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 너머 육성준은 몇 초 동안 침묵했다.고다정이 자신을 거절하는 거라는 걸 알았지만 여기서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처음 고국을 떠나 먼 곳으로 떠났을 때 육성준은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사라질 줄 알았다.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도전할 기회가 생긴 이상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지금 마음이 무척 괴롭다는 거 알아. 당분간은 다른 사람과 새로운 만남을 시작하는 걸 받아들일 수 없겠지. 그렇다 해도 난 상관없어. 네 곁에서 함께 이 힘든 나날을 이겨낼게. 다만 생각 정리되면 그땐 나를 가장 먼저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전화기 속 육성준은 진심을 담아 얘기했고, 고다정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녀는 생각 끝에 육성준이 더 이상 오해하지 않도록 진실을 알려주기로 결심했다.“그게, 사실 나랑...”“됐어, 말하지 마. 내 마음은 정해져 있어. 지금 네가 날 거절해도 난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내가 여준재보다 낫다는 걸 행동으로 증명할 거야.”고다정의 거절이 두려워진 육성준은 그녀의 말을 가로채고는 전화를 끊었다.고다정은 무기력함과 고통이 뒤섞인 표정으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언젠가 꼭 시간을 내 육성준에게 이 일에 대해 제대로 알려줘야겠다.눈 깜짝할 사이에 또 한 주가 지나갔고, 강말숙이 충격을 받을까 봐 고다정과 여준재는 일단은 헤어진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하지만 종이로 불을 감쌀 수는 없는 법.특히 그동안 여준재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결국 이날 강말숙이 참지 못하고 이렇게 물었다.“다정아, 준재는 요즘 바쁘니?”그 말에 고다정과 강말숙 곁에 있던 두 어린아이 모두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두 아이는 서로를 쳐다봤고, 하윤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준이가 손을 뻗어 덥석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하윤이는 불만을 품은 듯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강말숙은 아이들의 이런 행동을 전부 눈여겨보고 있었고, 조용히 고다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VIP 고급 병동.고다정이 나간 뒤 강말숙의 시선이 두 어린아이에게 향했다.“말해봐, 너희들 엄마가 나한테 숨기는 게 뭐야?”두 아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윤이는 할머니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은 듯 의견을 구하는 눈빛으로 오빠를 바라보았지만 역시나 전처럼 거절당했다.하준이는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할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엄마가 할머니한테 뭘 숨기겠어요.”아이가 그럴수록 강말숙의 마음속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그만해, 여기서 내 눈 속일 생각 마. 너희 둘을 내 손으로 키웠는데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다 알지. 혹시 엄마랑 아빠 싸웠어?”강말숙은 짐작하고 있던 바를 얘기했고, 두 아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순간 강말숙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게다가 엄마 회사는 줄곧 너희들 아빠가 맡아서 처리하고 있는데, 지금은 회사 일을 엄마가 직접 처리하는 게 이상하지 않니?”이 말에 두 아이는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고, 결국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엄마랑 아빠가 싸워서 헤어졌대요.”“헤어져?!”강말숙은 충격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에 고다정에게 일이 생겼을 때도 여준재는 고다정을 찾는 걸 포기한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고작 싸웠다고 헤어진 게 말이 되나.두 꼬마는 이런 강말숙의 속마음을 모르는지 강말숙의 곁으로 다가와 두 눈을 깜박이며 말했다.“할머니, 우리는 아빠랑 엄마가 헤어지는 게 싫어요. 아빠랑 엄마가 싸우지 않을 방법이 없을까요?”정신을 차린 강말숙은 두 아이의 기대에 찬 눈빛을 마주하며 말했다.“이따가 엄마 돌아오면 할머니가 무슨 일인지 물어볼게.”“그럼 할머니, 절대 우리가 알려줬다는 거 말하면 안 돼요. 안 그러면 엄마가 우리 혼낼 거예요.”하준이는 강말숙에게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강말숙은 그런 아이를 흘끗 쳐다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한편 고다정은 화영과 함께 회사로 향했
“아니, 그래도 아직 좀 불안해.”유라는 편안한 자세로 바꾸며 턱을 괸 채 말했다.“이렇게 하자. 한 가지만 더 해봐.”그녀는 디카프리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며 말했다....그날 저녁, 고다정은 회사 업무를 마친 뒤 쉬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갔다.원래는 외할머니와 함께 저녁을 먹은 다음 두 아이를 데리고 갈 계획이었다.그렇게 병실에 들어서는데 외할머니가 혼자 계셨다.“외할머니, 준이랑 윤이 어딨어요?”고다정이 묻자 강말숙은 그런 고다정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표정이 돌변하며 옆에 있던 찻잔을 그녀에게 집어 던졌다.“고다정, 내가 네 외할머니가 맞긴 하니? 준재랑 헤어지는 그런 큰일을 어떻게 나한테 말도 안 해. 어른인 내가 안중에 있기는 해?”외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호통에 고다정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이윽고 정신을 차린 고다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외할머니를 바라보았고, 외할머니는 눈치를 주면서도 계속해서 그녀를 질책했다.“남들 다 보는 앞에서 준재를 찔렀는데도 준재는 널 정신병원이 아니라 요양원에 보냈는데, 그게 이렇게 성질부릴 일이야? 내가 볼 땐 평소에 준재가 널 너무 오냐오냐해서 네가 이렇게 된 거야! 이번 일은 네가 잘못한 거니까 당장 준재한테 가서 사과해!”그 말을 듣고서야 고다정도 눈치를 채고 잔뜩 흥분한 채 대꾸했다.“내가 일부러 준재 씨를 찌른 것도 아닌데 왜 사과를 해요! 됐어요,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돌아갔다가 다음에 또 보러 올게요.”말을 마치고 뒤돌아 떠나는데, 막 병실을 나서기 바쁘게 안에서 외할머니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럴 필요 없다. 준재랑 화해하기 전까지 날 보러 올 생각 마!”이 말을 들은 고다정은 입술을 꾹 다물고 주변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뒤로한 채 병원을 나섰다.돌아오는 길에 외할머니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어때, 할머니 연기 잘하지?][어떻게 알았어요?]고다정이 호기심에 묻자 외할머니가 말했다.[오후에 심 여사가 준이, 윤이 데리러 왔을 때 너희들 안부를 물었더니 심 여사가
다음 날 이른 아침, 고다정은 두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성시원의 임시 거처로 갔다.그녀를 본 성시원은 다소 놀란 모습이었다.“왜 이렇게 일찍 왔어?”“스승님한테 사람 좀 빌리려고요.”고다정은 성시원에게 방문 이유를 숨기지 않고 어제 있었던 교통사고에 대해 이야기했다.이 말을 들은 성시원은 다소 어두운 표정이었다.“이런 일은 여준재가 처리해야 하는 거 아닌가?”불쾌한 표정을 짓는 스승님의 모습을 보며 고다정도 스승님의 마음을 알았는지 옅은 미소를 지었다.“준재 씨 때문이긴 해도 저를 괴롭히는데 아무 내색도 안 하면 오히려 만만하게 보지 않을까요?”말을 마친 고다정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어갔다.“걱정 마세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맞대응만 할 거예요. 전 선량한 시민이고 나쁜 사람 잡는 건 당연히 경찰 아저씨한테 맡겨야죠.”성시원도 일리가 있는 고다정의 말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이유 없이 괴롭히는데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결국 나 만만하니 괴롭혀도 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고다정은 스승님에게 빌린 호위대를 데리고 유라가 임시로 머무는 호텔로 곧장 향했다.호텔 프런트 직원은 위협적인 그들의 등장에 잔뜩 긴장했지만 그래도 프로페셔널하게 다가오는 고다정 일행을 향해 침착한 척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걱정 마세요. 사람 찾으러 왔는데 소란 피우지는 않을 테니까요.”프런트 직원의 불안한 모습을 본 고다정은 상대를 안심시킨 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그런데도 걱정되었던 프런트 직원은 서둘러 호텔 지배인에게 이를 알렸다.몇 분 만에 고다정은 유라가 있는 층에 도착했고, 고다정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복도를 지키고 있는 유라의 부하들이 보였다.부하 직원들도 고다정을 보고 서로 눈치만 보다가 그중 한 명이 고다정을 멈춰 세웠다.“고다정 씨 뭐 하시는 겁니까?”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고다정의 뒤를 돌아봤다.이윽고 고다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명령했다.“잡으세요!”그 말과 함께
유라도 당연히 밀어붙이는 고다정의 말뜻을 알아듣고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정말 내 부하들이 저 몰래 한 짓일 수도 있죠. 고다정 씨가 해명을 원하시니 반드시 만족스러운 대답을 드려야 할 것 같네요.”유라는 잠시 멈칫하다 말을 이어갔다.“실례지만 고다정 씨께서 제 부하중 누가 뒤에서 몰래 그런 짓을 했는지 말해 주시겠어요?”고다정은 그 말에 유라를 몇 초간 쳐다보다가 갑자기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보아하니 유라 씨는 이 문제를 사적으로 해결하려는 것 같은데, 안타깝지만 전 그럴 생각이 없네요. 할 말 있으면 경찰에게 하시죠.”“날 가지고 노는 거예요?”유라는 즉시 눈을 가늘게 뜨며 고다정을 위험하게 쳐다보았고, 고다정은 두 손을 벌리며 말했다.“내가 뭘 가지고 놀아요, 처음부터 경찰 불렀다고 했잖아요.”“...”유라는 말문이 막혔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좋아요.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니 우린 더 이상 할 말이 없겠네요. 나가주세요!”유라가 배웅하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고다정은 움직이지 않고 소파에 앉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유라 씨, 당신이 준재 씨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알아요. 제가 여준재 씨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라겠죠. 그렇지만 미리 말하는데, 예전 제 성격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저는 성격이 무척 안 좋아요. 조금이라도 위협을 받으면 백배, 천배로 갚아줄 겁니다.”이 말과 함께 방 밖에서 다음과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사건 담당 경찰입니다. 그쪽 보스를 만나러 왔어요.”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경찰이 왔으니 알아서 하세요.”말을 마치기 바쁘게 경찰이 문 앞에 도착했고, 고다정을 본 그들은 다소 놀란 표정이었다.“고다정 씨도 계셨네요.”“네, 이 외국인 아가씨에게 분명하게 전할 말이 있어서요. 이제 다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겠습니다.”고다정이 당당하게 말하자 경찰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고다정은 일행들과 함께 재빨리 호텔을 빠져나갔지만
정교한 룸 안에 고다정과 육성준이 마주 앉아 있었고, 식탁 위에는 고다정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차려졌다.밥 먹는 동안 육성준은 고다정을 살뜰히 챙겼다.“얼른 먹어. 여기 음식 제일 좋아했잖아.”육성준이 말하며 고다정에게 생선 한 점을 건넸다.“예전엔 여기 생선을 제일 좋아했던 것 같은데 먹어봐. 시간이 지나서 혹시 맛이 변했는지도 모르겠네.”“고마워.”고다정은 예의를 차리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에둘러 거절했다.“난 신경 쓰지 말고 너 많이 먹어.”육성준은 웃으며 말했다.“널 어떻게 신경 안 써.”육성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었던 고다정은 솔직하게 얘기하기로 했다.화영이 룸 주위를 살펴본 결과 카메라가 하나도 없었다.“성준아, 준재 씨랑 나 헤어졌다는 거 거짓말이야.”고다정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육성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거짓말이라고, 대체 왜?”그 말을 들은 고다정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상대를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어... 그게 다야.”말을 마친 고다정이 육성준을 바라봤지만 그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다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며 육성준이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잠시 후 겨우 고다정의 말을 이해한 그의 눈에는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감돌았다.‘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결말일 줄이야.’생각에 잠긴 육성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랬구나. 어쩐지 이별한 사람답지 않게 차분하다고 했어.”그런데 이 말을 들은 고다정이 눈썹을 치켜들었다.“내가 이별한 사람 같지 않아?”요즘 줄곧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다녔던 터라 고다정은 스스로 제법 실연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그런 고다정의 마음을 읽었는지 육성준은 웃으며 말했다.“별로 안 그래 보이긴 해. 겉으로 차갑게 굴긴 해도 슬픈 기색이 전혀 없거든.”이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고다정이 반박했다.“이별하면 꼭 슬퍼해야 한다고 누가 그래. 차분한 게 나빠? 요즘
고다정과 육성준은 환한 조명 아래서 과거의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며 식사를 했다.분위기는 유쾌하고 화기애애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식탁에 놓여 있던 고다정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러면서 화면 너머로 질투가 가득 담겨있는 메시지가 고다정 눈앞에 나타났다.[밥 먹은 지 2시간이나 지났어요. 밥알을 세면서 먹는 거예요?]그걸 본 고다정은 웃음을 참지 못했고, 육성준도 그녀의 눈빛 변화를 눈치채고 호기심에 목을 쭉 뻗었다.“여준재 씨가 메시지 보냈어?”“응, 밥 먹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네.”고다정은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하면서도 손으로는 멈추지 않고 여준재에게 조금 늦을 거라고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이를 본 육성준은 콧방귀를 뀌며 일부러 여준재를 비꼬듯 말했다.“왜, 지금 나랑 같이 밥 먹는 것도 뭐라고 하는 거야?”“그런가 봐. 너 때문에 위기감을 느낀 걸 수도?”고다정이 그를 힐끗 보았고, 육성준이 의기양양하던 찰나 귓가에 다시 한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근데 밥을 오래 먹은 건 사실이지. 지금 9시 다 되어가잖아. 나중에 시간 나면 은미도 불러서 같이 보자. 은미 말로는 예전에 셋이 자주 모였다는 데, 내가 기억 잃었다고 그걸 취소할 수는 없지.”맞은편에서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며 그녀의 말뜻을 모를 리 없었던 육성준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다음은 됐고, 그냥 지금 가고 싶다고 해. 돌아가서 네 남친이나 만나러 가.”마음을 들킨 고다정은 머쓱함에 코를 슥 만졌다.“이미 들켰으니 더 숨기지 않을게. 그럼 난 먼저 간다. 더 늦으면 질투쟁이 달래는 게 쉽지 않을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육성준을 향해 싱긋 웃었고, 육성준은 신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눈가에 씁쓸함이 스쳐 지나갔지만 얼굴엔 여전히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무심하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어서 가.”이를 본 고다정은 작별 인사를 하고 가방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룸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육성준의 얼굴에 담겼던 미소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질투에 가득 찬 여준재의 말을 들은 고다정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고개를 든 그녀가 검은색 반짝이는 눈동자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럼 나랑 한 끼 더 먹어요.”그 말에 여준재의 진지한 척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한결 부드러워졌다.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귓가에 고다정의 난감한 척하는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그런데 지금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헤어진 줄 알고 있는데, 준재 씨가 저랑 같이 가면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까요?”“난 준이랑 윤이 만나지도 못해요?”여준재는 품에 안긴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고다정의 계획에 동의한 것을 후회했다.그렇다, 그는 지금 후회하고 있었다.고다정의 계획에 동의한 이후 자신의 약혼녀와 아이를 만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유라를 상대하는 방법이 하나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 방법을 택했을까?곧 일행은 고다정이 임시로 찾은 아파트에 도착했다.하지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여준재는 고다정과 함께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그는 차고에서 10분 가까이 고다정이 메시지를 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집에 들어서자 향긋한 냄새가 밀려오며 고다정이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자, 마침 국수 다 됐으니까 가서 손 씻고 와서 먹어요.”여준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화장실로 갔다. 밖으로 나온 그는 거실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고다정을 보고 다가가 물었다.“준이랑 윤이는 어딨어요?”“애들은 벌써 자요. 국수 다 먹고 들어가서 애들 봐요. 애들이 며칠 동안 많이 보고 싶어 했어요.”고다정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여준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보고 싶은데 왜 날 만나러 오진 않았대요?”“그건 당연히 내가 속상할까 봐 그런 거죠. 애들 눈에 준재 씨는 이미 나쁜 아빠가 됐거든요.”당당하게 말하던 고다정은 여준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는 걸 보고 얼른 말을 돌렸다.“물론 당분간만 그런 거죠. 얼른 밥 먹어요. 방도 다 치웠으니까 오늘은 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