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방된 뒤 강승재는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대신 날 찾으러 갔다.당시 나는 박은우에게 나와 소원이를 아무 데나 안장해달라고 했다. 비석도 무덤도 필요 없고 그저 조용히 땅 밑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했었다.꽤 오래전 일이라 나조차 내가 어디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강승재는 날 찾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세영아... 세영아, 네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있을까?”그는 울먹거렸다.“만약 네 마음속에 여전히 내가 존재한다면 제발 널 찾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돼?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나는 그의 사과 따위 받고 싶지 않았다.늦은 사과 따위 필요 없었다.산속에서 3일을 헤맨 강승재는 너무 힘들어서 발을 들 수조차 없게 되자 팔을 이용해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알겠다...”강승재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아직도 내가 미운 거지? 내가 너와 소원이를 복수하지 않았으니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강승재는 날 찾지 못했지만 최나리는 쉽게 찾아냈다.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여자는 어딜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최나리를 단칼에 찔러 죽인 뒤 강승재는 그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게다가 강승재는 아픈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칼로 심장을 찌를 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세영아...”죽음을 앞둔 그는 여전히 내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세영아, 너랑 소원이를 위해서 복수했어... 그러니까... 이제 나 좀 용서해 주면 안 돼?”솔직히 얘기해 나는 강승재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았다.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감정 소모가 필요한 일이었다. 강승재는 내가 감정을 낭비해 가면서 원한을 품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게다가 나는 내 삶을 살아가야 했다.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했던 시스템이 어제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내게 물었다.나는 죽은 뒤면 당연히 시스템에서 벗어날
딸의 췌장암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남은 수명을 대가로 시스템에서 내 딸을 구할 수 있는 약 한 알을 받았다.남편은 제정신이냐면서 나를 타박하더니 몰래 그 약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 흉터를 치료하는 데 썼다.큰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남편은 한 점 부끄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나리는 연예인이 꿈이야. 걔 벌써 스물넷이야. 걔한테는 시간이 없어. 그리고 이 약 당신이 몸 팔아서 구한 거잖아. 그게 아니면 당신 같은 가정주부가 무슨 수로 이렇게 좋은 약을 구했겠어? 딸을 구하고 싶으면 다시 몸 팔아서 약을 구하면 되잖아. 한 번 더 몸을 팔면 뭐 죽기라도 해?”애석하게도 난 더 이상 약을 구할 수 없었다. 내게 더는 대가로 바칠 수명이 없었기 때문이다....거래가 성사된 뒤 시스템은 나머지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내게 일주일이란 시간을 주었다.첫날엔 약을 온전히 돌려받기 위해 기를 쓰고 강승재와 치고받고 싸웠다.둘째 날엔 딸의 병실 밖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강승재를 굳게 믿은 탓에 딸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너무도 한스러웠다.오늘은 셋째 날이다. 난 내가 이제 곧 죽으리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뒤 차분하게 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강승재가 내연녀의 손을 잡고 날 보러 왔을 때, 나는 고통을 참으면서 유서를 한 자 한 자 적고 있었다.망할 시스템은 내게 남은 수명을 거둬가게 되면 몸의 장기 역시 노화한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타자하는 것뿐인데도 손끝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마침 잘 왔네.”나는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애써 못 본 척하며 강승재에게 노트북 화면을 보여줬다.“변호사랑 얘기 마쳤어. 뭐 더 보충할 건 없는지 확인해 봐. 내가 살아있을 때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란 건 원래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버리니까.”“윤세영, 언제까지 그 지랄 떨 건데?”유언이라는 두 글자를 본 강승재는 버럭 화를 냈다.“겨우 약 한 알일 뿐이잖아. 왜 자꾸 당신
만약 내게 남은 수명이 있었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수명을 대가로 약을 받았을 것이다.그러나 내게는 4일밖에 남지 않았다. 겨우 4일로는 시스템에서 제공하는 가장 싼 물건도 얻을 수 없었다.강승재는 힘이 아주 셌다.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숨을 쉴 수 없었고 결국 눈앞이 깜깜해졌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병상 위에 누워있는 상태였다.“연기한 거지?”날 실신하게 만든 강승재는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당신 겨우 스물여섯이야. 여든여섯이 아니라고.”나는 더는 그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지금의 내겐 칼을 들어 최나리의 얼굴에 흉터를 남길 힘조차 없었다.“소원이 보러 갈 거야.”나는 버둥거리면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중심을 채 잡기도 전에 강승재가 날 밀었다.“소원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났어.”그는 날 힐끗 바라보았다.“약 가져오기 전까지 소원이 볼 생각하지 마. 소원이도 너처럼 무책임한 엄마는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강승재가 보기에 소원이가 아직도 병마에 시달리는 건 전부 내 책임이었다.그는 내가 박은우에게 몸을 팔아서 약을 받아오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소원이가 아직도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최나리에게 약을 준 건 그의 고집스러운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니 우리 모녀가 양보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제야 강승재가 뼛속까지 이기적인 사람임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약은 한 알뿐이야.”나는 폐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견디며 설명했다.숨 한 번 쉬는 것뿐인데도 기도와 폐가 불에 타는 듯 아팠다. 난 내 삶의 끝자락에서 이런 고통을 느낄 줄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말도 안 돼.”강승재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예전의 강승재는 내 안색만 봐도 어떤 곳이 좋지 않은지를 눈치채고 금방 약을 챙겨와서 날 돌봐주었다.그러나 지금의 강승재는 곧 죽음을 앞둔 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너랑 겨우 한 번 잤는데 박은우가 널 포기했다고?”그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하긴.
“엄마, 누가 엄마를 괴롭힌 거예요?”소원이는 눈을 깜빡이면서 앙상한 손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무게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그럴 리가 있겠어? 그런 생각 하지 마.”나는 애써 울분을 참으며 소원이의 이마 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주었다.소원이는 예전에 머리를 밀었었는데 머리가 조금 자라서 까슬까슬했다. 만져보면 단모종의 강아지 같기도 했다.소원이를 달래며 삭발을 시켰을 때가 눈앞에 생생했다. 그때 나는 삭발을 하고 나면 까맣고 윤기 도는 예쁜 머리카락이 자랄 거라고 소원이를 속였었다.그러나 머리카락이 자라는 모습은 이제 더는 보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간호사 언니가...”소원이는 시선을 내려뜨리면서 말했다.“제가 내연녀의 딸이라고 했어요.”소원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내연녀가 뭔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드러낸 악의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항상 다정하게 대해주던 간호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으니 소원이는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어렴풋이 누군가 날 괴롭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괜찮아.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나는 잔잔한 목소리로 소원이를 달랬다. 하지만 아쉽게도 목소리가 너무 쉬어서 자장가를 불러줄 수는 없었다.소원이는 언제나 말을 잘 들었다. 내가 자자고 하면 소원이는 늘 스스로 이불을 덮고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았었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소원이는 눈을 감지 않았고 입에서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병실 안의 기계들이 요란하게 경보음을 냈다.나는 놀라서 멍해졌고, 병실에서 끌려 나갈 때는 손이 끊임없이 떨리고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소원이 어머님, 예치금이 다 떨어졌어요.”간호사가 내게 포스기를 건네면서 말했다.“응급처치 비용과 중환자실 비용까지 총 2,000만 원을 결제해 주셔야 해요.”나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긁었지만 곧 잔액 부족이라는 알림이 떴다.그 카드에는 분명 1억
강승재는 카드란 카드는 모조리 긁은 듯했다. 잔액을 다 합쳐도 40만 원이 안 됐다.“돈 없어? 그러면 박은우 찾아가든가.”강승재는 아주 가볍게 말했다.“소원이가 지금까지 앓고 있는 건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가서 약 한 알 더 구해와서 소원이에게 먹여. 그러면 소원이도 금방 다 나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잖아. 안 그래? 윤세영, 난 정말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질책하는 건지 모르겠어. 난 그저 젊었을 때의 내 꿈을 이루고 싶은 것뿐이야. 그런데 당신은 매번 딸의 목숨으로 날 협박했지.”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 너머로 아주 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은 강승재가 얼마나 박력 있고 용기 있는지를 칭찬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자신의 꿈을 좇는 그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들은 강승재가 최나리를 구원해 준 영웅이라고 떠들어댔다.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내와 딸이 죽든 말든 관심도 없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구한 영웅이라니.나는 귀에 거슬리는 환호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묵묵히 전화를 끊었다.그들은 마치 거머리처럼 나와 내 딸의 몸에 달라붙어서 우리의 피를 빨아먹었다. 그들은 아마 우리의 피를 다 빨아 먹고서야 즐거운 얼굴로 우리의 몸에서 떨어질 것이다.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인간들이었다.나는 그렇게 밤새 모든 친지에게 연락을 돌려 겨우 2,000만 원을 구했다.돈을 내러 가자 의사는 필요 없다고 했다.그는 내 등 뒤의 수술실을 가리키고 있었다.초록색으로 빛나던 ‘수술 중’이라는 글이 까맣게 변하고 수술실 문이 열렸다. 내 딸 소원이가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랐다.흰색 천이 소원이의 야윈 얼굴 위를 덮고 있었다.“소원이 어머님,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의사는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소원이도 최선을 다했어요.”“암세포가 온몸에 퍼졌어요. 어젯밤에는 내출혈이 심했고요. 소원이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틴 건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소원이는 정말 강인한 아이였어요.”의사는 내
딸이 죽었는데 강승재는 딸이 정말로 죽었는지 병원에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저번의 그 기사로 최나리는 짧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녀는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빠르게 SNS 계정을 개설했고 오늘까지 이미 10만 명의 팔로워를 확보했다.최나리는 영화 크랭크인을 라이브로 방송하고 있었다.화면 속 강승재는 정성껏 다림질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고, 깔끔하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당당해 보였는데 마치 스무 살 때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딸이 위독한 순간에 강승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던 걸까?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강승재와 최나리가 손을 맞잡고 테이프를 끊을 때, 나는 라이브 방송을 끄고 소원이의 유골을 받으러 갔다.소원이는 성장하던 아이에서부터 작은 유골함에 담긴 유골이 되어 조용히 내 손 안에 숨었다.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박은우였다.우리는 7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고, 신분의 차이로 우리 사이에는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다.박은우는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기사들을 보고 내게 연락한 것이었다.박은우는 언론사에 연락을 돌려 나에 관한 기사들을 전부 내리라고 했고,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나는 품속의 흰색 유골함을 바라보며 그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나는 유골함을 들고 박은우의 별장으로 향했다.그는 내가 죽은 뒤면 나의 후사를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사실 박은우는 처음에 전화로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내 상태를 직접 보고는 눈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몇 년간 연락 한번 한 적 없던 박은우마저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러나 강승재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다.“여기 다른 사람은 없어.”박은우는 내게 명함 두 장을 내밀었다.“내 운전기사와 요리사야. 필요한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해.”그는 남은 시간 동안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을 지켜주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무척 고마웠다
그는 우리의 부부 관계로 날 협박했다.우스운 일이었다. 자기가 남편이자 아빠라면서 정작 아내와 딸이 죽은 사실을 알지 못하니 말이다.우리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을 강승재는 최나리와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내 메시지 못 봤어? 내일 애 데리고 나 만나러 와!]문자를 보내자마자 알겠다는 답장이 도착했다.내가 아니라 박은우가 보낸 문자였다.나는 강승재를 따라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소원이는 집에 남아 낯선 이모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소원이는 최나리가 자신의 소중한 물건들을 버릴까 봐 걱정되는 듯했다.약속 장소에 온 사람이 박은우임을 확인한 강승재는 단단히 화가 난 건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는 줄곧 박은우와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꼈다.박은우가 박씨 일가의 가주가 된 뒤로 강승재는 아주 오랫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박은우가 아니라 그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도, 강승재는 언젠가 내가 그를 버리고 첫사랑 박은우에게 가버릴까 봐 항상 두려워했다.그런데 정작 첫사랑을 찾아간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강승재였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여긴 왜 온 겁니까? 지금 나한테 시위라도 하는 거예요?”강승재는 마치 싸움에서 진 수탉 같아 보였다. 그는 일부러 날을 세워 말했다.“당당한 박씨 가문의 가주라면 여자가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 왜 굳이 남편 있는 유부녀를 건드리는 거죠? 약을 줬다고 해서 내가 당신한테 고마워할 것 같아요? 소원이는 절대 당신 딸이 될 수 없어요.”강승재는 경멸에 차서 말했다.“윤세영이 몸을 팔았으니까 난 당신에게 빚진 게 없어요!”박은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는 말없이 자신이 챙겨온 검은색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서 나와 소원이의 유골함을 꺼냈다.강승재는 당황했다.“세영이와 소원이는 죽었습니다.”“말도 안 돼요!”강승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둘 다 죽은 척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얕은수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에게 약이
석방된 뒤 강승재는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는 대신 날 찾으러 갔다.당시 나는 박은우에게 나와 소원이를 아무 데나 안장해달라고 했다. 비석도 무덤도 필요 없고 그저 조용히 땅 밑에서 사라지고 싶다고 했었다.꽤 오래전 일이라 나조차 내가 어디 묻혀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강승재는 날 찾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세영아... 세영아, 네 마음속에 아직도 내가 있을까?”그는 울먹거렸다.“만약 네 마음속에 여전히 내가 존재한다면 제발 널 찾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돼? 너에게 사과하고 싶어...”나는 그의 사과 따위 받고 싶지 않았다.늦은 사과 따위 필요 없었다.산속에서 3일을 헤맨 강승재는 너무 힘들어서 발을 들 수조차 없게 되자 팔을 이용해 앞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알겠다...”강승재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아직도 내가 미운 거지? 내가 너와 소원이를 복수하지 않았으니까.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강승재는 날 찾지 못했지만 최나리는 쉽게 찾아냈다.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여자는 어딜 가든 사람들의 이목을 받게 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최나리를 단칼에 찔러 죽인 뒤 강승재는 그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게다가 강승재는 아픈 걸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칼로 심장을 찌를 때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세영아...”죽음을 앞둔 그는 여전히 내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세영아, 너랑 소원이를 위해서 복수했어... 그러니까... 이제 나 좀 용서해 주면 안 돼?”솔직히 얘기해 나는 강승재가 죽어도 아무렇지 않았다.누군가를 증오하는 것은 감정 소모가 필요한 일이었다. 강승재는 내가 감정을 낭비해 가면서 원한을 품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게다가 나는 내 삶을 살아가야 했다.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했던 시스템이 어제 갑자기 나타나서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내게 물었다.나는 죽은 뒤면 당연히 시스템에서 벗어날
다행히도 강승재가 때마침 돌아왔다.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애정행각을 시작하려고 하기 전, 나는 그들이 소원이의 눈을 더럽히지 않도록 소원이의 눈을 가려주었다.“감히 날 배신해?”큰 충격을 받은 강승재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우리는 아무 사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배신이에요?”최나리는 아주 당당했다.“내가 남자 친구 좀 사귀겠다는데 승재 씨 허락이라도 받아야 해요?”“난 네 얼굴 흉터도 치료해 줬고 네가 영화를 찍을 수 있게 투자도 해줬어. 그런데 어떻게 감히...”최나리는 어깨를 쭉 폈다.“그건 승재 씨가 자발적으로 한 일이잖아요. 내가 언제 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승재 씨 이젠 돈 없잖아요. 이제 내게 더는 투자할 자금 없는 거 아니었어요? 반대로 방 감독님은 앞으로 영화 열 편쯤은 충분히 지원해 줄 수 있다고요!”최나리는 더 이상 강승재가 필요하지 않게 되자 가차 없이 그를 버렸다.강승재는 최나리의 말끔한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얼굴을 위해서 딸과 아내가 죽었다.“세영이 돌려줘! 소원이 돌려줘!”“그 두 사람에게 빚을 진 건 승재 씨지 내가 아니에요!”최나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박했다.세 사람은 끊임없이 싸웠다. 얼마나 시끄러운지 고막이 아플 정도였다.그러다 강승재가 칼을 들고 최나리의 얼굴을 바둑판처럼 만들어 놓고서야 집 안이 조용해졌다.영화감독은 기겁하면서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갔다.최나리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가 버둥거리면서 신고를 했고, 결과적으로 강승재는 폭행죄로 징역 5년과 배상금 6,000만 원을 선고받았다.얼굴이 망가진 최나리는 당연히 더는 영화를 찍을 수 없었지만 이미 부귀영화를 누려봤으니 당연히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는 라이브 방송을 하면서 자신의 얼굴 흉터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동정을 받으려고 했다.최나리의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남자에게 속아 넘어간 순진한 여자이자 꿈을 향해 모든 걸 쏟아붓는 여자였다.그러나 눈치가 빠른 네티즌은 곧 그녀의
그는 우리의 부부 관계로 날 협박했다.우스운 일이었다. 자기가 남편이자 아빠라면서 정작 아내와 딸이 죽은 사실을 알지 못하니 말이다.우리의 장례식을 치러야 했을 강승재는 최나리와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내 메시지 못 봤어? 내일 애 데리고 나 만나러 와!]문자를 보내자마자 알겠다는 답장이 도착했다.내가 아니라 박은우가 보낸 문자였다.나는 강승재를 따라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소원이는 집에 남아 낯선 이모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소원이는 최나리가 자신의 소중한 물건들을 버릴까 봐 걱정되는 듯했다.약속 장소에 온 사람이 박은우임을 확인한 강승재는 단단히 화가 난 건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는 줄곧 박은우와 자신을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꼈다.박은우가 박씨 일가의 가주가 된 뒤로 강승재는 아주 오랫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박은우가 아니라 그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도, 강승재는 언젠가 내가 그를 버리고 첫사랑 박은우에게 가버릴까 봐 항상 두려워했다.그런데 정작 첫사랑을 찾아간 사람은 내가 아니라 강승재였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여긴 왜 온 겁니까? 지금 나한테 시위라도 하는 거예요?”강승재는 마치 싸움에서 진 수탉 같아 보였다. 그는 일부러 날을 세워 말했다.“당당한 박씨 가문의 가주라면 여자가 부족하진 않을 텐데요? 왜 굳이 남편 있는 유부녀를 건드리는 거죠? 약을 줬다고 해서 내가 당신한테 고마워할 것 같아요? 소원이는 절대 당신 딸이 될 수 없어요.”강승재는 경멸에 차서 말했다.“윤세영이 몸을 팔았으니까 난 당신에게 빚진 게 없어요!”박은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는 말없이 자신이 챙겨온 검은색 상자를 열었고 그 안에서 나와 소원이의 유골함을 꺼냈다.강승재는 당황했다.“세영이와 소원이는 죽었습니다.”“말도 안 돼요!”강승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말했다.“둘 다 죽은 척하는 거잖아요. 이렇게 얕은수로 날 속일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에게 약이
딸이 죽었는데 강승재는 딸이 정말로 죽었는지 병원에 확인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저번의 그 기사로 최나리는 짧게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었다. 그녀는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빠르게 SNS 계정을 개설했고 오늘까지 이미 10만 명의 팔로워를 확보했다.최나리는 영화 크랭크인을 라이브로 방송하고 있었다.화면 속 강승재는 정성껏 다림질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고, 깔끔하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당당해 보였는데 마치 스무 살 때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딸이 위독한 순간에 강승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았던 걸까?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강승재와 최나리가 손을 맞잡고 테이프를 끊을 때, 나는 라이브 방송을 끄고 소원이의 유골을 받으러 갔다.소원이는 성장하던 아이에서부터 작은 유골함에 담긴 유골이 되어 조용히 내 손 안에 숨었다.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박은우였다.우리는 7년 동안 만난 적이 없었고, 신분의 차이로 우리 사이에는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다.박은우는 인터넷에서 쏟아지는 부정적인 기사들을 보고 내게 연락한 것이었다.박은우는 언론사에 연락을 돌려 나에 관한 기사들을 전부 내리라고 했고,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기 위해 연락한 것이었다.나는 품속의 흰색 유골함을 바라보며 그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나는 유골함을 들고 박은우의 별장으로 향했다.그는 내가 죽은 뒤면 나의 후사를 처리해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다.사실 박은우는 처음에 전화로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내 상태를 직접 보고는 눈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몇 년간 연락 한번 한 적 없던 박은우마저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알아보았다. 그러나 강승재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믿었다.“여기 다른 사람은 없어.”박은우는 내게 명함 두 장을 내밀었다.“내 운전기사와 요리사야. 필요한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해.”그는 남은 시간 동안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을 지켜주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무척 고마웠다
강승재는 카드란 카드는 모조리 긁은 듯했다. 잔액을 다 합쳐도 40만 원이 안 됐다.“돈 없어? 그러면 박은우 찾아가든가.”강승재는 아주 가볍게 말했다.“소원이가 지금까지 앓고 있는 건 전부 당신 때문이잖아. 가서 약 한 알 더 구해와서 소원이에게 먹여. 그러면 소원이도 금방 다 나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잖아. 안 그래? 윤세영, 난 정말로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날 질책하는 건지 모르겠어. 난 그저 젊었을 때의 내 꿈을 이루고 싶은 것뿐이야. 그런데 당신은 매번 딸의 목숨으로 날 협박했지.”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 너머로 아주 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그들은 강승재가 얼마나 박력 있고 용기 있는지를 칭찬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자신의 꿈을 좇는 그의 모습에 감탄했다. 그들은 강승재가 최나리를 구원해 준 영웅이라고 떠들어댔다.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아내와 딸이 죽든 말든 관심도 없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구한 영웅이라니.나는 귀에 거슬리는 환호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아 묵묵히 전화를 끊었다.그들은 마치 거머리처럼 나와 내 딸의 몸에 달라붙어서 우리의 피를 빨아먹었다. 그들은 아마 우리의 피를 다 빨아 먹고서야 즐거운 얼굴로 우리의 몸에서 떨어질 것이다.죄책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인간들이었다.나는 그렇게 밤새 모든 친지에게 연락을 돌려 겨우 2,000만 원을 구했다.돈을 내러 가자 의사는 필요 없다고 했다.그는 내 등 뒤의 수술실을 가리키고 있었다.초록색으로 빛나던 ‘수술 중’이라는 글이 까맣게 변하고 수술실 문이 열렸다. 내 딸 소원이가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수술실 밖으로 나왔다.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랐다.흰색 천이 소원이의 야윈 얼굴 위를 덮고 있었다.“소원이 어머님, 저희는 최선을 다했습니다.”의사는 비통한 얼굴로 말했다.“소원이도 최선을 다했어요.”“암세포가 온몸에 퍼졌어요. 어젯밤에는 내출혈이 심했고요. 소원이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틴 건지 놀라울 따름이에요. 소원이는 정말 강인한 아이였어요.”의사는 내
“엄마, 누가 엄마를 괴롭힌 거예요?”소원이는 눈을 깜빡이면서 앙상한 손을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무게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그럴 리가 있겠어? 그런 생각 하지 마.”나는 애써 울분을 참으며 소원이의 이마 위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주었다.소원이는 예전에 머리를 밀었었는데 머리가 조금 자라서 까슬까슬했다. 만져보면 단모종의 강아지 같기도 했다.소원이를 달래며 삭발을 시켰을 때가 눈앞에 생생했다. 그때 나는 삭발을 하고 나면 까맣고 윤기 도는 예쁜 머리카락이 자랄 거라고 소원이를 속였었다.그러나 머리카락이 자라는 모습은 이제 더는 보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간호사 언니가...”소원이는 시선을 내려뜨리면서 말했다.“제가 내연녀의 딸이라고 했어요.”소원이는 아직 너무 어려서 내연녀가 뭔지 알지 못했다.그러나 다른 사람이 의도적으로 드러낸 악의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항상 다정하게 대해주던 간호사가 갑자기 태도를 바꿨으니 소원이는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그저 어렴풋이 누군가 날 괴롭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괜찮아. 푹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나는 잔잔한 목소리로 소원이를 달랬다. 하지만 아쉽게도 목소리가 너무 쉬어서 자장가를 불러줄 수는 없었다.소원이는 언제나 말을 잘 들었다. 내가 자자고 하면 소원이는 늘 스스로 이불을 덮고 진지한 얼굴로 눈을 감았었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소원이는 눈을 감지 않았고 입에서 끊임없이 피를 토했다.병실 안의 기계들이 요란하게 경보음을 냈다.나는 놀라서 멍해졌고, 병실에서 끌려 나갈 때는 손이 끊임없이 떨리고 두 다리에 힘이 쭉 빠져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소원이 어머님, 예치금이 다 떨어졌어요.”간호사가 내게 포스기를 건네면서 말했다.“응급처치 비용과 중환자실 비용까지 총 2,000만 원을 결제해 주셔야 해요.”나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긁었지만 곧 잔액 부족이라는 알림이 떴다.그 카드에는 분명 1억
만약 내게 남은 수명이 있었다면 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수명을 대가로 약을 받았을 것이다.그러나 내게는 4일밖에 남지 않았다. 겨우 4일로는 시스템에서 제공하는 가장 싼 물건도 얻을 수 없었다.강승재는 힘이 아주 셌다.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숨을 쉴 수 없었고 결국 눈앞이 깜깜해졌다.다시 깨어났을 때는 병상 위에 누워있는 상태였다.“연기한 거지?”날 실신하게 만든 강승재는 같잖다는 듯이 말했다.“당신 겨우 스물여섯이야. 여든여섯이 아니라고.”나는 더는 그와 논쟁하고 싶지 않았다.지금의 내겐 칼을 들어 최나리의 얼굴에 흉터를 남길 힘조차 없었다.“소원이 보러 갈 거야.”나는 버둥거리면서 일어나려고 했는데 중심을 채 잡기도 전에 강승재가 날 밀었다.“소원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벗어났어.”그는 날 힐끗 바라보았다.“약 가져오기 전까지 소원이 볼 생각하지 마. 소원이도 너처럼 무책임한 엄마는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강승재가 보기에 소원이가 아직도 병마에 시달리는 건 전부 내 책임이었다.그는 내가 박은우에게 몸을 팔아서 약을 받아오는 걸 원치 않기 때문에 소원이가 아직도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리고 최나리에게 약을 준 건 그의 고집스러운 꿈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니 우리 모녀가 양보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나는 그제야 강승재가 뼛속까지 이기적인 사람임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약은 한 알뿐이야.”나는 폐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견디며 설명했다.숨 한 번 쉬는 것뿐인데도 기도와 폐가 불에 타는 듯 아팠다. 난 내 삶의 끝자락에서 이런 고통을 느낄 줄은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말도 안 돼.”강승재의 날카로운 눈빛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예전의 강승재는 내 안색만 봐도 어떤 곳이 좋지 않은지를 눈치채고 금방 약을 챙겨와서 날 돌봐주었다.그러나 지금의 강승재는 곧 죽음을 앞둔 나를 보고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너랑 겨우 한 번 잤는데 박은우가 널 포기했다고?”그는 조롱 섞인 말투로 말했다.“하긴.
딸의 췌장암을 치료하기 위해 나는 남은 수명을 대가로 시스템에서 내 딸을 구할 수 있는 약 한 알을 받았다.남편은 제정신이냐면서 나를 타박하더니 몰래 그 약을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 흉터를 치료하는 데 썼다.큰 충격을 받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남편은 한 점 부끄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나리는 연예인이 꿈이야. 걔 벌써 스물넷이야. 걔한테는 시간이 없어. 그리고 이 약 당신이 몸 팔아서 구한 거잖아. 그게 아니면 당신 같은 가정주부가 무슨 수로 이렇게 좋은 약을 구했겠어? 딸을 구하고 싶으면 다시 몸 팔아서 약을 구하면 되잖아. 한 번 더 몸을 팔면 뭐 죽기라도 해?”애석하게도 난 더 이상 약을 구할 수 없었다. 내게 더는 대가로 바칠 수명이 없었기 때문이다....거래가 성사된 뒤 시스템은 나머지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내게 일주일이란 시간을 주었다.첫날엔 약을 온전히 돌려받기 위해 기를 쓰고 강승재와 치고받고 싸웠다.둘째 날엔 딸의 병실 밖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강승재를 굳게 믿은 탓에 딸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 너무도 한스러웠다.오늘은 셋째 날이다. 난 내가 이제 곧 죽으리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뒤 차분하게 남은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강승재가 내연녀의 손을 잡고 날 보러 왔을 때, 나는 고통을 참으면서 유서를 한 자 한 자 적고 있었다.망할 시스템은 내게 남은 수명을 거둬가게 되면 몸의 장기 역시 노화한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다. 타자하는 것뿐인데도 손끝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마침 잘 왔네.”나는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을 애써 못 본 척하며 강승재에게 노트북 화면을 보여줬다.“변호사랑 얘기 마쳤어. 뭐 더 보충할 건 없는지 확인해 봐. 내가 살아있을 때 빨리 끝내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란 건 원래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버리니까.”“윤세영, 언제까지 그 지랄 떨 건데?”유언이라는 두 글자를 본 강승재는 버럭 화를 냈다.“겨우 약 한 알일 뿐이잖아. 왜 자꾸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