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조금 뒤 보기로 약속했다.민우는 신이 나서 말했다.“수호야, 여기서 기다려. 나 설아 데려올게.”“난 됐어. 둘이 만나는데 내가 왜 끼어?”민우는 다급히 말했다.“안돼, 넌 내 은인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까지 설아를 피하고 있었을 거야. 나 설아 앞에서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 내 말 들어. 기다려.”말을 마친 민우는 신이 나서 전기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버렸다.민우가 떠난 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설아와 대화했던 내용을 뒤져봤다.특히 어제 받았던 음성 메시지를. 지금까지도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나는 모든 대화 내용을 삭제했다. 이러면 증거가 없어질 테니.그때 임설아가 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안녕하세요. 나 임설아 엄마예요. 어젯밤 설아 핸드폰으로 대화한 건 그쪽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어요. 우리 설아랑 뭐 있죠?]‘귀신을 속여라.’‘아주 본인이었다고 광고를 해!’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협조했다.[어머님이셨군요. 저와 임설아는 그저 평범한 친구입니다. 아무 관계도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임설아는 나에게 또 문자를 보냈다.[믿어요. 어제 보낸 음성 메시지 역시 테스트 일종이니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아요.]나는 웃으며 임설아의 문자에 답장했다.[네, 그럼요. 하지만 좀 궁금하네요. 혹시 어제 저를 테스트하려고 스스로 한 거예요?]임설아는 화가 난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군.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당연히 인터넷에서 찾았지.][그렇군요. 알겠어요. 부모님 마음은 다 똑같잖아요. 이해해요. 그러면 그 사진은요? 어떻게 딸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폭로하는 사진은 마구 배포할 수 있어요?][사진으로 유혹하지 않으면 속았겠어요?][네, 참 촐명하시네요.]‘얼마나 똑똑했으면 낯선 남자를 시험하려고 자기 딸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보내지?’‘이런 말은 귀신도 안 믿겠어.’대화를 하면 할수록 어이없는 일의 연속이었다.심지어 임설
“수호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민우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남자가 그립다던데?”“어, 정말이야?”신민우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졌다.“설아 어머니 남편 있는데?”“남편이 있는데 뭐? 남편이 있다면 만족시켜 주지 못하나 보지. 임설아 아버지도 중년이라서 기능이 많이 약해졌나 보지, 반대로 어머니는 오히려 욕구가 많을 나이고.”나는 덤덤한 얼굴로 헛소리했다. 그러다가 임설아를 바라봤다.“임설아, 안 그래?”“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임설아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니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그러게 왜 자기 어머니를 방패막이로 사용해? 내가 바보인 줄 아나?’‘네가 놀겠다니 같이 어울려주는 거야.’“임설아, 네 어머니 병원에 좀 데려가 봐. 안 그러면 참다가 병 나.”사실 이 말은 임설아에게 하는 충고였다.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왜냐하면 임설아 낯빛을 보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라는 게 티가 났으니까.임설아는 나를 휙 째려봤다.“너나 잘해. 민우야, 나 오늘 집에 가기 싫어. 네 자취방 가고 싶어.”퉁명스럽게 나를 쏘아붙인 임설아는 얼른 민우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민우는 안색이 변했다.“뭐? 내 자취방에?”민우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테이블 아래로 그를 걷어찼다.‘아까 말한 걸 모두 잊었나?’사실 민우는 걱정이 있었다. 지금 그가 사는 곳은 환경이 안 좋아 임설아가 자기와 함께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하지만 내가 자꾸만 발로 툭툭 차며 임설아를 집에 데려가라고 일깨워 주니 갈등이 생긴 모양이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 나만 조급해 났다.‘나였으면 진작 동의했을 텐데. 이러니까 임설아가 불만이 많지.’“설아야, 아니면 내일 내 일자리가 확정되고 다른 자취방을 알아보면...”그 말을 들은 설아의 낯빛은 이내 어두워졌다.“또 변명이야? 매번 왜 변명이 그렇게 많아? 난 그저 너랑 하룻밤 같이 있고 싶을 뿐인데, 왜? 그게 그렇게
[수호 씨,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돌아와요.]애교 누나의 말에 나는 헤실 웃었다.“누나, 저 보고 싶어요?”[장난 그만 쳐요. 시간도 늦었고, 다치기까지 했는데 나쁜 사람 만나면 어떡하려고요?]“나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젠장!”나는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건너편에서 애교 누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수호 씨, 무슨 일이에요?]나는 불안한 마음에 뒤로 물러섰다.그도 그럴 게, 나랑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흰머리 사내, 정태곤이 음산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으니까.‘이거 너무 운이 없는 거 아니야?’나쁜 사람이 어디 있냐고 말하자마자 나쁜 사람을 만나 버리다니.게다가 이 골목은 너무 외진 고에 있어, 도움을 청해도 올 사람이 없다.나는 애교 누나한테 상황 설명할 새도 없이 전화를 끊고 뒤돌아 도망쳤다.정태곤은 내 뒤를 천천히 따라왔다. 뒤를 보니 점점 작아지는 놈의 실루엣에 어느 정도 안심이 됐다.하지만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정태곤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그것도 미친 속도로.“젠장, 젠장...”나는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난 정태곤과 같은 레벨도 아닌데, 이대로 잡히면 죽지 않더라도 적어도 불구가 될 게 뻔했다.정태곤이 점점 가까이 오더니 갑자기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낮에는 도망쳤겠지만, 지금도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나는 다급히 소리쳤다.“나 정말 소여정 씨랑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난 평범한 직원이라고, 내가 어떻게 소여정 씨 같은 사람을 건드려?”정태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뛸 수 없었다.그러다 결국 정태곤이 나를 따라잡아 발로 세게 걷어찼다.그때 어찌 된 영문인지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 발길질을 피해버렸다.그 순간, 정태곤의 눈빛이 날카로워지며 나를 향해 살기를 내뿜었다.“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발 괜찮죠?”나는 걱정스레 물었다. 그 목적도 사실은 내가 보통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기 위해서였다.하지만 정태곤은 그 말을 무
[내가 뭘 어쨌다고?]소여정의 대답에 나는 더욱 화가 났다.[이게 다 소여정 씨 때문이잖아요. 당신 남자가 사람을 시켜 나를 죽이라고 했다고요. 낮에도 나를 죽일뻔하더니, 방금 또 죽이러 쫓아왔어요. 나 하마터면 죽을뻔했다고요.]그 시각 별장 안.소여정은 내가 보낸 문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지금 괜찮아?]나는 셀카를 한 장 찍어 보냈다.[직접 봐요. 팔도 깁스를 하고 갈비뼈도 두 개나 부러져서 회복 중인데, 식사 도중에 그 악마 같은 놈이 또 튀어나왔어요. 내가 발이 빨랐으니 망정이지, 안 그러면 벌써 시체가 됐다고요.][그쪽이 죽으면 내가 맨 처음 향을 피워줄게.][헐, 내가 이렇게 됐는데 농담이 나와요? 정말 악독한 사람이네요.]대화를 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소여정이 만약 내 옆에 있었다면 한바탕 제대로 혼쭐내줬을 텐데.[나 원래 양심도 없고 독한 여자야. 안 그러면 왜 남의 정부나 하고 있겠어?][아주 대단하네요. 그래요, 앞으로 피하면 그만이지. 우리 더 이상 연락하지 말죠.]나는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소여정을 아예 삭제했다.생각할수록 소여정이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는 본인 때문에 이 지경으로 다쳤는데, 위로의 말은 하지도 않고 놀려대다니.‘생긴 게 예쁘면 뭐 해? 속이 악독한데. 앞으로 이런 여자랑은 더 이상 엮이지 말아야지.’한편 별장에 있던 소여정은 나에게 문자를 보내다가 전송 실패하자, 그제야 내가 본인을 삭제했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때, 샤워를 마친 임천호가 밖으로 걸어 나오더니 소여정더러 자기 다리에 앉으라고 사인을 보냈다.소여정은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걸어가 임천호의 품에 안겨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정태곤더러 돌아오라고 해요.”“왜?”“나 정수호라는 남자랑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조직 보스씩이나 되는 사람이 일개 마사지사를 왜 물고 늘어져요? 이건 좀 수준 떨어져 보여요.”임천호는 허허 웃으며
소여정은 고개를 들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임천호를 바라봤다. 임천호는 얼른 그녀에게 강하게 키스했다.“이러지 마, 나 마음 아파.”“마음 아프기는 해요? 정태곤을 강북에 보내 내 뒤를 캐게 하고, 의심하고 믿지 않았으면서.”임천호는 소여정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내가 잘못했어. 지금 당장 정태곤한테 연락해서 돌아오라고 할게.”임천호는 말을 마치자마자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정태곤, 돌아와.”“봤지? 네 말대로 했으니 이제 기분 풀렸지?”소여정은 임천호 품에 기댔다.“기분 나쁠 것도 없어요. 제 말대로 해주는 것만으로도 기꺼워요. 자꾸만 제가 변했다고 하는데, 사실 회장님도 변했어요. 제가 예전처럼 회장님한테 의지하는 건 아니지만, 자꾸 저를 예전처럼 속박하지 말아줄래요?”“강북 사람들 중에 제가 회장님 여자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제가 어디로 도망가겠어요?”소여정은 말하면서 구슬 같은 눈물을 떨구었다.소여정은 사실 임천호에게 마음이 있다.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가장 무기력할 때, 임천호가 불구덩이 속에서 그녀를 꺼내줬으니.한때 소여정은 임천호에게 무척 의지했었다. 심지어는 임천호의 곁에서 떨어지면 죽을 것만 같았었다.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성장한다.그렇게 성장한 소여정은 많은 걸 알게 됐고, 더 강해졌고, 독립적으로 변했다. 때문에 일정한 공간과 자유가 필요해졌다.그런데 소여정이 그럴 때마다 임천호는 매번 그녀가 자기 곁에서 떠나려는 줄 알고, 더 속박하고 옥죄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점점 멀어졌고,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소여정도 변하고 싶지만, 미래가 어떨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그 시각, 강북의 어느 한 거리에서 임천호의 전화를 받은 정태곤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정태곤은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임천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결국은 강북을 떠났다. 하지만 그와 나의 원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나는 아슬아슬하게 동네에 도착했고, 애교 누나 집에 들어서고 나서야 안심할
“안 돼요.”나는 단번에 거절했다.“누나, 안 그래도 저 고작 마사지사인 데다 나이도 어리고, 이룬 성과도 없어요. 그런데 이대로 아버님 도움까지 구한다면, 아버님은 저를 더 무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더 허락할 리 없고.”이것 때문이라도 나는 절대 누나의 집에 가지 않을 거다.애교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위로했다.“수호 씨 마음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이잖아요. 우선 안전부터 보장해야 하지 않겠어요?”“저 스스로 보호할 수 있어요. 믿어줘요!”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무엇보다 누나에게 나도 이젠 남자라는 걸, 그래서 모든 일에서 누나가 돌봐줄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애교 누나는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수호 씨도 참, 나한테까지 그렇게까지 내외할 거 없어요. 난 그런 거 상관 안 해요...”“누나, 그런 말 하지 마요. 저 이미 결정했어요.”나는 애교 누나의 말을 잘랐다.그제야 애교 누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았어요. 정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만약 정말 상대하기 벅차면 꼭 말해야 해요.”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저녁에 경험한 일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철렁할 일이지만, 그만큼 도움도 많이 됐다.특히 민우의 기술은 너무 도움됐다. 정태곤 같은 사람한테도 먹혔으니까.‘그 기술 잘 연습해야지. 아주 익숙해져서 민우보다도 강해질 거야.’그러면 나중에 정태곤을 다시 만나더라도 너무 놀라서 넋을 잃은 일은 없을 테니까.침대에 누운 내 머릿속에는 온통 정태곤과 싸우던 모습뿐이었다.그대로 열심히만 연습하면 분명 실력이 크게 늘 거란 확신도 들었다.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사모님이 사장님께 내가 다쳤다고 얘기한 덕에 집에서 몸조리하라는 사장님의 연락을 받게 됐다. 때문에 당분간은 출근할 필요가 없어 원하는 시간에 깨어날 수 있었다.내가 깨어났을 때, 애교 누나는 이미 아침상을 차려 놓고
“내 딸이 왕정민과 이혼한 게 자네 때문인가?”이태웅은 다시 물었다.수간 너무 불안해졌다.아무리 봐도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불안해서 얼른 설명하려고 할 때, 애교 누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아버지, 그런 거 아니에요. 왕정민이 바람피웠어요. 그 인간이 먼저 잘못했다고요.”“그렇다고 똑같이 구는 거니?”이태웅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애교 누나를 향해 호통쳤다.그 목소리에 놀란 애교 누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물을 그썽거렸다.애교 누나가 아버지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나도 무서웠지만 애교 누나가 억울하게 꾸중을 듣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아버님, 이 일은 애교 누나 잘못 아닙니다.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태웅은 차갑게 내 말을 끊었다.“자네를 탓하라고? 당연한 거 아닌가? 내 딸과 왕정민이 어떻든 두 부부 사이의 일인데,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나? 내 딸과 왕정민이 이혼하자마자 내 딸 집에 얹혀사는 건 무슨 속셈이고?”그 질문에 얼떨떨해져 나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했다.“나쁜 마음으로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애교 누나랑 같이...”“그 입 다물게!”이태웅은 또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그 목소리에 놀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나는 이토록 불안한 적도, 겁먹은 적도 없다. 이토록 내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이고.이태웅은 아직도 나를 혼내고 있었다.“내 딸과 만나고 싶다고? 무슨 자격으로? 왕정민 같은 사람도 내 눈에 안 차는데, 자네가 내 눈에 찰까?”이태웅의 싸늘한 눈초리가 내 마음을 쿡 찔렀다.나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이태웅이 나를 설교하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입을 열었다.“네, 저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신분도 백도 아무것도요. 그래서 애교 누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제가 평범하다는 걸 인정해요.
애교 누나는 아버지 말에 경악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아버지, 제가 왜 본가로 가야 하는데요?”“왕정민과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이젠 하다 하다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놈을 만나? 이 동네에 내 지인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 사람들이 내 앞에서 너를 어떻게 말하는지 아냐고?”이태웅이 노호했다.애교 누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대꾸했다.“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인데요? 설마 평생 남 눈치만 보며 살아야 해요?”“뭐라고?”이태웅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애교 누나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누나가 겁에 질린 모습에 나는 다급히 끼어들었다.“아버님, 제가 갈게요. 지금 당장 갈게요. 그러니까 애교 누나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나는 더 이상 애교 누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얼른 짐을 챙겨 누나의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수호 씨, 어디 가요?”“누나, 걱정하지 마요. 저도 손발이 있는데, 어디라고 못 가겠어요? 그리고 저 일자리도 있으니 벌어먹고 살 수 있고, 제 몸 건사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요.”말을 마친 나는 이태웅을 한번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 표정 때문에 방 안 전체에 먹구름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애교 누나의 집에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기분은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너무나도 괴로웠다.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누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하니까.형수네 집을 지날 때 나는 일부러 잠깐 멈칫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본능인 것 같았다.그 뒤로 나는 얼른 건물을 빠져나와 지하 차고로 향했다. 차에 앉은 순간 눈앞이 막막했다.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 빨았다. 하지만 이 시간에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그렇게 한 대, 또 한 대 입에 물다 보니 몇 대를 피웠는지 목이 뻑뻑했다.나는 평소에 담배를 별로 피우지 않는다. 이
전에는 누가 와서 소란을 피울까 봐 민우더러 나와 함께 가게에서 지내자고 했지만, 지금 사장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민우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다. 때문에 뭐든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민우를 집에 데려다 두는 길에 그는 나에게 함께 사장님 댁에 있어 달라냐며 물었다. 그러면 서로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서.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적 없어. 하지만 사장님을 돌보려고 그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너까지 데려가면 이상하잖아.”“난 그 개자식들이 또 너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러지.”“나도 무서워. 하지만 이미 준비해 뒀어.”나는 의자 밑에서 도구 몇 개를 꺼냈다.민우는 그 도구들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이 도구들은 조금 도움이 될 뿐이야. 그래도 내가 너한테 가르쳐준 방법을 사용해.”민우는 말하면서 손을 움켜쥐는 동작을 했다.그 동작에 나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그 방법 확실히 좋더라...”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백미러에 언뜻거리는 차 한 대가 비쳤다.무의식적으로 뒤에 따라붙은 사람이 운전할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챘다. 그도 그럴 게, 뒤에서 달려오는 차는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마치 나를 강제로 세울 것처럼 굴었으니까.“잘 앉아.”나는 불안한 예감에 다급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다만 내 차의 유일한 단점은 속도를 너무 빨리 낼 수 없다는 거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뒤 차에 따라잡혔다.놈들은 내 차를 강제로 멈추게 할 작정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 차량은 승합차였는데, 그런 승합차는 용량이 커 적어도 열댓 명을 태울 수 있었다.만약 차에서 열 몇 명이 우르르 내리면 나와 민우 둘이 대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때문에 나는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승합차 두 대는 좌우에서 협공하며 내 차를 가운데 몰아 끼긱끼긱, 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분명 차가 내는 소리였지만 내 살점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아직 차 할
내가 한창 망설이고 있을 때 사장님도 말을 보탰다.“수호 씨, 남아서 좀 도와줘. 우리 마누라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이런 고생 언제 해 봤겠어? 이것 봐, 피곤해하는 거 보이지? 나도 솔직히 마음 아파.”사장님과 사모님이 모두 나를 남으라고 설득하는 상황이라 나도 더 이상 거절하기 곤란했다.“그래요. 제가 남아서 도와드릴게요.”사장님이 드시고 사용해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 확실히 번거롭긴 하다. 때문에 나도 사모님 혼자 사장님을 케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다.사모님은 내 말에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수호 씨는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어요. 여기 모두 있으니까. 전처럼 계속 객실에서 자면 돼요. 그곳 채광이 좋고 공기도 좋아요...”사모님은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해할까 봐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사장님 내외가 사는 집은 모두 고급 가구를 사용했는데, 내가 이곳에 남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걸 누려볼 기회가 어디 있을까?사장님 내외는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다 미안할 따름이었다.사장님 몸은 우선 한약으로 며칠간 보양해야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사실 힐 것도 없어 나는 가게 일을 돌볼 수 있었다.요 며칠간 주해진은 소란 피우러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대로 포기했다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동료들한테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한편 주해진은 그날 도망치듯 가게를 떠난 뒤 마음이 계속 안 좋았다.하지만 최근 일손을 구해봤지만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주해진이 깡패라 정계와 연이 닿는 지인이 적었고, 두 번째 이유는 사촌 형이 다시는 화인당을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주해진은 입으로는 싫다고 했지만 요 며칠간 그래도 제 분수를 지켰다. 다만 김진호 병문안을 간 뒤, 마음이 또 바뀌었다.김진호는 나를 여자 등에 빨대 꽂고 출세한 놈으로 말하면서, 깡패인 주해진이 나 같은 등신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웃음거리
어르신도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너도 잘했어. 처방한 게 거의 다 맞췄으니까. 새내기 같지가 않아. 네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웠나 보네?”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럭저럭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어려 할아버지의 모든 재능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괜찮아. 앞으로 내가 네 할아버지니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어르신과 약처방을 확인한 뒤, 나는 화인당에 가 이틀 치 약을 짓고 동료들에게 사장님이 퇴원했다는 사실을 말했다.다들 사장님이 다 나은 줄 알고 기뻐하는 눈치였다. 특히 민우는 슬그머니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돌아오면 우리 따로 나가는 거지?”나는 얼른 민우의 말을 잘랐다.“사장님이 돌아와도 이런 말은 급하게 하면 안 돼. 화인당이 안정되고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 때 떠날 수 있어.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건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지만, 화인당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지. 사장님이 우리 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민우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앞으로 절대 함부로 말 안 할게.”“참, 요즘 태진 선배는 어때? 가게에서 본 적 있어?”나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모태진이 오늘 없다는 걸 발견했다.내 말에 민우가 대답했다.“누가 알겠어? 또 그깟 일 때문에 가게에 피해 갈까 봐 안 나왔겠지. 상관하지 마. 다 큰 어른이 본인 몸 하나 건사 못 하겠어? 수호야, 아직은 따로 나가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천수당을 관찰하는 건 괜찮지?”“관찰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마.”나는 신신당부했다.그러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나는 약을 가진 후 다시 사모님 댁으로 돌아갔다.이 약 일부는 목욕용이고 일부는 마시는 약이라 나는 위애 상세하게 적어 따로 분리했다. 그리고 먹는 약은 모두 달여 진공 포장한 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이렇게 하면 마실 때 데
윤지은은 보기 드물게 이번만큼은 내 편에 섰다.“동의하기 싫어도 동의해야지. 내가 진작 서약이 부작용이 있고 중독성이 커서, 장기적으로 이렇게 치료하면 환자가 오히려 탈탈 털릴 거라고 말했는데. 유미한테는 내가 말할게. 걔네 부모님은 아무튼 B시에 계시잖아? 한동안 돌아올 수 없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지 뭐.”윤지은이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건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의학 의사면서 서의학이 안 좋다고 하면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거다.하지만 친구 남편인 정호섭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 임유미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만약 정호섭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임유미는 어떡하라고?나는 사장님을 바라봤다.“그래도 되겠어요?”사장님은 효심이 강한 분이라 장인 장모를 속이는 게 안 좋다고 여겼다. 게다가 두 분이 지금껏 사장님을 길러왔으니.하지만 사장님이 고민하는 동안 윤지은은 이미 사장님 대신 결론을 내렸다.“뭐 그렇게 생각할 게 많아요? 두 분한테 말하면 절대 동의 안 할 거예요. 이 일은 내가 말한 대로 해요. 나도 한의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파악이 없으면 이런 말 안 해요.”나와 사장님 모두 머뭇거렸는데, 윤지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오히려 감화되었다.나는 윤지은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뭐든 엄격하고 신속하게 하는 모습은 내가 따라 배울 점이었다.윤지은은 나더러 병원에 남아 사장님을 돌보게 하고 본인은 유미 사모님을 모셔 오면서 한의 치료 방법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했다.그사이 나는 사장님이 아침 식사를 드시는 걸 도와드렸지만, 사장님은 입맛이 없다면서 조금밖에 드시지 않았다.요즘 매일 많은 양의 약을 먹어 위장이 망가져 음식을 먹는 것조차 무리였다.이렇게 부작용이 큰 게 바로 서양의학의 가장 큰 단점이다.나도 사장님을 강요하지 않았다.환자가 입맛이 없다는데 억지로 먹게 하면 오히려 위장의 부담을 더해주기 때문이다.나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 사장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
어르신은 내가 보인 자신감에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을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침술 하기 전에 모든 서약을 끊고 한동안 몸보신해야 해. 지금 너의 사장님 몸은 너무 나약해서 기혈이 거의 다 사라진 거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침술 할 수 없어. 이 일은 먼저 환자 가족들과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뒤 진행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윤지은이 회진하러 와서 나는 그녀더러 사장님을 잠시 봐달라고 하고는 어르신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됐어.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이 부근에 마친 공원이 있으니 나도 좀 산책하다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네 사장님 상황은 서둘러서 가족과 상의해. 더 지체되면 천지신명이 와도 어쩔 수 없어.”어르신의 긴박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할아버지.”나는 진심으로 어르신께 감사했다. 90세가 넘는 분이 내 전화 한 통에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거니까.이 은혜는 꼭 마음에 새길 거다.어르신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이건 나를 위해 덕을 쌓는 거야. 너도 얼른 가 봐.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거 잊지 말고.”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이 뒤돌아 떠난 뒤에야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다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윤지은만 병실에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사장님께 방금 전 상황을 말씀드렸다.“수호 씨, 한의학 치료법으로 정말 내 병을 완화할 수 있어?”사장님은 나를 조금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아까 보신 분이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한 명의세요. 젊을 때 저희 할아버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셔서 엄청 유명해요. 저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정말 방법이 있다더라고요.”“사장님이 입원한 뒤 몸 상태가 확실히 점점 나빠지셨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서약은 비록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도 커요. 사장님 몸은
“그럼 왜 진작 데려오지 않았어?”소여정은 나를 나무라는 듯 노려봤다.“저도 어제저녁에 갑자기 생각난 거예요. 외지에서 학교 다니다 보면 고향에 내려갈 일이 적잖아요.”나는 얼른 설명했다.그때 소여정이 크게 하품했다.“하, 피곤해. 난 먼저 휴식하러 테니 여기 지키고 있어.”“네, 먼저 들어가 쉬세요.”소여정은 정말 피곤했는지 얼굴에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사실 소여정도 따지고 보면 참 좋은 사람이다. 친구 남편이 아프다고 이렇게 고생도 마다하고 밤새도록 환자 곁을 지켜줬으니 말이다. 그것도 임천호한테 그렇게나 예쁨 받는 사람이.이렇게 의리 있는 친구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소여정이 가니 정태곤도 따라 나갔다.정태곤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없이 수문장처럼 꿋꿋이 소여정을 지키기만 한다.다행히 요즘 두 번이나 만났는데 정태곤은 나에게 싸움을 걸어오지 않아, 나도 정태곤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나는 얼른 병상 앞에 와서 진료 과정을 묵묵히 관찰했다.어르신이 진료할 때 우리 할아버지와 매우 닮았다. 모두 진지하고 엄격해 나는 감히 뭘 물어보지도, 방해하지도 못했다.나도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기에 한의사가 환자의 맥을 짚어보는 과정에 누군가 물어보면 짜증 난다는 걸 잘 안다.얼마 뒤 어르신이 맥을 짚던 손을 내리자 나는 얼른 물었다.“할아버지, 어때요?”어르신은 제 수염을 한번 쓸며 말했다.“상황이 좋지 않아. 만약 계속 서의학 방법으로 치료하면 상태가 더 나빠질 거야.”나도 사실 처음에 똑같은 의견이었다. 다만 이제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 한 말에 얼마나 힘이 있을까? 아마 말해도 믿는 사람이 없을 거다.그런데 어르신의 말이 내 추측을 증명한 셈이다.“침술과 한약 치료를 병행하는 게 더 좋은 거죠? 그래야 근본을 다지고 원기를 북돋울 수 있어 간의 손상을 줄일 수 있는 거죠?”나는 내 견해를 말했다. 무엇보다 어르신처럼 의술이 대단한 분이 앞에 계시는데, 이 기회에 잘 배워둘 작정이었다.그때 어르
어르신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네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너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너도 한의학을 배울 좋을 인재라고 하면서 나더러 나중에 많이 도와주라고 한 적도 있어.][요즘 젊은 사람들은 우리 같이 이리저리 떠돌며 의학을 배운 사람을 믿지 못하잖니. 대부분 학교에서 정식적인 교육을 받아서. 하지만 나한테 있는 방법이 민간요법이고 이상한데 받아들일 수 있겠어?]“우리 사장님 병만 고칠 수 있다면...”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르신이 끼어들었다.[고칠 수는 없어. 간병은 억제할 수 있을 뿐이지 완치는 어려워.]내가 말실수했다는 걸 깨달은 나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억제해도 괜찮아요. 적어도 고통을 줄여 주시면 돼요.”[그래. 날 믿으면 됐어.]나는 순간 너무 감격스러워 다급히 말했다.“그럼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모시러 갈게요.”어르신은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 주소는 유미 사모님 집과 그리 멀지 않았다.나는 이 소식을 서둘러 사모님께 알리지 않았다. 어르신이 정말 사장님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을지 아직은 몰랐으니까.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지금 말해봤자 오히려 실망만 할 거다. 게다가 사모님께 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었다.때문에 나는 아침을 사러 가는 척 말하고 차를 몰고 어르신을 모시러 갔다.20분 뒤, 나는 어르신을 만났다.하지만 어르신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분명 90이 넘는 노인이었는데 놀랍도록 정정했다. 이러니까 이 어르신이 선단을 드셨다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떠들어 댄 거였다.물론, 나는 사람을 장생불로 하는 선단 같은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어르신은 그저 보양할 줄 아는 거다. 게다가 자식들이 모두 효도하니 뭘 해도 기분이 좋을 거고, 그러니 자연스레 고민 없이 사는 거다.“봉섭 할아버지, 저 정수호예요.”나는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어르신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위라래로 살펴봤다.“네가 어릴 적에 네 할아버지가 너를 우리 집에 자주 데려왔었는데, 눈 깜짝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고용주가 까라면 까야지.”윤미화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문을 나섰다.한순간 집에는 나와 사모님 둘만 남게 되었다.나는 사모님 방 쪽을 한번 확인했다. 문이 꼭 닫혀 있는 데다 아무 인기척도 안 들리는 걸 봐서는 이미 자는 모양이었다.나는 다시 객실로 가지 않고 아예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면 사모님 방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바로 알 수 있으니까.소파에 누운 지 얼마되지 않아 사모님 방 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얼른 사모님을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야심한 밤에 여자 방을 들락거리는 건 좀 아닌 듯했다.하지만 아무것도 못들은 척하자니 또 소리가 너무 또렷하게 들려 순간 모순이 됐다.결국 나는 결심을 내리고 노크했다.“사모님, 괜찮아요?”“괜, 괜찮아요. 상환 말고 얼른 자요.”사모님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더 이상 울지 마요. 더 울면 몸 상해요. 그러면 사장님은 어떡해요?”내 말에 큰 힘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모님을 위로하고 싶었다.그때 안에서 ‘네’라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더니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내 위로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소파 쪽으로 돌아갔다.이 상황에서 아무리 위로해 봤자 소용이 없다.하지만 그 순간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그분은 나와 한 동네에 살았던 어르신인데, 젊을 적에 내 할아버지와 어울려 지내며 의술을 익혔다.올해로 90살쯤 됐는데 이상하게 그분은 한 번도 앓은 적이 없다. 마을 사람들 말로는 그 어르신이 스스로 몸조리해서 건강한 몸을 유지했다고 한다.그 어르신한테 사장님을 고칠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나 나는 한번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래도 시도해 보는 게 손 놓고 있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다음 날 아침, 나는 어머니한테 전화해 사장님 상황을 대충 말씀드리고 어머니더러 그 어르신한테 슬쩍 물어보라고 부탁했다.어머니도 우리 사장님이 좋은 분이라는 걸 알았기에 아침 일찍 식사도 하지 않고 어르신
‘장난하나? 주머니에 들어간 돈을 다시 토해내라니. 절대 안 돼.’나는 돈도 없는 주머니를 무의식적으로 꽉 쥐었다.“그건 안 돼요.”“그럼 얌전히 여기 있다가 내가 없을 때 유미 대신 좀 돌봐 줘.”난 여전히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윤 사장님, 제가 싫은 게 아니라, 유미 사모님 평판이 나빠질 거예요.”“수호 씨가 유미를 노리지 않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은 없잖아. 오래전부터 유미를 노리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나는 얼른 도리질했다.“그런 적 없어요. 전 사모님을 항상 존경해 왔어요.”“그럼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남아.”윤미화의 태도가 너무 강경한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동의했다.두 사람은 나에게 객실을 내주었다.유미 사모님의 집은 윤미화 집 못지않게 널찍하고 사치스러웠다. 방 4개에 거실 2개인 데다 인테리어가 화려했다.객실 침대에 누워 보니 평범한 침대와는 차원이 달랐다. 보아하니 가격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하지만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잠이 오지 않았다.천수당, 이태웅, 왕정민이 하나하나 내 뇌리를 스치다가 결국에는 동성 형까지 떠올랐다.동성 형을 떠올리니 내 마음은 더 복잡해졌다.용천 호텔에서 돌아온 뒤로 동성 형과는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형수는 동성 형이 이제는 대놓고 밖으로 나돌고 있다고 했었다.형수도 지금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할 거다.나는 얼른 문자로 형수 동생은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수한테서 답장이 왔다.[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이제는 아예 각자 변호사를 고용해서 소송을 진행 중이에요. 결과가 빨리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난 집에 돌아왔고요.][그럼 형은요? 형은 요즘도 집에 안 들어와요?][들어왔어요. 하지만 계속 각방 써요.]그 말에 나는 너무 놀라 되물었다.[왜요?][왜긴요, 요즘 일이 바쁘다면서 밤 늦게 들어오는데, 나를 방해하기 싫다면서 따로 자요.]그건 다 핑계일뿐이다. 사실 형수는 누구 보다도 그걸 잘 알고 있지만 티를 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