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요.”나는 단번에 거절했다.“누나, 안 그래도 저 고작 마사지사인 데다 나이도 어리고, 이룬 성과도 없어요. 그런데 이대로 아버님 도움까지 구한다면, 아버님은 저를 더 무시할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함께 있는 걸 더 허락할 리 없고.”이것 때문이라도 나는 절대 누나의 집에 가지 않을 거다.애교 누나가 내 손을 잡고 나를 위로했다.“수호 씨 마음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신변이 위협받는 상황이잖아요. 우선 안전부터 보장해야 하지 않겠어요?”“저 스스로 보호할 수 있어요. 믿어줘요!”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무엇보다 누나에게 나도 이젠 남자라는 걸, 그래서 모든 일에서 누나가 돌봐줄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서였다.애교 누나는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수호 씨도 참, 나한테까지 그렇게까지 내외할 거 없어요. 난 그런 거 상관 안 해요...”“누나, 그런 말 하지 마요. 저 이미 결정했어요.”나는 애교 누나의 말을 잘랐다.그제야 애교 누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알았어요. 정 그렇다면 강요하지 않을게요. 만약 정말 상대하기 벅차면 꼭 말해야 해요.”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늘 저녁에 경험한 일은 정말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철렁할 일이지만, 그만큼 도움도 많이 됐다.특히 민우의 기술은 너무 도움됐다. 정태곤 같은 사람한테도 먹혔으니까.‘그 기술 잘 연습해야지. 아주 익숙해져서 민우보다도 강해질 거야.’그러면 나중에 정태곤을 다시 만나더라도 너무 놀라서 넋을 잃은 일은 없을 테니까.침대에 누운 내 머릿속에는 온통 정태곤과 싸우던 모습뿐이었다.그대로 열심히만 연습하면 분명 실력이 크게 늘 거란 확신도 들었다.그렇게 생각하다가 나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사모님이 사장님께 내가 다쳤다고 얘기한 덕에 집에서 몸조리하라는 사장님의 연락을 받게 됐다. 때문에 당분간은 출근할 필요가 없어 원하는 시간에 깨어날 수 있었다.내가 깨어났을 때, 애교 누나는 이미 아침상을 차려 놓고
“내 딸이 왕정민과 이혼한 게 자네 때문인가?”이태웅은 다시 물었다.수간 너무 불안해졌다.아무리 봐도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불안해서 얼른 설명하려고 할 때, 애교 누나가 다급하게 달려왔다.“아버지, 그런 거 아니에요. 왕정민이 바람피웠어요. 그 인간이 먼저 잘못했다고요.”“그렇다고 똑같이 구는 거니?”이태웅은 갑자기 언성을 높이며 애교 누나를 향해 호통쳤다.그 목소리에 놀란 애교 누나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눈물을 그썽거렸다.애교 누나가 아버지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나도 무서웠지만 애교 누나가 억울하게 꾸중을 듣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워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아버님, 이 일은 애교 누나 잘못 아닙니다. 탓하려면 저를 탓하세요...”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태웅은 차갑게 내 말을 끊었다.“자네를 탓하라고? 당연한 거 아닌가? 내 딸과 왕정민이 어떻든 두 부부 사이의 일인데, 자네가 무슨 자격으로 참견하나? 내 딸과 왕정민이 이혼하자마자 내 딸 집에 얹혀사는 건 무슨 속셈이고?”그 질문에 얼떨떨해져 나는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대답했다.“나쁜 마음으로 그런 거 아닙니다. 그저 애교 누나랑 같이...”“그 입 다물게!”이태웅은 또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을 잘랐다. 그 목소리에 놀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나는 이토록 불안한 적도, 겁먹은 적도 없다. 이토록 내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한 것도 처음이고.이태웅은 아직도 나를 혼내고 있었다.“내 딸과 만나고 싶다고? 무슨 자격으로? 왕정민 같은 사람도 내 눈에 안 차는데, 자네가 내 눈에 찰까?”이태웅의 싸늘한 눈초리가 내 마음을 쿡 찔렀다.나는 소매 안에서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이태웅이 나를 설교하는 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의 말이 끝나자 나는 입을 열었다.“네, 저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신분도 백도 아무것도요. 그래서 애교 누나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저도 제가 평범하다는 걸 인정해요.
애교 누나는 아버지 말에 경악하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아버지, 제가 왜 본가로 가야 하는데요?”“왕정민과 이혼한 것도 모자라 이젠 하다 하다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놈을 만나? 이 동네에 내 지인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그 사람들이 내 앞에서 너를 어떻게 말하는지 아냐고?”이태웅이 노호했다.애교 누나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대꾸했다.“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무슨 상관인데요? 설마 평생 남 눈치만 보며 살아야 해요?”“뭐라고?”이태웅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애교 누나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누나가 겁에 질린 모습에 나는 다급히 끼어들었다.“아버님, 제가 갈게요. 지금 당장 갈게요. 그러니까 애교 누나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나는 더 이상 애교 누나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때문에 얼른 짐을 챙겨 누나의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수호 씨, 어디 가요?”“누나, 걱정하지 마요. 저도 손발이 있는데, 어디라고 못 가겠어요? 그리고 저 일자리도 있으니 벌어먹고 살 수 있고, 제 몸 건사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요.”말을 마친 나는 이태웅을 한번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그 표정 때문에 방 안 전체에 먹구름이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일을 더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애교 누나의 집에서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기분은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너무나도 괴로웠다.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누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하니까.형수네 집을 지날 때 나는 일부러 잠깐 멈칫했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 본능인 것 같았다.그 뒤로 나는 얼른 건물을 빠져나와 지하 차고로 향했다. 차에 앉은 순간 눈앞이 막막했다.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고 빨았다. 하지만 이 시간에 어디로 가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그렇게 한 대, 또 한 대 입에 물다 보니 몇 대를 피웠는지 목이 뻑뻑했다.나는 평소에 담배를 별로 피우지 않는다. 이
“내가 용천 호텔에서 이틀 지내면서 적어도 40만 원은 썼거든. 그건 왜 정산해 주지 않는데?”나는 하정현의 손을 뿌리치며 화를 냈다.“용천 호텔은 그쪽 친구네 가업인데, 왜 친구한테 돈 받지 말라는 말은 안 해요?”나는 귀를 세게 문질렀다.‘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무슨 여자가 손힘이 이렇게 세?’‘가슴은 평평한 게, 손힘은 세네.’하정현은 팔짱을 끼며 억지 부렸다.“내 친구가 무료고 해주든 말든, 그건 내 친구 자유지. 하지만 당신이 나더러 용천호텔까지 찾아가게 한 건, 당신 탓이잖아. 몰라, 배상해. 배상하기 싫으면 내 가슴 커지게 하던가.”대화할수록 화가 나 나는 이를 갈았다.“말했잖아요. 가슴 커지고 싶으면 임신하라고. 그쪽 가슴 작은 건 타고난 거라 아무리 마사지해도 소용없어요.”“소용없으면 전에는 왜 거짓말했어? 내 가슴 만지려고 그랬지? 나쁜 자식, 때려죽일 거야...”하정현은 말하면서 나에게 손찌검했다.‘진짜 미치겠네. 내가 이렇게 다쳤는데 나한테 폭력을 행사해?’게다가 윤지은과 이영미는 옆에서 웃으며 보고 있었다. 딱 봐도 도와줄 마음은 조금도 없는 듯했다.“됐어요. 마지막이에요. 만약 소용없으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요.”나는 너무 시달리다 못해 결국 타협했다.하정현은 양손으로 허리를 잡으며 씩씩거렸다.“진작 그럴 것이지. 하지만, 가슴 키울 방법 찾아내, 안 그러면 끝장 볼 거니까.”“작으면 작았지. 작은 걸 좋아하는 남자도 있을지 모르잖아요. 왜 커지게 하려고 애써요?”나는 구시렁거리며 차에서 내려왔다.하정현은 가슴을 쑥 내밀며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가슴이 커야 옷태가 살잖아. 탱크탑, 튜브탑, 그롭탑도 입을 수 있고... 지금처럼 꽁꽁 싸맬 필요 없잖아.”“이게 보기 얼마나 좋아요.”나는 귀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때 하정현이 갑자기 내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럼 나랑 사귀자. 그러면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알 거 아니야.”“미쳤어요? 나 기분 안 좋으니까 건드리지 마요.”“왜 기분 안
“네 아빠도 나 상관 안 하는데, 네가 왜 상관해?”이영미는 원망하는 표정으로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바로 강조했다.“아빠가 상관 안 하는 건, 엄마를 믿는 거죠. 제가 상관하는 건, 엄마가 함부로 하는 걸 막는 거고.”“내가 언제 함부로 했다고 그래? 내가 저 젊은 총각을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래? 나 그렇게 가리지 않고 다 만나는 사람 아니야.”“아무튼 안 돼요. 불편하면 제가 해줄게요.”“네가 할 줄 알아?”“왜 몰라요? 저도 한의사예요.”“그럼 안 아파. 나 휴식하러 갈게. 됐지?”이영미는 말을 마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에 윤지은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한편, 객실에서 하정현은 자기 가슴을 보며 원망스러운 듯 투덜거렸다.“왜 난 가슴이 이렇게 작은 거지? 다른 사람은 다 큰데. 튜브톱을 입어도 가슴이 받쳐주지 않고. 시멘트 바닥의 껌딱지잖아.”“하느님, 이럴 거면 남자로 태어나게 해주시지, 왜 이런 시련을 안겨주십니까?”하정현은 본인 몸매를 아주 싫어하는 듯했다.그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는 내가 다 난감할 지경이었다.“사실 이 정도면 괜찮아요. 적어도 a컵이잖아요. a도 안 되는 사람도 많아요.”“에이, 설마. 나도 평평한데, 어떻게 이것보다 더 평평할 수 있지?”“진짜예요. 그 정도로 평평한 여자들 정말 있어요.”“나보다도?”“네.”“그런 여자들은 어떻게 결혼한대?”윤지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질문이 너무 어이없어 나는 머리를 저었다.“그건 저도 모르죠. 사람마다 이상형이 있으니까요. 어떤 남자는 정말 가슴 작은 여자를 좋아해요.”“또 나 위로하는 거지? 내가 남자는 아니지만, 나도 안다고. 남자들은 모두 쭉쭉빵빵한 여자만 좋아하잖아. 나처럼 나뭇가지 같은 몸매는 남자들이 싫어한다고.”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싫어하는 게 확실하다.사실 싫어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성적 충동이 느껴지지 않는다.물론, 여자 친구를 사귀었다고 가정했을 때, 가슴이 작은 줄 몰랐다가 알게
‘헐, 이 정도 눌렀는데도 아직 안 느껴진다고?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가슴이 커졌을 텐데.’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결론을 내렸다.“그렇다면 확실히 유전이 맞아요. 이건 방법 없어요. 수술해야 해요.”“우리 엄마는 몸매 좋은데, 왜 나만 이래?”“정현 씨 어머니 몸매가 좋다고 정현 씨 몸매도 좋으리란 보장은 없죠.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수도 있으니까요.”“그럴 수도 있어?”“부모님 중에 한 분이라도 선천적으로 날씬한 분이 계시면, 정현 씨 몸매에도 영향 줄 수 있어요. 그런 상황이라면 가슴 키워준다는 마사지숍은 절대 믿지 마요. 선천적인 건 바꿀 수 없으니까요.”“됐어요. 할 얘기도 끝났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하정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나를 아예 무시했다.내가 방에서 나왔을 때, 이영미도 마침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뒤를 흘긋 보더니 조심스럽게 나에게 달려와 물었다.“이봐, 솔직히 말해. 내 딸과 무슨 사이지?”나는 고개를 저었다.“전 윤지은 씨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그런데 우리 지은이 왜 저렇게 이상해?”“어머님, 다른 일 없죠?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잠깐만, 있어.”사실 나는 진작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 타이밍에 이영미가 나를 불러 세울 줄은 몰랐다.‘역시 묻지 말았어야 했는데.’그런데 이미 말을 꺼냈으니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무슨 일이에요? 만약 마사지를 원하는 거라면 해드릴 수 없어요.”“아무 문제 없는데 마사지는 무슨, 그런 거 필요 없어. 사실은 다른 목적이 있어. 수호 씨 잘하지? 우리 남편 좀 봐줄 수 있어? 그 방면에 문제 있는 게 아닌지?”이영미는 겉으로는 신경 안 쓴다고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무척 신경 쓰고 있었다.특히 매번 찔러 봐도 반응 없는 윤해철이 이상해, 안 되는 건데 부끄러워 말 못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남편 상태 봐달라는 게 목적이었다고?’이영미가 나를 붙잡아 세우고 남편 상태를 봐달라는 부탁을
“뭘 도와주면 돼?”“저 사실 양동준 형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데, 혹시 설득해 주실 수 있어요?”양동준 형님이 윤씨 가문을 위해 일하니까 어머님 도움을 받으면 일이 쉽게 해결될 게 뻔하다.이영미는 그 말을 듣더니 싱긋 웃었다.“그게 뭐 별거라고. 간단하네. 수호 씨가 나 도와주면 양동준은 내가 설득해 주지.”동의를 얻어내고 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그럼 약속한 거예요, 어머님? 지금 가요.”“난 됐어. 수호 씨 혼자 가.”“네? 제가 어떻게 혼자 가요?”“내가 요즘 그이랑 싸우고 있어서 돌아가면 안 돼. 그리고 내가 그런 병 보게 했다는 거 비밀로 해야 해.”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그런데 저 아버님을 모르고 댁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병은 어떻게 봐 드려요?”“내 남편 스케줄을 알려줄 테니까, 기회는 수호 씨가 만들어. 병 다 보면 결과도 나한테 알려주고.”‘그러면 되는구나.’하지만 이건 나에게 테스트나 다름없었다.‘물론 어렵지만, 양동준 형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기 위해서라면, 까짓거 해보지 뭐!’“좋아요, 아버님 스케줄 알려주세요.”나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그건 이따가 알려줄게. 그리고, 지은한테 비밀로 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이 일은 이영미가 귀띔해 주지 않아도 절대 윤지은한테 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이영미와 대충 상의를 마친 뒤, 나는 윤지은 집을 떠나 다시 차로 돌아왔다.이번에는 더 이상 전처럼 우울하지 않았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걱정되었다. 누나의 아버지는 보기에도 무서운 분이니 애교 누나가 본가로 잡혀갔을 게 뻔했다.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누나에게 문자라도 보내야 하나 생각하다가 아버지한테 들켜 또 꾸중을 들을까 봐, 나는 망설여졌다.그렇다고 상황을 물어보지 않기에는 너무 걱정되었다.결국 고민 끝에 애교 누나한테 문자를 보냈다.[누나, 지금 어때요? 아버님이 누나 곤란하게 하지는 않았죠?][난 괜찮아요. 그래도 내가 친딸이라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았어요. 그러는 수호 씨는
[나한테도 그래요?]형수의 물음에 나는 양심에 찔렸다.전에 용천 호텔에 있을 때, 형수가 나를 무시한다고 껌딱지처럼 졸졸 쫓아다녔으면서, 형수가 마음을 여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다니.순간 내가 너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형수를 갖고 논 셈이니까.형수한테 너무 미안했다.“형수, 미안해요. 제가 너무 무능해서 애교 누나한테도 상처를 줬는데, 더 이상 상처 주기 싫어요.”형수는 나를 탓하기는커녕 한숨을 푹 쉬었다.[나도 수호 씨 이해해요. 탓하지 않아요. 적어도 함께했던 시간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 지낸다니 아쉽기는 하네요.]나도 형수와 떨어져 지내기 아쉬웠다. 애교 누나도 마찬가지고.하지만 애교 누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확고해졌다.나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애교 누나 아버지가 알면 내가 누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까.아직은 능력도 없고 내 잠재력도 보여줄 수 없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동네를 떠나는 거다. 미련 없는 사람처럼.“형수, 진동성 그 인간은 요즘 집에 안 들어와요? 두 사람은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무엇보다 형수의 현황이 걱정되었다.그러자 형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상관없어요. 이제 신경도 안 써요. 나만 잘 살면 되지, 그 인간이 뭘 하든 관심 없어요. 수호 씨, 지낼 곳은 찾았어요?”형수는 다시 주제를 돌렸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이요. 방금 핸드폰으로 찾고 있었어요.”[우선 찾지 마요. 잠깐 내 둘째 동생 집에서 지내요. 지난번 용천 호텔에서 내 둘째 매제가 바람피우던 거 기억 나죠?]“네, 왜요? 두 사람 이혼한대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형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어디 그것뿐이게요? 그것보다 더 지저분해요. 진용진이 우리한테 본모습을 들키니 아예 내 동생한테 이혼 얘기를 꺼낸 것도 모자라, 내 동생을 빈털터리로 내쫓으려 하고 있어요.][그동안 애들 돌보랴, 시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