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왕정민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앉아 있었다.왕정민이 나를 도와주고, 나보다 나이도 많으니 이것까지는 괜찮았지만, 이거에서 끝나지 않고 나를 교육하는 어조로 말했다.“수호야, 남에게 술 따를 때는 잔을 채워야지. 이렇게 채우지 않는 거 아주 무례한 거야.”그 말을 들으니 왕정민이 더 싫어졌다.그때 형수가 옆에서 웃으며 설명했다.“수호 씨가 이제 막 사회에 나와서 경험이 없으니 많이 가르쳐 줘요.”그러면서 내가 따른 술잔에 술을 채웠다.나는 마지못해 왕정민에게 사과했다.“정민 형, 아까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사과드릴게요.”“뭐 잘못하고 말고가 아니라 그냥 귀띔하는 거야. 앉아.”나는 묵묵히 술 한 잔을 비웠다.“나더러 일자리 먼저 안배하라고 해서 약속 지켰는데, 나한테 약속했던 일은 언제 할 수 있죠?”그때 왕정민이 갑자기 하는 말에 형수가 대답했다.“그래도 진도 많이 나갔으니 얼마 지나지 않으면 될 거예요.”“조금만 서둘러요. 오래 기다려줄 수 없으니까.”왕정민은 나한테만 차가운 게 아니라 형수한테도 차갑게 대했다.‘이치대로라면 형이 왕정민 친구이니 친구의 아내한테 존중해야 맞는 거 아닌가?’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왕정민의 눈길이 자꾸만 형수의 가슴을 향했다.그래도 다행인 건, 이내 시선을 거두고 전화하러 갔다는 거다.그 덕에 나도 더 이상 연기할 필요가 없어졌다.“형수, 저 사람 왜 저렇게 짜증 나요?”내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자 형수는 웃으며 말했다.“사업 잘되고 잘 나가는 사장이니 갑질하는 거죠. 마침 갔으니 우리끼리 천천히 먹어요. 이거 대충 해도 60만 정도는 되는데, 안 먹으면 낭비잖아요.”‘하긴.’나와 형수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여기 술도 있어요. 한 병에 20만 원이니 우리 다 마셔요.”‘그건 좀 위험하지 않나? 취하면 어쩌려고?’내가 분명 속으로 말했는데 형수는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취하는 게 낭비하는 것보다는 낫죠.
“뭐 진심이고 아니고가 있어요? 난 그냥 아이 갖고 싶은 거라고요.”형수는 내 팔을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내가 수호 씨 형과 결혼할 때 사실 아이를 가졌었는데, 그때 수호 씨 형이 일자리도 불안정하고 아이를 낳으면 키울 수 없을 것 같다고 지우라고 했거든요. 이건 분명 그때 그 아이를 지워 벌받은 거라고요.”형수는 몹시 서럽게 울었다. 심지어 그 슬픔이 나한테까지 전해져 나는 형수를 안고 등을 토닥였다.“형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형 아직 병원에서 검사도 안 받아 봤잖아요. 우선 검사부터 받아보게 해요.”형수는 씁쓸하게 웃었다.“희박해요. 수호 씨 형 젊었을 때도 정자가 적었는데 이제 이렇게 됐으니 더 말할 것도 없어요.”만약 형 몸이 계속 그 상태였다면 확실히 치료하기 어렵다.때문에 나는 애써 형수를 위로했다.“형수,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형과 상의해 봐요. 정 안 되면 그때 다른 방법 찾아보고요.”“동성 씨, 나 사실 당신 탓한 적 없어. 그런데 나도 여자라 남자의 손길이 필요하다고.”형수는 나를 안으며 갑자기 형의 이름을 불렀다.형수가 술에 취해 사람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알 수 있었다.“형수, 쉬세요.”때문에 나는 형수를 얼른 눕혔다.하지만 형수가 갑자기 내 목을 끌어안더니 갑자기 입을 맞췄다.“동성 씨, 나 동성 씨 사랑해. 우리 오랫동안 하지 않았잖아. 이번 한 번만 나 만족시켜 주면 안 돼?”코를 찌르는 듯한 술 냄새가 덮쳐왔지만 형수 입술의 온기가 전해지자 나도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결국 참지 못한 나는 형수의 허리를 안은 채 침대에 누웠다.하지만 마지막까지 가려고 할 때 겨우 멈췄다.형수는 지금 취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게다가 형수한테는 이미 형이 있기에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깨어나서 나를 탓할까 봐 무서웠다.나는 너무 아쉬워 형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형수, 미안해요. 내가 또 마음대로 했네요, 탓하지 마세요.
일찍 일어나 의자에 앉아 게임 하고 있던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형수 취해서 잠들었어요. 핸드폰도 몇 번이나 울렸는데 모르고 자더라고요.”“누구 전화였어요?”“애교 누나요. 제가 대신 받았어요. 애교 누나한테 최남주라는 친구가 있는데 우리가 나오기 전에 그 누나가 애교 누나 집에 갔었거든요. 그래서 저녁 준비하지 말고 같이 밖에서 먹자고 해요.”“뭐예요? 혹시 최남주도 만났어요?”“네, 왜요?”“걔가 무슨 짓 안 했죠?”나는 너무 당황했지만 진실을 말할 수 없어 뻔뻔하게 거짓말했다.“아무 짓도 안 했어요. 마침 형수가 전화해서 몇 마디 못 했어요. 그런데 왜 그래요? 그 여자 무서워요?”형수는 나한테 손짓하더니 자기 옆자리를 툭툭 내리쳤다.그러고는 내가 형수 옆에 앉자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최남주 아주 굶주린 유부녀예요. 수호 씨 형도 꼬셨다니까요. 그런데 수호 씨처럼 젊고 멋있는 남자를 보면 분명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형수는 남주 누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시큰둥한 말투로 말했다.하지만 남주 누나가 보통 여자가 아닌 걸 알았지만 형한테까지 손을 내밀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형수와 애교 누나가 절친이니 남주 누나와 형수도 친구인데, 어떻게 친구 남편을 꼬실 수 있지?’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형수, 걱정하지 마요. 무조건 거리 둘게요. 그런데 애교 누나는 어떡해요? 아직도 우리 전화 기다릴 텐데.”“내가 전화해서 못 간다고 할게요.”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애교 누나한테서 다시 전화가 걸려 와 형수는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어, 애교야... 남주도 왔어? 둘이 식사해. 난 안 갈게. 뭐? 수호만 보내라고?”“내가 좀 뻐근해서 수호 씨한테 마사지 받으려고 그러는데.”“그래. 그럼 이따 나도 같이 갈게.”다시 말을 바꾸는 형수를 보자 나는 어리둥절했다.“형수, 아까는 안 간다면서요?”형수는 그 말에 난감한 듯 대답했다.“애교가 그러는데 오늘 남주가 쏜대요. 해산물로. 남주는 부자라 한턱
세 사람이 모두 잔을 들고 축하해주니 나는 너무 기뻐 어쩔 줄 몰랐다.형제자매도 없이 혼자커온 지라 항상 누나가 있었으면 했었다.누나는 나를 지켜주기도 할 거고, 다정하기도 하니까.그런데 한꺼번에 누나 셋이나 생겨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마워요.”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수호 씨, 뭐 갖고 싶은 거 있어요? 내가 선물할게요.”애교 누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남주 누나가 이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얼씨구, 해가 서쪽에서 뜨려고 그러나? 애교가 먼저 나서서 남자한테 선물도 다 주고.”애교 누나는 그 말에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운 듯 말했다.“목소리 좀 낮춰. 사람들 다 듣잖아.”남주 누나는 애교 누나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야, 너 솔직히 말해봐. 너 수호 씨한테 딴맘 있지?”“무슨 헛소리야? 난 수호 씨 남동생으로밖에 생각 안 해.”“동생? 정말 순수한 남동생 맞아?”공공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야한 농담을 하는 남주 누나 때문에 애교 누나는 얼굴이 빨개졌다.이윽고 남주 누나의 팔을 꼬집었다.“목소리 낮춰. 사람들 많은데 부끄럽지도 않아?”남주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왜 부끄러워해야 하는데? 저 사람들은 안 들으면 되잖아. 안 그래? 태연아?”내 옆에 앉아 있던 형수는 남주 누나의 말에 호응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나한테 묻지 마. 나도 너랑 다른 부류니까.”남주 누나는 아무도 제 편을 들어주지 않자 갑자기 어깨를 움직이며 애교를 부렸다.그때마다 흔들리는 가슴을 보니 속옷을 안 입은 게 틀림없었다.‘어떻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보기가 다 민망하네.’“태연아, 설마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 내가 뭐 네 남편 꼬신 것도 아니고, 살짝 장난 좀 친 거 가지고.”애교 누나는 그 일을 몰랐는지 놀란 듯 물었다.“꼬셨다니? 너 동성 씨한테 무슨 짓 했어?”남주 누나는 그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 “별거 아니야. 지난 번에 네 남편이 우리 데리
“게다가, 네가 나보다 작은 것도 아니고, 네 남편이 널 버리고 나한테 올까?”남주 누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형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아무튼 난 너 싫어. 그리고 수호 씨 어떻게 할 생각이라면 꿈 깨.”남주 누나는 갑자기 눈웃음을 치며 나를 봤다.“내가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뭐 너희 둘을 어떻게 할까?”그때 애교 누나가 곁에서 남주 누나의 팔을 잡아당겼다.“됐어, 태연 속 그만 긁어.”그러자 형수도 질 세라 말했다.“네가 자꾸 이러면 다음번에 네 남편 봤을 때, 나도 네 남편 다리에 앉아 러브샷 할 거야.”“그래. 난 상관없어. 우리 남편만 원한다면.”“그럼 난 어렵겠네. 네 남편은 너밖에 없어서 다른 여자 눈에도 안 들어올 거잖아.”“다른 여자라면 모를까, 너라면 무조건 돼. 네 얼굴과 몸매가 있는데.”남주 누나가 형수를 응원하자 형수는 가슴을 한껏 내밀고 말했다.“당연하지.”그 덕에 분위기는 점점 누그러졌다.나는 형수가 남주 누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걸 싫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물론 남주 누나의 이런 성격은 여자들의 질투를 사지만 남자한테는 치명적인 매력으로 통한다.그만큼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니까.형수와 남주 누나는 대화하면 할수록 점점 산으로 갔다.그러다 남주 누나가 남편과 할 때 느낌 있는지, 남편을 바꾸지는 않을지 물어보는 걸 듣는 순간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옆에 있던 애교 누나는 심지어 목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얘기 나누고 있어, 난 화장실 다녀올게.”애교 누나는 더 이상 들어주기 힘들었는지 대충 핑계 대고 나가버렸다.그리고 한참 뒤, 나도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나왔다.그렇게 나는 애교 누나와 화장실 입구에서 만나게 되었다.화장실에는 우리 외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얼른 애교 누나를 끌어안고 키스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무서웠는지 나를 밀어냈다.“안 돼요. 누가 오면 어떡해요.”“무서워할 거 뭐 있어요? 형수랑 남
“우리 너무 오래 나와 있으면 태연이랑 애교가 의심하지 않을까요?”내가 신이 나서 애교 누나에게 입맞춤하고 있을 때 애교 누나가 걱정되는 듯 말했다.하지만 나는 그런 걸 상관할 겨를이 없어 다급히 대답했다.“그건 나중에 생각해요. 제가 방법 생각해 볼게요. 애교 누나, 이제야 겨우 누나를 안아보네요.”내가 바지를 벗고 본론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애교 누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확인해 보니 남주 누나가 영상 통화를 걸어온 거였다.나는 핸드폰을 빼앗아 얼른 거절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주 누나가 또 영상 통화를 했다.그러자 애교 누나는 나를 진정하게 하고 소리 내지 말라고 경고했다.“내가 전화 안 받으면 계속할 거예요. 그러니 받아야 해요.”“누나 친구 정말 귀신 아니에요? 어떻게 매번 이렇게 우리를 방해해요?”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그러자 애교 누나가 내 볼에 입을 맞추며 나를 달랬다.“얼마 안 있다가 갈 거니까 좀만 참아요.”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애교 누나도 영상 통화를 받았다.전호를 받자마자 남주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혹시 우리 몰래 나쁜 짓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무슨 헛소리야? 그런 말 하지 마.”“그런데 무슨 화장실을 이렇게 오래가? 어? 아니네? 네 등 뒤에 배경 화장실 아니잖아. 왜 주차장으로 갔어?”애교 누나는 순간 찔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러자 내가 얼른 전화를 빼앗아 왔다.“애교 누나가 허리를 삐끗했다고 해서 제가 같이 파스 찾으러 왔어요.”남주 누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약 가지러 간 거 맞아요? 무슨 짓 하러 간 거 아니고?”“그럴 리가요. 애교 누나와 친구라면서요. 그러니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는 저보다 더 잘 알 거잖아요.”“흥. 너무 오래 안 봐서 모르겠는데? 오랫동안 외롭게 지낸 유부녀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요. 애교 바꿔줘 봐요, 뭐 물어볼 거 있으니까.”남주 누나의 의심을 덜기 위해 나는
남주 누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정말 파스뿐이야? 다른 건 없어? 콘돔이라든지.”애교 누나는 매서운 눈초리로 남주 누나를 째려봤다.“없어. 못 믿겠으면 내려와서 직접 확인하든가.”“내려오라면 누가 못 갈 줄 알고? 내가 가면 직접 확인할 거야.”남주 누나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자 애교 누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정말 약이야. 이상한 생각 좀 안 하면 안 돼?”“아, 나 허리 아픈데 수호 씨, 파스 좀 붙여줘요.”남주 주님에게 증명하려고 애교 누나는 연기까지 했다.나는 얼른 애교 누나의 옷 속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그랬더니 누나는 얼른 카메라를 위쪽으로 돌리고 한 손으로 나를 막으면 안 된다는 눈치를 줬다.하지만 나는 끈질기게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한 번만 만지게 해달라고 소리 없이 애원했다.결국 애교 누나가 묵인하자, 나는 손을 안으로 밀어 넣어 누나의 가슴을 잡았다.솔직히 당장 통화를 끄고 한바탕 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만 그렇게 되면 애교 누나가 난감해질 게 뻔했다.때문에 원하는 대로 만져만 보고 순순히 손을 뺐다.그때 남주 누나가 갑자기 또 물었다.“애교야, 너 방금 왜 카메라 렌즈 위로했어? 혹시 수호 씨랑 뭐 부끄러운 짓 한 거 아니야?”애교는 그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남주 정말 귀신인가? 어떻게 다 알아? 무서워 죽겠네.’애교 누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카메라 렌즈를 내 쪽으로 돌렸다.내가 마침 애교 누나를 도와 파스를 붙여주고 있었으니까.그때 남주 누나가 뜬금없이 물었다.“수호 씨, 애교 몸매 어때요?”나는 무슨 말을 하든 상대가 꼬투리 잡을 거라고 생각해 일부러 무심한 듯 대답했다.“아주 좋아요, 남주 누나보다 더.”“하! 지금 내 몸매가 별로라는 거예요? 오기만 해 봐, 아주 곤죽을 만들 거야.”나는 애교 누나 허리에 파스를 붙이고는 카메라를 바라봤다.“봤죠? 저 정말 애교 누나 파스 붙여주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상한 상상하지 마요.”“파스 붙여준다는 핑계로 이상한 짓 했는지 누가
나는 할 수 없이 고분고분 남주 누나를 따라나섰다.남주 누나의 요염하고 섹시한 모습에 함께 나란히 걷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나를 끌고 화장실에 도착한 남주 누나는 여자 화장실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자 나를 끌어 칸막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특히 남주 누나에게 놀림당할까 봐 무서웠다.그때 남주 누나는 웃는 얼굴로 내 아래를 흘긋거렸다.“솔직히 말해요. 애교랑 대체 뭐 했어요?”“아무것도 안 했어요.”“안 했는데 이렇게 됐다고?”“그건...”나는 마음이 찔려 머리를 짜내 변명을 지어냈다.“아까 애교 누나한테 파스 붙여주면서 몸매를 봤더니 주체할 수 없었어요.”“개도 아니고, 한번 본 걸로 이렇게 된다고요? 그럼 만지거나 입 맞추면 난리 나겠네요?”“내가 잘못했어요. 하지만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그렇다면 너무 배짱 없는 건데? 주차장까지 내려갔고, 이렇게까지 됐는데 아무것도 안 했다니.”“해도 안 된다, 안 해도 안 된다.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남주 누나는 발끝을 들고 내 가슴에 기대더니 키득키득 웃었다.“방법 대서 애교 꼬셔 봐요.”“네? 왜요?”“걔가 너무 보수적이니까 내가 가벼운 여자 같잖아요. 그런데 수호 씨가 애교를 성공적으로 꼬시면 내가 수호 씨랑 뭘 하든 계도 뭐라 하지 못할 거잖아요.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걔가 나랑 같은 상황이 돼야 내 일 누설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난 정말 여자들의 생각을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것 같다.본인이 놀기 좋아하고 놀고 싶다고 친구도 끌어내리려 하다니.‘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 떳떳하게 애교 누나와 하고 싶은 걸 해도 되지 않을까?’머리를 굴리던 나는 일부러 놀란 듯 전전긍긍하며 말했다.“해, 해볼게요. 그런데 애교 누나가 너무 보수적이라 성공할 거란 보장은 없어요.”“무서워할 거 뭐 있어요? 내가 있는데.”‘너무 좋겠는데? 그럼 나도 더 수월해질 거잖아.’하지만 연극은 끝까지
“지은이가 그동안 나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나도 도움이 돼야지. 지은이한테 돈은 부족하지 않은 거 알아. 수호 씨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건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거야.”하정현은 요즘 막 취직하여 이곳에 남아 윤지은을 돌봐 줄 수 없기에, 미력하나마 자기 최선을 다할 생각인 듯했다.나도 더 이상 하정현과 실랑이를 벌이기 싫어 결국 카드를 받았다. 나중에 그걸 쓸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할 일이다.“지은이한테 절대 말하지 마.”하정현은 또다시 당부했다. 그러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로부터 얼마 뒤, 윤해철과 하정현도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은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찼다. 내가 병실에서 나온 건 정확한 결정이었다.하지만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고 결국 하나둘씩 떠나갔다.윤해철도 나에게 당부했다.“수호 군. 수호 군이 그래도 우리 지은이 마음 쓰는 게 보여. 이번 기회에 서로 좀 잘해 봐. 난 두 사람 응원해.”이영미도 따라서 맞장구쳤다.“나도 두 사람 응원해. 내가 볼 때 두 사람 아주 천생연분이야.”“두 사람이 천생연분이면, 내 딸은 뭐지?”이게 무슨 상황인지, 애교 누나가 아버지인 이태웅과 함께 나타났다.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윤해철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자네 딸과 수호 군의 결혼 반대한 거 아니었어? 자네는 수호 군을 싫어하겠지만, 난 좋아해.”이태웅은 냉담한 얼굴로 걸어왔다. 그 강력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순식간에 찬 숨을 들이켰다.하지만 이건 가장 무서운 게 아니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건, 내가 애교 누나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나는 내가 윤지은한테 마음이 흔들린 게 애교 누나한테 미안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다.“수호 씨, 우리 저쪽에서 얘기 좀 할래요?”나와 애교 누나는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애교 누나, 제 말 좀 들어봐요...”나는 애교 누나에게 설명하고 싶었다.하지만 애교 누나는 웃으
나는 머리를 문질렀다.“백 쌤, 너무 세게 때렸잖아요. 머리통 날아갈 뻔했어요.”“흥. 그러게 누가 지은이 노리래? 감히 지은이까지 넘봐?”젠장.좋은 분위기가 그대로 망해버렸다. 만약 다음번에 또 물어보려면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윤지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는 얼굴로 백연우와 임유미를 바라봤다.“연우야, 유미야, 왔어?”유미 사모님은 창가에 앉아 다정하게 윤지은의 손을 잡았다.“어쩌다 이렇게 됐어?”“실수로 데였는데 큰 문제 없어.”“내가 들은 건 아예 달랐는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던데.”백연우는 히죽거리며 물었다.그 말에 윤지은은 마음이 찔려 시선을 피했다.“누구한테서 들었는데?”“강한나지. 네 그 교통경찰 하는 친구. 오는 길에 마침 만났는데 말해주더라고.”“걔가 헛소리하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이 해명했다.하지만 백연우는 마치 신대륙을 만난 사람처럼 신기해했다.“오호라. 이거 봐. 네 말투가 이미 너를 배신했어.”화들짝 놀라는 백연우의 모습에 윤지은이 오히려 멍한 얼굴을 했다.“내 말투가 어때서?”백연우는 마치 윤미화에게 빙의 된 것처럼 탐정놀이를 시작했다.“너 평소 얼음장처럼 싸늘하고 남이 말하면 몇 배 욕해주잖아. 그런데 네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내가 놀려댔는데 나를 욕하지도 않았잖아. 이거 이상해.”‘헐.’백연우의 관찰력은 확실히 대단했다.사실 방금 윤지은이 말할 때 나도 그 점을 눈치채 백연우와 유미 사모님한테 들킬까 봐 걱정했다.그런데 정말 이런 식으로 들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무엇보다 백연우는 사실 나와 윤지은의 사이를 진작 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다는 거다.아마 연기했으면 오스카상 감이다.나는 더 이상 이곳에 있었다가 나한테까지 불똥이 튈까 봐 슬금슬금 도망칠 각을 쟀다.물론 서둘러 떠나지는 않았다.백연우와 유미 사모님은 윤지은의 병문안을 온 거라 이따가 떠날 텐데, 침대도 내리지 못하는 윤지은을 돌봐 줄 사람은 필요하다.윤
윤지은은 부족함 없지 자랐다. 부잣집 외동딸인 데다, 아버지는 강북에서 유명한 대기업 회장이라 주변에 구애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는 부잣집 도련님도 있고, 실력 좋은 보디가드들도 있었다.그렇게 우수한 남자들을 많이 봐왔기에 윤지은은 나한테 이성적인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한테만은 자꾸 다른 감정이 느껴졌다.윤지은은 마음이 복잡해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정수호, 내려줘.”얌전히 안겨 있던 윤지은이 갑자기 또 이러자 나는 순간 어리둥절했다.“왜요? 아프게 했어요?”“그런 거 아니야!”윤지은은 또 쌀쌀맞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차갑게 쏘아붙였다.“네 돌봄 따위 필요 없어. 나가.”“왜요?”“이유 없어. 그냥 나가.”“요즘 지은 씨 무척 이상한 거 알아요?”나는 해답을 찾으려고 일부러 떠나지 않았다.하지만 윤지은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윤지은이 그동안 보인 이상 행동을 열거했다.“갑자기 연락처를 삭제했다가, 아예 차단해 버리고. 이제는 또 뜬금없이 쫓아내기까지. 설마 나 좋아해요?”나는 이 기회에 윤미화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순간 내 마음도 무척 두근거렸다.이런 일은 진지한 태도로 얘기할 수 없기에 나는 결국 농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마침 분위기가 무르익어 무심코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그 말을 들은 순간 윤지은은 심장이 벌렁거려 극구 부인했다.“무슨 헛소리야? 내가 왜 너를 좋아하겠어?”“그럼 왜 뜬금없이 나한테만 화내요? 합당한 설명을 해줘요.”나는 포기하지 않고 캐물었다.결국 윤지은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렸다.“내가 왜 설명해야 하는데? 네가 뭔데?”“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지은 씨가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나를 몇 번이나 구해줬잖아요.”“저한테 아무 마음도 없으면 계속 도와줄 리 없잖아요. 본인이 다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와주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고요. 나를 좋아한다고
얼마 뒤 윤미화도 떠나는 바람에 병실에는 나와 윤지은 둘뿐이었다.윤지은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자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읽을 수도 꿰뚫어 볼 수도 없어, 나는 결국 사과를 깎아 건넸다.“사과 좀 먹어요.”“안 먹어.”“그럼 귤은요?”“안 먹어.”“포도는요?”“좀 조용히 할 수 없어?”나는 윤지은이 말하는 틈에 포도 한 알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씩 웃으며 말했다.“아플 때 많이 먹어야 빨리 나아요.”“미친놈.”윤지은은 나를 욕하면서도 순순히 포도를 씹어 먹었다.심지어 하나를 다 먹고 난 뒤 또 하나를 요구했고. 그걸 먹고 나니 또 요구했다.윤지은은 늘 이렇듯 말은 누구보다 날카롭게 하면서 마음은 항상 여리다.이번에 윤지은의 도움이 컸기에 나는 윤지은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곁에서 세심하게 돌봐 주었다.사람을 돌보는 건 나한테 어려울 게 없었다. 딱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그건 바로 화장실 문제였다.윤지은도 부끄러워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서 계속 참았다. 하지만 몇 시간이 지나니 한계에 다다랐다.“나, 나 좀 화장실로 부축해 줘.”윤지은은 끝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하지만 방광이 터질 것 같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나는 서둘러 윤지은을 부축한 채 화장실로 향했다.윤지은이 입원한 병실은 1인실이었기에 안에 화장실도 딸려 있었다.화장실 문 앞까지 부축한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자 윤지은은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한 발에만 힘을 줘야 했기에 변기에 앉는 것도 어려웠다. 어렵사리 변기에 앉으니 또 바지를 벗는 게 문제였다.나도 윤지은이 불편할 걸 알았기에 밖에서 조심스럽게 물었다.“도움 필요해요?”“필요 없어. 훔쳐보지 마.”‘그럴 필요 있나? 우리 사이에 안 본 곳이 어디 있다고.’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밖에서 기다렸다. 그때 갑자기 안에서 ‘아’하는 비명이 나더니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보아하니 윤지은이 넘어진 모양이었
나는 윤지은이 그동안 나를 미워하고 싫어한다고만 생각했다. 가끔 외로울 때 나를 찾아 외로움을 달래는 것 외에는 아무 감정이 없다고 여겼다.때문에 윤지은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그래서인지 이 순간 나는 모든 게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현실적인 느낌과 비현실적인 느낌이 한데 섞여 나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윤미화가 팔꿈치로 나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거 봐. 내 말 맞지? 지은 씨가 수호 씨를 좋아한다니까.”“윤 사장님도, 지은 씨가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나는 여전히 확신이 서지 않아 되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화가 난 듯 나를 째려봤다.“더 사람이 하는 대화 못 들었어? 또 어떻게 해야 믿을 건데?”“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믿기지 않아서요. 제가 전에 지은 씨한테 고백했는데 아주 대차게 차였거든요.”“우리 평소에 만나면 항상 다투기만 해요. 누구도 서로 양보하지 않아요. 게다가 연인끼리 하는 달콤한 말은 한 번도 한 적 없고, 서로 좋아한다는 고백을 한 적도 없어요.”“너무 사랑하면 미워지고 너무 미워하면 사랑한다는 거 몰라?”윤미화는 아주 철학적인 말을 했다.나는 그 말을 한참 곱씹었다.“확실히 일리가 있네요.”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너무 기쁘다. 그러면 윤지은의 마음속에 내가 있다는 뜻이니까.하지만 한편으로 골치 아팠다. 나한테 이미 애교 누나가 있기에 나는 윤지은을 책임질 수 없고 사랑을 받아줄 수도 없다.윤미화는 마치 내 뱃속에 들어왔다 나온 것처럼 농담조로 말했다.“평생 결혼하지 마. 그러면 부담 없잖아.”“어떻게 그래요?”“안 될 거 뭐 있어? 결혼은 종잇장으로 한 약속에 불과해. 누구한테 잘해주고 싶으면 그런 게 없이도 잘해줄 수 있잖아. 요즘 연애만 하고 결혼하지 않는 사람 많아. 난 그것도 괜찮다고 봐.”‘대체 뭐라는 거지?’나는 그 정도로 개방적이진 않다.나는 우선 마음을 가다듬었다.
강한나는 윤지은 옆에 앉으며 물었다.“다리는 왜 그래?”“별거 아니야.”강한나는 장소도 개의치 않고 윤지은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윤지은의 종아리는 벌겋게 부어오른 데다 물집까지 잡혔다.“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왜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둬? 그리고 이렇게 됐으면 병원부터 가지 왜 여기까지 달려와서 저 사람 일에 신경 쓰는 건데? 너 미쳤어?”강한나는 윤지은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윤지은은 남자에게 희망을 걸 사람이 절대 아니고, 남자를 위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을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그런데 윤지은은 지금 그렇게 하고 있었다.강한나는 문득 눈앞의 윤지은이 자기가 알던 그 윤지은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괜찮은 줄 알았어.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윤지은도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그녀도 다리에 흉터가 남을까 봐 걱정됐다.“안돼. 너무 아파. 얼른 병원 데려다줘.”강한나는 화가 나면서도 어쩔 수 없어 윤지은을 업고 일어났다.“못 말려 정말. 여자는 역시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니까.”윤지은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그런 거 아니야. 허튼 생각 하지 마. 정말 실수로 이런 거야. 이렇게 심각할 줄 몰랐어.”“알았다. 알았어. 해명할 거 없어. 그럴수록 오히려 뭘 숨기려는 것 같으니까.”강한나는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윤지은이 떠난 뒤 윤미화만 밖에서 나를 기다렸다.약 30분 뒤, 나는 풀려났다. 하지만 윤미화만 보여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지은 씨는요?”“몰랐어?”“뭘요?”“다리에 화상을 입어 물집까지 잡혔는데 수호 씨를 돕겠다고 달려온 거였어. 방금 경찰 친구가 병원에 데려갔어.”윤지은이 화상을 입다니. 어쩐지 방금 절뚝거린다 했는데.그 정도로 화상을 입었다면 절대 가볍지 않다.게다가 여자는 누구나 예쁜 걸 좋아하니 흉터가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게 먼저일 텐데, 윤지은은 상처를 치료하러 가지 않고 먼저 나를 찾아왔다.나는 윤미화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어
윤지은은 마음이 초조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때문에 실수로 컵라면을 엎어 뜨거운 물이 다리 위로 흘러내렸다.윤미화는 아파서 찬 공기를 들이마셨지만 대충 찬물로 덴 곳을 헹구고 얼른 옷을 입고 밖으로 향했다.“무슨 일인데요? 상세하게 말해 봐요.”윤미화는 자초지종을 대충 설명했다.이윽고 윤지은은 곧바로 강한나에게 연락했고, 경찰서에 인맥이 있던 강한나가 인맥을 통해 말을 해둔 덕에 윤지은과 윤미화는 곧바로 나를 찾아왔다.“윤지은? 여긴 어쩐 일이에요?”평소 혼잣말 할 때 이름만 부르는 게 습관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이름이 튀어나왔다.윤지은은 절뚝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윤지은이 걷는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했다.“다리는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야.”윤지은은 솔직히 말하지 않고 의자를 당겨 그 위에 앉았다.“일은 대충 들었어. 하지만 상대가 절대 합의는 안 해주겠다고 하네. 정말 의서를 돌려줄 생각 없어?”나는 단호하게 말했다.“절대 안 내놔요. 내놓으면 끝이에요. 그건 제 할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에요.”“그럼 강도죄가 성립되어 감옥살이해야 해.”윤지은이 강조했다.나는 복역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윤지은은 고개를 저었다.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어쨌든 그 의서는 절대 내놓을 수 없어요.”“봐요. 내 말 맞죠? 참 융통성이 없다니까요.”윤미화는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그때 윤지은도 나를 날카롭게 째려봤다.“융통성도 없고 멍청하기도 하네요.”“내 상황을 보고도 욕이 나와요?”‘참 동정심도 없다니까.’윤미화는 결국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죽어도 뜻을 안 꺾겠다고 버티는 거야? 이게 뭔지 봐 봐.”윤미화는 새 책 하나를 나한테 건넸다.너무 궁금한 나머지 몇 장 펼쳐 본 순간 나는 눈이 커다래졌다.“이, 이건 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서 내용이잖아요.”‘왜 인쇄되어 있지?’할아버지가 남긴 의서는
“고집 한 번 세네. 아주 정호섭과 똑같아. 좋아. 그럼 나도 쓸데없는 말 하지 않을게.”서윤기는 손을 휙 저었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직원이 내 몸을 더듬었다.“서 사장님, 없어요.”서윤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봤다.“의서를 숨겼어?“그건 원래부터 우리 집 의서였어.”“그런데 지금은 내 거야. 네놈이 내 물건을 빼앗았으니 내가 신고하면 넌 감방행이야.”“정수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기회를 줄게. 나랑 손잡으면 의서 건은 책임을 묻지 않고 큰돈을 만지게 해줄게.”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아무리 돈이 좋아도, 난 깨끗한 돈만 취급해. 양심을 팔아 돈 버는 일은 안 해.”“좋아. 그럼 신고하지.”30분 뒤, 경찰 몇 명이 현장에 도착했고 호텔 CCTV에 찍힌 바람에 나는 잡아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다 나는 결국 경찰들에게 잡혀갔다.내가 잡혀가는 걸 보자 윤미화는 다급히 달려와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의서는 찾았어요?”나는 가장 걱정되는 것부터 물었다.그러자 윤미화는 고개를 끄덕였다.“찾아서 챙겼어. 그런데 왜 잡혀가는 거야?”“그 약재상이 신고했어요. 의서를 내놓지 않는다고 잡혀가는 중이고요.”“의서가 뭐라고 주면 될 거 아니야.”“안 돼요. 그건 할아버지가 저한테 남겨준 거라 절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면 안 돼요. 서윤기는 악덕 상인이라 그 책을 망가뜨릴 거예요.”나는 그 의서만큼은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다.“그럼 나도 구해줄 수 없어.”나는 윤미화의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일도 솔직히 윤미화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서윤기의 인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경찰들은 나를 경찰서에 데려간 뒤 서둘러 심문하지 않고 취조실에 계속 가두었다.이건 분명 절차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 바로 서윤기의 체면을 봐서 일부러 이러는 거다.안에 갇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윤미화가 나를 꺼내주기만을 기다렸다.윤미화는 강북
윤미화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막았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막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방을 한 칸 한 칸 수색하다가 결국 내가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잡았다.그러고는 곧장 나를 8층 808호실로 끌고 갔다.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기뻤다.내 계획이 성공했으니 말이다.서윤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내가 말했잖아.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내가 전에 사람 잘못 봤네. 서윤기 당신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눈에 돈밖에 없는 인간이었어.”나는 서윤기를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서윤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돈 버는 게 나빠? 뭐 문제 있어? 난 상인이야. 상인이 돈 벌지 않고 설마 사람을 구할까?”“아무리 돈을 벌고 싶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약재 가격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안 좋은 약재와 좋은 약재를 섞어서 팔고 가짜 약재로 진짜 약재를 바꿔치기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이건 내가 가장 참지 못할 부분이다.약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약재상이 질이 안 좋은 약재를 섞어 팔고 가짜 약재로 수만 채운다면, 약은 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그때 서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정 사장이랑 같이 일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약재를 가장 싼 가격에 팔았어. 그렇게 매일 개처럼 일했는데 결국엔 고작 몇 푼밖에 못 벌었다고.”“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이 동종업자들이 1년 동안 번 것보다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놀리고 비꼬아 댔는지 알아? 병에 걸린 환자들도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의사한테 고마워하지, 누가 약재상한테 고마워해?”“양쪽에서 모두 찬밥 신세 당하면서 내가 왜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정 사장과 협력하지 않은 이후로 한 달에 얼마씩 버는 줄 알아?”“4억 가까이 돼. 전에는 1년에도 이 정도 못 벌었어. 매달 4억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