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도 그래요?]형수의 물음에 나는 양심에 찔렸다.전에 용천 호텔에 있을 때, 형수가 나를 무시한다고 껌딱지처럼 졸졸 쫓아다녔으면서, 형수가 마음을 여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다니.순간 내가 너무 나쁜 놈처럼 느껴졌다. 따지고 보면 형수를 갖고 논 셈이니까.형수한테 너무 미안했다.“형수, 미안해요. 제가 너무 무능해서 애교 누나한테도 상처를 줬는데, 더 이상 상처 주기 싫어요.”형수는 나를 탓하기는커녕 한숨을 푹 쉬었다.[나도 수호 씨 이해해요. 탓하지 않아요. 적어도 함께했던 시간 동안 정말 행복했어요. 하지만 다른 곳에서 지낸다니 아쉽기는 하네요.]나도 형수와 떨어져 지내기 아쉬웠다. 애교 누나도 마찬가지고.하지만 애교 누나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다시 마음이 확고해졌다.나는 더 이상 이 동네에 있을 수 없다. 만약 애교 누나 아버지가 알면 내가 누나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테니까.아직은 능력도 없고 내 잠재력도 보여줄 수 없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동네를 떠나는 거다. 미련 없는 사람처럼.“형수, 진동성 그 인간은 요즘 집에 안 들어와요? 두 사람은 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나는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무엇보다 형수의 현황이 걱정되었다.그러자 형수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상관없어요. 이제 신경도 안 써요. 나만 잘 살면 되지, 그 인간이 뭘 하든 관심 없어요. 수호 씨, 지낼 곳은 찾았어요?”형수는 다시 주제를 돌렸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직이요. 방금 핸드폰으로 찾고 있었어요.”[우선 찾지 마요. 잠깐 내 둘째 동생 집에서 지내요. 지난번 용천 호텔에서 내 둘째 매제가 바람피우던 거 기억 나죠?]“네, 왜요? 두 사람 이혼한대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자 형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어디 그것뿐이게요? 그것보다 더 지저분해요. 진용진이 우리한테 본모습을 들키니 아예 내 동생한테 이혼 얘기를 꺼낸 것도 모자라, 내 동생을 빈털터리로 내쫓으려 하고 있어요.][그동안 애들 돌보랴, 시
형수는 행동력을 과시하는 듯 바로 고수연한테 전화했다.요즘 진용진 일로 심란해하던 고수연은 형수의 말을 듣자마자 반갑게 대답했다.[언니 동생 오라고 해. 진용진 그 개자식이 이제는 아예 대놓고 여자 만나고 다녀. 너무 역겨워서 나도 돌려줘야겠어.]그 말에 형수는 가슴이 철렁해 바로 귀띔했다.“당분간 네 집에서 좀 지내게 하라는 거지 몸을 노리라는 거 아니야.”[내가 언제 몸을 노렸다고 그래? 내가 지금 남자 몸을 노릴 기분이겠어? 분노하는 거잖아! 분노! 잘못은 진용진이 했는데, 왜 사과를 안 해? 게다가 어떻게 뻔뻔하게 먼저 이혼을 입에 올려? 무슨 자격으로 나를 빈털터리로 집에서 쫓아내겠다는 건데?][이 세상에 정말 좋은 남자는 없어. 앞으로 남자 말을 믿나 봐라.]형수는 동생을 안쓰러워했다. 어쩌면 언니 동생이 쌍으로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는지?형수는 한숨을 푹 쉬었다.“우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네 몸과 두 아이나 잘 챙겨. 네가 아파서 쓰러지면 진용진만 좋아할 거잖아.”고수연은 울면서 말했다.[알았어. 화내지 않을게. 그런 남자 때문에 화내는 건 감정 낭비야. 참, 언니, 그 동생분더러 일찍 와달라고 해. 진용진이 또 찾아와서 행패 부릴까 봐 무서워.]“알았어, 바로 가라고 전화할게.”형수는 동생과 통화를 끝내자마자 나에게 전화했다.[수호 씨, 동생한테 이미 말해뒀으니 바로 가요. 이따가 주소 보내줄게요.]“네.”[가서 내 동생 좀 돌봐줘요. 진용진이 또 행패 부리면 혼내줘요.]“형수, 걱정하지 마요. 제가 있는 한, 수연 누나가 괴롭힘당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전화를 끊은 뒤 형수는 바로 동생네 집 주소를 보내 주었다.나는 몇 달 동안 살던 동네를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아쉬운 마음으로 그곳을 떠났다.이곳에는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애교 누나고, 한 명은 형수다.하지만 누나의 아버지 때문에 이곳을 잠시 떠나 있어야 한다는 게 매우 아쉬웠다.그런데 별 수 있나? 누나와 형수를 위해서
그 모습을 보기 살짝 민망해, 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수연 누나 맞죠? 정수호예요.”“알아요, 들어와요.”고수연은 눈시울이 붉은 게, 방금 운 듯했다.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집안이 어수선한 데다, 방금 한바탕 싸운 듯한 흔적들이 보였다.나는 미간을 팍 구겼다.“왜 이래요? 집에 도둑 들었어요?”“아니, 그 인간이 다녀갔어요. 나랑 한바탕 싸웠어요.”“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분명 본인이 잘못했으면서 손찌검까지 했어요?”나는 짐을 놓고 얼른 집을 정리했다.고수연은 우울한 모습으로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질러진 집을 정리할 마음도 없어 보였다.결국 내 도움으로 집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고수연의 기분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심지어 가끔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그 모습이 너무 불안해 보여, 나는 고수연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수연 누나, 울지 마세요. 우선 물부터 마셔요.”고수연은 손을 뻗어 컵을 받아 들었다.“미안해요. 감정이 주체가 안 되네요. 피곤할 텐데 가서 쉬어요. 지금은 챙겨줄 수가 없네요.”“저는 상관하지 마세요. 저도 다 큰 어른인데, 스스로 돌볼 수 있어요.”고수연이 여전히 우울해 보여,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저 간단히 내가 묵을 객실이 어디인지 묻고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하지만 객실 침대에 앉아 있는 게 매우 불편했다.문밖에 있는 여자와 친한 사이도 아닌 데다, 남녀가 단둘이 있으니 왠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민우한테서 두 번이나 전화가 걸려 왔었다.그제야 오늘 민우를 데리고 면접보러 가겠다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건데 내가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니.나는 얼른 민우에게 전화했다.“민우야, 미안해. 아침에 일이 좀 있어서 폰을 확인하지 못했어... 너 면접은 어떻게 됐어?”그나마 다행인 건,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면서 면접 절차에 대해 대충 얘기했기에, 민우는 나와 연락이 닿지 않아도 아마 면접에 지장이 가지
[있었지. 그런데 몸이 안 좋았다고 했잖아. 그래서 검사하고 하려고 얘기해 보려고 했지.]“하긴, 천천히 해. 서로 소통만 잘하면 점점 더 좋아질 거야.”나는 임설아의 몸을 노린 적도 없고, 두 사람이 헤어지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솔직히 말하면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를 더 바란다.지금의 나는 남주 누나처럼 개과천선했다. 때문에 미색에 절대 홀리지 않을 거라고 이미 다짐했다.실력이 없으면 미색을 탐하면 안 된다. 때문에 나는 우선 내 실력부터 키워야 한다.우리는 그 뒤로도 한참 얘기를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뒤, 나는 살금살금 문 앞으로 다가가 문틈 사이로 거실을 확인했다.고수연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가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 모습을 보니 위로해야 할지 무척 고민되었다.위로 하자니, 내키지 않았고. 그냥 넘어가자니, 너무 매정한 것 같았다.나는 침대에 한참 동안 앉아 있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거실로 나갔다.“수연 누나, 울지 마세요. 계속 울면 실명할 수도 있어요. 그런다고 그 남자가 마음 아파하지는 않잖아요.”이 말을 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 말을 들은 고수연은 더 서럽게 울었다.“괴로운 걸 어떡해요? 아이 키우고, 시부모님 모시는 게 어디 쉬워요? 내가 늙으면 남편이 싫어할까 봐, 관리도 열심히 했어요.”“충분히 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왜 바람피우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고수연은 말하면서 계속 흐느껴 울었다.나는 얼른 티슈 몇 장을 뽑아 건네며, 부족한 말솜씨로 고수연을 위로했다.“변심한 남자는 곁에 둬도 소용없어요. 차라리 일찍 버리세요. 그리고 아직 젊은데, 일자리도 찾으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어요.”“말이 쉽지, 벌써 경력 단절된 지 몇 년이 됐어요. 그런 사람을 누가 받아줘요?”“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잖아요. 앞을 내다봐요. 그래야 사는 게 희망이 있죠.”나는 위로하면서도 막막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계속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나도 방법이 없었다.아직 결혼도 안 해
진용진은 그에 반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고수연, 당신도 그만해. 곧 이혼할 사이에, 이러는 거 싸 보여.”고수연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맞아, 나 싸. 당신이 바람피운 거 알면서도 이래. 내가 여자 망신시키고 있어.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어. 나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겠다고. 당신을 떠나면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어떡해?”고수연은 말하면서 또 흐느껴 울었다.진용진은 아예 이골이 났는지 귀찮은 티를 팍팍 냈다.“내가 당신을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이런 점이야. 나를 사랑한다면서 사랑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맨날 껌딱지처럼 달라붙는 것만 좋아하고.”남자도 자유가 필요해.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고. 당신이 너무 옥죄어 와서 숨쉬기 바빠. 나 이제 더 이상 못 참겠어.”고수연은 황급히 사과했다.“앞으로 안 그럴게.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집에만 잘 돌아오고, 나를 계속 사랑해 주면 돼.”고수연은 말하면서 진용진을 끌어안고 입 맞췄다.그러다 보니 진용진도 점차 반응했다.곧이어 진용진은 고수연을 품에 안고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건 당신이 스스로 말한 거다. 내가 강요한 거 아니야. 자, 엎드려. 우선 한 발 빼자...”고수연은 순순히 엎드려 다정하게 물었다.“여보, 이 높이 괜찮아?”진용진은 음탕한 미소를 지었다.“그래, 아주 좋아.”말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짓는 진용진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보기 힘들었다.진용진은 분명 고수연의 몸만 탐하는 건데, 고수연은 체면도 다 버린 채 진용진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으니.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걸 듣고 있는 게 괴로워, 나는 물건을 내려놓고 바로 집을 나왔다.나는 동네 공원에 앉아 답답한 마음을 추슬렀다.같은 고씨 집안 사람이고, 모두 미녀인데, 두 사람이 왜 이렇게 다른지?형수는 독립적인 여지인데, 고수연은 남자의 부속품 같았다.분명 상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나는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꺼내 형수한테 상황을 말하려고 했다.하지만 폰을 꺼내자마자 고수연이 빼앗아 갔다.“뭘 또 말해요? 여기 우리 집이거든요. 내가 지내도 된다면 지내고,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그 말을 들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좋아요, 갈게요. 핸드폰 돌려줘요.”“안 돼요. 우선 짐부터 싸요. 그쪽이 후회할까 봐 먼저 주기 싫어요.”고수연은 나를 아예 소인배 취급했다.분명 소인배는 제 남편 진용진인데, 그런 인간한테는 매달리고, 내 앞에서는 위세를 떨고 있다니.나는 속으로 고수연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솔직히 형수만 아니면, 당장 이 여자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었다.나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마요. 난 그쪽처럼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은 아니니까.”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고수연을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다. 이건 어쩔 수 없었다.내 말을 들은 고수연은 갑자기 욱해서 소리쳤다.“누구더러 낯가죽이 두껍다는 거예요? 다시 한번 말해 봐요.”고수연은 말하면서 나를 향해 손톱을 드러냈다.그 틈에 나는 얼른 핸드폰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다만 고수연이 발 빠르게 움직여 내 손을 피했다.그렇게 싸우다 보니 신체 접촉은 피할 수 없었다.그래도 남자라 여자 하나 제압하기에는 수월했으나, 팔이 다친 바람에 한 손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수연은 생각보다 악랋해서 나를 이길 수 없자 다친 내 팔을 세게 잡았다.갑자기 전해지는 고통에 나는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심지어 눈물도 찔끔 흘러나왔다.나는 잔뜩 분노해서 고수연을 노려봤다.“미쳤어요? 팔 다친 거 안 보여요?”고수연은 뻔뻔하게 대답했다.“아니까 팔 공경한 거지. 여자인 나한테 폭력을 쓰는 그쪽도 비겁한 건 똑같으면서.”“정말 제정신 맞아요? 남편이 바람피웠는데도 매달리며 굽신거리다니.”나 역시 독설을 퍼부었다.고수연은 그 말에 나를 독하게 노려봤다.“바람피운 게 어때서요? 세상에 바람 안 피우는 남자가 몇이나 돼요
“집? 차? 아니면 아무 걱정 없이 살게 해줄 수 있나? 본인 하나 챙기기도 어려우면서. 당신 같은 남자는 결혼하면 안 돼, 안 그러면 여자도 같이 고생이니까.”고수연의 말은 비수처럼 내 가슴을 꽂았다.내가 가난한 건 사실이다.하지만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가난하다고 결혼할 자격도 없나?그대로 떠나려고 했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다시 돌아갔다.고수연은 차가운 눈으로 나를 쏘아봤다.“뭐야? 나 때리려고?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 봐!”“때리지 않아요. 형수 동생이라, 형수를 봐서라도 건드리지 않아요. 하지만 잘 들어요. 나 정수호는 평생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사람 무시하지 마요. 그리고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도 상관없으면 혼자 그런 남편한테 매달리면서 비굴하게 살아요. 당신 언니까지 피해주지 말고.”말을 마친 나는 뒤돌아 떠났다.고수연이 뒤에서 쌍욕을 하든 뭘 하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르엘 빌라에서 나온 나는 기분이 매우 가라앉았다. 그동안 이처럼 기분이 안 좋았던 적은 처음이었다.심지어 애교 누나의 아버지한테 무시를 당했을 때보다 더 괴로웠다.그분은 그래도 강북시 부시장이니, 나 같은 가난한 사회 초년생을 무시하는 게 당연하다.하지만 고수연은 직장도 없는 여자인데, 그런 사람도 나를 무시한다는 게 충격이었다.고수연이 현실적이고 속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 왜 이렇게 가혹한지 자꾸만 생각하게 됐다.가난이 언제부터 잘못이 되었을까?누군 뭐 가난한 사회 초년생이고 싶어서 이렇게 사나?남 아래에서 허리 굽히며 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가난한 사람은 왜 결혼할 자격도 없을까?나도 계속 노력하는데, 그런 여자 눈에는 내가 결혼할 자격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니.인정한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자존심이 크게 꺾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기분이 너무 안 좋아, 나는 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오늘 하루, 한 달 치 담배를 피우는 것 같네.’내가 가라앉은 기분
형수에게 다시 전화할 땐 벌써 통화 중이었다.보아하니 이미 동생과 얘기 중인 듯했다. 때문에 나는 그저 속으로 두 사람 사이에 충 돌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나는 또 담배 한 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았다.나는 형수의 전화를 기다렸다.전화를 받고 나서 이곳을 떠나 살 집을 알아볼 생각이었다.내가 물론 부자는 아니지만, 손에 돈은 그래도 조금 쥐고 있었기에 셋집 하나 구하는 건 문제없었다.이제 더 이상 남의 밑에서 눈치 보며 사는 생활은 지긋지긋했다. 남이 내 과거를 무시하는 건 더욱 싫고.한참 뒤, 형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하지만 형수의 목소리는 조급해 보였다.[수호 씨, 얼른 다시 올라가 봐요. 수연이 맞았어요.]“네? 대체 무슨 일이에요?”[진용진 그 인간이 다른 여자를 데리고 집에 갔대요. 수연한테 두 사람 시중을 들라고 했대요. 그게 인간이에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건 고수연이 자초한 일 아닌가 하고.남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걸 알면서 비굴하게 붙어 있었으면서, 상대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자신마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의 사랑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하지만 형수를 위해서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바로 올라가 볼게요.”전화를 끊은 뒤, 나는 또 차에서 내려 고수연의 집으로 올라갔다.사실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기 싫었다.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었다.하지만 형수를 위해 참아야 했다.고수연 집에 도착해 보니,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진용진, 당신이 사람이야? 당신은 짐승도 아니야.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집안 물건은 또 이것저것 깨져 엉망이 되어 있었고, 고수연은 맞아서 여기저기 멍들어 있었다.하지만 진용진과 그 요염하게 생긴 여자는 소파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짓을 하고 있었다.내가 들어온 걸 본 진용진은 펄쩍 뛰었다.“젠장, 당신 누구야? 아, 생각났다. 용천 호텔에서 봤었지?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