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어 굉장히 체면이 서고 우쭐했다.‘내가 김진호를 제압하고 이 깡패들한테 겁을 줬다니, 너무 대단한걸.’하지만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전히 칼을 김진호의 목에 겨누었다.“네가 절대 그냥 물러서지 않을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돌아올 줄은 몰랐어. 정 사장님과 화인당을 노리고, 나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네가 목적에 달성하지 않은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거 난 알아. 하지만 경고할게. 화인당은 건드리지 마. 나도 건드리지 마. 앞으로 화인당 한 번만 더 노리고 날 꼭지가 돌게 하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나는 말하면서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칼날이 김진호의 살갗을 찢으며 빨간 피가 흘러나왔다.김진호는 목에 통증이 느껴지자 소스라치게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 얼른 칼 치워. 나 목에 스크래치 났잖아.”나는 손쓸 때에도 계속 김진호를 주의하고 있어, 대동맥은 피해 공격했다.하지만 사람이 공포에 질리면 머리가 새하얗게 질린다고, 김진호는 그런 것까지 생각할 수 없었다.나는 놈들더러 우리 쪽 사람을 모두 풀어주게 하고, 짐을 챙기게 한 뒤 당장 이곳을 떠나게 했다.김진호는 이번에 정말 놀란 듯 허둥지둥 기어 일어나더니 제 목을 감싸 쥔 채 기사에게 소리쳤다.“병원, 병원으로 가. 얼른! 나 죽기 싫다고.”승합차가 멀어지자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겨우 한시름 놨을 때, 민우와 모태진이 함께 쳐들어왔다.“수호 씨, 괜찮아요?”“김진호 그 개자식. 아까 분명 가는 척하더니 또 돌아오던데, 역시 너한테 시비 걸러 온 거였구나. 너 어쩌다 이 지경으로 쥐어 터졌어? 그 개자식, 만나기만 해봐라...”나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별일 아니야. 그냥 가벼운 외상이야. 뼈를 다친 것도 아니야. 그 지식 이번에 제대로 놀랐을걸.”“대체 어떻게 된 거야?”나는 방금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설명해 줬다.그러자 민우는 박장대소하며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대단한데. 내 전매특허를
“그래. 네 안목 뛰어나. 임설아 진짜 좋은 애야.”나는 추억에 잠겨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민우의 어깨를 툭툭 치려 했지만, 손을 든 순간 너무 아파 미간을 찡그렸다.그러자 모태진이 얼른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수호 씨, 돌아가서 붕대 다시 감아 줄게요.”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모태진을 바라봤다.모태진이 전에 나를 오해한 것만 생각하면 기분이 아주 나빴다. 심지어 앞으로 모태진 일에 참견도 하지 않을 거라고 속으로 맹세까지 했었다.하지만 한의관에 문제가 생기고, 나한테 일이 생기니 모태진은 누구보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했다.게다가 방금 전 한은솔이 그 노랑머리 놈과 다시 붙어 다니는 걸 본 탓에,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됐다.하지만 워낙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모른 척하려니 답답해 미칠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모태진에게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어쨌든 할 말은 이미 했으니 성택은 본인이 알아서 해요.”이 말을 하고 난 뒤, 나는 속이 후련해서 다시 화인당으로 향했다.내가 돌아오자 동료들은 일사불란하게 나를 도와 붕대를 감아주었다.사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간단한 외상이라 물약만 발라주면 나을 정도였다.동료들은 내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면서 나를 공신 대접해 줬고, 그 덕분에 내 마음도 흐뭇했다.책임을 짊어지는 게 이렇게 성취감 있을 줄은 몰랐다.가게에 몇 없는 여직원들도 나에게 은근히 친절하게 굴었다.“수호 오빠, 오늘 저녁 시간 있으면 같이 식사라도 할까요?”“수호 오빠, 최근에 새 영화가 개봉했던데, 제가 영화표 쏠게요.”나는 웃으며 손을 저었다.“난 됐어요. 다른 사람과 함께 가요.”오민혁이 얼른 맞장구쳤다.“그래요. 차라리 나랑 같이 가요. 나 아직 솔로예요. 우리 수호 형님은 주변에 널린 게 여자라 두 사람한테 기회가 없을걸요.”“쳇, 수호 오빠처럼 실력이나 기르고 데이트 신청해요.”여직원들이 퉁명스럽게 말을 던지고 하나 둘 떠나가자 오민혁은 울적한 표정
“상대는 연애 한 번 못 해본 순진한 애라서 무조건 조심해. 평소에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지 말고.”내가 민우와 얘기하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여대생? 그것도 모쏠? 나한테 소개해 줄 수 있어요?”그 사람은 오민혁이었다.오민혁은 화인당에 몇 없는 솔로인데, 매일 연애하겠다고 노래를 불러대지만 언제 한번 성공하는 꼴을 본 적 없다.나는 순간 난감해졌다.“감히 누굴 노려요? 상대는 여대생이라고요. 아직 학교 다녀요. 본인이 그런 여자애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요?”오민혁은 뻔뻔하게 말했다.“어울리지 못할 건 또 뭐예요? 아직 어울려 보지도 못했는데, 뭔 자격을 논해요?”‘헐, 말꼬리 잡으시겠다?’나는 아예 오민혁을 향해 발길질했다. 그러자 오민혁은 키득키득 웃으며 옆으로 피했다.“수호 형님, 그 여대생 나한테 소개해 줘요. 나도 여자 맛 좀 보게 해줘요. 나 지금 기운만 넘친다고요.”일전에 오민혁과 교류가 많지 않아 그가 이런 성격일 줄은 알지 못했다.그런데 지내고 보니 털털하고 뒤끝 없는 성격 같았다.전에 분명 기분이 안 좋다고 애먼 상대에게 화풀이했는데, 그걸 꽁해하지도 않고. 나는 오민혁의 이런 성격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진지하게 말했다.“안 돼요. 상대는 내 여자 친구 사촌 동생이에요. 민혁 씨가 그 애를 해치게 둘 수 없어요.”“누가 해친대요? 그냥 진지하게 구애하겠다는 거잖아요. 결혼을 전제로. 그러면 괜찮죠?”나는 아예 오민혁을 째려봤다.“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요? 하고 싶으면 하게?”“에이, 시도도 안 해보고 어떻게 알아요. 시도할 기회도 안 주고, 어떻게 안 되는 줄 알아요?”“징그럽게 굴지 말고 저리 비켜요.”나는 오민혁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민우를 끌고 떠났다.난 절대 주선영을 오민혁한테 소개해 주지 않을 거다. 주선영한테는 더 좋은 남자가 어울린다.20여 분 뒤, 나는 민우를 데리고 내가 살고 있는 월세방에 도착했다.어젯밤 사고가 있은 탓에 주선영은
‘무슨 뜻이지?’‘내가 노출증 환자라고 생각하는 건가?’나는 너무 어이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됐어. 설명하기도 귀찮아.’이런 일은 차라리 꺼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안 그러면 말할수록 난감해질 테니까.나는 얼른 주전자 쪽으로 다가가 물 한 컵을 따랐다.그때 주선영이 갑자기 물었다.“수호 오빠, 오빠 학교 다닐 때 생리학 잘했죠?”“그건 의대생 기본 아니야? 생리학, 인체 구조는 다 기본이잖아. 그것도 못하면 혈 자리는 어떻게 파악하고 어떻게 한의사가 될 수 있겠어?”내 말에 주선영은 얼굴이 빨개지더니 부끄러운 듯 말했다.“난 그거 어려워요. 생리학 수업 들을 때 교수님이 보여주는 그림만 보면 너무 부끄러워요. 이번에도 C 학점 받았어요.”C학점이면 낙제라는 뜻이다. 그런 점수라면 앞으로 졸업에도 영향 줄 수 있다.나는 주선영의 말이 너무 놀라워 ‘저래서 어떻게 의학을 배우나’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내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주선영이 말을 이었다.“수호 오빠, 혹시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저 그쪽 지식 과외 좀 해 줘요.”“지식점은 모두 책에 있어. 진짜 배우고 싶으면 책 보면 돼. 네 가장 큰 문제는 태연하지 못하다는 거야. 의학을 배우는 애가 생리학과 인체 구조를 학습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데 그걸 부끄러워하면 어떡해?”내 말에 주선영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다.“아마도... 어릴 때 겪은 일 때문에 그럴 수도 있어요.”그 말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렇게 부끄러워해?”주선영은 입술을 깨문 채 붉은 눈으로 나를 봤다.“어릴 때, 남자 친척이 우리 집만 오면 엄마 아빠가 없는 틈에 자기 그걸 보게 했어요... 그때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었었는데. 그 뒤로 남자 몸을 마주하는 게 무서워요. 책 속에 있는 사진도 보지 못하겠어요.”처음에는 호기심에 질문한 거였는데, 주선영의 경험을 듣고 나니 화가 치밀었다.‘젠장. 그게 성추행이랑 뭐가 달라?’‘어린애한테 그런 게 얼마나 큰 상처로
“그런데 두 분 모두 저한테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는데, 제 성적이 나빠 실망할까 봐 걱정돼요.”“넌 가만 보니 생각이 너무 많아. 뭐든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지부터 생각하니 진짜 너를 잃는 거야.”이런 성격은 좋지 않다. 남을 만족하기 위해 항상 본인이 고생하니까.본인도 즐겁지 못하면서 남을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뭐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든다.그래서인지 이제는 남주 누나와 백연우 쌤 같은 성격이 좋다고 느껴진다.소탈하고 자유롭고. 자기한테 그 어떤 압력도 부담도 주지 않으니까.“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어릴 때부터 이랬어요.”“성격이 그런 건 네 탓이 아니야.”나는 계속해서 주선영을 위로했다.그러자 주선영은 코를 훌쩍이며 말을 이었다.“수호 오빠, 저 정말 생각을 바꾸고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래서 오빠 도움이 필요해요.”나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럼 책 가져와. 내가 도와줄게.”주선영은 그제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책가방에서 책을 찾았다. 하지만 얼마 뒤, 이내 입을 삐죽거리며 나왔다.“어떡해요? 책을 두고 왔어요.”“그럼 내일 돌아오면 가르쳐 줄게.”“안 돼요. 교수님이 제 학습 정황 확인하겠다고 했어요... 제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면 부모님을 부르겠댔어요.”‘뭔 선생님이 이래? 대학에서 무슨 학부모를 불러?’나는 속으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나중에야 생리학 교수님이 주선영 어머니 친구라는 걸 알게 됐다.‘난 또 주선영의 머리가 너무 나빠서 이런 방식으로 압력 주는 줄 알았네.’나는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아니면... 내가 차로 데려다줄 테니까, 학교에서 책 가져올래?”주선영은 겸연쩍게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그 생각 했어요.”“그럼 가자.”벌써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차로 갔다 다시 돌아오면 아마 11시가 될 거다. 때문에 나는 얼른 책을 가지고 돌아와 주선영을 가르쳐주고 일찍 잘 생각이었다.우리는 강북대 한의과 대학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여자 기숙사 쪽으로 걸어
“미쳤어요? 학과장이라는 사람이 왜 그래요? 학생들한테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이곳은 학교지 용천호텔이 아니다. 때문에 이토록 서슴없이 행동하는 백연우가 믿기지 않았다.하지만 백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느새 손을 내 옷 속에 밀어 넣어 손끝으로 내 피부를 살살 간지럽혔다.“내 눈을 봐.”백연우가 속삭이듯 말하며 바짝 달라붙는 바람에 내 몸도 점점 불타올랐다.하지만 나는 이성을 유지한 채 백연우의 손을 잡았다.“안 돼요. 난 더 이상 예전처럼 굴지 않아요. 전 양동준 형님처럼 강해지고 싶어요.”백연우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발끝을 들더니 내 입술에 쪽 입맞춤하더니 따뜻한 입김을 내 턱에 불었다.“양동준처럼 강해지는 거랑 누나를 만족시키는 게 서로 모순되지는 않잖아. 양동준처럼 강해져도 나랑 하는 데 지장 없는 거 아니야?”“안... 안돼요...”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연우는 내 턱을 깨물었다. 그것도 아주 살짝.백연우는 일부러 나를 자극했다. 심지어 내 옷 안에 들어온 손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백 쌤... 읍...”백연우가 내 입을 마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이 요물 같은 여자는 남자 마음을 어떻게 휘어잡아야 할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먼저 내 마음에 불을 지펴놓고 오히려 생글생글 웃으며 뻔뻔하게 물었다.“더 원해?”당연한 걸 왜 묻는지. 나는 이미 완전히 자극받아 당장 이 자리에서 백연우를 안고 싶었다.하지만 백연우는 내가 직접 말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역시 누나라 이건가? 사람 마음을 너무 잘 휘어잡네.’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백연우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날 이렇게 만들었으면서 원하는지 묻긴 뭘 물어요?”나는 아래가 너무 불편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백연우가 갑자기 나를 놀려댔다.“그런데 이젠 내가 싫어. 나 숙소 돌아갈 거야.”“안 되죠.”나는 백연우가 도망칠까 봐 그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먼저 나를 건드렸으면서 어딜 도망치려고?’“좋아요. 우리
방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두말 없이 백연우를 벽에 밀쳤다.“아까 저를 혼내 준다고 했죠? 어디 혼내 봐요.”나는 백연우의 옷을 거칠게 찢었다.그러자 백연우는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안 그러면 어떡해. 발각될 텐데.”나는 더 이상 그런 걸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원래는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했으나, 막상 그 행위에 빠지니 시간 가는 줄도, 주선영이 기다리는 줄도 까맣게 잊은 채 눈앞의 아리따운 여자로 머리가 꽉 차버렸다.백연우와 이런 짓을 하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백연우는 고난도 동작을 시도했다. 심지어 세 번이나 해 결국에는 기진맥진해졌다.여자가 성욕이 쌓이면 남자보다 더 무서워진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나는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고, 백연우는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고작 세 번 만에 힘 빠진 거야?”“매번 할 때마다 40분도 넘게 했거든요. 게다가 다 제가 리드했으니 당연히 체력 소모가 심하죠.”나는 핑곗거리를 찾았다.‘그런데 이 여자는 왜 이렇게 즐거운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니까 오히려 내가 당한 것 같잖아.’“오늘 자고 갈래?”백연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사 원피스를 걸치며 말했다.하지만 그때, 나는 문득 주선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게 떠올라 얼른 침대에서 내려왔다.“헐. 큰일 났다. 선영을 잊었네.”나는 신속히 옷을 갈아입고 다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순간까지도 내 다리는 후들후들 떨렸다.‘불여우한테 단단히 홀렸네. 이러다 목숨이 남아나질 않겠어.’나는 속으로 감탄했다.한편, 백연우는 내 앞에서 경험 많은 누나인 것처럼 굴더니 내가 떠나자마자 얼굴색이 싹 바뀌었다.“어린놈의 자식이. 뭔 힘이 그렇게 세? 습... 다리 아파.”알고 보니 백연우는 내 앞에서 다리가 후들거린다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연기한 거였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 백연우는 워낙 뭐든 주도권을 쥐려고 하는 여자니까....내가 여자 기숙사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나는 급한
물론 주선영과 합숙 생활을 하긴 하지만, 방에 들어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역시 여자애라 그런지 방도 핑크 핑크하고 귀염뽀짝하게 꾸며져 있었다.사실 방금 전 에너지를 다 쏟아부은 탓에 나는 잠이 솔솔 몰려왔다. 하지만 이미 과외 해주겠다고 동의한 이상 약속은 지켜야 했다.“내 설명 이해됐어? 사실 이 과목 아주 간단해. 인체의 각 부위에 대응해서 이해하면 바로 기억할 수 있어.”나는 말하면서 하품했다.그도 그럴 게, 벌써 새벽 1시라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었다.주선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대충 알아들었어요. 물론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괜찮아요. 내일 교수님 질문에 대답할 정도는 충분해요. 오빠도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쉬세요.”나는 사양하지 않고 바로 일어났다.“그래. 나 먼저 가서 잘게. 너무 피곤해서. 너도 일찍 자.”방에 도착했더니 민우가 이미 내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내 자리까지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나는 얼른 다가가 민우의 다리 한쪽을 끌어 옆으로 밀었다. 다행히 민우도 깊이 잠들었는지 내가 그렇게 했는데도 깨어나지 않았다.얼른 그 옆에 누웠더니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눈이 스르르 감겼다.하지만 내가 한참 자고 있을 때, 갑자기 손 하나가 내 몸을 더듬으면서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설아야, 너 몸매 진짜 좋다...”‘이건 민우 목소리 아닌가?’‘설마 자면서 나를 임설아로 착각한 거야?’순간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나 앉아 보니 민우의 아래가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이 변태자식. 감히 나를 여자로 착각해?”게다가 몸까지 더듬거리는 바람에 너무 역겨웠다.나는 민우를 깨우려고 연신 발길질했으나, 이미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 민우는 내가 아무리 차도 깨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마음 같아서는 밖에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내가 집으로 끌어들였으면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결국 드르렁드르렁 코를 골며 자는 민우를 보다가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민우가 다시 나를 끌어안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
사모님의 이런 모습을 보니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문 채로 옆을 지켜드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최근 계속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그동안 제대로 휴식한 적 없어, 나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눈을 붙이려고 했다.하지만 잠을 편히 잘 수 없었다. 꿈속에서 정 사장님은 계속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나도 사장님을 구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사장님과 닿을 수 없었다. 그러다 꿈의 마지막쯤 정 사장님은 가면을 쓴 사람에게 살해당했다.꿈에서 놀라 깬 나는 이미 온몸이 식은땀에 푹 젖어 있었다.비록 꿈이었지만 꿈에 나온 장면들이 너무 생동해서 직접 경험한 것 같았다.밖은 어느 때부터인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최면 노래처럼 느껴졌다.피곤함에 눈을 비비다가 문득 사모님이 침대에서 사라졌다는 걸 발견한 나는 다급히 호텔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모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나는 호텔 안을 마구 달리며 윤지은에게 전화했다.“혹시 유미 사모님 봤어요?”[나 계속 밖에 있어서 유미 본 적 없는데? 네가 유미 호텔에서 돌봐주던 거 아니었어? 그런데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윤지은이 반문했다. 이에 나는 얼른 설명했다.“제가 너무 피곤해서 잠깐 눈 붙였는데 깨어나니 사모님이 사라졌어요.”[넌 대체 뭘 할 수 있어? 사람 하나 돌보는 것도 못해?]윤지은은 나를 꾸짖기 시작했다.나는 얼른 전화를 끊고 이리저리 찾으며 물어봤지만 호텔 직원들도 모두 사모님을 본 적 없다고 했다.결국 나는 프런트에 달려가 물었지만 프런트 직원들도 못 보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럼 CCTV 한번 확인할 수 있을까요?”“안 됩니다. 호텔 규정상 CCTV는 함부로 보여드릴 수 없어요.”나는 다급히 말했다.“제 친구 남편이 이틀 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친구 정서가 엄청 불안해요. 반드시 빨리 찾아야 해요. 지금 우선 CCTV 확인해 줘요. 제가 당장 경찰에 신고할 테니까...”“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자가 이렇게 빨리 남편 시신을 화장하려고 하는 이유가 없다.내가 분명 이번 교통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닐 거라고 말했는데 들을 생각도 하지 않다니.나는 슬쩍 찔러보려고 다시 물었다.“왜 그렇게 서둘러요? 혹시 뭐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여자는 내 말을 듣더니 얼굴색이 확 바뀌었다. 나는 뭔가 찔린 듯 불안해하는 여자의 행동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여자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뭔가 알고 있는 거죠? 알고 있는 거 다 얘기해요. 그게 이번 사고의 진실을 밝힐 수도 있어요...”“뭐 하는 거예요? 아파요.”여자는 내 손을 뿌리쳤다. 여자의 아들은 어머니가 괴롭힘당하는 걸 보자 바로 나를 막아섰다.지금 내 실력으로 두 사람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윤지은은 일을 크게 만들까 봐 내 팔을 쿡쿡 찔렀다.“됐어. 저 사람들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나는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이 너무 수상해 반드시 기회를 잡아 두 사람의 입을 열어야 했다.하지만 점점 모여드는 구경꾼들 때문에 나는 결국 포기할 수박에 없었다. 만약 나 혼자였다면 내가 내키는 대로 소란을 피웠을 테지만, 정서가 불안정하기에 사모님한테 피해 가게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장례식장을 떠난 뒤 두 사람을 찾아 결판 낼 생각이었다.오늘 장례식장에 나타난 유가족은 또 있었다. 바로 운전한 오 기사님 가족이었다.오 기사님 가족은 얘기가 잘 통해 화장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 그들 역시 이번 교통사고가 수상쩍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오 기사님 아들은 심지어 확신했다.“제 아버지 운전 실력은 엄청 좋아요. 사고가 난 곳도 생전에 수백 번도 더 다녔던 곳이라 그 길을 잘 알고 있어요.”“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도 처음에 믿지 않았어요. 난 이번 일 제대로 조사해서 아버지 결백을 증명할 거예요.”겨우 생각이 같은 사람을 찾았다는 생각에 나는 너무 기뻤다. 결국 조금희의
“들여보내 줘요. 나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 같이 있어 줘야 해요...”장례식장 입구에서 유미 사모님은 몇몇 직원들에게 가로막혀 애타게 울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자마자 나와 윤지은은 급히 달려갔다.“사모님, 여긴 왜 왔어요?”장례식장도 규칙이 있는데 가족 방문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가 나가기 전 분명 사모님더러 호텔에서 휴식하라고 했는데,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한참 애를 먹던 두 직원이 얼른 말했다.“얼른 이분 좀 말려 봐요. 이곳 냉기를 보통 사람들은 견디기 힘들어하세요. 그런데 자꾸만 안에 들어가겠다고 하시는데, 절대 안 됩니다.”“그리고, 절차는 다 밟았나요? 다 밟았다면 얼른 화장할 수 있게 사인하세요. 시체 안에 계속 두고 있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에요...”나는 손을 저으며 두 직원의 말을 잘랐다.“네, 알겠어요. 먼저 가서 일들 보세요.”나와 윤지은은 유미 사모님을 조용한 곳으로 데려갔다. 사모님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고 너무 지쳐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윤지은도 드물게 눈시울을 붉혔다.“유미야, 이러지 마...”윤지은은 흐느끼느라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사모님 역시 슬피 울부짖었다.“왜? 좋은 사람은 복이 온다며? 그런데 왜...”“호섭 씨는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인데. 호섭 씨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선행을 베풀었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왜...”처절한 외침에 듣는 나도 너무 괴롭고 삼장이 칼에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이 순간 어떤 위로의 말도 소용없다. 그 어떤 위로도 사모님의 비통한 심정을 달랠 순 없으니까.나는 그저 사모님이 진정할 수 있게 침을 놔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뒤 나는 조금 안정이 된 사모님을 안아 차에 앉혔다. 창백하고 초췌한 사모님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 그때 윤지은이 이를 악물며 악에 받쳐 말했다.“이번 사건 우리가 꼭 밝혀낼게.”그 순간 나도 윤지은과 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고 그걸 당장 토
나는 윤지은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지도 못해 무척 감격스러웠다.나 혼자 다른 도시에서 도움 없이 이 사건을 조사하는 건 확실히 힘들다. 하지만 윤지은이 같이 조사하겠다고 하니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나는 느릿한 말투로 진지하게 말했다.“이번에 우리 같이 손을 잡고 정 사장님을 위해 진실을 밝혀요.”그동안 나와 윤지은은 서로 고양이와 개처럼 항상 만나기만 하면 싸웠는데, 이번만큼은 힘을 합쳐 함께 정 사장님 사건을 조사하기로 했다.우리는 해야 할 일을 확인한 뒤, 강한나를 만나러 갔다. 강한나라면 전문가의 관점에서 우리를 도와 증거를 수집할 수 있을 테니까.“최선을 다해 볼게.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내가 방금 사건 기록을 봤는데 현장 사진과 다양한 증거들을 취합해 보면 단순 사고사일 수 있어.”“내가 의심했던 브레이크 흔적 거리인데, 이것도 어찌 보면 사고사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 결론적으로 조사하기 매우 어려워.”한참 듣고 있던 윤지은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현장 증거로 조사할 수 없으면 다른 쪽으로 출발해야겠네.”한창 낙담하고 있던 나는 윤지은의 말에 다급히 물었다.“혹시 방법이 있는 거예요?”윤지은은 팔짱을 끼면서 냉정하게 분석했다.“내가 알기로 운전한 기사는 호섭 씨랑 오랜 친구였고 운전 실력도 엄청 뛰어나. 이 점에서 출발하면 될 것 같아. 그리고 함께 차에 탔던 피해자 가족들도 조사해 볼 수 있어.”나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음,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럼 사고 유가족들부터 조사해 봐요.”강한나는 우리를 보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정말 그렇게 할 거야? 이 사건이 만약 인위적인 거면 두 사람도 위험해. Y시는 국내 다른 도시들과 달라. 여긴 무법지대인 D국과 엄청 가까워.”윤지은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그게 뭐? 의심 가는 구석이 있는데 그냥 덮자고? 그러고도 내가 무슨 친구야? 유미 지금 충격이 너무 커. 호섭 씨는 유미한테 가장 중요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