하게 말했다.“피차일반입니다.”하민은 형과 아빠가 티격태격하자 조용히 구석에 숨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서 지위가 가장 낮다는 것을 알았다.여준재는 막내아들의 속마음을 모른 채 자기한테 말대꾸하는 큰아들을 보며 문득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너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허구한 날 남의 마누라를 생각하지 말고 네 마누라를 찾아. 아니면 네 할머니한테 맞선을 주선하라고 할까?”그렇다. 여준재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하준을 결혼시키는 것이다.‘이 자식이 자기 마누라가 생기면 더 이상 내 마누라를 생각하지 않겠지.’하준이 그의 생각을 모를
그날 저녁 여씨 삼남매는 결국 남아서 고다정을 축하해 주었다.식사가 끝난 후 임은미는 두 딸을 데리고 떠나갔다.가기 전에 그녀는 고다정과 내일 오후에 같이 쇼핑하기로 약속했다.임은미를 보낸 후 다섯 식구는 남녀가 분리된 온천 노천탕에 갔다.고다정은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느긋한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인가.그녀가 눈을 감고 즐기고 있을 때 어깨 위에 갑자기 손이 올라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주물렀다.고개를 돌려 보니 둘째 딸이 그녀의 뒤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엄마...”“왜?”고다정이 나지막이 묻자 하윤이 바짝 붙으며 말했다.“엄마가 아빠한테 사정 좀 해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고다정의 환심을 사려고 방긋 웃었다.“오늘 엄마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아빠의 계획을 제가 망쳤으니 아빠가 틀림없이 내일 저한테 일을 시킬 거예요.”그녀가 이렇게 단언하는 원인은 그동안 이런 일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학교 다닐 때는 그녀가 엄마한테 너무 달라붙는다고 아빠가 그녀를 속여 공부를 많이 시켰다.후에 점차 크고 오빠가 폭로해서야 그녀는 아빠의 꾀에 넘어갔다는 것을 알았다.고다정은 고민 가득한 딸애 얼굴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이 계집애는 어릴 때부터 말을 잘 듣지 않았는데, 매번 아빠의 권위에 도전했다가, 결국 비참하게 혼쭐이 나고 불쌍한 모습으로 엄마를 찾아왔다.“이제야 두려워? 이모를 꼬드길 때는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생각 안 했어?”“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요. 엄마가 원래 여가 시간이 많지 않은데 아빠가 항상 엄마를 차지하니까.”계집애는 말하면서 고다정의 어깨를 껴안고 또 응석을 부렸다.애교 공세에 당할 수 없는 고다정은 이내 동의했다.하윤은 기쁜 나머지 고다정을 안고 뽀뽀하더니 배시시 웃었다.“역시 엄마밖에 없어요.”“너도 참, 빨리 온천에 몸을 담가.”고다정이 말하면서 그녀를 잡아당겨 노천탕에 앉혔다.그러나 하윤은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그녀는
한편, 서쪽 외곽에 위치한, YS그룹에서 개발한 온천 리조트에 세련된 곡선미를 자랑하는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도착했다.차가 천천히 입구에 멈춰 서더니 검은색 수작업 맞춤 양복을 입은 여준재가 차에서 뛰어내렸다.똑바로 선 후 그는 돌아서서 허리를 살짝 굽히더니 차 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준수한 얼굴에서는 꿀 뚝뚝 다정함이 넘쳐흘렀다.“부인, 도착했습니다.”검은색 여성 정장 차림의 고다정이 가늘고 예쁜 손을 우아하게 여준재의 손바닥 위에 얹더니 차에서 내렸다.지금의 그녀는 풋풋함을 벗은 대신 카리스마와 여유가 넘쳤다.옆에 있던 매니저가 알랑거리며 그녀를 맞이했다.“사모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건 저와 직원들의 작은 성의입니다. 인류 의학에 공헌한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말하고 나서 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넸다.사방에서 박수와 축하가 쏟아졌다.“축하드립니다, 사모님.”“사모님, 진짜 대단하십니다!”“사모님은 제 롤모델입니다!”이 말을 듣고 고다정은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감사합니다.”옆에 서 있는 여준재도 눈에 자랑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뒤이어 두 사람은 매니저의 안내로 룸에 들어섰다.룸에는 이미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준비돼 있었다.두 사람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있을 때 가방 속에 있는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임은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은미야, 무슨 일이야?”고다정이 전화를 받았다.옆에 있던 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두 눈을 가늘게 떴다.고다정을 쳐다보던 그는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고다정의 표정을 보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제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은미가 축하 파티를 준비했다고 오래요.”“은미 씨는 인터넷을 안 본대요?”여준재가 답답한 듯 한마디 했다.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분명 고다정은 그의 아내인데, 지난 12년간 그는 아내와 단둘이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궐에서 전하를 만나는 것보다 어려웠다.안팎에 강적이 있는 데다 고다정이 그동안 암세포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어느새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12년간 지도층이 바뀌고, 많은 연예인이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심지어 국제 정세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등 많은 일들이 발생했지만 여준재와 고다정의 애정 전선은 변함이 없었다.현재 두 사람은 주변에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잉꼬부부가 됐다.사람들이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은 금실이 좋은 것도 있지만 잘생기고 철이 든 아들딸을 두었기 때문이다.지금 여씨 가문의 큰 도련님, 아가씨, 작은 도련님 얘기가 나오면 엄지척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특히 여하준은 1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도와 두 회사를 관리하고 있다.물론 여하윤도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콘서트홀에서 연주했을 정도로 뛰어나다.그리고 여씨 가문의 작은 도련님은 형, 누나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어려서부터 말솜씨가 좋아 많은 귀염을 받았고, 지금은 연예계 인기 아역 스타다....운산공항 로비의 스크린에 최신 국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12년 만에 암세포를 죽이는 약을 개발해 낸 고다정 교수님의 교베르 의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이는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연구 성과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암을 두려워할 필요도, 암 얘기에 놀랄 필요도 없게 됐습니다.”뉴스 진행자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최근 몇 년 고다정 연구팀의 약물 연구 덕분에 암세포 억제제가 꾸준히 개진되긴 했지만 암세포를 철저히 소멸할 수는 없어 암에 걸린 후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이 뉴스는 방송되자마자 많은 행인의 주의를 끌었다.인터넷에서도 큰 화제가 됐고 고다정에 대한 축복이 쏟아졌다.[고 원장님이 해낼 줄 알았어!][너무 기쁜데 어떡하지? 우리나라를 빛낸 고 원장님을 지지하기 위해 약방에 가서 그 회사 약들을 대량 구매할 거야.][나도. 우리 집에는 환자가 없지만 이 약들을 필요한 기관에 기증할 수 있어!][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네. 그때 고 원장님이 안 된
열 몇 시간 후 비행기는 드디어 평온하게 착륙했다. 여준재가 낮은 소리로 옆에서 달게 자는 아내를 깨웠다.“여보, 일어나요.”그 소리에 고다정이 눈을 뜨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낯선 환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여기 어디예요?”“아직 비밀이에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알 거예요.”여준재는 그녀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을 나섰다.그들을 마중 나온 차량이 벌써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차에 탄 후 고다정이 또 한 번 참지 못하고 물었다.“우리 지금 어디 가요?”“먼저 밥 먹으러 가요. 지금 너무 배고프죠?”여준재가 기사에게 근처의 가장 좋은 레스토랑으로 가자고 말했다.고다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할 때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이렇게 장시간 비행한 까닭에 확실히 배가 고팠다.레스토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웨이터의 안내에 따라 룸에 들어갔다.주문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레스토랑 직원이 예쁘게 플레이팅된 음식들을 들여왔다.훈훈하고 달콤한 분위기 속에서 여준재가 고다정의 식사를 챙겼다.이때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는데, 국내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엄마, 아빠랑 같이 어디 갔어요?”쌍둥이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이 목소리를 들은 고다정은 갑자기 뜨끔했다.“컥컥, 엄마랑 아빠가 일이 있어서 외출했어. 며칠 뒤에 돌아오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잘 듣고. 알았지?”“흥! 엄마랑 아빠가 둘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몰래 나간 거잖아요.”쌍둥이가 직접 고다정의 거짓말을 폭로했다.고다정은 무안해하며 도와달라는 듯 여준재를 바라보았다.당연히 아내 편인 여준재는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아빠와 엄마가 신혼여행 중이야. 돌아갈 때 너희 선물을 사 갈게.”말하고 나서 그는 직접 전화를 끊어버렸다.전화기 건너편에서 신호가 끊긴 스마트워치를 바라보는 쌍둥이의 앳된 얼굴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아빠 나빠.”“너무 나빠!”쌍둥이는 아빠한테 잔뜩 화가 났다.이때 임은미가 오더니 그들의 안색이 안 좋은
이 말이 나오자 고다정과 임은미는 서로 마주 보며 웃더니 손을 잡고 무대 옆으로 나와 하객들을 등지고 섰다.“부케를 받은 사람은 내년에 솔로 탈출합니다.”두 사람이 부케를 던진 후 뒤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자가 입을 열었다.“부케를 누가 받았는지 신부님들 뒤를 돌아보세요.”고다정과 임은미는 두 젊은 아가씨가 부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축복의 말을 건넸다.“두 분도 내년에 행복을 찾길 바랍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두 아가씨가 감사 인사를 했다.사람들 뒤에 서 있던 구남준은 속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분명 자기도 동작이 빠른데 부케를 하나도 받지 못하다니. 설마 평생 혼자 살 운명인가?...결혼식이 끝난 후 신혼방으로 돌아온 두 사람.“피곤하죠? 좀 쉴래요?”여준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아니요. 방금 결혼식장에서 잠깐 쉬었더니 지금 괜찮아요. 당신 먼저 옷부터 갈아입어요.”고다정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알았어요. 고생했어요, 여보.”순간 여준재가 고다정을 꽉 껴안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여준재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고다정은 황급히 그의 입술을 피하더니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아직 밤도 아닌데, 이미지에 좀 신경 쓰세요.”“당신 앞에서 무슨 이미지에 신경 써요? 당신을 안고 자려는 것뿐인데.”여준재는 이 말을 듣고 억울한 표정으로 고다정을 바라보았다.“알았어요. 놀리지 않을게요.”여준재의 불쌍한 모습을 보고 고다정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당신은 웃을 때 진짜 예뻐요.”여준재가 넋이 나간 듯 고다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당신도 참.”그의 칭찬에 고다정은 얼굴이 더 빨개졌다.여준재는 고개를 숙이더니 고다정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고다정은 피하려고 했지만 여준재가 그녀를 꽉 껴안고 반항하지 못하게 했다.키스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고다정이 호흡 곤란이 올 정도가 돼서야 여준재는 그녀
결혼식 현장은 환상적이었다.전 세계 명문가에서 대표를 파견해 참석했다.이렇게 많은 유명인들 앞이라 고다정과 임은미는 몹시 긴장했다.“준재 씨, 좀... 긴장돼요.”가볍게 입술을 깨물며 여준재를 쳐다보는 고다정의 눈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수줍음과 기대감도 보였다.“괜찮아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게요.”여준재가 약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긴장 풀어요. 당신은 신부 노릇만 잘하면 돼요. 다른 건 다 저한테 맡겨요.”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마음이 놓이는 대신 열정이 넘치고 약간 기대도 됐다.“신부가 진짜 예쁘네.”“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신부네 집안도 보통이 아니래. 여씨 가문이 더 번창하겠어.”하객들이 쑥덕거렸다. 그중 고다정을 부러워하는 상류층 부잣집 따님도 적지 않았다.오늘 여준재는 유난히 멋있었다. 매끈한 양복 차림에 준수한 외모가 불빛 아래에서 유달리 돋보였다.고다정은 여준재와 팔짱을 끼고 사람들의 부러운 눈빛 속에서 천천히 버진로드의 종점을 향해 걸어갔다.두 사람이 무대에 선 후 채성휘와 임은미가 뒤늦게 입장했다.이들 둘도 버진로드를 따라 행진해 여준재와 고다정의 옆에 섰다.결혼식 사회자는 두 쌍의 신랑 신부가 모두 입장한 것을 보고 결혼식의 시작을 알렸다.“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결혼식을 시작합니다!”이 말이 끝나자 무대 아래의 하객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하객분이 증인이 되어 두 쌍의 신랑 신부가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도록 축복해 주시길 바랍니다.”사회자의 말에 무대 아래에서 또 한 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여준재 씨는 옆에 있는 아름답고 우아한 신부를 아내로 맞아 평생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돌보기를 원합니까?”사회자가 웃음 띤 얼굴로 무대 위에 서 있는 여준재를 보며 물었다.“물론입니다!”여준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한 후 확고한 눈빛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