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당신을 가주로 뽑았는지 알아?”유라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권위적인 표정으로 마크를 바라보았고, 고개를 숙인 마크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하지만 그의 얼굴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다지 정직하지 않았다. 유라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마크의 눈 밑으로 번쩍이는 광채가 스쳐 지나갔다.이윽고 마크는 긴장한 듯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모, 모릅니다.”유라는 이런 그의 모습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마크는 가문에서 겁쟁이에 무능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가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머리를 밟고 올라설 수 있을 정도였다.“내가 가주 자리를 넘겨줬지만 그래도 앞으로 가문의 발전은 내가 결정할 테니 당신은 내 계획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만 하면 돼, 알겠지?”유라 역시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마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알아들었다니 다행이네. 앞으로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방식 잘 알지? 최근 아내가 어린 딸을 낳았다고 들었는데, 금방 세상에 태어난 아이에게 인간 세상의 험악함을 알려주는 건 당신도 원하지 않을 거야, 그렇지?”유라가 위협적인 표정으로 마크를 바라보자 그는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면서도 얼굴만은 겁쟁이 같은 표정으로 정중하게 말했다.“네, 그렇습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좋아, 가자. 오늘은 승계 첫날이니 많은 사람들이 축하하러 올 거야. 가서 즐겨.”유라는 나가라고 손짓하며 내보냈고, 마크가 떠나자 다시 입을 열었다.“사람 보내서 가족들 잘 감시하라고 해.”“네.”디카프리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며칠이 지나고 6월이 되자 두 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었다.이른 아침 네 식구는 일찍 일어났고, 그 사이 여진성 부부도 격식 있게 차려입고 저택에서 이곳까지 달려왔다.여진성은 큰 키와 어울리는 빈티지한 노란 양복을 입었는데, 진지한 표정은 그 옛날 황제처럼 위엄있어 보였다.반면 심해영은 형언할 수
인터넷에 떠도는 소식이 여준재의 귀에 빠르게 전달되었고, 옆에 있던 구남준이 물었다.“대표님, 사람 시켜서 기사 내리라고 할까요?”“아니, 괜찮아.”여준재는 거절했다.크게 별일도 아니었고, 마침 다른 사람들에게 여씨 가문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면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이에게 화살을 돌리는 걸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두 아이가 학교에 들어서자 여준재는 기분이 들떠 있는 부모님을 바라보며 말했다.“준이 윤이 시험 끝나려면 아직 두 시간 남았으니까 근처 카페에 가서 잠깐 있다가 거의 끝날 때 다시 와요.”“난 안 가. 여기서 준이 윤이 기다릴 거야.”심해영은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하며 슬쩍 경고하는 눈빛으로 옆에 있는 여진성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가지 말라는 분명한 의사에 여진성도 자연스레 맞춰주었다.이를 본 여준재는 못 말린다는 듯 웃고는 고개를 돌려 곁에 있는 고다정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아빠는 괜찮겠지만 다정 씨 생각도 해야죠. 아직 임신 중인데 너무 오래 서 있으면 몸에 안 좋아요.”그 말을 들은 심해영은 자신이 간과했던 것을 떠올리며 후회하는 듯 머리를 툭 때렸다.“어머, 미안해. 너무 흥분해서 순간 다정이 배 속에 아기가 있다는 걸 잊었어.”그러고는 여준재를 노려보며 그에게 책임을 돌리듯 질책했다.“넌 약혼자가 돼서 다정이를 왜 여기 서있게 해. 얼른 다정이 데리고 근처 카페라도 가지 않고 뭐 해?”여준재는 어리둥절했다.조금 전 그의 말은 고다정이 임신한 걸 빌미로 두 어르신이 다정이를 배려해 함께 카페에 가서 쉬자는 뜻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자신만 약혼녀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몰상식한 사람이 되었다.고다정은 옆에서 그런 여준재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녀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여준재를 끌어당기며 웃었다.“어머님, 아버님께서 여기 계시고 싶다 하니 그냥 두세요. 준이 윤이 생각해서 그러시는 건데, 이따 구남준 씨가 차 가져올 테니까 힘들면 차에서 잠시
점심이 다 되어서야 두 아이의 시험이 끝났고 학생들이 하나둘 학교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여씨 부부 내외 때문인지 고다정도 덩달아 긴장되었다.그녀는 여준재의 곁에 서서 까치발을 들고 학교 쪽을 바라보았다.여준재도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고는 재빨리 고다정의 잘록한 허리를 감싸며 당부했다.“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저기 우리 준이랑 윤이가 보이네요.”고다정은 문득 반가운 듯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준아, 윤아. 엄마 여기 있어.”“엄마, 아빠!”두 아이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재빨리 달려왔다.물론 그들 옆에 한껏 긴장한 얼굴로 서있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인사를 건넸다.인사가 끝난 뒤 네 명의 어른들은 성적에 대해 일절 묻지 않고 두 어린이를 데리고 근처 식당에 갔다.“우리 준이, 윤이, 많이 먹어. 오늘 수고했어.”심해영은 계속해서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두 아이에게 집어줬다.두 아이는 입 주변에 묻힌 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다.분위기는 아주 훈훈했다.뒤늦게 식사를 마친 뒤 고다정은 그제야 시험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혹시 선생님이 성적 결과가 언제 나온다고 말해줬어?”“이미 나왔어요. 저랑 오빠가 모두 만점으로 시험에 통화했다면서 여름방학이 끝나면 학교에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 하셨어요!”두 아이는 뜸도 들이지 않고 선생님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사실 오늘 시험을 본 대부분의 학생이 시험에 통과했다.유치원에서 초등학교로 진급하는 시험이라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그래도 세 어른은 한껏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기뻐했다.“와, 우리 준이, 윤이 정말 대단하네.”하지만 여준재는 이러한 광경이 너무 웃겼다.특히 평소에 무뚝뚝하고 점잖던 아버지와 옆에서 같이 환호를 지르는 어머니, 거기에 고다정까지 보고 있으니 무슨 말해야 할지 몰랐다.고하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칭찬을 듣고 득의양양해서는 웃으며 말했다.“기뻐할 일이 더 있어요. 저랑 오빠는 개학하면 선생님께 월반 시험도 보겠다고 할 거예요.”“
고다정의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암흑 그 자체였다. 여준재가 조사한 내용 따르면 고다정은 어렸을 때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고경영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강수지는 비록 고다정에게 사랑을 베풀었지만 그녀도 워킹맘이라 대부분의 정력을 회사에 쏟다 보니 고다정에게는 항상 소홀했다.하여 고다정은 공부를 통해 어머니의 관심을 사려고 학년 1등은 놓친 적이 없었고 월반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그러면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끊임없이 공부하며 보냈고 즐거움이란 뭔지 모르고 자라왔다.돌아가는 길에 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얼굴빛을 흐리며 말했다.“고경영, 그 사람을 단순히 감옥에만 보내면 안 됐어요.”예전의 고다정은 정말 마음이 여렸다.이렇게 아내를 죽이고 딸을 해친 쓰레기는 마땅히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게 해야 하는데!여준재는 곁에서 순간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 고다정을 보고는 단번에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고 미소를 지었다.“걱정하지 말아요. 어차피 감옥에서도 잘 지내지 못할 겁니다.”고다정은 어리둥절해하다가 그녀도 같이 웃었다.맞는 말이다. 여준재가 어떻게 자기 여자를 괴롭혔던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두겠는가.아무리 그녀의 아버지라고 해도 어림없다. “고마워요.”고다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대로 여준재의 허리를 감쌌다. 그리고 가볍게 그에게 입을 맞췄다.“이건 포상.”여준재도 그녀를 향해 웃음을 짓다가 눈썹을 살짝 치켜들며 일부러 삐진 척 물었다. “겨우 이거요?”“모자라요?”고다정은 다시 그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눈앞의 아리따운 용모를 한 여자를 보더니 지금 안 한 지 거의 3개월이 다 되어가는 여준재는 침 한번 꿀꺽 삼키고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히 아쉽긴 하죠.”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한 손으로 고다정의 뒤통수를 감싸고 고개를 숙여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그렇게 서로의 입술이 맞닿았다.고다정은 눈을 살짝 뜨고 눈앞의 잘생긴 이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다시 눈을 감고 팔을 여준재의 목에 휘감
“좋은 소식을 전하러 왔어.”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한 모금 마시던 성시원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고다정은 그의 태도 변화에 여준재와 시선이 마주쳤다.하지만 여준재는 그녀에게 고개를 저으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다.역시나 성시원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M 국의 특효약보다 더 좋은 효능을 가진 새로운 종류의 특효약을 개발했다고 말했던 걸 기억해? 이전에 임상 시험하는 곳으로 보냈었는데 반년이 지난 지금, 임상 시험 데이터가 매우 성공적이어서 이미 생산 허가도 받게 되었어. 앞으로 두 달만 지나면 국내에도 우리만의 특효약이 있게 될 것이고 더 이상 비싼 돈을 주고 M 국의 특효약을 살 필요가 없어!”성시원의 눈빛은 환희로 가득 차 있었다.고다정은 그의 모습을 보고는 비록 예전의 기억은 아직 없지만 이 일이 기쁜 일이란 건 알고 있었다.외할머니가 뇌암 환자여서 암세포 억제제 구입에 대해 알아봤고, M국과 본국에서 구입에 대해 많은 조항을 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이건 그렇다 치고, 하필이면 약 한 병의 가격은 2천만 원도 넘어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었다.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본국에 그들만의 특효약이 나왔고 심지어 효과는 M국의 약보다 더 좋아 앞으로 그들이 도리어 사정하면서 사 갈 것이다.이때, 성시원의 약간 상기된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하마터면 중요한 일을 잊어버릴 뻔했네. 이틀 뒤에 나랑 함께 M국 가서 교베르 시상식에 참석해야 해. 특효약이 임상시험에 들어갔을 때, 사람을 시켜 약을 국제의약국에 보냈는데 글쎄 교베르 창작자 상을 받게 되었대!”“진짜예요? 우리 이 특효약이 진짜 창작자 상을 받게 되었다고요?”고다정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여준재도 어리둥절했다.다른 게 아니라, 교베르 상은 국제적으로 가장 영예가 높은 의학상이다. 보통 여기의 상을 받는 사람은 모두 의학계의 최고 거물이라고 할 수 있다.성시원은 놀란 얼굴을 한 두 사람을 보더니 그들이
M 국에 도착해보니 이미 12시간이 지난 뒤였다.두 아이는 이미 지쳐 고다정과 여준재의 품에 안긴 채 깊은 잠에 빠졌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성시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들었는데 교베르 주최 측에서 이번에 우리를 직접 차로 데리러 온대.”고다정을 포함한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인 뒤 그를 따라 공항 밖으로 나왔다.나오자마자 웬 전형적인 M 국 사람일 것 같은 남자가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성시원을 향해 다가왔다.“성 교수, 오랜만이야. 이렇게 다시 만나서 너무 기뻐!”남자는 말을 마치자마자 성시원을 크게 안아줬다.성시원도 미소를 짓더니 같이 포옹했다.그러다가 얼마 안 지나 그 남자한테서 급히 떨어지더니 대뜸 물었다. “호준아, 오랜만이야. 근데 네가 마중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놀랐지. 내가 특별히 마중 나오고 싶어서 어렵게 기회를 뺏어왔지.”백호준은 성시원에게 눈을 한번 찡긋하더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말을 마친 뒤 그제야 성시원 뒤에 서있는 사람들을 보고 감탄했다.“와, 정말 아름답고 잘생긴 젊은이들이네. 혹시 모두 네 제자들인가? 너무 행복하겠다.”평소 이쁘장하게 생긴 건 다 좋아하는 사람이라 그의 과장된 말투를 듣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성시원은 순서대로 고다정과 채성휘를 소개해 줬다.“이 두 사람만 내 제자야. 여기는 고다정, 그리고 여기는 채성휘. 이분은 두 사람의 가족이야.”여준재와 임은미까지 소개를 마친 성시원은 잊지 않고 자기 친구도 소개했다.“이 사람은 백호준, 내 친구야. 그리고 09년도 교베르 의학상 수상자이고.”“저도 메르즈병의 최초 발견자이자 치료 과정을 만든 창시자인 백호준 교수님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 발표하신 모든 의학 논문도 열심히 봤었고요.”채성휘는 팬심이 가득한 얼굴로 백호준을 바라보았다.백호준은 전혀 놀란 기색이 없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별말씀을요. 아니면 제 밑으로 전입하는 건 어때요? 마침 최근에 학생들이 모두 졸업했거든요.”“백 교수님께서
“주최 측에서도 지금 스미스 가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습니다. 근데 그쪽에서 추궁하기 시작하면 아마 그 시상식은 취소될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란 사실이 밝혀져야 다시 평가에 들어갈 수 있다지만 그러면 이번 연도 시상식은 때를 놓치게 되어 다시 4년 뒤를 기다려야 하니까요.”백호준은 자신이 추측한 내용들을 말했다.하지만 스미스 집안은 전 M 국의 특효약을 장악하고 있는 대가문이었다.말을 듣고 있던 성시원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이 벤저민은 여전히 주최 측의 빈틈만 파고드네.”고다정은 그들의 걱정을 단번에 눈치챘다. 만약 스미스 가문에서 이 일에 대해 추궁하기 시작하면 이 상장은 분명 그 벤저민이라는 사람 손에 넘어갈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답했다.“스승님, 우리 쪽에서도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확실히 미리 준비해야겠어요.”채성휘도 맞장구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람이 상장을 채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성시원은 진지해진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그쪽에서 먼저 수를 쓰기 시작했으니 우리도 맞장구쳐줘야지. 혹시 애초에 왜 우리가 이 특효약을 개발했던지 기억해?”“기억해요. 우리나라 모든 암 환자들이 억제제를 사용하고 적은 돈으로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잖아요.”채성휘가 엄숙한 얼굴로 답했다.그의 단어 하나하나가 결의와 끈기로 가득 차 있어서 가만히 듣고 있던 고다정과 임은미도 같이 격앙되기 시작했다.하지만 여준재는 오히려 눈빛을 반짝이며 성시원을 보고 말했다.“어르신은 특효약의 제조법을 공개할 것입니다.”여준재는 결의에 차서 말했다.성시원도 그의 생각을 짐작하고는 부정하지 않았다.“사실 이 일에 대해서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원래는 상을 받은 후에 공개하려고 했지만 누군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를 해치려고 한다면 나중에 말할 필요가 없겠지. 만약 스미스 쪽에서 진짜 벤저민을 도와 우리 쪽의 트집을 잡
“그들도 분명 동의할 겁니다.”채성휘는 진지한 눈빛으로 답했다.고다정은 그의 안색이 수상해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집 사적인 일이라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자기 동료이자 제자인 그에게 충고 한마디는 해야 했다.“저랑 은미는 친자매나 다름없어요. 또한 제 세 아이의 두 번째 엄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 제 사람을 만약 채 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괴롭힌다면 결과가 어떨지는 익히 알 거로 생각합니다.”“알아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채성휘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짐했다.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엘리베이터도 멈췄다.임은미는 자신을 걱정해 주는 친구랑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고 그들의 손을 한 손씩 잡더니 웃으며 말했다.“됐어, 두 사람이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나도 알아. 근데 지금 이 장소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 더구나 지금 우리는 잘 쉬고 오후에 놀러 나가는 게 제일 중요해. 아까 어르신께서도 우리한테는 오늘 반나절밖에 놀 시간이 없다고 하셨잖아.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이 일이 끝나야 시간이 있을 것 같아.”고다정과 채성휘는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임은미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여준재는 고하윤을 안고 맨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는데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고다정이 기억을 잃어도 임은미와의 관계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복도에서 헤어졌다.스위트룸에 들어서자 여준재와 고다정은 안고 있던 아이들을 조심스레 침대에 눕혔다.두 아이가 곤히 잠든 모습을 보더니 고다정은 참지 못하고 그들의 이마에 뽀뽀한 뒤 낮은 소리로 여준재에게 말했다.“너무 깊게 잠들어서 우리가 이렇게 대화해도 깨지 않네요.”“비행기 타는 것도 힘든 일인데 어제 늦게까지 놀았으니 당연히 오늘에는 깊게 잘 겁니다.”여준재는 말을 마친 뒤 외투를 벗고 욕실로 향했다.“다정 씨도 피곤할 텐데 제가 욕조에 물을 받아놓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